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31
원복이 삼도의 사졸들을 포박하라 이르고 공주의 수레를 향해 막 말머리를 돌리려 할 때였다.
별안간 후문 쪽의 군사들이 대쪽처럼 양편으로 갈리더니
그사이에서 말을 탄 사내 하나가 미친 듯이 창을 휘두르며 나타났다.
“공주님, 덕만 공주님 어디 계십니까!”
그는 소리 높여 공주를 찾으며 무섭게 말을 몰았다.
이를 본 소삼정 군사 몇이 질주하는 말머리 앞으로 무기를 디밀고 사내를 막아보려 했다.
그러나 마상의 사내가,
“비켜라, 이놈들!”
하며 거침없이 휘두르는 창질에 그를 막아보려던 무기는 버들잎처럼 허공에 나부꼈고,
동시에 군졸 서너 명도 비명을 지르며 뒤로 나동그라졌다.
“게 섰거라!”
보다 못한 원복이 철퇴를 비스듬히 꼬나 든 채 사내의 앞을 가로막고 나섰다.
사내가 원복을 알아보고 말고삐를 잡아채며 달려오던 속도를 줄였다.
“너는 누구의 허락으로 여기에 나왔느냐?”
“나는 삼도대감 알천이오.”
알천이라는 말에 원복도 잠시 놀란 표정을 짓고 다시 사내를 쳐다보았다.
직접 대면한 일은 없었지만 가잠성과 낭비성에서 두루 공을 세운 알천을 원복인들 모를 턱이 없었다.
“대체 무슨 일이오? 무슨 일인데 야밤에 병부 군사들이 지엄한 왕궁에서 이 난리를 치는 것이오?”
대궁 정전의 방비를 맡고 있던 알천은 임금이 정무를 파하면 일이 끝났으므로
야간 당번을 설 이유가 없었다.
그러나 덕만 공주의 신변을 줄곧 염려해온 용춘이 별전과 가까운 대궁 후문을 알천에게
따로 부탁하고 잡인 출입을 엄격히 통제한 까닭에 공무가 끝나고도 후문에서 늦게까지
번을 설 때가 많았다.
집이 대궁 근처였던 알천은 이날도 공무가 일찍 끝나 사졸들을 파하고 밥을 먹으러 집에 들렀는데,
대문 앞으로 군사들이 떼를 지어 지나가는 것을 보자 먹던 밥을 팽개치고 허겁지겁 뛰어나왔다.
아니나다를까. 그가 후문에 이르렀을 때 낯선 군사들이 길을 가로막았다.
알천은 크게 노하여 맨주먹으로 군사 두셋을 요절내고 창과 말을 빼앗아 달려오는 길이었다.
“무슨 일인지는 모르지만 나는 대궁 후문에 쥐새끼 한 마리 들락거리지 못하도록 하라는
병부령의 군령을 받았다.
그대는 어서 무기를 버리고 말에서 내려 병부의 지시에 따르라.”
알천은 원복이 말하는 동안 횃불 아래 널브러진 삼도 사졸들과 동료 구평의 처참한 주검을 보았다.
사태를 파악한 알천의 눈에 새파란 불꽃이 일었다.
“대궁 방비는 본래 삼도의 몫이다.
병부령이 무슨 권한으로 그런 군령을 내릴 수 있으며
또 너 따위가 어찌하여 미친개처럼 날뛰는가?”
연하의 사찬에게서 하대와 욕설을 들은 원복은 애당초 알천을 구슬러보려던 마음이 싹 가셨다.
게다가 그가 가잠성에서 공을 세웠다는 말을 들은 뒤부터 기회만 닿으면 무예를 겨뤄보고 싶은
무인 특유의 기질도 발동했다.
“천하에 버르장머리없는 놈아, 네 눈에는 이 철퇴가 뵈지도 않느냐?”
원복은 60근 철퇴를 가볍게 휘두르며 싸울 태세를 취했다.
알천도 굳이 피하려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는 잠자코 고삐를 끌어당겨 말에 탄력을 주었다가
그대로 박차를 가하며 원복을 향해 달려들었다.
두 사람이 맞겨룬 지 불과 1, 2합, 그러나 싸움은 너무도 싱겁게 끝났다.
알천이 원복의 가슴을 한 창에 꿰어 공중으로 번쩍 치켜올린 것이었다.
원복은 그가 자랑하던 철퇴를 제대로 써보지도 못한 채 찢어지는 비명을 남기며 죽어갔다.
자자했던 명성과는 어울리지 않는 원복의 최후였다.
소삼정의 용맹스러움은 본래 원복한테서 나온 것이었다.
군사들은 장수를 하늘같이 믿었고,
장수는 그런 군사들을 맵게 다루어 한덩어리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하늘같이 믿던 장수가 한 창에 찔려 죽는 것을 보았으니
졸개들의 사기가 유지될 리 없었다.
“쥐새끼 같은 놈들, 썩 물러가지 못하겠느냐!”
창 끝에 꿴 원복의 시신을 무슨 짐짝처럼 훌쩍 집어던진 알천이
눈을 험상궂게 부라리며 버럭 고함을 지르자 혼비백산한 졸개들은
놀란 개미떼처럼 사방으로 뿔뿔이 흩어졌다.
“보시오 장군! 공주님은 여기 계십니다!”
시종 감탄한 눈으로 알천의 눈부신 활약상을 지켜보던
자장이 수레에서 일어나 힘차게 손을 흔들었다.
알천은 급히 말을 몰아 수레로 다가갔다.
“공주님께서는 무사하십니까?”
알천의 목소리를 확인한 덕만 공주가 수레 바깥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오, 족숙공!”
한동안 긴장했던 덕만이 반색을 하며 소리쳤다.
“아뢰옵기 송구하오나 역모인 듯합니다.
진정왕이 병부의 군사들을 동원해 역모를 일으킨 것 같습니다.”
“나도 들었소.”
덕만이 침통하게 대답했다.
“병부 군사들이 대궁을 장악했다면 3궁이 다 안전하지 못할 것이오.
아바마마께서는 어디로 피신을 하셨는지 모르겠구려.”
임금을 걱정하는 덕만의 말에 알천은 우선 용춘을 만나봐야겠다고 판단했다.
“내성사신의 집으로 가보면 사정을 자세히 알 수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하면 어서 서두르오.”
알천은 덕만이 탄 수레를 호위하여 대궁 후문을 무사히 빠져나왔다.
하지만 용춘의 집으로 가는 사량부의 대로변에는 병부 군사들이
이미 장사진을 치고 있어 더 이상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그때 수레를 몰던 자장이 말했다.
“소승의 우거가 서형산성 서남쪽 시오리허에 있습니다.
비록 허름한 초암이긴 하지만 하룻밤의 위급함은 능히 피할 만하니 그쪽으로 가십시다.”
알천이 생각해도 달리 방도가 없었다.
그는 덕만의 의향을 물어,
“형편이 그렇다면 어찌하겠소? 스님께 하룻밤 신세를 지는 수밖에.”
하는 대답을 듣고는 자장의 절로 덕만을 모셔갔다.
다행히도 도성의 남문에선 아직 통행이 자유로웠고,
문지기들도 사태를 전혀 모르는 듯했다.
게다가 자장의 안내로 찾아간 서형산성 바깥의 절은 과수(果樹)가
빽빽한 정원의 평지에 있어 수레가 절 문 앞에까지 갈 수 있었다.
도착하고 보니 알천은 그곳이 여러 모로 마음에 들었다.
무엇보다 주위에 민가가 드물고 또 대궐과 거리가 적당히 떨어져서 좋았다.
그 정도라면 하루가 아니라 며칠쯤은 안심하고 지낼 수도 있을 것 같았다.
“저는 용춘공을 만나뵙고 형지를 자세히 알아봐야겠습니다.
제가 돌아올 동안 스님께서 공주님을 좀 보살펴주십시오.”
알천이 정중히 부탁하자 자장은 걱정스러운 낯을 해보였다.
“공주마마를 뫼시는 것이야 소승에겐 다시없는 광영이나
이 야밤에 시호 같은 반역의 무리가 날뛰는 데를 어찌 혼자 가려 하십니까?
차라리 날이 밝거든 움직이시지요?”
“제 걱정은 마십시오. 날이 밝으면 오히려 도성을 출입하는 경비가 더 삼엄해질 것입니다.”
알천은 덕만에게도 양해를 구하고 다시 도성으로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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