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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애(禁止愛) (11)

오늘의 쉼터 2014. 9. 25. 16:49

금지애(禁止愛) (11) 

 

   
  
 
[ 나… 아무래도 잘못한 것 같아. ]
 
 귀에 대고 있는 핸드폰에서 한숨같은 소리가 번져 나왔다. 
 저녁 느지막히 퇴근하던 참이던 현우는 
 갑자기 울린 폰에서 들린 첫마디에 조금 당혹하면서 되물었다.
 
 " 무슨 일 있어요? 오늘 마감 날이라구 했잖아. 뭐 실수했어? "
 [ ……그런 것 같아. ]
 " 어이구, 매사에 철저하신 황은영씨가 웬일이랍니까. 
  무슨 일이야? 회사 잘릴 만한 일이셔? "
 [ 너, 오늘 야근 안 하지. 저녁 먹었니? ]
 
 조금 장난스런 뉘앙스를 담은 질문에, 상대는 딴소리를 했다.
 
 " 막 나가려던 참. "
 [ 빨랑 나와. ]
 " 엥……? "
 
 어리벙벙하게 대꾸하니, 조금 쑥스러움을 감춘 듯 딱딱한 음성이 들어왔다.
 
 [ 나 지금 그대 회사 앞이야. ]
 " 요즘 국X은행서 일하는 거 알고 하는 소리에요? 
  설마 용산 온 건 아니지? "
 [ 날 바본 줄 알어? 기껏 힘들게 여의도까지 왔으니 얼렁 나와. 
  나, 더워서 파스타 가게 안에 들어 와 있어. 
  어딘진 알지? 저번에 거기. 내가 살게 빨랑. ]
 " 허 참, 알았습니다. "
 
 현우는 은근히 치밀어 오르는 감동(?)을 감추면서 퉁 하게 대꾸하곤 
 전화를 끊었다. 
 
 입구로 이미 움직이던 참이던 이사가 대화를 들었는지 
 툭 던지는 말투로 물어온다.
 
 " 서현우 선생, 애인? "
 " 하, 애인요? "
 
 낯간지러운 느낌이 들어 반문했더니, 
 상대는 시침떼지 말란 듯 히죽이 웃는다.
 
 " 서선생 만한 인물에 상대가 없단 것도 우습지 않아? 
  그래도 우리 뱅킹 본부 얼굴인데. "
 " 힉, 서현우 선생이 우리 본부 얼굴? 이사님, 벌써 노안이십니까? "
 
 퇴근 준비중이던 뱅킹 본부 동료들의 야유는 거들떠보지도 않고 
 이사가 재차 물었다.
 
 " 짝, 있는 거지, 서선생? "
 " 대쉬한 여자한테 보기 좋게 걷어차여서 아직 멍도 안 가셨습니다. "
 " 뭐? "
 
 
 
 현우는 다른 사람들이 먼저 나가는 걸 보고 나서 
 작업이 다 저장된 노트북 시스템을 종료하고 뚜껑을 닫았다. 
 옷걸이에 걸려 있던 재킷을 집어 입을까 하다가 귀찮아서 그냥 팔에 걸친다.
 
 제길, 이 놈의 회사는 삼복더위조차 긴 팔 와이셔츠만을 고집한다. 
 원칙을 세운 높은 사람들이야 빵빵하게 튼 카 에어컨을 향유할 수 있겠지만
 매일 대중교통의 러시 아워에 휩쓸리는 우리 같은 평사원들이 
 실제보다 2도 이상 높은 체감온도 속에 말라 죽어간단 사실, 
 그들은 모를 테지.
 
 ' 생각해 보니, 마지막 말은 거짓이었는지도. '
 
 멍은… 이제 확실히 가신 것 같다. 
 하긴 애당초 시작되지도 않은 관계였으니까.
 
 처음 봤을 때부터 반했었지만, 
 지금 생각해 보면 그 감정은 일방적인 만큼이나 설익어 있었던 것 같다. 
 
 확실히, 성급했었다. 
 상대에게뿐만이 아니라 자신에게 있어서도.
 
 그렇다면, 지금은…? 
 요즘 드는 생각은……??
 
 
 
 " 서현우 선생님, 여기! "
 " 장난치지 마시죠. "
 
 현우는 나직이 한숨쉬었다. 
 
 회계사들이 서로를 선생이라 부르고 있단 사실에 대해 들은 이후로 
 은영은 자신을 보기만 하면 선생이라 부른다. 
 하긴 자신도 처음 회계법인에 입사했을 때, 
 선배고 후배고 서로서로  선생>이란 호칭을 쓰는 게 너무 어색해서 
 한동안 어리둥절했었더랬다. 
 
 테이블에 이미 앉아 있던 은영은 마감을 지나 초췌한 얼굴, 
 몇년이 지나도 그대로일 듯 뵈는, 마치 소년처럼 깡마른 체구완 
 전혀 걸맞지 않게 큰 목소리를 냈다.
 
 " 숫자에 눌어붙은 얼굴이네. "
 " 그러는 누님은 활자에 눌어붙은 얼굴이겠죠. 
  근데 기껏 사준다는 게 파스타야? "
 
 " 너 갑부냐? 아니면 내가 갑부니? 
  정말, 지난번에 네가 술에 쩔어 의식불명상태일 때 
  내가 술값 다 낸 거 잊었어? 
  이것이 정말, 선배를 벳겨 먹지 못해서 안달이네. 돈도 잘 버는 것이. "
 
 말은 시큰둥하게 했지만, 이 파스타 집은 사실 현우의 단골 같은 곳이다.
 점심시간의 경우엔 조금만 늦게 와도 밖에서 한참을 기다려야 할 정도로 
 인기가 많다.
 
 " 무슨 일 있었어요? "
 
 크림소스와 토마토소스로 하나씩 주문시킨 뒤, 
 현우가 기다렸단 듯 질문해 왔다. 
 실은 저 여자 안색이 노란 것이 아까 전화가 아니라도 
 나 고민 있네, 라고 씌어진 모습이다.
 
 " 응? "
 " 아까 그 말은 뭔데? 잘못한 일 있다면서요. "
 " 어? 어… "
 
 " 회사 일? "
 " 어, 그건 아니고……. "
 
 은영은 탁자에 놓여 있던 컵을 집어 물을 마셨다. 
 
 " ……? "
 " 나 말야, 말을 막하는 편이지? "
 " 무슨 뜬금 없는 소리. 
  그야 누나가 하고 싶은 말 시원하게 다 하는 사람인 건 사실이지만. "
 " 역시 그렇지… "
 
 은영이 축 어깨를 늘어뜨린다. 
 학생 때도 그렇고 졸업한 지금도 그렇고, 
 언제나 지나치리만큼 활기찬 여자가 저런 모양을 하고 있으니 
 눈에 뭔가 낀 것 같다. 
 대체 왜 저러는 거야?
 
 " 누구한테 무슨 말을 하고 그러는 건데요? "
 " 후…… "
 
 다시 한번 묻자, 선배는 길게 뜸을 들이고 나서야 설명을 시작했다.
 
 " 음, 그러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잘되기 힘들 그런 두사람이 있는데ㅡ 
  나도 최근서야 여자 쪽 얘기로 둘의 관계를 알게 됐거든… "
 " 예. "
 " 여자가 결국 떠났어. 그런데, 오늘 남자 쪽이 날 찾아와서 묻는 거야. 
  멜을 받았다면서, 아마 몰랐던 거 같아. 
  나한테 지금 어딨냐고 묻길래, 좀 다그치듯이 말해 버렸어… "
 
 은영은, 동하의 당혹감에 젖은 얼굴을 떠올리고 있었다.
 브이넥 티 위로 뻗어 있는 갸름한 라인… 
 뭔가에 쫓기고 있던 것처럼, 아니 쫓고 있는 것처럼 
 다급한 기색으로 어두워진 얼굴을. 
 그것은 건조한 카키, 입은 웃옷의 색과 묘하게 흡사해서…
 
 - 저, 만나야 해요. 어딘지 알려 주세요. 
 - 시연이, 미국 갔어. 
  돌아오더라도 시연이가 먼저 연락하기 전에 내가 먼저 알려 주는 건 
  옳지 않다고 생각하고. 
 - ……그게 무슨 말씀이시죠? 
 - 내 말 기분 나쁘게 듣지 말았으면 해. 
  시연이 계속 힘들었던 거, 
  내가 굳이 말 안 해도 동하가 먼저 알거라 생각하는데. 
  이제까지로 충분하지 않니? 
  더 이상 시연이 괴로운 거, 그건 동하도 싫지 않겠어? 
  겨우 마음 다잡고 쉬러 간 애, 이제 건들지 말았으면 좋겠다.
 - ……. 
 
 회사 근처의 커피숍에 앉아 자신의 얘기를 그저 듣고 있던 소년의 모습. 
 아니, 이제 소년이란 말이 어색할 어른스러움을 갖춘 얼굴이 
 자신의 한마디 한마디로 인해 점점 어둡게 흐려져 가는 걸 보면서, 
 그 모습이 안스럽다 느끼면서도 조금 화를 내듯 다 말해 버렸었다.
 
 - 나 정확히는 모르지만, 대충 얘기 들었어. 이해 못하는 건 아냐. 
  하지만 시연이가 나한테 그 얘길 했을 때는 
  이미 전부 정리하려고 생각한 후라구. 자신이 그렇게 결정한 거야. 
  동하한테 말을 하지 않고 떠났다고 해서 섭섭하게 생각지 말아 줘. 
  나도 잘한 결정이라고 생각해. 시연이 결정이 옳은 거라구.
  정리하지 않으면 계속 힘든 건 시연이 쪽이란 거 모르겠니?
 - …….
 
 동하는 입을 꼭 다문 채, 잠자코 말을 듣고 있었다.
 
 - 시연이 지금 사는 곳도 세를 놓을 거라고 했어. 좁은 집으로 옮기겠다구. 
  원래 아버지 집이니 네가 자라면 그 집을 네 명의로 바꿔 주고 싶단 
  소리까지 하더라. 걔, 그렇게 남 생각하는 애야. 
  아마 너한테 제대로 말못하고 나중서야 메일 보낸 것도 
  그런 이유라 생각해. 
  그러니 너도 공부 열심히 하고, 미련 따윈 버려주는 게 
  시연이를 위한 거야. 알겠니?
 
 마지막 말은 왠지 설교조가 돼 버렸다. 
 상당히 거침없이 말했건만, 
 동하는 화가 났다거나 불쾌한 듯한 기색 같지는 않았다. 
 대신, 망치에 쾅 얻어맞은 듯 머리부터 발끝까지 경직된 모양으로 
 그저 자신에게 인사를 한 채, 커피숍을 나갔었던 것이다ㅡ
 
 " 그럴 수도 있지, 뭘 그렇게 죄책감 느끼는 거야. 
  누나, 그렇게 마음 약한 사람이었어요? "
 
 현우가 달래듯 말했지만 은영은 고개를 흔들었다. 
 
 그 때는 시연을 옹호하는 말이라고 판단했었어. 
 한데 시간이 지나고 보니, 괜한 짓을 했단 생각이 자꾸 치밀어 올라와. 
 
 비틀거리며 나가던 동하의 뒷모습이 자꾸만 떠오르는 거다.
 
 " 모르겠어, 왠지 불안해… 자꾸 실수한 것 같아… 
  그렇게 매몰차게 말할 건 없는 거였는데… "
 " 그렇게 남의 일만 신경 쓰니 연애도 못하죠.
  저번에 소개팅했다던 남자랑은 계속 만나고 있는 거야? 
  잘 나가고 있는 것 같더니. 
  오늘 나한테가 아니라 그 사람한테 고민 털어놨어야 하는 거 아닌가? "
 " 그래, 내가 차였다. 
  이 나이가 되서 감정 몰입이 그렇게 쉽게 되는 지 알어? 
  어영부영하다가 폼도 못 잡고 끝났다, 왜. 
  계속 잘되면 자랑하려고 했는데 생각대로 안 되더라. 
  그런 넌 제대로 해 봤냐, 연애? 사돈 남말하고 있지, 정말. " 
 
 은영이 현우를 한껏 째려봤다. 
 현우가 웃었다.
 
 " 아아ㅡ 뭐, 차인지 얼마 되지 않은 사람이 이런 말하는 것도 웃기지만. "
 " 알긴 아는구나. "
 " 누나랑 나랑 사귀면 어떨까? "
 " 뭐…? "
 
 은영은 이번엔 자신이 얻어맞고 쌍꺼풀 없이 커다란 눈을 동그랗게 만들었다.
 
 저 자식이 지금 사람 놀리나? 
 아니면, 아직도 실연의 상처에서 못 벗어나서 헷소리 하냐? 
 낮술도 안한 것 같은데 왜 이러니? 
 
 근데 갑자기 저 놈이 왜 이리 잘생겨 뵈는 걸까…? 
 내 심미안에 드디어 금이 간 걸까?
 
 " 너 청순한 타입 좋아하잖아. 사람 놀림 못 쓴다. "
 " 음. 확실히 그런 타입을 좋아하는 줄 알았는데… "
 " ……? "
 " 그런 타입은 나 쳐다 안 보잖아. 
  그리고 결정적인 건, 내가 변했다는 거죠. "
 " 무슨…… "
 " 가만히 생각해 보니 나, 
  대학 때부터 고민이 있으면 누나한테 전화하고 있었어. 
  왜 하필 누날까…… 그런 것도 관계 형성의 중요 요소가 되잖을까. 
  연애치란 공통점도 있고. "
 " 논문 쓰니? "
 
 은영이 애꿎은 냅킨을 포크로 쿡쿡 찔렀다. 
 이 놈의 파스타는 왜 이리 안 오는 거야? 밀부터 빻고 있나?
 
 " 농담으로 받아치고 싶음 그렇게 해요. "
 " 화…났어…? "
 
 갑자기 현우의 표정이 심각하게 변한다. 
 은영은 당황해서 그 때까지 줄곧 생각하고 있던 동하에 대한 걱정을 
 잠시 잊기로 했다. 
 물론, 마음 귀퉁이엔 줄곧 불안의 씨앗이 남아 있었지만.
 
 문득 쳐다 본 창 밖으로 비가 내리기 시작한 게 보인다. 
 어둑하니 그늘이 드리워진 공기면 위로 투명한 선이 그어지는 광경. 
 창에까지 몸을 내린 물줄기가 기묘한 얼룩을 그리며 번져가는 모습.
 
 비는 시간이 갈수록 굵어지고 또렷해져 가고 있다. 
 마치 더 이상 선 아닌 면, 아니 입체로 보일 만큼 
 두텁게 질량을 과시하는 물방울, 한여름의 비.
 
 아무래도 무슨 일이 있을 것 같은 예감이 든다. 
 그저, 아니길 바랄 뿐.
 왜, 순간 시야에 들어온 뒷모습이 그토록 까맣게 얼룩져 보였던 걸까.
 
 시연아, 아무래도 네가 있어야 할 것 같단 생각이 자꾸 들어.
 지금, 뭐하고 있는 거니…? 응……? 
 

 

한가지만 있으면 된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단 한가지만은 포기할 수 없다고… 그렇게 생각했어.
 그런데 무엇에도 집착하지 않으려 했던 사람의, 난생 처음 집착한 한가지가 
 없어지면 그럼, 그는 어떻게 되는 거지…? 어떻게 되는 건데……?!
 
 어째서 그런 거지? 
 어떻게 그렇게 쉽게 혼자 결론지을 수 있는 거지?
 
 결국 난 당신한테 이 정도의 존재였어? 
 아무리 발버둥쳐도 이것밖엔 안 되는 거야?
 혼자 힘들어하고 혼자 결정해야 할만큼 아무 것도 아니었던 거냐구…!!!
 
 
 
 티셔츠가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걸 느낀다.
 아까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가 진해졌나 보다.
 여름비는 결코 차갑진 않다… 다만 귀찮을 뿐. 이런 밤엔 더더욱.
 
 자꾸만 속력을 내게 된다. 
 눈앞에 가로막는 것도 없으니 속도감이 느껴지지 않아.
 여긴 어디지…? 자신은 어딜 가고 있지?
 
 고속도로란 것만 알 수 있을 뿐. 
 차가 거의 지나다니지 않는 공간.
 
 모르겠다. 
 알 수 없어. 
 알고 싶지 않아. 
 그런 건 전혀 중요하지 않아.
 
 간간이 지나치는 차들이 
 헤드라이트를 비치고 있을 텐데, 클랙션을 울리고 있을 텐데, 
 동공이 그걸 담아내지 못하는 건지, 아니면ㅡ 
 고막이 그걸 받아들이지 못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게 아니라면 전달하는 신경에 문제가 있는 걸까? 
 아니면 뇌가 인식하지 못하는 걸까?
 
 미칠 것 같다. 
 미친 듯이 소리지르고 싶은데, 
 그런 방법… 누구도 가르쳐 주지 않았어. 
 
 세상이 아득하게 느껴지는데, 아무 것도 붙들 것이 없다… 
 구덩이 속으로 무작정 떨어지고 있을 뿐…… 
 질식해서 죽어버릴 것 같아…… 
 
 아무리 희미한 향기라도 좋으니 갖고 싶은데 
 그건 이뤄질 수 없는 바램이란 걸 안다…… 
 자신이 살아있단 사실조차 모르겠어…….
 
 
 
 비로 인해 기온이 내려가서일까, 헬멧 안이 부옇게 흐려져 있는 것 같다. 
 앞이 잘 뵈질 않는다. 
 
 아니, 그게 아냐. 
 헬멧이 흐려진 게 아니다… 
 눈에 문제가 있는 거야.
 
 나는… 울고 있는 거다…….
 바보처럼…… 울고 있는 거다………….
 
 
 - 널 놔둘 수 없어. 어떤 방법으로든 널 챙길 거야.
 
 그렇게 말했잖아.
 
 - 내가 그렇게… 싫어? 같이 지낼 수 없는 거야? 
 
 그렇게 말했잖아, 당신.
 
 - 나에 대해 알려주고두 싶었구… 너무 욕심냈지? 나.
 
 이유를 배제한 감정 따윈 갖고 싶지 않았다… 
 이성을 잃을 만큼 어딘가에 휩쓸리지 않겠다고 결심했었다…
 그런데, 나를 이렇게 조절할 수 없게 만든 건 당신이잖아… 당신이잖아……!
 사랑한다고… 진심이라고 생각한다고 말해 준 것도, 당신이잖아……!
 그 전부가 이제 와서 거짓이었다고 말하는 거야……?!
 
 
 
 하늘이 절규하는 것처럼 수분을 쏟아 붓고 있었다.
 미끄러운 아스팔트 지면 위로 미친 듯이 비가 내렸고, 
 아주 가끔 비쳐지는 헤드라이트가 물기로 질퍽해지는 바닥을 비춰 
 또 다른 빛을 반사시키고 있었다.
 어둠 속에서 거의 검은 색으로 보이는 붉은 바이크는 
 그 빗속에서 목적지를 잃은 듯 계속해서 매순간을 달리고만 있었다.
 
 헬멧을 쓰고 있어 닦을 수도 없지만, 알고 있다… 
 닦으려 해 봤자 어차피 다시 눈물이 흘러나와 
 자신을 절망에 빠뜨릴 거란 사실을. 
 
 시야가 점점 흐려져 간다…….
 
 지금 자신 안에 있는 감정은 뭐지…? 
 분노? 
 배신감?
 
 아니다…… 
 그런 게 아냐…… 
 그것은 두려움이다…… 
 아득함이다…… 
 
 누군가를 잃을 때 자신을 지배하는 제1감정이 두려움이란 사실, 
 이런 식으로 알게 될 줄은 몰랐었다.
 
 왜, 라는 질문은 더 이상 중요치 않다ㅡ
 
 중요한 건, 잃었다는 사실. 
 빛을, 잃었다는 사실.
 
 
 
 
 
 커브 길이었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커브를 막 돈 시점.
 
 그 트럭은 중앙선을 벗어나 돌진해 왔다… 
 바이크의 바로 정면으로.
 
 한순간의 일.
 
 동하의 몸은…… 그 한순간, 힘없이 날아올랐다.
 
 마치,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그 무엇처럼.
 한순간ㅡ 아주, 가볍게.

 

 

 

 Yesterday - Yes a day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Like any day, alone again for every    여느 때처럼 혼자서
 Day seemed the same sad way            언제나처럼 슬프게 느껴지는 매일
 To pass the day                        그 매일을 보내고 있었어
 
 Living my life without him              그 없이 살아가기 위해……
 
 Don't let him go away                  그를 보내지 마
 He's found my shadow                    내 그림자를 찾아 주었는 걸
 
 Don't let                              그를,
 Him go                                  보내지 마…… 
 
제인 버킨/Yesterday - Yes a day·4절

 

 

 

 

 

 

쿵ㅡㅡ!
 
 기체가 갑자기 심하게 흔들렸다.
 좀처럼 잠들지 못하고 있던 시연은, 감았던 눈을 떴다.
 
 [ 승객들에게 안내 말씀 드립니다. 
  지금 기류가 불안정하여 잠시 기체의 흔들림이 있었습니다. 
  자리를 비우신 승객께서는 자리로 돌아와 주시고, 
  자리에 계신 분들은 반드시 안전벨트를 매어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립니다…… ]
 
 어둑하니 불이 꺼진 비행기 안. 
 
 작은 스크린에선 언젠가 들어 본 듯한 외화가 돌아가고 있었다.
 아까까지 스포츠 신문을 보고 있던 옆 사람은 
 방송도 못 들을 만큼 깊이 잠들었는지 잠잠하다.
 비행기 안은 적막하다 싶을 만큼 조용하고 또, 건조했다.
 
 그 조용함과 건조함 속 내내 부풀어오르던 뭔가가 
 방금 그 흔들림으로 인해 증폭된 듯한, 그런 느낌.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긴장이 
 투명한 막처럼 겉과 속을 전부 감싸고 있는 감각.
 
 어째서 이렇게 불안할까…… 
 사소한 흔들림에도 어째서 이렇게 불안한 걸까.
 
 
 
 - 시연씨, 동하… 어떻게 컸지요? 
  아버지랑 닮았나요? 어릴 때부터 닮았다 그랬었는데.
 
 그날 밤, 동하의 어머니는 그렇게 물었었다.
 
 - 많이, 닮았어요.
 
 자신은 그렇게 대답했었다. 
 
 하지만 난, 어느 사이 더 이상 동하에게서 그의 아버지를 보지 않고 있었다. 
 난, 어느 사이 동하 한사람만을 보고 있었어. 
 어느 사이 그의 아버지를 생각하고 동하를 생각하는 게 아니라, 
 동하를 보며 그에 부수적인 형태로 
 동하의 아버지를 보고 있게 돼 버렸던 거다…….
 
 경박한 나. 어리석은 나. 
 경박하고, 어리석지만… 어쩔 수가 없어…….
 
 결국 그 대답과 더불어 깨달은 건, 좀처럼 추억을 지울 수 없는 자신 뿐.
 
 아니, 추억이 아니다… 
 불과 몇 개월간의 그 일들은 결코 추억이 아냐. 
 마치 현재와 같다. 
 마치 지금 눈앞에서 일어나는 일들처럼 살아 움직이며 자신을 사로잡는다. 
 
 ……바로 정면에서 움직이고 있다.
 
 
 
 - 한가지만 부탁해도 될까요? 
 
 그날 밤, 동하의 어머니는 그렇게도 물었었다.
 
 - 동하를 다시 못 볼만큼, 싫어한다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면… 
  동하를 만나게 도와주세요. 
  뻔뻔하다고 생각해도 좋아요. 사실이니까. 
  나 동하 보고 싶어요. 
  한번이라도 좋으니, 그 애한테 욕을 들어도 좋으니 만나고 싶어. 
  나, 조만간에 한국 가게 될 거 같은데… 
  동하랑 만날 수 있게 해 줄 수 있어요? 
  부탁해요…….
 
 마구… 흔들려 버렸다. 
 점토가 채 마르기도 전에, 다시금 결심에 금이 가기 시작했다.
 
 
 
 - 내 이름은, 엄마 아버지 두분이서 같이 지은 거래요. 
  ……겨울 동(冬)에 여름 하(夏). 
  아버진 사계절 중 겨울, 엄마는 여름을 제일 좋아했다나요.
 
 - 전에 엄마 사진, 한장도 없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구 대답했었죠. 
  기억나요?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꼭 한장… 지갑에 넣어 뒀었어요.
 
 자신은 겨우 수개월간의 기억 속에서도 이렇게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데, 
 아무리 몇년이나 흐른 이전의 일이라 할지언정 
 수년동안의 기억, 그것도 모자간의 정이라 불리는,
 감히 무게를 잴 수도 없는 저 감정을 동하라고 잊었을 리 없다. 
 
 절대, 그럴 리가 없어.
 
 
 
 -  잊을려구요. 얼굴도 기억도 다 없애버리려구요.
 
 아니, 잊을 수 있을 리 없을 거야. 
 얼굴도 기억도 다 없애버릴 수 있을 리 없어. 
 마지막 남은 사진 한장까지 찢어버렸다 해도 
 네 가슴속에 엄마의 영상이 얼마나 뿌리깊게 박혀 있을지,
 기억이 얼마나 소중하게 자리잡고 있을지, 분명히 알고 있어. 
 
 그리고, 그건 엄마도 같으실 거야.
 
 
 
 - 사실은 한번도 잊은 일이 없었던 거죠. 
  레이니… 딸을 볼 때마다 동하를 생각했어요. 
  레이니가 내 젖을 물때마다 동하가 오버랩되서… 
  그 앤 이제 날 아예 기억도 못할지 모르는데…
 
 그 마음을 전해주고 싶다, 
 오랫동안 떨어져 있던 두사람을 연결시켜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서투른 자신이 상처 입힌 누군가에게, 
 그가 정말 필요로 하는 걸 얻을 수 있도록 돕고 싶었다.
 
 물론 자신에겐 그럴 능력, 없을 지도 모른다. 
 스스로 더 아프지 않기 위해 도망쳐 온 자신에겐, 
 그럴 자격이 처음부터 없을 지도 몰라. 
 
 하지만, 가능하다면…… 
 만일에, 가능하다면…….
 
 
 
『 동하를 다시 못 볼만큼, 싫어한다거나 부담을 느끼지 않는다면……. 』
 
 부담은, 모르겠다. 
 두려워하고 있는지도. 
 그래서 진영의 말처럼, 
 난  환타지 세계>와 같은 그곳 미국으로 잠시 도피해 갔던 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어차피 피할 수 없는 것… 
 어차피 언젠가는 그를 봐야 하는 거야. 
 
 아니, 이건 핑계…… 
 이처럼 절실하게 사랑한다 느낀 적이 일찍이 있었을까.
 처음도 아닌데, 해서는 안될 사랑인데, 그 만큼 절실한.
 
 잡고 싶다… 바보처럼 붙들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다. 
 뿌리치고 온 건 분명 자신이건만, 안으론 오직 매달리고 싶단 생각뿐. 
 
 그것이 옳든 옳지 않든, 이성으로 막을 수 있는 영역이 아니란 사실.
 상처는 치유되는 것이 아니라 치유된다고 착각하고 있을 뿐이란 걸,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어떤 것이 인생엔 존재할 수 있단 사실을, 
 그 순간 고통스러울 만치 절실하게 체감해 버렸다…….
 
 꼭 갈망하는 방식 그대로 얻을 수는 없을 지언정, 
 절대 도망쳐서는 안 된다고. 
 몇번이고 어겼던 자신과의 약속을 지키자고. 
 이젠 절대 도피하지 말자고. 
 
 만남이란, 자신과 대화할 기회… 
 모처럼 운명이 내려준 선물이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래서, 시연은 돌아오고 있었다. 
 
 아니… 홀린 것처럼 동하 어머니에게 
 자신의 핸드폰 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알려 주고, 
 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비행기 티켓을 끊었다. 
 정말이지, 뭔가에 홀린 것처럼. 
 어떻게 해야 좋을 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저, 무작정.
 
 시연은 그렇게 도피의 공간에서 벗어나, 
 부딪쳐야 할 현실로 다시 돌아오고 있었다. 
 날이 잘 선 칼처럼 냉정하고, 그럼에도 
 벗어나기 힘든 달콤함이 존재할 지도 모를 현실로 돌아오고 있었다.
 
 하지만, 흔들림은 단순한 기류의 불안정 때문이 아니었다.
 불안은, 단순한 긴장이 아니었다.

 

 " 춥냐? 에어컨 끌까? "
 " 끌 것까진 없구 쫌만 줄여 줘, 오빠. "
 
 운전하고 있던 매니저 영준의 질문에, 뒷자리에 반쯤 누워 있던 미은은 
 종일 이어진 CF 촬영에 부은 다리를 대충 뻗은 자세로, 
 눈을 뜨지도 않고 대답했다.
 
 " 그나저나 웬 비가 일케 계속 오냐. 아, 배 안 고프니? "
 " ……괜찮아. "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로 대꾸하면서, 
 미은은 차 문 옆에 놔뒀던 껌을 집어 까서 입에 넣었다. 
 
 사실 조금 감기기운이 있는 것 같기도 하지만… 뭐, 상관없다. 
 지금은 집에 가는 길인 걸. 
 촬영은 끝났고, 얼굴 가득 사람들에게 웃음을 파는 작업은 
 다음 촬영 때까지 쉬어도 좋다.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거야. 
 
 " 오빠두 먹을래? "
 " 껌? ……주라. "
 
 영준이 미은의 로드 매니저로 일하기 시작한 진 사실 얼마 되지 않았다. 
 
 원래 길거리에서 픽업된 잡지 모델로 시작했던 미은은 
 작년 겨울과 봄에 나온 이런저런 브랜드의 카탈로그를 도배하며 
 은근히 주목받기 시작했고 그런 그녀에게 재빠르게 팔을 뻗어 온 것이 
 바로 영준이 일하는 기획사였다. 
 
 주로 10대 스타들이 소속된 에이전시로 
 미은 외에도 주목받고 있는 예비스타들이 꽤 많이 들어 있고 
 무명을 제대로 키워 내놓는단 평판인 곳이기도 했다.
 
 미은은 이제 CF에도 간간이 얼굴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것도 신인치곤 운좋게시리 
 초콜릿이나 청바지, 10대 전문 화장품처럼 '때깔나는' CF만 골라서. 
 드라마 섭외도 들어오고 있었지만, 그건 조금 실력을 키운 뒤 
 제대로 시작하자는 실장님의 충고로 미루고 있는 중이다.
 
 오늘 미은은 광고용 탄산음료만 마시며 저녁시간을 보낸 덕에 
 속이 말이 아니었다. 
 게다가 아침부터 이상하게 좋지 않았던 몸은 
 야외에서 겪은 수시간 동안의 강행군 덕에 완전히 탈진한 상태. 
 
 그래도 괜찮아, 
 오늘은 푹 잘 수 있을 거야.
 
 연예계에 들어가는 게 지상목표였던 기억은 없었다. 
 어쩌다 보니 이 길에 발을 디뎠고, 
 어쩌다 보니 지금에 와선 지하철이나 버스만 타도 
 사람들이 꽤 알아보는 얼굴이 돼 있을 뿐.
 
 
 
 ' 동하, 봤을까? '
 
 나 요즘 TV에 꽤 나온단 말야. 
 네가 패션 잡지 같은 거야 절대 안 볼 타입인 건 알지만, 
 그래도 TV는 보지? 그렇지? 
 
 너한텐 고백했다 차인 나지만, 그래도 남자애들 팬레터를 제법 받는단 말야. 
 그래 봤자 요만큼도 아깝다곤 생각 안 하지? 
 ……쳇, 이 차가운 놈아.
 
 
 
 미은은 눈을 가늘게 떠, 
 차창에 붙었다 흘러 떨어지는 물방울들을 멍하니 바라봤다. 
 아까보단 비의 양이 많이 줄었다. 
 방금 전만 해도 전혀 뵈지 않던 창 밖 풍경도 어렴풋이 들어온다. 
 
 
 
 - 사귄다기 보단…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밤의 놀이터. 달빛을 받아 그림자에 반쯤 가려져 있던 동하의 얼굴. 
 그 사람이란 누구를 말하는 걸까. 혹, 내가 아는 사람일까. 
 
 - 포기할 수 없어. 
  이대로 감정을 밖으로 밀어 두거나 하면 평생 후회하고 살 것 같으니까…
 
 조용하면서도 힘있게 울리던 말. 
 뭔가를 뚫어지게 노려보고 있는 듯한 시선. 
 
 그의 주변을 감싸는 공기는 이미 또래의 영역을 벗어나 있었다. 
 그 앤, 이미 나와는 다른 세계에 존재하고 있었다.
 
 그런 감정이란 어디서 오는 걸까. 
 어디서 와서 어떻게 자리잡는 걸까.
 뭔지 아직 이해할 순 없지만,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사랑하고 사랑 받고 싶어.
 
 
 
『 오늘은 서울 하늘이 외로워, 음… 외로워
  눈감으면 내 손끝에 그대 체온이 느껴지네 』
 
 차안엔 라디오가 흐르고 있었다. 
 뒷자리에 앉은 미은은 머리를 좌석에 기댄 자세로 
 가만히 밖을 보고 있는 모양이다. 
 영준은 그 모습을 미러를 통해 곁눈질하면서 볼륨을 아주 살짝 높였다. 
 
『 지금 난 그대 미소를 생각해 음… 생각해
  재미없는 얘기에도 웃어주던 널 떠올리며
  운명을 느끼게 된다는 너의 얘길 실감하며
  그대가 선물해 준 액자 속 웃고 있는 우리를 바라보네…… 』
 
 ( 조규찬  서울 하늘 )
 
 
 
  " 오빠! "
 
 차안에 퍼져 나가던 부드럽고 감미로운 허밍 음이 갑작스레 흐트러졌다. 
 음악에 취해 있던 영준은 뒷자리에서 갑자기 터져 나온 외침에 깜짝 놀라 
 하마터면 핸들을 놓칠 뻔했다. 
 뭐, 뭐야…?! 하고 묻기도 전에 
 다시 한번 외치는 소리가 날카롭게 귀를 찌른다.
 
 " 세워, 오빠! "
 " 왜 그래? "
 " 세워, 오빠! 빨리…!!! "
 " 뭐……?! "
 
 놀란 영준이 차를 제대로 멈추기도 전에 
 미은은 차 문을 열고 뛰어내릴 기세였다. 
 차가 멈추자마자, 거의 박차고 나간다 싶을 동작으로 뛰어 나간다.
 
 " 야, 우산! "
 
 영준이 쫓아가며 소리쳤지만, 반바지에 스포츠 샌들차림의 미은은 
 비 따윈 개의치 않고 저편에 쓰러져 있던 뭔가로 돌진하고 있었다. 
 
 그 뭔가는 바이크였다. 
 어둠 속에서 언뜻 검게 보였지만 원래 색은 빨강일. 
 그리고 그 옆, 도로 옆 젖은 흙 위에 
 또 다른 뭔가, 아니 누군가가 쓰러져 있었다. 
 그 누군가는 카키색 티셔츠와 면바지를 입은 남자로 
 옷 입은 걸로 보아 미은 정도의 나이인 듯 했다. 
 축축한 비에 온통 젖어버린 몸은 언뜻 경직된 듯 보인다. 
 다만, 아직 마르지 않은 피가 아직은 숨이 붙어 있음을 전해주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광경에 굳어졌던 그는 
 미은의 외침이 들리고서야 제 정신으로 돌아왔다.
 
 " 동하야……!!! "
 " 아는 사람이야?! "
 " 오빠, 오빠, 오빠, 어떡해…… 어, 어떡해…… 도, 동하야, 정신차려! "
 " 야! 가만있어 봐! 아는 사람이지? "
 
 물어볼 필요도 없는 질문이었다. 
 영준은 대답을 듣기도 전에 핸드폰을 꺼내고 있었다. 
 
 " 오빠, 어떡해…… 어떡해…… 동하야! " 
 " 어어, 일으키지 마! 구급차부터 불러야지. 
  사고 환자, 함부로 건드렸다 악화되면 클난단 말야. 
  그러니까 흔들지 말고 가만있어. ……여보세요? 119죠? 
  사고… 예, 지나가다 우연히 발견했는데요…… 예, 여기가…… "
 
 영준이 전화하는 걸 보며, 미은은 울음이 터지기 일보직전인 표정을 지은 채 
 그가 건네 준 우산을 쓰러져 있는 동하에게 씌운다. 
 아까보다 한결 희미해진 비에 젖지 않도록 
 차 트렁크에 있던 담요를 덮어주고 우산을 씌운 채 구급차를 기다리며, 
 그녀는 입술을 아프도록 깨물었다. 
 
 놀람은 아직도 가시지 않았지만, 
 이 순간 자신이 뭘 어떻게 해야 할 지 소녀는 잘 알고 있었다.
 
 언젠가 네가 날 도와 줬지? 
 혼자 돌아가던 내가 운 나쁘게 걸렸을 그 때, 일부러 쫓아와 줬잖아.
 이번엔 내가 널 도와줄게. 반드시, 반드시, 도와줄게. 

 

 

 문을 열고 들어온 집은 한동안의 주인의 부재로 인해 
 아침임에도 후텁한 공기로 가득 차 있었다. 
 
 아는 사람들에게 가끔 와서 환기를 시켜주고 
 무슨 일 있으면 연락 달라고 했지만, 
 그들도 그리 자주 와 보진 못한 모양이다. 
 그간 도둑이 안 들어온 게 참으로 다행스런 일.
 
 " 후우… "
 
 전신에 쌓인 피로를 재확인하듯 가만히 한숨을 내쉰 시연은, 
 거실에 여행 가방을 놓아두고 
 방금 편의점에서 사 온 토마토 쥬스를 봉지에서 꺼냈다. 
 
 슬슬 허기 질 시간이긴 했지만, 
 열수시간을 꼼짝 않고 한 자세로 앉아 온 탓인지 
 뭔가 챙겨 먹기도 귀찮았을 뿐더러 속도 은근히 거북했다.
 쥬스만 마시고 샤워라도 한 뒤 일단 눈을 붙여야겠단 생각뿐. 
 
 지친 몸을 소파에 내리고 병 뚜껑을 막 비틀었을 때, 전화가 울렸다. 
 시연은 멈칫해선 쥬스 병을 내려놓고 느릿하게 몸을 일으켰다.
 
 동하일 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지만, 그래서 받기가 조금 꺼림칙했지만, 
 일단 집어들기로 하고 손을 뻗었다. 
 
 더 이상 동하를 피하지 않기 위해 돌아온 것이다. 
 그것이 어떤 생각에서 나온 것이든, 그리고 어떤 결과를 낳든지 간에 
 그녀는 동하를 다시 마주하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그 결론에 가장 큰 역할을 한 것은 미국에 있던 짧은 기간, 그것도 
 마지막 순간에 잠시 얼굴을 접했을 따름인 동하의 엄마였다. 
 
 
 
 - 나 동하 보고 싶어요. 
  한번이라도 좋으니, 그 애한테 욕을 들어도 좋으니 만나고 싶어. 
 
 저, 간절함이 담긴 한마디였다.
 
 
 
 " 여보세요? "
 [ 여보세요…? ]
 
 의외의 목소리였다. 
 이 시간에 전화가 오리라곤 생각도 못한 상대.
 
 [ ……연석인데요, 기억…하시죠? ]
 
 그 음성은 여느 때보다 조금 높고 그렇지만, 잠겨 있는 듯했다. 
 
 그녀가 한동안 서울에 없었던 거, 연석이 알 리가 없다. 
 어떻게 생각하면 연석은 참으로 타이밍 좋게 전화한 셈이었다. 
 
 시연은 학생다운 이미지를 지닌, 동하의 친구를 좋아했기 때문에 
 내심의 껄끄러움을 드러내지 않으려 조심하면서 
 되도록 밝게 당연히 기억한다고 대꾸했다. 
 
 [ 저기, 저 지금 여의도 성X병원에 와 있는데요… ]
 
 어딘가 무게를 담고, 상대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하기 힘든 말을 억지로 하는 듯한 한마디.
 
 " ……! 무슨 일 있어요?! "
 
 그러고 보면, 
 동하 주변 누군가에게 전화를 받는 건 꼭 무슨 일이 터진 후였다. 
 시연은 가슴에 치밀어 오르는 불안을 억제하지 못하고 소리를 높였다.
 
 [ ……. ]
 
 수화기 너머로 잠시 침을 삼키는 듯한 공백이 있었다. 
 
 그리고, 그 공백 후 들려온 대사에 
 여자의 얼굴은 일순, 현기증이 일 듯한 충격으로 그림자를 드리웠다. 
 전화를 내려놓은 그녀는 한방 얻어맞은 듯한 머리와 피로에 짓눌린 몸을 
 간신히 추스려, 아직 벗지 않았던 옷을 그대로 걸친 채 밖으로 나갔다. 
 
 휘청거리는 걸음 뒤로, 
 아직 다 따지도 않은 토마토 쥬스 병과 미처 풀지도 않은 여행가방이 
 횡-한 집안을 채우고 있었다. 
 
 
  
 
 유미은(柳美恩·Yoo Mi Eun)
 
 데뷔한지 몇 달 안된 신인모델. 
 스탠더드한 예쁜 스타일은 아니지만 상당히 눈에 띄는 외모를 지녔다. 
 동하에게 첫눈에 반했으나 차였음.
 화끈한 성격이지만 나름대로 기준이나 생각도 정립돼 있는 10대 소녀로 
 클라이맥스 부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야 하기 때문에 설정한 캐릭터임.

 

 

 

 I wish I could                    당신을 다시       
 just make you turn around        돌아서게 할 수만 있다면
 Turn around and see me cry        울고 있는 날 돌아보게 할 수만 있다면
 
 There's so much                  당신에게 해 줄 말이,   
 I need to say to you              해야 할 변명이, 
 So many reasons why              너무나 많이 있어요
 
 You're the only one              당신은 날 이해해 주는 
 who really knew me at all        단 한명인 걸요
 
 
 So take a look at me now          그러니 지금 날 봐 주세요
 There's just an empty space      여긴 텅 빈 공간뿐이에요
 
 There's nothing                  여긴 떠올릴 만한 게 
 left here to remind me            아무 것도 없어요
 
 Just the memory of your face      그저 당신의 얼굴만이 남아 있을 뿐 
 
필 콜린즈/Against All Od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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