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24
한편 낭비성을 치고 나서 덕만은 춘추를 당나라로 보내어 조공하고 이세민에게
계림의 어려운 사정을 잘 설명하도록 일렀다.
춘추가 금성을 떠날 무렵 둘째 아이 산달이 임박해 있던 문희는,
“가시면 족히 몇 달은 뵙지 못할 터인데 며칠만 기다렸다가 제가 아이 낳는 거나 보고 가십시오.
아버지가 몇 달씩이나 아들이 나왔는지 딸이 나왔는지 모르는 것도 흉악한 일이지만
저 또한 낭군님도 없이 무슨 기운으로 애를 낳습니까?”
하며 부른 배를 움켜잡고 아양을 떨어댔다.
춘추가 허허, 하고 한참을 웃다가,
“지난번 큰놈 낳을 적에도 나야 방귀가 나오도록 용만 썼지 무슨 도움이나 되었소?
세상에 남자로서 하지 못할 것이 제 처 아이 낳는데 바깥에서 죽어라 땀내는 일이오.”
첫아이 낳을 때를 떠올리고 새삼 고개를 절절 흔들었다.
“하루 이틀쯤 기다리는 거야 채비를 덜 갖췄다고 핑계를 대볼 수도 있지만 무한정 기다릴 수야 있소?
듣자니 유신 형님은 스무 달 만에도 나왔다고 하던데,
행여 뱃속에 든 놈이 무던한 제 외숙을 닮았으면 내가 당나라를 다녀오고도 얼마간 여유가 더 있소.”
춘추의 말에 문희가 천연덕스럽게 자신의 부른 배를 슬슬 어루만지며,
“얘야, 네 아버지 하시는 말씀을 다 들었지?
하루나 이틀 안에 나오든지 아니면 아예 거기 눌러앉아 살아라.”
하였다.
춘추와 문희 내외는 갈수록 정분이 더 나서 밤마다 어린애들 소꿉 놀듯 재미나게 살았다.
춘추는 이틀을 더 지체했지만 아이가 나오지 않으니,
“아무래도 임자 몸푸는 것은 보지 못하겠소.”
했더니 문희도 그때는 사정이 불가피한 줄을 알고,
“장부는 집 밖에 나서면 집안일은 말끔히 잊는다고 했습니다.
애는 제가 낳을 테니 일이나 빈틈없이 보고 오세요.”
하였는데, 춘추 떠나고 불과 사나흘 뒤에 산기가 돌았다.
문희가 첫아이 법민을 낳을 적엔 특별히 태몽 같은 꿈을 꾼 기억이 없었다.
그때는 처녀의 몸으로 애를 배는 바람에 걱정이 태산 같았고,
또 태어나서 처음 겪는 일이어서 설사 꿈을 꾸어도 그것이 태몽인지 무엇인지 알지도 못했다.
그러나 둘째가 들어설 때는 이름 모를 꽃들이 만발한 계곡에서 네댓 살짜리 애들을
새까맣게 거느린 이상한 행색의 노인을 만났다.
그 노인이 문희를 보자 대뜸 공손히 합장하여 문희 또한 답례로 인사를 했더니,
“부인이 삼신산에 또 오셨구랴.”
하고 알은체를 하는데 옆에서 수많은 아이들이 노인과 문희 주변을 맴돌며
저희들끼리 다투고 장난질을 치느라 아무 정신이 없었다.
“이놈들아, 좀 조용히 하지 못하겠느냐?”
노인이 귀 뒤로 주먹을 들어 보이며 애들을 나무랐으나 소용이 없자 크게 탄식하며 말하기를,
“일전에 부인이 큰놈을 데려가고 나서 그만 이 꼴이 되었다오.
그래도 큰놈 있을 때는 말썽 한번 부리지 않던 얌전한 놈들이었는데,
아무래도 저 애들을 데리고 이곳을 떠날 때가 된 모양이오.”
하고는 갑자기 손을 들어 먼 곳을 가리켰다.
“이번엔 저놈을 데려가오.
큰놈 가고 나서 그래도 책 읽고 공부하는 놈은 저놈뿐이오.
가끔 어려운 것을 물어 그게 탈이지 성질도 무던하여 나무랄 데가 없고.”
노인이 손짓으로 가리킨 곳은 기암절벽의 바위틈이었다.
문희가 자세히 보니 그곳에 말쑥하게 생긴 동자 하나가 책을 펴놓고 앉아 글을 읽고 있었다.
“인문아, 이리 온!”
노인이 팔을 흔들며 큰 소리로 부르자 동자는 읽던 책을 옆구리에 끼고 다람쥐처럼
민첩하게 바위를 내려왔다. 문희가 가까이 다가온 동자를 살펴보니
이목구비가 반듯하고 맑은 눈동자에 어진 꼴 이 가득하여 매우 마음에 들었다.
“너, 나를 따라서 바깥세상으로 나가련?”
문희가 동자에게 물으니 그 동자가 반들반들 눈빛을 빛내며 문희를 빤히 올려다보고 나서
빙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꿈이 깬 것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
그로부터 얼마 지나지 않아 과연 몸에 태기가 도니 문희는 순전히 제 짐작으로 이번에도
사내아이일 거라고 믿었지만 귀한 꿈일수록 발설하지 않는다는 말을 들은 것 같아
아무한테도 태몽 꾼 말을 하지 않고 지냈다.
산모의 짐작은 정확하여 문희가 산일에 또다시 옥동자를 낳자 용춘은 천명을 보고서,
“나는 일생을 외롭게 보낸 사람인데 며느리 하나가 잘 들어와 앞으로는 슬하가 북적거리고
계림의 광문거족으로 손색이 없게 되었으니 이제는 죽어도 여한이 없소.
이는 임자도 평생에 하지 못한 거사외다.”
하며 천명이 춘추 하나만 낳고 단산한 것을 탓하듯이 말하였는데
다른 때 같았으면 토라졌을 천명도 이때는 덩달아 활짝 웃으며,
“그러게 말입니다. 세상에 우리 집 며느리같이 귀하고 어여쁜 것이 다시 있을까 모르겠어요.”
하고 흡족해하였다.
문희가 아이를 낳고 나서 비로소 천명에게 태몽을 말하니
그 얘기를 전해들은 용춘이 참 좋은 꿈이라며 아이 이름을 꿈에서 들은 대로
인문(仁問)이라고 지어 부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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