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장 황금과 미녀의 유혹(誘惑)
군검풍은 묵묵히 동편으로 떠오르는 일륜을 주시하고 있었다.
"만금우, 그가 무엇 때문에 나를 보자고 한 것일까?"
그는 짐작이 가지 않는다는 듯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 천금공자(千金公子) 만금우!
천금왕부(天金王府)의 소부주로 군검풍과 함께 벽라공주의 부마자리를 다투었던 그가
뜻밖에도 군검풍에게 만나기를 청해왔던 것이다.
군검풍은 만금우를 만나기 위해 이곳 천단에 나온 것이었다.
군검풍이 의아한 표정으로 생각에 잠겨있을 때였다.
"소형제! 누구를 기다리는가?"
갑자기 군검풍의 등 뒤에서 묵직한 일성이 들려왔다.
"...!"
군검풍은 흠칫하며 돌아섰다.
그의 뒤에는 언제 나타났는지 한 명의 자포(紫袍)의 중년인이 우뚝 서 있었다.
육 척의 훤칠한 키에 청수한 용모를 지닌 인물.
그의 전신에서는 숨막힐듯한 패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그는 형형한 시선으로 군검풍을 주시하고 있었다.
'예삿인물이 아니다!'
군검풍의 두 눈에 빠르게 이채가 스쳤다.
"허허! 사색을 깼다면 용서하게. 나는 남궁무외(南宮武畏)라 하네."
자포인이 먼저 너털웃음을 터뜨리며 군검풍에게 포권했다.
그러는 가운데도 그의 시선은 군검풍을 뚫어지게 주시하고 있었다.
군검풍은 그 강렬한 눈빛에 내심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십절천마만큼 강한 눈빛이다. 이 사람은 대체 누구란 말인가?'
그의 놀라움은 아주 컸다.
이백 년 전에 이미 천하무적이었던 십절천마후만큼 가공할 눈빛을 지닌자가
당세에 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던 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군검풍은 그런 감정을 전혀 겉으로 내색치 않았다.
그저 그는 담담한 표정이었다.
"소생은 군검풍이라 합니다."
그는 자포인 남궁무외를 향해 정중하게 포권했다.
그 말에 남궁무외는 흠칫하는 기색을 지었다.
"군검풍! 그렇다면 자네가 질풍공자라 불리는 그 청년이란 말인가?"
남궁무외의 두 눈에서 일순 화산이 폭발하듯 강렬한 안광이 폭사되었다.
태연한 신색을 유지하던 군검풍마저 심혼이 얼어붙을 정도였다.
하지만 군검풍은 이내 안색을 가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미생이 북경의 망나니로 불리는 군모가 맞습니다."
"망나니라... 우핫핫...이거 반갑군! 천하의 큰 망나니인 남궁무외가
오늘 북경의 작은 망나니를 만나게 되다니 말일세!"
남궁무외는 군검풍의 대답에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그는 아주 흡족한 표정을 지으며 군검풍을 주시했다.
군검풍의 두 눈에 이채가 스쳤다.
'자칭 망나니라 하다니...
이런 인물은 최고의 효웅이 아니면 가장 뛰어난 영웅(英雄)일 것이다.'
그는 나름대로 그렇게 추측하며 중얼거렸다.
하지만 내심의 생각을 감추며 그는 빙긋 미소지었다.
"망나니라...천하에 소생말고 또 다른 망나니가 있다니 뜻밖입니다.
어쨋든 만나게 되어 반갑습니다."
"핫하... 좋아! 오늘 처음 만났으나 자네와는 이야기가 통할 것 같은 느낌이 드는군.
어떤가, 이 기회에 호형호제(呼兄呼弟)하는 것이?"
남궁무외는 거리낌 없이 선뜻 이렇게 제의했다.
그의 기분은 몹시 유쾌해 보였으며 솔직하고 화통한 성격이 그대로 엿보였다.
군검풍은 그의 뜻밖의 제의에 흠칫했다.
그는 내심 빠르게 생각을 굴렸다.
'효웅이든 영웅이든 한 번 사귀어 볼만한 인물이다.'
이렇게 판단한 군검풍은 즉시 마음의 결정을 내렸다.
"소제 검풍이 형님께 인사드립니다."
그는 망설임없이 남궁무외를 향해 넙죽 절했다.
남궁무외는 몹시 흡족한 듯 연신 대소를 터뜨렸다.
"핫하... 나 남궁무외가 흥복이 터졌군.
천하제일재(天下第一才)를 아우로 두게 되다니 말일세."
그는 호쾌한 표정으로 역시 군검풍을 향해 마주 절했다.
상례 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서로를 주시했다.
남궁무외는 문득 감회 어린 표정을 지으며 말했다.
"하하... 감회가 새롭군. 거친 세상을 사고뭉치로 살아온 우형에게 자네같은 아우가 생기다니..."
"부족한 점이 많습니다. 형님께서 지도편달해 주시기 바랍니다."
군검풍의 겸손한 말에 남궁무외는 고개를 내저었다.
"그것은 내가 할 소리네. 우형은 자네를 비장의 변수로 간직할 것이네."
그는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모종의 결심을 하는 듯했다.
'비장의 변수라... 많은 의미가 담긴 소리다!'
군검풍은 남궁무외의 말을 입안으로 뇌까려 보았다.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생각난 듯 물었다.
"형님께서는 천단에 무슨 일로 오셨습니까?"
남궁무외는 두 눈을 번뜩 빛내며 대답했다.
"우형은 한 명의 노독물(老毒物)을 추격중이라네."
"노독물이라니요?"
그는 의아한 표정으로 남궁무외를 바라보았다.
"사사독종(邪死毒宗)이란 자일세.
그 자는 천하를 망칠 독계(毒計)를 진행하다가 우형에게 발각되어 이곳 연경에 스며들었다네."
"사사독종?"
군검풍은 미간을 모으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런데, 바로 이 때였다.
"우우...!"
돌연 천단의 동편에서 웅후한 장소성이 들려왔다.
남궁무외의 두 눈이 번갯불처럼 번쩍 빛났다.
"사사독종의 종적을 발견한 모양이군."
그는 장소성이 들려오는 쪽을 주시하며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품속에서 하나의 작은 깃발을 꺼내더니 군검풍에게 쥐어주었다.
"이것은 천패번(天覇幡)이라는 것이네. 아우를 만난 기념으로 주겠네."
그것은 자색을 띈 깃발로 길이는 한 자 남짓, 깃폭은 오촌 정도되어 보였다.
그 자색번의 중앙에는 다음과 같은 글자가 선명하게 재겨져 있었다.
<패(覇)>
"무림에 나오거든 패왕궁(覇王宮)의 수하들에게 그것을 보이면 도움을 줄것이네. 그럼 다시 보세!"
남궁무외는 길게 설명하지 않았다.
그는 간단하게 그 한 마디를 남긴 후 이내 선풍을 끌며 삼백 장 밖으로 날아갔다.
'무서운 경공이다.'
군검풍은 그 모습에 감탄하며 내심 찬바람을 들이켰다.
이어, 그는 수중에 있는 천패번을 내려다 보았다.
'천패번... 패왕궁?'
그는 천패번을 만지작거리며 내심 중얼거렸다.
패왕궁이란 이름을 어디선가 한 번 들어본 것 같았지만 언뜻 떠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바로 그 때였다.
"크후웃! 네놈은 패왕궁(覇王宮)의 궁주 남궁애송이의 끄나불이냐?"
갑자기 한가닥 음냉하고 잔혹한 음성이 군검풍의 등 뒤에서 들려왔다.
군검풍은 돌연히 들려온 그 음성에 흠칫 몸이 굳어졌다.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세우면서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오늘은 기이한 날이군. 기인들을 연이어 만나다니...!'
언제 나타난 것일까?
그의 삼 장 앞에는 한 명의 괴노인이 가부좌를 튼 채 무서운 눈으로 군검풍을 주시하고 있었다.
강시를 연상케 하는 깡마른 체격에 갈가리 찢긴 너덜너덜한 남삼을 걸친 괴인이었는데
그의 인상은 실로 강팍하고 음산해 보였다.
기이하게도 그의 전신피부는 남빛을 띠고 있었으며, 움푹 패인 두 눈마저 남색이었다.
괴노인의 남색의 피부와 눈빛을 본 순간 군검풍은 번쩍 뇌리에 떠오르는것이 있었다.
'독공을 익힌 인물이다. 그렇다면...!'
생각이 여기에 미치자 곧 그는 입을 열었다.
"노인장이 사사독종(邪死毒宗)이시오?"
"캇! 잘 알면서 묻다니 괘씸한 놈이구나.
바득! 노부가 곧 죽을 목숨이다만 남궁 애송이의 끄나불을 한 놈이라도 더 죽이고 죽겠다."
남색 눈들 지닌 괴인, 즉 사사독종은 이를 갈며 잡아먹을 듯이 군검풍을 노려보았다.
군검풍은 그의 기세에 움찔하며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노인장, 오해요! 나는 남궁노형을 오늘 만났소."
그러나 사사독종은 막무가내였다.
"캇! 듣기 싫다. 죽어랏, 패멸독황인(覇滅毒皇印)!"
그는 버럭 일갈을 내지르며 다짜고짜 깡마른 좌수를 내쳤다.
쩌...엉!
그의 손에서 섬뜩한 자색독강류(紫色毒剛流)가 뻗어나오며 군검풍의 가슴을 후려쳤다.
꽈릉...!
군검풍은 미처 피하고 어쩌고 해볼 겨를 조차 없었다.
쿵!
그는 가슴에 일격을 얻어 맞으며 그대로 삼 장 밖으로 나뒹굴었다.
"보기보다는 별 볼일 없군. 엇!"
사사독종은 대수롭지 않은 표정을 짓다말고 갑자기 흠칫놀랐다.
군검풍은 그가 내친 일격에 막대한 충격을 받고 혼절한 상태였다.
그런데, 어찌된 일인지 그의 몸은 겉으로는 전혀 변화가 없어 보였다.
무쇠도 얼음처럼 녹여버릴 수 있는 사사독종의 지독한독공을 맞고도 멀쩡한것이었다.
사사독종은 믿을 수가 없었다.
"이런 엉터리 같은 일이....! 노부의 패멸독황인(覇滅毒皇印)을 맞고도 중독되지 않다니...!"
그는 당혹함과 경악을 금치못했다.
이미 사색이 깃든 그의 얼굴은 불신의 빛으로 가득차 있었다.
그는 급히 군검풍의 맥문을 쥐었다. 다음 순간 그의 안면이 괴이하게 일그러졌다.
"이... 이럴 수가! 이 나이에 불사지체라니...!"
맥문을 쥔 그의 손이 눈에 띄게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군검풍이 불사용수를 복용하여 이미 불사지체가 된 것을 알아차린 것이었다.
당혹과 경악의 빛을 감추지 못하던 사사독종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그러다니 이내 그의 눈빛이 야릇한 빛으로 번뜩였다.
"어...어쩌면 우리 사독마맥(死毒魔脈)은 이놈으로 인해 구원을 받을지도 모른다.
불사지체를 지녔으니 독황연(毒皇淵)에 들어 전설의 천년독공(千年毒功)을 완성할 수 있을것이다."
죽음의 그림자가 완연한 그의 강팍한 얼굴에 어떤 결의의 빛이 어렸다.
"녠! 어차피 나는 오래 살기는 틀린 몸이다.
이제 이놈에게 사독마맥의 운명을 걸어보는 수밖에 없다!"
그는 재빨리 품속에서 한 장의 철편(鐵片)을 꺼내 군검풍의 가슴에 넣어주었다.
이어, 그는 남빛 안광을 번뜩이며 중얼거렸다.
"흐흣...노부의 살황독강(薩荒毒 )을 주입시켜주면...
독황군단(毒皇軍團)의 아이들이 이놈을 발견하여
멸신천황도(滅神天荒島)의 독황연으로 데려갈것이다.
그 다음은 이 어린놈에게 달려있다.
이 놈이 독종철편(毒宗鐵片)의 비밀을 풀어 천년독공을 연성하길 빌 뿐이다."
그는 득의의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다음 순간 기이한 일이 벌어졌다.
츠으... 우르르!
갑자기 사사독종의 이마 위로 하나의 신비한 자색구슬이 떠올랐던 것이다.
-- 천독응혈단(千毒凝血丹).
그것은 만독을 흡수하여 절대독인경(絶對毒人境)에 이른 자만이
만들 수 있는 일종의 내단(內丹)이었다.
그 것에는 사사독종의 모든 독공과 오갑자의 내공이 담겨져 있었다.
따라서, 천독응혈단을 상실하면 그는 더 이상 살 수가 없다.
이미 그는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을 시작한 것이었다.
"녠! 너를 믿는다... 애송이!"
츠으...!
천독응혈단은 사사독종의 이마를 떠나 서서히 군검풍의 코로 스며 들어갔다.
스스...!
이어 그것은 군검풍의 호흡에 따라 안개같이 흩어지며 그의 몸 속으로 빨려들어 가는 것이 아닌가?
군검풍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 또 다시 크나 큰 기연을 얻고 있는 것이었다.
백 년을 고련해야 얻을 수 있는 절대독공과 오갑자의 내공을 동시에 얻었으니,
이는 일생을 통틀어 한 번 있을까 말까한 엄청난 기연이 아닐 수 없었다.
이윽고, 천독응혈단은 완전히 군검풍에게 흡수되었다.
"녠... 되었군!"
그런데, 다음 순간 실로 놀라운 광경이 벌어졌다.
츠으...!
사사독종이 신형이 갑자기 휘청하더니
그의 팔다리가 거짓말처럼 한 줌의 독수로 녹아드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무섭고도 끔찍한 광경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사사독종은 이미 예정된 죽음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는 몸이 녹아드는 가운데도 마지막 한 가닥 기대를 버리지 않았다.
"녠... 남궁무외! 그놈이 보낸 저주스런 인간 사냥꾼,
천풍사랑(天風死狼)보다 먼저 독황군단의 아이들이 이놈을 발견하기를 바랄 뿐...!"
푸시시...!
마침내 그의 하체가 완전히 흐물흐물 녹아들었다.
"하늘이여... 우리 사독일맥을 도우소서!"
그 한 마디가 끝남과 동시에, 사사독종의 신형은 삽시에 머리까지 모두 녹아버렸다.
그는 한 줌의 독수만을 남기고 세상에서 사라져버린 것이었다.
괴이하고도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광경이었다.
그리고 차 한 잔 마실 시각이 흘렀을까?
스슥!
문득 한 줄기 선풍이 일며 허공에서 한 명의 미청년이 날아내렸다.
"엇! 이런 곳에 잠들어 계시다니...!"
그는 내려서자마자 고개를 갸웃하며 군검풍에게로 다가섰다.
천금공자 만금우,
바로 그였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그는 여인 같이 고운 아미를 찌푸리며 혼절해 있는 군검풍을 내려다 보았다.
그 모습은 미인을 무색케 할 정도로 아름다웠다.
"어쨋든 잘됐다. 오히려 상황이 좋아졌으니...!"
이윽고 그는 손을 뻗어 군검풍을 안아 들었다.
그 순간, 그의 하얀 두 볼이 발그레하게 물들었다.
그것은 흡사 수줍음을 느끼는 여인의 모습과 다를 바가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후훗...어쨋든 당신은 나의 손을 벗어나지 못해요, 검풍!"
어찌된 일인지 만금우의 목소리가 갑자기 돌변했다.
놀랍게도 그것은 은쟁반에 옥구슬이 구르는 듯 청아한 여인의 교성이 아닌가!
그렇다면 만금우는 남장여인이었단 말인가?
만금우는 봉목을 빛내며 알 수 없는 음성으로 혼자 중얼거렸다.
"후후... 당신은 금황벌(天金魔流)의 전사가 되셔야 해요.
그래서 소녀 대신 남궁무외에게 당한 금황벌의 원한을 반드시 갚아주셔야 해요."
스슥!
이윽고, 그녀는 군검풍을 안은 채 허공으로 떠오르더니 바람같이 사라졌다.
다시 일 다경이 흘렀다.
휘...이잉!
한 줄기 추풍이 장내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와 함께, 추풍에 실려 천단 위로 한 명의 인물이 환상처럼 나타났다.
그는 그리 크지 않은 키의 회포인이었다.
그의 인상은 아주 괴이하고 특이했다.
그의 얼굴은 마치 흰 칠을 한 듯 창백한 백면(百面)이었다.
그 희디 흰 얼굴에서는 전혀 표정을 찾아 볼 수 없었다.
또한, 그의 눈은 인간이 지닌 감정을 한 올도 담고 있지 않았다.
그것은 감정이 죽은 눈(死眼)이었다.
그의 눈을 보고 있자면 섬뜩한 공포로 절로 몸이 오그라붙을 지경이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그의 전신에서는 음울한 잿빛 분위기가 스물스물 피어오르고 있었다.
그것은 스산한 죽음의 냄새와도 같은 것이었다.
회포인은 크고 작은 두 자루 기형검을 허리에 차고 있었다.
"....!"
그는 깊게 가라앉은 음울한 시선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그는 지극히 무심한 눈을 한쪽에 고정시켰다.
"이곳에서 죽었군, 사사독종...!"
툭!
그는 사사독종이 한 줌의 독수로 녹아내린 자리를 발견하고는
그곳에 나뒹구는 돌을 발끝으로 툭! 찼다.
이어 그는 무심한 눈으로 힐끗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이미 햇살이 퍼진 가을 하늘은 파랗게 개어 있었다.
"그러나... 살황독강의 냄새가 끊이지 않은 것을 보면 이 노독종은 죽기전에
누군가에게 살황독강과 독종철편을 전하고 죽은 것이 분명하다."
실로 무서운 추리력이었다.
회포인은 사안을 내리깔며 건조한 음성으로 다시 중얼거렸다.
"권태스럽군. 또 한 놈을 죽여야 하다니...!"
그는 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어쨋든 좋다. 독종철편만 회수하여 패왕궁에게 전하면 나 천풍사랑(天風邪狼)의 임무는 끝다니까!"
-- 천풍사랑.
이 이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 이름이야말로 가장 집요하고 가장 공포스러운 죽음의 상징이었다.
회포인 천풍사랑은 미간을 가볍게 모으며 중얼거렸다.
"북경쪽으로 살황독강의 냄새가 이어지고 있군."
스스스...!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의 신형은 환상처럼 사라졌다.
실로 귀신과도 같은 놀라운 경공이었다.
"이제... 정신이 드세요?"
잔잔하고도 아리따운 여인의 음성에 군검풍은 비로소 정신이 들었다.
그의 귓전을 울린 여인의 음성은 황홀하도록 곱고 해맑았다.
그 음성이 군검풍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노을처럼 화사한 미인의 옥용이었다.
그녀는 우아한 백의궁장을 걸치고 있었다.
나이는 이십 전후로 보였으며 완숙한 아름다움이 무르익은 모습이었다.
그녀의 전신에서는 난초같이 은은한 기품이 흐르고 있었다.
게다가, 미모 또한 빼어나기 이를 데 없어 가히 경국지색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었다.
희고 고운 피부에 어디 한 군데 흠잡을 곳 없이 단아하고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여인.
그녀의 매력은 동작 하나, 심지어는 눈빛속에서도 황홀하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군검풍은 백의궁장녀의 존재에 의아함을 느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그는 자신이 누워있는 곳이 어딘지 알고 싶었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의혹의 음성으로 물었다.
"소저, 이곳은 어디요?"
그 말에 백의 궁장녀는 그윽한 음성으로 다소곳이 대답했다.
"긴장하실 필요 없어요. 이곳은 천금왕부(天金王府)예요.
군공자께서 천단에 쓰러져 있는 것을 금우 동생이 모시고 왔어요."
"...!"
군검풍의 눈에 순간적으로 번뜩 이채가 스쳤다.
"소저께서 바로 금황선(金皇仙) 만소저시구료."
백의궁장녀는 군검풍의 말에 옥용을 살짝 붉히며 고개를 숙였다.
"남들이 금황선이란 과분한 이름으로 불러주는 것이 못내 부담스러워요."
그녀의 태도는 지극히 겸손했다.
-- 금황선(金皇仙) 만금예(萬金霓).
야훼서시 백리월영, 병서시 군대려,
그리고 벽라공주와 함께 경성사대미인(京城四大美人)에 드는 절세가인이었다.
그녀는 자타가 공인하는 천하제일부호(天下第一富豪)인
천금왕야(天金王爺) 만금해(萬金海)를 아버지로 둔 여인이었다.
군검풍은 검미를 모으며 내심 생각을 더듬어 보았다.
'사사독종, 그 괴노인의 공격을 받고 정신을 잃었었다.
그 노인은 어찌되었을까?'
그는 사사독종이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해졌다.
만금예는 생각에 잠긴 군검풍의 모습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 사람이야말로 절대 놓칠 수 없는 잠룡(潛龍)이다!
모든것을 희생해서라도 꼭 잡아야 한다.
패왕궁과 직접 맞서 싸울 힘이 없는 우리 금황벌(金皇閥)은
이 사람을 의지해야만 패왕궁과 맞설 수 있다!'
그녀는 내심 그런 생각에 골몰해 있었다.
이때, 군검풍이 만금예의 생각을 깨우며 궁금한 듯 물었다.
"만형은 어디 있소?"
"동생은 아버님의 급명으로 제남으로 갔어요."
"그럼 다음 기회에 만형을 보기로 하고 이만 돌아가야겠구료."
군검풍은 이렇게 말하며 침상에서 내려섰다.
만금예는 그 말에 멈칫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러다, 그는 얼른 생각난 듯 말했다.
"여기... 장삼이 있어요."
그녀는 옆 탁자에서 폭풍삼을 들어 군검풍에게 입혀 주었다.
군검풍은 그녀의 호의를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무심결에 마주친 만금예의 부드럽고 그윽한 눈빛을 대하자 그만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만금예는 군검풍에게 폭풍삼을 입혀주며 수줍게 옥용을 붉혔다.
"그리고... 이것은 대공자님의 옷에서 떨어진 것이에요."
그녀는 한 장의 철편을 군검풍에게 내밀었다.
"...!"
군검풍은 흠칫했다.
그녀가 내민 철편은 전혀 못 보던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철편의 크기는 손바닥만 했으며, 전체적으로 은은한 자광(慈光)이 감돌았다.
그리고, 철편의 표면에는 어지러운 문양이 복잡하게 새겨져 있었다.
놀랍게도 그것은 남만에서 쓰는 고문(古文)이었다.
'독종철권(毒宗鐵卷)...?'
군검풍은 어렴풋이 그 뜻을 알아내고는 고개를 갸웃했다.
그런데, 이 때였다.
"허허! 그러고들 있으니 보기에 좋군."
문득 한 줄기 창노한 웃음이 군검풍의 귓전을 울렸다.
군검풍과 만금예는 동시에 고개를 돌렸다.
그들의 눈에 하나의 바퀴의자, 즉 윤차(輪車)가 들어왔다.
그 윤차 위에는 한 명의 금포노인이 앉아 있었다.
그는 군검풍과 만금예를 바라보며 흡족한 웃음을 짓고 있었다.
각이 진 네모난 얼굴에 부리부리한 봉(鳳)의 눈을 지닌 노인.
그는 탐스러운 백염을 가슴까지 기르고 있었다.
일견하여 사람좋아 보이는 호인의 인상을 풍기는 인물이었다.
아울러, 일대종사의 위엄과 기품이 그의 전신에 자연스럽게 배어 흐름을 느낄 수 있었다.
윤차 위의 노인을 본 만금예는 옥용을 노을같이 붉히며 고개를 떨구었다.
"아버님...!"
백염노인은 수줍어 하는 그녀의 모습을 바라보며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허허...! 금우녀석이 그토록 칭찬한이 것이 틀리지 않았군."
그는 두 눈을 신비로운 금빛으로 물들이며 군검풍을 유심히 주시했다.
그의 눈빛은 패도적인 강렬함은 없었다.
그러나, 사람의 심혼을 제압하는 종사의 기도가 담긴 눈이었다.
군검풍은 그를 처음 본 순간 직감적으로 깨달았다.
'이 사람이 황제폐하조차 곤란하게 만든다는 천하제일부 천금왕야군.'
-- 천금왕야(天金王爺) 만금해(萬金海).
구주(九州), 사해(四海), 팔황(八荒)을 통틀어 그보다 더 큰 부자는 없다.
그가 어느 정도 부자인가 하면 중원의 절반이 그의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천하제일부호(天下第一富豪)!
그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아무것도 없는 신비 속의 인물이었다.
군검풍은 만금해를 향해 정중히 포권했다.
"왕야(王爺)를 뵙습니다."
만금해는 흡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헛허, 좋아. 사자왕 전하께서 천하에 부러울 것이 없다고 한 이유를 알겠네."
"부끄럽습니다."
군검풍은 겸손하게 대꾸했다.
"보여 줄 것이 있네, 따라 오게."
드르르...!
만금해의 말이 끝남과 동시에 륜차는 저절로 회전하더니 밖으로 굴러갔다.
군검풍과 만금예는 아무말 없이 그 뒤를 따랐다.
이윽고, 세 사람은 천금왕부의 지하밀실 앞에 이르렀다.
"후훗! 그대에게 보여주고 싶은 것의 일할이 이 중에 있네."
만금해는 륜차 위에 앉은 채 군검풍을 돌아보았다.
그의 입가에는 나직하고 신비한 웃음이 감돌았다.
군검풍은 자신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의 앞에 우뚝 버티고 선 지하밀실의 문은 놀랍게도
전체가 찬란하고 눈부신 황금(黃金)으로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그 황금 문 위에는 큼직한 글씨로 다음과 같이 쓰여져 있었다.
<금황천고(金皇天庫)>
군검풍은 그것을 바라보며 내심 중얼거렸다.
'내게 당신의 재력을 보여주겠다는 얘긴가?'
이때 만금해가 금황천고의 한곳을 손으로 가볍게 눌렀다.
그르릉...!
그러자, 굉음과 함께 거대한 황금의 문이 쩍 갈라졌다.
그 안은 드넓은 석로(石路)가 뻗어 있었다..
만금해는 윤차를 굴러 앞장 서며 문득 너털웃음을 터뜨렸다.
"헛허...! 가장 세속적인 것이지만 또한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이 황금이라네."
"....!"
이윽고, 세 사람은 금황천고 안으로 들어섰다.
금황천고 안에는 구십구 개의 석실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는 너무도 놀랍고 엄청난 광경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 구십구 개의 석실마다 온갖 재화가 산더미처럼 가득 쌓여 있는 것이 아닌가?
실로 그것은 어마어마한 진경이 아닐 수 없었다.
눈을 멀게 할 듯 찬란한 광채를 번쩍이는 백만 관의 황금과
일만 개의 철궤에 가득한 각종 진귀한 보주(寶珠)들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어디 그뿐이랴?
일만 종의 무가지보와 일천 종의 절세신병(絶世神兵),
그리고 십만 권의 무경(武經)들이 석실 가득 차고 넘쳤다.
한 가지만 복용해도 무적의 내공을 주는 절세영약이
무려 구만 구천 구백 구십 종이나 있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것은 엄연한 사실이었다.
게다가, 백파(白派)를 움직일 수 있는 각대문파의 수호지령(守護之令)들도 제각각 그 위세를 뽐내고 있었다.
그 밖에도, 실로 상상할 수 없는 보물들이 석실 안에 태산같이 쌓여 있었다.
그것들만 있으면 천하의 반을 살 수 있으며 천만인을 부릴 수 있을 것이다.
아니, 원한다면 황제의 위(位)라도 얻을 수가 있었다.
그 엄청난 재력이 금황천부 구십 구 개의 석실에 가득 쌓여 있는 것이었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사실은 이 어마어마한 재력이
천금왕야 만금해가 지닌 모든 능력의 일할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세 사람은 마지막 백 번째의 석실 앞으로 다가섰다.
화려한 대전 안에 이른 만금해는 군검풍을 돌아보며 두 눈에 신광을 번뜩였다.
"허허...어떤가?"
그는 앞의 탁자에서 하나의 영패를 들어올렸다. 황금에 금강석을 박은 금패였다.
<금황부(金皇符)>
그것은 천하의 상인(商人)들을 움직일 수 있을 뿐 아니라,
만금해의 모든 것을 얻을 수 있는 절대신물이었다.
만금해는 황금의 광채가 일렁이는 신비한 눈으로 군검풍을 주시했다.
그러다가 신중한 어조로 말했다.
"천금구십구로(天金九十九路)의 모든 것이 담긴 이 금황부(金皇符)와,
이것보다 열 배 중한 것이 그대의 것이 될 수 있다네, 군대공자!"
그는 형형하게 번뜩이는 눈으로 군검풍을 주시했다.
"노부에게 절을 하고 금황벌(金皇閥)의 수호자가 되겠다고 맹세하게.
그리하면 천금구십구로와 나의 장중주 금예가 너의 것이 될것이다."
만금해의 눈은 군검풍을 태워버릴 듯 무섭게 이글거렸다.
"...!"
그러나 군검풍은 일점의 흔들림 조차 없었다.
그는 태양같이 강렬한 만금해의 시선을 정면으로 받으면서도 한치의 동요조차 보이지 않았다.
만금해는 당혹감을 느꼈다.
군검풍의 너무도 태연하고 담담한 눈빛이 은연중 그를 떨게 만들었다.
'으으...! 저 눈..., 저 눈은 폭풍의 눈이다. 나의 막대한 황금으로도 어쩔 수 없는 폭풍의 눈...!'
그는 순간적으로 패배를 직감했다.
그것을 깨닫자 그는 입 안이 타는 것 같은조바심을 느꼈다.
하지만 그는 내심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않았다.
'그러나... 견디지 못하리라. 황금의 유혹과 금예의 아름다움에는 결국 굴복하고 말 것이다.'
그는 입 안에 고이는 침을 삼키며 뚫어지게 군검풍을 주시했다.
그러나, 그의 기대는 군검풍의 입가에 떠오른 한 가닥 허무한 미소에 산산이 조각나고 말았다.
"왕야께서는 상대를 잘못 고르셨소이다. 후훗...!
금황벌에 어떤 사연이 있어 나 군검풍을 필요로 하시는지는 몰라도...
후훗! 소생을 잡으실 수는 없을 것이요."
군검풍은 고개를 흔들며 씁쓸하게 미소지었다.
그 미소에 담긴 그의 뜻은 확고하고도 뚜렷했다.
"흐윽...!"
그것을 지켜보고 있던 만금예는 갑자기 안색이 밀납같이 창백하게 변했다.
그녀는 쓰러질 듯 휘청하며 몸을 벽에 기댔다.
그녀가 받은 타격은 예상외로 컸던 것 같았다.
그녀의 맑고 아름다운 봉목에 물기가 맺히는 것만 봐도 그것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만금해의 충격 또한 그녀에 못지 않았다.
파팍...!
그는 격정을 누르지 못하며 부르르 몸을 떨었다.
그 바람에 그의 손 아래있던 자옥의 탁자가 박살났다.
"무... 무엇 때문이냐? 나 만금해의 제의를 거절하는 이유가?"
그는 화산이 폭발하는 듯한 눈길로 군검풍을 노려보았다.
중후하던 그의 얼굴은 분노와 수치감으로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노... 노부의 황금이 네 양에 차지 않음이냐?
아니면... 금예의 미모가 천하제일이 못 되는 까닭이냐?"
우르르... !
그의 전신에서는 창창한 금빛 기류가 폭발하듯 일어났다.
그러나, 군검풍은 씁쓸하게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아니외다. 이유는... 나란 놈이 바람이기 때문이오.
후훗...! 장차 팔황을 떠돌 거친 바람에게 금황벌의 장래를 맡기시려는 것이오?
왕야께서는 나 같은 바람이 아니라, 산(山)이 될 인재를 구하셔야 할 것이오."
그의 대답은 칼로 자르듯 분명했다.
그 말을 마치자, 군검풍은 더 이상 그곳에 있을 필요를 느끼지 않는 듯 돌아섰다.
만금해는 치미는 격노를 금치못했다.
"가지 못한다! 금황벌의 수호전사로서의 맹세를 하기 전에는 결코 금황천고를 벗어나지 못한다!"
우르르... 츠으...!
급기야 그는 륜차 위로 휙! 날아오르며 군검풍의 앞으로 내려섰다.
그 순간, 군검풍은 흠칫하는 표정을 지었다.
그의 앞에 내려선 만금해,
놀랍게도 그의 두 다리는 허벅지 아래서부터 싹둑 잘려나가고 없었기 때문이다.
어떤 강력한 강력에 박살나 버린 듯했다.
그러나 군검풍의 태도는 시종일관 변함이 없었다.
"후훗...! 소생에게 인연의 끈을 얽어매려 하지 마시오.
소생은 자유로운 바람이 될 놈이외다!"
그는 무심한 미소를 입가에 띄우며 만금해를 향해 다가섰다.
만금해는 그 완고한 의지에 또 다시 부르르 신형을 떨었다.
하지만 그 역시 지지 않겠다는 듯 군검풍을 노려 보며 단호하게 잘라 말했다.
"보내지 않겠다! 차라리 너를 이곳에 묻어버리고 말겠다!"
쩌정...!
그의 주위로 일순 찬란한 금빛강벽이 일어났다.
-- 금황천탄강(金皇天彈 )!
십패천 중 금황벌 비전의 파천강력(破天 力)이었다.
콰...쾅!
그 직후, 요란한 폭음이 들썩 대전을 뒤흔들었다.
'윽!'
군검풍의 입가로 선혈이 주르르 흘러내렸다.
금황천탄강의 강력에 그의 내부가 뒤틀린 것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결코 뜻을 꺾지 않았다.
"소생을 막지는 못하오, 왕야!"
뚜벅...!
그는 입가로 선혈을 흘리면서도 태연히 만금해에게로 다가섰다.
만금해의 안색이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으으... 네... 네놈은... 용(龍)임에는 틀림이 없다!"
그는 신형을 휘청하며 입술을 악물었다.
군검풍의 전신에서 일어나는 폭풍의 기세에 오히려 그는 위압 당하고 있었다.
"크... 제발...부탁이다. 금황벌을 지켜다오.
노부는 천패마종(天覇魔宗)이란놈에게 십억 냥의 황금과,
두 다리를 빼앗긴 불쌍한 늙은이다.
나를... 도와다오!"
그는 다시 륜차 위로 올라서며 간절한 음성으로 말했다.
드르르...!
그는 군검풍의 당당한 기세에 오히려 뒤로 밀려나며 애원했다.
군검풍은 간절하게 사정하는 만금해의 모습에 괴로운 표정을 지었다.
그는 마음이 약했다.
상대의 약한 면을 보고 외면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짧은 순간, 그는 몇차례의 갈등을 겪어야 했다.
'천금왕야... 이 사람은 패배자다.
천패마종이란 인물에게 많은 것을 빼앗겼을 것이고,
그 한(恨)을 나로 하여 풀려고 한다. 하지만.....'
어차피 그의 선택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나는 도와줄 입장이 못 된다. 나 자신에 얽힌 은원마저 제대로 알지 못하는 상태이니...!'
그는 잠시 갈등 어린 눈빛으로 만금해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는 이내 무심한 표정으로 돌아왔다.
이어, 그는 다시 뚜벅뚜벅 만금해에게로 다가섰다.
"네... 네가...!"
만금해의 안면이 절망으로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마지막으로 걸었던 한가닥 기대마저 무너지자 그는 갑자기 전신의 맥이 탁 풀어지는 것을 느꼈다.
간절한 애원으로서도 군검풍의 마음을 되돌릴 수 없었던 것이다.
만금해의 안색이 절망과 분노, 격화로 인해 시커멓게 변했다.
"네... 네놈도 천패마종이나 구천마야(九天魔爺),
그놈과 다를 바 없는 놈이다. 네... 네놈을 죽이겠다!"
쩌정!
그의 죄수에서 돌연 일 장 길이의 강기의 검이 번쩍 일어났다.
그것은 금황천강검(金皇天剛劍)으로 십대천병 이상가는 날카로움을 지닌 상승검력이었다.
그러나 군검풍은 물러서지 않았다.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그는 한 걸음 더 앞으로 다가섰다.
"왕야는 내게서 뜻을 이루실 수 없소!"
"네놈은... 크으...!"
만금해는 이를 갈며 다시 발작적으로 좌수를 쳐들었다.
하지만 그는 륜차에서 뚝 떨어지고 말았다.
콰...당!
그는 한 모금의 선혈을 울컥 토해낸 후 그대로 혼절하고 말았다.
극심한 심화를 이기지 못하고 정신을 잃은 것이었다.
"아버님...!"
만금예는 비명을 토하며 만금해에게로 뛰어들었다.
"아버님... 흐윽!"
그녀는 쓰러진 만금해를 부둥켜 안고 서러운 오열을 터뜨렸다.
그 모습은 안스럽기 이를 데 없었다.
"미안하오. 만소저! 다시 뵐 때는 웃으며 만날 수 있기를 바라오!"
군검풍은 나직한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돌렸다.
그는 만금예의 옆을 지나쳐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바로 이 때였다.
"바로 너냐? 사사독종이 독종철편을 맡긴 대상이...!"
어디선가 지극히 건조하고 음울한 음성이 귓전을 울렸다.
그것은 전혀 인간의 감정이 담겨 있지 않은 무감동한 음성이었다.
"...!"
군검풍은 흠칫하며 걸음을 멈추었다.
지하대전의 문 밖에 누군가 유령처럼 서 있었다.
그는 음울한 회색의 눈을 지닌 한 명의 검수였다.
그의 분위기는 죽음처럼 깊고 음산한 잿빛이었다.
그의 전신은 어두운 죽음의 그림자를 안고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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