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6
소천이 하인의 옷을 얻어 입고 서형산성 진채로 돌아와 아직 서현에게 자초지종을 고하기 전인데
유신이 헐레벌떡 나타났다.
유신을 본 서현은 딴말은 아니하고,
“가서 어머니부터 뵈어라.”
하여 유신이,
“네.”
하고 진채 밖으로 나왔더니 마침 아우 흠순이 제가 거느린 낭도들과 더불어 절의 곳간에서
쌀가마를 들고 나오다가,
“형님 오셨습니까.”
하며 공손히 인사를 했다. 유신이 흠순에게 어머니가 있는 곳을 물으니
흠순이 한 팔로 쌀가마를 옆구리에 낀 채,
“저기 장설간에서 군사들의 저녁밥을 짓고 계십니다.”
다른 팔로 산자락 밑을 가리켰다.
유신이 그곳으로 가니 만명부인뿐 아니라 여러 여자들이 부산하게 밥과 국을 끓이느라
비지땀을 흘리는데, 낯 모르는 사람도 있지만 천명 공주도 보이고, 보희와 문희도 일손을 거드느라
여념이 없었다.
유신이 약간 면목이 없어 일하는 여자들 앞에 선뜻 나서지 못하고 얼쩡거리는 차에 보희와 문희가
먼저 유신을 발견하곤,
“오라버니 오셨네!”
“큰오라버니, 어딜 가 계시다가 이제야 오세요?”
하며 호들갑을 떨었다. 유신이 더욱 난처하여 쩔쩔매다가,
“어머니, 저 왔습니다.”
만명부인을 향해 고개를 숙였더니 부인이 잠자코 유신을 물끄러미 바라본 뒤에,
“무사하니 다행이다. 시장할 테니 어서 군사들 틈에 가서 앉아라.”
사연은 묻지도 않고 온화한 말투로 대하여 유신으로선 더욱 면목이 없었다.
낙담에 빠져 있던 서형산성 진채에 난데없는 원군들이 출현한 것은 그로부터 사나흘이 흐른 뒤였다.
그사이 용춘이 품주대사 사진(思眞)과 인편에 몰래 소식을 주고받았는데,
조정에 서형산성 진채가 알려져 백반이 노발대발했으며, 칠숙과 염종이 남당(南堂:정전)에서
식은땀을 흘리며 곧 토벌군을 보내겠노라 약조하였으므로 조만간 병부 군사들이 들이닥칠 거라는
서찰이 당도해 있었다.
이 일로 서형산성 진채는 더욱 비탄에 잠겼다.
게다가 1천 명이나 되는 군사들이 아무 하는 일 없이 삼시 세 끼를 먹어대니
자장이 비축해둔 곳간의 양식도 거의 동이 나서 하루하루가 견디기 힘든 형국이었다.
자장은 자신의 절 이름을 원녕사(元寧寺)라 짓고 덕만 공주가 장차 무사히 보위에 오를 것을
불력의 힘을 빌려 축원하였지만 사정은 갈수록 어려워지기만 했다.
용춘과 서현을 비롯한 진채 장수들이 속수무책으로 둘러앉아 장탄식만 거듭하고 있을 때였다.
돌연 말을 탄 군사 하나가 서형산성을 찾아와 장수들에게 아뢰기를,
“저희는 금관주에서 출발한 원군입니다.
저희 군주의 아드님인 금강 도령께서 친히 1만 군사를 이끌고 곧 당도하실 것입니다.
기별도 없이 많은 군사가 오면 행여 진채의 장군들께서 놀라실까봐 금강 도령께서
미리 저를 보내어 이 사실을 고하도록 하였습니다.”
하였다. 너무나도 뜻밖이라 여러 사람이 선뜻 좋아하지도 못하고 서로 얼굴만 바라보는 가운데
서현이 나서서,
“너희 군주로 말하면 얼마 전에 내가 가서 직접 만났던 사람인데 그때는 완강하다가 어찌하여
갑자기 마음이 바뀌었다더냐?”
하고 물으니 그 군사가,
“자세한 것은 모르옵고 금강 도령께서 유신 도령과 약조한 일이라고만 들었습니다.”
하고 대답했다. 조금 있자 과연 무기를 들고 갑옷을 입은 군사 1만이 새카맣게 나타났다.
이를 본 진채 장수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입이 귀밑까지 찢어졌다.
도탄에 빠져 있던 그들의 눈에 원군을 인솔하고 온 금강이 무슨 신장(神將)처럼 보이고,
군사들은 하늘에서 보낸 신군(神軍) 같았다.
“이게 대체 어찌 된 영문인가?”
금강의 인사를 받고 용춘이 진채 사람들을 대신하여 묻자 금강이 허리를 굽혀 공손히 대답했다.
“임금을 시해한 간적의 무리를 어찌 용납할 수 있으오리까?
가친께서 연로하신 까닭에 잠시 판단이 흐려지셨다며 저에게 대신 사죄를 올리라는
당부의 말씀이 계셨습니다.
그간 심려를 끼쳐 죄송합니다.
특히 서현 나리께는 뒷날 세상이 조용해지면 따로 찾아뵙겠다고 하더이다.”
“잘 왔네, 잘 왔어! 실로 천군만마를 얻었네그랴!”
용춘이 금강의 손을 덥석 붙잡고 희색이 만면해 소리쳤다.
금강이 당도하여 얼마 지나지 아니한 때였다.
이번에는 압량주 쪽에서 또다시 얼마인지도 모를 군사들이 떼를 지어 나타나는 게 보였다.
진주가 데려온 1만 5천의 압량주 군사들이었다.
“유신 형님! 저희 아버지께서 군(郡)에 소집령을 내렸는데 향군들이 모이는 대로
다시 군사를 보내겠다고 하셨습니다.
뒤로 5천 명은 더 오지 싶습니다!”
진주는 제 아우인 진흠(眞欽)까지 대동하고 나타나 약속을 지켰다며 우쭐해서 소리쳤다.
“이제 살았네! 보아하니 다 망친 일을 유신이 들어 다시 일으키는군그래!”
용춘은 서현을 붙잡고 기뻐 어쩔 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일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그날 밤에 박조진의 아들 천효가 거타주에서만 3만 5천이나 되는 정병을 이끌고 나타났다.
3만 5천이면 백제와 대치한 거타주 군사의 절반에 달하는 엄청난 숫자였다.
또 뒷날 새벽녘엔 하주 군주 진부가 친히 그 아들 문충과 함께 군사 8천에 군량미까지 싣고 왔는데,
진부는 서현에게 와서 겸연쩍은 얼굴로 인사를 하며,
“나리께서 다녀가신 뒤로 번민이 많았습니다.
그러던 차에 자식놈이 와서 불충한 신하와 불효한 자식이 어떻게 다르냐고 따지니 할말이 있어야지요.
자식 앞에 장사 없다고…… 하여간 나리께는 뵐 면목이 없습니다. 죄송합니다.”
하고 사죄하니 서현이,
“이 사람아, 면목 없을 게 무어야? 어려운 결심을 했네! 잘 왔으이!”
하며 어깨를 부둥켜안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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