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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인물 28

오늘의 쉼터 2014. 9. 29. 11:27

제20장 인물 28

 

 

 

 

“달아나는 시종들은 죽일 것이 없다.

그러나 까닭을 묻거나 소란을 피우는 자가 있거든 남김없이 주살하라!”

명을 받은 도부수들이 흩어지고 나자 칠숙은 피 묻은 칼을 뽑아 들고 휘하의 군사들을 돌아보았다.

“너희는 이곳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지 말고 내가 나올 때까지 대기하라.”

그러자 칠숙을 따라온 병부대감 선칠(善柒)이 물었다.

“험한 일을 어찌 나리께서 직접 하시려 합니까? 아랫것들을 시키십시오.”

“다른 사람은 피할 수 있지만 나는 피할 수 없는 사람이다. 그간 분에 넘치는 호강을 하고 살았으니 이젠 그 값을 물어야지.”

말을 마친 칠숙은 혼자 임금의 침소로 달려가 신을 신은 채로 침전에 올라섰다. 침전 앞에서 병든 닭처럼 졸던 내관 하나가 기겁을 하며,

“뉘시오?”

하고 물었지만 칠숙은 대답 대신 칼을 휘둘렀다. 내관의 찢어지는 비명이 고요한 침전의 밤공기를 섬뜩하게 갈라놓았다.

“웬 소란이냐?”

일찍 침소에 들었다가 비명소리에 눈을 뜬 백정왕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옥음을 높여 물었다. 칠숙은 침소의 문을 열어 제치고 잠시 늙은 임금의 눈을 내려다보았다.

“너는 칠숙이 아니더냐?”

임금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칼날과 칠숙의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칠숙은 칼을 손에서 내려놓고 임금을 향해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신 병부령 칠숙, 대왕 전하께 급한 용무가 있어 왔나이다.”

절을 마치자 칠숙은 다시 칼을 집어 들었다.

“무슨 급한 일인데 야밤에 이토록 시끄럽게 군단 말인가? 그러고 너의 손에 든 그 칼은 무엇이냐? 어서 치워라, 흉물스럽구나.”

대개 그쯤이면 사단을 짐작할 만도 하련만 늙어서 사리 판단이 흐려진 왕은 아직 아무런 낌새도 알아차리지 못하는 눈치였다. 칠숙은 눈에 물기를 머금고 그런 임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았으나 그 시간은 불과 잠시였다. 그는 마침내 매서운 결심을 한 듯 어금니를 꽉 깨물었다. 그와 동시에 칼끝을 앞으로 고쳐 쥐더니 쏜살같이 왕을 향해 돌진했다.

꿈에서도 생각하지 못한 참변이었다. 백정왕은 달려드는 칠숙을 이부자리에서 엉겁결에 가슴으로 안았다가 돌연 크게 몸을 뒤틀며 입으로 짧은 신음을 토했다. 내제석궁(內帝釋宮) 천주사의 돌 세 개를 한꺼번에 부러뜨렸던 장대하고 기굴한 체구의 백정왕도 명치끝을 파고든 칼끝에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전하, 구천에서 만나거든 대역죄인 칠숙에게 가장 가혹한 천벌을 내려주십시오.”

칠숙은 임금을 끌어안은 채 크지 않은 목소리로 말했다.

“이, 이놈 칠숙아…… 내 너를 홀대하지 않았거늘 이 무슨 짓이냐, 이놈아…… 어서 칼을, 칼을 뽑지 못하겠느냐……”

왕은 안간힘을 쓰며 사지를 버둥거렸지만 칠숙은 그럴수록 손에 쥔 칼자루에 힘을 주었다. 칼끝이 점점 더 깊이 박혀오자 칠숙의 어깨를 끌어안은 왕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부들부들 몸을 떨어댔다.

“아프다 이놈아, 아프다……”

“곧 편안해질 것입니다, 전하.”

칠숙은 한쪽 손으로 칼자루를 더 깊이 들이밀고 다른 한 손으론 왕의 어깨를 가만히 감싸안았다.

“누구냐…… 백반이더냐……”

왕이 끊어질 듯 여천을 몰아쉬며 묻고는 갑자기 무서운 힘으로 칠숙의 머리통을 움켜쥐었다.

“백반은 안 된다. 명심하라 칠숙아. 알겠느냐……?”

말을 마치자 숨을 한번 크게 들이켜고는 그대로 축 늘어져버리는 것이 칠숙이 느끼기에 비로소 명이 끊어진 듯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칠숙은 살그머니 임금에게서 몸을 떼고 옥체를 요 위에 조심스레 눕혔다. 침소 주변은 온통 피투성이였다. 칠숙은 왕의 가슴에 박힌 칼을 뽑고 허공을 향해 부릅뜬 시신의 눈을 감겨주었다. 장에서 정갈한 침구 한 채를 가져다 시신을 옮겨 누인 그는 옥체 위에 깨끗한 이불을 덮고 자신의 속옷을 찢어 침소 주변의 낭자한 피를 대강 닦아냈다.

“편히 쉬옵소서 전하, 신 칠숙 물러가옵니다.”

정돈을 마친 칠숙은 백정왕의 시신에 큰절하고 임금에 대한 마지막 예를 갖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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