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29
칠숙이 왕을 시해하는 동안 시위부 군사들 사이에선 역모가 일어났다는 소식이 짜하게 돌았다.
그날 대궁 도정의 당번 수장은 아찬 염장(廉長)이었다.
진골 귀족 출신인 염장은 병부령 염종과는 육촌간이었고, 염종의 천거로 시위부 장군이 되었는데,
그 소임은 말할 것도 없이 내성사신 용춘을 감시하고 견제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염장은 식견이 있고 성품이 무던한 사람이었다.
비록 육촌 아우의 도움으로 임금을 가까이 모시게 되었지만
혈연과 공무는 구분할 줄 알았을 뿐 아니라 무턱대고 백반을 맹종하지도 않았다.
그는 삼도의 장군이 되어 용춘과 자주 만나면서 오히려 용춘의 편에서 일을 처리할 때가 많았다.
침전의 방비를 서다가 도망쳐온 군사들로부터 대강의 이야기를 듣고 난 염장은
이내 사태의 전모를 환히 깨달았다.
“아, 올 것이 왔구나. 칠숙이 앞장을 섰다면 이는 진정왕(眞正葛文王:백반)이
마침내 역모를 일으킨 것이다.”
그는 도정 앞에 걸어둔 징을 쳐서 대궁 각방에 흩어져 있던 당번들을 불러 모았다.
징소리를 듣고 대감과 대두, 그 밑으로 항(項)과 졸(卒)들이 30명 가까이 모여들었다.
“용춘공은 퇴궐하셨는가?”
염장이 대감 구평(俱枰)에게 물었다.
후문을 지키던 구평이,
“아까 신시경에 별전에 들렀다가 곧바로 돌아가시는 것을 보았습니다.”
하고 대답하자 염장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병부 군사가 대궁을 장악했다면 삼도의 당번들만으로는 당할 수 없다.
그대는 사졸들을 이끌고 별전으로 가서 공주를 뫼시고 용춘공의 집으로 오라.
별전 후문으로 빠져나올 시간은 있을 것이다.
나는 그사이 용춘공에게 역모가 일어났음을 알리고 대책을 세워보도록 하겠다.”
하고 말했다.
“나리, 병부령이 군사를 이끌고 침전으로 갔다면 마땅히 임금부터 구해야 하지 않습니까?”
구평이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반문하자 염장이 대답했다.
“칠숙이 대두의 목을 치고 침전을 습격하였는데 임금이 아직 온전할 까닭이 있겠느냐?
모르긴 해도 앞으로 일은 덕만 공주와 진정왕의 싸움이 될 것이다.
그대는 지체 없이 내 명을 따르라!”
염장의 재촉에 구평은 급히 말잔등에 뛰어올랐다.
이때 덕만의 처소에는 승복을 입은 한 젊은 손님이 찾아와 밤이 늦도록 정담을 나누고 있었다.
그의 속명은 선종(金善宗), 법명은 자장(慈藏)으로 전대에 소판 벼슬을 지낸 김무림(金茂林)의 아들인데,
덕만과는 장안사 시절에 연적의 소개로 인연을 맺어 자별한 도반(道伴)의 정을 나눠오던 터였다.
용춘의 명으로 별전에 출입하는 면면을 일일이 확인해온 구평이 덕만의 처소에 손이 있음을
모르지 아니했으나 이때는 일이 워낙 다급하여 시종을 통하지 아니하고 직접 안에다 말하기를,
“공주마마, 어서 나오십시오! 화급을 다투는 일이올시다!”
하니 마침 자장과 얘기에 한창 넋이 팔렸던 덕만이 미간을 찡그리며,
“스님이 보시듯 궐에서 사는 일이란 게 늘 이러하오.
장안사 승방이라면 밤을 꼬박 지새운들 누가 훼방을 놓겠소.”
자장에게만 은밀히 소리를 낮춰 푸념하고서,
“밤이 깊었는데 무슨 일이오?”
바깥에다 대고 소리를 높여 물었다.
“병부의 군사들이 대궐에 개미 떼처럼 깔렸습니다. 시급히 나와 몸을 피하셔야 합니다!”
덕만은 이 말을 들을 때까지도 사태를 전혀 짐작하지 못했다.
“병부의 군사가 왜 대궐에 깔렸단 말씀이오?
그리고 군사들이 깔렸다고 내가 몸을 피해야 할 까닭이 무엇이오?”
구평은 더 이상 사실을 숨길 수 없었다.
“진정왕이 역모를 일으켰다고 합니다!”
“뭐, 뭐라구요?”
그제야 덕만은 안색이 백변하여 바깥으로 달려나왔다.
“좀 자세히 말을 해보오. 숙부가 역모를 일으켰다니?”
“지금은 그럴 틈이 없습니다.
어서 수레에 오르십시오.
신이 안전한 곳으로 뫼시겠나이다.”
“침전에는 아바마마가 계시오.
아바마마께는 말씀을 드렸소?”
“……전하께서는 이미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신 줄 압니다.”
마음이 급한 구평은 덕만의 지극한 효성을 익히 알던 바라 거짓말을 둘러대지 않을 수 없었다.
안심한 덕만은 비로소 구평이 준비해온 수레에 오르다가 문득 생각난 듯 뒤를 돌아보았다.
“스님께선 어찌하려오?”
“소승의 일은 염려하지 마십시오.”
덕만을 따라 나온 자장이 말했다.
구평이 자장을 보고서,
“스님도 우선 수레에 타시오.
혼자 계시다간 무슨 봉변을 당할지 알 수 없소.”
하니 자장이 공주와 같이 수레를 타기가 면구스러워,
“하면 따로 말 한 필만 빌려주오.”
하였다.
구평은 공주를 호위한 채 별전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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