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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0장 인물 25

오늘의 쉼터 2014. 9. 29. 11:14

제20장 인물 25

 

 

 

 

시일이 흐르면서 왕은 점점 더 수상한 행동을 보였다.

 

밤에 일어나 홀로 대궁을 거닐기도 하고, 아무도 없는 허공에 대고 알아듣기 힘든 소리로

 

벌컥벌컥 역정을 내기도 했다.

 

내전에서 길을 잃어 덕만이 데려온 일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한번은 백관들이 모인 자리에서,

“근래에는 대일과 월종의 모습을 통 볼 수가 없구나.

 

머리 허연 것들이 없으니 눈은 좋다만 늘 앞에서 지저귀던 소리를 안 들으니 귀가 심심하다.

 

그 자들에게 혹 무슨 변고라도 생겼느냐?”

하고 물어서 신하들을 어리둥절하게 만들기도 했다.

 

멀쩡한 때도 없는 것은 아니었으나 그렇지 못한 날이 자꾸만 늘어갔다.

신하들간에 양위(讓位) 공론이 일어난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다.

 

경인년(630년) 연간에 백반은 자주 임금을 알현하고,

“형님께서는 이제 물러나 쉬실 때가 되었습니다.

 

늘그막에 쇠한 기력으로 어찌 번잡하고 귀찮은 일들과 짝하려 하십니까?

 

장안에서도 이연이 젊은 아들에게 보위를 물려주고 태상황으로 나앉았는데

 

오히려 정사가 순조롭다고 합니다.

 

형님께서 양위를 하시면 신이 정성을 다해 편안히 모시겠나이다.”

당나라의 예까지 들며 간곡히 설득하였다.

 

임금이 어떤 날은,

“그래, 네 말이 지극히도 옳다.

 

길일을 가려 양위를 하고 어서 이놈의 귀찮고 고단한 왕 노릇을 그만두어야지.”

하고 쉽게 동의하기도 했지만 때로는,

“이놈아, 늙는 것도 서러운데 뒷전으로 물러나라면 그만 죽으란 소리밖에 더 되느냐?

 

네 감히 어느 안전에서 그따위 불경한 소리를 지껄이느냐?”

하며 호통을 쳤고,

“양위를 하라니 도대체 누구에게 양위를 하란 게냐?

 

오호라, 너는 젊었을 때부터 임금질을 하고 싶어 안달하던 놈이니 너한테 양위를 하란 소리렷다?

 

이 불충하고 불경한 놈아, 네 어찌 형에게 이럴 수가 있느냐? 너는 목이 수십 개라도 되더냐?”

하고 노기등등한 낯으로 호되게 꾸짖기도 했다.

백반이 처음에는 형이 오락가락하는 사람이라

 

그래도 저래도 크게 마음이 상하지 아니하였는데,

 

신묘년(631년) 정초에 아들 둘을 거느리고 신년 인사를 가서 다시 양위할 것을 권하자

 

임금이 용상을 박차고 벌떡 일어나,

“내가 너 따위에게 양위를 하느니 차라리 국법을 고쳐서라도 딸이나 사위를 왕으로 삼겠다!”

하는 소리를 듣고는 그만 속이 뒤틀리고 눈알이 뒤집혔다.

 

망령이 나면 젊어서 겪은 뼈아팠던 일들이 떠오르는 법인지

 

바로 전날 임금은 선화의 이름을 부르며 담벼락에 붙어 서서 한참을 울었다.

 

임금은 선화의 일 때문에 백반을 증오하게 되었는데,

 

하필이면 그런 뒷날에 백반이 덩실한 아들들을 데리고 나타나 양위할 것을 주장하니

 

임금으로선 부아가 치밀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일은 결국 두 늙은 형제의 사이를 돌이킬 수 없는 지경으로 끌고 갔다.

 

왕녀 덕만이 임금의 노망을 핑계로 계속 대궐에 머물며 정사에 이리저리 참견하는 것이

 

벌써부터 눈에 거슬렸던 백반이었다.

 

그는 집으로 돌아와 일체의 출입을 삼간 채 근 달포나 온갖 궁리에 사로잡혔다가

 

이윽고 칠숙과 염종, 두 병부령을 불러 찬역을 도모하기에 이르렀다.

“정사는 황폐하고 왕업은 쇠잔하여 계림의 7백 년 사직이 송두리째 흔들리는데

 

도대체 언제까지 망령난 왕의 천수가 끝나기만을 속수무책으로 기다려야 한단 말인가!

 

나는 그간 나라의 장래를 걱정하는 우국지사들로부터 늙은 왕을 몰아내고 선정을 펴달라는

 

충언을 귀가 따갑도록 들어왔으나 형제간의 정리를 생각하고 왕실의 아름다운 선례를 남기려

 

차일피일 결행을 미루고 있었는데, 사태는 날로 긴박하고 임금의 노망은 갈수록 꼴불견이라

 

더 이상 사사로운 정리나 논하며 한가롭게 앉았을 수가 없구나.”

백반은 궐에서 받은 충격과 흥분이 아직도 가시지 않은 듯 안색이 수시로 변하고

 

노여움으로 살을 떨었다.

“임금은 살 만치 살았고 더 살아서는 나라와 사직에 짐만 될 뿐이다.

 

또한 덕만이 머리를 기르고 대궐에 머무는 걸로 미루어 필경은 늙은 왕과 짜고 뒤로

 

무슨 수작을 부리고 있음이 분명하다.

 

사정이 이럴진대 내 어찌 앉아서만 당할 것인가?

 

나는 비로소 몸을 일으켜 쇠잔한 왕업과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제하기로 결심했다.

 

한즉 어떤가? 그대들 두 사람은 노망난 임금과 그 딸을 따를 것인가,

 

아니면 나를 도와 계림의 진정한 충신이 되어보겠는가?”

백반의 묻는 말에 염종이 먼저 대답했다.

“저는 비록 금왕의 신하지만 선대부터 나리와 교류하며 한집 식구처럼 허물없이 지내온 사이입니다.

 

오로지 나리를 따라 견마지로를 다할 뿐, 어찌 딴마음이 있겠습니까?”

그는 대일과 월종이 죽은 뒤로 누구보다 소리 높여 양위 공론을 주창하던 인물이었다.

 

염종의 대답을 들은 백반이 이번에는 칠숙을 바라보았다.

“그대의 뜻은 어떠한가?”

“저 역시 나리께서 보위에 오르기만을 일구월심 바라고 기다려온 사람입니다.

 

마땅히 나리의 뜻을 좇을 것입니다.”

칠숙은 우선 그렇게 대답한 뒤 목소리를 잔뜩 죽여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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