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27
나라의 병권을 손에 쥐고 있던 백반이었다.
그가 마음만 먹는다면 역모는 언제고 가능했다.
도성에서 병부의 절도를 벗어난 병력은 임금의 친위대인 시위부의 군사 2백 명 정도에 불과했다.
3궁의 방비를 맡아 삼도(三徒)로 불리기도 하던 시위부 군사들만이 내성사신의 절도 아래 있었다.
병부에 도착한 칠숙과 염종은 십정(十停:三千幢)과 귀당, 법당, 서당 등의 5군을 모두 동원,
군사를 세 갈래로 나누어 대궁과 양궁, 사량궁으로 급파했다.
그런데 정작 군사를 일으키자 염종은 칠숙에게 자신의 모계가 왕실과 먼 친척간임을 들어,
“대궁에서 임금과 공주를 주살하는 일은 공이 맡으시오.
공이 없다면 모를까 아무래도 칼을 뽑아 들기가 껄끄럽소.
게다가 나는 전에 사량궁 사신을 지낸 까닭으로 그곳 지리에 한결 익숙하오.”
슬그머니 발을 빼더니,
“공이 대궁 한 곳을 맡으면 나머지 사량궁과 양궁은 내가 맡으리다.”
마치 선심이라도 쓰는 양 말했다.
만일 있을지도 모를 실패를 염두에 두고 미리 달아날 구멍을 파놓으려는
염종의 얄팍한 잔꾀를 칠숙인들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칠숙은 염종의 제안을 순순히 받아들였다.
처음부터 도성의 귀족 가문에서 자라 수월하게 대신의 반열에 오른 염종과는 달리
칠숙은 밑바닥에서부터 자력과 노력으로 성공한 인물이었다.
그의 아버지는 비록 진골이었지만 일생 변방의 군현을 떠돌며 주석의 흥이나 돋구는 노래자이였다.
칠숙은 그런 아버지를 보며 일찍부터 인생의 덧없음을 배웠고,
한편으론 밤낮을 가리지 않고 책을 읽으며 기필코 계림의 이름난 인물이 되리라 이를 갈았다.
군마를 관리하는 소오로 벼슬살이를 시작한 이래 금성 관가의 조명 높은 텃세와 멸시에 찬
귀족들의 눈총을 극복하고 일국의 병권을 좌우하는 병부령이 되기까지 그가 겪은 역경과 고충은
필설로 다 형용할 수 없었다. 때로는 별것도 아닌 일로 고관의 집에 불려가 매를 맞기도 했고,
시골뜨기라는 놀림도 수없이 받았으며, 제법 견식과 지모가 있다고 알려진 뒤에는
그의 재주를 시기하여 천박한 노래자이의 아들이라고 대놓고 면박을 주는 자도 있었다.
벗바리가 없다 보니 조그만 실수에도 당장 가혹한 처벌이 떨어지기 일쑤라 벼슬살이가
남보다 갑절은 위태롭고 어려웠다.
그가 장립대령(長立待令)이란 조롱과 핀잔을 받으면서도 권문세가를 열심히 드나든 이면에는
이 같은 사연이 숨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모든 어려움은 왕제 백반의 눈에 들고 급기야 책사로 알려지면서
거짓말처럼 말끔히 사라졌다.
자신을 괴롭히고 모욕하던 고관들이 별안간 양순하고 깍듯하게 구는가 하면,
온갖 듣기 좋은 말과 칭찬하는 소리가 가는 곳마다 들려왔다.
잡아먹지 못해 안달하던 사람들일수록 오히려 아첨이 더했다.
이것이 백반의 충복 노릇을 하게 된 칠숙의 운명이라면 운명이었다.
그는 백반의 주선으로 유하(幼賀)라는 여자와 재혼했는데 유하는 백반의 처 남천부인의 인척이자
금성 거부의 여식이었다.
그 일로 칠숙은 귀족들 사이에서도 두터운 신망을 얻어 마침내 병부령의 지위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그는 언젠가 축건백이란 옛날 벗이 오랜만에 찾아와 서로 술잔을 기울이며 한담을 나누던 끝에,
“자네는 어찌하여 백반과 같은 인물을 평생의 주인으로 섬기는가?”
하고 나무라자 별이 총총한 밤하늘을 올려다보며,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그 사람뿐이니 낸들 어찌하는가? 탓을 하자면 시운을 탓해야지.”
하며 깊이 탄식한 뒤에,
“나에겐 자네처럼 평생을 야인으로 지낼 배포와 용기가 없네.
더욱이 나 하나 없어진다고 달라질 세상인가?
젊어서야 장부의 휘황한 꿈이 어찌 내 가슴엔들 없었으랴만 이젠 거의 다 포기했다네.
사는 동안 집에 식구들 밥 안 굶기고 그저 천수나 누리고 가면 다행이지.”
자조 섞인 한탄에 이어 눈물까지 글썽인 적도 있었다.
어쨌거나 칠숙은 자신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임금이 있는 대궁으로 말을 달렸다.
궁문을 지키던 문지기들은 병부령이 나타나자 아무런 의심 없이 문을 열어주었고,
칠숙은 정전과 편전을 지나쳐 시위부 군사들이 횃불을 들고 야순을 도는 침전에까지 단숨에 달려갔다.
침전 경비를 맡은 시위부의 당번들은 야밤에 군사들이 들이닥치자 크게 놀라고 당황했다.
“멈춰라, 무엇을 하는 무리들인가?”
휘하에 졸개 10여 명을 거느린 당번 대두(隊頭) 하나가 용감하게 나서서 칠숙의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이놈아, 나는 병부령이다! 임금께 급히 아뢸 말이 있어 왔으니 지체 없이 물러서라!”
칠숙이 위엄을 갖추고 소리치자 대두는 고개를 빼고 횃불로 칠숙임을 확인한 뒤에,
“병부령께서 이 야밤에 군사들을 이끌고 어인 일이시오? 도성에 무슨 난리라도 났습니까?”
하며 반문했다.
“너 따위에게 자세한 말을 할 겨를이 없다. 어서 침전으로 통하는 문을 열라!”
칠숙이 재촉하자 대두는 아무래도 수상하다는 듯이,
“지존이 계시는 어전에 창칼을 든 군사들이 들이닥치는 것도 해괴한 일이지만
그 사정을 숨기니 더욱 괴이쩍소.
이곳을 통하려면 내성사신의 허락이 있어야 하니 병부령께서는 용춘공부터 만나보고 오시오.”
하고 문을 막아선 채로 도리질을 하였다.
칠숙에겐 더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비키지 않으면 베고 가겠다!”
칠숙이 엄포를 놓았지만 대두는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하는 수 없다고 판단한 칠숙은 칼을 뽑아 들고 순식간에 대두의 머리통을 날려버렸다.
대두가 단칼에 죽는 것을 본 10여 명의 군사들은 뿔뿔이 사방으로 달아났다.
칠숙은 잠긴 전각문을 부수고 급히 도부수 10여 명을 추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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