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0장 인물 22

오늘의 쉼터 2014. 9. 26. 23:51

제20장 인물 22

 

 

 

 

자리를 펴고 누운 용춘은 근래 부쩍 이상해진 백정왕(白淨王:眞平王)과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느라

 

쉬 잠을 이루지 못했다.

 

한참 동안 뒤척이다가 바람이나 쐴 겸 가만히 밖으로 나갔더니

 

서현이 홀로 밤하늘을 쳐다보며 앉았다가,

“사돈도 잠이 안 오시는가?”

하고 물어 잠자코 다가가서 그 곁에 앉았다.

돌이켜보면 참으로 묘한 인연이었다.

 

한창 혈기 방장한 나이에 서로 다른 왕실, 몰락한 왕가의 적손으로 만나

 

평생 우정과 동고동락을 맹약했던 두 사람이었다.

 

그 마음 깊은 곳에는 폐왕가의 한(恨) 과 우수가 나란히 흘렀고,

 

당대에 기필코 집안을 일으켜서 보란 듯이 천하를 휘어잡아 보리라던

 

방촌의 의지 또한 서릿발과 같았다.

 

시작은 그처럼 비슷한 처지에서 느낀 동병상련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운명이란 늘 예기치 않은 곳으로 치닫는 놀란 말과 같아서

 

둘은 이내 인척간으로 맺어졌고, 세월은 뜻과 같지 않아 용춘이 일생을 허무하게 보내면서

 

서현 역시 용춘과 가깝다는 이유로 수발이 황락하도록 외관만을 전전했다.

 

애초 만나지 않았던들 두 사람의 인생은 크게 달라졌을 것이요,

 

만났기 때문에 좋은 일보다는 궂은 일이 훨씬 많았던 사이였다.

그러나 그 고단한 세월을 보내면서도 둘은 단 한 번도 서로를 원망하거나 만난 것을

 

후회해본 적이 없었다.

 

외로울 때는 묵묵히 맞은편에서 술잔을 기울이는 벗이 되었고,

 

중대사가 생기면 반드시 벗의 의견을 물어 지침으로 삼았다.

 

한동안 소원했던 시절도 있었지만 그것은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서로 가까이 지내는 것이 벗에게 누가 될 것 같아서였고,

 

굳이 설명이나 해명 없이도 그런 마음들이 바람결에 통하고,

 

만나지 않아도 눈만 감으면 뜻이 환히 보였다.

 

이심전심이란 바로 그런 것이리라.

 

그리고 마침내 자식들이 자라서 아름다운 인연을 맺었으니

 

두 사람이 말년에 서로를 가리켜 사돈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은

 

어쩌면 일생을 곱게 가꾸어온 우정에 하늘이 내린 최고의 선물일지도 몰랐다.

때는 바야흐로 8월 중순,

 

중추절 가배를 목전에 둔 터라 달이 좋았다.

 

두 사람은 약속이나 한 듯 나란히 앉아 달빛 아래 군사들이 먹고 마시며

 

노는 모습을 멀찌감치 바라보았다.

“우리 세월은 이대로 흘러가는 모양일세.”

한참 만에 용춘이 탄식조로 읊조렸다.

 

그러자 서현 역시 숙연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게나. 취산서 보던 달은 옛날과 다름없고 젊어서 꾸던 꿈도 마음속에 여전한데

 

이것 참 야단이 아닌가? 인생 6, 70이 참으로 순식간이야.”

“순식간이지. 아무렴, 순식간이고말고.”

“하룻밤에 태산을 몇 번씩 옮기던 기개는 어디로 가고 남은 것은 주름살과 백발뿐이네, 허허.”

“결국은 자네도 나도 옳은 세상 한번 보지 못하는군그래.”

“세월을 잘못 만난 게지.”

“우리 복이 그뿐인 게야.”

“자식이 저만치 자라 나라에 공을 세웠으니

 

나는 이제 돌아가거든 사직을 청하여 그만 관직에서 물러날까 하네.”

서현의 그 말에 용춘이 갑자기 다급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직은 아님세.”

“아니라니?”

“우리야 기왕 때를 만나지 못한 사람들이라 사직을 하건 말건 크게 상관이 없지만

 

자식들의 장래를 생각하면 마지막으로 꼭 한 가지 할 일이 남았네.”

“그것이 무언가?”

“임금이 심상찮다네.”

“환후를 얻으셨는가?”

“……망령이 난 것 같네.”

그때까지도 궐내에 떠도는 소문을 듣지 못한 서현은 깜짝 놀랐다.

“하면 어찌하는가?”

“덕만 공주가 궐에 내려와 있으니 어떻게든 그쪽으로 끌고 가야지.”

“궁리는 해보았나?”

“정 궁하면 군사를 일으키는 수밖에.”

“공주와는 말이 되었구?”

“그런 셈이네.”

서현은 골똘한 생각에 잠겼다가 크게 한숨을 쉬었다.

“쉽지 않을 텐데……”

“그러니 자네 같은 이가 섣불리 물러나서는 큰일나네.

 

유신이나 알천 같은 청년도 있어야 하지만 아직은 자네와 나 같은 늙은이도 필요해.

 

우리 세상이야 얼마 남지 않았어도 자식들 앞길마저 우리와 같아서는 곤란하지 않나?

 

갈 때 가더라도 앞길은 닦아놓고 가야지.”

젊었을 때 취산에서 그러했듯 두 사람은 모처럼 어깨를 나란히 한 채로

 

밤이 깊도록 긴한 얘기들을 나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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