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0장 인물 12

오늘의 쉼터 2014. 9. 22. 23:31

제20장 인물 12

 

 

 

 

한편 그 무렵 춘추에게는 고민거리 한 가지가 생겼다.

유신의 막냇누이 문희가 임신을 하여 배가 차츰 눈에 띄게 불러오고 있었으니

 

처지가 바이 난감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의 집에서 문희를 처음 본 순간 이미 넋을 빼앗겼던 춘추가 자신의 옆에 앉아

 

땀내 나는 저고리를 다소곳이 꿰매는 자태에 반하여 옷을 받는 척하며 은근히 손을 쥐었는데,

 

화들짝 놀란 문희가 급히 유신을 훔쳐보고는 시선을 피하며 오히려 생긋 웃음을 머금었던 것이다.

그렇게 시작된 두 사람의 사이가 순조롭게 뒷날로 이어져 문희는 보희가 하주(下州:창녕)로

 

돌아갈 적에도 여러 가지 핑계를 대며 같이 가지 아니하고 혼자 금성에 남아 거의 매일 춘추를 만났다.

 

그러다 어느 달 밝은 밤,

 

남산 기슭에 산보를 나갔다가 야밤 정취를 빌려 서로 장래를 약속하고 몸을 허락하는 사이로

 

발전하였는데, 그 뒤로도 어찌나 철저히 주변 시선을 따돌렸는지 상세한 내막을 아는 사람은

 

당자들 외엔 아무도 없었다.

어쨌거나 춘추는 문희와 몰래 통정한 사실이 알려져 망신을 당하는 것은 둘째요,

 

우선은 축일상종하며 부쩍 가까이 지내게 된 유신에게 면목이 서지 않아

 

그것이 제일 큰 걱정거리였다.

 

기왕지사 일이 그처럼 됐으니 전후 사정을 낱낱이 털어놓고 혼례라도 서두른다면

 

그나마 반면목은 세울지 모르지만 실은 그렇게 하기에도 께름칙한 남모를 사연이 춘추에게 있었다.

춘추는 당나라 장안에 이미 처자식이 있던 몸이었다.

 

처는 구칠(仇柒)과 중국 여자 사이에서 난 둘째딸로 춘추보다 세 살 위였는데,

 

장안에 건너간 이듬해 살림을 차리고 이어 딸 둘을 낳았다.

 

당시 춘추는 향수병과 외로움이 극심했을 때였다.

 

구칠의 차녀인 계화(鷄華)는 그런 춘추를 어머니나 누나처럼 이해하며 잘 다독거려주곤 했다.

 

하지만 몸이 허약하던 계화는 딸 고타소(古?炤)와 지소(智炤)를 연년생으로 낳은 뒤부터

 

병석에 누워 지내는 날이 많았다.

 

더군다나 춘추가 당조의 중신들과 어울리느라 색주가를 드나들자

 

스스로 시기와 질투에 못 이겨 입에 거품을 물고 혼절하는 일이 잦았다.

 

계화가 비록 마음은 착하지만 투기가 지나치자 보다못한 구칠조차 춘추를 보고 차탄하기를,

“내 딸년은 자네를 내조할 양첫감이 아닐세.

 

제딴에는 자네가 귀국하면 따라 나설 모양이지만 몸까지 비영비영하는 골비단지를 데려가

 

어디에 쓰겠나? 자네도 고생이지만 저 또한 고생일세.

 

그러니 귀국할 적엔 혼자 가시게. 계림이 자네나 나한테야 몽매에도 잊지 못할 본향이지만

 

저한테는 만판 객지 아닌가? 하물며 자네 부친과 나는 막역지간일세.

 

공연히 온전치 못한 딸년 때문에 귀중한 우정을 깨뜨리고 싶지 않네.”

하고는 음성을 더욱 낮춰,

“본국에 가시거든 문벌 좋고 마음씨 고운 건강한 처자를 골라 따로 배필을 정하시게.”

하는 권유까지 했을 정도였다.

 

그러나 춘추에게 계화는 평생을 두고 잊지 못할 첫 여자였다.

 

비록 처음 만났을 때의 애틋한 마음과 살뜰한 정분은 투기 때문에 많이 없어졌지만

 

한편 생각하면 부부란 게 으레 그러려니 싶었고, 몇 해를 자식까지 낳고 살다 보니

 

속정도 들어 쉽게 갈라설 수 없었다.

춘추가 중국을 떠날 때 계화와는 조만간 다시 만날 약조를 단단히 하고 헤어졌는데,

 

실제로 본국의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장안으로 돌아가 계화와 다시 살 마음도 없지 않았다.

 

하지만 춘추의 이런 마음은 문희를 만난 뒤로 완전히 바뀌었다.

 

계화와는 비교조차 할 수 없이 발랄하고 아름다운 문희를 만나 상상하지도 못한 뜨겁고

 

강렬한 사랑에 빠지자 갑자기 별천지에나 온 듯 만물이 황홀하고 그러다 문득 생각하면

 

계화와 보낸 지난 일들이 지옥처럼 끔찍하게만 느껴지는 거였다.

 

문희를 몰랐다면 모르되 안 이상에는 계화와 다시 살 수 없었다.

 

아니 어떤 이유로든 문희와 헤어진다면 세상을 더 살아 무엇하랴 싶을 정도였다.

춘추는 얼마간 혼자 고민에 빠졌다가 급기야 모든 일을 솔직히 털어놓기로 마음을 다잡고

 

유신을 찾아갔다.

 

초저녁부터 술상을 마주한 채 춘추로부터 장안의 처자식 얘기며 문희가 임신해 배가 불러 있다는

 

소리를 모두 들은 유신은 한동안 입술을 꽉 다문 채 춘추의 얼굴만을 뚫어지게 바라보았다.

“형님께서 이 용렬한 아우를 매제로 삼아주신다면 내일 당장 부모님께 말씀을 드리고

 

문희 낭자와 날을 잡아 혼례를 올리고 싶습니다.”

춘추의 말이 끝나자 유신이 비로소 말문을 열었다.

“아우님은 내 누이를 과연 일생의 배필로 여기시오?”

“물론입니다.”

“문희는 아직 나이 어려 보고 배운 것이 없는 데다 남의 아내가 되기에 여러 모로 부족한 아이외다.

 

거기 비하면 아우님은 임금의 외손이자 국서(國壻)의 독자로 얼마든지

 

양처의 규수를 고를 수 있는 처지요.

 

배필을 구하기로 들면 문벌 높은 명문거족의 딸들이 대문 앞에 줄을 설 텐데,

 

그래도 내 누이 같은 것을 정실로 들이시겠소?”

“형님께선 저를 너무 속되게 보지 마십시오.

 

이 김춘추가 비록 어리석긴 하지만 제 짝을 알아볼 눈은 있습니다.”

춘추의 부러진 답에 유신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무래도 석연찮은 듯 다시 물었다.

“아우님 마음은 알겠소.

 

그러나 내 누이는 굳이 따지면 가야 사람이오.

 

출신을 따지고 혈족을 중시하는 계림 왕가에서 임금의 외손이 미천한 가야 혈통의 여자를

 

정실로 맞이하겠다면 과연 이를 허락할지 의문이외다.

 

설혹 왕실의 반대를 무릅쓰고 혼례를 올린다 해도 살아가면서 당할 고충과 불이익

 

또한 만만히 볼 것은 아니오.

 

그러다 보면 두 사람의 정분에도 금이 가기 쉬울 테고……

 

나는 귀한 내 누이가 혹시라도 아우님의 창창한 앞날에 짐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소.

 

굳이 정실이 아니라도 좋으니 훗날을 기약하였다가 첩실로 데려가는 것은 어떻겠소?”

그러자 춘추는 잠깐 깊은 생각에 잠겼다가 자세를 고쳐 앉으며 대답했다.

“왕실의 반대는 있을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 반대라는 것이 결국에는 나라 꼴을 이처럼 만든 중대한 이유 가운데 하나가 아닙니까?

 

형님께 삼한일통(三韓一統)의 숭고한 뜻을 배우고 술상 맞은편에 앉아 감히 천년대업을 논하던

 

춘추가 마음을 뺏긴 정인을 그런 이유로 배척한다면 이는 천하에 떳떳하지 못한 길을 걷는 것입니다.

 

오히려 저는 문희 낭자가 가야 혈통인 것이 다행스럽고 형님의 누이동생이라는 사실이 자랑스럽습니다.

 

이 또한 운명이 아닐는지요? 첩실은 당치 않습니다. 반대가 심하면 하주 어르신들처럼 외관이나

 

당나라로 도망을 가 살더라도 반드시 저의 뜻을 관철시킬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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