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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호각세(互角勢) 7

오늘의 쉼터 2014. 9. 30. 11:50

제21장 호각세(互角勢) 7

 

 

 

 

이제 그쯤이면 서형산성 진채에서도 승산이 있었다.

 

한데 또다시 국원과 북한산주에서도 원군이 오고,

 

심지어 하슬라주에서까지 군사가 밀어닥치니 불과 사나흘 사이에 사정은 판이해지고 말았다.

 

이렇게 모인 7주의 군사가 대략 10만이었다.

 

유신과 약속한 상수 가운데 끝까지 나타나지 않은 이는 오직 일선주 석품의 맏이인 여운뿐이었다.

“이제 간적의 무리를 소탕하고 그 수괴를 처단하여 혼미한 사직의 앞날을 바로 세우는 일은

 

누구도 거역하지 못할 하늘의 뜻이 되었네. 무엇을 더 망설일 것이며 무엇을 더 두려워할 것인가!

 

이대로 군사를 이끌고 도성으로 진격하면 명분과 위용에 눌린 간적들은 고함소리 한 번에

 

저절로 흩어질 게 뻔하네.”

용춘이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이에 서형산성 장수들은 10만 군사로 횡진을 만들었고,

 

붉고 푸른 깃발과 금고대(金鼓隊)를 앞세워 요란하게 북소리를 울리며 도성으로 진격했다.

10만 군사는 기실 도성을 사방으로 에워쌀 만큼 엄청난 숫자였다.

 

그런 대군이, 더구나 넓게 벌여 세운 횡진으로 천지가 떠나가라 함성을 지르며 진격해 들어가자

 

도성 안의 군사들은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남당에 있다가 급보를 접한 백반은 홍변한 얼굴로 황급히 칠숙을 찾았다.

“용춘 일패가 외주에서 군사를 얻어 쳐들어온다고 한다!

 

네 어찌 내 말을 듣지 않고 꾸물거리다가 이런 낭패를 겪게 한단 말이냐?”

백반이 노기등등하여 꾸짖자 칠숙이 웃으며 대답했다.

“신이 어찌 따로 방책을 마련하지 않았겠나이까? 나리께서는 너무 염려하지 마십시오.”

칠숙이 워낙 태연하니 거벽을 떨며 설쳐대던 백반도 일순 기가 꺾였다.

 

곧 안색과 말소리를 부드럽게 하여,

“오호, 하면 무슨 묘책이 있는 겐가?”

하고 물으니 칠숙이 여전히 조용한 어조로,

“물론입니다. 제가 대궁 뒤뜰에 열 대의 수레를 마련하고 각각의 수레마다

 

나리와 두 도령의 옷을 입힌 자들로 세 사람씩 태워놓았습니다.

 

이제 저들이 도성 안으로 들어오면 열 대의 수레가 각각의 문을 통해 사방팔방으로

 

어지럽게 흩어질 것입니다.

 

그럼 저들은 나리와 두 도령께서 도망가는 줄 알고 미친 듯이 뒤쫓을 게 뻔합니다.

 

그런데 외주에서 동원한 향군들은 군령도 다르고 군호도 각각이라

 

그 절도가 일사불란할 턱이 없습니다.

 

제가 마부에게 수레를 끌고 달려갈 길을 미리 지시해두었으니

 

그대로만 한다면 저들의 오와 열은 금세 무너질 것이며,

 

저희끼리 뒤엉켜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할 것입니다.

 

그 혼란을 틈타 요소에 숨겨놓은 복병으로 급습한다면 숫자만 믿고 덤비는 자들쯤은

 

능히 섬멸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고 차근차근 계책을 설명했다.

 

얘기를 들은 백반은 만족한 얼굴로 크게 무릎을 쳤다.

“과연 공이오!”

그러자 칠숙이 덧붙여 말하기를,

“신이 만일 나리 말씀을 듣고 서형산성을 먼저 치러 갔다면 지세가 험하여 쉽사리

 

이기지도 못했을 뿐더러 도성이 텅 비어 마음놓고 싸우기도 어려웠을 것입니다.

 

게다가 이런 기회가 아니면 어찌 외관 군주들의 진심을 알겠나이까?

 

신은 오직 저들이 쳐들어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이제야 드디어 때가 온 것 같습니다.”

하니 칠숙이 명에 따르지 않는다고 불만하던 백반이,

“나야 본시 그대의 지략만을 태산같이 믿는 사람이 아니오.

 

말은 아니했어도 그대가 반드시 무슨 복안이 있을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소.”

언제 그랬더냐 싶게 활짝 웃음을 지었다.

일은 칠숙이 말한 대로 되어갔다.

외주의 군사들이 횡진을 넓게 벌여 보무도 당당히 월성 안으로 밀고 들어오자

 

칠숙의 명을 받은 병부 군사들은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성루에 배치한 포노(砲弩)를 쏘고

 

시석을 날리며 거세게 항전했다.

 

양군간에 한 식경 가량 치열한 공방이 벌어진 뒤였다.

 

대궁이 의지한 월성 전체를 사방에서 겹겹이 포위하고 있던 외주 군사들의 눈에

 

갑자기 궁문이 열리더니 말이 끄는 수레 한 대가 쏜살같이 빠져나와 양궁과 사량궁 쪽으로

 

급히 달아나는 게 보였다.

 

마차에 탄 사람은 셋인데, 모두 금총포(金總布)로 지은 화려한 옷을 입고,

 

백옥으로 만든 허리띠 아래 자줏빛 가죽신을 신은 걸로 미루어 성골들이 틀림없었다.

 

더구나 한 사람은 늙고 둘은 젊은이라,

 

누가 보더라도 백반과 두 아들로밖에는 생각할 수 없었다.

“간적의 수괴 백반이 저기 간다!”

횡진의 앞에 있던 선군 장수 하나가 크게 고함을 질렀다.

 

그는 어서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에 부하들을 인솔하고 급히 마차를 뒤쫓았다.

 

그들이 허겁지겁 수레를 쫓아간 뒤 궁문에서는 또다시 마차 한 대가 나타났다.

 

이번에도 마차에는 똑같은 차림의 세 사람이 타고 있었지만 먼젓번 수레를 보지 못한 중군들은

 

그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백반 부자다! 저들을 붙잡아야 한다!”

중군의 장수가 다시 눈에 불을 켜고 부하들을 독려했다.

 

이런 일은 대궁의 네 문에서 거의 동시에 일어났다.

 

시석을 날려대며 거칠게 저항하던 월성도 갑자기 조용해졌다.

 

승기를 잡았다고 판단한 외주 군사들은 다투어 성안으로 달려들었고,

 

이내 달아나는 마차를 뒤쫓아 산지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 바람에 월성을 에워싼 채 견고하던 횡진은 순식간에 무참히 허물어지고 말았다.

 

대오를 이탈한 외주 군사들은 10여 패로 나뉘어 오로지 마차를 뒤쫓기에만 혈안이 되어 있었다.

일이 그쯤 되면 모종의 흑막이 있음을 한번쯤 의심해볼 법도 하련만 7주에서 동원된 군사들은

 

서로 소통이 원활하지 않아 중군이 선군의 사정을 모르고, 후군이 중군의 간 곳을 알지 못했다.

달아나는 수레를 뒤쫓는 데만 정신이 팔린 군사들은 얼마 안 있어 도성 안의 여러 곳에서

 

전혀 예기치 못한 상황과 마주쳤다.

 

자신들이 쫓아간 마차가 공터나 후미진 모퉁이에 이르자 갑자기 두 대, 세 대로 늘어나는 것이었다.

 

각기 다른 방향에서 마차를 뒤쫓아온 추격병들은 자신들의 눈을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도대체 어떻게 된 노릇인가?”

“저 중에 과연 어느 것이 우리가 쫓아온 수레란 말인가?”

달아나던 마차가 한곳에 모이자 이를 쫓던 군사들이 같은 장소에서 뒤엉킨 것은 당연지사였다.

 

당황한 외주 군사들이 미처 사정을 파악하지 못해 우왕좌왕하고 있을 때였다.

 

홀연 북소리가 사방에서 울리더니 창칼을 뽑아든 복병이 일제히 함성을 지르며 달려나오기 시작했다.

 

추격병들은 그제야 자신들이 계략에 빠진 줄을 알았지만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함정에 빠졌다! 모두 달아나라!”

“어디를 도망가느냐? 한 놈도 남김없이 모두 주살하라!”

고함소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피를 튀기는 접전이 벌어졌으나 승부는 진작부터 갈렸다.

외주 군사들은 10여 곳에서 크게 무너졌다.

 

정사당 서쪽과 내을신궁(奈乙神宮) 동쪽,

 

우역 앞 등지에서는 절반의 군사가 목숨을 잃거나 크게 다쳤고,

 

염종이 복병을 숨긴 채 기다리던 양궁과 사량궁 앞에서도 숱한 이들이 봉변을 당했다.

 

숫자만 믿고 계책 없이 덤빈 당연한 결과였다.

 

혼비백산한 외주 군사들이 황급히 잔군을 추려 서형산성 진채로 돌아왔을 때는

 

10만을 상회하던 원군의 숫자가 7만으로 줄어들었고,

 

장수들 가운데에서도 염장과 천림이 부상하고 금강과 천효도 팔에 화살을 맞아

 

상수들이 살을 찢고 밤새 피를 빨아냈다.

“원군들을 믿고 흥분한 나머지 우리가 너무 성급하게 군사를 부렸소.

 

 아, 모두가 나의 과실이외다.”

용춘이 뒤늦게 가슴을 치며 후회하자 서현도 침통한 얼굴로,

“이는 칠숙의 계략이 틀림없소. 칠숙은 결코 만만히 볼 자가 아니오.

 

치밀한 계책을 세워 쳐들어가야지, 그렇지 않으면 오히려 우리가 당하기 십상이오.”

하고 말했다. 장수들은 머리를 맞대고 다시 도성을 공략할 새로운 방안을 강구하기 시작했다.

이튿날이 되자 병부 군사들은 월성 성루에 포노를 수십 대나 설치하고 군사의 숫자도 갑절은

 

늘려 가히 철통 같은 방비를 펴고 나왔다.

 

아울러 백반은 내관을 시켜 용춘에게 서신 한 통을 보냈다.

내성사신으로 3궁을 버리고 도망간 죄와 신하로서 외주 군사를 선동하여

 

도성을 침공한 죄가 비록 크지만 이제라도 직분에 충실하여 대궐로 돌아온다면

 

자신은 모든 일을 용서하고 더불어 국사를 논의할 용의가 있으며,

 

병부의 절도를 받지 않고 함부로 군사를 움직인 외주 군주들 또한 비록 그 죄가 역모에 해당하지만

 

당장 임지로 복귀하면 불문에 부치겠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백반은 서신의 말미에 형제간의 우애를 재차 강조하면서,

서경(書經)에 말하기를 빈계지신이라 하였고, 역경(易經)에는 이시부척촉이란 경구가 있으니

 

이를 천리로써 말한다면 양은 강하고 음은 유하며, 사람으로 말하면 남자는 높고 여자는 낮은 것이라,

 

어찌 감히 아녀자가 규방을 나와 어지러운 천하의 일을 살필 것인가?

 

형이 임금이 되고 아우가 상신(상대등)이 되어 계림의 사직을 반석 위에 올려놓는다면

 

나라를 위해서나 후세를 위하여 그 얼마나 귀하고 아름다운 일이랴.

 

아우는 나의 제언을 잘 생각하여 후회하지 않을 결정을 내리기 바라노라.

하는 말로 끝을 맺었다.

 

백반의 서신을 읽은 용춘은 크게 노하여 당장 도성을 치려 했지만 주위에서 신중을 기하자고

 

간곡히 만류하여 겨우 흥분을 가라앉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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