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1장 호각세(互角勢) 4
한편 소천의 옷을 빌려 입은 유신이 그 길로 찾아간 곳은 병부의 상수관이었다.
신물 나는 상수살이를 끝내고 두 번 다시 찾지 않으리라 맹세했던 지긋지긋한 상수관,
그는 출입문을 지키고 선 늙은 보졸을 가만히 손짓으로 불러냈다.
“자네가 나를 알아보겠느냐?”
젊은 범골이 돌연 반말로 물으니 나이 든 보졸은 이놈 봐라 싶어 일순 눈에 쌍심지를 켰는데,
미처 화를 내기 전에 변복한 유신임을 알아차리자,
“용화 도련님 아니십니까요?”
눈이 왕방울만하게 휘둥그레졌다.
10여 년을 하루같이 보던 사람을 모를 턱이 없었다.
“도련님의 복색이 어찌 그 모양이 되었습니까?”
“그럴 사정이 있네. 소문에 듣자니 궁에서 난리가 났다는데 도대체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가?”
“글쎄올습니다. 소문이야 여름풀처럼 무성하지요.
위에서는 임금이 출면도 하지 못할 만큼 환후가 깊어 진정왕으로 하여금
양위를 서두르는 모양이지만 임금이 환후 중이라고 병부 군사들이 3궁을 철통같이
지키는 것도 알지 못할 노릇이고, 덕만 공주와 내성사신의 행방이 묘연한 것도
여간 수상쩍은 일이 아니지요.
게다가 지난 며칠간 자비문 앞에서 번을 선 군사들 얘기로는 침전 쪽에서
매일 고약한 냄새가 흘러나온다고 하니 어쩌면 임금이나 덕만 공주가
이미 이 세상 사람들이 아닐지도 모릅니다.
여기저기서 별별 소리가 다 나옵니다.”
“상수관에는 별다른 일이 없는가?”
“여기야 일년 3백 날이 늘 만찬가지지요.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어제 같은 곳 아닙니까.”
“하면 자네가 내 청 한 가지만 들어주겠는가?”
“기탄없이 말씀하십시오. 도련님 청이라면야 목이 달아난대도 듣겠습니다요.”
“고마우이.”
이어 유신은 긴한 말로 용무를 밝혔고 보졸은 염려하지 말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상수관을 떠난 유신은 전에 늘 다니던 단골 주막을 찾아갔다.
주막 주인이 모처럼 나타난 유신을 보고는 내외가 한꺼번에 달려 나와 반색을 하며,
“도련님 떠나신 뒤로 장사가 통 안 됩니다요.”
하고 투정하듯 말하자 유신이 웃으며,
“어어, 그럼 안 되지. 잔칫집엔 하객이 북적대고 초상집엔 문상객이 북적대듯이
주막엔 술꾼이 넘쳐나야 되는 게라. 하면 오늘은 내가 장사를 좀 시켜줌세.”
하고서,
“조금 있으면 상수들이 관에서 저녁 점고를 맞고 죄 이리로들 몰려올 걸세.
그런데 오늘은 긴한 얘기를 나눌 게 있으니 자네들이 쓰는 안방을 치우게.
어떤가, 그래 주겠는가?”
하였더니 주인 내외가 희색이 만면하여,
“여부가 있겠습니까요. 안방이 아니라 집을 통째로라도 내어드리지요.”
하였다. 유신이 주막의 안방에 자리를 잡고 기다리자 얼마 아니 있어
저녁 점고를 맞고 나온 상수들이,
“유신 도령이 오셨다고?”
“형님 어디 계시오?”
하며 들이닥쳤다.
금관주 보동의 장자 금강(金剛)과 북한산주 변품의 아들 품일(品日)을 필두로
진춘(陳春), 수승(守勝), 여운(如芸) 등이 차례로 나타나고,
마지막에 압량주 군주의 아들 진주가 저보다 더 어려 뵈는 낯선 소년 하나를 데리고 들어섰다.
이들 가운데 금강만이 유신보다 나이가 두어 살 위였고 나머지는 다 어렸는데,
특히 품일이나 진주는 상수살이를 처음 시작할 때 나이가 겨우 10여 세 안팎이어서
유신이 데리고 다니며 코도 닦아주고 등에 업어도 주면서,
“너희가 무슨 죄가 있어 이 고생이냐.”
하고 탄식할 때가 많았다. 그렇게 동생처럼 키우다시피 한 상수들이
이제는 어엿한 청년들이 되었으니 오랜만에 보는 유신으로서도 감회가 새로웠다.
“저 소년은 내가 보지 못한 아이인데?”
유신이 진주가 데려온 어린 상수를 가리키자 유신의 옆에 앉은 금강이,
“그대가 풀려나고 대신 고생문이 열린 아이요. 하주 진부공의 외아들이외다.”
하였고, 이어 백룡의 장자인 진춘과 일선주 군주 석품의 맏이 여운이 거의 동시에,
“얘 문충(文忠)아, 어서 인사부터 올려라.”
“네가 말로만 듣던 용화 도령이시다.”
했더니 문충이란 소년이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로 넙죽 큰절을 하며,
“하늘같이 흠모하던 분을 뵙게 되어 꿈만 같습니다. 문충이라고 합니다.”
제법 인사를 야무지게 하였다. 유신이 자식뻘인 문충에게,
“자네는 내가 꽤나 원망스럽겠구만.”
점잖게 반공대로 물으니 문충이 긴장한 얼굴로 급히 고개를 저으며,
“아닙니다, 그런 마음은 잠결에도 품어본 일이 없고 그저 나라의 제도가 원망스러울 따름입니다.”
대꾸를 또다시 다부지게 하였다. 유신이 빙긋 웃고 나서,
“그렇다면 다행일세. 어서 앉으시게나.”
했더니 문충이,
“네.”
하고 다른 상수들처럼 답삭 책상다리를 하고 앉는데,
그 태도가 마치 어린애가 어른 흉내를 내듯 어색한 중에도 얼마간 자깝스러운 구석이 있어
여러 사람이 허허 하고 이유 없는 웃음을 터뜨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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