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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호각세(互角勢) 9

오늘의 쉼터 2014. 9. 30. 12:01

제21장 호각세(互角勢) 9

 

 

 

 

자장이 축건백이라 불리는 수품을 진채 안으로 불러들이자

 

용춘이 크게 반가워하며 상빈의 예로 맞이했다.

“마음속으로 흠모해온 큰선비를 이런 누추하고 번잡스런 곳에서 보게 되어 면목이 없소이다.

 

소싯적에 나는 돌아가신 나의 부왕으로부터 들은 충신 월지공(月池公)의 존함을

 

한 번도 잊어본 적이 없소.”

월지는 수품의 아버지였다.

 

그는 진지왕 폐위 사건에 연루되어 벽지로 귀양을 갔다가 그곳에서 일생을 마친 사람이었다.

“그 뒤로 선생께서 재주를 아끼고 동표서랑하는 이유가 혹시 선대의 아름답지 못한 일 때문이

 

아닌가 싶어 우레 같은 이름을 바람결에 전해들을 때마다 괴로운 심사를 억누를 길 없었다오.”

용춘의 말에 수품은 약간 감격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저는 다만 선친의 유훈을 따랐을 뿐입니다.”

월지는 잡찬 벼슬을 지내며 품주에 예속된 창부(倉部)의 일을 맡아보았는데,

 

궁중에서 모시던 임금의 폐위 논의가 있을 때 이를 극렬히 반대하다가 백정왕이 보위에 오르자

 

스스로 사직을 청하여 물러났다.

 

그런데 물러난 사람을 굳이 벽지로 귀양까지 보냈다가 사람을 시켜 그곳에서 죽이니

 

월지가 세상을 뜨기 얼마 전 자신에게 닥칠 불행을 미리 예감하고,

“천하에 사람으로 하지 못할 일이 세 가지가 있다.

 

첫째는 살인이요,

 

둘째는 도둑질이며,

 

셋째는 벼슬살이다.

 

앞으로 내 슬하에서 만일 이 세 가지 가운데 하나를 행하는 자손이 나온다면

 

내 혼령이 구천에서도 격분하여 그 앞날을 결코 평탄하지 않도록 만들 것이다.”

 

하고는 그 내용을 유서로 써서 처자에게 남겼다.

 

당시 뱃속에 들어 있던 수품이 세상에 나와 그 글을 읽었을 때는

 

이미 아버지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수품이 일생을 야인으로 떠돌며 지낸 데는 이러한 사연이 숨어 있었다.

축건백이 수품이 용춘의 극진한 환대를 받으며 늦도록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데,

 

용춘은 수품의 언행이 소문과 같아 십수 년 연하임에도 항상 깍듯함을 잃지 않았고,

 

수품은 진지왕의 적자로 태어나 진골이 되는 수모까지 겪으면서도 사직과 백성을 진심으로

 

걱정하는 용춘의 태도에 깊이 감복했다.

 

개인의 아픔으로 치자면 자신보다 더할 사람이 아니던가.

 

특히 그는 머리가 허옇게 센 용춘이 시종 한숨과 탄식으로 계림의 앞날을 근심하자

 

왈칵 측은지심이 일었다.

“나리께서는 역적의 무리를 토벌할 계책이 따로 있는지요?”

수품이 돌연 정색하고 묻자 용춘은 침통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병부령 칠숙이 꽤나 총명한 자라 묘책이 서지 않습니다.

 

혹시 선생께서 고견이 있으면 저 무도한 백반 일당을 응징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

“칠숙은 어렸을 때 잠깐 동문수학한 사이로 저와는 오랜 교분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는 비록 향리에서 노래자이의 아들로 태어나 백반과 같은 자를 오랫동안 섬겨왔지만

 

지모가 있고 머리가 비상하 여 결코 만만하게 볼 인물이 아닙니다.

 

한때 저희를 가르치신 스승께서는 칠숙의 재주를 일컬어 잘 쓰면 국보요

 

잘못 쓰면 국치(國恥)일 거라 하였는데, 이제 칠숙은 빈틈없는 국치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의 일생을 벗의 눈으로 보자면 일말의 동정이나 공감하는 바가 없는 것도 아니지만

 

지금은 개인의 인간사를 논할 때가 아니므로 사사로운 친분은 버리고 말씀드리겠습니다.”

수품은 그렇게 말문을 열었다.

“백반의 수족으로는 칠숙과 염종이 있고 아들로는 태와 비담이 있습니다.

 

그런데 칠숙과 염종은 본래 기미가 맞지 않아 늘 사이가 좋지 않습니다.

 

또한 태와 비담 역시 형제간이긴 하지만 형은 아우 를 무시하고 아우는 형을 시기한 지 오랩니다.

 

장남인 태는 나이 마흔이 넘도록 아무 하는 일 없이 주색에만 빠져 살아온 자로,

 

하루도 술 없이는 살지 못하고 열 손가락으로도 그 첩의 숫자를 다 헤아릴 수 없습니다.

 

그에 비해 비담은 성정이 포악하고 욕심이 많아서 자신이 원하는 것은 반드시 취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인물입니다.

 

벌써 10여 년도 더 된 일이지만, 비담이 형의 첩 가운데 사옥이란 여인을 흠모하여

 

강제로 범하고 빼앗은 일은 권문의 사람이면 모두가 다 아는 왕실의 치부가 아닙니까?

 

그때 태가 노발대발하여 비담의 집으로 들이닥쳤더니

 

비담이 칼을 뽑아 들고 달려드는 바람에 오히려 태가 밤새 도망을 다녔다고 합니다.

 

그 전에도 형제간의 사이가 좋았던 것은 아니지만 사옥의 일이 있고 나서

 

태와 비담은 같은 상에서 밥도 먹지 않을 정도로 내심 원수처럼 지낸다고 합니다.”

수품의 얘기는 물 흐르듯이 계속되었다.

“겉으로는 백반이 아직 살아 있으니 모두가 한패인 듯하지만 한꺼풀만 벗기고 안을 들여다보면

 

칠숙과 염종, 태와 비담은 서로가 잡다하고 사사로운 일로 틀어져 속으로 경원하고 시기하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칠숙은 태와 친하고 염종은 비담과 죽이 맞습니다.

 

게다가 칠숙과 태는 백반과 더불어 대궁에 있고 염종과 비담은 양궁과 사량궁에 따로 나와 있습니다.

만일 이런 관계를 적절히 이용한다면 역적의 무리는 쉽게 토벌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수품은 자신이 생각한 이간책(離間策)을 털어놓았다.

“비담은 이번 역모가 성공하여 백반이 보위에 오르더라도 왕통이 자신에게 이르지 않을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쯤은 이득 없는 싸움에 말려들어 괜한 고생을 한다고 여길 게 틀림없습니다.

 

염종 또한 마찬가집니다.

 

그는 한때 자신의 딸을 태에게 시집보내어 후사를 도모한 적이 있었으나

 

태가 염종의 딸을 추물이라고 싫어할 뿐만 아니라 걸핏하면 주먹을 휘둘러 상처를 입히므로

 

마음속에 깊은 앙심을 품고 있습니다.

 

그가 비담을 따르게 된 것도 태와 사이가 틀어진 뒤부터입니다.

 

지금이야 백반의 위세에 눌려 아무런 불평도 못하고 있지만 염종은 자신과 사이가 좋지 않은

 

태보다 비담이 보위에 오르기를 바라는 사람입니다.

 

이 두 사람에게 은밀히 밀사를 보내어 비담으로 하여금 보위에 오르라고 부추긴다면

 

탐욕스러운 비담과 어리석은 염종은 앞뒤를 가리지 않고 서슴없이 백반을 배반할 것입니다.”

수품이 말한 계책은 용춘의 동의와 탄복으로 이어졌고,

 

곧바로 이를 실행할 방법을 의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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