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17. 새인생(4)
(1819)새인생-7
“도대체.”
이층 베란다에 나와 바다를 내려다 보던 장선옥이 머리를 돌려 조철봉을 보았다.
“여기 방값이 얼마죠?”
이층은 응접실에 욕실이 딸린 커다란 침실, 베란다까지 50평이 넘는 면적이었는데
침실만 빼놓고 삼면이 유리였다.
그래서 바닷가와 바다까지 한눈에 보였다.
“글쎄, 내가 예약 안해서 잘 모르겠지만 좀 될 거야.”
조철봉이 시치미를 떼었다.
베란다의 탁자에는 메이드가 놓고 간 술과 안주가 가지런히 놓여져 있다.
더 시킬 일이 없다면서 메이드를 쉬게 했지만 아래층 방에서 상주하고 있는 터라
벨만 누르면 올 것이다.
양주잔을 든 장선옥이 웃음 띤 얼굴로 조철봉을 보았다.
“비행기 일등석에다 초호화판 빌라,
아주 날 세뇌시키려고 작정을 했군요.”
“그게 무슨 말이야?”
소파에 등을 붙인 조철봉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나도 이런 곳 처음이야.
장선옥씨한테 점수 따려고 한 것 뿐이라구.”
“이래야 점수를 딴다고 생각했어요?”
“싸구려로 움직이는 것보다는 낫지.”
“또 시작이네.”
하면서도 장선옥이 탁자 위로 두 다리를 올려놓고 길게 뻗었다.
진주색 가운 차림이어서 가운 깃을 여미었지만 맨다리가 무릎 위까지 드러났고
가지런한 발가락이 꼬물거리다 멈췄다.
조철봉은 위스키 잔을 들며 한모금에 삼켰다.
밤이 깊어지면서 아래쪽 모래사장을 오가던 남녀도 뜸해졌다.
이 곳은 호텔 사유지여서 일반인이나 잡상인의 출입이 금지되었고 한국에서처럼
요란하게 폭죽을 쏘아 올리지도 않는다.
“참, 집에다는 뭐라고 했어요?”
불쑥 장선옥이 생각났다는 듯이 물었으므로 조철봉은 잔에 술을 채우다가 머리를 들었다.
장선옥이 집안 이야기를 묻는 건 지금이 처음이다.
이미 다 조사를 했겠지만 제 입으로 듣고 싶은 것이다.
장선옥쯤 되는 선수가 즉흥적으로 말을 꺼낼 리는 없다.
잔에 마저 술을 채운 조철봉이 장선옥을 보았다.
“내가 지금도 베이징에 있는 줄 알겠지 뭐.
내가 자주 출장을 나가기 때문에 내가 먼저 연락하는 버릇이 들어서.”
“의심하지 않아요? 바람 피울까봐.”
그러고는 장선옥이 눈웃음을 쳤다.
“자기가 그거 잘 하잖아요. 그러니까.”
“그래?”
정색한 조철봉이 지그시 장선옥을 보고 나서 한모금에 위스키를 삼켰다.
식도를 타고 뜨거운 기운이 위까지 흘러 내려가는 느낌이 전해져 왔다.
입을 벌려 더운 기운을 뱉은 조철봉이 말했다.
“와이프는 애인이 있어.”
“네?”
못 알아들은 듯이 장선옥이 되물었다가 반쯤 입을 벌리고는 가만 있었다.
장선옥의 시선을 받은 조철봉이 차분하게 말했다.
“같은 학교 선생이야.
둘의 관계는 일년쯤 되었어.
내가 확인한 후부터 일년이니까 더 되었겠지.”
“아니, 그럼.”
당황한 장선옥이 입안에 고인 침을 삼키는 동안 조철봉은 줄거리를 다듬었다.
물론 거짓말이다.
멀쩡한 이은지를 바람쟁이로 만들었지만 양심의 가책 따위는 없다.
당면한 목적은 장선옥을 감동시키는 것이다.
인간은 수만가지 형태의 감동을 받으며 그 방법 역시 수만가지가 된다.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장선옥을 감동시키려고 이은지를 잠깐 죽일 수도 있는 것이다.
이미 장선옥의 몸은 장악되었으니 이번에는 마음이다.
무슨 사기를 쳐서라도 마음을 낚아채겠다.
(1820)새인생-8
조철봉이 입을 열었다.
“내가 자주 출장을 다녔기 때문이야.
아무래도 난 가정적인 남편으로는 불량품인 것 같아.”
당황한 듯 장선옥이 시선을 내렸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섹스도 전부가 아냐. 오히려 역효과를 낼 수도 있어.”
“…….”
“남자가 필요할 때 옆에 없었으니까 말야. 원인 제공을 내가 한 셈이지.”
“설마.”
장선옥이 겨우 입을 떼었을 때 조철봉은 잔에 술을 채우고는 한모금을 삼켰다.
“지금 와이프는 내 아들 담임선생이었어. 재혼한 와이프가 말야.”
심호흡을 한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 아들한테 아주 잘해. 아들도 제 친모보다 더 따르고.”
“…….”
“헤어질 수 없어.”
조철봉이 머리를 저었다.
“애한테 또 상처를 줄 수는 없어.”
“그래서 묵인하신다는 건가요?”
건조한 목소리로 장선옥이 묻더니 손을 뻗어 술잔을 쥐었다.
이제는 똑바로 조철봉을 바라보고 있다.
“와이프의 불륜을 말이죠.”
“난 어디 결백한가?”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장선옥을 마주 보았다.
“요즘은 와이프가 이 삼각관계를 잘 유지시켜 주기를 바랄 때가 많아.”
눈만 깜박이는 장선옥을 향해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내 대신 그 박선생이란 작자가 잘 좀 이끌어 주기도 바라고 말야.”
“기가 막혀.”
“조사해보니까 와이프를 데리고 싼 식당, 싼 여관으로만 돌아다니던데
돈을 듬뿍 쥐어주고 싶을 때도 있었어.”
“세상에.”
“그자가 섹스는 별로더구먼. 옆방에서 녹화시켰는데 5번 평균 3분25초야. 내 20분지 1도 안돼.”
“정신 나갔어요?”
했다가 눈을 치켜뜬 장선옥이 조철봉을 찬찬히 보았다.
“거짓말이죠?”
“내가 왜 거짓말을 하겠어?”
하고 불쑥 물은 순간 조철봉의 가슴이 뜨끔했다.
그렇게 묻는 게 아니었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가장 보편적인 질문은 이런 때 하는 게 아니다.
이런 때는 가만있어야 한다.
스스로의 분위기에 취해 저도 모르게 오버했다.
그때 장선옥이 시선을 내리면서 말했다.
“정말이라면 우습네.”
목소리가 가라앉았으므로 조철봉의 가슴이 뛰었다.
먹혀든 것이다.
그때 장선옥의 말이 이어졌다.
“그럼 계속 모른 척하고 살 건가요?”
“애가 제 앞가림을 할 때까지만.”
금방 대답한 조철봉이 덧붙였다.
“아까도 말했지만 와이프는 내 아들한테 정말 잘해. 애도 따르고.”
“와이프 앞에서 시치미 뗄 수가 있던가요?
그, 3분25초짜리 필름을 보고 나서도 말이에요.”
정색하고 장선옥이 물은 순간 조철봉의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그렇다고 한다면 연극을 아주 잘한다는 것을 본인이 자백한 셈이니
지금의 상황도 믿음성이 떨어질 것이었다.
그 반대면 견디는 과정설명이 길다.
조철봉은 헛기침을 했다.
“쉬운 일은 아냐. 하지만.”
쓴웃음을 지은 조철봉이 장선옥을 보았다.
이 여자를 속이려면 진실과 사기가 적절하게 섞여야 한다.
그래야 실감이 난다.
“자식을 위해서 이를 악물고 참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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