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14
“일은 기왕 벌어진 바요,
굳이 따지자면 너희 두 사람을 소개시킨 나에게도 얼마간 책임이 있으므로 하주 부모님께는
내가 잘 말씀드려 꾸중을 면하게 해줄 수도 있다.
그러나 내가 불안한 것은 춘추 도령의 마음이다.
지금만 같으면 서로 한창 정분이 나서 문제될 게 없지만 춘추 도령은 전조 진지대왕의 적손이요
금왕의 하나뿐인 외손으로 그 신분이 우리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존귀하다.
너도 잘 알겠지만 우리는 고작해야 몰락한 가야 왕족의 일원에 불과하다.
게다가 영웅은 호색이라는 말도 있으니 나중에라도 춘추 도령이 마음을 달리 먹고
지체 높은 집안의 처자와 어울린다면 네가 불행해질 것은 뻔한 이치가 아니냐?
그래서 너의 임신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려 춘추 도령의 마음에 한번 더 못을 박아두려 하는데,
그러자면 네가 처자의 몸으로 감당하기 벅찬 수모를 겪을 수도 있다.
어떠냐? 그렇게 되더라도 능히 감수하겠느냐?”
그러자 문희는 볼을 붉혔을 뿐 대답이 없었다.
유신이 보기에 심히 마뜩찮다는 기색이었다.
유신은 그런 문희를 묵묵히 바라보다 말고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임신한 사실을 만천하에 알리는 데는 또 한 가지 이유가 있다.
나는 춘추 도령이 언젠가 한번은 때를 얻어 왕업을 좌지우지할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믿는다.
작금의 왕실 계보와 그 면면을 두고 보건대 김춘추만한 이가 없음은 명백한 사실이다.
적어도 20년 안쪽에는 이 나라의 성골들은 모두 동이 날 것이고,
그렇다면 왕가의 진골 가운데 임금이 날 수도 있는 일이다.
아니 반드시 임금까지는 아니라 해도 재상의 지위에 올라 천하를 호령하는 날은 틀림없이 올 것이다.
그런데 지금 세간의 민심은 크게 둘로 나뉘어 가야 사람은 신라인을 욕하고 신라 사람은
가야인을 무시하거나 경멸하고 있다.
자고로 큰일을 할 사람은 천하 인심을 고루 얻어야 하는 법이 요
그런 점에서 김춘추 역시 예외가 아니다.
이럴 때 가야 왕실의 딸인 네가 신라 왕실의 자제인 춘추와 혼인을 하면
그는 자연히 가 야인의 인심을 얻게 될 것이고,
너희 부부는 계림의 민심을 하나로 아우른 본보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여자의 도리를 놓고 보아도 그것이 곧 지아비를 섬기는 지어미의 당연한 내조가 아니겠느냐?
김춘추가 가야인의 인심을 얻고 말고는 지금 네 손에 달렸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같은 중대사를 어찌 잠깐의 수모와 견줄 수 있겠느냐?”
문희는 그제야 유신의 뜻을 환히 알아차렸다.
좀 전까지 시무룩하던 표정이 일시에 가시면서,
“오라버니의 말씀을 비로소 알겠습니다.
뜻대로 하십시오.
저는 다만 오라버니의 뜻에 따를 뿐입니다.”
평소처럼 밝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유신이 크게 고개를 끄덕이며,
“고맙구나. 너는 똑똑하고 영리한 아이라서 내 뜻을 따를 줄 알았다.”
하고는,
“하면 내일 너를 남산으로 데려가 불에 태워 죽이는 시늉을 할 것인데
조금도 놀라거나 당황하지 말아라.”
하며 뒷날 자신이 계획한 일들을 소상히 설명해주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유신은 남산 어귀로 문희를 데려갔다.
사람들 눈에 띄는 적당한 장소를 골라 검불을 긁어모으고 섶을 쌓은 뒤
공주의 행차가 남산에 이르기를 기다려 불을 붙이고 연기를 일으켰다.
상복을 입은 덕만은 산의 중턱에서 잠시 다리를 쉬다가 자욱하게 피어오르는 연기를 보았다.
“저것이 무슨 연기냐?”
공주가 시종과 문무 백관들을 보고 묻자 누군가가 앞에 나서서,
“아마도 김유신이란 자가 그의 누이를 기어코 불에 태워 죽이려나 봅니다.”
하고 대답했다.
덕만이 입 속으로 김유신, 김유신 하고 두어 번 이름을 되뇌다가,
“김유신이라면 하주 군주 서현(舒玄) 공의 자제가 아니냐?”
하고 물어 그렇다는 답을 듣고 나자,
“이상한 일이구나.
내가 듣기로 김유신은 나이 18세에 국선(國仙)이 되어 이름을 크게 떨친 자요
그 조부 때부터 가야인과 신라인에게 두루 신망이 두텁기로 소문난 집안의 자손인데,
어찌 누이를 불에 태워 죽일 만치 성정이 포악하단 말인가?”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이때 다시 누군가가 나서서,
“그 누이가 시집도 안 간 처자의 몸으로 임신을 한 바람에
김유신이 집안의 법도에 따라 화형을 시킨다고 합니다.”
하고 귀띔하였다.
꽃다운 젊은 시절부터 불법에 심취하여 오십줄을 넘기도록 산중에서 홀로 지내온 공주였다.
비록 스스로 원하여 선택한 길이나 장안사를 내려와 조금씩 자라나는 머리에 백발이 섞이고,
언제부턴가는 달거리도 들쭉날쭉하여 여자로서 한가닥 허무한 감회가 없지 아니하였는데,
새파란 처자가 임신하여 그 때문에 죽임을 당한다고 하니 딱하고 가련한 마음이 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것은 대뜸 상대한 남자에 대한 미움으로 바뀌었다.
더군다나 유신의 누이라면 덕만에게는 고모할머니뻘인 만명의 딸이라 생판 남도 아니었다.
“처자가 임신한 것이 상도를 벗어난 일이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어찌 죽이기까지 한단 말인가?
하물며 짐승도 새끼를 배면 죽이지 않는 것이 계림의 풍속이 아닌가?
또한 여자가 임신을 했다면 반드시 상대가 있을 터인데,
그 작자는 도대체 어떤 자인데 정인이 저 지경이 되도록 어디서 무엇을 하고 있더란 말인가!”
공주는 돌연 화를 불같이 냈다.
“혼례도 치르지 않고 임신을 시킨 것이 누구의 소행인지 당장 알아보라!”
시종이 황급히 연기 나는 곳으로 달려가려 할 때였다.
어머니 천명 공주와 함께 덕만의 곁에 시립하고 있던 춘추가 몸을 어기적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자연히 모든 이의 시선이 춘추에게 쏠렸다.
그는 아픈 사람처럼 몸을 비비적거리며 한동안 눈 둘 곳을 몰라했다.
그것은 누구도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덕만도 처음에는 춘추가 왜 갑자기 그러는지 몰라 어리둥절했다가
가만히 기색을 살피고는 문득 낌새가 수상하여,
“혹시 너의 소행이더냐?”
하며 다그쳤더니 춘추가 기어드는 목소리로,
“네.”
하고 짧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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