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2장 뜻밖의 납치(拉致)
야훼원을 나서던 군검풍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미간을 모으며 전면을 주시했다.
여명의 하늘은 긴 잠에서 깨어나며 서서히 빛을 물결을 일으키고 있었다.
그런데, 그 여명의 동녘을 등지고 한 명의 인물이 우뚝 서 있었다.
그 인물은 등을 돌리고 있어서 그 모습은 확인할 수 없었다.
다만, 사내같이 훤칠한 체격에 날개같은
피풍을 걸치고 있는 모습만 어렴풋이 볼 수 있었을 뿐이다.
군검풍은 그 특이한 피풍을 한번 본적이 있었다.
야훼원으로 오는 길던길에 그는 벽색 깃털로 짠 장포와
그 위에 붕조 날개 모양의 피풍을 걸친 벽안(碧眼)의 여인을 만나지 않았던가?
잠깐 스치기만 했을 뿐인데도 그녀의 인상은 선명하게 군검풍의 뇌리속에 남아있었던 것이다.
군검풍은 먼저 말을 꺼냈다.
"어제 제독부로 찾아왔던게 그대였소?"
그는 여인이 누군지는 개의치 않았다.
하지만 그는 이 여인의 등장이 어제 제독부의 잠풍헌에서
괴음성과 약속했던 일과 무관하지 않은 존재라고 판단했다.
그렇게 생각한 군검풍은 거침없는 어조로 말했다.
"폭풍제왕검의 비밀을 알고 싶소.
그 대가로 신강 군마림이 아니라 지옥유계까지도 같이 가 주겠소."
"...!"
등을 돌린 여인은 아무런 말도 없었다.
잠시 두 사람 사이에는 참묵이 흘렀다.
그러다가 이윽고 신비여인이 먼저 침묵을 깨며 입을 열었다.
"후회하지 않겠어요?"
매끄럽고도 청아한 음성이었다.
그녀의 목소리는 기이하게도 상대의 마음을 끄는 신비한 힘이 담겨 있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은은한 위엄과 기품까지 서려있었다.
군검풍은 신비여인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후회라고 했소? 쓸데없는 질문을 하는군."
"좋아요. 당신이 왜 신강 군마림을 언급하는지 모르지만
폭풍제왕검의 비밀은 알려드릴 수 있어요.
나... 벽안신녀(碧眼神女) 백옥상(白玉霜)만 따라가 준다면 말이예요."
"벽안신녀 백옥상?"
군검풍은 의아한 표정으로 입 안으로 나직이 되뇌었다.
그가 어제 괴음성으로부터 들었던 말은 그것이 아니었다.
그자는 십지성궁(十地聖宮)을 언급했었던 것이다.
하지만 군검풍이 의혹의 표정으로 기억을 더듬으려 할 때였다.
스으!
갑자기 그의 코 끝으로 한 가닥 기이한 향기가 스치는 것을 느꼈다.
그와함께 아찔한 현기증이 몰려왔다.
"몽....몽혼미향(夢魂迷香)을....!"
군검풍은 자신이 맡은 향기의 정체를 알아차리고 신음했지만 이미 늦은후였다.
돌연 전신이 무기력해짐을 느끼며 그는 아득히 혼절하고 만 것이다.
벽안신녀라 자칭한 신비여인은 쓰러지려는 군검풍을 재빨리 부축하여 안아들었다.
"색(色)을 좋아하는 것이 흠이기는 하지만 사부 사사독종께서는 훌륭한 전인을 선정하셨다."
그녀는 만족스러운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는 군검풍을 안으며 슬쩍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붉게 퍼져오르는 햇살 아래 그녀의 모습이 드러났다.
탄력 있는 갈색 피부에 투명하고 신비로운 자색 눈동자를 지닌 미녀.
그녀가 머리에 쓴 붕조 모양의 투구는 아주 인상적이었다.
-- 벽안신녀(碧眼神女) 백옥상(白玉霜).
이것이 여인의 이름이었다.
그녀는 저 십패천중 사사독마갱(邪死毒魔坑) 막하 최강의 조직인 독황군단(毒皇軍團)의 수좌였다.
벽안신녀는 문득 주위를 돌아보며 외쳤다.
"구십구독왕(九十九毒王)! 주위를 엄호하라!"
스스...!
말을 마친 그녀는 군검풍을 안은 채 둥실 허공으로 떠올랐다.
그러자, 어디선가 즉각 대답이 들려왔다.
"옛! 수좌"
"녠! 맡기십시오, 누구도 수좌와 독황야(毒皇爺)의 앞길을 막지 못할 것입니다."
츠으...!
여명 속에서 몇 마디 함성과 함께 구십 구 인의 인영이 일제히 떠올라 벽안신녀와 함께 이동했다.
실로 일사불란한 동작이었다.
스스스...! 슥!
삽시에 그들의 모습은 여명 속으로 사라져 갔다.
한 칸의 넓은 석실.
"무어라고?"
콰쾅...!
찌렁찌렁한 분노의 폭갈과 함께 하나의 석탁이 무참하게 박살났다.
쩌저정...쿠쿵!
그에 이어 가공할 묵강(墨剛)이 드넓은 석실의 내부를 완전히 박살내 버렸다.
그 가운데 한 명의 괴인이 석실 가운데 우뚝 서 있었다.
그는 전신이 먹물 같은 묵강에 뒤덮인 괴인이었는데
지금 몹시 분노한 듯 전신을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 묵형천마(墨形天魔)!
이같은 이름을 지닌 그는 저 십지성궁(十地聖宮)의 삼태상(三太上) 중 막내였다.
비록 십지성궁 삼태상의 막내라고는 하지만
현재 그의 나이는 이미 이백세에 가까워 마도에서도 최고의 배분을 지닌 인물이었다.
그 뿐 아니라 그는 일신에 십패천의 종주들을 능가하는 마력을 지닌 거마이기도 했다.
그런 그가 지금 무슨 일인지 극도의 분노를 드러내고 있었다.
머리끝까지 화가 난 그의 기세는 실로 가공스러울 정도였다.
그의 앞에는 한 명의 인물이 오체복지하고 있었다.
"으... 용서하십시오. 방심하는 사이 사사독종의 제자 벽안신녀가
구십구독왕(九十九毒王)을 이끌고 군검풍 소주를 납치해 가버렸습니다."
그는 묵형천마의 무서운 추궁에 전신을 사시나무 떨 듯 하며 공포의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거대한 체격을 지닌 곱추노인. 놀랍게도 그는 구문제독부의 총관인 혈추마타(血鎚魔駝) 동극하였다.
동극하는 사색이 된 채 묵형천마의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어쩔줄 몰라했다.
아차 하는 사이 그는 그만 벽안신녀에게 어이없이 군검풍을 빼앗기고만 것이었다.
그 일로 인해 그는 묵형천마로부터 불같은 추궁을 당하고 있는 중이었다.
혈추마타는 떨리는 음성으로 황급히 둘러댔다.
"소... 소주께서 야훼원에서 주무실 줄은 몰랐습니다.
야훼원을 나서던 그분을 벽안신녀가 중도에서 가로챌 줄은 미처 생각지 못했습니다.
지금... 그들은 급속도로 남진중입니다."
동극하의 보고는 묵형천마의 노화를 더욱 부채질했다.
그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다시 귓청을 뒤흔드는 폭음과 벼락같은 노갈이 터져나왔다.
"그걸 말이라고 주절대느냐!"
꽈릉....!
다시 한 차례 가공할 묵강이 폭풍처럼 석실을 휩쓸었다.
"크... 용서하십시오...!"
콰당...!
혈추마타는 칠공에서 피를 토하며 나뒹굴었다.
하지만 그는 사색이 된 채 다시 일어나며 머리를 조아렸다.
묵형천마는 눈을 부릅뜨며 버럭 폭갈을 내질렀다.
"꼴보기 싫다! 잠형일천무영재(潛形一千無影才)를 딸려줄테니 기필코 소야(消夜)를 모셔오라!"
"예... 옛!"
혈추마타는 코가 땅에 닿도록 절하며 황급히 대답했다.
"으득! 명심해라! 소야를 모셔오지 못하면... 네놈은 목이 부러지리라!"
"명... 명심하겠습니다."
대답을 마침과 동시에, 혈추마타는 벼락같이 몸을 날려 밖으로 사라졌다.
그가 사라지고 나자 묵형천마는 신경질적인 음성으로 소리쳤다.
"잠형일천무영재! 저 얼간이를 도와라!"
그는 석실의 어딘가를 바라보며 명했다.
"옛!"
"맡기십시오!"
그러자, 즉시 우렁찬 대답이 들려왔다.
스스... 슥!
이어, 어디서 나타났는지 수많은 인영이 유령같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일사불란한 동작으로 즉시 혈추마타가 사라진 곳으로 날아갔다.
묵형천마는 그것을 주시하며 무서운 안광을 폭사했다.
"으득... 벽안신녀! 감히 천년마제(千年魔帝)가 되실 분을 납치하다니 용서치 않겠다!"
이를 갈며 극심한 분노에 치를 떠는 그의 모습은
실로 간담을 오그라붙게 만들만큼 오싹한 전율을 느끼게 했다.
쏴...아! 철썩!
넓고 푸른 망망대해, 끝간데 없는 바다가 펼쳐져 있다.
바다는 흰 포말을 일으키는 파도에 휩싸이며 몸살을 앓고 있었다.
넘실거리는 푸른 물결은 이따금씩 살아 꿈틀거리듯 회오리를 일으킨다.
그 아득한 바다, 수평선 끝으로 컴컴한 먹구름이 몰려들고 있었다.
파도가 갈수록 높아지는 것은 그때문인 듯 했다.
그런데, 점점 물결이 거세지는 바다 위에 한 채의 범선이 나타났다.
그범선은 유유히 파도를 타며 흐르고 있었다.
범선의 선수에는 푸른 색의 붕조(碧鵬)가 수놓인 하나의 깃발이 펄럭이고있었다.
그 깃발 아래, 한 명의 늘씬한 인영이 옷깃을 펄럭이며 우뚝 서 있었다.
"...!"
무거운 먹구름이 깔린 남천(南天)을 주시하고 있는 그 인영은
일신에 벽붕의 날개 같은 벽익천의를 걸치고 있었다.
거기에다 붕조머리 모양의 투구까지 쓴 훤칠한 키의 미인!
그녀는 바로 사사독종의 제자인 벽안신녀(碧眼神女) 백옥상(白玉霜)이었다.
지금 그녀는 무엇인가 깊은 생각에 잠겨 있는 듯 했다.
이따금씩 그녀의 봉목이 투구의 그늘 아래로 섬연히 빛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는 오랜 생각을 마친 듯 입술을 열었다.
"벌써 열흘... 참으로 힘든 여행이었다."
그녀는 힐끗 뒤를 돌아 보았다.
그녀의 뒷쪽은 화려한 선실이었다.
선실 안은 아늑하고 화려하게 꾸며져 있었다.
여인의 취향에 맞게 꾸며진선실 안은 마치 잘 정돈된 여인의 규방을 보는 듯 했다.
한쪽에는 은은한 벽색의 휘장이 드리워져 있었는데,
그 안쪽에는 교룡피의 화려한 침상이 놓여 있었다.
침상 위에는 한 명의 미청년이 잠들어 있었다.
창백하게 느껴질 만큼 흰 피부에 준미하기 이를데 없는 용모를 지닌 청년.
그는 다름아닌 군검풍이었다.
군검풍은 천일취(千日醉)라는 지독한 미약에 취한 상태였다.
그 때문에 열흘 내내 혼곤히 잠에 빠져 있었다.
벽안신녀는 휘장 안에 누워있는 군검풍을 바라보았다.
"독황야(毒皇爺)! 사부 사사독종께서 선택하신 당신을 지키기 위해
사독마맥 일천전사가 장렬히 전사한 것을 당신은 알고 있나요?"
그녀는 죽은 듯이 잠들어있는 군검풍을 바라보며 낮은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투구 밑으로 드러나 보이는 그녀의 투명한 자색 눈동자는 신비로운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 때였다.
"수좌(首座)! 멸신천황도(滅神天荒島)가 백 리 앞으로 가까워졌습니다."
문득 한소리 묵중한 음성이 벽안신녀의 귓전을 울렸다.
이어 돛대 위에서 일 인의 인물이 내려섰다.
그는 자색 얼굴에 고리눈을 한 장한이었는데 어깨에 다섯자 크기의 강궁을 짊어지고 있었다.
벽안신녀는 힐끗 장한을 바라보며 물었다.
"자면신장(紫面神將)! 추격자의 종적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느냐?"
자면신장이라 불린 장한은 공손히 허리를 굽히며 대답했다.
"예! 구십구독왕들이 분투하여 추격을 저지하는데 성공한 듯 합니다."
"..."
벽안신녀는 자신들이 헤쳐온 아득한 북서쪽을 주시했다.
그녀의 봉목에는 짙은 우수의 빛이 어렸다.
그녀는 여전히 눈길을 북서쪽에 둔 채 다시 자면신장에게 물었다.
"독황야를 노린 세력이 모두 몇 개라고 생각하는냐?"
"주세력은 십지성궁입니다. 십지성궁 외에,
패왕궁 휘하 의 망나니들과 화정맹의 요녀들의 종적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또 한 부류의 초강자들의 종적도 확인되었습니다."
"....?"
자면신장은 식은 땀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들은 모두 구백여 명으로 개개인의 무공이 구십구독왕보다 뛰어난 자들이었습니다.
북경을 떠날 때부터 암중으로 이곳을 따라 넓게 포위망을 펼쳐오다가
갑자기 황하 포구에서 추격을 중단했습니다."
그의 말을 듣고 있던 벽안신녀의 눈빛이 섬연하게 빛났다.
'설마... 폭풍세가의 초강자들마저 독황야를 주시하고 있었단 말인가?'
그녀는 일순 의혹과 신비가 얽힌 눈으로 군검풍을 돌아보았다.
'도대체 저 사람은 어떤 비밀을 지니고 있는 것일까?
폭풍세가의 종사지령(宗師之令)까지 지니고 있다니...!'
벽안신녀는 도무지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내심 염두를 굴렀다.
그녀는 단지 사부인 사사독종이 군검풍에게 주입해준 응혈천독단(凝血千毒丹)의 냄새만으로
군검풍을 추적하여 납치했을 뿐이다.
그가 바로 저 천년제일무가인 폭풍세가의 소가주임은 꿈에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헌데 벽안신녀가 염두를 굴리고 있을 때였다.
"...!"
죽은 듯이 감겨있던 군검풍의 눈이 서서히 떠졌다.
동공이 열린 그의 눈은 천천히 주위의 경물을 살피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내 그의 안면에는 의혹의 빛이 떠올랐다.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뜻밖에도 아주 낯선 곳임을 확인한 것이었다.
시종 군검풍에게서 눈길을 떼지 않던 벽안신녀는
그가 깨어났음을 알아 차리고는 흠칫하는 기색을 지었다.
군검풍이 중독된 미향은 천일취라는 것으로 일단 중독되면
아무리 내공이 고강한 내가고수라고 하더라도 최소한 한달은 깊은 잠에 빠지고 만다.
헌데 군검풍은 그 천일취에 중독되고도 불과 열흘만에 깨어난 것이다.
하지만 벽안신녀는 곧 안색을 가다듬으며 선실로 들어섰다.
그리고는 침상가로 다가서더니 갑자기 군검풍의 발치 아래 한쪽 무릎을 꿇는 것이 아닌가?
"정신이 드셨나요?"
"...!"
군검풍은 갑작스런 그녀의 태도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이내 그는 담담한 눈빛으로 벽안신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여기는 어디오?"
먼저 그것이 궁금했던 것이다.
"이곳은 남해(南海)예요."
벽안신녀의 대답에 군검풍은 검미를 찌푸리며 다시 의아한 빛을 떠올렸다.
"남해? 신강(新疆)의 군마림(群魔林)이란 곳으로 가는 것이 아니란 말인가?"
벽안신녀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공자께선 지금 군마림이 아니라 멸신천황도(滅神天荒島)란 곳으로 가고계시는 중이에요."
"멸신천황도?"
군검풍은 처음 들어보는 생소한 이름에 의아함을 느끼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벽안신녀는 별다른 감정의 드러내지 않는 담담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그곳에 독황연(毒皇淵)이란 곳이 있어요.
독황야(毒皇爺)가 되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곳에 드셔야 해요."
"독황연? 독황야?"
군검풍은 미간을 찌푸리며 씁쓸하게 중얼거렸다.
비로소 그는 무엇인가 일이 잘못되었음을 깨달았다.
'내가 이 여인을 폭풍제왕검을 준 그 신비 인물로 착각한 모양이구나!'
그의 머리는 빠르게 회전하며 전후사정을 추정해냈다.
하지만 어찌하랴? 이미 일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러 있었다.
지금와서 다시 중원으로 돌아간 다는 것은 무리였다.
군검풍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그의 의도는 어이없이 빗나가고 지금은 정체조차 알 수 없는 여인에 의해
이곳 남해까지 이끌려온 자신을 생각하면 한심한 기분마저 드는 것이었다.
하지만 군검풍은 이내 마음을 냉정하게 가라앉혔다.
그는 어쨋든 이 예기치 않은 상황에서 벗어나야만 했다.
그는 벽안신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대는 누구요?"
벽안신녀는 그의 물음에 공손히 고개를 숙이며 대답했다.
"소녀는 백옥상(白玉霜)이라고 해요.
사사독마갱(邪死毒魔坑)의 제자로 강호에서는 벽안신녀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지요.
하지만 소녀의 진정한 신분을 밝히자면 앞으로 독황야의 시녀(侍女)로 내정되어 있어요."
그녀의 대답은 실로 놀랍고 뜻밖이었다.
-- 벽안신녀 백옥상.
그녀는 사사독마갱의 갱주인 사사독종의 제자로써
저 십지마련의 십대마맥중 사독마맥(死毒魔脈)의 직손이었다.
당당한 천하제일의 여전사인 그녀는 오연하고 도도한 성격으로 천하인을 오시해 왔다.
그런데 그녀 스스로 독황야,
즉 군검풍의 시녀를 자처하는것이었다.
군검풍은 예기치 못한 백옥상의 대답에 실소를 흘렸다.
"훗! 이거야말로 놀랍군. 당당한 독황군단의 총수를 시녀로 두다니... 내게는 너무 과분하오."
이어, 그는 침상에서 내려와 선수로 다가섰다.
그러자 백옥상과 자면신장은 공손히 그의 뒤를 따랐다.
군검풍은 뒷짐을 지며 멀리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먹구름이 잔뜩 몰려오고 있는 수평선은 아득히 멀어만 보였다.
그의 눈빛이 아련한 빛으로 젖어들었다.
세찬 해풍에 그의 옷깃이 제멋대로 펄럭이고 있었다.
"바람이 거칠어요."
백옥상은 자신의 벽붕천익을 벗어 군검풍을 감싸주었다.
"고맙소!"
군검풍은 고개를 끄덕이며 싱긋 미소지었다.
그의 얼굴에 오랜만에 떠오른 미소는 참으로 보기 좋았다.
"...!"
투구를 쓴 백옥상의 옥용에 언뜻 홍조가 떠올랐다.
군검풍의 미소가 그녀에게 던진 느낌은 신선하고 인상적이었다.
'한 줄기 미소로 돌같이 굳어진 나 백옥상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시다니...!'
그녀는 가슴이 설레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영원히 흔들리지 않을 것 같던 그녀의 눈빛이 묘한 파문으로 흔들렸다.
하지만 군검풍은 백옥상의 이같은 변화를 아는지 모르는지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오느라 희생이 많았겠군."
그 말에 백옥상은 흠칫했으나 솔직히 시인했다.
"그래요. 하지만..... 독황군단의 일천전사의 희생으로 위기를 해소했어요."
그녀의 말을 듣고 있던 군검풍은 침중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틀렸소. 가장 큰 위험이 아직 해소되지 않고 있소."
백옥상의 눈빛이 긴장과 의혹으로 굳어졌다.
"가장 큰 위험이라니요?"
"세상에서 가장 끈질긴 살수가 나를 노리고 있소!"
"천풍사랑(天風死狼)!"
백옥상의 교구가 한 차례 떨림을 일으켰다.
그와함께, 한 줄기 전율의 빛이 그녀의 봉목을 스쳤다.
군검풍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친구는 모든 추격이 단절되어 자기만이 손을 쓸 때를 기다리고 있소."
"...!"
백옥상과 자면신장은 은은한 공포의 기색을 지으며 빠르게 범선의 주위를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들의 모습에 군검풍은 설레설레 고개를 내저었다.
"아니오. 그는 이 배에 숨는 따위의 치졸한 방법은 쓰지 않을 것이오.
그는 살수지만 늘 정공만을 취해 왔소.
그가 공격해 온다면 아마도 저 바다로부터일 것이오."
"바다!"
백옥상은 신음처럼 나직히 부르짖었다. 그와 함께 그녀는 홱 고개를 돌렸다.
콰르르...쏴아!
바다 저편에서 폭풍이 밀려오고 있었다.
드높은 바람과 함께 파도가 십여장씩 철썩철썩 몰아치고 있었다.
그런데 폭풍이 몰려오는 바다를 주시하던 자면신장은 갑자기 안색이 홱변했다.
"저... 저기...!"
그는 경악의 눈으로 전면을 가리켰다.
군검풍과 백옥상의 시선도 이미 전면을 향하고 있었다.
콰콰... 쿠르릉...!
쏴아!
파도가 미친 듯 기숭을 부리며 날뛰는 가운데,
한 척의 편주(片舟)가 바람을 등진 채 무서운 속도로 미끄러져 오고 있었다.
그것은 믿을 수 없는 속도로 범선을 향해 쇄도해 들어왔다.
처음 보았을 때 편주는 십여 리 밖에 있었다.
그런데, 삽시에 그것은 백여 장 밖으로 다가서고 있지 않은가?
그 편주 위에는 회포를 걸친 한 명의 검사가 우뚝 선 채 범선쪽을 주시하고 있었다.
표정 없는 창백한 안색에 음울한 회색 눈을 지닌 검수.
바로 천풍사랑(天風死狼)이었다.
그, 아니 그녀를 일컬어 저주의 인간 사냥꾼이라고들 한다.
그런 그녀가 여자라는 것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군검풍은 그녀의 비밀을 알고있는 몇 되지 않는 사람중의 하나였다.
천풍사랑은 감정이 죽은 회색의 눈을 번뜩이며 무서운 기세로 다가서고있었다.
백옥상은 그 모습에 잘근 입술을 깨물고는 급히 자면신장을 향해 명했다.
"자면신장! 파천신전(破天神箭)을 다오!"
"옛!"
자면신장은 대답과 함께 한 자루 거대한 강궁(强弓)과
푸른 빛이 도는 다섯 자 길이의 강전을 백옥상에게 내주었다.
파천신전(破天神箭).
그것은 사독마맥 비전의 파천신병이었다.
그 안에는 백 가지의 독과 천근 화약에 해당되는 화기가 비장되어 있었다.
능히 작은 산 하나를 부술 엄청난 위력이 담겨 있는 것이다.
백옥상은 무서운 눈으로 천풍사랑을 노려보며 교갈을 터뜨렸다.
"천풍사랑! 그대는 독황야를 따라오지 말았어야 했다!"
패...앵!
그녀의 수중에 들린 무쇠로 만들어진 강궁이
다섯 자 길이의 화살을 머금은 채 반원처럼 휘어졌다가 .
쐐애액!
그러다가 시위가 놓여지자 파천신전이 푸른 번개인 양 뻗어나가며
백여장까지 쇄도해 들어오고 있는 천풍사랑을 향해 일직선으로 무찔러갔다.
거의 동시에 천풍사랑의 괴검(怪劍)이 번쩍 빛을 발하며 파천신전을 후려쳤다.
콰르릉...!
다음 순간 요란한 굉음과 함께 거창한 불길이 천풍사랑을 뒤덮었다.
파천신전에 실린 독기와 화염이 그대로 폭발한 것이었다.
"되었다!"
그 광경을 주시하던 백옥상은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투구밑으로 드러난 그녀의 옥용에는 비로소 안도의 미소가 떠올랐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을 뿐 그녀의 옥용은 이내 경악의 빛으로 물들었다.
"저... 저럴수가...!"
그녀는 믿을 수 없는 듯 봉목을 한껏 치켜떴다.
화르르...!
콰아!
놀랍게도 편주는 타오르는 화염 속에서 빠르게 빠져나와
범선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천풍사랑은 여전히 무심한 회색 눈을 빛내며 편주 위에 우뚝 서 있었다.
"지... 지독하다!"
백옥상은 질린 눈빛으로 고개를 흔들었다.
하지만 그녀의 입에서는 이내 무서운 교갈이 터져나왔다.
"밀어붙여라! 저 편주를 갖고 어떻게 이 독황대선(毒皇大船)에 맞서는지두고 보겠다!"
선부(船夫)들에게 명령을 내린 그녀는 다시 자면신장을 향해 손을 뻗었다.
"무기를 다오!"
"옛!"
자면신장은 한 자루의 오척 장검을 그녀에게 건네주었다.
그것은 전체가 푸른 빛이 돌았으며 검신에 푸른 붕조의 문양이 새겨진 거검이었다.
-- 벽붕단천검(碧鵬斷天劍)!
이는 벽붕삼보(碧鵬三寶)라는 것들 중의 하나였다.
백옥상은 사독마맥뿐 아니라,
우연한 기연으로 대막의 전설적 상고문파인 벽붕성(碧鵬城)의 진전도 이어받은 상태였다.
벽붕성은 변황제일강파인 적붕존성(赤鵬尊城)과 함께
저 고금사대무벌중 하나인 천붕애(千鵬崖)에서 연원한 문파였다.
그녀가 걸치고 있던 벽익천의는 벽붕무보(碧鵬武寶)와 함께 벽붕성의 삼대지보에 든다.
백옥상은 자기 키만한 거검 벽붕단천검을 쳐들며 외쳤다.
"독황야! 뒤로 물러서세요!"
그녀는 군검풍의 앞을 가로막아 섰다.
콰콰...!
어느새, 천풍사랑이 탄 일엽편주는 범선의 오십 장까지 쇄도해 들고 있었다.
"...!"
군검풍은 검미를 찌푸리며 천풍사랑과 그가 탄 편주를 주시했다.
그런데, 갑자기 그는 흠칫하며 안색이 굳어졌다.
그의 후각으로 불현듯 한 줄기화약내음이 느껴졌던 것이다.
군검풍은 안색이 홱 변했다.
'아차! 천풍사랑의 배에는 화약이 실려 있다.
그는 편주를 충돌시켜 독황대선을 침몰시킬 생각이다!'
직감적으로 그것을 깨달은 그는 백옥상을 향해 다급한 외침을 발했다.
"신녀! 천풍사랑의 배에는 화약이 실려 있소. 접근시키면 안 되오!"
"...!"
그 말에 백옥상의 안색이 급변했다.
그녀는 당황하며 자면신장에게 외쳤다.
"빨리 배를 돌려라!"
하지만 그보다 빨리 천풍사랑의 음울한 음성이 그들의 귓전을 파고들었다.
"늦었다! 군검풍!"
천풍사랑의 음울한 일성이 귓전을 파고들었다.
콰...아!
눈 깜짝할 순간, 그녀의 소주는 섬전처럼 독황대선의 선수로 육박해 들었다.
바야흐로 두 채의 배가 충돌하기 직전이었다.
촤아...!
두 배가 충돌하기 직전 천풍사랑의 몸은 수직으로 치솟아 올랐다.
"선미로 물러서랏!"
천풍사랑이 날아오르는 것을 본 백옥상은 자면신장을 향해 외치며
자신도 군검풍을 잡아채면서 뒤로 날아갔다.
콰콰쾅!
그녀가 몸을 띄운 직후 엄청난 굉음이 바다를 뒤집어 엎을 듯 터져 올랐다.
다량의 화약을 실은 천풍사랑의 쪽배가 그대로 백옥상의 독황대선에 부딪힌 것이다.
엄청난 폭음과 화염이 치솟고 뒤이어 처절한 비명이 잇달았다.
"크...아악!"
"아악!
그 비명은 독황대선의 선수가 박살나며 미처 피하지 못한 백옥상의 수하들이 지른 것이었다.
끔찍하게도 그들은 전신의 몸이 파편처럼 산산이 흩어져 산화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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