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폭풍세가

제10장 몰려드는 군마(群魔)

오늘의 쉼터 2014. 9. 30. 14:53

 

제10몰려드는 군마(群魔)

 

 

군검풍은 그 검수를 보는 순간 가슴이 서늘해지는 것을 느꼈다.
'살기가 강한 자다. 그 살기가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것은 

최고 경지의 살수경(煞手境)에 든 까닭이다.'
그는 직감적으로 그것을 느끼며 바짝 긴장했다.

그의 내부에서 차가운 한기가 치밀어 올랐다.

-- 천풍사랑(天風死狼)!

문 밖의 인물은 바로 그였다.
죽음의 늑대(死狼)라 불리는 비밀 속의 천하제일살수!
그는 살황독강의 냄새를 따라 이곳까지 군검풍을 추격해온 것이었다.
군검풍은 담담하게 가라앉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귀하는 누구요?"
"나?"
천풍사랑은 억양 없는 무심한 어조로 반문했다.
이어, 그는 가라앉은 음성으로 대꾸했다.
"내 이름은 천풍사랑이다. 그대 목숨을 거두러 왔다!"
"처... 천풍사랑!"
만금해를 부축하던 만금예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신음이 터져나왔다.
하지만 군검풍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천풍사랑이라는 이름을  처음 들었다.
따라서, 놀할 이유도 없는 것이다.
"천풍사랑이라... 그런데 왜 본인을 노리는 것이오?"
천풍사랑의 입에서 낮고 건조한 일성이 흘러나왔다.
"독종철편을 지닌 죄다. 더 이상은 묻지마라!"
말을 마침과 동시에 그는 유령처럼 군검풍에게로 다가섰다.
그것을 본 만금예가 날카로운 음성으로 다급히 외쳤다.
"금대공자! 물러서요. 그 자는 저주의 살수예요!"
"....!"
그러나 군검풍은 피하지 않았다.

그는 그 자리에 우뚝 선 채 묵묵히 다가서는 천풍사랑을 주시했다.
"나를 죽일 수 있다고 생각하시오?"
그의 뜻밖의 질문에 천풍사랑은 일순 흠칫했다.

하지만 곧 그는 무표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천하에서 가장 무섭다는 독문제일종(毒門第一宗) 사사독종마저 나의 살검을 피하지 못했다!"
그런데 왜 일까?

그는 지극히 무심하게 대답했지만 그 속에는 뭔지 모를한 가닥 불안이 섞여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순간적으로 그의 뇌리로 한 줄기 불길한 예감이 스쳤다.
'왜 그럴까? 이 자를 죽일 수 없을 것 같은 예감이 들다니...!'
그 예감은 천풍사랑을 당혹하게 만들었다. 

그의 회색 눈에 일순  미세한 파문이 일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에는 극히 정교한 인피면구가 씌어져 있었기 때문에 겉으로 표정이 드러나지는 않았다.
이때, 군검풍은 극히 태연한 신색으로 천풍사랑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그는 나직한 실소를 발했다.
"잘됐군. 그렇잖아도 살수라는 부류의 인물들을 한 번 만나보고 싶었소."
이어, 그는 천천히 왼쪽 소매를 걷었다.

그러자 그의 좌수가 드러났다.

이하게도 그의 좌수는 은은한 묵빛을 띄고 있었다.

바로 무영환자의 절대 살병 잠형묵린갑을 끼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츠으...!
잠형묵린갑이 나타나자 갑자기 보이지 않는 살기가 구름같이 일어나 지하대전을 가득 메웠다.

그 무형의 살기는 고도의 수련을 거친 살수에게만 느껴지는 것이었다.
"...!"
그 무형의 살기는 은연중 천풍사랑을 떨게 만들었다.

그는 칼날같은 긴장감 위에 선 기분이었다.
'예삿 인물이 아니다. 사사독종이 사독마맥의 운명을 이 아이에게 맡긴데는 이유가 있다.'
인피면구 속의 그의 이마에는 자신도 모르게 땀방울이 맺혔다.

그는 숨막히는 표정으로 군검풍을 주시했다.
한 순간, 천풍사랑의 순이 빠르게 움직였다.
"천풍섬(天風閃)!"
츠읏!
그 순간, 이미 아흔 아홉 가닥의  검기가 군검풍의 아흔 아홉 군데  사혈(死穴)을 베고 있었다.
하지만 군검풍의 좌수가 휘둘러진 것도 거의 같은 순간이었다.
"환룡섬린(幻龍閃鱗)!"
슈슈슉...!
그의 좌수 잠형묵린갑에서 삼백 육십 개의 용린(龍鱗) 같은 강기가  한꺼번에 폭사되었다.

그것은 눈부시게 기쾌한 속도로 삼백육십 방위를  베어갔다.
환룡섬린은 무영환자의 환상살법(幻像殺法) 삼번식(三飜式) 중 제 일식이었다.
쩌...엉!
카카캉!
귀청을 찢는 듯한 파열음과 함께 용의 울음소리와 같은 날카로운 음향이 동시에 들렸다.
천풍사랑의 몸이 순간적으로 휘청하더니 뒤로 삼 장이나 물러섰다. 

감정이 죽은 그의 눈에는 처음으로 공포의 빛이 떠올랐다.
군검풍 역시 쓰러질 듯 신형을 휘청했다. 그 또한 큰 충격을 받은 듯  했다.
하지만 천풍사랑의 놀라움은 이루 형언할 수 없을 정도였다.
"이... 이럴수가...!"
그의 두 눈에는 공포와 불신의 빛이 가득 떠올라 있었다.

그는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자신의 가슴을 내려다 보았다.
그가 걸친 회색 장포는 길게 찢어져 펄럭이고 있었다.
그런데, 정작 놀라운 것은 그것이 아니었다.

찢어진 회포 안으로 터질 듯부푼 한 쌍의 젖가슴이 불쑥 드러나 있지 않은가?
그것은 너무도 뜻밖의 사실이었다.

천하제일의 살수로 알려진 천풍사랑이 믿을 수 없게도 여인의 신분이었다니.....!

세상 사람들  모두 경악할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천풍사랑의 가슴 팔대요혈에는 흡사 용의 비늘같은  형상의 상처가 선명하게 나 있었다.

바로 환룡섬린수에 당한 흔적이었다.
군검풍 역시 멀쩡한 것만은 아니었다.

그의 심장부근에서도 선명한  혈흔이 스며나왔다.
"좋아... 멋진 살수(殺手)요!"
쿵!
군검풍은 씨익 미소 지으며 둔탁하게 넘어갔다.
그가 무영환자 최강의 살수 환상살법을 얻었다고는 해도

고도의 살수 수련을 거친 천풍사랑의 상대는 되지 못했다.
이 광경을 모두 지켜보고 있던 만금예는 아연실색을 금하지 못했다.

그녀는 도무지 믿기지 않는 이 상황에 반은 넋이 나가 있었다.
"군... 군대공자...!"
그녀는 쓰러진 군검풍을 내려다보며 망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 때였다.
"아까운 친구! 미안하지만 죽어주어야겠다!"
츠으...!
천풍사랑은 어느새 원래의 무심함을 회복한 듯 회색 눈을 음울하게 빛내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녀는 쓰러진 군검풍을 향해 유령처럼 다가왔다.
절대절명의 순간이었다.
"천풍사랑! 감히 천년마제(千年魔帝)가 되실 분을 시해하다니!"
돌연 한소리 날카로운 교갈이 천풍사랑의 등 뒤에서 터졌다.
"웃!"
직감적으로 위기를 느낀 천풍사랑은 홱 몸을 돌려세웠다.
파파팟!
그 순간, 밀로 저편에서 갑자기 반투명한 그물이 날아와 그녀를 덮어 씌워버렸다.
천풍사랑은 흠칫하며 경악성을 발했다.
"대라천망(大羅天網)...!"
그녀는 다급히 십장 뒤로 물러섰다.
그러나, 예의 반투명한 그물은 그대로 천풍사랑의 몸을 휘감아 바닥에 내동댕이치고 말았다.
콰당...!
천풍사랑은 어이없이 그물에 뒤덮인 채 나뒹굴었다.
대라천망은 십패천 중 마뇌서원(魔腦書院)의 비전신물로써

한 번 펼쳐지면 그 누구도 빠져나가지 못한다.
천풍사랑이 바닥에 나뒹군 직후였다.
"바득! 나 십전마혜 을유향의 부군될 분을 해친 것은 꼭  기억하겠다. "
스슥!
한명의 마의소녀가 유령같이  날아들며 군검풍을 잡아채더니  다시 대전 밖으로 날아갔다.
십전마혜 을유향이라면,

바로 마뇌서원의  원주인 사안마성(四眼魔聖) 을목천의 말썽꾸러기 손녀가 아닌가!
군검풍이 야훼원에서 난봉꾼 노릇을 하는 것을 목도하고 화가 나 떠났던 그녀가

어떻게 군검풍을 구할 생각을 하게 된 것일까?
사실 한때의 분기를 참지 못하고 떠났던 그녀는

조부 사안마성의 엄명에따라 다시 군검풍의 주위를 떠돌며 그의 행태를 지켜봐 왔다.

그  과정에서 영리한 그녀는 군검풍이  양부 구문제독의 눈밖에 나기 위해

일부러 망나니 짓을 해온 사실을 알아차린 것이다.

"기억해라, 천풍사랑! 너는 나 을유향의 손에 죽지도 살지도 못하게 될 것이다!"
그 말을 끝으로, 을유향은 군검풍을 안은 채 삽시에 밀로 저편으로  사라져 버렸다.
"십전마혜 을유향...!"
천풍사랑의 입에서 은은한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마뇌서원조차 저 아이를 비호하다니...!"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그녀의 눈에는  경이의 빛이 떠올라 있었다.
스스슥...!
다음 순간, 그녀는 대라천망에 덮인 채 환상같이 사라져버렸다.
한바탕 광풍이 휩쓸고 지나간 금황천고 안.
금황선 만금예는 부친 천금황야 만금해를 안은  채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또르르...!
문득, 맑은 이슬 같은  눈물이 그녀의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피가 배이도록 입술을 꼭 깨물었다.
"천풍사랑...십전마혜...!"
그녀의 교구가 분노로 바들바들 떨렸다.
"금황벌을 능멸하고 내 앞에서 나의 검풍을 빼앗아 가다니... 결코 용서치 않겠다!"
문득 그녀는 허공에 대고 외쳤다.
"환공(幻公)! 사령(邪靈)!"
그러자, 즉시 대답이 들렸다.
"부르셨습니까? 공주님!"
"녠! 이제야 부르십니까? 당장  아가 두 계집을 붙잡아오리까?"
츠으... 스스스...!
기괴한 두 마디 대답과 함께, 천정과 바닥으로부터 갑자기 두 사람이  치솟아 올랐다.
천정에서 내려온 자는 반투명한 그림자로 뒤덮인 괴인이었다.
그리고, 바닥에서 치솟아 오른 인물은 전신이 온통 뭉클뭉클한 핏빛 사기로 뒤덮인 자였다.

-- 환공.
-- 사령.

그들은 만금예를 따르는 충복들이었다.

놀랍게도 그들은 천정에 몸을 숨기고 있었던 것이다.

실로 귀신같은 신법이 아닐 수 없었다.
만금예는 입술을 깨물며 결연한 음성으로 말했다.
"금황성(金皇城)으로 철수하겠어요!"
그 말에 환공과 사령은 깜짝 놀라는 기색이었다.
"예옛?"
"아니... 그럼!"
그들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나왔다.
금황성, 그곳이 어디기에 이토록 경악한단 말인가?
만금예는 입술을 깨물며 말을 이었다.
"타인에게 의지하여 금황벌의 복수를 하려고 한 것이 잘못이예요.

금황성으로 돌아가 본녀 스스로 지옥마관(地獄魔關)에 들어 금황전사(金皇戰士)가 되겠어요!"
그녀의 눈빛은 굳은 의지와 신념을 담고 있었다.
"오오! 공주님...!"
"아아! 잘 생각하셨습니다! 금황벌은 더 이상 십패천의 말석일 수 없습니다!"
환공과 사령은 희열의 빛을 감추지 못하며 격동에 찬 외침을 발했다. 

이어, 그들은 동시에 그 자리에 털썩 무릎을 꿇었다.
금황수호전사... 대체 그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만금예는 환공과 사령을 바라보며 오연한 음성으로 명했다.
"사령은 아버님을 성으로 모시고, 환공은 천하에 퍼져 있는 천금구십구로(天金九十九路)와

금황십팔공(金皇十八公)을 성으로 귀환시키세요!"
"예... 옛!"
"분부거행 하겠습니다!"
스스... 슥!
사령과 환공은 대답과 함께 즉시 천금왕야  만금해를 안아들고 유령같이 사라졌다.
그들이 사라지고 나자, 만금예는 결연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금황벌의 분노를 보여주겠다! 천패마종 남궁무외, 천풍사랑, 그리고 십전마혜!

너희들은 나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군검풍, 당신 역시 마찬가지에요."
이어, 그녀는 몸을 돌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주르르...!
이유를 알 수 없는 눈물이 그녀의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왜? 그 눈물의 의미는 무엇일까?

 

구문제독부의 후원에는 온갖 기화이초가 현란한 아름다움을 뿌리며 다투어 피어 있었다.
잘 가꿔진 정원 한 가운데에는  한 채의 삼 층(三層)  고각(古閣)이 우뚝자리하고 있었다.

그 삼층 누각은 화려하고 운치 있는 꾸밈새로 건축되어있었다.
석양빛에 젖은 고각의 고풍스런 멋은 절로 감탄을 자아내게 만들었다.

-- 제후비각(帝后秘閣).

삼 층 고각의 현판에는 이와 같은 글씨가  섬세하고 정교한 필체로 쓰여져 있었다.
그 제후비각 삼 층의 난간에는 한 명의 여인이 기대앉아 있었다. 

그녀는 창백한 안색에 그린 듯 아름다운 용모를 지닌 미녀였다.
바로 병서시 군대려였다.
경성사대미인의 일미로, 신비함과 더불어 연약한 교구에 폭풍의 꿈을  품고 있는 여인이었다.
"제후(帝后)! 심상치 않은 내력의 강자들이 계속 황성 일대에 잠입 중입니다."
문득 군대려의 등 뒤에서 한가닥 창노한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그녀의 뒤에는 한 명의 노인이 공손하게 시립하고 있었다.

팔 척의 훤칠한 체구에 관운장을 연상케 하는 길고 짙은 흑염을 기른 노인이었다.
그는 일신에 검은 철릭을 걸치고 있었으며, 두 눈에는 뇌전 같은  강흔이 번쩍이고 있었다.

일견하여 추측을 불허하는 절정고수자임이 분명했다.
그런데, 그런 흑염노인이건만 군대려의 뒤에 극히 공손한 자세로  시립하고 있는 것이었다.
이는 실로 놀라운 사실이었다.
"...!"
무슨 생각에 잠겨있는 것일까?

노을 저편을  응시하고 있는 군대려의 눈빛은 극히 고요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흑염노인은 잠시 간격을 둔 다음 다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소가주를 호송해온 마뇌서원의 십전마혜  외에,

사사독마갱의 사사독종,패왕궁의 천패마종 남궁무외등의 종적이 연이어 발견되었습니다."
"천패마종 남궁무외...!"
고요하기만 하던 군대려의 시선이 한차례 흔들림을 보였다.

창백한  그녀의 옥용에 처음으로 표정이 나타났다.
하지만 그녀는 여전히 시선을 돌리지 않은 채 잔잔한 음성으로 물었다.
"철혈대공(鐵血大公)! 그들이 무슨 목적으로 황성에 잠입했다고 보세요?"
그런데, 철혈대공이라 했는가?

-- 철혈대공 초패강(楚覇强).

그는 저 십패천 중 일파인 철혈마루(鐵血魔樓)의 전인이 아닌가?
철혈마루는 패왕궁과 더불어 마도쌍패(魔道雙覇)로 불리는 초강파였다.
그러나 사십 년 전, 그들은 마교지존(魔敎至尊)  구천마야 독고의 발호시

정면충돌하여 패멸해 버린 것으로 알려졌다.
철혈대공 초패강은 구천마야 독고에게 패사한 철혈마루의

전대루주 철혈노조(鐵血老祖)의 제자였다.
그런데, 그런 그가 병서시 군대려의 수하를 자칭하는 것은 놀라운 사실이 아닐 수 없었다.

철혈대공은 군대려의 물음에 공손한 어조로 대답했다.
"역시 소가주를 노리는 것이 아닐까 합니다.

소가주를  얻으면  천년제일 패세인 폭풍세가(暴風勢家)의 십만패웅을 얻게 될 테니까요."
"...!"
군대려는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녀는 조용하고 잔잔한 시선을 멀리로 던졌다.
두겹의 담장 너머 저쪽,
군대려의 시선 끝으로 한 채의 수중누각(水中樓閣)이 그림처럼 빨려 들어왔다.
방원 삼십여 장의 넓직한 연못 위에 마치 한  폭의 그림을 펼쳐 놓은 듯
떠있는 수각(水閣)의 모습은 아주 평화롭게 느껴졌다.

<잠풍헌(潛風軒)>

이것이 그 수각의 이름이었다.
그리고 열려진 잠풍헌의 창문가에는  한 명의 흑삼청년이 뒷짐을  진 채 서 있었다.
그는 연못에 떠있는 철늦은 연꽃을 바라보고 있었다.
군대려의 시선은 그 흑삼청년의 일신에 머물고 있었다.
청년을 바라보는 군대려의  눈빛은 마치 자애로운  어머니같이 잔잔하고 그윽했다.

따스한 정감이 넘치는 눈빛이었다.
이때 군대려의 생각을 일깨우며 다시 철혈대공이 입을 열었다.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십전마혜라는 아이는 다행히 소가주께 호의를 갖고 있어

부상한 소가주를 부중으로 호송해 주었으나

다른 군마(群魔)들도 같은 호의를 갖고 있다고는 생각지 않습니다."
"...!"
여전히 철혈대공의 말을 듣고만 있을 뿐 대답이 없는 군대려였다.
철혈대공은 그런 군대려의 기색을 조심스럽게 살피며 말을 이었다.
"폭풍구천존(暴風九天尊)이 북경내로 잠입하여  군마들을 감시 중입니다.
명만 내리시면 제독부 일만강병과 구천존(九天尊)  휘하 구백폭풍천위(九百暴風天衛)로

그들을 모두 잡아들이거나 추방시킬 수 있습니다."
그말에 군대려는 비로소 짤막하게 대꾸했다.
"구천존을 철수시키세요!"
"옛?"
그녀가 한 말은 너무도 뜻밖이었다.

철혈대공은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군대려를 바라보았다.
하지만 군대려는 여전히 잔잔한 표정으로 말했다.
"악연(惡緣)이라도 검풍에게는 복이 될 수도 있어요. 굳이 군마를 제어할 요는 없어요."
그녀의 말에 철혈대공은 자못 염려를 금치 못하는 표정이었다.
"하오나 자칫 소가주의 옥체에 심각한 위험이 올 수도...!"
그러나 그의 말을 군대려가 빠르게 잘랐다.
"그것도 좋지않겠어요? 그로 인해 검풍이 더 강해질 테니 말이에요."
"...!"
철혈대공은 그만 할말을 잃고 말았다. 그는 멍한 표정을 지으며 군대려를 라보았다.
하지만 군대려는 여전히 철혈대공은 돌아보지도 않고 

잠풍헌 안의 흑삼 청년만을 주시하고 있었다.
흑삼청년, 그는 바로 잠풍헌의 주인인 군검풍이었다.


"십전마혜 을유향...!"
군검풍은 뒷짐을 진 채 창가를 서성이며 침중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천천히 몸을 돌려 창가에 마련되어 있는 탁자에 앉았다.
탁자 위에는 한 장의 지편과 하나의 옥지환(玉指環)이 놓여져 있었다.

옥지환은 은은한 자색 광채가 도는 것으로,

그 표면에는 복잡한 문양이  종힝으로 뒤엉킨 채 새겨져 있었다.
"을유향...! 그녀는 어떤 여인이기에 나를 구했을까?"
군검풍은 을유향에 대해 호기심과 궁금증을 느꼈다.
이윽고 그는 탁자 위의 지편을 집어들었다.

지편에는 섬세한 필체로 다음과 같이 새겨져 있었다.

-- 나를 잊지 말아요. 당신은 이제 소녀 십전마혜 을유향의 것이예요.

영원히 그 사실은 변하지 않을거예요.

대라천신환(大羅天神環)은 소녀의 마음이 담긴 것이예요.

언제 어디서라도 당신을 지켜드릴 거예요.

그것은 금황천고에서 절대절명의 순간에 군검풍을 구해온 십절마혜 을유향이 남긴 것이었다.
군검풍은 을유향이 남긴 글을 읽으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후훗! 이상한 일이군. 난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데, 아무것도  바랄 것이 없는데....

무엇을 위해 내 주위에 모여든단 말인가?"
그는 고개를 흔들며 서천을 주시했다. 붉게 노을이 타고 있었다.

그 노을너머로 폭풍의 그림자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군검풍은 그 그림자를 보았다. 그는 눈을 빛내며 중얼거렸다.
"이제는... 때가 되었다. 아버님이 원하시는 대로 모두 해드렸으니 이제는 떠나야겠다.

자유로운 바람이 되어 팔황을 떠돌고 싶구나.

후훗! 어느 곳으로 가야할지는 모르겠지만 발길 닿는대로 떠나리라."
그는 노을을 바라보며 허허로운 웃음을 지었다.

웬지 그의 웃음은 가슴이 뭉클할 정도로 짙은 외로움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크녠! 길을 알려드리오이까, 소가주?"
어디선가 남녀노소를 종잡을 수 없는 괴이한 음성이 군검풍의 귓전을 울렸다.
"....!"
군검풍은 흠칫했다.
'가까이에 누군가가 있다!'
거푸 여러 가지 일을 겪은 뒤라 그는 내심 아연긴장했다.

하지만  겉으로 표정을 드러내지는 않았다.
그는 고개를 돌리지 않고 담담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길을 알려주겠다고 했소? 그것을 귀하가 알고 있단 말이오?"
그러자 예의 그 종잡을 수 없는 음성은 지척지간에서 다시 대답해 왔다.
"후후훗! 물론 알고 있소이다. 소가주의 신세와 가문의 비밀,

그리고 소가주가 가장 보고 싶어하는 분의 행방까지도 모두 알고 있소!"
"...!"
군검풍의 눈이 이채로 번쩍 빛났다.

그는 갑자기 입안이 바싹 타는  것을느꼈다.
'이 자의 말이 사실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틀림없이 어떤 목적을 지닌 자다.'
그는 직감적으로 이렇게 판단했다.

그는 긴장과 흥분으로 가슴이 뛰었다.
하지만 여전히 그는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잠시 말이 없던 그는 이윽고 불쑥 물었다.
"내게 확신을 줄 수 있겠소?"
그 말에, 예의 괴이한 음성이 즉시 대꾸해왔다.
"녠! 역시 소가주는 천하제일기재요."
스팟!
이어 한소리 날카로운 음향과 함께 무엇인가가  군검풍의 면전으로 날아들었다.
군검풍은 재빨리 손을 뻗어 그것을 잡아챘다.
그의 수중으로 날아든 물건은 한 자 길이의 단검(短劍)이었다.
검이라고는 하지만 그것은 전혀 검답지 않은 모양새를 하고 있었다.

전체가 거무튀튀한 빛을 띠고 있었으며 끝이 뭉툭하여 무하나 조차 벨 수 없을 듯 했다.
하지만 그 투박한 모습과는 달리 손잡이에 쓰여진 갑골문자의 검명(劍名)은 실로 범상한 것이 아니었다.

-- 폭풍제왕검(暴風帝王劍).

그 웅휘한 필체와 압도적인 검명은 첫눈에 군검풍의 심신을 사로잡았다.
"폭풍제왕검...!"
어떤 강렬한 예감이 군검풍의 뇌리를 전류처럼 스치고 지나갔다. 

무엇인지 모를 그 강렬한 느낌은 군검풍의 전신을 사로잡았다.
그는 자기도 모르게 단검을 쥔 손끝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느꼈다.
이때 예의 그 괴이한 음성이 다시 군검풍의 귓전을 두드렸다.
"녠! 그것은 폭풍제일명(暴風第一命)이오.

아울러, 천하백대패가(天下百大武家)를 움직일 수 있는

폭풍무련(暴風武聯)의 맹주지명(盟主之令)이기도하오."
군검풍의 안색은 다소 굳어 있었다.
"이것이 본인과 무슨 연관이 있단 말이오?"
그는 검미를 모으며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것은 어쩌면 괴인의 입에서 튀어나올 다음 말에 대한 두려움을 감추기 위해서 였는지도 모른다.
"녠! 있고말고! 그것의 주인이 바로 실종되신 영전(令尊)이시니까."
"...!"
군검풍의 신형이 휘청했다.

그는 크나 큰 충격을 받았다.
'폭풍제왕검의 주인이 나의 친부시라고...? 그럼 이것이 바로 그분 폭풍대제님의....!'
그의 눈에는 숨길 수 없는 경악의 빛이 가득 떠올랐다.

그는 가슴이 마구 두방망이질치는 흥분에 정신이 아찔해졌다.

그만큼 괴인의 말은 충격적인것이었다.
잠시 경악과 불신으로 혼란스러움을 느끼던 군검풍은  하지만 급격히 냉정을 되찾았다.
이윽고 다시 입을 여는 그의 음성은 놀랍도록 침착하고 담담했다.
"내게 원하는 것이 무엇이오? 나 군검풍에게서 무엇을 원하는 것이오?"
"녠! 소가주는 군검풍이 아니외다. 뇌검풍(雷劍風)이 맞는 이름이오.!"
괴인의 그 말에 군검풍은 눈썹을 꿈틀하며 침중하게 일갈했다.
"입씨름을 원하는 것은 아니겠지?"
"크녠... 물론이외다. 노부가 원하는 것은 아주 간단하오.

소가주께서 한곳에 가주시기를 바랄 뿐이오."
"그곳이 어디요?"
군검풍의 물음에 예의 괴음성은 곧 바로 대답해 왔다.
"신강(新疆) 군마림(群魔林)에 있는 십지성궁(十地聖宮)이오."
"십지성궁...!"
군검풍은 나직이 입 안으로 그 이름을 되뇌어 보았다.

-- 십지성궁(十地聖宮)!

그곳은 이미 전설 속에 묻혀버린 신비 마역이었다.

 

바로 저 고금사대무벌중 십지마련(十地魔聯)의 총단이 되는 마도의  성역인 것이다.
천 년 전,
마도무림은 자신들 외의 어떤 마도문파의 존재를 용납하지 않는 도 마교,
즉 구천마교(九天魔敎)와 맞서기 위해 하나의 맹을 결성했다.
구천마교를 제외한다면 마고최강을  자부하는 십파,

즉  십대마맥(十大魔脈)이 주축이 되어 이루어진

그 연맹이 바로 십지마련(十地魔聯)이었다.
십지성궁은 바로 그 십지마련의 총단이고 십지마련의  련주는 대대로 천년마제(千年魔帝)라고 불려왔다.
그러나, 지난 천 년의 세월 동안 구천마교는 풍진 속에 묻혀 버린 듯  단 한 번도 무림에 나타나지 않았다.
자연히 마교를 상대하기  위해 결성된 십지마련은  내부에서부터 서서히 분열이 일기 시작했다.
십지마련을 이루는 십대마맥(十大魔脈)은  마교의 존재가 사라지자 

서로 천하쟁패를 놓고 치열한 암투를 벌이기에 급급해진 것이었다.

그 와중에, 십지마련의 성역인 십지성궁의 권위는 땅에 떨어져  버렸고

마침내는 십대마맥의 어느 가문에게도 미치지 못하는 미약한  존재로 몰락하고 말았다.
이백 년 전 십절천마후가  마련의 율법을 어기고 무림으로  뛰쳐나올 수 있었던 것도

십지성궁이 더 이상 휘하의 십대마맥을 통제할 힘이 사라진 결과였다.
그리고 백 년 전,
십절천마후의 이탈에 자극을 받은 십대마맥의 다른  가문들도 일제히 무림으로 뛰쳐나가

각자 세력을 구축하기에 이르렀다.

-- 십패천(十覇天)!

밑도 끝도 없이 갑자기 세상에 뒤어나와 강호를 십분해버린 십패천이 바로

십지마련 막하 십대마맥(十大魔脈)의 변신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십지마련을 배신한 십패천은 그 대가를 혹독하게 치루어야 했다.
즉, 천 년간 절전되었던 마교가 기다렸다는 듯이 부활하여

천하가 또  한번 마교에 정복당하고만 것이었다.
마교지존 구천마야 독고가 세상에 나와 일거에 십패천을 휩쓸어 버린 것이었다.
십패천은 필사적으로 저항했지만 결국  무참하게 패퇴하고 말았다. 

그런데, 이미 몰락하여 세인들의 기억에서 사라진

십지성궁의 이름이  언급되다니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군검풍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그러다 그는 다시 물었다.
"십지성궁에서 내가 무엇을 하기를 원하오?"
"녠! 그것은 십지성궁에 가보면 아실 것이오.

또한, 그곳에 닿으시면 원하는 모든 것을 알게 될 것이오!"
"생각해 볼 문제로군."
군검풍은 폭풍제왕검을 만지작거리며 서천을 주시했다.

그는 확실히 예의 괴음성이 제안한 것에 대해 흥미를 느끼고 있었다.
"좋소이다. 내일 아침까지 생각하실 여유를 드리겠소."
"...!"
예의 괴이한 음성은 다시 덧붙여 말했다.
"십지성궁을 가신다면 복연만이 있을 뿐 화(禍)는 절대 없소이다.

그것은 맹세할 수 있소. 잘 생각하시길 바라오."
군검풍은 고개를 끄덕였다.
"내일 아침 다시 얘기하도록 합시다. 지금은 선약이 있어서 나가보아야만하오!"
말을 마침과 함께 그는 탁자에서 몸을 일으켜 잠풍헌을 나섰다.
'야훼서시가 무엇 때문에 보자고  하는지 모르겠지만....

야훼원까지 다녀 오는 사이에 가부간의 결심을 해야 하리라!'
군검풍은 두눈 깊숙이 안광을 빛내며 계단을 내려갔다.

이내 그의 모습은 구름다리를 건너 화원 저편으로 사라져 갔다.
그러나....그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나선 그 발걸음이 다시 구문제독부로 돌아오는 데까지는

무려 삼년여의 세월이 걸리게 되리라는 것을....!
그리고,

촤아...!
군검풍의 모습이 잠풍헌에서 사라진 직후,

갑자기 연못가의 연꽃 그늘 아래서 하나의 붉은 인영이 유령처럼 치솟아 올랐다.
그 인영은 일신에 적포를 걸친 구척  거구의 곱추노인이었다.

허리에는 백근의 무게가 실린 피빛 추를 두르고 있었다.
그 인물은 바로 구문제독부의 총관인 혈추마타(血鎚魔駝) 동극하였다.
그가 왜 연못가에 몸을 숨기고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어쨋든, 혈추마타는 기이한 눈으로 군검풍이 사라진 쪽을 바라보았다.
그의 입에서 음산하고 낮은 중얼거림이 흘러나왔다
"흐흣! 소주! 소주는 영원히 십지성궁의 그늘에서 벗어날 수 없소이다."
그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득의의 눈을 번뜩였다.
"크녠! 십패천의 망나니들이 소주의 주위를 떠도는 모양이지만.... 

누구도 소주를 우리 십지마련(十地魔聯)의 손아귀에서 뺏아가지는 못한다."
알 수 없는 중얼거림과 함께 혈추마타의 모습은  이내 그 자리에서 연기처럼 꺼져버렸다.

마치 유령같은 신법이었다.
그러나 그런 적강신타는 꿈에도 모르고 있었다.
".....!"
근처의 은밀한 꽃 그늘 아래서 빛나고 있는 한 쌍의 지극히 맑고 아름다운 봉목이 있다는 것을.
그 눈빛은 지금까지의 모든 상황을 빠짐없이 지켜보고 있었다.
눈길의 주인은 병색이 완연해 보이는 초췌한 안색을 지닌 여인이었다.

물론 그녀는 병서시 군대려였다.
그녀의 뒤에는 짙은 흑염을 보기좋게 기른 한  명의 노인이 시립하고 있었다.
"후웃! 감히 소주를 충동하다니 간덩이가 부었군.

혈추마타, 언젠가는  나의 손에 쓴맛을 보리라.

나 철혈대공 초패강이 결코 그냥두지 않겠다."
흑염노인 초패강은 이글거리는 눈으로 혈추마타가 사라진 곳을 주시했다.
"...!"
하지만 군대려는 아무말도 없었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그녀의 눈빛은  깊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맑고 투명한 가운데 신비한 광채가  일렁거리는 눈빛,

그녀의 눈빛에 담긴 뜻을 추측해내기란 불가능했다.


북경의 대로변에 접어든 군검풍은 문득 걸음을 멈추었다.
그는 지금 긴히  보고 싶다는  야훼서시(野卉西施) 백리월영(白理月影)의 전갈을 받고

야훼원(野卉院)으로 가던 길이었다.
그런 그의 전면으로 한 명의 여인이 다가서고 있었다.
여인의 나이는 이십 전후 정도로 보였는데 키가  아주 커서 거의 군검풍 만큼이나 되었다.
육 척이나 되는 키의 이 장신 여인은 뭇 사람들의 시선을 잡아끄는 인상적인 용모를 지니고 있었다.
먼저 그녀의 탄력 넘치는 갈색 피부와 신비롭게도 푸른색을 띈 눈빛부터가 그랬다.
이목구비의 생김으로 보아 색목인(色目人)이 아님에도

그같은 벽안(碧眼)을 지녔다는 것은 그녀가 한가지 특이한 무공을 익혔다는 반증이었다.
그리고, 둘째로 시선을 끄는 것은 그녀의 의복이었다.
특이하게도 그녀는 푸른 빛이 도는 새의 깃털로  짠 장포를 걸치고 있었으며,

등에는 일 장 크기의 붕조의  날개모양을 한  피풍을 두르고 있었다.
그 뿐만이 아니었다. 그녀는 머리 위에 역시 붕조 모양의 투구까지  쓰고있었다.

붕조의 부리 밑으로 여인의 신비로운 자안이 투명하게 빛나고 있었다.
한 마리 학같이 훤칠하고  고고한 인상인 벽안의 여인은 

군검풍을 향해 규칙적인 큰 보폭으로 다가섰다.
군검풍은 두 눈에 이채를 띄우며 자신에게 다가오는 벽안의 여인을 주시했다.
'예삿 여인이 아니다. 새의 깃으로 의복을 해입다니....!'
그는 여인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하는 것을 느꼈다.
여인이 걸친 옷은 벽익천의(碧翼天衣)라는 것으로, 

남천무림(南天武林)의 전설적 보물이었다.
그것은 벽익천붕(碧翼天鵬)이란 신조(神鳥)의  깃으로 짜여져

수화(水火)가 불침하며 어떤 강기에도 찢기지 않는다.
하지만 그것은 이미 수백 년 전에 실전된 보물이었다.
그 전설적인 보물을 걸친 여인은 과연 누구란 말인가?
군검풍의 시선을 받으며 벽익천의를 걸친 장신의 여인은 그의 앞으로 다가섰다.
그러나 그녀는 군검풍에게 일별도  않고 그의 곁을 지나  대로 저편으로 멀어져 갔다.
"...!"
군검풍은 그녀의 뒷모습을 한동안 주시하고 있었다.
이상하게도 여인의 뒷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여인의 인상적인 외모 탓이었을까?

그녀의  독특하고도 아름다운 모습은 군검풍의 뇌리에 선명하게 자리잡았다.
그는 기이한 느낌에 사로잡히며 중얼거렸다.
"어쩐지 다시 볼 것 같은 예감이 드는군."
이어 그는 다시 전면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의 앞에는 하나의 화려한 장원이 우뚝 자리하고 있었다.

바로 북경에서 제일 유명한 기루인 야훼원이었다.


야훼원의 그림같이 정교한 누각들 위로도 노을이 부서져 내리고 있었다.
오늘 따라 놀빛은 유난히 붉고 선명하다.
야훼원의 저녁은 분주하고 화려하게 시작되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은 하루의 일과를 아침에 시작한다.

하지만 야훼원의 야화(夜花)들은 저녁무렵에야 비로소 꽃망울을 활짝 터뜨리며

생명의 물기를 머금고 빛을 발하기 시작한다.
야화들이 활짝 피어나 눈부신 빛깔과 향기를 뿌리기 시작하는 시각,

노을이 유달리 아름다운 저녁이었다.

-- 월영루(月影樓).

야훼원의 가장 깊고 조용한 곳에 외부와 완히  격리된 채 지어진 이층의 화려한 누각!

이곳은 월영루라는 이름 그대로 야훼원의 원주인 야훼서시 백리월영의 처소였다.
번잡한 것을 싫어하는 백리월영은  방이 십여개가 넘는 이  넓은 건물에 시녀도 없이 혼자 살고 있었다.

물론 한달전에 새로운 동거자가 생길  때까지의 이야기긴 하지만,

쪼르르르!
무릎을 꿇은 산월(山月)은 떨리는 손으로 조심스럽게 군검풍의 찻잔에 차를 따랐다.
"....!"
옆에 앉은 군검풍은 말없이 그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곳은 월영루의 일층에 자리한 거실이었다.
그를 초청한 야훼서시 백리월영은 중요한 손님의 접대 때문이니

잠시 기다려 달라며 산월에게 시중을 들게 하였다.

영리한 백리월영은 일부러 군검풍과 산월이 시간을  보내도록 배려를 해준 것이다.
군검풍의 끈끈한 시선을 온몸에 느낀 산월은 목덜미까지 발그레해졌다.
무려 한달여만의 재회였다. 그동안 군검풍은 한시도 산월을 잊은 적이 없었다.

백리월영의 말대로 남자 역시 첫 경험의 상대인 여자를 잊을  수가 없는 것이다.
게다가 군검풍은 그후 비록 강제로 당한 것이긴 하지만 십절천마후와 관계를 갖기도 했다.

여자를 알게 된  탓에 군검풍은 더욱 더 산월을  잊을 수가 없었다.
박속같이 희디흰 속살, 순박한 외모와는 달리 뜨겁고 격정적이던 잠자리에서의 행위,
산월을 떠올릴 때마다 군검풍은 몸의 일부가  불덩이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느끼곤 했다.

그리고 지금 그녀가 군검풍의 손이 닿는 지척거리에  있는 것이다.
그동안 산월은 여러모로 변해 있었다.

일개 숙수였던 몸에서 지금은 야훼원의 살림을 전부 관장하는 위치에 올라있는 것이다.
백리월영은 군검풍과의 약속을 지켜 그녀를 자신의  거처에 머물게 하고

심지어 그녀를 언니로 부르고 대접했다.
원주에게 결의자매로 대접받는 산월을  어느 누가 홀대할  수 있겠는가?
산월은 명실상부한 야훼원의 이인자가 되었고 이 모든 것이 하룻밤 군검풍의 수청을 든 결과였다.
하지만 지위는 변하고 형편은 좋아졌으나 산월의  차림은 여전히 소박했다.

그녀의 몸에 걸쳐진 것은 아무 치장도 없는 무명 적삼이었다.
잿빛의 헐렁한 그 무명 적삼 속에서 흐드러진  여체가 흥분에 떨며 감싸여 있었다.
살풋 열려진 저고리 섶 사이로 티끌 하나  없이 희고

양지유처럼 보드라워 보이는 젖가슴의 깊은 탐스럽고 계곡이 들여다 보였다.
군검풍의 눈 아래 내려다 보이는 산월의  그 젖무덤 계곡에서는 육향(肉香)이 서린

관능(官能)의 내음이 아지랑이처럼 피어올랐다.
어느 순간 군검풍은 자신도 모르게  산월에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은 산월의 저고리 섶을 파고 들었다.
"....!"
찻잔을 내밀려던 산월의 몸으로 파르르 경련이 스쳤다.
군검풍은 말없이 그녀의 따스하고  보드라운 육봉을 움켜쥐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젖무덤의 감촉, 

산월의 풍선처럼 부푼 젖가슴은  군검풍의 손으로도 다 움켜쥘 수 없을 정도로 크고 풍만했다.
"원....원주께서 곧 오실 것입니다!"
산월이 기어들어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말은 그렇게 해도  군검풍의 손을 거부하지는 않았다.

아니 어쩌면 그녀 자신이 간절히 원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군검풍은 말없이 손을 움직였고, 산월의 몸은 그의 손길 아래 급속히  달아올랐다.
오랜 세월 여자로서의 욕망을 잊고  있었던 그녀였다.

그 본능의  욕구가 일단 군검풍에 의해 되살아나자 그녀는 매일  밤을 고통으로 지새워야했다.

한창 욕구가 왕성할 나이인지라 그녀의 몸은 너무도 간절히 군검풍을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 한달여만에 기다리던 사람의 손길이  그녀의 육체를 애무하고 있는 것이다.
산월은 소매깃을 입에 틀어넣어 터져나오려는 신음을 억지로 삼켰다. 

하지만 그녀의 육체는 도저히 참을 수 없는 듯 절로 물결치듯 요동을 쳤다.
그 사이 군검풍의 손길은 점점 대담하게 아래로 이동했다.

산월은 군검풍의 손길이 지나는 피부에 마치 화상을 입는  듯한 작렬감을 느끼고 전율했다.
이윽고 군검풍의 손길이 산월의 치마 속으로 파고들었다.

이미 그같은 상황을 기대한 것일까? 산월은 무명 치마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고 있었다.
옥같이 매끄럽고 비단결처럼 따스한 산월의 허벅지가  군검풍의 손 끝에 만져졌다.
무릎을 꿇은 채 앉아있던 산월은 몸서리치며 꼭 붙였던 허벅지를 좌우로 벌렸다.
군검풍의 손길이 그 사이로 깊숙이 파고 들었다.
퍼득!
소맷깃을 입안에 틀어넣은 산월의 몸에 벼락이라도 맞은 듯 세찬 경련이 스쳤다.

가장 예민하고 이미 극도로 달아올라있는 그녀의 중심부로  어린 정인의 손이 헤집고 들어온 것이다.
그녀의 중심부는 이미 완연한 열탕으로 변해있었다.

깊은 샘물 뿐만 아니라 그 일대 계곡까지도 넘쳐흐른 춘수로 흥건히 젖어 있는 것이다. 

이미 제법 관록이 붙은 탓일까? 

군검풍은 집요하게 산월의  민감한 부분만을 골라 공략했고

산월은 몇 번이고 자지러드는 몸짓을 보였다.
어느덧 자연스레 산월은 군검풍의 무릎 위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은 자세가 되었다.
군검풍은 그녀의 한 손을 말없이 끌어당겨 자신의 중심부를 만져보게 하였다.
손 끝에 무쇠같이 충혈된 남성을 느낀 산월의  무르익은 여체에 세찬 경련이 스쳤다.

그리고 그 직후  산월은 일변하여 다시금 자신이  주도권을 쥐었다.
허겁지겁 군검풍의 허리띠를 풀고 바지를 벗긴 그녀는 무릎을 꿇은 자세로 상체를 일으켰다.

그리고는 한손으로 무명 치마를 걷어올려  말아쥐었다.
노을이 흘러드는 속에 아무것도 걸치지 않은 산월의 흐드러진 하체가 고스란히 들어났다.
한손으로 치마를 말아쥔 그녀는 다른 손으로

군검풍의 실체를 쥐고는 그위로 자신의 하체를 내리눌렀다.

이미 두 사람 다 충분히 준비가 된 탓에 결합은 일거에 거침없이 이루어졌다.
군검풍은 엄청난 흡입력을 지닌 늪지를 느끼며 산월의 살진 허리를 와락 움켜쥐었고,
소맷깃 대신 치마를 입안에 틀어넣은 산월은  날카로운 창에 궤뚫리기라도 한 듯

몸을 뒤틀며 군검풍의 목에 매달렸다.
그리고는 그녀는 군검풍의 무릎위에 걸터 앉은  자세로 

미친 듯이 하체를 흔들며 몸부림치기 시작했다.
군검풍은 활화산같이 터지는 산월의 관능의 불길에 그대로 휘말려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