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13
춘추는 용춘으로부터 들은 유신의 부모 이야기에 자신과 문희의 경우를 빗대어 말했는데
그 어투가 칼로 자르듯이 확고했다.
미상불 남녀간의 처지만 뒤바뀌었을 뿐 사정은 그때와 너무도 흡사했다.
춘추의 굳은 마음을 확인한 유신이 혼삿말이 나오고 처음으로 빙그레 웃음을 지었다.
“일이 이처럼 되고 보니 나도 고백할 일이 한 가지 있소.
전에 아우님이 명활성 축국장으로 나를 찾아와 우리 두 사람이 눌최의 장지에서 나눈 말을
비밀로 해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소?
그때 내가 입으로 대답은 안했지만 일부러 아우님의 옷 끈을 밟아 떨어뜨리고 내 집으로 끌고 와서
누이를 소개시켜준 것이 실은 나의 대답이었소.
그럼 아우님이 더 이상 그런 일로 이몸을 의심하지는 않을 테니까.”
유신은 잠시 말허리를 끊고 허허 하고 웃었다.
“그런데 과연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일이오.
그때 내 마음으론 문희는 나이 아직 어리고,
보희를 데려다가 곁방의 첩실이라도 삼아주기를 은근히 바랐는데,
문희가 복이 있어 아우님 눈에 들었구려.
첩실감도 되지 못한 아이를 정실로 들이겠다니
이 몸으로선 그저 과분하고 고마울 따름이외다.”
하나를 부탁하자 열을 내어준 셈이었다.
기껏 일신의 안위나 걱정하여 입조심을 당부하러 찾아간 사람에게
유신의 대답은 선뜻 자신의 누이를 소개시켜준 거였다.
그런 유신의 앞에서 춘추는 자신의 걱정이 얼마나 하찮고 부질없는 것이었나를 깨닫고
새삼 심한 부끄러움을 느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누이들이 아닙니까.
어리석고 아둔한 춘추를 그렇게까지 생각해주시니 실로 몸둘 바를 모르겠습니다.”
춘추는 유신의 대범한 도량과 남자다운 처신에 다시 한 번 탄복했다.
더욱이 외톨이로 자라 형제간의 우애를 잘 알지 못하던 춘추였다.
그는 유신에게서 친형같이 따뜻하고 깊은 정을 느끼자 크게 감동하여 눈물까지 글썽였다.
그 모습을 잠자코 바라보던 유신이 갑자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런데 아우님께 긴한 청이 한 가지 있소이다.”
“무엇인지요?”
“우리가 이번 일로 덕만 공주의 인품과 자질을 한번 알아보는 것이 어떻겠소?”
춘추가 유신의 말뜻을 얼른 알아차리지 못하자 유신이 사뭇 목소리를 낮춰 설명했다.
“계림의 사직을 이어가는 데 남녀의 구분은 크게 중요하지 않다는 게 나의 지론이오.
후대의 보위를 이을 사람이 얼마나 대범한 포용력으로 세간의 피폐해진 민심을
하나로 아우를 수 있느냐에 7백 년 사직의 존망이 달렸소.
그런데 아우님도 나도 덕만 공주가 과연 사직을 이을 임금의 재목으로 어떤지를 모르지 않소?
마침 공주께선 아우님을 친자식처럼 귀하게 여기니 이번 일은 그분이 가야와 신라로 나뉜 민심을
하나로 아우르고 계림의 사직을 탄탄하게 이어갈 적임자로 합당한지 아닌지를
시험해볼 좋은 기회가 될 수 있을 듯하오.”
평소에 춘추를 통하여 덕만 공주를 옹립하려는 용춘의 의도를 대략 알고 있던 유신이었다.
“만일 아우님이 가야 혈통의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는 데 반대를 하고 나선다면
그 어른 역시 후대를 맡을 임금의 재목은 아닌 게요.
그러나 찬성을 한다면 흐트러진 국기를 능히 바로잡을 인물이니 앞날의 희망이 있는 것이외다.
마땅히 우리도 덕만 공주를 옹립하는 데 미력이나마 보태야겠지요.
아우님 뜻은 어떻소?
나는 그 결과를 지켜본 뒤에 공주를 섬길지 말지 결정할 작정이오.”
춘추는 유신의 제안에 흔쾌히 찬성했다.
“좋은 생각이십니다.
하면 내일이라도 당장 덕만 공주를 찾아뵙고 문희 낭자가 임신한 사실을 알리겠습니다.”
그러자 유신은 잠시 궁리에 잠겼다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럼 재미가 덜하니 이 일은 당분간 비밀에 부칩시다.
대신 아우님은 꾀를 써서 조만간 공주를 모시고 궐 밖으로 나오시오.
그 다음 일은 모두 내가 알아서 하리다.”
하지만 춘추가 꾀를 쓰고 말고 할 것도 없이 그로부터 며칠 뒤 왕녀 덕만은
임금을 대신해 만조의 백관들을 거느리고 남산으로 행차할 일이 생겼다.
타계한 마야 왕비의 능에서 마지막 제사를 받드는 오칠일(五七日) 행사가 도래한 것이었다.
이 소식은 행차 하루 전에 춘추의 집 말 많은 하인을 통해 유신에게 전해졌다.
유신은 급히 소천을 불렀다.
“지금부터 너는 바깥에 나가서 김유신의 누이동생이 시집도 가지 않은 처녀의 몸으로
임신을 했기 때문에 문중 법도에 따라 화형으로 다스릴 것이니
구경하고 싶은 사람들은 내일 모두 남산으로 오라고 소문을 내고 다녀라.”
유신의 말에 소천은 무척 놀랐으나 이내 깊은 뜻이 있는 줄 알아차리고,
“분부대로 하겠습니다.”
하고 밖으로 나갔다.
소천이 나가자 유신은 가만히 문희의 거처를 찾았다.
“춘추 도령한테서 얘기를 다 들었다.”
임신한 사실을 몰래 숨겨왔던 문희는 너무나 부끄러워 차마 얼굴을 들지 못했다.
열세 살이나 위인 큰오빠 유신은 문희에게는 부모나 다름없이 어렵고 엄한 사람이었다.
“그래 불편한 데는 없니?”
호통을 칠 줄 알았던 큰오빠가 뜻밖에도 따뜻한 말로 묻자
그동안 혼자서만 속을 앓아온 어린 누이로선 왈칵 눈물마저 솟구쳤다.
“네……”
평소 활달하기로 소문난 문희가 이때만은 기어드는 음성으로 간신히 대답했다.
“김춘추가 좀처럼 보기 힘든 천하의 기재요,
옛날부터 우리 집안과 가까이 지내온 사이라고는 하나 네가 부모한테도 알리지 않고
임신부터 한 것은 정숙해야 할 처자로서 큰 허물이다.”
“……네, 오라버니.”
유신은 잠시 말허리를 끊고 침묵했다가 더욱 따뜻한 어조로 아우를 불렀다.
“문희야.”
“네.”
“너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잘 들어보아라.”
분위기가 심상치 않음을 알아차린 문희가 소매로 눈물을 닦고 자세를 고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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