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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인물 26

오늘의 쉼터 2014. 9. 29. 11:20

제20장 인물 26

 

 

 

 

“그런데 나리께 한 가지만 여쭈어보겠습니다. 찬학(簒虐)입니까……?”

백반이 칠숙과 시선을 맞춘 채로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칠숙이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하면 나리께선 무턱대고 일을 벌이실 게 아니라 치밀한 계획부터 짜야 합니다.

 

늙은 왕을 주살하는 일이야 무엇이 어렵겠나이까만 궐내엔 덕만 공주가 있고

 

궐밖엔 천명 공주가 있습니다.

 

또한 용춘과 춘추가 있고 시위부를 주관하는 알천이 있습니다.

 

이들은 과연 어떻게 하실 작정입니까?”

칠숙의 염려하는 바를 알아차린 백반이 말했다.

“이런 일은 시일을 오래 끌 게 아니야.

 

어차피 해치울 거면 순식간에 해치워야지.

 

늙은 왕을 베고 나면 나머지는 절로 평정이 될 걸세.

 

나는 여러 사람이 다치는 것을 원하지 않지만 끝까지 저항하는 자가 있다면 하는 수 있는가?

 

공주든 용춘이든 방해하는 자는 벨 수밖에.”

“그럼 뒤를 감당하기가 여간 어렵지 않을 겝니다.”

칠숙이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용춘공과 춘추만은 설득을 해 우리 편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김춘추가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어째서 그런가?”

“나리께서 임금을 죽이고 보위에 오르시는 데까지는 저희 두 사람만 가지고도 크게 무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문제는 그 다음입니다.

 

나리께서도 익히 아시는 바처럼 춘추는 당주와 호형호제하는 인물이요

 

당조의 수많은 중신들과도 흉금을 터놓고 지내는 사입니다.

 

다시 말해 당에서는 우리나라 전체보다도 오히려 김춘추 한 사람이 더 중할지 모릅니다.

 

그런데 만일 나리께서 그런 춘추를 죽이고 보위에 오른다면 당에서 나리께 앙심을 품을 것은

 

불을 보듯 뻔합니다.

 

만일 그들이 백제나 고구려를 도와 우리를 치기라도 한다면 그때는 헤어날 방법이 없습니다.”

칠숙은 차분히 말을 이어갔다.

“또한 춘추는 얼마 전에 서현공의 막내딸과 혼인을 하였고,

 

낭비성에서 공을 세운 용화 김유신과는 처남 매부지간으로 인연이 깊습니다.

 

서현과 유신 부자는 가야국 출신 망국민들에게 신망이 두터운 인물이올시다.

 

김춘추를 죽이는데 그의 장인과 처남이 가만있을 리 없고,

 

그렇다면 서현공과 김유신도 같이 죽여야 합니다.

 

그러잖아도 나라에선 신라인과 가야인이 서로 불상득하여 견원지간처럼 지내는 예가 허다합니다.

 

나리께서 그들 두 부자를 죽이고 보위에 오르신다면 장차 아무리 선정을 베풀어도

 

가야인의 인심은 결코 얻지 못할 것이며, 안으로는 내란에 시달리고 밖으로는

 

사면초가에 휩싸여 형세가 더욱 어려워질 공산이 큽니다.”

“하면 그대에게 무슨 좋은 방도가 있는가?”

“신의 소견에는 찬학보다 차라리 화백을 소집하여 전왕의 선례를 따르는 것이 어떨까 합니다.

 

지금 조정 중신들 가운데 임금의 망령을 걱정하지 않는 이는 아무도 없습니다.”

칠숙은 임금을 죽이는 극단적인 찬학보다 폐위와 양위 쪽으로 은근히 권유했다.

 

백반은 아주 못마땅한 표정으로 눈을 감고 깊은 생각에 잠겼다.

 

염종이 그런 칠숙을 반박했다.

“공은 화백에 나오는 중신들이 만장일치로 나리를 추대할 거라고 어떻게 장담하오?

 

다른 사람은 다 그만두고라도 용춘의 경우를 가정해봅시다.

 

내성사신이면 화백에서 엄연히 한 자리를 차지할 것인데

 

그가 과연 장인의 폐위에 동조를 하려 들겠소?”

“그러니 설득을 해야지. 자고로 찬위란 천하의 인심을 등에 업어야 성공할 수 있는 법,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화백의 결과를 보아가며 해도 늦지 않으이.”

“본래 큰일을 하자면 작은 희생은 따르게 마련이오.

 

시시콜콜한 것을 다 따지고서야 무슨 일인들 할 수 있단 말이오?

 

나리께서 보위에 오르고 나면 공이 염려하는 것과는 일이 많이 달라질 게 틀림없소.

 

제 목숨 아깝지 않은 이가 세상에 흔합니까?

 

장인이든 사위나 처남이든 다 제 목숨이 살고 있는 것이지

 

죽은 다음에야 그런 게 무슨 소용이 있겠소?”

백반이 눈을 감은 채로 앉아 염종의 말에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염종과는 더 말할 것이 없다고 판단한 칠숙이 백반을 향해 자세를 고쳐 앉았다.

“만일 우리와 당의 관계가 틀어지면 백제왕 부여장은 고기가 물을 만난 듯 설쳐댈 게 뻔합니다.

 

선화는 부여장을 부추겨 부형의 원수를 갚으려 들 것이고,

 

그럼 부여장은 장인의 원수를 갚는다는 명분으로 반드시 군사를 일으킬 것입니다.

 

일이 크게 잘못될 경우엔 당과 백제가 결탁하여 연합군을 낼 수도 있는 일이올시다.”

칠숙은 백제로 시집간 선화 공주까지 거론하며 백반을 설득하려 애썼다.

 

그러나 이미 형을 죽이고 보위를 찬탈하기로 마음이 돌아선 백반의 귀에

 

칠숙의 조리 있는 말들이 제대로 먹힐 리 없었다.

“혹시 그대는 다른 마음이 있는 게 아닌가?”

백반이 감았던 눈을 지릅뜨고 의심하는 시선으로 칠숙을 노려보았다.

“다른 마음이라니요?”

“그대의 말을 들어보면 나는 앞으로 일어날 일들이 두려워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구나.

 

도대체 너의 주장하는 바가 무엇이냐?”

백반은 일그러진 낯으로 따지듯 반문했다. 당황한 칠숙이,

“나리께선 과연 저의 진심을 모르시겠나이까?

 

저는 다만 거사에 앞서 인심을 아우를 치밀한 계획을 짜야 한다는 점을 말씀드렸을 뿐입니다.

 

나리도 나리지만 뒤를 이을 태(泰) 도령의 왕업까지 함께 순탄하여 그 덕화가 아침 해처럼

 

사해만방에 퍼져나가기를 바랄 따름입니다.

 

부디 신의 충심을 헤아려주십시오.”

하고 머리를 조아렸다. 이에 백반이 다소 누그러진 얼굴로,

“늙은 임금과 왕녀 덕만은 벨 수밖에 없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그 처신하는 바와 일의 형지를 보아가며 결정할 것이다.”

하고서,

“그대의 말이 비록 이치에 맞는 구석은 있지만 한 가지 간과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바로 권세의 속성이다. 나는 중국에서 건너온 글들을 제법 읽었지만

 

제(齊) 나라의 명신 관중(管仲)이 본래 자신이 섬겼던 공자 규(糾)의 원수를 갚았다는 말을

 

아직 들어본 바가 없다.

 

만물을 기르는 것은 해요, 신하란 만물이 해를 향하듯이 임금을 섬기고 받들 뿐이다.

 

나는 노후의 안락함과 갈문왕의 명예로움을 쾌히 저버리고 계림의 사직과 백성들의 안온함을 위해

 

저 수주(隋主:양광)와 당주(唐主:이세민)가 택한 고난의 가시밭길을 기꺼이 걸어갈 것인즉,

 

칠숙은 기우를 거두고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라.

 

오늘만 지나고 나면 세상은 완전히 달라져 있을 것이다.”

이어 백반은 근엄한 얼굴로 두 병부령을 향하여 그날 밤중으로 도성의 군사를 움직여

 

3궁을 장악하고 왕과 공주 덕만을 죽이라는 영을 내렸다.

 

명령을 받은 칠숙과 염종은 백반의 사가를 물러나는 즉시 병부로 말을 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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