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0장 인물 16

오늘의 쉼터 2014. 9. 26. 22:36

제20장 인물 16

 

 

 

 

하루는 문희가 구종별배를 죄 한자리에 불러놓고서 집안에 너무 생기와 활기가 없어

 

오던 복도 달아날 판이라고 나무라며,

“집안이 살아야 고을이 살고 고을이 살아야 나라가 살지.

 

우리 집은 날마다 깊은 우물 속 같애.

 

사람 사는 집에선 얘깃소리도 나고 웃음소리도 나야지,

 

발소리를 죽이고 살금살금 다니는 것만 능사가 아니다.

 

어른들 계신 곳은 몰라도 앞으로 내 거처를 드나들 때는 제발 활달하고 기운차게들 다녀라.

 

지금처럼 이래 가지고야 어디 사람 사는 데라 할 수 있겠니?

 

그러고, 오는 사람 너무 막지 마라.

 

너희도 마실 갈 데가 있거나 마실 올 사람이 있거든 기탄없이 오가면서 살아.

 

어머님께는 내가 허락을 받아낼 테니.”

일장 연설을 마친 뒤 곧바로 시어머니의 거처를 찾아와서,

“집안이 너무 고적해요,

 

어머님. 저는 하주 친정에 있을 때 허구한날 가야국 망국민들이 당을 짓고 진을 치며

 

한집에서 살다시피 하는 광경을 보며 자라서 접빈객의 예도를 어려서부터 몸에 익혔습니다.

 

어머님께서 대문을 열고 살도록 허락만 해주신다면 찾아오는 손님들한테 욕을 먹는 일은

 

없도록 하겠나이다.”

하고 청하니 번잡한 것이라면 당최 싫어하던 천명이,

“얘, 나도 한때는 접빈을 낙으로 삼고 살던 때가 있었다마는 나중 돌아보니 죄 실없는 짓이더라.

 

공연히 밥청, 술청을 하는 귀찮은 식객만 늘어나 그 뒤치다꺼리에 집안 식구들이 죽어날 뿐이야.”

했더니 문희가 다시 공손하게 말하기를,

“지금 당나라 황제는 보위에 오르기 전부터 사해의 인걸들과 활발하게 교류를 했다고 들었습니다.

 

봉황을 어찌 날마다 볼 것이며, 물길을 막는데 교룡이 무슨 수로 찾아오겠습니까?

 

백 명의 식객을 쳐서 한 사람의 귀인을 만난다면 오히려 유익한 일이 아니겠는지요?”

하였다.

 

그 일이 있은 뒤로 천명은 아들의 앞날을 생각하고 며느리를 다시 보게 되었는데,

 

문희의 요청대로 대문을 활짝 열어제치고 살면서부터 빈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아니하여

 

적적하던 집안에 번잡스러울 만치 생기와 활기가 돌았다.

 

무거운 몸으로 하루에 수십 명 손님을 치면서도 천명에게는 힘든 내색 한번 한 적이 없었고,

 

하인들을 어떻게 휘어잡는지 다들 입에서 단내가 나도록 일에 시달리고도 누구 하나

 

불평하는 이가 없으니 그 또한 천명에게는 신통한 일이었다.

 

아니 불평은 고사하고 집안에서 마주치는 하인들마다 도리어 전에는 보지 못하던

 

희색마저 감돌아 천명이 하루는 용춘을 보고,

“저 아이가 나리 말씀대로 신통하기는 꽤나 신통해요.

 

하인 부리는 것을 보니 여자로 났기 망정이지 남자였으면 틀림없이 이름난 장수가 됐을 겁니다.”

하고서,

“어쨌거나 춘추 앞날은 이제 걱정을 안해도 되겠어요.”

며느리 들인 뒤로 처음 찬사를 내었다.

본시 여물 잘 먹는 말이 가기도 잘 간다고,

 

천명의 마음이 돌아섰을 무렵 문희가 몸을 틀어 반나절 만에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으니

 

천명이 하루종일 웃고 다니면서,

“아들이 장군이 아니라 며느리가 장군감이다!”

하고 좋아했을 뿐 아니라 급기야는 부엌에 들어가서 며느리 몸풀 때 먹일 미역국까지

 

손수 끓이기에 이르렀다.

이렇게 낳은 아들이 법민(金法敏:문무왕)이었다.

 

저녁에 퇴궐하여 집으로 돌아온 용춘이 난생 처음으로 손자란 물건을 품에 안아보더니

 

밥도 먹지 않고 시종 헛웃음만 치며,

“이놈이 말로만 듣던 손자라는 건가? 허허, 이놈이 과연 내 손자렷다?”

“욘석! 눈 좀 뜨고 할애비 낯짝을 좀 보려무나. 내가 이놈아, 네놈 할애비야!”

“허 참, 고얀 놈일세.

 

나는 아직 청춘인데 눈도 못 뜨는 이 주먹만한 놈이 난데없이 나타나선

 

창졸간 나를 영감으로 만드네그랴.”

평소 과묵하던 이답지 않게 혼자 온갖 수다를 떨었다.

 

그날 밤 용춘은 아이 이름을 짓느라 밤새 끙끙거리다가 새벽녘에 언뜻 잠이 들었는데

 

좀체 안 뵈던 낭지(朗智) 법사가 꿈에 나타나 자신에게 넙죽 큰절을 하며,

“이제 계림에 날 사람은 다 났소.”

하는지라 용춘이 깜짝 놀라며,

“법사가 드디어 노망이 드셨구려. 이놈저놈 하시던 입으로 어찌하여 존대를 하시오?”

하고 물으니 낭지가 근엄한 표정을 짓고,

“공의 슬하에서 삼한의 제왕이 났으니 어디 예전같이 대할 수가 있어야 말이지.”

이상한 소리를 하였다.

 

용춘이 더욱 기이한 느낌이 들어,

“그게 무슨 소리요?”

하자 낭지가 그 말에는 아무 대꾸가 없고,

“법지법(法之法)대로 사는 세상이 와야지. 아무렴 그런 날이 곧 올 게라.”

하고는 다시 허리를 굽혀 깍듯이 절한 뒤에,

“생시에 또 봅시다.”

인사를 마치자 홀연 연기처럼 사라졌다.

 

용춘이 소스라치게 놀라 눈을 떠보니 꿈은 꿈인데,

 

꿈에서 들은 낭지의 음성이 실제로 귀에 들리는 듯하고

 

머리에선 법민(法敏)이란 두 글자가 무슨 암시처럼 선명하게 떠올라,

“옳거니. 내 손자놈 이름은 법민이다.”

하고는 뒷날 식구들을 불러모아 그대로 부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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