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15
아들과 나란히 서 있던 천명 공주는 너무도 뜻밖인 나머지 혈색마저 창백해졌고,
시립한 백관들도 동시에 놀란 표정을 지으며 입을 다물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춘추가 당주(唐主) 이세민과 호형호제하는 사이라는 소문이 돌면서부터
내심 그를 사윗감으로 점찍어둔 대신들이 한둘이 아니었다.
그런 판에 그가 신붓감으로 고른 규수가 하필이면 세상이 다 아는 가야 출신 지방 군주의 딸이라니
과년한 딸을 둔 중앙의 문벌 높은 대신들은 하나같이 다들 기가 차고 억장이 무너졌다.
믿어지지 않기로는 덕만도 마찬가지였다.
자식이 없던 덕만에게 아우의 아들인 춘추는 유일한 혈육이었다.
소문에는 선화가 백제로 시집가서 낳은 자식들이 많다지만 나라가 다르니 상종할 바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오로지 천명의 독생자인 춘추가 있을 뿐이었다.
하니 인정으로 논하자면 무지렁이에 어정잡이라도 귀하고 사랑스러울 판인데,
당나라 일을 묻느라 조석으로 상면하여 보니
장성한 조카의 학문과 식견이 예사롭지 아니하므로 더욱 어여쁜 마음이 일었다.
그리하여 날이 갈수록 친자식과 다름없는 정과 사랑을 쏟아온 터였다.
그라고 춘추가 번듯한 명가의 규수와 혼인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을 리 없고,
그래야 춘추의 장래가 순탄하리라는 것도 모를 턱이 없었다.
그러나 덕만은 자신의 욕심보다 사람의 도리를 먼저 헤아릴 줄 아는 사람이었다.
장안사 비구니들에게 설법을 할 때도 불법을 받들려면
우선 심신을 청정하게 닦으라고 강조해온 그였다.
코앞의 이익보다는 근본을 헤아리고 도리를 좇는 것이 먼저요,
정사를 펼 때도 몇 수 앞을 내다보고 심모원려(深謀遠慮)를 구상할 줄 아는 안목이 있었다.
“춘추는 들으라.”
덕만이 돌연 목소리를 높였다.
“나는 네가 태산이라도 집어삼킬 만큼 그릇이 큰 줄 알았더니 이번에 하는 짓을 보니
영락없는 졸장부구나. 초야에 묻혀 사는 이름 없는 범부도 제 처자식이 귀한 줄은 아는 법이거늘
입만 열면 당주와 교우를 자랑하는 네가 어찌 이리도 비겁하더란 말이냐?
사랑하는 여인이 위급함에 빠졌을 땐 목숨이라도 내걸고 구하는 것이 부랄 찬 사내의
당연한 도리가 아니냐?”
덕만은 춘추에게 처음으로 낯까지 붉혀가며 호되게 꾸짖었다.
산자락 아래에서는 여전히 검불 태우는 연기가 자욱히 피어오르고 있었다.
“지금은 사태가 급박하니 여러 말을 할 겨를이 없다.
너는 당장 달려가서 정인의 목숨부터 구하라.
만일 김유신이 집안의 법도를 내세워 말을 듣지 않거든 왕명으로 이를 중지하게 하라.
길일을 택해 혼례를 올리는 것은 그 다음의 일이요,
이는 내가 너의 부모와 충분히 상의하여 결정할 것이다.”
줄곧 고개를 들지 못하던 춘추는 덕만의 추상같은 명령을 받자 황급히 연기 나는 곳으로 달려갔다.
춘추가 가고 나자 덕만은 창백한 얼굴의 천명에게 다가가서 온화한 표정과 따뜻한 말투로 위로하였다.
“아우는 과히 염려하지 마시게. 김유신의 누이면 빈틈없는 명가의 규수요
믿을 만한 충신의 여식이 아닌가?
춘추가 사람 보는 안목이 있으니 제 배필이야 오죽 알아서 구하였으리.”
무자년(628년) 늦봄이면 둘째 공주 천명에게는 아직 모상복중(母喪服中)이었지만
산 사람의 일이 워낙 다급하니 국상만 끝내고 서둘러 며느리를 보았고,
그렇게 부랴부랴 본 며느리가 부랴부랴 아이를 낳은 것은 혼사가 끝나고 고작 서너 달 뒤였다.
일생의 지기인 서현의 딸로 며느리를 삼는다는 소리에 무턱대고 좋아한 용춘과는 달리
천명은 춘추에게 기대하던 바가 커서인지 시초만 해도 섭섭하고 애운한 감정이 없지 않았는데,
그 뒤 새로 들인 며느리와 한집에 살면서 요것조것 물어도 보고 또 그 마음 씀씀이며
처신하고 행동하는 바를 찬찬히 살펴보니 아무나 보고 생글생글 잘 웃는 것과 웃을 때
볼우물 생기는 것만 빼곤 크게 흠잡을 데가 없어 차차 시초의 감정이 누그러졌다.
문희가 손끝도 여간 맵지 않고 본성도 상냥하지만 시부모 앞에서도 크게 어려워하는 법이 없어
아침에 입궐하는 시아버지를 보고도,
“아버님 쓰신 복두가 비뚤어졌네요.”
하고 하인들이 다 보는 데서 시아버지 머리를 만져 복두를 바로잡아주기도 예사요,
“이제 차츰 날이 무더워지기 시작하니 관복 안에 이 옷을 입으세요.”
하고는 제가 직접 삼을 만져 지은 속옷을 갖다 바치기도 하니
용춘은 며느리만 보면 속없는 사람처럼 허허거리며,
“하여간 우리 집에 희한한 며느리가 들어왔어. 선녀가 현신을 해도 저보다 어여쁠까.”
하고 탄복을 금치 못하였다.
천명은 한동안 그런 며느리의 태도가 경박하다고 흉을 보면서,
“촌에서 본데없이 커서 저 모양이지.
만명 할머니가 예절은 모르지 않을 사람인데 딸자식 훈육을 어찌 저리 시켰을꼬.”
뒷전에서 눈을 흘길 때가 많았다.
'소설방 > 삼한지'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20장 인물 17 (0) | 2014.09.26 |
---|---|
제20장 인물 16 (0) | 2014.09.26 |
제20장 인물 14 (0) | 2014.09.26 |
제20장 인물 13 (0) | 2014.09.26 |
제20장 인물 12 (0) | 2014.09.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