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협지/폭풍세가

제6장 철사천부(鐵獅天府)의 기연(奇緣)

오늘의 쉼터 2014. 9. 30. 13:19

 

 

제6철사천부(鐵獅天府)의 기연(奇緣)

 

 

북경의 서북단, 만리장성이 멀지 않은 곳에  드넓은 석성(石城)의 폐허가 자리하고 있었다.
석성의 폐허 주위에는 온통 천년단목(千年檀木)이 빽빽하게 들어차 

하늘을 꿰뚫을 듯한 기세로 치솟아 있었다.
사자림(獅子林)-!
이것이 그 울창한 박달나무 숲의 이름이었다.
이 사자림에 둘러쌓인 페허는  불굴의 투혼을 자랑하던 한  문파의 오랜 유적이었다.

 

-철사자문(鐵獅子門)!

 

천 년 전, 마교(魔敎)와 정면으로 충돌하여 미증유의 투혼을 발휘했던 문파였다.
그러나 철사자문은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마교의  공세에

마침내 최후의 한명까지 장렬히 전사하여 명맥이 끊기고 말았다..
하지만 마교도 철사자일맥(鐵獅子一脈)의 진정한 뿌리는 끊지 못했다.

사자일맥의 뿌리는 바로 장경고인 철사천부(鐵獅天府)로 이어져 내려왔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오백 년 전, 철사황(鐵獅皇)이라 불리는 군가의 선조에 의해 철사자문은 부활되었던 것이다.

사자림으로 들어서던 군검풍은 잠시 발걸음을 멈췄다.
그의 눈에 주위를 빽빽히 메운 천년단목의 철사림이 들어왔다.

그것은 보기만 해도 절로 장엄하고 높은 기상이 느껴졌다.
"여기에는 혼(魂)이 배어흐른다. 천 년을 떠도는 투혼이...!"
스스스...!
천년단목의 숲을 흐르는 안개는 흡사 철사자문 전사들의 숨결인 양 느껴졌다.
군검풍은 그 단목의 숲을 둘러보며 나직이 탄식했다.
"그러나 철사자문의 투혼은 나의 것이 아니다.

안 됐으나... 철사자일맥은 이후로 완전히 끊기리라."
그는 침울한 어조로 중얼거렸다.

그런데, 바로 그 때였다.
"고연 놈이로고!"
"재질은 천년제일이나 풍기(風氣)를 지닌 놈이다!"
"어쩌다 우리 군(君)가에서 바람의 기운을 지닌 아이가 태어났는가?"
갑자기 웅웅! 하는 진동을 일으키며  몇 줄기 음성들이 군검풍의 고막을 진동시켰다.
'웃!'
군검풍은 고막이 터질 것 같은 충격을 느끼며 안색이 변했다.
하지만 그가 미처 놀라움을 추스리기도 전에 또  다시 거창한 폭갈이 들려왔다.
"오너랏!"
"그릇된 바람기를 사자혼으로 부수어 주마!"
그 폭갈과 함께 네 방향에서 거대한 잠력이 광풍처럼 일어났다.
츠으.....츠츳!
우르르...콰콰...!
군검풍은 일순 움찔했다. 하지만 이내 그의 신형은 허공으로 떠올랐다.
"후훗, 역시 태상조들다우십니다!"
허공에 떠오른 군검풍은 태연한 표정으로 미소 지었다.
하지만 지금 그는 웃을 처지가 못되었다.

그의 온 몸은 부서져 나갈 듯한 지독한 고통을 당하고 있었다.
우르르...!
감당할 수 없는 거대한 잠력은 순식간에 군검풍을  백 장 높이로 끌어올렸다.

군검풍의 눈 아래로 울창한 사자림이 까마득히 내려다 보였다.
그 사자림 너머, 끝이 보이지 않는 하나의 단애(斷崖)가 보였다.

흡사  도끼로 찍어놓은 듯한 가파르고 위태로운 단애였다.
우웅...!
우르르.....츠츠...!
잠력이 뻗어나오고 있는 곳은 바로 그 단애 아래쪽이었다. 

그곳으로부터 막강한 강풍이 뻗어나와 군검풍의 전신을 휘감아왔다.
"헛...!"
군검풍이 미처 놀랄 사이도 없었다. 

무방비 상태로 허공에 떠있던  그의 신형은 그대로 절벽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휘...익!
눈 깜짝할 순간, 군검풍은 백 장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자, 비로소 단애의 바닥이 보였다.
그 까마득한 단애의 아래에는 네 명의 노인들이  원을 그리고 앉아 있었다.
그들은 겉으로 보기에 대체 나이가 얼마나 되었는지  종잡을 수 없어 보였다.

백발이 성성하고 주름살 투성이의 노인이 있는가 하면 청수한 중년인의 모습도 보였기 때문이었다.
우웅.....츠츠츳!
우르르...!
전신을 압도하는 막강한 강풍은 바로 그 노인들에게서 쏟아지고  있었다.
노인들은 단애 아래로 내려온 군검풍에게 일제히 시선을 집중했다.
"헛허. 생긴것은 번지르하구먼. 손주를 낳으면 금동옥녀(金童玉女)를 낳겠군."
"허허! 어쨋든 군가의 후예가 아닌가?"
그들은 바로 철사사천왕이라 불리는 노인들이었다.
군검풍은 이윽고 그들의 옆에 내려섰다.
"소손, 태상조들을 뵙습니다."
이어, 그는 사대천왕에게 차례로 배례를 올렸다.
"흐흣! 어쨋든 가주는 도리를 아는  분이군.

우리 늙은이들이 무료할까봐 이렇게 소일거리를 보내주다니 말일세."
"흐흣! 절은 나중에 해도 좋다.

이곳에서의 사흘은 네게는 지옥과도 같을테니 그 후에도 절을 하고 싶은 마음이 생길지 모르겠군!"
사대천왕은 군검풍의 뛰어난 자질을  한 눈에 알아보았다.

그것을  확인한 그들은 몹시 흡족한 듯 기분좋은 표정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하나같이 손자를 바라보는 인자한 할아버지와 같이 

뜨거운 정이 담긴 눈길을 군검풍에게 보내고 있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적적하게 지내온 그들에게 있어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인지도 몰랐다.
더구나, 군검풍이야말로 군가의 진정한  후예라고 믿고 있는  그들이기에
그에게 각별한 관심과 애정을 가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사자천왕(獅子天王).
-만수천왕(萬手天王).
-패천혈왕(覇天血王).
-천래음왕(天來音王).

이들이 달리 철사사천왕(鐵獅四天王)이라고도 불리는 군씨일족의

최고 원로 사대천왕(四大天王)들이었다.
그들은 제각기 한 방면에서 무적자 들이었다.

그들이 지닌 신기는 하나같이 천지를 진동시킬만한 놀라운 위력을 지녔다.
사자천왕은 기공(氣功)으로,
만수천왕은 한 자루의 철부(鐵斧)로 태산이라도 부술 수 있는 패도강자였다.
그리고, 패천혈왕은 권법으로,
천래음왕은 모든 악기(樂器)를 다루는 음공제일고수로 각기 패도적인  위치를 확보했던 인물이었다.

"네가 들어가 사흘을 보내야 할 곳은 바로 저곳이다!"
사대천왕의 첫째인 사자천왕이 군검풍에게 한 곳을  가리켜 보이며 말했다.
사자천왕은 네 사람 중  가장 연배(年輩)가 높았다.

하지만  그의 외모는 청수한 중년인의 모습이었다.

이미 그는 반노환동(返老煥童)의 경지에 이르렀던 것이다.

그는 실상 군씨일가 최고의 고수였다.
군검풍은 말없이 사자천왕이 가리키는 곳을 바라보았다.
"...!"
그러던 군검풍의 두 눈이 이채를 발했다. 단애 저편에 하나의 커다란  석동이 보였던 것이다.

<철사천부(鐵獅天府)>

석동에는 대전체(大篆體)로 쓰여진 그같은 네  자의 글씨가 깊이 새겨져있었다.
그렇다. 그곳이야말로 철사자문의 전설적인 투혼의 비밀이 숨어있는 곳이었다.

철사천부의 석동은 철문으로 굳게 닫혀 있었다.
철사자문의 장경고였던 철사천부는 본래 수십 장 두께의 석벽 뒤에 교묘히 감춰져 있었다.
그러던 것이 이백여 년 전 북경 일대를 휩쓴 지진의 여파로 석벽이 무너지면서

팔백여 년 만에 그 모습을 세상에 들어내었고,

마침 이곳을  지나던 군씨성을 가진 백면서생에 의해 발견되기에 이른 것이다.
'저곳이 바로 군씨의 발원지....!'
군검풍은 자신도 모르게 가슴이 두근거리는 것을 느꼈다.

그런 그의 귓전으로 다시 사자천왕의 웅혼한 일갈이 들려왔다.
"가라! 사흘의 시간은 결코 길지  않다. 그 동안 너는  세 가지 절기만을 선택하도록 해라!"
"분부받겠습니다!"
군검풍은 대답하고는 거침없이 석동으로 다가갔다.
곧 철문 앞에 이른 군검풍은 걸음을 멈추었다.
철문은 온통 검푸른 이끼로  뒤덮여 있었는데 철문 위에는  이런 글귀가 적혀 있었다.

<철사자일맥이 당한 치욕을  잊지 않으리라! 마교는 언제고 철사자문의 후예에 의해 무너질 것이다.
 철사대제(鐵獅大帝)>

그것은 비장함이 느껴지는 글귀였다.
"철사대제...!"
군검풍은 철문에 적힌 글을 되뇌이며 나직한 신음을 발했다.
'마교에 패망했던 천 년 전의 철사자문의 문주겠구나!'
군검풍은 마치 그의 혼이 철문 안에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이어, 그는 철문으로 손을 뻗었다.

그러자, 이끼가 벗겨지고  철문에 새겨진 웅장한 문양이 드러났다.

그것은 거대한 사자가 포효하는 모습이었다.
끼긱!
마침내 육중한 굉음과 함께 철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흡사 사자의 울음인양 웅후한 마찰음이었다.
"....!"
군검풍의 눈이 형형한 빛을 뿜는 중에 철문은 안쪽으로 천천히 열렸다.
이윽고 철문이 완전히 열리자 군검풍은 한차례 심호흡을 하고는 철문 안으로 일보를 내디뎠다.
헌데 그가 철문 안으로 완전히 들어선 순간,
쿠쿵!
돌연 등 뒤에서 철문이 육중한 소리를 내며 닫혔다.

하지만 군검풍은  조금도 동요치 않고 철문 안으로 계속 걸어 들어갔다.

얼마나 걸어 들어갔을까?
츠으...!
군검풍의 얼굴이 갑자기 안족에서 번져나온 빛에 의해 붉게 물들었다.
그곳은 철문 안으로 길게 이어진 통로의 끝이었는데

천정에는 수천 수만개의 야광주가 현란하게 붉은 빛을 발하고 있었다.
그곳은 방대한 규모의 지하서고(地下書庫)였다.
그 규모는 실로 어마어마하여 자그마치 백 개의 서가(書架)가 줄을  잇대어 늘어서 있었다.
한 개의 서가에 꽂힌 비급만 해도 무려 천여권에 달했다.

가히 보통 사람이 백 년을 읽어야 할 엄청난 분량이었다.
군검풍은 그 방대한 분량의 비급들을 둘러보며  놀라움과 찬탄을 금치못했다.
"군씨일족이 짧은 시간내에 강해진 것은 결국 우연이 아니었다. 

가히 바다와 같은 이런 저력이 있기에 지금같이 강해진 것이다."
그는 고개를 끄덕이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서고의 중심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곳에는 하나의  석탁(石卓)이 놓여 있었는데 그 석탁 위에는 십여 권의 비급이 따로 놓여 있었다.
그런데, 그 비급 옆에는 한 자루의 옥검(玉劍)이 번쩍이는 청광을 발하며 꽂혀 있었다.
군검풍의 시선이 이채를 띈 채 옥검을 훑었다.

놀랍게도 옥검의 검신에는 수없이 많은 글자가 흡사 검의 무늬처럼 새겨져 있었다.

-철사삼율(鐵獅三率).

세 가지 철사의 율법(律法). 검신에 새겨진 글자는 바로 철사군가의 율법이었다.
군검풍은 그것을 읽기 시작했다.

-- 철사천부에 드는 자, 다음 세 가지 율법을 지켜야 한다.
첫째, 여타의 무공을 익히기에  앞서 철사십대무경(鐵獅十大武經)을 먼저 독파해야 한다.
둘째, 어떤 경우라도 무적(無敵)의 자신이 있기  전에는 철사절기를 펼치지 마라.

마교가 아직도 철사일맥의 단절을 노리고 있기 때문이다.
셋째, 검을 들면 결과를 봐야 한다. 적을 쓰러뜨리든, 자신이 쓰러지든 반드시 결과를 확인하라.

이것이 옥검에 새겨져 있는 철사의 세가지 율법이었다.
군검풍은 쓴 웃음을 지었다.
"지독한 율법이군.

본시 군가는 문가(文家)였는데  기연으로 철사천부를 열게 된 후 가장 지독한 무가(武家)가 되었다."
그것은 실로 놀라운 변신이었다.
"철사천부에 들어온 이상 철사삼율은 지킨다.

그러나 그것은 내가 바람이 되기 전까지만 지켜질 것이다."
군검풍은 침중한 음성으로 나직이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석탁 위에 놓여있는 열 권의 비급에 손을 가져갔다. 

그것은 천년 이전의 비급으로 금방 삭아버릴 정도로  오래된 비급에서부터

최초에 기록된 비급까지 종류가 다양했다.
<철사십대무경(鐵獅十大武經)>
열 권의 비급을 일컬어 그렇게 불렀다. 

그 바탕은 천 년 전  철사자문이 남긴 한 권의 비급에서 기원하고 있었다.

-철사패북경(鐵獅覇皇經).

바로 이것으로, 군씨일가는 철사패북경을 바탕으로

오백 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이 흐르는 동안 그 내용을 수없이 수정하고 보완하여 발전시켜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것은 당대에 이르러 열 권의 무경, 즉 철사십대무경으로 완성되었던 것이다.
"하루의 시간은 철사십대무경에 뺏기겠군."
군검풍은 중얼거리며 한 권의 비급을 집어들었다. 그것은 철사패북경이었다.

누런 표지에 제목은 대전체로 쓰여져 있었다.
군검풍은 표지를 잠시 본 뒤 책장을 넘겼다.
"내가 이것을 보는 것은 단지 율법을 지키기 위해서일 뿐이다. 

한 번 보면 무엇이든 기억해 버리는 내 기억력이 이럴 땐 거추장스럽게 느껴진다
만.... 그러나 철사의 절기는 결코 나의 손에서 펼쳐지지 않으리라."
그는 스스로에게 다짐하듯 중얼거렸다.

이윽고,  표지가 넘겨지고 철사패 북경의 절기가 나타났다.

철사패황심결(鐵獅覇皇心訣).
패천권결(覇天拳訣).
사자신검결(獅子神劍訣).
무적사자행(無敵獅子行).
대사후(大獅吼).
철사대팔식(鐵獅大八式).
.....

그것은 하나같이 천 년 이전에 잊혀진 패도절기들이었다.
그것들은 마치 봇물 터지듯 군검풍의 머리 속으로 밀려 들어왔다.
군검풍의 기억력은 놀라왔다.

순식간에 수많은 절기가 한 자도 빠지지 않고 그의 뇌리속에 기억되고 있었다.
한 번 본 것은 그대로 기억하고 마는 놀라운 능력.

그의 그런 능력은  그가 원치않는 철사절기를 단 한번에 그의 뇌리속에 저장시키고 말았다.
갈수록 책장을 넘기는 속도는 점점 빨라졌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군검풍은 자신도 모르게 무아경으로 빠져들었다.
마침내, 철사패북경의 마지막 장이 넘어갔다.
군검풍은 책을 덮었다.
이어, 그는 다시 두 번째 비급에 몰두해 갔다.
얼마의 시각이 지났는지 두 번째의 비급이 석탁  위에 내려지고 다시 또 다른 비급이 들추어졌다.
마침내, 군검풍은 마지막 비급을 읽기 시작했다.

-- 질풍검경(疾風劍經).

그것은 철사십대무경 중의 정화로서 군씨일가의 오백 년 잠력이 담긴 결정체였다.
질풍검경을 읽던 군검풍의 눈이 갑자기 강렬한 빛을 발했다.

비급의 서두에는 철사군가의 시조가 남긴 수려한 필체가 적혀 있었다.

-- 후손에게 나 철사황 군명(君命)이 남긴다.

군검풍은 질풍검경에 몹시 흥미를 느꼈다.

질풍공자라는 별호를 지닌  그가 질풍검경에 흥미를 느낀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질풍검경? 우연치고는 범상치 않은 우연이군. 하하...나의 별호와 일치하는 이름을 지녔다니...!"
군검풍은 미소를 지으며 계속 글을 읽어나갔다.

-- 노부는 백 년간을 철사천부에서 오직 무공일도에 전념하며 참수했다.
그 결과 어느 정도 자신감을 지니게 되었을때 한 가지 영감이  떠올랐다.
그것은 한 번 펼치면 만류를 깨뜨릴 수 있는 거력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 다시 십 년을 고심하여 그 거력을 한 가지 검결로 형상화시킬 작정을 했다.

이른바 질풍검결이 그것이다.

"질풍검결...!"
군검풍은 책에서 잠시 시선을 떼며 중얼거렸다. 웬지 그는 질풍검결에 마음이 끌렸다.
이어, 그는 다시 책장에 시선을 보냈다.

-- 하지만 노부의 욕심이 너무  과했다는 것을 머지않아 깨닫게 되었다.
죽음을 앞두고서야 노부는 질풍검결이 결코 일대(一代)에서 이루어질 수 없는

검결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노부는 통탄과 함께 실망을 금하지 못했다. 하지만 결코 포기할 수는  없었다.
아마도 그것은 천년 세월이 지나야 완성될지도 모른다.

그러나 노부는 이를 군가의 능력을 시험해 볼 좋은 기회라 생각하고

여기 노부의 보잘 것없는 심득이나마 그 기초를 남긴다.

후손은 부디 정진하여 노부의 간절한 뜻을 이루어 주기 바란다.

이같은 내용 아래로, 복잡하고 난해한 검결이 빽빽히 적혀 있었다.
"...!"
하지만 군검풍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그 구결을 읽어 나갔다.
질풍검결-!
그것은 일단 한 번 펼쳐지면 누구라도 막을  자가 없는 초극강의 검결이었다.

그것은 오백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대부분 완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검결을 마무리 짓는 일은 아직 난제로 남아 있었다.

이제  검날을 세우는 일만 남은 보검이라고 할까?
이윽고, 군검풍은 마지막 비급인 질풍검결마저 다 읽고 석탁에  내려놓았다.
얼마나 많은 시각이 흘러갔는지 알 수 없었다. 군검풍은 그제서야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이어, 그는 수를 헤아릴 수 없을만큼 빽빽한 서책들로 꽉 들어찬  서가로 다가섰다.
"철사절기를 쓰지 않을 작정이니 이 기회에 달리 대용(代用)할 절기를 찾는 것도 괜찮겠다.

이곳에는 아직 아무도 연마하지 않은 비급이 수두룩할 테니까!"
군검풍은 서가에 진열된 비급들의 제목을 빠르게 훑어보기 시작했다.

패엽보경(貝葉寶經), 벽력천화경(霹靂天華經), 무적도보(無敵刀譜), 대천제왕경(大天帝王經),

혈수마경(血手魔經), 사령화혈급(邪靈化血給), 유가천기공결(儒家天氣空訣), 천도연검록(天刀鍊劍錄),

해풍검보(海風劍譜), 금강수미경(金剛須彌經)...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비급들. 불문(佛門)과  도가(道家), 유문(儒門),

속가(俗家)등 구류의 실전절기들이 산같이 쌓여 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중원의 절기가 아닌 해외변방의 절기들도 무수히 많았다.

사후마경(邪吼魔經), 뇌음파천보(雷音破天譜), 천룡유급(天龍幽  ), 범천뇌공경(梵天雷空經),

부상인자술도해(扶桑忍者術圖解),   뇌정팔보(雷霆八譜),묵룡일도류(墨龍一刀流),

섭혼환상혈경(攝魂幻像血經), 서천요지비해(西天遙地秘解)...

천축(天竺), 서역(西域), 관외(關外), 부상(扶桑)...
구주팔황에서 기원한 절기들을 담은  비급의 숫자는 가히  어마어마했다.
그것들 중 단 하나만  무림에 흘러들어도 온 천하가  발칵 뒤집혀지기에 충분할 정도였다.
그러나, 그 수없이 많은 절정비급이 쌓여 있었지만 정작 군검풍의 마음을 뺏는 비급은 눈에 띄지 않았다.
군검풍은 저으기 실망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모두가 평범하다. 뛰어나기는 하나, 절정인 것은 하나도 없다."
그는 고개를 흔들며 중얼거렸다. 그 어떤 비급의 절기도  철사십대무경을 능가하는 것이 없었던 것이다.
군검풍은 이번에는 서고의 가장 후미진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흠, 이곳이 마지막이군."
그곳의 서가에는 낡은 비급들이 아무렇게나 쌓여 있었다.

그것들은  군씨일가와 철사자문이 일고의 가치도 없다고 판단하여  제멋대로 버려진 비급들이었다.
그러나 군검풍은 그 버려진 비급들에 관심을 가졌다.
"진주는 진흙 속에 묻혀 있는 법, 이 중에도 나의 마음에 드는 것이 없다면...

철사천부는 날 실망시킨 것이다."
군검풍은 무릎을 굽히고 버려진 비급들을 손에 집히는대로 한 권 집어들었다.
"...!"
무심코 집어든 비급의 책장을 넘기던 그의 얼굴이 갑자기 붉게 물들었다.

-- 극락환희경(極樂歡喜經).

그것은 다름아닌 하오문에서 만들어진 방중술(房中術)에 대한 음서(淫書)였던 것이다.
책의 첫 장부터 차마 민망하여 읽을 수 없는 원색적인 내용이 시선을 자극했다.

뿐만 아니라, 남녀가 짐승같이 얽혀 있는 낯뜨거운  도해(刀解)가 온통 책자를 가득 채우고 있었다.
군검풍은 그 자극적인 음서의 내용에 절로 얼굴이 화끈거렸다.
"이곳의 책들을 왜 쓰레기같이 쌓아 놓았는지 알만하군."
그러나 군검풍은 그것을 내려놓지 않고 계속 읽어나갔다.
"심기가 허한 자라면 음서라 하여 보기를 꺼릴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들과 다르다."
군검풍은 신비한 눈을 빛내며 쉬지않고 책장을 넘겨나갔다.

오직 그는 새로운 내용과 다양한 분야에 대한 지식을 얻고자 하는 욕심뿐이었다.
극락환희경의 내용은 다양했다.
방중술(房中術), 미술(媚術), 채음보양술(採陰補陽術) 등이 아주 상세히 기재되어 있었다.
그런데, 극락환희경을 읽어가던 군검풍은  점점 감탄을 금치못하게  되었다.
"으음...!"
뜻밖에도 극락환희경은 아주  정연한 이론을 바탕으로  저술되어 있었던것이다.

그것은 흔히 음서(淫書)라 하여 보기를  꺼리는 사람들의 심리를 교묘히 배신하고 있었다.
우주만물의 근원이 되는 양과 음의 조화야말로 이 세상을 움직이는 거대한 힘이 된다는

신비하고도 오묘한 진리가 그  속에 포괄적인 의미로 함축되어 있었다.
군검풍은 읽을수록 감탄을 거듭하며 그 내용에 빠져들어 갔다.
그런데, 얼마나 읽어 나갔을까?
군검풍은 손을 멈추며 고개를 갸웃했다.
"책장이 붙어버렸군."
그가 읽고 있는 부분은 극락환희경의  가장 뒷부분에 속한 몇  장이었다.
그런데, 책갈피 사이에 무엇이 끼었는지  서너 장의 갈피가 서러  맞붙어있는 것이었다.
군검풍은 책을 그만 읽을까 하다가 곧 고개를 흔들었다.
"기왕 본 것이니 마저 읽어야겠지."
그는 이렇게 중얼거리며 맞붙은 책갈피를 조심스레 떼어 내었다. 

다행스럽게도 책갈피는 상하지 않고 깨끗하게 떨어졌다.
그런데, 이 때였다.
툭...!
무엇인가 책갈피 사이에서 군검풍의 발밑으로 떨어졌다.

그것은 아주  얇고 가벼운 물건으로 맞붙은 지편 사이에 감추어져 있다가 지편이 떨어지자 드러났던 것이다.
"무엇이지?"
군검풍은 허리를 숙여 발 끝에 떨어진 물건을 집어들었다.
"이것은 장갑이 아닌가?"
군검풍의 눈이 번뜩 빛을 발했다.
그의 손에 들린 물건. 그것은 아주 기이하고 얇은 하나의 장갑이었다.

무엇으로 만들었는지 지극히 얇고 반투명했으며, 표면에 검푸른 빛의  비늘 모양이 떠오르는 장갑이었다.

그 비늘은 흡사 용의 비늘인 듯이 보였다.
"글이 있다!"
군검풍의 눈이 번쩍 이채로 빛났다.

기이한  장갑의 표면에는 용린(龍鱗)과도 같은 검은 비늘 모양에 깨알보다 더 작은 글들이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도 작고 은밀하여  범인이라면 읽을 엄두 조차  내지 못할 정도였다.

십만 권의 경서를 읽어 고도의 집중력을 지닌 문사가 아니라면 결코 판독할 수 없는 글이었다.
하지만 군검풍에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어렸을 때부터 책 읽는것을 밥먹기 보다 더 좋아했던 그는 집중력과 끈기가 누구보다 뛰어났다.
군검풍이 눈에 들어온 글의 내용은 이러했다.

-- 사념(思念)에 빠지지 않고 극락환희경을 끝까지 읽은 그대의 정력(定力)에 치하를 보낸다.

그런 뜻으로, 여기 살문제일기병인 잠형묵린갑(潛形墨鱗鉀)을 남긴다.

"잠형묵린갑?"
군검풍은 고개를 갸웃하며 의아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그 이름은  처음 들어보는 것이었다.

이어, 그는 예의 검은 비늘 문양의 수갑을 들어보았다.
하지만 그는 미처 모르고 있었다. 자신의 손에 들린 그 이상한 장갑이 얼마나 가공스러운 물건인지를.
잠형묵린갑...!
그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고금오대신병(古今五大神兵)의 서열 오위인 기병이라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어린 아이의 손에 끼워지더라도 만년한철의 벽을 으스러뜨릴 수 있는

무서운 마력이 숨겨져 있다는 것이었다.
이것이야말로 보이지 않는 암흑의 세계에 사는 살수들이라면

꿈에서라도 얻기 원하는 살문제일천병(殺門第一天兵)이었다.
그 사실을 알리없는 군검풍은 그저 호기심어린 표정으로 글을 계속 읽어 나갔다.

__노부는 무영환자(無影幻刺)라는 인사(忍士)다.
평생 구천구백구십구 번의 살인을 시도했으며, 단 한 번도 실패하지 않았다.

그런 가운데 경험이 누적되어 노부의 피묻은 손에서는 가장 효과적인 살수가 완성되어 갔다.

군검풍은 안면을 찡그렸다.
"인사(忍士)....! 사람백정이었던 인물의 글이라니...!"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이지러졌다.
자객(刺客)-!
타인의 약점을 노려 목숨을  빼앗는 그 부류는 군검풍이  가장 혐오하는 부류의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검풍은 무영환자라는 상고의 살수가 남긴 글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그것은 기이한 흡인력을 지닌 듯 군검풍의 관심을 끌어들이고 있었다.

그의 글은 계속되고 있었다.

-- 이로하여 만들어진 것이  환상살법(幻想殺法)이다.

즉, 이는 피살자를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죽게 하는 가장 완벽하다고  자부할 수 있는 삼종살법(三種殺法)이다.
.....

무영환자(無影幻刺)-!

그의 이름은 역사의 어느 곳에서도 발견되지 않았다.
어둠속에서 살다간 자객.

그야말로 철저히 역사의 그늘속에 묻혀 있는 인물이었다.
전국(戰國) 말엽, 대난세는 헤아릴 수 없는 자객들을 만들어 냈다.

무영환자는 그들 중 한 명으로 그저 조금 특출한 자객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는 무수한 사람들의 목을 베며 그들의 고통스런 최후를 목격했고,

그들의 고통에 인간적인 동정을 느꼈다해서 그는 고통없이 목을 베는 방법을 연구했다.
이런 그의 철학(?)은 난세의  자객으로서는 찾기 힘든  특이한 것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것은 살수의 원칙에 어긋나는 일인지도 몰랐다.
당시의 자객이든 오늘날의 자객이든 자객이라면 일체 감정을 배제시켜야만 했다.

따라서, 흔한 인정이나 동정 따위는 그들에게 있어 사치한 감정에 지나지 않았다.

인간적인 감정이란  목을 베는데 있어 가장  불필요한 장애가 되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살수로서의 불문율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이런 면에서 볼 때, 무영환자는 특별한 살수였다.
그는 표적된 자를 살해하되, 가장  효과적으로 고통 없이 죽이는  방법에 골몰했던 것이다.
그가 골몰하여 생각해 낸  방법은 세 가지 살식(殺式)이었다. 

구천 구백구 명의 생명을 대상으로 창안해낸 살식은 과연  놀라운 효과를 지닌 것이었다.

<환상살법(幻像殺法)>

-- 전궁인(電弓刃).
-- 환룡섬린(幻龍閃鱗).
-- 극락쇄심인(極樂碎心印).

이것은 구천구백구십구 명의 목숨을 벤 댓가로 만들어낸 가장 인정이 넘치는 살식이었다.

전궁인...
한 조각의 강편( 片)이 전궁같이 흐르면 피살자는 자신의 생명이 

사라지는 것을 조금도 느끼지 못하고 황천으로 간다.

환룡섬린...
무형무성의 찬란한 은빛을 발하는 절정의 살인수(殺人手).

피살자는 생시의 표정을 그대로 떠올  채 생명을 잃는다.

그야말로  오싹 소름이 끼치는 극치의 수법이다.
시신은 삶의 표정을 그대로 지닌 채  목부분 천돌혈에 흐릿한 용린흔(龍鱗痕)만을 남긴다.

극락쇄심인...
이것이야말로 살인술의 절정이라 할 수 있었다.

피살자는 생명이  끊어지는 순간 야릇한 쾌감에 전율하며 죽는다.
시신의 얼굴에는 황홀함을 느끼는 듯한 미묘한 미소까지 떠오른다. 

하지만 정작 내부는 천가닥 만가닥으로 걸레조각처럼 찢겨져 죽게 되는 잔혹하고도

환상적인 살인수법이었다.

그야말로 극락경에 도취되어 처참한 죽음을 당하는 수법인 것이다.

군검풍의 이미에는 땀이 흐르고 있었다.
"지독하다. 어찌 인간의  두뇌에서 이런 살인수법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이는 그로서는 실로 듣도 보도 못한 전율스러운 살인수법이었다.
"나의 손에 들어오길 잘했다. 자칫 흉사(兇士)의 손에 이것이 들어갔으면 천하가 대혈란에 빠졌을 것이다."
군검풍은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이어, 그는 소맷속에 잠형묵린갑을 집어넣었다.
"이렇게 잔혹한 수법은 없애버리는 것이 좋겠다. 무형환자란 분에게는 안된 일이지만 어쩔 수 없다."
군검풍은 탄식하며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몸을 일으켰다.

그런데, 일어서던 그는 흠칫하는 기색을 지었다.
"음...?"
책더미 사이에 낀 거므스름한 물체를 발견한 것이었다.

그것은  군검풍이 극락환희경을 빼내느라 책더미 속에 숨어있다가 드러난 것이었다.
"비급이 아닌 물건도 있었단 말인가?"
군검풍은 의아함을 느끼며 예의 그 거무스름한 물체를 빼냈다.
먼저 묵직한 느낌부터 들었다. 그것은 녹인 잔뜩 슬어있는 둥근 쇳덩이였다.
두께는 한 푼 가량 되어 보였고, 크기는 손바닥만한 했다.

그런데,  그 용도가 모호했다.
"무엇에 쓰던 것...윽!"
둥근 쇳덩이를 들고 살펴보던 군검풍. 그의 안면근육이 갑자기 크게 꿈틀거렸다.

둥근 철판에서 돌발적으로 튀어나온 예리한 날에 손가락이  베었던 것이다.
땅...!
군검풍은 손가락이 잘리는 듯한 통증을 느끼며  그것을 바닥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하지만 놀라운 일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았다.
츠으으...!
쩌정!
일순 삼엄한 예기가 폭풍같이 일어나더니 순식간에  철사천부를 가득 채우는 것이었다.
"어엇! 이...이것은...!"
군검풍은 흠칫 놀랐다. 그는 눈을 크게 뜬 채 바닥에 떨어진 철판을 바라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그것은 놀라운 변신을 하고 있었다.
표면을 덮고 있던 녹이 떨어져 나가고 본래의 모습을 드러낸 둥근  물체,
뜻밖에도 그것은 섬뜩한 묵광을 발하는 하나의 륜(輪)이 아닌가!
그것은 아주 특이한 구조를 지닌 륜이었다.
몸체에는 날카롭고 예리한 세 개의 날(刃)이 달려 있었다.

그리고 평시에는 접어서 손바닥 안에 넣을 수 있을 정도로 작은 크기로 축소시킬 수도있었다.
뿐만이 아니었다. 묵광을 발하는 그 날카로운 륜은 섬칫하도록 강한 살기를 뿜어내고 있었다.
군검풍은 이 기이한 륜이 풍기는 독특한 느낌과  강한 살기에 흠칫 몸을 떨었다.
"살기가 무척 강한 놈이다."
하지만 그럴수록 그의 눈에는 강한 호기심의 빛이 떠올랐다.

그의 손에서는 여전히 피가 흐르고 있었지만 그는 상관치 않았다.
그는 이번에는 손가락을 베지 않도록 조심하며 다시 륜을 집어들었다.
"...!"
군검풍은 그 기형의 륜을 자세히 살펴보았다.
그러자, 륜의 표면에 깨알 같은  전자체의 글씨가 새겨져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 폭풍패천류(暴風覇天流)에 영광 있으라.

그것은 천수백 년 전에 새겨진 것이었다.
"폭풍패천류?"
군검풍은 의아한 표정으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이어 그는 다시 륜에 새겨진 글씨를 읽어 갔다.
그 륜에는 천하무림이 잊고 있는 놀라운 고사가 기록되어 있었다.

-- 폭풍패천류는 강하고 위대하다. 

그런데, 그것을 시기한 마교(魔敎)와 십지마련(十地魔聯)이 비겁하게 연수하여  우리 폭풍패천류를 습격해  왔다.

나 폭풍지존(暴風至尊)은 폭풍패천류의  영광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중과부적이다. 일만명을 죽였으나 적의 수는  끝이 없다. 점점 기력이 소멸되어 간다...

"음...!"
군검풍의 입에서 자신도 모르게 가는 신음이 새어나왔다.

딱 꼬집어 무엇이라 표현할 수는 없었지만 폭풍지존의 글을 읽는  동안

그는 기이한 흥분과 긴장, 그리고 관심을 느꼈다.
그 짧은 글에 나타나 있는 것만 보더라도 폭풍지존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강한 성격을 지녔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었다.
글에 나타나 있는 폭풍지존의 어조는 비장하기 그지 없었다.

-- 본존은 회복치 못할 중상을 입었다. 이제 후사를 생각할 때이다.

적의 포위망이 점점 좁혀들고 있다. 

이제 폭풍삼보(暴風三寶)를 상수(湘水)에 띄워 보낼 것이다.

"...!"
군검풍은 마음이 무거워졌다. 폭풍지존이  처했던 당시의 긴박한  모습이 눈에 선하게 떠오르는 것 같았다.
숨막히게 좁혀오는 적의 포위망. 그 급박한 상황속에서도

후사를  생각하고 빈틈없이 행동하는 침착한 폭풍지존의 모습이...

-- 폭풍천검(暴風天劍), 대폭풍륜(大暴風輪),  폭풍철경(暴風鐵經)은 천하로 흘러들 것이다.

이를 얻은 연자(緣者)에게  부탁하노니 반드시 마교와 잠형마류를 깨쳐주기를 바라노라.

나 폭풍지존의 한을 담아 폭풍륜에  두가지 절기를 남긴다.

'두 가지 절기...!'
군검풍의 눈이 섬광을 발했다.
그가 들고 있는 륜은 바로  폭풍삼보 중 하나인 대폭풍륜이었다. 

그것은 두 가지 절기의 요결을 담고 있었다.

-- 폭풍파천황결(暴風破天荒訣).
-- 폭풍굉천뢰(暴風宏天雷).

그것은 실로 무서운 힘을 지닌 초극강의 륜결이었다.

군검풍은 흥분한 눈빛으로 구결을 읽어갔다.
폭풍파천황결은 일신의 내공을 순간적으로 십 배로  증폭시켜 펼치는 초 강마공이었다.
그리고, 폭풍굉천뢰는 대폭풍륜을 펼쳐내는 초식이었다.
상상을 불허하는 가공할 위력이 담긴 죽음의 폭풍륜법.

그것이 한 번  펼쳐지면 수이 두 가지 륜결이야말로 조금도 인정이 부여되지 않은 잔혹하고 비정한 무공이었다.
그러나, 위력이 막강하고 절륜한 반면, 이에는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그것은 극도의 내공 소모를 요하므로 한 번  전개한 뒤에는 완전히 탈진되어 버린다는 것이었다.

군검풍은 대폭풍륜을 쓰다듬으며 싱긋 미소를 지었다.
"대폭풍륜이라.....! 후훗! 폭풍이란  이름도 그렇고...

넌  나에게 어울리는 놈이다. 나는 네가 마음에 든다."
그는 아주 흡족한 표정이었다.

그로서는 생전 처음 보는 절대마병이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군검풍은 기이하게도 대폭풍륜에 마음이 끌렸다.

마치 아주 오랫동안  다뤄온 병기인 듯 친밀감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훌륭한 동반자를 얻었다. 폭풍행(暴風行)을 하기에 아주 좋은 친구가 되겠군!"
군검풍은 싱긋 미소를 지으며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이윽고, 그는 옆으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사대천왕 할아버님께 보여 줄만한 물건은 못된다.

세  가지 절기를 선택하라 하셨으니 그분들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형식이나마 갖춰야 할 테지!"
이어, 그는 아무렇게나 쌓인 비급들 중 세 권의 비급을 보지도 않고 빼냈다.

 백 장이 폭풍강살에 뒤덮여 완전히 초토화되고 만다.
더욱이, 폭풍파천황결을 전개하여 내공을  열 배로 증폭시켜 사용한다면

그 결과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가 될것이다.
-- 능마금강경(陵魔金 經).
-- 전마혈권(戰魔血卷).
-- 묵강경(墨 經).

아무렇게나 뽑아든 비급이지만 결코 평범한 비급들은 아니었다.

그 중 하나라도 무림에 흘러 들어가면 그 즉시 일대혼란을 일으킬만한 놀라운 위력이 담긴 비급들이었다.
군검풍은 그 세 권의 비급들을 내려다보며 문득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어쨋든 인연을 맺고 말았다. 철사천부와 아버님의 의도는 성공하신 셈이다."
그는 혼잣말로 중얼거리며 문 쪽으로 다가갔다.
"이제 이틀 남았다. 네 분 할아버님을 기쁘게 해 드리기 위해 이 세 권의 비급을 휴지로 만들어 보이고 말겠다!"
군풍은 두 눈을 형형하게 빛내며 철사천부의 문을 밀었다.


"크하핫...! 과연 군가의 종손답다!"
"일 년이 걸릴 것을 사흘 만에 해치우다니...

허헛, 철사군가의 영화가 너로 인해 결정되리라!"
적막하기만 하던 철사곡이 때아닌 웃음소리로 무너질 듯 뒤흔들렸다. 

그것은 사대천왕의 기쁨에 찬 파안대소였다.
사대천왕은 너무 기뻐 감격의 눈물까지 글썽거리고 있었다.

지금  그들은 격동의 표정을 숨기지 못하며 나란히 앉아 있었다.
그들 앞에는 군검풍이 담담한 안색으로 단정히 앉아 있었다.
사대천왕은 한결같이 이루 형언할 수 없는 격동과 희열에 휩싸여 있었다.
그들에게 이런 크나 큰 기쁨을 제공한 장본인은 바로 군검풍이었다.

그가 믿어지지 않게도 사흘 만에 세 권의 비급을 모두 연마해냈기 때문이었다.
사자천왕이 대견스러운 눈빛으로 군검풍을 바라보며 말했다.
"허헛...이것은 시작에 불과하다. 작은 성취에 불과해. 자만치 말고 절차탁마해야 할 것이다."
그는 여간해서 자신의 감정을 밖으로 드러내는 인물이 아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그의 만면에는 흡족한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그리고,  군검풍을 바라보는 눈빛은 자애로움과 대견함으로 가득차 있었다.
"고생이 많았다. 이제 부중으로 돌아가도 좋다."
사자천왕은 청수한 얼굴에 부드러운 미소를 띄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군검풍은 담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철패혈황이 나직한 괴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크녠...아이야, 한 가지 부탁이 있다."
"하명하십시오."
"늙어지니 무료하기만 하구나. 심심풀이로 제자 녀석이나 한번 길러 봤으면 좋겠다.

적당한 재질이 있는 아이가 있으면 네가 한 명 골라 이곳으로 보내다오."
"명심하겠습니다."
군검풍은 고개를 끄덕여 대답했다.
그것을 기다렸다는 듯 사자천왕이 다시 재촉했다.
"자, 이제 돌아 가거라!"
스으.....스스!
말과 함께 일순 사자천왕에게서 강맹한 잠력이  일어나 군검풍에게로 밀려왔다.
그러자, 군검풍의 몸이 저절로 둥실 떠올랐다.

이어, 그의 몸은 그대로 단애 저편으로 날아가 버렸다.

실로 순식간의 일이었다.
군검풍은 사대천왕에게 미처 인사를 할 겨를조차 없었다.

하지만 어쩔 수없었다.
(어쨋든 잊지는 못하리라, 철사천부...!)
군검풍은 까마득히 내려다 보이는 철사천부를 응시하며 중얼거렸다.
노을이 주위를 붉게 물들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