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17
한편 기축년(629년) 춘궁기를 넘어서자 신라에서는 웅진에 주둔한 장왕(璋王:武王)이
또다시 군사를 일으켜 쳐들어올 거라는 소문이 나돌아 민심이 극도로 어수선하였다.
일 년의 모상 기년복(朞年服)을 핑계로 대궐에서 지내던 덕만은 저녁에 가만히
용춘과 아우 천명 내외를 궐로 불러 다음과 같이 말했다.
“기회는 저절로 오는 법이 드물고 다만 사람이 애를 써서 그것을 만들 따름입니다.
지금 나라 안에는 백제가 군사를 일으킬 거라는 소문이 파다한데,
부여장이 해마다 군사를 내어 국경을 어지럽히는 까닭은
우리의 국력이 쇠약한 것을 믿고 계림을 만만하게 보기 때문입니다.
더욱이 우리 군사들은 번번이 싸움에서 패하여 적이 쳐들어온다는 소문만으로도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편입니다.
싸움이란 본시 지략과 병법보다도 군사들의 사기로 하는 것이며,
신라의 국력이 날로 쇠하는 것도 따지고 보면 사기와 자신감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덕만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쓰러지는 나라를 다시 일으켜 세우려면 무엇보다
백성들에게 자신감을 되찾게 해주는 일이 시급합니다.
사람이란 금수와 달라서 한번 신바람이 나면 하지 못할 일이 없습니다.
백성들에게 신바람을 불러일으키는 일은 조정의 몫입니다.”
잠깐 말허리를 끊었던 덕만은 곧 용춘 내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병가에 허허실실이란 말이 있지 않습니까?
당숙께서 군사를 일으켜 북적(北敵:고구려)을 한번 쳐보지 않겠습니까?”
덕만의 돌연한 제안에 천명은 깜짝 놀라는 눈치였으나 용춘의 얼굴에선 한가닥 희열의 빛이 서렸다.
그는 무릎을 치며 말했다.
“과연 탁견이십니다.
비록 군사를 낼 처지는 아니지만 어차피 침공을 당해도 싸움은 불가피하니
안팎의 어려운 사정을 감안해 능히 허세를 부려볼 만합니다.”
“그랬다가 자칫 백제까지 쳐들어온다면 양난(兩難)에 빠지지 않겠습니까?”
천명이 근심 어린 얼굴로 반문하자 덕만이 대신 말했다.
“그건 아우가 잘 몰라서 하는 걱정이야.
동편이 위급할 때 서편을 치는 것은 병가에서 흔히 쓰는 계책일세.
작년 가잠성의 일도 있고 하니 만일 우리가 먼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친다면
부여장은 오히려 군사를 거두고 사태를 지켜보려 할 것이 틀림없네.
상대하기 버거운 자 앞에서 약자를 호통 쳐 기강을 다스리는 일은 저자에서도
흔히 쓰는 속임수가 아닌가.
우리처럼 삼국이 솥발과 같은 정족지세(鼎足之勢)에선 결코 위험한 계책이 아니라네.”
천명에게 설명을 마친 덕만이 용춘에게 시선을 돌렸다.
“제가 금강산에 있을 때 고구려의 지세를 눈여겨보았는데 접경의 낭비성(娘臂城)은
방비도 허술하고 지세도 그리 험한 편이 아니라 적은 군사로써 공격하기에 제격이었습니다.
또한 조정에서 공론을 일으키면 아무도 따라가지 않으려 할 게 뻔하므로
차제에 하주 서현공과 더불어 출정하고 이를 기화로 서현공을 대궐로 불러들인다면
우리로선 일거양득이 아니겠는지요?
당숙께서 결심하시면 아바마마의 윤허는 제가 얻도록 하겠습니다.”
덕만의 말을 들은 용춘은 만 가지 근심이 절로 사그라지는 듯했다.
“결심을 하고 말고가 있겠나이까. 마땅히 공주의 뜻에 따르겠습니다.”
대궐을 물러나온 용춘은 당장 하주로 사람을 보내 덕만의 뜻을 전했고
서현은 그 인편에 쾌히 허락하는 의사를 알려왔다.
고구려를 치자는 계획이 어전에서 공론화되자 염종(廉宗)은 화를 자초하는 일이라며 반대했지만
칠숙(柒宿)은 좋은 계책이라고 찬성하여 두 병부령간에 틈이 생기고 중신들간에도 양론이
분분하게 되었다.
사전에 이미 덕만으로부터 내용을 들어 알고 있던 왕은 중신들의 다투는 소리가 하도 지겨워,
“너희들은 어째 만날 뜻이 갈리고 무슨 일만 생기면 내 앞에서 눈깔을 허옇게 까뒤집고
대가리가 터지도록 쌈박질만 일삼느냐?
그래 가지고 지금껏 해놓은 일이 무어냐?
나는 고금의 조정 중신이란 무리 가운데 너희와 같은 것들이 있다는 소리를 전고에 듣지 못하였다!”
화를 벼락같이 내며 고함을 질렀다.
왕이 중신들 앞에서 이처럼 대로한 것도 전례가 없던 일이지만,
인품과 덕이 있던 지존의 입에서 험악한 쌍소리가 나온 것도 이때가 처음이었다.
중신들이 한동안 어리둥절하여 왕의 기색을 조심스레 살피는 중에,
“전하, 속이 거북하십니까?”
“조정 대사에 이론은 매양 있는 일입니다.”
하자 왕이 그렇게 말한 자를 잡아먹을 듯이 노려보며,
“여봐라, 방금 아가리를 열고 지껄인 저놈 둘을 당장 끌어다 목을 쳐라!”
하였다.
그제야 중신들은 왕의 기색이 심상찮은 것을 깨닫고 움찔 자라목으로 사위를 살폈다.
용춘도 평소에 보던 왕이 아니라 사뭇 느낌이 이상했다.
“그렇다고 어찌 목을 치겠습니까? 고정하십시오.”
그러자 왕은 용춘을 보고도 버럭 소리를 치며,
“뭐라구? 이눔아, 너도 죽지 못해 환장을 하였더냐?”
하고는,
“뭣들 하는 게냐? 너희는 이제 왕명마저도 거역한단 말이냐?
너희가 하지 않으면 내가 친히 목을 베리라!”
탑전이 떠나가라 소리를 치며 그 기굴한 덩치를 일으켜 칼을 찾아 두리번거렸다.
이에 시위부 군사들이 들이닥쳐 이찬 대일(大日)과 품주대신 월종(月宗)을 끌어내기에 이르렀는데
막상 처형을 맡은 젊은 장수가 두 원로대신의 목을 좀처럼 치지 못하고,
“나리, 이 노릇을 어찌하오?”
“아무래도 임금이 본정신을 잃은 모양이니
잠시 지체하고 화급을 다투어 백반 나리를 불러주시게나.”
“그럴 새나 있소.
당장 목을 치라니 미적거리다간 내 목숨도 위태로울 지경이오.”
“이 사람아, 영이 영 같아야 따르지?”
“어쨌거나 왕명이 아니오? 천하에 왕명보다 더한 것이 있소?”
한동안 설왕설래하고 있으려니
안에서 늙은 내관이 종종걸음을 치며 나와 손짓으로 젊은 장수를 은밀히 부르고서,
“재촉이 심하오. 죽지 않으려거든 알아 하시오.”
하고 채근하므로 장수는 마침내 독한 결심을 아니 할 수 없었다.
대일과 월종은 혹시라도 그사이 왕의 본정신이 돌아왔는가 싶어
내관의 말하는 입과 젊은 장수의 안색을 두루 살피는데,
마침내 내관을 만난 젊은 장수가 두 사람 가까이 다가와서,
“두 분께서는 저승에 가서도 이 몸을 원망하지 마시오.”
하는 말을 듣고야 사태가 돌이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대일과 월종이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구며 궐문 밖으로 끌려 나갔다가
몸은 그대로 밖에 두고 목만 다시 궐 안으로 들어오니 왕이 흡족한 얼굴 로 말하기를,
“저 두 놈 때문에 일생을 시끄럽게 살았더니 이제 좀 조용히 지내겠구나.”
하고서,
“아까 논의하던 바가 무엇이냐?”
하며 좌중을 둘러보았다.
백관들이 입을 열었다가는 또 무슨 참변을 당하랴 싶어 한결같이
꿀 먹은 벙어리 시늉을 하자 보다못한 용춘이 나서서 재차 사안을 아뢰었다.
왕이 용춘의 고하는 소리를 조는 듯한 얼굴로 다 듣고 나더니,
“나는 이제 나이가 들어 만사가 귀찮다.
앞으로는 내 앞에서 이러쿵저러쿵 지껄이지 말고 한 가지만 말하라.
이번에 이 일도 너희가 잘 타협한 뒤에 의견이 하나로 모아지거든 내게로 오라.”
말을 마치자 그대로 몸을 일으켜 자리를 뜨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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