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4장 독황연(毒皇淵)의 기연(奇緣)
군검풍은 검미를 모으며 시신을 바라보았다.
독혈의 입구를 향해 기어가듯 쓰러져 있는 시신의 주인은 아주 거구였다
"지극화기와 만독강살이 휘몰아치는 중에서도 골격을 유지하다니...
이 시신은 혹시 만독태야(萬毒太爺)란 인물이 아닐까?"
그는 시신을 일견하는 순간 얼핏 깨달아지는 것이 있었다.
그는 시신을 향해 몇 걸음 다가섰다.
시신은 독혈쪽으로 기어가다가 죽어 있어 있었는데
그의 우수에는 한 자루 투명한 장검이 움켜쥐어져 있었는데, 그 것은 바닥에 꽂혀 있었다.
-- 투명심인검(透明心刃劍).
투명한 기형검의 검신(劍身)에는 그와 같은 갑골문(甲骨文)의 검명(劍銘)이 새겨져 있었다.
그리고 검이 꽂혀 있는 바닥에는 몇 줄의 글이 어지럽게 새겨져 있었다.
-- 크...! 하늘을 저주한다.
독종비지(毒宗秘地) 독황연(毒皇淵)에 이르러...사라천존과 맞닥뜨리게 하다니...!
군검풍은 자신의 예상이 빗나가지 않았음을 느끼고는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이 분은 만독태야 갈천후(葛天吼)시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 만독태야 갈천후!
그는 저 십지마련의 십대마맥중 사독마맥(死毒魔脈) 사상 최강의 독종으로 일컬어지는 인물이었다.
만독태야는 사라천존과의 대격전으로 회복하지 못할 중상을 입고
독종의 영원한 성지인 이곳 독황연에까지 와서 죽은 것이었다.
군검풍은 기대와 호기심으로 눈을 빛내며 다시 어지럽게 적혀 있는 바닥의 글을 읽어 나갔다.
만독태야의 글은 다음과 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 죽는 것이 두렵지는 않다. 다만 독중독존(毒中毒尊) 조사의 영전을 찾지 못한 것과,
본 사사독마갱의 제일신병인 투명심인검을 본문으로 돌려보내고 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뿐...
글의 끝부분은 거의 보이지 않을 만큼 흐릿했다.
죽기 직전 사력을 다해 쓴 흔적이 역력했다.
군검풍은 두 눈에 이채를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이곳이 과연 독황연(毒皇淵)의 입구였군."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만독태야의 시신을 내려다 보았다.
그것이 어떤 것이든, 죽기 직전까지 한을 품고 있었다는 것은
보는 이의 마음을 불편하게 하는 것이었다.
군검풍은 만독태야의 심정을 짐작할 수 있을 것도 같았다.
그는 가능하다면 만독태야가 죽음 직전까지 안고 있던 한을
자신의 힘으로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걱정하지 않으셔도 되오. 투명심인검은 반드시 사사독마갱으로 돌려 드리겠소."
그는 만독태야의 시신을 향해 약속했다.
이어, 그는 투명심인검의 손잡이를 잡았다.
수수...!
그 바람에 만독태야의 시신은 재로 부서져 날아갔다.
투명심인검은 이윽고 군검풍의 손에 들려졌다.
그것을 든 군검풍의 두 눈이 유현하게 빛났다.
"신검이다!"
그는 감탄의 눈빛으로 투명심인검을 치켜들었다.
우웅...!
마치 군검풍에게 자신의 존재를 알리듯 투명심인검은 은은한 검명을 일으켰다.
그와 함께, 한 줄기 서늘한 기류가 군검풍의 팔을 거쳐 전신으로 번졌다.
투명심인검-!
그것은 검끝에서부터 손잡이까지 전체가 완전히 투명하게 보이는 기검(奇劍)이었다.
투명심인검은 검의 재질부터가 흔히 일반적으로 쓰이는 검과는 달랐다.
검의 주원료인 무쇠로 만든 것이 아니라,
그것은 만독을 투명보옥(透明寶玉)에 투입시켜 만든 것이었다.
따라서, 투명심인검에 공력을 주입하여 내치면
그 즉시 백 장 주변이 투명독강(透明毒 )에 휘말려 박살나 버린다.
또 한 가지 투명심인검은 아주 특이한 점을 지니고 있었다.
그것을 팔의 골격 속에 검을 흡수하였다가 필요에 따라 꺼내어 내칠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것은 일종의 독정(毒精)이 응고되어 형성된 검(劍)이기때문에 가능한것이었다.
군검풍은 투명심인검의 독특한 모양과 강한 개성이 마음에 들었다.
그것은 어쩌면 평범한 것을 거부하려는 그의 본성과 닮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심인수혼검결(心刃搜魂劍訣)?"
그는 투명심인검의 검신에 흐릿하게 떠오르는 구결을 읽으며 문득 의아한 듯 고개를 갸웃했다.
-- 심인수혼검결(心刃搜魂劍訣).
이것이야말로 투명심인검을 팔 속으로 흡입시킬 수 있는 신비한 대법의 구결이었다.
군검풍은 아주 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마음에 드는 검이고 검결이다!"
그는 투명심인검을 허리에 찼다.
그리고는 천천히 지극화양혈을 향해 다가섰다.
그러자, 반투명한 화강풍(火剛風)이 맹렬히 군검풍의 전신을 휘감아왔다.
"좋다! 이제 무너져 주어야겠다!"
츠으...!
그는 형형한 신광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그가 좌수를 쳐들자 검푸른 빛이 떠올랐다.
바로 묵린잠형갑이 발하는 기운이었다.
군검풍은 지극화양혈을 주시하며 우렁한 일갈을 내질렀다.
"십방마라폭(十方魔羅瀑)!"
쩌... 정!
그의 좌수에서 묵린잠형갑으로 인해 십 배 중폭된 마라강기가 벼락같이 폭사되었다.
십방마라폭!
그것은 바로 십절천마후가 준 십절마종보(十絶魔宗譜) 상에 기록되어 있던
서열 오위의 절정마공이었다.
콰르릉...!
요란한 폭음과 함께 십방마라폭이 지극화양혈의 천정을 강타했다.
그러자 실로 어마어마한 광경이 벌어졌다.
콰콰쾅...쿠쿵!
천지가 뒤흔들리는 굉음과 함께 지극화양혈의 천정이 쩍쩍 갈라지기 시작했다.
삽시에 천정이 무너져 내리며 지극화양혈은 그 속으로 함몰되어 버린 것이었다.
"되었다!"
스슥!
군검풍은 지면을 박차며 재빨리 뒤로 물러났다.
꽈르릉...!
군검풍은 천정이 무너져 지극화양혈을 메우는 광경을 바라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었다.
그는 이마의 땀을 손으로 쓱 닦으며 흐뭇한 표정을 지었다.
그에게는 어렵고도 힘든 경험이었다.
하지만, 어려운 난관을 거친 힘든 작업 뒤에는 언제나 흐뭇함이 따르는 법이었다.
아침.
멸신천황도의 아침이 밝았다.
모든 생명체가 말살된 멸신천황도는 삭막하고 거친 죽음의 섬이었다.
하지만, 그곳에도 태양은 어김없이 떠올랐다.
칙칙한 죽음의 안개를 헤치며 찬란한 태양이 눈부신 광채를 뿌리며 치솟아 오르고 있었다.
주위는 삭막하고 음습했다.
하지만 태양의 빛은 공평한 법, 그것은 언제라도 밝고 찬란했다.
멸신천황도를 비추는 이 아침의 태양은 더욱 눈이 부셨다.
사라마벽의 정상에는 일노일소(一老一少)가 어깨를 나란히 한 채 일출(日出)을 바라보고 있었다.
두 사람중 영준한 용모의 청년은 물론 군검풍이었다.
그리고 그의 옆에는 거대한 체구의 괴인이 감개무량한 표정으로 우뚝 서있었다.
만수종 해극패였다.
해극패의 팔다리에는 일 장 길이의 대라철삭(大羅鐵索)이 그대로 매어져 있었다.
그것은 지난 사십 년 동안 그를 사라마벽에 묶어놓았던 마물이었다.
하지만 인간이란 무엇이든 오래 같이 하다보면 정을 느끼는 법이었다.
미운정, 고운정이란 말이 있듯이
해극패는 자신을 속박했던 대라철삭이 이제 전혀 불편하게 느껴지지 않았다.
불편하기는커녕 이제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일부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굳이 몸에서 떼어내지 않고 그대로 두기로 했던 것이다.
해극패는 감회어린 눈빛으로 찬란한 일출을 바라보고 있었다.
'이것이 얼마만인가?'
그는 비로소 자신이 살아있음을 실감했다.
사십년 만에 다시 바라본 해돋이 광경은 그야말로 감개무량하기만 했다.
"녠! 오늘 따라 일출(日出)이 유달리 감상적이군."
해극패는 코끝이 시큰해지는 감흥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그는 눈시울마저 붉어지려는 것을 억지로 감추며 안면을 실룩거렸다.
"그렇습니다, 형님!"
군검풍은 격동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도 뿌듯한 기쁨이 어리고 있었다.
그의 호칭은 어느새 자연스럽게 바뀌어져 있었다.
군검풍과 해극패는 누가 보더라도 호형호제할만큼 나이가 비슷하지가 않았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그런 것은 게의치 않았다.
그들은 서로 의기가 투합했고, 그래서 나이를 초월하여 결의형제를 맺은 상태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의 시간은 특히 해극패에게 많은 것을 돌이켜 생각하게 만들었다.
이윽고, 그 침묵을 깨고 해극패가 먼저 입을 열었다.
그의 음성은 격동으로 떨려 나왔다.
"우형은 오늘 이 지겨운 멸신천황도를 떠날 생각이네."
군검풍은 여부가 있겠냐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셔야지요. 중원을 떠난 지 벌써 사십 년이나 되셨으니 당장이라도 이곳을 떠나고 싶겠지요."
그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해극패의 심정을 충분히 헤아리고도 남는 그였다.
해극패의 심정은 한시가 급했다.
"필경 해천패왕맹은 사해지존 융해... 그놈의 손아귀에 쑥대밭이 되었을것이다.
우선 해천패왕맹을 재조직한 후에, 그놈 융해를 찾아 육시를 할것이다."
그의 두 눈은 분노와 증오, 복수의 불길로 활활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 모습에 군검풍은 문득 걱정스러움을 떨칠 수 없었다.
그는 침중한 음성으로 당부했다.
"조심하셔야 할 것입니다. 어쩌면... 그 자의 배후에는 거대한 세력이 있을지도 모르니까요!"
"거대세력?"
해극패는 의아한 눈으로 군검풍을 바라보았다.
군검풍은 벽붕천익을 펄럭이며 묵묵히 일출을 주시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그는 해극패의 시선을 느끼자 무거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사해지존 융해는 사십년 내 전혀 무림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습니다.
그것은 그 자가 모종의 계획하에 암약 중이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입니다."
"...!"
그 말에 해극패의 시선이 흔들렸다.
그의 놀라움은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다.
'과연... 용중용(龍中龍)이다!
이 녀석의 머리는 어찌된 것이 직접 변을 당한 노부 이상으로 사해지존 융해를 잘 알고 있단 말인가?'
그는 내심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나이 어린 아우의 머리서속에는 얼마나 큰 지혜가 들어있는지 추측이 불가능할 정도였다.
해극패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군검풍은 진중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 있었다.
그러다, 그는 해극패를 올려다보며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사해지존이 속한 조직은 노형님께 어쩐지 큰 벽이 될 것이라는 불길한예감이 듭니다. 조심하십시오."
그는 진심이 가득한 눈빛으로 염려스러운 마음을 전했다.
해극패는 그런 군검풍의 진심이 가슴에 와닿는 듯 하여 또 한번 코끝이 찡해졌다.
의외로 체구가 커다란 그의 성격은 작은 일에 쉽게 감동하고 기쁨을 느끼는 순박한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해극패는 그런 내심을 드러내지 않았다.
"우형의 걱정일랑 붙들어 매두어도 된다. 독황연에 들어갈 네녀석 걱정이나 해라!"
그는 염려말라는 듯 호쾌하게 웃으며 군검풍의 어깨를 두드렸다.
그 모습은 든든한 맏형의 모습을 보듯 믿음직스러워 보였다.
"이것을 받아라!"
문득 그는 품 속에서 두 가지의 물건을 꺼내 군검풍에게 내밀었다.
그것은 하나의 옥패와 한 권의 비급이었다.
-- 수종제일령(水宗第一令).
-- 수종천급(水宗天級).
"수종천급에는 우형의 못난 수공(水攻)이 수록되어 있다.
그리고, 수종제일령은 우형의 신물로 천하 어느 곳의 하천에서라도
제시하기만 하면 우형과 연락이 될 것이다."
"소중히 보관하겠습니다."
군검풍은 수종제일령과 수종천급을 공손히 받아들며 고마움을 표했다.
해극패는 군검풍의 어깨를 두드리며 툴툴 웃었다.
"쿳쿳! 선물이 보잘 것 없어 미안하다!"
"별말씀을 다하십니다."
군검풍은 고개를 저으며 싱긋 웃었다.
그의 웃음은 실로 매력적이었다.
해극패를 만나고, 그를 구해주는 과정에서 그는 부쩍 심신이 성장한 느낌이 들었다.
어려운 일을 겪은 후에 비로소 성숙해 지는 것이 인간이었다.
이때 해극패는 불현 듯 입술을 오무리더니 날카로운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이내 그의 휘파람에 대답하는 것이 있었다.
구우욱...!
갑자기, 남해가 떠나갈 듯한 괴성과 함께 맹렬한 강풍이 주위를 휩쓸었다.
이어 사라마벽의 아래에서 거대한 한 마리 익룡(翼龍)이 치솟아 올랐다.
물론 해극패의 부름을 기다리고 있던 융천신마룡이었다.
"자, 그럼 다음에 보자!"
휘...익!
해극패는 융천신마룡이 나타나자 그놈의 등으로 가볍게 날아올랐다.
"안녕히 가십시오!"
군검풍도 해극패를 향해 손을 흔들며 소리쳤다.
"곧 마신을 다시 돌려보내마!"
해극패의 음성이 끝남과 동시에, 그를 태운 융천신마룡은 까마득히 허공으로 치솟아 올랐다.
이어, 그놈은 삽시에 까마득한 하나의 점으로 변해 군검풍의 시야에서 사라져 갔다.
"...!"
군검풍은 잠시 멍한 표정으로 그 광경을 주시하고 있었다.
갑자기 가슴이 텅 빈 듯한 공허감이 밀려들었다.
혼자 남게된 그는 불현듯 밀려드는 짙은 외로움에 가슴이 젖어들었다.
"이제 정말 혼자로군!"
그는 씁쓸한 어조로 중얼거리며 천천히 시선을 내리깔았다.
"고독이란 것이 이렇게 감당하기 힘든 것일줄이야..."
그는 혼자라는 것을 느끼자 가슴 한 부분이 퀭하게 뚫려버린 듯한 공허감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의 눈 앞으로 그리운 사람들의 얼굴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갔다.
특히, 단 하룻밤의 인연을 맺고 떠나온 백리월영의 아름다운 모습이 가슴 뭉클해지도록 그리웠다.
하지만 이내 그는 고독감을 떨쳐버리는 듯 고개를 흔들었다.
그는 지긋이 입술을 깨물며 중얼거렸다.
"빨리 독종철편의 비밀을 풀어 독황연에 들어야 한다.
그래야 중원으로 들어갈 수 있을 테니까."
그는 한 장의 철편(鐵片)을 만지작거리며 눈을 빛냈다.
독종철편-!
그것은 사사독종이 죽음에 이르러 군검풍에게 넘겨 주었던 그의 신물이었다.
헌데,
"저것은...!"
생각에 잠겨있던 군검풍은 어느 순간 흠칫 생각에서 깨어나며 고개를 들었다.
그는 눈을 크게 뜨며 서쪽을 주시했다.
츠으... 츠으...!
칙칙한 죽음의 안개를 뚫고 느닷없이 새파란 광휘(光輝)가
뇌전(雷電)처럼 치솟고 있는 것을 발견한 것이었다.
'검기(劍氣)다!'
군검풍의 두 눈이 번쩍 빛을 발했다.
'이 궁벽한 멸신천황도에 나 외에 또 누가 있단 말인가?'
생각이 여기에 이른 순간 그는 망설임없이 성큼성큼 걸음 걸음을 옮겼다.
한 걸음에 십여 장씩 쭉쭉 전진하던 군검풍은
이내 검기가 치솟고 있는 서쪽 해변을 향해 날아갔다.
늪지,
이곳은 걸쭉한 갈색 물감을 풀어놓은 듯 기분 나쁘고 질펀한 늪지였다.
게다가 무엇인가 썩는 듯한 퀴퀴한 냄새마저 풍기고 있어 누구라도 접근을 꺼려할 정도였다.
늪지의 주위로는 음산하고 칙칙한 안개가 흐르고 있었다.
마치 또아리를 튼 뱀들이 꾸물거리며 움직이듯 음산한 기운을 자아내는 안개였다.
그런데, 늪지를 감싸고 있는 그 안개 속에 지금 기괴한 광경이 벌어지고 있었다.
"감히 미물 따위가 덤비다니...!"
츠으... 쩌정!
날카로운 여인의 교갈과 함께,
뇌전 같은 검기가 천가닥 만가닥으로 뻗어나와 늪지 주위의 안개를 베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고오...
콰쾅...!
검기가 뿌려질 때마다 가공할 괴수의 울부짖음과 폭음이 잇달아 터져나오고 있었다.
지금 이곳에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인수대전(人獸大戰)이 벌어지고 있었다.
한 마리 끔찍하게 생긴 괴수의 인간의 싸움이 치열하고도 격렬하게 펼쳐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괴수와 싸움을 벌이고 있는 사람은 놀랍게도 여인이었다.
더구나, 더욱 놀라운 것은 대담하게 괴수와 맞서고 있는 여인이
한 자루 장검만으로 괴수를 상대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그녀는 일신에 다 낡고 해어진 회포를 걸치고 있었는데 나이는 대략 이십 전후 정도로 보였다.
지금 회포여인은 괴수와의 치열한 접전으로 인해 옷차림과 머리 모양새가 말이 아니었다.
그녀의 긴 머리카락은 제멋대로 마구 흩어져
얼굴을 가리고 있었기 때문에 용모는 알아볼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녀의 전신에서는 송곳 같은 예기와 긴장감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마치 암표범 같이 사나운 기세를 느끼게 하는 여인이었다.
그녀가 상대하고 있는 괴수는 보기만 해도 끔찍하고 징그러운 이무기(蛟)였다.
그놈은 몸 길이만도 십 장이 넘는 거대한 크기로
전신이 거무칙칙한 비늘로 뒤덮여 있어 더욱 흉측한 모습이었다.
또한, 그놈의 이마에는 검은 빛이 도는 석 자 가량의 뿔이 돌출해 있었다.
그로 인해, 더욱 흉맹하고 거친 흉성이 느껴졌다.
-- 묵각해망(墨角海網).
이놈은 바다에 살며 해일(海溢)과 폭풍(暴風)을 일으킨다는 전설속의 괴수였다.
전신에 돋아있는 검푸른 비늘은 창칼보다 더 무서웠으며 도검마저 불침한다.
게다가 입으로는 치명적인 사망독장(死忘毒裝)까지 뿌려
자신의 주위 백장 내에 있는 모든 생명을 말살시키는 무서운 위력을 지니고 있었다.
그리고 묵각해망의 이마에 돌출해 있는 뿔은
마황묵룡각(魔荒墨龍角)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데
그것은 가히 무가지보의 가치를 지닌 것이었다.
그것은 만가지 극독을 해제하데도 큰 묘용을 지니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그 핵을 다듬어 날을 세우면 호신강기를 종이 베듯 하는 신검이 된다.
그런데 그 천고마물과의 일전에서 고전하는 것은 여인쪽이 아니었다.
오히려 묵각해망이 낭패를 당하고 있는 형국이었다.
"감히 나 은밀월(隱密月)을 해치려 한 죄다! 환밀참(幻密斬)!"
쐐...액!
은밀월이라 자칭한 여인은 분노의 음성으로 교갈을 내질렀다.
그녀의 장검 끝으로 일순 환상같은 달그림자(月影)가 흘렀다.
그녀의 장검에서는 실로 놀라운 검기가 발출되었다.
카아악...!
그러자, 처절한 비명과 함께 묵각해망의 앞발이 무참하게 끊어져 나가버렸다.
늪지 주위로 섬뜩한 피보라가 확 뿌려졌다.
앞발을 잃은 묵각해망은 고통의 비명을 내지르며 황급히 늪지 깊숙이로 달아나려 했다.
이미 은밀월의 혹독한 살수에 적잖은 겁을 집어먹은 참인지라
더 이상 버틸 용기가 없었던 것이다.
하지만 은밀월은 결코 호락호락한 여인이 아니었다.
그녀는 묵각해망이 달아나는 것을 허용치 않았다.
"달아나겠다고? 어림없다!
월영제일살(月影第一煞)인 나 은밀월의 손에서 달아난다는 것은 꿈도 꾸지않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녀는 어림없다는 듯 차갑게 냉소했다.
이어, 그녀는 장검을 안고 훌훌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월락대지(月落大地)! 벽월대파천황(碧月大破天荒)!"
그녀의 입에서 날카로운 교갈이 잇달아 터져나왔다.
다음 순간, 방원 십여장이 온통 신비로운 벽색(碧色)의 월광에 휘말렸다.
그 광경은 가히 눈이 부실 정도였다.
츠츠츳...!
반월형의 검륜(劍輪)이 번개같이 묵각해망의 목을 휩쓸었다.
캬...아!
묵각해망도 절망을 느낀 듯 최후의 발악을 시도했다.
그놈의 쩍 벌어진 입으로부터 천가닥 만가닥의 푸른 독강전(毒剛電)이 벼락같이 쏟아졌다.
콰르릉...!
캬악...!
천지가 뒤흔들리는 듯한 엄청난 굉음과 함께 묵각해망의 처절한 비명이 터져나왔다.
실로 믿을 수 없는 광경이었다.
쿠쿵...!
거대한 검륜강이 묵각해망의 동체를 가차없이 두 동강 내버린 것이었다.
두 쪽난 묵각해망의 시신은 마치 산이 허물어지듯 육중하게 늪지로 함몰되었다.
하지만 은밀월도 결코 무사한 것 만은 아니었다.
"음...!"
그녀 역시 충격을 받은 듯 교구를 휘청하며 늪지로 나뒹굴었다.
"지독한 놈...!"
그녀는 교구를 비틀거리며 고통스럽게 중얼거렸다.
"투쟁 본능이 강한 짐승과의 싸움이 인간을 베는 것보다 열 배는 더 어렵다."
그녀는 한바탕 고전을 치루고나자 전신이 욱신거리고 쑤시는 것 같았다.
그녀는 지친 몸을 이끌고 느릿느릿 늪지를 벗어났다.
"독기를 씻어내야 할 텐데...!"
그녀는 힘겹게 중얼거리며 비틀비틀 걸어나왔다.
그녀는 겉보기보다 훨씬 더 상처가 심각했다.
지금 그녀의 전신으로는 빠르게 푸른 독기가 번지고 있었다.
묵각해망이 내친 사망독장이 전신에 퍼지고 있는 것이었다.
얼마나 걸었을까?
졸졸...!
불현듯, 시원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은밀월의 귓전을 스쳤다.
그 소리는 지칠대로 지쳐 축 쳐진 그녀의 심신을 상쾌하게 적셔주었다.
그 소리는 전면의 바위 뒤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그곳에 방원 이십 장 가량 되는 맑은 연못이 고여 있었다.
그것을 발견한 은밀월은 안도의 미소를 지었다.
"다행이다. 세골환수대법(洗骨環髓大法)을 펼칠 수 있겠구나."
그녀는 맑은 물을 보자 절로 마음이 평화로워 지는 것을 느꼈다.
-- 세골환수대법(洗骨環髓大法).
이것은 동영(東瀛) 인자류(忍者流) 비전의 요상법이었다.
흐르는 물로 전신에 맺힌 독기(毒氣)와 사혈(死血)을 씻어내는 대법이었다.
연못 앞에 이른 은밀월은 망설임없이 일신에 걸친 회포를 벗었다.
피에 젖은 낡은 회포가 벗겨져 나가며 그녀의 적나라한 나신이 마치 껍질을 벗듯이 드러났다.
그녀의 벗은 몸매는 가히 뇌살적이라 할만 했다.
그녀는 성숙할대로 성숙하여 만지면 터질 듯 풍염한 몸매를 지니고 있었다.
미끈하고 늘씬한 팔등신의 몸매는 완벽한 균형미를 자랑하고 있었다.
그 모습은 아찔한 현기증을 불러 일으킬 만큼 유혹적이었다.
여인의 가슴이 지닌 그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새삼 언급할 필요가 없다.
하지만, 은밀월의 젖가슴이야말로 그야말로 탐스러운 두 개의 복숭아와도 같았다.
수줍어 파르르 떨어 맺힌 두 알의 분홍빛 유실은 처녀만이 갖는 아름다움의 상징이었다.
비단 젖가슴 뿐만이 아니었다.
아름다움은 그녀의 온 몸 곳곳에 향기처럼 뭉쳐져 있었다.
유지같이 매끈한 아랫배와, 그 밑으로 숨어드는 은밀한 여인의 비림(秘林)...,
거기에다, 대리석으로 조각한 듯 미끈한 두 다리와 세류요의 허리는
급격히 풍성함을 이룬 둔부와 놀라운 대조를 이루고 있었다.
누군가 그녀의 모습을 보았다면 그 황홀한 아름다움에 넋이 나가고 말았을 것이다.
하지만 독상을 입은 지금 은밀월은 경황이 없었다.
그녀는 전신으로 밀려오는 은은한 고통을 참느라고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이어, 그녀는 검을 입에 물고 힘겹게 연못을 향해 걸어 들어갔다.
촤아...!
연못 물은 시리도록 차가왔다.
"음...!"
한천(寒泉)에 몸을 담그자 은밀월의 입에서는 절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연못 속으로 걸어 들어가며 중얼거렸다.
"군검풍이라 했던가? 두 번씩이나 나의 손에서 벗어나다니... 아무튼 대단한 사내야."
그녀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실로 놀랍고 뜻밖이었다.
그렇다면, 은밀월은 지금까지 군검풍을 노려 왔다는 말인가?
은밀월은 마치 사냥감을 노리는 암표범과 같은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그러나 다음에는 결코 실수하지 않겠어! 나의 손으로 반드시 너를 베고 말겠다!"
그런데 그녀의 중얼거림이 끝난 직후였다.
"후훗... 이거 뜻밖인걸? 나를 아는 미인(美人)을 이런 곳에서 만나다니 말이오!"
느닷없이 한소리 나직한 웃음소리가 은밀월의 귓전을 울렸다.
은밀월은 아연실색했다.
그녀의 교구가 파르르 경련을 일으켰다.
언제 나타난 것일까?
연못의 동쪽 언덕에 한 명의 인물이 나타났다.
떠오르는 일륜을 어깨위에 이고 나타난 청년은 벽색피풍을 펄럭이며 우뚝 서있었다.
그 청년을 본 은밀월의 입에서 앓는 듯한 신음이 새어나왔다.
"군...검풍!"
그녀는 자신의 눈을 의심했다.
지금 그녀는 연못 속에 가부좌를 틀고 앉은 상태였다.
하지만 그녀는 전문살수였다.
그녀가 놀라움의 감정을 드러낸 것은 지극히 짧은 순간에 불과했다.
이내 그녀는 냉정을 회복했다.
그리고, 차가운 살수의 본능을 되찾은 그녀는 장검을 쥔 손에 전 공력을 주입시켰다.
그 바람에, 세골환수대법은 일시적으로 정지되었다.
그와 더불어, 차츰 씻겨지던 사망독장은 다시금 빠르게 그녀의 온 몸으로 번지기 시작했다.
군검풍은 상당히 뜻밖이라는 표정을 지었다.
그는 고개를 갸웃하며 나직한 웃음을 흘렸다.
"후훗! 나를 노리던 천풍사랑(天風死狼)이 이토록 아름다운 여인일 줄은 미처 몰랐는 걸?"
그는 눈썹을 찡긋하며 연못으로 다가섰다.
천풍사랑!
그렇다!
은밀월이라는 이 여인이 바로 천하제일살수로 악명 높은 천풍사랑이었다.
"칫!"
천풍사랑 은밀월은 물 속에 앉은 채 바득 이를 갈았다.
제일살수가 되기위해 자신이 여인이라는 사실 조차도 잊고 살아왔던 그녀였다.
하지만 왜일까?
지금 그녀는 군검풍의 앞에 자신의 나신을 보이는 것이 부끄럽게 느껴졌다.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모닥불을 놓은 듯 화끈 달아 올랐다.
그것은 그녀가 생전 처음으로 느끼는 이상하고 야릇한 감정이었다.
그녀도 여인이 지닌 본능적인 심리는 버릴 수 없었던 것일까?
하지만 은밀월은 입술을 깨물며 그런 감정의 동요를 억눌렀다.
'죽여야 한다!'
그녀는 다시 살수 본연의 자세로 돌아왔다.
그런 그녀의 전신에서는 무서운 살기가 피어올랐다.
"살(殺)!"
번...쩍!
그녀의 입에서 한 마디 짤막한 외침이 터져나왔다.
그와 동시에, 그녀의 장검이 연못을 두 쪽으로 가르며 번개같이 군검풍의 심장으로 날아들었다.
"빠른데...?"
군검풍은 싱긋 웃었다.
웃으며 그는 우수를 쳐들어 은밀월의 장검을 막아갔다.
그 모습에 당황한 것은 오히려 은밀월이었다.
'바보같은 사내! 맨손으로 나의 월영살검(月影殺劍)을 막으려 하다니...!'
그녀의 두 눈에 언뜻 당혹의 빛이 스쳤다.
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었다.
쐐액...!
그녀는 당황하면서도 검세를 늦추지 않았다.
그런데 결과는 전혀 엉뚱했다.
카...캉!
요란한 쇳소리가 이는 순간 은밀월은 월영살검이 허공에서 무엇인가와 충돌한다고 느꼈다.
믿을 수 없게도 절정살병인 월영살검이 허무하게 두동강 나버린 것이 아닌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월영살검을 두 동강낸 무형의 병기는 질풍처럼 은밀월의 목을 찔러왔다.
어떤 경우에도 놀라움을 드러내지 않는 전문살수 은밀월.
하지만 그녀도 이번만은 놀라움을 숨길 수 없었다.
"투... 투명심인검(透明心刃劍)?"
은밀월은 눈을 치켜뜨며 경악의 신음을 발했다.
그제서야 그녀는 깨달았다.
군검풍의 손에는 전체가 투명하여 그 형체가 보이지 않는 투명심인검이 들려 있다는 사실을.
하지만 그녀의 깨달음은 너무 늦었다.
이미 군검풍의 투명심인검은 그녀의 목 밑까지 쇄도하여
도저히 피할 수가 없는 상황이었던 것이다.
"악!"
은밀월은 자기도 모르게 공포 서린 비명을 내지르며 눈을 질끈 감았다.
생전 처음으로 그녀는 죽음의 공포를 느낀 것이었다.
그것은 그녀가 사람의 목숨을 베는 살수로 살면서 처음으로 경험한 공포였다.
그녀는 지금껏 사람을 죽이는 일에만 익숙해 있었지
자신이 죽음의 위기에 처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실로 결과는 뜻밖이었다.
파팍!
투명심인검은 은밀월의 목을 밑을 스치고 지나갔을 뿐,
그녀에게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이다.
대신, 검은 그녀의 옆으로 빠르게 접근 중이던 일 장 길이의 한 마리 독사의 머리를 관통했다.
"...!"
비로소 홱 고개를 돌린 은밀월의 두 눈에
투명심인검에 이마를 관통하여 한 줌의 독수로 녹아내리는 독사의 모습이 들어왔다.
은밀월은 도무지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다... 당신...!"
그녀는 교구를 파르르 떨며 놀란 눈으로 군검풍을 바라보았다.
오래 전에 잊었던 공포가 되살아 나는가 했더니,
이미 메말라버린 가슴에 촉촉한 물기마저 차올랐다.
그것은 그녀가 너무나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눈물이란 것이었다.
그것들은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흔하고 평범한 감정이었다.
하지만 은밀월은 살수가 되면서부터 그 흔하고 평범한 감정들을 제일 먼저 버렸다.
그런데, 그 본능적인 감정들이 이 순간 갑자기 거부할 수 없는 엄청난 무게로 그녀를 짓눌러왔다.
군검풍은 어떤 표정을 지어야 좋을지 난감해져 있는 은밀월을 바라보며 싱긋 웃었다.
"후훗...! 무서웠소?"
그는 은밀월에게로 다가서며 자연스럽게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 동작은 지극히 자연스러웠으며 전혀 사심이 깃들어 있지 않았다.
은밀월은 더 이상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이 순간, 그녀는 자신도 모르게 연약한 여인의 본모습으로 돌아가 있었다.
"흑...!"
그녀는 와락 오열을 터뜨리며 활짝 벌린 군검풍의 팔 안으로 그대로 뛰어들었다.
그녀의 목에는 한 가닥 미세한 혈흔이 그어져 있었다.
"흑...나쁜 사람! 당신은 나쁜 사람이예요!"
은밀월은 아직도 죽음의 공포를 벗어나지 못한 듯
교구를 애처롭게 떨며 군검풍에게 매달렸다.
그것은 생각만 해도 끔찍한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군검풍의 투명심인검이 한치만 안으로 스쳤어도 그녀는 목이 쩍 갈라져 죽었을 것이다.
그 끔찍한 상상은 은밀월로 하여금 인간 본능의 공포심을 불러 일으켰다.
누구나 죽음앞에 이르면 나약해지는 것이 인간의 공통적인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흑흑...놀랐어요. 당신은 정말 사람을 놀라게 만드는 재주가 뛰어나군요.
난... 죽는 줄로만 알았어요."
은밀월은 공포가 가시자 갑자기 왈칵 치밀어 오르는 서러움에 마침내 눈물을 보이고 말았다.
죽음의 공포에서 벗어난 안도감이 그녀로 하여금 기이한 서러움을 유발시킨 것이었다.
그 모습에 군검풍은 빙긋 미소지었다.
놀라움에 창백해진 은밀월의 모습이 귀엽고 사랑스럽게 느껴지기조차 했다.
"후후...! 그대는 절대살수(絶對殺手)는 못 되겠군."
그는 은밀월의 교구를 부드럽게 안아 어깨를 토닥거렸다.
풍만한 여인의 나체가 두 팔 가득 느껴졌다.
그 느낌에 비로소 군검풍은 움찔하며 자신이 지금 실오라기 한 올 걸치지 않은
알몸의 여자를 껴안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으음!"
눈물을 흘리며 오열을 터뜨리던 은밀월이 갑자기 힘없이 축늘어졌다.
감정적으로 흥분상태에 이르자 사망독장의 확장속도가 급격히 확대되어
삽시에 그녀의 온 몸으로 독기가 퍼진 것이었다.
군검풍은 흠칫하며 은밀월을 내려다 보았다.
그의 눈썹이 절로 찌푸려졌다.
"이런...방치해두었다간 큰일나겠군!
그는 이내 은밀월의 상세가 심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완벽한 균형을 이룬 아름다운 은밀월의 몸매를 내려다보며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살수가 되기에는 지나치게 아름다운 몸을 가졌어.
후훗! 이런 몸으로는 한 남자의 아름다운 아내로 살아가는 것이 제격일 것이다.
비정하고 냉혹한 살수는 그대에게 어울리지 않는다."
그는 축 늘어진 은밀월의 나신을 안고 연못 밖으로 걸어나갔다.
이어 그는 연못가 풀밭에 그녀의 나신을 조심스럽게 뉘였다.
"으음...!"
다음 순간 그의 입에서는 자신도 모르게 나직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그의 눈앞에 무방비 상태로 드러난 은밀월의 나체가 너무도 유혹적이었기 때문이다.
그것은 너무 아름다워 와락 끌어안고 싶은 충동을 유발시켰다.
사내라면 누구나 그런 충동을 느끼는 것이 당연할 것이다.
군검풍의 시선이 한차례 흔들렸다.
하지만 곧 그는 쓴웃음을 지으며 고개를 흔들었다.
"마황묵룡각(魔荒墨龍角)이 필요하겠군."
그는 은밀월의 상세를 치료하는 것이 더 급하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었다.
곧 그는 은밀월의 월영살검 아래 무참하게 잘려있는 묵각해망의 시신을 향해 다가섰다.
해가 서산을 넘어가고 있었다.
사위는 몸살을 앓듯 온통 붉은 기운으로 잠겨들었다.
언제라도 저녁놀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해낸다.
하지만 해질녘은 인간의 감상적인 부분을 묘하게 자극시킨다.
더구나, 고향을 떠나와 낯선 타지에서 맞이하는 황혼은 더욱 더 쓸쓸하고 외롭다.
사라마벽의 정상.
은밀월이 저녁 놀을 온 몸으로 받으며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은은한 주홍빛 놀이 드리워진 그녀의 얼굴은 더 한층 아름다워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은 무엇인가 깊은 고뇌와 번민에 잠긴 듯어둡고 침울해 보였다.
그녀의 무릎 위에는 반동강이 난 월영살검이 놓여져 있었다.
"음...!"
문득, 은밀월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무거운 신음성을 발했다.
그녀의 눈빛은 번뇌로 어지럽게 흔들리고 있었다.
아닌게 아니라, 그녀는 지금 심각한 갈등과 번민에 빠져있었다.
그것은 다름아닌 한 사내 때문이었다.
은밀월이라는 살수답지 않은 고민이었다.
"부끄러운 곳까지 모두 그 못된 사내에게 보여 버렸으니...!"
그것을 생각하자 그녀의 얼굴이 수치로 화끈하게 달아올랐다.
군검풍이 사망독장을 제거하기 위해 자신의 전신을
주물렀을 것이라는 생각을 떠올리기만 하면 잊었던 여인의 수치심이 강하게 되살아곤 했다.
그것은 견딜 수 없는 노릇이었다.
"이 상태로는 더 이상 월영살수(月影殺手)로 살아갈 수 없다.
더욱 못견딜 일은... 그 사내에게 생명의 은혜를 입었다는 것이다."
이유야 어쨋든 그녀는 군검풍에게 큰 빚은 진것만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목숨을 구함받은 크나 큰 빚이었다.
은밀월은 갈등의 눈빛으로 길게 꼬리를 드리우며 서산으로 기울어져 가는 저녁놀을 주시했다.
"다시 살수 천풍사랑으로 돌아가는 길은 단 한가지 뿐, 오늘 당한 수치와 은혜를 잊는 것이다."
무엇을 생각했는지 그녀의 두 뺨에는 살짝 홍조가 어렸다.
이윽고 그녀는 결연한 표정을 지으며 교구를 일으켰다.
아마도 무엇인가 결심을 굳힌 듯했다.
"사라동천으로 가자. 내가 지닌 단 하나뿐인 것을 그에게 주어 버리겠다.
내게 가장 소중한 것을 그에게 주어 버리면 차라리 번뇌가 사라질 것이다."
그녀는 이렇게 생각하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일단 결심이 서자 그녀는 즉시 행동에 옮기기로 했다.
스슥!
곧 그녀는 선풍을 일으키며 사라마벽을 날아 내려갔다.
헌데...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자신의 갈등과 번뇌에 몰입해 있던 그녀는
전문살수로서의 예리한 이목이 일시적으로 분산되어 있었고,
그 때문에 한쌍의 신비로운 눈이 줄곧 자신을 지켜보고 있었음을!
"...!"
그 눈의 주인은 사라마벽 맞은 편의 석벽 위에 옷깃을 펄럭이며 우뚝 서있었다.
벽색 붕조의 깃으로 짠 전포와 붕조 머리 모양의 투구,
그리고 벽색의 검신을 지닌 오척거검을 가슴에 품은 훤칠한 키의 미인!
특이하게도 눈동자가 바다처럼 짙푸른 벽안(碧眼)이고
또 투구 밖으로 한줄기 검흔이 그어진 옥용이 살짝 내비치는 것이 아주 인상적인 여전사였다.
벽안신녀(碧眼神女) 백옥상!
그녀는 바로 독황군단의 수좌인 벽안신녀 백옥상이 아닌가?
그녀가 무사했다니 실로 놀라운 일이었다.
백옥상은 일견하여 많은 어려움을 겪은 듯이 보였다.
하지만 달리 큰 상처는 없는 듯했다.
그녀는 은밀월이 사라진 곳을 바라보며 차가운 눈빛으로 중얼거렸다.
"천풍사랑...! 부끄러움을 모르는 계집이군."
그녀는 천풍사랑의 태도가 심히 못마땅한 듯 아미를 찌푸렸다.
"자신의 번뇌를 없애기 위해 황야에게 음탕한 짓을 하려하다니!"
그녀의 짙푸른 벽색의 봉목에서는 불길이 훨훨 타올랐다.
질투를 하고 있는 것일까?
그녀 또한 여인임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므로.
그녀는 싸늘한 표정으로 사라마벽 아래를 주시했다.
이어 그녀는 품에 안고 있던 벽붕단천검의 검신을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어쨌든 좋다. 여인을 밝히는 황야의 노리개로는 부족함이 없는 계집이니까.
오늘은 특별히 황야와 신방을 차리는 것을 묵인하겠다.
하지만, 그 다음에는 사부 사사독종의 원수를 갚겠다!"
그녀의 봉목에서는 뇌전같이 강렬한 빛이 흘렀다.
그녀가 쏘아보는 사라마벽의 아래에는 은밀한 하나의 석동이 위치하고 있었다.
사라마벽의 그늘에 가리진 채 은밀하게 자리한 석동.
군검풍은 지금 그곳에 있었다.
<사라동천(沙羅洞天)>
동굴의 입구는 온통 음습한 이끼로 뒤덮여 있었다.
그 이끼 사이로 위와 같은 대전체의 글이 간신히 드러나 보일 뿐이었다.
바로 이곳이야말로 그 옛날 사라천존(沙羅天尊) 북궁후량이
만독태야(萬毒太爺) 갈천후와 치열한 격전을 벌였던 곳이었다.
그들 두 사람은 결국 동귀어진하여 이곳에서 일생을 마친 것이었다.
만수종 해극패는 이곳에서 사라진경과 사라천강도를 얻었다.
하지만 곧 사해지존 융해의 압습을 받아 사십여 년간 사라마벽에 묶여 있어야 했다.
사라동천의 끝에는 하나의 석실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석실 안에는 한 명의 청년이 벽붕천익으로 어깨를 덮은 채 단정한 자세로 앉아 있었다.
청년은 물론 군검풍이었다.
지금 그는 독종철편을 들여다보며 무엇인가 중얼거리고 있었다.
"패멸살황독강류(覇滅薩況毒 流)...!"
군검풍은 독종철편(毒宗鐵片) 위에 대전체로 쓰여진
한 가지 절대독공의 구결을 암기하고 있었다.
-- 패멸살황독강류(覇滅薩況毒剛流).
바로 이것이었다.
이는 전설과 공포의 천년독공으로 먹물같이 검은 독종묵강(毒宗墨剛)이 이는 순간
일천 장내의 모든 것이 한줌의 독수로 변하고 만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전무하다.
어떤 호신강기도, 어떤 방벽도 패멸살황독강의 앞에서는 눈녹듯 녹고 만다.
그러나 이 가공무쌍한 독공 패멸살황독강에도 치명적인 약점이 두 가지있다.
그 첫째는, 패멸살황독강은 만독지정(萬毒之鼎)에도 끄덕없는
불괴지체(不壞之體)인 자만이 연마가 가능하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한 번 패멸살황독강을 펼치면
불행하게도 일 년 간은 폐인이 되어 버린다는 점이었다.
모든 공력이 패멸살황독강으로 녹아 함께 펼쳐지기 때문이었다.
패멸살황독강류의 구결을 살펴본 군검풍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이래서는 도무지 연마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아무리 절대무적의 천년독공이라 해도 말이다."
그러다가 문득 그는 한 가지 생각을 떠올렸다.
"독황연(毒皇淵)에 어떤 열쇠가 있는 것일까? 내일 독황연에 들어가 보면알 수 있겠지."
그는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이 때였다.
"...!"
군검풍은 문득 은은한 한 줄기 체향을 느끼며 고개를 돌렸다.
"밀월, 어쩐 일이오?"
그도 의아로운 눈빛으로 앞을 바라보았다.
군검풍의 앞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은밀월이 그림자같이 서 있었다.
"나는 이곳을 떠나려 해요."
은밀월은 극히 무감정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소? 하핫! 이것 서운하구료."
군검풍은 눈썹을 찡긋하며 웃었다.
그 웃음은 아주 보기 좋았다.
여인의 방심을 사정없이 뒤흔들어놓을 만큼 매력적인 웃음이었다.
은밀월은 군검풍의 그 웃음에 일순 매료당하고 말았다.
그녀는 짧은 순간 멍한 표정으로 군검풍을 바라보았다.
'이 사내의 웃음은 너무 매력적이다.
어쩌면 나는 영원히 당신의 심장을 찌르지 못할지도 모르겠다.'
이런 생각을 떠올린 은밀월의 아미가 눈에 띄게 떨림을 보였다.
그녀의 마음이 흔들리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냉정을 회복하려 애썼다.
잠시 후, 다시 무감정한 표정으로 돌아온 그녀는 건조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래서... 떠나기전 당신에게 진 빚을 갚으러 왔어요."
"빚이라고? 밀월이 내게 빚진 것이 있단 말이오?"
군검풍은 짐짓 모르겠다는 듯 시치미를 뗐다.
은밀월은 지긋이 입술을 깨물며 어렵게 말했다.
"당신은... 나의 몸을 허락도 없이 제멋대로 주물러 내게 수치를 주었어요.
하지만, 나를 사망독장에서 구해낸 것도 당신이에요.
나는 떠나기 전 그 빚을 갚으려 해요."
"그럴 필요까지는 없소. 엇!"
태연하게 대꾸하던 군검풍은 갑자기 질겁하며 당황성을 터뜨렸다.
사르르...!
갑자기 은밀월이 입고 있던 장포의 앞자락을 스스로 헤쳤기 때문이었다.
실로 대담한 행동이었다.
회포의 앞자락이 흩어지자 그녀의 옷자락 사이로 수밀도같은 유방이 불쑥 드러났다.
하지만 놀라움은 거기에서 그치지 않았다.
아니 이제부터가 시작이라고해야 옳았다.
은밀월은 이번에는 망설임없이 장포를 벗어내렸던 것이다.
그녀의 장포가 벗겨지며 뽀얗고 동그스름한 어깨가 노출되었다.
이어 분가루가 묻어날 듯 뽀얗고 투명한 속살이 그대로 드러났다.
쥐면 부러질 듯 잘룩한 세류요, 그 아래로 놀랍도록 풍성한 곡선을 이룬둔부, 기름진 아랫배...
"왜... 왜 이러는 거요?"
군검풍은 은밀월의 허벅지 사이에 자리한
방초 무성한 신비림을 보는 순간 그만 두 눈을 질끈 감고 말았다.
그것은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 그녀의 전신 구석구석을 더듬었던 것 과는
또 다른 충격과 유혹을 던져주었다.
하지만 일단 마음을 정한 은밀월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지 않을뿐더러, 그녀는 더욱 대담하게 나왔다.
"나를 거부하지 말아요. 더 이상의 치욕은 참을 수 없으니까."
그녀는 실오라기 한올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서슴없이 군검풍에게로 다가섰다.
지금껏 태연을 유지하려 애쓰던 무감정한 그녀의 음성이 문득 가늘게 떨려나왔다.
"나... 나를 편히 보내줘요. 나를 범해서... 내게서 수치심을 없애 주고,
내 몸에서 쾌락을 즐겨 당신에게 진 생명의 은혜를 갚도록 해줘요."
그것은 그녀로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대담한 행동이었다.
군검풍은 그만 말문이 막히고 말았다.
그는 미처 무어라 대답하기도 전에 코앞으로 바짝 다가온
은밀월의 뇌살적인 육체를 대하자 정신이 아찔해졌다.
군검풍의 앞으로 바짝 다가온 은밀월은
이윽고 떨리는 손길로 군검풍의 의복을 벗겨내기 시작했다.
'안 돼...!'
군검풍은 내심 이렇게 소리쳤다.
그는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욕념을 억누르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하지만 그것은 그의 의지였을 뿐, 몸은 그의 의지를 배반하고 있었다.
그것은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어쩌면 그것은 불가항력인지도 모른다.
그는 천하최고의 양강(陽强) 영약인 불사정수(不死精髓)를 몸 안에 지니고 있었다.
그런 까닭에, 보통 사내보다 무려 천배에 달하는 양강지력을 몸 속에 지니고 있는 군검풍이었다.
그것이 여체를 접하여 순음지력과 접근되자
그의 의지와는 달리 마구 기승을 부리며 날뛰는 것이었다.
그 충동은 너무 강하고 뜨겁게 휘몰아쳐와서 삽시에 군검풍의 이성을 송두리째 마비시키려 했다.
하지만 군검풍은 한 가닥 남은 이성으로 그와 맞섰다.
그는 이를 악물며 그 고통스런 욕념을 억눌러 참았다.
그러자, 은밀월의 옥용이 창백하게 변했다.
"목... 목석 같은 사람! 나... 나를 수치심에 못이겨 죽게 만들 작정인가요?"
그녀는 냉담하기만 한 군검풍의 반응에 당혹과 수치로 죽고만 싶은 심정이었다.
마침내 참지 못하고 그녀의 투명한 뺨 위로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제발... 나를 더 이상 힘들게 하지 말아요! 흐흑... 나를...!"
그녀는 군검풍의 머리를 가슴에 안으며 애원하듯 흐느꼈다.
실로 그녀에게서 처음으로 발견하는 인간다운, 아니 여인다운 모습이었다.
그녀가 흘린 눈물이 문득 군검풍의 이마 위로 한 방울톡! 굴러 떨어졌다.
바로 그 때였다.
"흐... 윽!"
은밀월은 갑자기 허리가 무쇠로 꽉 죄어지는 듯한 느낌에 흐느낌과 같은 신음성을 발했다.
갑자기 군검풍의 강건한 두 팔이 으스러져라 은밀월의 새류요를 움켜 쥐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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