무협지/폭풍세가

제16장 귀여운 묘녀(苗女)

오늘의 쉼터 2014. 9. 30. 16:07

제16장 귀여운 묘녀(苗女)

 

 

 

하나의 잘 가꿔진 화원(花園)이 있다.
지금 그곳은 꽃들의 축제가 한창이다.

꽃은 저마다 독특한 향기를 지녔다.

그 향기가 한데 어우러져 발산되고 있는 화원은 그야말로 아찔한 현기증마저 느껴질 정도다.
저마다 빛깔이 다르 듯이 저마다 개성있고 독특한 향기가 온통 넘칠 듯 출렁거리고 있었다.
그 향기와 더불어 현란한 색채의 조화가 눈부시게 이루어진 곳,

화원은 그야말로 꿈의 낙원을 연상케 한다.
온갖 기화이초(奇花異草)들은 활짝 만발하여 저마다 아름다움을 마음껏 뽐내고 있었다.
사각... 사각!
마치 옷자락을 손질하는 듯 가벼운 음향과 함께 가위가 움직이고 있다.
작은 전지가위는 가늘고 여린 섬섬옥수에 의해 규칙적으로 움직여지고있었다.
그런데 그것은 그저 평범한 가위질이 아니었다.

가위가 움직일 때 마다 놀라운 조화가 그 끝에서 이루어지고 있었다.
놀랍게도 한 번의 가위질이 가해질 때마다

생기를 잃어 시들어가던 화목(花木)들이 마치 거짓말처럼 윤기를 띄며 생기를 되찾는 것이었다.
섬섬옥수를 부지런히 놀리며 꽃가지를 자르고 있는 여인은

그 손짓만큼이나 아름다운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불면 꺼질 듯 극히 병약한 모습이었다.

얼굴은 너무 희고 갸냘퍼 애처롭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러나, 그녀의 가냘픈 몸에서는 고귀하고 은은한 기품이 꽃향기처럼 피어오르고 있었다.

마치 그녀 자신이 한 송이 꽃이 되어 화원속에 피어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할 정도였다.
바로 병서시 군대려였다.
"...!"
군대려는 잠시 가위질을 멈추며 숙였던 허리를 폈다.

그리고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벌 써 삼 년(三年)의 세월이 흘렀다. 그동안 검풍은 어떻게 변했을까?"
그녀의 추수같이 그윽하고 맑은 봉목에 아련한 빛이 어렸다.

그와 함께 한 줄기 우수의 그림자가 스치고 지나갔다.
"고모부님을 닮았겠지. 폭풍혈(暴風血)은 어쩔 수 없으니까."
그녀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중얼거렸다.
삼년! 그렇다!

군검풍이 한마디 말도 남기지 않고 구문제독부에서 사라진지 어느덧 삼년의 세월이 흘렀다.
그날 이후 군검풍은 마치 바다에 던져진 돌조각처럼 완전히 종적이 사라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 때였다.
"제후(帝后)... 노노입니다!"
문득 웅웅 하고 울리는 웅혼한 음성이 군대려의 귓전에 들려왔다.

이어, 화원 밖에서 철릭(鐵翼)을 걸친 한 명의 흑염노인이 나타났다.
철혈대공 초패강, 바로 그였다.
철혈대공은 나타나자마자 군대려를 향해 공손하게 시립했다.
"어서오세요. 패공!"
군대려는 은은하게 미소지며 철혈대공에게 시선을 주었다.

이어, 그녀는 잠깐 멈추었던 가위를 바로잡았다.
삭... 삭!
그녀는 다시 섬섬옥수를 움직여 화목을 다듬기 시작했다.
철혈대공은 군대려를 향해 공손한 태도로 보고했다.
"지시한 대로 세가의 전사들을 패왕궁(覇王宮)에 잠입시킨 바...

아주 놀라운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십패천중에서도 최강이라는 패왕궁의 배후에 또 다른 세력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군대려는 고개를 끄덕이며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럴 거예요. 소녀가 세가의 힘으로 패왕궁 정도는 초토화 시킬 수 있으면서도

세가의 주력을 발동시키지 않은 것은 그 배후 세력의 진정한 힘을 모르고 있기 때문이에요."
"아! 알고 계셨습니까?"
혈대공의 눈이 커졌다.
'역시 제후시다. 세가의 안주인으로 손색이 없으신 분이다.'
그는 내심 군대려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군대려는 여전히 섬섬옥수를 움직여 화목을 다듬으며 말했다.
"역시 모든 일은 검풍이 돌아온 후에야 추진할 수 있겠어요."
"그것에 대해 새로운 소식이 있습니다."
철혈대공은 미소 지으며 군대려를 바라보았다.
"...!"
그 말에 군대려는 손길을 멈추었다.

그녀는 관심있는 눈빛으로 철혈대공의 말을 기다렸다.
철혈대공은 그런 군대려의 모습에 절로 미소를 띄웠다.
"열흘 전, 남해 멸신천황도가 화산으로 폭발하여 침몰했습니다.

그 직후 남해를 지나던 선인(船人)들 사이에 신(神)을 보았다는 소문이 퍼졌는데,
그 신은 멸신천황도를 침몰시킨 뒤 남해를 날아 건너 중원으로 향했다고합니다."
쨍!
갑자기, 군대려는 들고 있던 전지가위를 떨어뜨리며 교구를 비틀했다.

그녀는 마음의 큰 동요를 느낀 듯 했다.

급히 옆의 화목을 짚었기에 간신히 쓰러짐을 면할 수 있었다.
철혈대공은 황급히 그녀의 곁으로 다가섰다.
"제후, 괜 으십니까?"
그는 염려스러운 안색으로 물으며 군대려를 부축했다.
"고마와요."
군대려는 창백한 옥용에 미소를 띄우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녀는 아련한 눈으로 남천을 주시했다.
"그가 돌아오는 군요. 검풍이...!"
그녀의 봉목에 뽀얀 물안개가 어렸다.


묘강(描疆).
쏴아... 우르르...!
비가 내린다.

갑자기 쏟아진 폭우였다.
장대발 같은 비가 묘강의 정글을 사정없이 두드리고 있었다.

장마철도 아니건만 때아닌 폭우는 빽빽한 밀림을 휩쓸어 버릴 듯 맹렬한 기세로 퍼붓고 있었다.
흡사 용의 형상을 한 구릉이 폭우속에 자리하고 있었다.
"...!"
그 구릉 위에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다.

그는 일신에 흑포를 걸친 이십이삼세가량의 년이었다.

청년은 뒷짐을 지고 선 채 구릉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쏟아지는 폭우를 전신으로 맞고 있는 청년은 그러나 미동도 없이 빗속에 서 있었다.
육 척의 훤칠한 키에 폭포수같은 장발을 어깨 위로 드리운 청년의 용모는 수려하고 인상적이었다.

바로 군검풍이었다.
지금 그의 모습에서는 세월의 흐름이 잘 나타나 보였다.

멸신천황도에서의 삼 년은 그를 어린 용에서 맹룡으로 변화시켜 놓은 것이었다.

그 늠연하고 헌앙한 기도는 실로 신인(神人)을 방불케 할 정도였다.
"...!"
군검풍은 호신강기도 두르지 않고 온 몸으로 폭우를 맞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런 것에 게의치 않고 침잠한 눈빛으로 구릉 아래를 주시하고 있었다.
구릉 아래로 거대한 석성(石城)의 폐허가 눈에 들어왔다.

반경 삼십여 리에 달하는 거대한 석성이었다.
그런데, 그 석성은 실로 처참하게 파괴되어 있었다.

석성이 파괴된 것은 최근의 일인 듯 했다.

초토화 된 석성의 폐허 사이 사이로 수만 구의 시신들이 나뒹굴고 있었다.

끔찍하고 잔혹한 광경이었다.


-- 사사독마갱(邪死毒魔坑)!


눈 앞의 석성은 바로 사사독마갱이었다.
십패천의 하나이며 천하마류독문(天下魔流毒門)의 하늘이 되는 사독마맥의 총본산.
그들은 단일세력으로 천하십강 안에 드는 초강파였다.
그런데 그 사사독마갱이 무참하게 초토화 되어 있는 것이었다.

실로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이 때였다.
구우욱!
갑자기, 한 소리 거창한 용음이 울려퍼지며 하늘이 시커먼 그림자로 뒤덮였다.

그 그림자는 쏟아지는 폭우마저 가릴 듯 거대한 장막을 형성했다.
쐐...액!
곧 이어, 한 마리 거대한 익룡(翼龍)이 폭풍을 일으키며 구릉 위로 내려섰다.

구릉을 온통 가득 채우며 날아내린 그놈은 물론 융천신마룡이었다.
콰드득...!
융천신마룡이 나타나자,

그놈의 맹렬한 날개 바람에 밀림의 거목들이 마구 부러지고 뽑혀나갔다.

그것은 폭우로 인한 충격보다 더한 것이었다.
그 직후였다.
"황야(皇爺)!"
비통함과 격분이 가득한 음성이 군검풍의 귓전을 울렸다.
그와 함께 융천신마룡의 등에서 한 명의 거한이 날아와 군검룡의 앞에 부복했다.
그는 얼굴이 자주빛을 띄었으며 등에 강궁을 짊어진 장한이었다.
그는 바로 벽안신녀 백옥상이 군검풍에게 시종으로 딸려준 사사독마갱의 호걸 자면신장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는 분노와 충격으로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그는 간신히 격분을 억누르며 비통한 어조로 군검풍에게 보고했다.
"백 리 이내에는 어떤 중거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침통함이 가득한 어조로 말을 이었다.
"십만 명의 용사들이 전사했습니다.

놀랍게도 본갱 용사들의 태반이 중독되어 죽고 말았습니다."
군검풍은 묵묵히 듣고 있다가 침착한 음성으로 물었다.
"천하의 사사독마갱 제자들을 독으로 해쳤단 말인가?"
"그... 그렇습니다. 본성의 용사들은 중류 이상의 파천독공(波天毒功)과

서역에서만 산출되는 쇄심천갈산(碎心天蝎散)에 쓰러졌습니다."
"...!"
군검풍은 여전히 침잠된 시선으로 사사독마갱의 폐허를 내려다보았다.

보이지 않는 분노와 격정이 그의 눈속에 가라앉아 있었다.
자면신장은 격앙된 음성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을 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벽안신녀 총수님과 성의 주력 일천 명의 시신은 발견되지 않았읍니다."
"...!"
"총수님만 무사하시면 독황령(毒皇令)을 발동하여

천하에 산재한 삼십만 독문용자들을 호출할 수 있습니다.

그들로 하여금 미지의 적에게 반격을 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자면신장의 말을 듣고 있는 것일까?

군검풍의 시선은 여전히 음울한 빛을 담고 폐허만을 주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는 내심 깊은 생각에 잠겨 있었다.
'서역이라... 서역의 전설적 독문 유명독신교(幽命毒神敎)가 부활하여 사사독마갱을 쳤단 말인가?'
그는 힐끗 하늘을 주시했다.


-- 유명독신교(幽命毒神敎).


그들은 서역과 천축(天竺) 일대를 휩쓸던 잔혹한 사교일파였다.

독을 만능으로 숭배하는 그들은 독문 역사 이래 가장 잔혹한 혈행을 저질러온 문파다.
그러나 그들은 사사독마갱과 천축 대뢰음사(大雷音寺)의 연수합격하에 이백 년 전에 괴멸 되었다.
그런데 이십여 년 전, 대뢰음사의 십만항마승들이 중독되어 몰사된 적이있었다.
지금의 상황이 그와 똑 같았다.

그 때와 똑 같은 상황이 이번에는 사사독마갱에서 일어난 것이었다.
군검풍은 침중한 눈빛으로 내심 염두를 굴렸다.
'누군가 있다. 패멸살황독강류를 완성한 나와 맞설만한 초강의 독종(毒種)이 있음이 분명하다.'
그는 자면신장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궁(弓)을 주게."
"예? 옛! 여기 있습니다."
자면신장은 일순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그는 황급히 메고 있던 강궁을 군검풍에게 내주었다.
군검풍은 두 눈에 기이한 빛을 띄우며 말했다.
"사냥을 좀 해야겠네. 천하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마조(魔鳥)들이 이 주위에 우글거리고 있네."
"예?"
자면신장은 무슨 영문인지 알지 못하겠다는 듯 멍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군검풍은 팽팽하게 시위를 당겼다가 별안간 우측의 숲을 향해 퉁겼다.
피...잉!
하는 날카로운 파공성이 사위를 갈랐다.
꽈당!
"케...엑!"
시위가 울리는 벼락치는 소리와 함께 백 장 밖 밀림에서 처절한 비명성이 터져올랐다.
이어 밀림 위로 한 마리 거대한 독응(毒鷹)이 치솟았다가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몸집의 크기는 일 장여에 이르렀으며, 전신이 피빛의 깃으로 싸여 있는 거응(巨鷹)이었다.
"혈천독응(血天毒鷹)!"
거응을 본 자면신장이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바로 이때, 귓전을 긁는 듯한 잔혹한 음성이 장내를 울렸다.
"카캇! 감히 우리 혈응파천위대(血鷹破天衛隊)를 건드리다니..!"
"카앗! 갈가리 찢어 혈천독응의 먹이로 삼으리라!"
콰콰...! 고오오...!
갑자기 백여 마리의 혈천독응이 일제히 밀림 위로 날아오르더니 새까맣게 군검풍을 뒤덮어왔다.
혈천독응의 등에는 손에 손에 기형의 창(槍)을 든 괴인들이 타고 있었다.

전신에 알록달록한 색칠을 한 기괴한 모습의 괴인들이었다.
캬아... 고오...!
한 순간 하늘은 온통 혈천독응으로 새까맣게 뒤덮였다.
그 광경을 보고 있던 군검풍은 무심한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모여 있으니 한결 사냥하기가 쉽겠군."
따당! 피...잉!
그의 손에서 연이어 강궁의 시위가 퉁겨졌다.
후두둑...!
"크아악!"
"아...악!"
그 때마다, 새카맣게 날아들던 혈천독응들은 분분히 추락했고,

그 위에 타고 있던 괴인들도 비명을 내지르며 굴러 떨어졌다.
쐐...액!
살아남은 십여 마리의 혈천독응만이 황급히 북쪽 구릉 너머로 달아났다.
군검풍은 그것을 노려보며 자면신장에게 강궁을 돌려주었다.
"요격하도록 하게!"
자면신장은 눈을 번뜩이며 힘있는 어조로 대답했다.
"맡기십시오. 한 놈도 살려보내지 않겠습니다!"
괴인들이 어렴풋이 사사독마갱의 멸절과 관련이 있음을 느낀 그는 전신에 무서운 살기를 드러냈다.
그는 즉시 바위같이 웅크리고 있던 융천신마룡의 등으로 휙! 날아올랐다.
"마신! 날아라!"
그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융천신마룡은 폭풍을 일으키며 거구를 떠올려 북쪽으로 날아갔다.
"...!"
군검풍은 무심한 눈으로 그 모습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뚜벅뚜벅 걸음을 옮겨 한쪽으로 다가갔다.
그는 하나의 바위 밑에 이르러 우뚝 멈추어 섰다.
그곳에는 무참하게 머리가 깨져 피를 흘리고 있는 한 명의 괴인이 쓰러져 있었다.

그는 아직 숨이 끊어지지는 않았지만 고통스런 표정으로 다 죽어가고 있었다.
괴인은 거칠게 숨을 헐떡이며 신음하다가 군검풍이 다가서자 공포의 눈으로 부르르 몸을 떨었다.
"크으... 무... 무서운 자...!"
그는 머리에 요란한 새깃을 꽂은 것으로 보아 아마 괴인들의 두목인듯했다.
군검풍은 뒷짐을 진 채 사색이 완연한 괴인을 내려다보았다.
"어디서 왔느냐?"
그의 물음에 괴인은 짐승 같은 눈을 번뜩이며 가래끓는 음성을 뱉아냈다.
"으...우리는... 파밀(破密)...혈응족(血鷹族)이다...만독지존(萬毒至尊)의 영광스런 전사들...!"
"만독지존?"
"크크...기억해 두거라, 그 분의 존명을. 만독(萬毒)으로 천하를 지배하실분이다...!"
다 죽어가던 괴인의 두 눈에는 자랑스러움과 자부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군검풍의 검미가 무섭게 꿈틀거렸다.
"사사독마갱을 무너뜨린 것도 만독지존(萬毒至尊)이란 자의 짓이냐?"
괴인은 득의의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캇! 그 분이... 아니면 누가...!"
채 말 끝을 맺지도 못하고 괴인은 툭! 하고 고개를 꺾고 말았다.

절명하고 만것이다.
"만독지존...!"
군검풍은 굳은 안색으로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전혀 의외의 변수로군.

그 자가 어떤 자인지 모르나... 천패마종 남궁형 만큼 무서운 자임에는 틀림없다."
그는 검미를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뒷쪽을 향해 고개를 돌리지도 않고 소리쳤다.
"그쪽 친구... 끌어내기 전에 나오는 것이 어떤가?"
그러자, 과연 뒤쪽에서 반응이 들려왔다.
"깜짝이야! 놀랬잖아! 그렇게 소리지를 필요까진 없잖아!"
뜻밖에도 바위 뒤쪽에서부터 들려온 것은 옥구슬이 구르는 듯한 청아한 소녀의 음성이었다.
'응?'
군검풍은 흠칫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천천히 몸을 돌렸다.
몸을 돌린 그는 눈썹을 찡그리며 놀란 눈빛을 지었다.
한 그루의 열대나무 아래 한 명의 소녀(小女)가 그림같이 서 있었다.
소녀의 나이는 십사오 세 가량,

인형같이 귀엽고 아름다운 용모가 첫눈에도 사랑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발 끝까지 이르는 삼단같은 머리는 칠흑같이 검었는데

유난히 커다랗고 맑은 눈에 마늘쪽같이 오똑한 콧날,

그리고 도톰하고 붉은 입술을 지닌 귀여운 소녀였다.
"너는...?"
군검풍의 두 눈에 언뜻 당혹의 빛이 스쳤다.
소녀는 십사오 세라고는 하지만 아주 조숙한 편이었다.

그 때문에 그녀의 몸매는 성숙한 여인에 못지않게 풍만했으며

사내를 매혹시키는 뇌살적인 매력까지 지니고 있었다.
더구나, 그녀의 차림새는 너무나 자극적이고 선정적이었다.

아찔하게도 소녀가 일신에 걸친 것이라고는

가슴 부분과 허리 아래를 가린 손바닥만한 표범가죽이 전부였다.
그 모습은 실로 요요롭고도 매혹적이었다.
군검풍은 자유분망하고 귀여운 소녀의 모습에 어쩐지 마음이 끌리는 것을 느꼈다.

이어, 그는 호기심을 느끼며 물었다.
"아가씨는 누구지?"
"나? 나는 내내(耐奈)라고 해. 그런데 아저씨는 누구야?

정말 이상하네. 아저씨는 왜 그렇게 무섭게 생겼어?"
소녀는 쪼르르 군검풍에게로 다가와 그의 턱 밑에 고개를 바짝 들이대며 질문을 퍼부었다.

그녀는 예의나 관습같은 것에 전혀 구애받지 않는 듯 말투 또한 제멋대로였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군검풍은 그런 소녀가 밉지 않았다.

밉지않을뿐더러, 그는 티없이 맑고 천진해 보이는 소녀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기만 했다.
그는 어릴 때부터 예쁘고 착한 여동생이 한 명 있었으면 하고 생각했던적이 있었다.

소녀 내내를 보자 마치 그가 바랬던 여동생을 보는 듯 하여 절로 미소를 지었다.
"내내... 예쁜 이름이군."
그 말에 소녀 내내는 환하게 미소지으며 되물었다.
"정말? 내내의 이름이 예뻐?"
"하하! 예쁘고 말고. 나는 군검풍이라고 한다. 잘 사귀어 보자."
"호호 좋아! 오빠는 내내의 마음에 들었어."
그녀는 흑요석같은 눈을 반짝이며 짜랑짜랑한 교소를 지었다.

그리고는 군검풍의 대답이 몹시 흡족한 듯 냉큼 그의 팔짱을 끼는 것이었다.
군검풍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런데... 내내는 이곳에 사는 모양이지?"
내내는 고개를 살래살래 흔들었다.
"아니! 내내는 일곱 개의 산을 넘어 왔어. 달아난 금아(金兒)를 찾기 위해서."
"금아? 금아가 누구지?"
군검풍은 의아로운 표정으로 물었다.
"응! 금아는 아주 수다장이에다 못생기고 심굴궂은 애야."
그런데 내내의 말이 끝나자 마자, 누군가 꼬집듯이 그녀의 말을 되받았다.
"흥! 누가 못 생기고 수다장이야? 내내야말로 못 생긴데다 수다장이고 심술꾼이지."
그것은 좌측의 고목 위에서 들려왔는데 뽀족한 어린 아이의 목소리 처럼들렸다.

그 소리에 내내는 반색을 띄우며 고목 위를 올려다 보았다.
"금아! 너 거기 있구나."
그녀는 활짝 웃으며 반갑게 손을 흔들어 보였다.
어느새 고목 위에는 금빛 날개를 지닌 한 마리 극락조(極樂鳥)가 오도마니 앉아 있었다.
전신이 찬란한 금빛을 띠고 있었으며 붉은 관을 머리에 단 신조(神鳥)였다.

그놈의 눈은 타는 듯 붉어 마치 반들반들한 홍옥(紅玉)을 연상케 했다.
극락조는 고목 위에서 금빛 날개를 뽐내며 빽빽 소리를 내질렀다.
"다 봤어! 다 봤어! 내내가 바람 피우는 것을 금아가 다 봤어!"
그 말에 내내는 붉은 입술을 삐죽거리며 옆구리에 손을 척 갖다 올렸다.
"이리 내려와! 네가 내내와 함께 돌아가지 않으면

아마 맛있는 호두나무 벌레는 구경도 하지 못하게 될걸?"
"호두나무 벌레?"
파다닥!
내내의 말에 극락조는 깜짝 놀라며 얼른 고목에서 내려와 내내의 어깨에 내려 앉았다.
"안돼. 그건 안 돼! 난 엄마에게 맛있는 호두나무 벌레를 간식으로 받고싶어."
극락조는 그럴 수는 없다는 듯 작은 고개를 연신 내저었다.

그 광경에 군검풍은 그만 어언이 벙벙해지고 말았다.
그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귀여운 소녀와 영리한 극락조가

대화를 나누는 해괴한 광경을 바라보고 있었다.

극락조가 사람의 말을 흉내낸다는 말을 들었지만 직접 말하는 것을 보기는 처음이었다.
더구나, 금아라 불리는 이 극락조는 영리하기 이를데 없는 놈인 듯 했다.
그저 사람의 말을 흉내내는 정도가 아니라 그야말로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수준이었으니까.
군검풍은 고소를 지으며 문득 어깨를 으쓱했다.
"그런데, 저 귀여운 놈은 호두나무 벌레를 무척 좋아하는 모양이군."
그는 내내의 어깨에 내려앉은 극락조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러자, 내내는 고개를 끄덕이며 비양거리는 음성으로 말했다.
"응! 이 못생긴 금아는 호두나무 벌레가 제일 맛있대."
"하핫! 그래? 별난 식성이군."
군검풍은 눈썹을 찡긋하며 유쾌하게 웃었다.
금아는 갑자기 수선을 피우며 재촉했다.
"가자! 가자! 빨리 가서 간식먹자!"
내내는 샛별같은 눈을 반짝이며 군검풍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불쑥 그의 손을 잡아 끌었다.
"오빠도 같이 가자! 내내의 엄마는 정말 미인이시거든. 아마 오빠를 보면 반가워 하실 거야. "
군검풍은 갑작스런 그녀의 제의에 어리둥절해졌다.

하지만 그는 웬지 이 천방지축의 소녀에게서 친근감을 느끼고 있었다.
그는 잠시 생각하는 듯 하다가 마침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하하... 그렇다면 내내의 말대로 엄마가 얼마나 미인이신지 같이 가볼까?"
"호호... 됐어! 내내를 따라와!"
내내는 군검풍이 같이 가준다는 말에 신바람이 난 듯했다.

그녀는 곧장 교구를 움직여 한 마리 사슴처럼 솟구쳐 올랐다.
그 모습에 군검풍은 흠칫했다.

그는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무공을 알고 있다니 놀랍군. 내내의 어머니란 여인은 아마 범상한 여인이 아닐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추측하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내내의 뒤를 따라 성큼성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얼마나 걸었을까?
마침내 군검풍은 하나의 단애 앞에 이르렀다.

그는 내내와 극락조 금아를 따라 깍아지른 듯 가파른 천인 단애 위로 내려섰다.
"다왔어!"
단애 위에 이른 내내는 군검풍을 돌아보며 생긋 웃었다.
그 단애의 주위는 온통 자욱한 운무로 뒤덮여 있었다.

그 때문에 단애가 얼마나 깊은지 도저히 추측이 불가능햇다.
단애 옆에는 일 장 높이의 이끼 낀 석비(石碑)가 세워져 있었다.

석비에는 풍상에 흐릿하게 지워진 몇 자의 글이 새겨져 있었다.


-- 만수... 천형...곡(萬獸天形谷).


군검풍은 그 석비를 바라보며 고개를 갸웃햇다.
'만수천형곡...?'
그는 의혹을 느끼며 만수종 해극패가 남긴 기록들을 더듬어 보았다.

하지만 떠오르는 것이 없었다.
내내는 명랑하고 쾌활한 성격을 지닌 소녀였다.

이곳까지 오는 동안 시종 그녀는 입을 다물지 않고 종알거렸다.

군검풍에 대한 호기심이 많은 듯 그녀는 이것저것 묻기도 했으며

극락조 금아와 말씨름을 하며 깔깔거리고 웃기도 했다.
그리고, 단애 앞에 이르자 그녀는 더욱 생기가 만면해져 한껏 들뜬 표정마저 지었다.
"오빠! 따라와."
스슥!
내내가 생긋 웃으며 갑자기 단애 아래로 뛰어내렸다.
"내내!"
갑작스런 내내의 태도에 군검풍은 당황했다.

그는 손을 내저으며 다급한 외침을 발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
내내는 한 마리 비조처럼 날아 이미 운무 속으로 사라지고 없었다.
그제서야 군검풍은 짐작되는바가 있었다.
"저 운무 중에 무엇인가가 준비되어 있군."
그는 검미를 모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어, 그 역시 망설임없이 운무속으로 가볍게 뛰어내렸다.
그러자, 운무 중에서 내내가 한 마리 거대한 붕조의 등에 탄 채 손을 흔들고 있는 것이 보였다.
"오빠, 여기야!"
구우...!
내내의 목소리를 듣고 고개를 돌리던 군검풍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의 눈에 실로 놀라운 광경이 들어왔다.
날개를 편 길이가 십 장이나 되는 한 마리 거붕(巨鵬)이

산풍을 타고 운무 가운데 등실 떠 있는 것이 보였다.
'붕조가 다리 역할을 하다니...!'
이 기상천외한 광경에 군검풍은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윽고, 그 역시 내내를 따라 붕조의 등으로 날아내렸다.
고오...!
그러자, 군검풍과 내내를 태운 붕조는 일시에 하강하여 삼백 장 아래로 내려갔다.
단애 아래로 깊숙이 내려가자 자욱하던 운무가 말끔히 걷혔다.
그 순간, 군검풍은 눈 아래 드러나는 광경에 놀람을 금치 못했다.
그곳은 완전히 별천지였다.

수백 장의 석벽에 의해 병풍처럼 둘러싸인 분지가 드넓게 펼쳐져 있었다.

사방 수십 리에 달하는 그 분지는 마치 그림 같이 아름다웠다.
먼저, 분지 중앙에 자리한 십 정(十停) 정도의 맑은 호수가 눈에 들어왔다.

그 호숫가에 한 채의 아담한 모옥이 지어져 있었다.
그리고 모옥의 앞에 한 명의 백의여인이 나와 선 채 하강하는 대붕을 주시하고 있었다.
"엄마!"
휘익...!
대붕이 지면 오십 장까지 내려오자 내내는 펄쩍 뛰어 제비같이 날아내렸다.
"조심해...!"
군검풍은 그 모습에 자기도 모르게 경호성을 발했다.
하지만, 내내는 그 사이 뛰듯이 백의 여인의 품으로 날아들었다.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말썽꾸러기로군."
군검풍은 고개를 저으며 그만 실소를 발했다.
이어, 그는 허공을 밟으며 마치 계단을 내려가듯 모옥쪽으로 다가섰다.
십절답공능허(十絶踏空凌虛)-!
군검풍이 펼친 경공은 바로 이것으로, 십절마종보의 서열 십위에 드는 절정경공이었다.
한 모금의 진기만으로 무려 십 리를 날 수 있다.

백의여인의 품에 안긴 내내는 군검풍을 가리키며 명랑하게 재잘거렸다.
"엄마, 엄마! 내내가 새로 사귄 오빠야!"
"좋은 오빠를 얻었구나, 내내는...!"
백의미부는 고개를 끄덕이며 잔잔하게 미소지었다.
그녀는 삼십 대 후반 정도의 나이로 눈이 큰 전형적 묘강미인이었다.

탄력 있는 갈색 피부에 윤기도는 긴 머릿결이 아주 인상적이었다.

그녀는 묘강미인이면서도 온유한 기품과 고아함을 지니고 있었다.
군검풍은 백의미부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소생은 군검풍이라 합니다.

예고도 없이 불쑥 방문하게 되어 결례가 된 것은 아닌지 모르겠군요."
그 말에 백의미부는 고개를 저으며 온화한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 않아요. 이곳에 오신 것을 환영해요. 군공자, 아무쪼록 편히 지내다 가세요."
그녀는 다정하고 기품있게 군검풍에게 답례했다.
군검풍은 백의미부의 모습에서 그녀의 내력이 범상치 않을 것이라는 예감을 느꼈다.
'분명 묘강여인인데 기이하게도 중원의 체취가 느껴진다. 중원인을 닮은 내내도 그렇고...!'
그의 눈에 한 줄기 이채가 스쳤다.
백의미부는 군검풍을 바라보면서 자신을 소개했다.
"천한 계집의 이름은 사군려(査君麗)라고 해요. 박채나마 준비되어 있으니 함께 드시지요."
"폐를 끼치겠습니다."
군검풍은 거절하는 것이 예의가 아님을 느끼고는 백의미부를 따라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잠시 조용하던 극락조 금아도 수선스럽게 외쳤다.
"나도... 나도! 간식 줘!"
그놈은 같은 말을 몇번이나 반복하며 즉시 사군려를 따라 모옥 안으로 들어갔다.

"호호... 까르르...!"
마음을 청아하게 씻어주는 해맑은 소녀의 웃음이 옥구슬처럼 흐르고 있었다.
드넓은 초원,

비 개인 뒤에 내리쬐는 화창한 봄 햇살 아래 소녀 내내는 커다란 표범을 안고 뒹굴며 놀고 있었다.
전신이 새카만 털로 뒤덮인 그 흑표는 맹호나 사자 이상가는 거구의 신표였다.
이놈이 나는 독수리도 잡는다는 흑령신표(黑靈神彪)였다.
그러나 소녀 내내에게 있어 흑령신표는 그저 말 잘듣는 애완동물에 불과했다.
짐승은 비단 흑령신표 뿐만이 아니었다.

만수천형곡 내에는 수천 마리의 짐승들이 있었다.
거상(巨象) 물소, 사자 등을 비롯해서 사슴, 토끼, 다람쥐 등

작은 닭들까지 가지각색의 짐승들이 군거하고 있었다.
신기한 것은, 그 많은 짐승들이 함께 모여 살면서도 절대 싸우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호호... 대흑(大黑)! 목욕하자!"
내내는 기분좋은 교소를 터뜨리며 흑룡신표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갑자기 그녀는 그나마 걸치고 있던 표범가죽마저 훌훌 벗어 던졌다.
그녀의 이런 행위는 아주 자연스럽게 느껴졌다.
그러자, 그 부분만 햇볕에 가려져 유난히 새하얀 젖가슴이 앙증맞게 드러났다.
또한, 하체의 매끈한 복부 아래 보드라운 잔디가 곱게 깔린 신비의 구룽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호호... 가자!"
내내는 깔깔 웃으며 흑령신표를 잡아끌었다.

이어 둘은 그대로 호수로 풍덩 뛰어들었다.


모옥의 창은 활짝 열려 있었다.
그 창가에 두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
군검풍과 사군려였다.
"내내는 정말 행복해 보이는 군요."
군검풍은 멀리 바라보이는 내내의 천진무구한 모습에 절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두 사람은 탁자를 사이에 두고 앉은 채 차를 들고 있었다.
"그래요. 내내는 정말 밝고 꾸밈없는 아이에요. 그래서 스스로 행복을 만드는 아이죠."
사군려는 그윽하게 미소 지으며 딸의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군검풍의 시선은 내내에게서 잠시도 떠나지 않았다.
하지만 벌거벗은 내내의 모습을 보면서도 여전히 그의 시선은 담담하기만 했다.

아직은 나이 어린 풋내기 소녀이긴 하지만 그래도 사내의 시선을 끌기에 충분한 모습이었다.
"...!"
시종 담담하기만 한 군검풍의 모습에 사군려의 봉목에는 한 줄기 경탄의 빛이 스쳤다.
'이 젊은 이는 대인(大人)이다. 그이... 내내의 아버지 이상가는...!'
그녀의 입가로 소리없는 한숨이 흘렀다.
이어, 그녀는 호수 속의 딸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내내를 맡길만한 사람이다.

아버지에게 버림받은 내내에게 아버지 역할까지 충분히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남몰래 작정하며 내심 중얼거렸다.
이때, 군검풍이 시선을 돌려 사군려를 마주보았다.
"세상과 단절되어 사는 이 생활이 외롭지는 않습니까?"
그의 물음에 사군려는 잔잔하게 미소 지으며 대답했다.
"외로움... 저도 인간이니 외롭지 않을 수야 없겠죠.

그러나 추악한 인간들 속에 사는 것보다 거짓과 가식을 모르는

저 짐승들과 사는 것이 오히려 마음 편해요."
군검풍은 그녀의 말에 직감적으로 느껴지는 것이 있었다.
'무엇인가 사연이 있다.'
아니나 다를까?
사군려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말을 꺼냈다.
"천한 계집의 넋두리를 들어 보시겠어요?"
"세이경청 하겠습니다."
"감사해요."
사군려는 잔잔한 눈빛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이윽고 이야기를 꺼냈다.
"군대공자께서는 만산제일가(萬山第一家)에 대해 들어보셨나요?"
"만산제일가!"
군검풍은 흠칫하며 나직이 부르짖었다.


-- 만산제일가!


그 이름은 군검풍도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무림에 전설적인 한 가문(家門)이 있었다.

인간과의 교류보다 만금만수에 묻혀 살기를 원했고

그 때문에 모든 것이 신비 속에 가려진 세가였다.
그들이 바로 만산제일가 악가(岳家)였다.
산이 있는 곳, 그곳은 바로 악가의 영토였다.

산에 관련되는 모든 사람, 모든 조직은 만산제일가의 비호하에 놓여 있었으며,

그 때문에 만산제일가 악가는 달리 만산집맹(萬山集盟)의 변형된 이름으로 세상에 알려지기도 했다.


사군려는 잔잔한 눈빛으로 군검풍을 마주보며 말했다.
"저는 만산제일가 이십팔대가주 만수천형존(萬獸天形尊) 악붕비(岳鵬飛)라는 분의 손주 며느리에요."
"만수천형존! 만산집맹(萬山集盟)의 분이신 줄은 몰랐습니다."
군검풍은 감탄의 음성으로 말했다.
"부끄러워요. 이 계집은 감히 악가의 계집이라 자처할 수도 없는 부끄러운 계집입니다."
사군려는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자신의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십 수 년 전, 사군려는 묘강 소국의 왕녀였었다.
그녀는 어린 나이에 만수천형존 악붕비의 손자 만산대공(萬山大公) 악뢰(岳雷)에게 출가했다.
그리하여 악가의 근원지인 이곳 만수천형곡(萬獸天形谷)에 정착했다.
그러나, 이십 년 전 그녀는 남편 만산대공 악뢰가

의문의 변사를 당하는 바람에 그만 청상과부가 되고 말았다.
젊은 나이에 과부가 된 손주며느리를 바라보며 악붕비는 안스러운 마음을 금치 못했다.

그는 기회를 보아 사군려를 재가시키리라 작정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명의 중년인이 만년오공에 물려 다 죽게 된 채 만수천형곡으로 떨어졌다.
외인을 싫어하는 악붕비는 그 중년인을 그냥 방치하려했다.
하지만 사군려는 심성이 여리고 착하여 이것을 그냥 지나칠 수가 없었다.
그녀는 보다 못해 악붕비에게 애원했다.
그녀의 간청에 못이긴 악붕비는 마지못해 중년인을 구해 주게 되었다.


-- 위지대영(慰遲大永).


이것이 중년인의 이름이었다.

그는 준수하고 기골이 헌앙한 인물이었다.
악붕비는 위지대영의 뛰어남에 감탄했으며 그를 놓치기 아깝다는 생각을하기에 이르렀다.

그러자 곧 바로 며느리인 사군려가 떠올랐다.

그는 위지대영에게 그녀를 출가시키려고 작정했다.
사군려 또한 예의가 반듯하고 인물됨이 출중한 위지대영이 싫지 않았다.
더구나, 위지대영은 정성껏 병수발을 드는 사군려에게 따뜻한 호의와 관심을 보이기 까지 했으니

그녀의 방심이 흔들린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그녀는 악붕비의 반강제적 권유로 마침내 위지대영에게 재가하게 되었다.
청상의 외로움을 떨치고 새로운 인생을 찾은 그녀는 마냥 행복한 꿈에 부풀었다.
그러나, 그녀의 행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사군려도 악붕비도 미처 알지 못했다.

이 모든 것이 처음부터 작정하고 행해진 위지대영의 계산된 행위였음을.

그들은 꿈에라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던 것이다.
그 후 꿈 같은 세월이 흘렀다.

새롭게 되찾은 신혼의 꿈은 아름다웠다.
그 아름다운 꿈의 결과로 그녀는 마침내 내내를 잉태하게 되었다.

최고의 기쁨이 그녀의 인생에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바로 그 즈음, 위지대영의 태도가 갑자기 돌변하고 말았다.
그는 만수천형존 악붕비를 기습하여 제압한 뒤

악가비전의 만수천경(萬獸天經)과 천형신금(天形神琴) 탈취했다.

그리고, 유유히 만수천형곡을 빠져나갔다.
만수천경은 악가 이천 년의 정화가 수록된 천외비경(天外秘經)이었다.

그중에는 만수만금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실 팔 종의 만수절기가 기록되어 있었다.
그리고, 천형신금(天形神琴)은 만수천형존이

우연히 이곳 만수천형곡에서 얻은 천음부(天音府)의 비전신병(秘傳神兵)이었다.
천음부는 십패천와 맞서 싸우다 멸절당한

묘강의 전설적 문파로 변황십 팔대패세의 일패세였다.

그들의 음공절기는 가히 천년제일이었다.
천형신금은 바로 그 천음부의 호법신병이었다.


여기까지 이야기한 사군려는 잠시 말을 멈추었다.

그녀는 창 밖을 바라보며 나직한 한숨을 내쉬었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쓸쓸한 회의의 빛이 우수처럼 깃들었다.
이윽고, 그녀는 평정을 되찾은 잔잔한 음성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사람을 한번 잘못 본 것으로 인해

천 년을 내려온 만산제일가인 악가는 큰 타격을 입고만 것이에요."
그녀는 호수 속에서 즐겁게 유영을 즐기고 있는 내내를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녀의 눈에는 맑은 물기가 고이고 있었다.


위지대영에게 불의에 암습당한 악붕비는 그 후 주화입마하여 절명하고 말았다.

이로써, 악가의 전통은 완전히 단절된 것이었다.
사군려는 옥용 가득 수심의 빛을 드리우며 말했다.
"이제 저는 차마 세상 사람들 보기 부끄러워 바깥 세상에는 나갈 수 조차 없어요.

그저 이곳 만수천형곡에서 시조부님의 묘를 지키다 죽음으로 속죄드리는 수 밖에요."
말을 하던 그녀는 문득 간절한 눈빛으로 군검풍을 바라보았다.
그녀의 눈빛을 접한 순간, 군검풍은 가슴이 덜컹 내려 앉는 것을 느꼈다.
'내내를 맡아달라는 뜻인가?'
그는 사군려의 시선이 무엇을 뜻하는지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이윽고, 사군려는 몸을 일으켰다.
"보여드릴 것이 있어요."
그녀는 방 한쪽에서 하나의 옥함을 들고 왔다.
탁자에 다시 앉은 그녀는 군검풍이 보는 앞에서 옥함을 열어 보였다.

옥함 안에는 몇 가지 물건이 들어 있었다.
하나의 철패와 두 권의 비급이었다.
두 권의 비급 중 한 권은 최근에 지은 것으로 보였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전체가 누렇게 뜬 것으로 보아 이미 천년 이전에 지어진 것으로 추측할 수 있었다.
"이것은 만산집맹(萬山集盟)을 움직일 수 있는 만산금령(萬山禁令)이예요."
사군려는 호두상(虎頭像)이 조각된 철패를 군검풍에게 내밀며 말했다.
"이것을 제가 사필한 만수천경(萬獸天經)과 함께 지니고 계시다가 내내에게 전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군검풍은 거절하지 않고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러자, 사군려는 다시 누런 양피지 비급을 건내주며 말했다.
"이것은 제가 만수천형곡 동벽(東壁)에서 찾은 것이예요.

폐를 끼치는 대가로 약소하나마 받아주세요."


-- 천음제형경(天音帝形經).


밝은 비급의 표지에는 그와 같은 글씨가 대전체로 쓰여져 있었다.
군검풍은 흠칫하며 놀람의 표정을 지었다.
"천음제형경! 이것은...!"
"그래요, 천음부의 비전무경이예요.

그 안에는 천형신금을 제압할 수 있는 절정음공들이 수록되어 있어요."
"이 귀한 것을 어찌 소생이 받겠습니까?"
군검풍은 고개를 저으며 겸손하게 사양했다.
하지만 사군려는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섭섭해요, 그런 말씀을 하시면...!"
그녀의 시선이 다시 밖으로 향했다.
"...!"
군검풍도 고개를 돌려 호수를 바라보았다.
"호호... 나를 잡아봐! 호호...!"
촤...아!
내내는 흑령신풍에게 물을 끼얹으며 인어 같은 나신으로 호수 속을 헤엄치고 있었다.
해맑은 그의 옥용 위로 봄햇살이 환하게 빛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