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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1장 호각세(互角勢) 8

오늘의 쉼터 2014. 9. 30. 11:55

제21장 호각세(互角勢) 8

 

 

 

 

금성의 젖줄인 남천을 경계로 한 양쪽 진영의 팽팽한 대치 형국은 그로부터 석 달간이나 계속되었다.

 

이는 궁극으로 백반과 공주 덕만의 왕위 다툼이었지만 일변으론 남자와 여자의 싸움이었고,

 

외주와 도성의 대결이기도 했다. 그 석 달 동안 양측 진영에서는 몇 번 군사를 내어

 

상대방을 공략했으나 별다른 재미를 보지 못했다.

우선은 군사의 숫자가 워낙 절묘한 호각지세인 데다,

 

외침을 염려하여 마음껏 총력전을 펴지 못한 것도 시일을 오래 끈 이유 가운데 하나였다.

 

내분 사실이 바깥으로 알려지면 국경이 위태로워질 것은 불을 보듯 뻔한 일이었다.

 

백제나 고구려가 만에 하나 군사를 내기라도 하면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다른 방법이 없었다.

이는 집권에 뜻을 둔 두 진영이 다같이 경계하고 두려워하는 일이었다.

서형산성 장수들은 금성의 일과 국경의 위태로움을 동시에 걱정하느라 연일 밤잠을 설쳤다.

 

시일이 흐를수록 불리한 쪽은 고향을 떠나온 외군들이었다.

그런데 5월도 중순으로 접어든 어느 날,

 

자장의 절인 원녕사로 진골 복색을 한 말쑥한 차림의 선비 하나가 찾아왔다.

 

쉰을 조금 넘겼을까. 인물은 볼품없는 추남이요,

 

야윈 몸에 키만 장대처럼 껑충한데, 무엇보다 양미간에 박힌 희고 큼지막한 점이

 

유난히 시선을 잡아 끄는 사람이었다.

 

자장을 만난 그 선비는 절 문 위에 걸어놓은 원녕사란 편액과 군사들이 진을 친

 

서형산성의 형세를 번갈아 살피더니,

“백무가관일세.

 

신성한 불전 밖으로 군사가 첩첩이니 내가 오십 평생 이런 몰풍정은 보던 중에 처음일세.

 

군사로 지키는 원녕이 어찌 참다운 원녕일꼬. 덕을 쌓으면 원녕이야 절로 이뤄지는 것을.”

야유인지 탄식인지 모를 말끝에 혹처럼 불거진 양미간을 잔뜩 찌푸렸다.

 

자장이 웃으며,

“도리천 아래에도 사왕천(四王天)이 있고 불국정토 밖에도 사천왕이 무기를 들고 지키니

 

아주 그릇된 이름은 아니오리다.”

하고서,

“공주께서 덕을 쌓아 장차 원녕을 이루도록 도와주시지요.

 

시국 뒤숭숭하기가 이만하면 일생을 은둔하던 광세지재(曠世之才)도

 

가히 세상에 나올 때가 되지 않았소?”

하였더니 선비가 그 말에 즉답은 아니한 채 다시 산성의 군사들이 포진한 것을 둘러보며,

“너무 오래 끄는구먼.”

하고 혀를 찼다.

 

그날 승석 무렵에 자장이 지성으로 저녁 염불을 마치고 방으로 돌아오니

 

선비가 옷도 벗지 않고 앉아서,

“그래 이 선도산 진채에는 백반을 당할 자가 진정으로 없더란 말인가?”

하며 물었다. 자장이 크게 한숨을 쉬며,

“외적들이 있어 결사항전이 어려우니 양난곡경이올시다.”

하자 선비가,

“여주(女主)라, 여주라……”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가,

“성골이 동이 났으니 하는 수 없더란 말인가.”

이 말은 허공을 향해 혼잣말하듯이 하고,

“큰공주가 품성이 현량하고 지기가 빼어났다는 소리는 두어 번쯤 들은 바 있으나

 

자네 보기에 과연 제왕감이 되던가?”

이 소리는 자장을 쳐다보고 하였다.

 

자장이 선비의 의심하는 바를 알아차리고 결코 드러나지 않는 표현으로

 

덕만 공주의 인덕과 자질을 차분히 설명하니 선비가 자장의 말을 묵묵히 듣고 앉았다가,

“하긴 불가에서 무던히 30년 수행을 하였으니 비록 여자일지언정 백반보다야 못하랴.”

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자장이 다시,

“기왕 예까지 오셨으니 공주님께 가서 궁금한 것을 직접 물어보시지요.

 

소승이 통기를 하오리다.”

하자 선비가 그럴 것 없다며 휘휘 손사래를 치고서,

“내가 선종의 말을 아니 믿으면 뉘 말을 믿어.

 

자네한테 들은 바로도 충분하지만 저자에서 따로 들은 말도 있네.”

하고는,

“공주보다도 지금은 용춘공을 좀 만나봤으면 하네.

 

그런데 내가 용춘공과는 일면식도 없으니 수고스럽겠지만

 

자네가 나를 데려가 인사를 시켜주지 않겠나?”

하였다. 자장이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수고라니요, 당치 않습니다!”

말을 마치자 당장 선비를 용춘에게 데려갔다.

“혹시 그사이 수품(水品)이란 이름을 들어보셨는지요?”

자장이 선비를 진채 바깥에 세워두고 용춘에게 묻자

 

용춘이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자장을 쳐다보았다.

“그의 고고한 인품은 자비왕조의 백결선생(百結先生)에 견줄 만하고,

 

박학으로 말하면 법흥왕조의 철부(哲夫)와 박염도(朴厭道:이차돈)를 오히려 능가하며,

 

천문에 해박하고 지리에 통달한 것이 가히 계림의 상신감으로 손색 없는 인물입니다.”

자장의 극찬하는 말을 들은 용춘이,

“혹시 율사가 말씀하시는 분과 축건백이라는 사람은 어떤 사이요?”

하고 물었다. 자장이 웃음을 짓고,

“축건백이란 미간에 축건 태자(부처)를 닮은 흰 점이 있어서 지어 부르는 별칭인데

 

수품을 달리 그렇게들 말합니다.”

하자 그제야 용춘이 크게 반가워하며,

“알지, 내 비록 과문하나 어찌 축건백이와 같은 고명한 선비의 이름을 모르겠소!

 

다만 인연이 없어 아직 만나지 못했을 뿐이오!”

희색이 만면하여 소리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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