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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애(禁止愛) (8)

오늘의 쉼터 2014. 9. 25. 16:46

금지애(禁止愛) (8) 

 

   
  
 
걷는다.
 무작정 걷는다.
 
 길거리를 메운 수많은 인파.
 그 중, 한 부분으로 편입하기 위해 그저 걷는다.
 
 내 몸을 휩쓸듯 내 정신도 휩쓸어 갔으면 좋겠다.
 날 메우고 있는 이 무거운 덩어리를 전부 쓸어가 줬으면 좋겠다.
 
 생각해 보면 나란 존재, 이 넓디넓은 세계의 미세한 일부에 
 지나지 않을 뿐인데, 어째서 그 미세한 존재를 덮는 고민은 
 이다지도 어둡고 탁한 색을 띄고 있는 것일까. 
 
 지금 내 시야를 잠시 스쳐가는 저 많은 사람들도 
 내부에 나처럼 힘든 뭔가를 지닌 채, 힘들게 호흡하고 있는 것일까.
 
 
 
 시연은 걷고 있었다.
 늘 동하가 그러듯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그저 멍하니 걷고 있었다.
 언제나와 다름없이 사람들의 물결로 메꿔진 주말의 종로는 
 따뜻한 햇살을 받아 눈부신 생기를 지닌 채, 그녀를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저 나오고 싶었다. 
 나오면 해결책이 떠오를 것 같았다. 
 자신이 뭘 원하는지, 아니, 적어도 뭘해야 하는지 
 해답을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어젯밤의 대화가 계속 머릿 속을 맴돌고 있었다.
 
 
 
 연석에게 전화해, 동하를 설득하다시피 함께 내보낸 후.
 
 " 저, 시연씨 책망하려는 거 아녜요. 
  그야, 동생은 죽었구… 죽은 사람 생각하며 한창 꽃필 시기를 
  혼자 지내라고 하는 거, 말도 안되죠. 
  그치만, 그 상대가 동하라면… 예, 그건 또 안되는 일이죠. "
 
 시연이 이제까지의 자초지종을 대략 줄여서 설명하고 난 후.
 눈을 감으며 한숨을 토해낸 고모가 한 말이었다.
 
 " 동하는… 딴 사람도 아니고, 동생의 아이에요. 
  물론 시연씨랑 동생, 혼인신고도 안 올렸으니 엄마라고까지 말하긴 
  뭣하지만… 예, 그래도 아무 사이도 아닌 건 아니지 않은가요. 
  이런 일은 상식적으로 말도 안되는 일이죠. 안 그래요…? "
 " ……. "
 
 시연은 하얀 얼굴을 한 채, 그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말을… 대꾸를… 할 수가 없다.
 
 그런 시연을 보고, 계속 몰아 붙인 게 미안한 듯 
 고모가 음성을 누그러뜨린다.
 
 " 뭣보다 시연씨를 위해 하는 말이에요. 
  그런 것들이 문제가 안된다고 칩시다, 그래도 이건 아니에요. 
  동하 쟤, 아직 열일곱입니다. 그 나이 애가 뭘 알겠어요. 
  저 나이 또래 남자애들은 다 연상의 여자에 대한 환상같은 게 
  있는 법이랍니다. 그런데 가장 가까이 있던 게 시연씨였고. 
  그런 일시적인 감정을  갖고 사랑이니 뭐니 하며 착각하는 거예요. "
 " ……. "
 
 " 아시겠어요? 동하, 조만간에 자기 또래 여자앨 보게 될 겁니다. 
  첨부터 그래야 했단 듯, 그렇게 휭 가버릴 거에요. 
  그럼, 시연씬 어떻게 될까요? 동하랑 있었던 기억들이 
  시연씨 버린 시간이랑 미래를 보상해 줄 것 같아요? 
  아니, 천만의 말씀이죠. 괜한 시간낭비가 되는 거예요. "
 " 고모님, 전… 시간낭비라곤 생각지 않습니다. "
 
 시연은 겨우… 한마디를 뱉어냈다.
 앉아 있는데도 불구하고 몸을 지탱하는 것조차 힘겨울 정도로 
 정신이 아득하다.
 몸은 오싹하리만치 차가운데, 얼굴에만 열이 올라온 듯 더운 기운이 감돈다.
 …머리가 어지러웠다.
 
 " 그래요, 그래. 말이 지나쳤을 수도 있어요. 그치만 내가 말한 쪽이 
  현실이고 정석이란 사실, 시연씨가 더 잘 알 거야. 
  그리고, 동하 쟤… 가장 중요한 땝니다. 
  이제 고2고 금방 고3 올라가는데, 이런 일에 정신뺏길 시간이 어딨어요? 
  시연씨랑 같이 살며 그래, 성적이 유지가 될 것 같애요? 
  지금 인생의 가장 중요한 시기 중 하나에 봉착해 있단 사실, 
  시연씨도 알잖아요. "
 
 " ……. "
 " 부탁해요. 동하 보내 줘요. 지금이 딱 좋을 때예요. 늦으면 후회해. 
  어린 아이도 아니잖아, 시연씨. 냉정하게 생각해 줬으면 해요. "
 
 고모의 음성은 이제 완전히 정상적인 톤을 찾고 있었다.
 
 " 두사람을 위한 일이에요. 동하, 부산으로 내려가게 설득해 줘요. 
  저 녀석 성격에 내가 아무리 강압적으로 밀어 부쳐봤자 역효과가 될 거구, 
  시연씨가 말해야 겨우 들을 거야. 
  정 말하기 껄끄러우면 일단 떨어져 있자는 식으로 말하면 되지 않겠수? 
  헤어지자구 하지 말구. "
 " ……. "
 "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져요. 그러구 나면, 
  시연씨 쪽에서 굳이 멀어지잔 소리 안해도 될 상황이 만들어 질 거예요. "
 
 
 
 " 혹시, 이시연씨…? "
 
 머뭇거리는 음성이 옆에서 울려 와 이어폰을 떼고 
 자신의 얼굴을 들여다 보는 사람의 얼굴을 올려다 봤다. 
 
 그 얼굴, 퍽 오랜만에 보는 그 얼굴을, 결코 낯설게 느껴지지 않는 
 따스함과 아련한 그리움을 느끼게 하는 그 얼굴을 보고 
 조금 놀란 시연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 …강주…선배……? "
 
 남자는 부신 듯 눈을 가늘게 만들며 웃었다. 
 그것은, 아주 오래간만에 보는 미소였다. 
 한동안 잊지 못해 가슴 한구석에 욱신거림을 느끼게 했던 그 미소.
 
 " 맙소사, 이렇게 만나게 될 줄 몰랐는데. "
 
 시연도 웃었다.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그랬어. 
 이 사람은 그런 능력이 있었다. 
 한번 웃으면 마치 전염시키듯 주변 사람까지 미소짓게 만드는 그런 능력.
 
 " 오랜만이에요, 선배. "
 
 하지만 그런 건, 때론 누군가를 아프게 만들 수도 있다. 
 냉기가 아니라 따스함이 사람을 상처입힐 수도 있단 사실, 
 그걸 뼈저리게 일깨워 준 사람이었다. 
 
 그것이 그의 잘못이 아니었기에 더욱 아팠던 기억.
 
 " 나도. 근데, 하나 안 변했네? 아니, 좀 머리가 길었나? "
 " 그래요? 선밴 좀 늙은 것 같은데? "
 
 그건 조크였다. 
 하지만 적어도 많이 여유로워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때의 풋풋한 젊음은
 이제 어느 정도 자기 생활을 찾은 자의 여유로움으로 바뀌어 있어
 보는 사람을 기분좋게, 그리고 약간의 부러움과 동경을 갖게 만든다.
 
 …봄에 어울리는 사람이었다.
 
 " 아, 이제 아저씨지 뭐. …반갑다, 정말. "
 " 예. "
 " …지금 약속 있어? "
 " 아, 아뇨. 선배는요? "
 " 난 그냥 책 좀 사러나온 거야. 시간 있으면 커피나 한잔 할까? "
 " …네. "
 
 어색하단 생각, 전혀 들지 않았다. 
 스스로도 이상하리만치 담담한 기분으로 시연은 상대의 제안을 따랐다. 
 그러면서 문득 생각한다.
 
 
 그래, 그렇구나.
 이젠 정말 아무렇지도 않게 볼 수 있구나.
 시간이란, 그런 거구나.
 
 하고.
 
 
 
 " 선배 결혼했단 소식 들었어요. "
 
 조용한 카페 구석자리.
 헤이즐넛의 향을 느끼면서 입을 먼저 연 시연이었다.
 
 " 부인이 교포라면서요. 같이 온 거에요? "
 " 어, 아니. 이번엔 나 혼자만 잠깐 왔어. "
 " 유학생활, 할 만해요? "
 " 그렇지 뭐. 나 원래도 공부 잘 못했잖아. 
  그런 놈이 머릴 쥐어 짜면서 책상 앞에 앉아 있으려니, 하하… "
 
 멋적은 듯 웃는다. 
 MBA를 따기 위해 유학한 선배가 그 곳에서 지금의 부인을 만나 
 결혼했단 사실을 알게 된 건, 시연 자신이 결혼하기도 전 일이었다.
 
 " 엄살 부리지 말아요, 선배. "
 " 우습지, 참. 공부 잘했던 넌 일하고 있고, 책이라곤 치를 떨던 난 
  이렇게 공불 계속하고 있으니. 인생은 예측불허, 실감하게 돼. "
 " ……. "
 
 선배는 아무 생각없이 내뱉었을지도 모르는 대사였다. 
 인생은 예측불허. 
 하지만 그 일곱글자의 문장이 지금의 시연에겐 저림으로 다가온다.
 
 인생은 예측불허… 
 무슨 일이 있을 지 전혀 알 수 없이 
 그렇게 오늘을 보내고 내일을 맞이하고… 
 희망하고, 절망하고, 환희했다, 무너지며… 
 그렇게 흘러간다.
 
 선배와 헤어졌을 때. 
 아니, 자신 쪽에서 헤어지자고 말을 꺼내고, 처음으로 보는, 
 항상 따스한 미소를 비치고 있던 선배의 그 최초의 눈물에 
 자꾸만 손 내밀고 싶고 기대고 싶은 충동을 억지로 억누르며 
 흔들리는 몸과 마음을 다잡았을 때의 기억은 어느 샌가 
 밑바닥 깊숙히 고인 작은 앙금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것이 돼 버렸다.
 
 시간은, 그런 것이다. 
 고모님 말씀이 맞을 지도 모른다. 
 
 몸이 멀어지면, 마음도 멀어질 수 있을 지도, 
 그리고 그 뒤엔 시간이 해결해 줄 지도 모른다. 
 더 이상의 아픔을 느끼지 않게 될 지도 모른다. 
 지금은 상상만으로 죽을 것처럼 고통스러운 감정도 언젠간 치유되어 
 아픔이 있었단 사실마저 잊을 수 있을 지도 모른다.
 
 
 
 두사람은 2시간 정도를 주변 근황을 얘기하며 보냈다. 
 선배는 시연이 결혼했단 사실을 모르는 것 같았고 
 또 이상하게 그에 대해 묻지 않았다. 
 알고 있으면서도 모르는 척 하는 건지, 정말 모르고 있는 건지… 
 어쨌든 시연에겐 잘된 일이었다. 
 대신 두사람은 동창들의 이야기나, 과거 대학 시절의 에피소드 같은 
 잡다한 얘기를 주고 받았다. 
 시간은 흘러가고 문득 헤어질 때가 된 듯 선배가 시계를 본다.
 
 " 엇. 시간이 이렇게 됐네, 벌써. "
 " 아, 그렇네요. "
 
 시연도 놀란 듯 손목시계로 눈을 보냈다.
 
 " 밥이라도 한끼 사 주고 싶은데, 오늘은 내가 저녁 약속이 있어. 
  형욱이랑 정수 녀석인데, 시연이 너도 같이 갈래? "
 " 아뇨. 됐어요, 선배. 저도 좀 정리해야 할 일이 있어서… "
 
 과 동창들은 이전 두사람의 관계를 다 알고 있다. 
 사회학과의 CC로 워낙 유명했던 두사람이었다. 
 물론 그건 다 지나간 과거 일이지만. 
 뭣보다 지금은 사람들을 만나고 싶지 않은 시기였다… 그 누구라 할지라도.
 
 두사람은 마치 약속된 것처럼 일어서서 나란히 입구로 나갔다. 
 선배가 억지로 자신이 내겠다고 한다. 
 시연은 거부하는 게 더 어색하단 생각이 들어 물러서서 입구에서 기다렸다. 
 그리고, 작별인사를 했다.
 
 " 만나서 반가웠어요, 선배. "
 " 나도야, 정말… 반가웠다. "
 " 갈게요. 커피, 고마워요. "
 
 시연은 미소지으며 등을 돌려 다시 거리의 인파 속으로 섞이기 위해 
 걸음을 몇발짝 뗐다. 
 …그 때.
 
 " 시연아…! "
 
 조금 다급한 듯한, 몇번을 머뭇거리다 토해낸 듯한 선배의 음성이 들려 와 
 시연은 우뚝 멈추고, 그리고 천천히 뒤를 돌아 봤다. 
 강주 선배가 당황어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리고 눈이 마주치자, 그 굳은 얼굴을 어색한 미소로 억지로 감추며 
 자신을 본다.
 
 " 선배…? "
 
 선배가 시연의 앞으로 다가 왔다. 
 그리고 결심한 듯 숨을 한번 크게 쉬고 빠른 말투로 말하기 시작했다.
 
 " 나 말이지… 첨 네가 그렇게 이별선언했을 때, 
  그 속 어렴풋이 짐작하면서두 솔직히 많이 원망했었다. "
 
 알고 있었어요, 선배. 
 나 일부러 휴학하고 내려갔을 때 선배가 날 찾아 온 적도 있었단 걸. 
 아르바이트 하다가 선배 왔다고 아주머니가 전화해 주셨죠. 
 나 거기서 지내지 않는다던 아주머니의 말, 
 내 부탁으로 하신 거짓말이었어요. 
 나 말이죠, 선배랑 마주치지 않으려고 
 일부러 그 날 아주 늦게 돌아 왔어요. 
 아주머니는 내 마음을 아시니까, 더 묻지 않고 내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셨죠. 
 그 6개월 간, 나… 무지막지 일했어요. 
 몸을 혹사하면 마음이 아픈 걸 잊을 것 같아서. 
 복학하고서도 일부러 선배와 다른 수업을 잡고, 
 가능하면 선배랑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일부러 길을 돌아가고, 
 학교 도서관에서 마주칠까 봐 공부도 애써 다른 도서관에 가서 하고, 
 나 그랬어요. 
 일부러 빡빡하게 아르바이트를 뛰고, 
 선배랑 어쩌다 마주쳐도 이를 악물며 쌀쌀맞게 대하고, 
 차라리 선배가 빨리 날 미워해 주길 바라며…… 그렇게 보냈어요…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먼저 무너질 것 같아서.
 
 
 " 근데, 지금은 고맙다고 생각해. 
  만일 우리가 주변 반댈 무릅쓰면서 계속 같이 있었다면, 
  내가 널 얼마나 더 상처입혔을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많이 상처입혔을 거야. 그리고 파국을 맞았던지, 
  아니라두 결코 좋기만한 감정으로 서로를 마주 볼 수 없게 되었겠지. "
 " ……. "
 " 미안하다, 그리고 고맙단 말을 하고 싶었다. 
  나중에 네가 쓰러졌단 얘길 듣고 나, 얼마나 자신을 책망했는지 몰라. 
  내가 네게 해준 건 아무 것도 없는데, 짐은 죄다 네게 맡기고 난, 
  자신은 최선을 다했다고 핑계만 대고 있었지. 
  날… 용서해 줄 수 있겠니? "
 " 선배… "
 
 씁쓸하게 웃은 다음, 시연은 고개를 들었다.
 
 " 고마워요. 선배, 여전하군요. 
  선배는 착한 사람이니까 언제나 자신을 책망하죠. 
  하지만 그런 식으로밖에 행동하지 못한 건 나니까. 
  아무렇지 않게 대해줘서 오늘 정말 기뻤어요. 고마워요. "
 
 쓰러지기까지 했었다. 
 상처가 너무 큰 탓에 도저히 버틸 수 없이 이내 무너질 것 같았는데, 
 한때는 눈 앞의 저 남자가 없으면 세상을 살아갈 힘을 부여받을 수 있을까, 
 의문마저 들었는데… 자신은 살아 있다. 
 이렇게 멀쩡히… 다른 사람을 사랑하게 되고, 
 그리고, 새로운 아픔을 맛보고 있다.
 
 ( 그건… )
 
 그건… 지금의 아픔도 시간이 해결해 줄 수 있다는 뜻, 아닐까.
 다 잊을 수 있다는, 지울 수 있다는 의미 아닐까.
 그래, 그런 거였다. 인생이란 그런 거였어.
 시간이 흐르면… 잊을 수 있다.
 잊을 수 있어.

 

" 물어도 돼? "
 
 중간시험 기간이라, 늦도록 학교 자습실에서 공부하다 돌아가는 길이었다. 
 
 밤의 적막함은 이제 완연한 봄의 향기를 감싸 
 그 은은함에 안타까움을 부여한다. 
 그런 때문일까, 줄곧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 …뭘. "
 
 연석의 한마디에 동하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나직이 내꾸했다. 
 연석으로 말하자면 시험기간 내내 미뤄 둔 질문이었다. 
 시험기간 내내 연석의 집에 머물면서 아침에 같이 나갔다 같이 들어 왔던 
 친구는 평소에도 그리 많은 편이 아니었던 말수를 완전히 잃고 있었다. 
 내일이면 시험이 끝난다. 
 그러고 나면, 아마 같이 놀더라도, 함께 있어도, 그룹 속에 묻혀서 
 질문할 기회를 잃을지도 모른다.
 
 " 그 날 말야… "
 " 그 날? "
 " 갑자기 전화와서 너랑 같이 있어 달라고 하셨던 날. "
 " 아아. "
 
 무겁게 끄덕이는 친구를 보며 연석은 줄곧 혀끝에 매달려 있던 질문을 
 조심스레 뱉어 냈다.
 
 " 무슨 일이… 있었던 거냐. "
 " ……. "
 
 달빛은 여전히 적막한 냉기를 지니고 두사람을 비추고 있다. 
 그 싸늘함 사이로 공기의 흐름을 뚫고 동하가 힘겹게 호흡하는 것이 
 연석의 귀에 들려 왔다.
 
 " 룰을 깨뜨리는 질문이라면 이제 더 묻지 않을게. 하지만… "
 " 고모가 오셨어. "
 
 사이를 두지 않고 바로 답이 들려 와, 연석은 놀라 
 어깨에 매고 있던 스포츠 백의 끈을 고쳐 쥐었다. 
 
 약간은 자포자기한 듯한 응답.
 
 " 고모? "
 " 그래. "
 " 어쩐 일로? "
 " 날 데려 가시겠대. "
 " 부산으로? "
 " …그래. "
 " 이제 와서…? "
 " 위험, 하니까. "
 
 위험하다…? 
 무엇이?
 
 " 무슨 일 있었구나. "
 " ……. "
 
 동하의 얼굴은 달빛을 받아설까, 전에 볼 수 없이 파리했다. 
 영 핼쑥해 뵈는 건 시험공부에 지친 탓만은 아닌 듯 싶다.
 
 " 새 엄마에 관계된 일이냐…? "
 
 다시금 이어진 한동안의 침묵 끝에, 불쑥 연석이 뱉어낸 말에 
 동하는 놀란 듯 시선을 들었다. 
 그 눈가가 거무스레하게 변색되어 있는 게 연석의 눈에 들어온다. 
 
 그러나 다시금 고개를 떨어 뜨린 동하는 힘을 잃은 듯 우뚝 걸음을 멈췄다. 
 그에 이끌리듯 연석도 걸음을 멈추고 주위를 둘러 본다.
 
 " 잠깐 앉자. "
 
 덩그라니, 벤치가 보였다. 
 여느 때라면 연인들이 자리하고 있을 그곳은 어쩐 일인지 텅 비어 있다. 
 두사람은 천천히 걸음을 옮겨 자리에 앉았다.
 
 
 " 어떻게 알았지. "
 
 동하가 중얼거리듯 말한다.
 
 " 혼자 살 때는 아무 말 없으셨으니까. 니가 원하는 대로 해 주셨잖아. 
  갑자기 부산에 오라 하시다니…. 무슨, 오해라도 하신 거야? "
 " 오해가, 아니야. "
 " 응? "
 
 동하는 건물들 틈새로 비치는 하늘을 올려 보고 있었다.
 그 동공에 어느 사이, 구름에 반쯤 가려져 그 빛을 다 발산하지 못하는 
 은백색 달이 비치고 있음을 깨닫고 연석은 천천히 자신도 달을 시선으로 
 빨아 들였다.
 
 별은 없었다. 
 그저 외로이 달이 있을 뿐. 
 그리고 그 달은 지금 빛을 가리운 채, 홀로 방황하고 있다. 
 안타까울 만치 창백한 은빛으로. 
 
 밤…이었다.
 
 
 " 너, 그 분을… 좋아하니? "
 
 저절로 질문이 흘러 나왔다. 
 하려던 생각은 없었는데, 거의 자동으로.
 
 " ……? "
 " 새 엄마 말야. "
 " …좋아해. "
 
 생각보다 빠른 속도로 대답이 나온다.
 
 " 아니, 내가 말하는 건… "
 " 네가 말하는 의미로. "
 
 동하는 입가에 미소조차 띄우고 있었다. 
 저런 미소는, 게다가 좀처럼 표정 변화를 보이지 않는 녀석의 
 저런 식의 미소는 보는 사람을 지독히 당혹하게 만드는 것이다. 
 
 녀석을 가까이 접한 지 벌써 1년도 넘었건만 아직도 연석은 
 자신의 옆벤치에 앉아 팔을 뒤로 한 자세로 다리를 쭉 뻗고 있는 
 친구란 놈의 사고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아무 생각 없는 듯 대꾸할 때가 실은 가장 무섭다. 
 가장 친한 친구라는 나한테조차 빗장을 걸고 있어, 녀석은. 
 가끔 속을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내가 지독히 치사하단 감각을 맛볼 때가 
 있다. ------입맛이 써. 
 
 그렇다곤 해도… 새 엄마를… 정말로… 그런 의미로… 너…?
 
 " 당황했냐. "
 " 어…? "
 " 물었잖아. 그래서 대답했어. "
 " 네 편에서 먼저 말해 줄 순 없는 거지. "
 " 쿡… "
 
 동하는 약간은 피곤하단 뉘앙스가 담긴 고소를 터뜨리며 
 이마에 손바닥을 갖다 댄다. 
 그 행동 안에 엄청난 무게가 존재함을 깨닫고 연석은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리고, 그 다음 대사가 이어졌을 땐 가슴까지 싸아해져 왔다.
 
 " 진짜로 원하는 건 말이지… "
 " ……. "
 " 어째서 이토록 갖기 힘든 걸까. "
 " …진짜, 인 거야? "
 " 그래. "
 
 친구가 그렇게 말한다면 진짜다. 
 진짜 감정인 것이다. 
 함부로 판단하고 휩쓸릴 놈이 아니었다… 
 설사 그것이 자신의 일이라 할지라도.
 
 " 잘못이라 해도… 진짜기 때문에, 놓을 수가 없어. 
  설령 잘못이라고 해도. "
 
 동하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연석의 눈에 그는 피곤해 보이고, 힘들어 보이고, 지쳐 보이고, 
 아파 보였다. 그리고… 어른으로 보였다.
 
 " 언제부터였지? "
 " 모르겠어. 정신이 들고 보니, 이미 그랬어. "
 
 언제나 한발 앞서간다, 녀석은. 
 언제나 나보다 한발 앞서서 하나의 개체로 독립하고 부딪히며, 
 어른이 되는 계단을 먼저 올라간다. 
 그저 동경만 할 따름인 감정을 녀석은 먼저 잡아서 그걸로 인해 
 괴로워 하고 있다. 
 
 미안… 난 널 위로하기 이전에 먼저 질투하게 돼. 
 왜냐면 난 아직 어린애니까. 
 아무리 노력해도 언제나 난 너한테 뒤쳐지게 된다. 
 언제쯤 난 네가 지금 소유한 감정을 느낄 수 있을까. 
 네 가슴엔 대체 어떤 것이 있을까. 
 …짐작조차 할 수 없다.
 
 " 고모님… 다 아시는 거냐. "
 
 말없이 끄덕, 한다.
 
 " 어떡할 거야. "
 " 어떻게… 할까. "
 
 시선을 저편에 자리잡은 풀숲으로 돌린다. 
 도둑 고양이라도 있는 걸까, 
 어디선가 들려 온 울음소리가 가늘게 귀를 찌른다. 
 그 소리를 흘려 들으며 연석은, 조금은 주제넘다 생각하면서도 
 천천히 입을 뗐다.
 
 " 이건 간섭이 아냐. 그저 제안일 뿐이니까 부담없이 들어 줘. 
  내 생각엔, 고모님 말씀대로 하는 게 나을 것 같아. 
  널 위해서가 아니라 새 엄마를 위해서도 네 마음만 고집해선 안될 것 
  같다는 게 내 생각이야. "
 " ……. "
 " 포기하라는 게 아니고, 잠시 물러서란 의미야. "
 
 포기하라고 해도 듣지 않겠지, 넌. 
 이미 눈에 보인다.
 
 " ……. "
 
 
 그녀를 위해서라…. 
 그럴지도 모른다. 
 내가 계속 같이 있으면 상처입는 건 그녀일지도 몰라. 
 
 그 생각을 못했었다. 
 고집 부리고 있었어. 
 나란 인간, 아직 멀었다. 
 
 내가 지켜줘야 할 사람이야. 
 그런데 지금까지의 난 뭔가. 
 바보… 늘 제자리 걸음이다. 
 늘 그래, 결국은 한자리다. 
 움직이지 못하고 있어. 
 
 그래, 일단 얘기를 하자. 그녀의 의견을 듣자. 
 그녀를 행복하게 해 줄 수 있는 길을 찾아 보자. 
 
 중요한 건, 이 감정이 절대로 변하지도 왜곡되지도 않으리란 사실이니까.
 
 
 문득 조금 밝아진 느낌이 들어 하늘을 보니, 
 아까까지 달을 가리고 있던 구름이 서서히 걷히고 있다. 
 
 달에서 시선을 내린 동하는 걱정스런 표정으로 자신을 보고 있는 친구에게로 
 돌려, 조용히 끄덕였다. 웃으며 상대의 어깨를 친다.
 
 " 진연석, 넌 멋진 놈이야. "
 " 이제 알았냐. "
 
 무척이나 썰렁한 대꾸였지만 동하는 웃지도 않고 벌떡 일어섰다. 
 그리고 결심한 것처럼 팔을 앞으로 쭉 뻗어 기지개 켜듯 몸을 움직인 후,
 
 " 가자. "
 
 고, 말한다. 
 연석도 벤치 옆에 놔둔 스포츠 백을 다시 어깨에 걸쳤다. 
 
 저편에 서 있는 가로등 빛과 반대 방향으로 
 길고 흐릿한 그림자가 늘어져 있다. 
 그 그림자를 밟듯이 두사람은 연석의 집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집에 가면, 따뜻한 차라도 한잔 줘야… '
 
 평소 라면도 잘 안 끓이던 연석은, 그 밤, 
 난생 처음으로 기특한 생각을 했다. 
 그 옆에선 막 어른이 되어가는 친구가, 
 아직도 복잡한 그 무언가를 머릿 속으로 곱씹으며 발을 움직이고 있다. 
 
 그래도 아직은 당도가 더 진한 감정.
 
 아직…이었다. 
 
 진짜로 원하는 것을 갖기 위해선 
 몇배 저리고 아파 피가 흐르는 감정과 경험을 지불해야 한단 사실을 
 아직 모르고 있었다….

Yesterday - Yes a day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Like any day, alone again for every    여느 때처럼 혼자서
 Day seemed the same sad way          언제나처럼 슬프게 느껴지는 매일
 To pass the day                                  그 매일을 보내고 있었어
 
 The sun went down without you          태양은 당신없이 져버렸는데
 
 Folding me in his arms                        팔로 나를 안아 
 and become his shadow                    그림자 속에 감추고
 
 He said                                                그는 말했지
 Let's go                                            『 가요 』 
 
제인 버킨/Yesterday - Yes a day·3절

 

 

 

 

 바다였다.
 봄의 바다였다.
 여름의 활기와 부산함을 거쳐, 가을의 성숙함을 지나, 
 겨울의 고요한 수면에서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하는 수줍은 봄의 바다였다.
 
 " 시험, 잘 봤니? "
 
 한동안 고모가 머물다 돌아간 탓에, 
 그리고 중간고사 기간동안 죽 동하가 연석의 집에서 지낸 탓에, 
 두사람만의 시간을 가진 건 정말이지 오랜만의 일이었다. 
 
 그 어색한 침묵에 내심 긴장하고 있던 동하는 
 여자의, 여느 때와 그닥 변함없는 톤을 지닌 목소리를 듣고서야 
 안심한 듯 입을 열었다.
 
 " 그럭저럭요. "
 
 열심히 했다. 
 시연과 살면서도 성적이 떨어지지 않는단 걸 보여주기 위해 
 정말 더 이상 할 수 없다시피 시간을 쪼개서 열심히 했었다. 
 고민의 늪 속에서도 최선을 다했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은 그것 밖엔 없었으니까.
 
 " 그래… "
 
 이 세상에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와 그리고, 
 그들 두사람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는 공간. 
 아직 제철이 되지 않아 투명한 햇빛 아래서조차 
 아직 바닷바람이 싸늘한 이 넓은 공간 속에 
 조그맣게 존재하는 두사람, 그리고 바이크.
 
 서울에서부터 바이크를 타고 수시간을 달려 바다에 왔다. 
 어느 쪽이 오자고 한 건 아니었다. 
 무작정 달리다 보니 여기까지 와 버린 것이다. 
 다만 바이크를 타고 싶다고 한 건 시연이었다. 
 그리고, 여기까지 움직여 온 건 동하였다.
 
 ( 깨끗해… )
 
 눈물이 날 정도로 푸른 봄 바다가 마치 속까지 들여다 보일 것처럼 
 햇살을 받아 빛나고 있다. 
 그 빛이 바닷 속 어디까지 들어갈지 궁금하다고 생각하며 
 시연은 아련한 푸른 색에서 눈을 떼, 자신을 보고 있는 늘씬한 몸으로 
 고개를 돌렸다.
 
 " ……. "
 
 자신을 향한 눈은 너무나 맑아서, 
 혼탁한 자신을 깨닫게 할 만치 맑디 맑아서, 
 시연은 저도 모르게 모랫사장에 뻗어 있는 그림자로 눈길을 보내고 말았다.
 
 빛은 얼마만큼의 깊이까지 들어 갈 수 있는 걸까. 
 진실이란 얼마만큼의 거짓을 집어낼 수 있는 걸까. 
 그 어떤 빛도 파고 들어갈 수 없는 심연은 분명 존재한다. 
 굳은 결심으로 봉인된 심연은 진실을 가릴 수 있다. 
 그걸 믿고, 난 지금 저 눈을 보고 거짓을 말하려 한다. 
 진심을 버리고 거짓으로 나 자신을 포장하려 한다.
 
 괜찮아, 이시연. 
 단 한번만 거짓을 말하면 되는 거야. 
 그거면 이제 더는 거짓을 말하지 않을 수 있어. 
 더는 자신을 속이지 않을 수 있어. 
 그런 상황으로부터 너 자신을 피할 수 있어. 
 그러니까… 그러니까… 단 한번만.
 
 "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들어 줄 수 있니? "
 
 바다 쪽에서부터 불어 오는 바람의 입김을 전신에 맞으며, 
 그 싸한 감각에 금방이라도 흔들릴 듯한 자신을 다잡으며 말했다. 
 이런 절박함 속에서도 주변의 풍경에 감상적이 되버리는 자신은, 
 그 얼마나 경박한 인간인가.
 
 " 한가지만 빼고요. "
 " ……? "
 
 긴 침묵 끝에 던져진 여자의 질문에 
 소년은 두려움을 감추며, 그래도 흔들리는 목소리로 대꾸한다. 
 시연은 그 대답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소년의 앞머리가 잔잔한 바람에 조금 흐트러진 모습이 보인다.
 
 " 한가지만 빼고 다 포기할 수 있어요. "
 " ……. "
 " 그 한가지가 뭔지는 말 안해도 알 테죠… 그러니까 묻지 마세요. "
 
 그 말에 이제까지의 계획과 단단히 싸맨 마음의 준비가 
 전부 수포로 돌아갔음을 깨닫고 시연은 가슴을 눌렀다. 
 씁쓸한 감정 아래, 그래도 아직 달콤한 뭔가가 혀끝에 남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래도 안된다… 
 이 달콤함에 넘어가선 안돼.
 
 고모님과 약속했어… 분명히 약속했다.
 
 " 부산으로 가, 동하야. "
 
 또박또박 되도록 감정을 싣지 않은 음성으로 말했다. 
 절대로 가슴을 드러내지 않도록 호흡을 조절해 가며… 
 이를 악물고, 눈을 응시하며. 언젠가 그랬듯이.
 
 - 근데, 지금은 고맙다고 생각해. 
  만일 우리가 주변 반댈 무릅쓰면서 계속 같이 있었다면, 
  내가 널 얼마나 더 상처입혔을지 모른다는,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어. 
  틀림없이 그랬을 거야. 많이 상처입혔을 거야. 그리고 파국을 맞았던지, 
  아니라두 결코 좋기만한 감정으로 서로를 마주 볼 수 없게 되었겠지.
 
 언젠가 너도 나한테 선배처럼 말할 날이 올 거야.
 고맙다고… 고맙다고… 고맙다고.
 
 나 역시 언젠가 잔잔하게 웃으며 말할 수 있겠지.
 아무렇지 않게 대해 줘서 기쁘다고.
 
 " 진심…이에요? "
 " …응. "
 
 파도 소리가 들린다.
 조용하다… 
 
 쏴아 하는 그 작은 음까지도 놓치지 않을 만치 
 일체의 다른 소음이 배제된 공간. 
 
 오직 파도소리와… 내 고동소리만이 들린다.
 
 ------아프다.
 
 " 날 봐요. "
 " ……. "
 
 나는 너를 보낼 거야.
 나는 너를 보낼 거야.
 여기서 보낼 수 없다면 시간이 보내도록 만들 거야.
 
 시연은 자신의 바로 앞, 숨결까지 닿을 만한 거리에 접근해 있는 동하를 
 올려다 봤다. 
 시선이 흔들리지 않도록 고정시킨 채, 맑고 맑은 칠흑의 동공을 응시했다.
 
 어쩌면 저렇게도 아름다울까. 
 어쩌면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거짓을 말하려는 순간까지 
 어쩌면 넌, 그토록 아름다울 수 있는 거지?
 
 " …알았어요. "
 
 시연을 한동안 뚫어지게 보고 있던 소년이 미손지 아닌지 
 도무지 파악하기 힘든 복잡한 표정을 얼굴에 담고 말했다.
 
 " 진심이라면, 그렇게 할게요. "
 " ……. "
 " 그렇지만… "
 
 동하는 말하다 문득 그림자가 울퉁불퉁하게 늘어진 옅은 색 모래 위로 
 시선을 떨군다. 
 
 그리고 조그맣게 웃곤, 몸을 숙여 신고 있던 신발을 벗었다. 
 그리고 발을 싸고 있던 양말도 벗어 맨발이 된다.
 
 " ……? "
 " 따뜻해요. "
 
 멍하니 자신의 행동을 보고 있는 여자에게 소년은 미소를 보냈다.
 
 " 신을 벗고 맨발로 밟아 봐요, 진짜 기분 좋아. "
 
 시연도 피식 웃고, 동하의 말대로 신고 있던 단화를 벗어 
 모랫사장에 가지런히 두고 양말도 벗어 마찬가지로 맨발이 됐다. 
 
 그 사이, 소년은 저편 바닷물이 들어오는 영역까지 가 있다. 
 입고 있는 진바지 아래를 걷어 올려 매끈한 발목이 
 햇살 아래 드러나 있었다. 
 
 얕은 물을 철벅거리며 미소짓는 모습이 천진한 어린애 같다. 
 
 길고 늘씬한 몸 가까이 머뭇거리며 다가간 시연은 갑자기 끌리듯 
 동하의 몸으로 다가섰다. 
 
 실은 소년이 손을 뻗은 것. 
 끌어당긴 가는 몸을 절대 놓치지 않으려는 듯, 
 동하는 힘을 주어 시연을 꽉 끌어 안았다.
 
 " 그렇지만, 한가지만은 약속해요. 
  절대 헤어지는 건 아니라고… 절대 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
 " 동하야… "
 " 약속해요… "
 
 동하는 울고 있었다. 
 시연의 어깨에 머리를 묻은 채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아직 17세였다. 
 아직 고교생이었다. 
 힘든 사랑을 하기엔 너무 버거운 나이였다.
 
 " 응… "
 
 미안해… 
 미안해… 
 거짓말이야… 
 용서하지 않아도 돼… 
 이기적이라도 욕해도 돼… 
 
 나는 너와 함께 있을 수 없어… 
 주변의 시선도 두렵고… 너의 변화도 두려워… 
 지금은 날 사랑한다고 말하는 네가 바뀌기 전에 내가 먼저 끝내고 싶어… 
 하지만 그걸 입에 담지조차 못하는 날 경멸해도 돼… 
 이기적이라고, 용기없는 인간이라고 비웃어도 돼… 
 
 미안… 난 널, 버릴 거야… 약속을, 버릴 거야…
 
 " ……. "
 
 동하는 시연에게서 몸을 떼고 눈물을 닦았다. 
 그리고, 행복한 듯 미소했다. 
 
 눈물과 미소… 무엇이나 너무도 투명하고 너무도 깨끗하다.
 
 " 봐요. "
 
 동하가 발 밑을 가리킨다. 
 눈부신 햇살 아래 드러난 자신과 여자의 맨발을. 
 소금물에 젖은 갈색 흙 아래, 
 자연 그 자체처럼 노출되어 있는 두사람의 일부를.
 
 " 우리 둘 다 맨발이에요. 이렇게 서 있는 지금은, 
  당신은 스물 일곱이 아니고 나도 열 일곱이 아니야. 
  나에게 당신은 아버지와 결혼한 사람이 아니고 
  당신에게 나도 남편의 아들이 아니에요. 
  우리 둘은, 그냥 두사람일 뿐이야. "
 " ……. "
 " 다시 이렇게… 맨발로 같이 걸어 줄 거죠? "
 " 그래… "
 
 시연은 목이 메어오는 걸 느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그런 날이 결코 오지 않을 것을 그녀는 알고 있었다. 
 
 이것으로 마지막인 것이다. 
 이것으로 둘의 추억에 그녀는 피리오드를 찍을 것이었다. 
 하지만 저 눈을 보고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대신 시간이 상대의 감정을 지워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거짓을 말한다… 
 더 상처입기 전에 종지부를 내는 나약함--- 그것이 자신이었다. 
 앞을 똑바로 보는 저 곧음을 사랑하지만, 자신은 그렇게 될 수 없다. 
 그것만으로 나와 그는 어울리지 않아… 
 그러므로, 이제 끝을 낸다.
 
 
 청명한 빛이 수면 위로 들어 왔다 반사돼 나간다. 
 그 눈부심과 그로 인해 남는 잔상이 지독히도 아련하고 아름다왔다. 
 그리고 그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자신의 앞에 서 있는 존재도 
 빛나고 있다. 
 
 그러나 그 빛은, 아름다움은, 앞으로 지워 갈 상처를 더 심화시킬 것에 
 지나지 않는단 사실을 알고 있기에…
 
 그래서… 아팠다.
 너무도… 아팠다.

 

 

그리고, 동하는 부산으로 떠났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떠났다.
 웃으며 떠나 버렸다.
 
 " 시연아. 대지 몇개 남았니? "
 " 하나요. 선배는요? "
 
 원고를 다 마치고 이제 대지 작업이 끝나기만을 기다리며 
 만화책을 보고 있던 시연의 어깨를 툭 건드리며 
 은영선배가 평소와 전혀 다름없는 명랑한 음성으로 물어 왔다. 
 
 다른 기자들은 모두 미술부실에 가서 작업 완료된 대지를 수정하느라 
 편집부에 남아 있던 사람은 시연 하나 뿐이었다. 
 밤이 깊어가는 시각이지만 왠지 잠은 오지 않는다. 
 은영은 시연이 보고 있던 책을 뒤집어 표지를 확인했다.
 
 " 나도 하나. 뭐 보니? 러버스 키스? 재밌니? "
 " 지금 막 집은 참이라서 아직 모르겠어요. "
 " 너 귀찮지 않으면 우리 저쪽 방에 가서 얘기할래? "
 
 은영의 제안에 시연이 끄덕여, 
 두사람은 자판기에서 밀크 커피를 하나씩 뽑아 
 편집실 저편에 위치해 있는, 지금은 비어 있는 휴게실로 발을 옮겼다. 
 자신의 옆 소파에 앉은 시연을 은영은 커피가 담긴 종이 컵을 든 채 
 빤히 응시한다.
 
 " 왜 그래요, 선배. 제 얼굴에 뭐 묻었어요? "
 " 어어, 아니… 그냥. 너 이상하게 평온해 보여서 불안하다. "
 " 선배도 참… 평온해 보이는데 뭐가 불안해요. "
 " 그런 거 있잖아. 폭풍우 전의 고요함… 그런 거. "
 
 " ……. "
 
 시연은 조용히 웃었다. 
 그런 시연을 보며 은영은 고백할지 말지, 질문할지 말지 심각하게 망설이다 
 입을 열었다. 
 
 아니, 실은 저절로 대사가 흘러 나와 말한 자신도 놀라고 말았지만.
 
 " 너 말야… 현우한테 정말 요만큼도 호감이 없었던 거니? "
 " 선배, 갑자기 왜… "
 " 어, 그냥. 단지 얼마 지나지 않았단 이유만으로 그런 거 아닐까 해서… "
 " 그게 아녜요, 선배. "
 " 응…? "
 
 시연은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댄 채 깍지 낀 손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그 얼굴 위에 문득 스쳐 지나간 복잡한 상념 한조각을 
 은영은 놓치지 않았다.
 
 " 최근 몇개월 간 내가 깨달은 건요… 
  내가 얼마나 경박한 인간인지에 대한 거예요. 
  나란 인간이 이럴 수도 있구나, 
  이렇게 철없이 감정대로 행동할 수 있구나, 그런 것에 관한 거에요. "
 
 대체 뭘 말하려는 걸까.
 내가 본 중 가장 바보같은… 너무 순수해서 때론 바보같기까지 하던 후배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걸까. 
 알아 듣기 어렵게 말하는 건, 스스로 뭔가를 불안해 하고 힘들어 하는 거다. 
 무슨 일, 있는 거니?
 
 " 네가 동한가, 걔한테 신경쓰느라 달리 아무 생각이 없었던 건 알아. 
  솔직하게 말하지만 너, 그렇게까지 할 필욘 없었다고 나, 지금도 생각해. 
  넌 너 나름대로 최선을 다했고, 다른 것도 마찬가지야. 자책할 필욘… "
 " 동하, 이제 없어요. "
 " 응? "
 " 부산 갔어요. 고모님 집으로요. "
 " …잘했어. 첨부터 그렇게 했어야 했어. 헛일을 했단 건 아니지만 말이지, 
  네가 강국장님 잔상에서 그렇게 허우적거리는 거 나 싫었다. 
  좀 더 이기적이 돼 주길 바래, 지금부터라두. "
 
 은영은 언제나 배려해 주지만 
 일단 말할 때 만큼은 항상 직설적이고 솔직했다. 
 그리고 그런 은영이기 때문에 시연은 그녀를 좋아하고 기댈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이 순간만큼은, 그런 은영에게 시연도 솔직하고 싶었다.
 
 " 선배, 나 회사 그만 둘 생각이에요. "
 " 뭐? 왜…? "
 " 좀 지쳐서요. 이제 슬슬 옮길 때도 된 것 같고 
  실은, U 출판에 있는 유진언니도 생각있으면 오라 하던데… 
  그런 것보단 지금은 그냥 쉬고 싶어요. 
  일단 쉬고 앞으로 어떡할지 생각해 보고 싶기도 하고. "
 " 하긴 너도 이제 환경을 바꿀 때가 됐구나. 
  공채 출신이란 프리미엄을 버리는 건 좀 아쉽지만, 
  그래… 이젠 너도 좀 쉴 때가 오긴 했어. "
 
 한 회사에 길어야 3년. 
 그리고 다른 잡지로 철새처럼 이동하는 것이 잡지기자들의 생식 리듬이고, 
 은영이 보기에도 시연은 이제 환경을 바꿀 때가 된 것 같았다. 
 
 그렇다 해도, 이건 좀 갑작스런 감이…
 
 " 너, 장례 치루고도 바로 일했잖아. 갑자기 그런 결심한 거… "
 " ……. "
 " 동하… 때문이니? "
 
 은영의 직감은 가끔 정말이지 무서울 정도였다. 
 그리고 그 직감을 부정할 기운도 기력도 이제 시연에겐 없었다.
 
 " …네. "
 " 역시 그랬구나. 너 괜찮다 잘 지낸다 할 때도 나 늘 불안했어. 
  그 애 왠지 너한테 상처 줄 것 같아서… "
 
 " ------선배. "
 " 응? "
 
 " 남편이 가버린 지 얼마 되지도 않은 처지의 여자가, 
  남편의 아들을 생각하게 됐다면… 역시 말도 안되는 거, 겠죠…? "
 " ……뭐? "
 
 은영은 저도 모르게 입에 가져 가려던 종이컵을 탁자 위에 도로 내려 놓으며 
 옆 자리에 조용히 앉아 있는 후배의 흰 얼굴을 멍하니 바라 보았다. 
 창백한 얼굴엔 뭐라 말할 수 없이 고통스럽고 씁쓸한 뭔가가 얹혀 있어 
 보고 있는 은영의 마음까지 안타깝게 만든다. 
 
 그리고 머리는, 상대의 말을 겨우 이해했다.
 
 " 후…… "
 
 그러나 리액션은 영 힘들었다. 
 말보다 먼저 한숨이 나온다. 
 당황한 가슴을 미처 쓸어 내리지 못한 채, 은영은 말을 하기 시작했다.
 
 " 그런 거… 그럴 수 있… 저… "
 " ……. "
 
 비밀을 입 밖에 냈는데도 전혀 감각이 없어. 
 어째설까. 우습다… 우스워… 그저 우스울 뿐. 
 피곤해서 그런 걸까? 마치 모든 게 잠시 지나간 것처럼 느껴져서….
 
 시연의 얼굴은 무표정했다. 
 그런데 그런 무표정한 얼굴에는 감정을 다 드러내어 토해내는 울음보다 
 더 보는 사람의 감정을 뒤흔드는 뭔가가 있었다.
 
 " 선배, 미안. 놀랐어요? "
 " 아, 아니. 시연아… 너… "
 " 다 끝났어요, 이젠. 동하, 이제 부산에 갔고 저도 마음 정리할 거니까, 
  이젠 다 끝났어요… 다만, 누군가한테라도 이 일을 말하고… 그리고, 
  그걸로 완전히 끝을 내고 싶다고 생각해서…. "
 " 너희 둘, 무슨 일이 있었구나, 그렇지? "
 " 선배… 들어 줄 수 있어요? "
 
 은영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시연은 그간의 이야기를 천천히, 가끔 생각에 잠기며, 
 또 가끔은 더듬거리면서 말하기 시작했다.
 
 
 
 
 반시간 정도에 걸쳐 시연은 은영에게 이야기를 했다. 
 자신의 감정을 정리하듯 간간히 끊어지는 시연의 말을 
 은영은 참을성 있게 듣고 있었다. 
 그리고 시연은 자신의 감정에 마지막 종지부를 찍듯 
 마침내 이야기를 끝냈다.
 
 " 대놓고 말할 수가 없었어요. 그러면 절대 가지 않았을 테니까. 
  그런 애에요… 그래서 거짓말을 할 수 밖에 없었어요. 
  어쨌든 이젠 끝난 거에요. 나중에 사실을 얘기하겠지만, 
  그 때가 되면 그 애도 이해해 줄 거라고 생각해서… 
  하지만 저 자신은 이미 결심했… "
 
 하고 말하다가, 시연은 깜짝 놀라 은영을 고쳐 쳐다 봤다. 
 상대의 눈에 눈물이 그득 고여 있었던 것이다.
 
 " 선배…? "
 
 은영은 탁자 위에 놓인 티슈박스에서 티슈를 두장 뽑아 나오려는 눈물을 
 급히 닦아냈다. 그러곤, 조금 떨리는 음성으로 중얼거리듯 말한다.
 
 " 미안… 너 그렇게 고민하는 줄도 모르구… "
 " 선배가 무슨 잘못이 있어요. "
 " 그래두… "
 
 나 정말 바보구나, 그리고 한심해. 
 연이은 실연으로 고통스러워 할 후배 옆에서 
 그 후배의 사연을 듣고 가슴 아파하면서도 
 한편으론 나, 지금 난 행복해서 다행이라 생각하고 있다. 
 
 인간이란 그 얼마나 이기적인 동물인가. 
 사실은 시연아… 나 너한테 내 행복을 자랑하고 싶어서 말을 꺼낸 거였어. 
 하지만 당분간 나, 너한테 그런 얘기 절대 못할 거야. 
 너무 미안하고 부끄러워… 미안하다.
 
 " 나, 홀가분해졌어. 다는 아니지만 절반은 내려간 것 같애. 
  정말 고마워요. "
 
 억지로 웃는 시연을 보면서 은영은 차마 자신의 감정을 말하지 못하고 
 뽑아 든 티슈에 다시금 배어나온 눈물을 마저 찍는다.
 
 " 은영선배, 시연씨 거기 있어? 대지 교정 본 거 나왔던데? "
 " 어, 알았어요, 갈게! "
 
 미술부 사람의 외침이 들려 와, 은영은 외치듯 답하곤 마지막으로 물었다.
 
 " 정말 괜찮니? 후회하지 않니? "
 " 더 힘 빼고 싶지 않아요, 선배. 딱 여기에서 멈추고 싶어. 
  맘 편하게 조마조마한 것 없이 살고 싶어요. 이젠 정말 편해지고 싶어… "
 
 시연은 그렇게 말했다. 
 일견 태연한 듯 미소지으면서, 담담하게, 감정이 실리지 않은,
 맑은 음성으로 말했다. 
 
 그리고 그런 시연을 은영은 막지 않았다. 
 막을 수 없었다. 
 자신도 같은 입장이었다면 마찬가지로 행동했을 것이므로.
 
 행복한 자신은 이해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닐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계속하는 건 안 된다. 그것만은 알고 있다. 
 
 힘을 전부 상실한 뒤에 무너지는 것보다 
 아직 여유가 있을 때 방향을 바꾸는 게 나아.
 
 " 잘한 거라고 생각해. "
 
 …그러길 바래.
 …네가 행복하길 바래.
 
 은영은 다만, 그것만을 바랬다.
 그녀가 생각한 건 그 순간, 단지 그 뿐이었다.
 후배가 더 이상 힘든 사랑으로 자신을 상처입히지 않길 바랬다.
 
 그런 은영을 보며 시연은 조용히 웃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시연을 보며 은영은 웃지 않았다.

 

안녕조차 말하지 못한
 사랑이 끝났다…
 비겁과 배려조차 구분하지 못한
 내가 있었다… 
 
  5월은 시연이 자란 이곳 고아원이 가장 아름답게 보이는 시기였다. 
 
 작은 건물 앞, 조용히 서 있는 큰 나무는 
 가지와 잎을 화려하게 늘어 뜨려 그늘을 만들고, 
 뒷뜰에 만들어 논 화단엔 이제 막 제철을 맞이하여 피어난 색색의 꽃들이 
 시야를 메꾸고 있다. 
 
 홍차를 담은 머그잔을 들고 건물 뒤에 있는 벤치에 앉아 
 나무와 꽃을 보는 건 자신이 자란 장소의 5월을 즐기는 시연의 방식이었다.
 
 " …역시 여기 와 있었구나. "
 
 부드러운 소리가 들려 뒤돌아 보니 원장이 따뜻한 미소를 지으며 서 있다. 
 시연도 마주 미소를 돌려 주며 답했다.
 
 " 언제 봐도 이곳 화단은 근사해요. 매년 이렇게 꽃을 피울 수 있단 거, 
  어릴 땐 너무 당연하게 생각했는데… "
 " 그래, 축복이지. "
 " ……예. "
 
 어린 시절, 이 뒷뜰의 화초에 물을 주는 건 그녀의 담당이었다.
 하나의 생명이 자신의 손을 거쳐 자라난다. 
 어린아이의 고사리처럼 작은 손. 
 그 손과 마음으로도 뭔가가 자라날 수 있단 사실이 너무 신비로와 
 그저 젖어 들어갔다. 
 그런 마음을 키워 준 이곳과 선생님께… 진심으로 감사한다.
 
 봄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너무나 푸르러서, 푸르르고 푸르르고 푸르러서, 
 그 아름다움을 실감하지 못했다… 
 작은 나를 감싸고 있던 것은 따뜻한 빛이었음을.
 
 그 시절로 돌아가고 싶다, 고 처음으로 생각했다. 
 그 시절에 고통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확실히 처음부터 무언가를 결여한 채 태어난 자로서의 번민이 
 가슴 속에 뿌리박혀 있었다. 
 
 조금은 나아졌다 생각한 지금. 
 그러나, 그 지금은…….
 
 " ……. "
 
 한동안 침묵이 흘렀다. 
 그 침묵이 특별히 어색하단 생각이 든 건 아니었다. 
 다만 입에서 흘러나온 말을 내 보낸 건 왜 그런지 꽤나 시간이 흐른 뒤였다.
 
 " 선생님, 저 지금 다니는 회사 그만 두려고 해요. "
 " …그러냐. "
 
 원장은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가볍게 대꾸했을 뿐이다. 
 그 반응에 외려 시연이 놀랐다. 
 부모나 다름없는 존재다. 
 피도 섞이지 않은 자신을 거둬 지금까지 길러 주신 분이다. 
 
 얼마든지 터치하려면 할 수 있는 처지에 있으면서 
 원장은 때로 의아하다 싶을 만큼 시연을 믿어 주었다… 
 일단 어른이 된 지금은. 
 그런 배려가 눈물이 날 만큼 감사하지만 한편, 
 죄스러움으로 다가오는 시연이다.
 
 " 아무 것도 묻지 않으세요? "
 " 너한테 생각이 있으니까 그런 거겠지. 
  시연이도 이제 어린애가 아니잖겠어? "
 " ……. "
 
 시연은 식어가는 홍차를 한모금 마시곤 피식 웃었다. 
 
 무슨 설명을 할 수 있을까. 
 그저 번민과 갈등에 싸여 있는 현재에 대한 도피, 
 그 이상이 있다곤 절대 말할 수 없는 그녀인 것이다. 
 
 한심하죠… 선생님. 
 저는 아직도 어린 모양이에요.
 
 " 실은 아무 생각이 없어요. 
  잠깐 쉬면 직장으로 돌아가야겠지만, 지금 당장은… 
  선생님, 저 어떻게 해야 하죠? "
 " 미국에 잠깐 갔다 오련? "
 
 묻자마자 흐르듯 나온 답에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 예……? "
 
 조금 앞에 서 있던 원장은 손에 들고 있던 흰 수건으로 
 나날이 길쭉하게 자라는 나무의 푸른 잎을 정성껏 닦으며 답한다.
 
 " 너 전부터 영어를 배워 보고 싶다고 했잖니. 
  동생이 LA에 살고 있는데, 거기 가서 지내 보지 않으련? 
  제법 큰 한식점을 하고 있는 놈인데, 
  전에 한국 왔을 때 너도 몇번 본 적이 있어서 알 거다. "
 
 원장의 동생 되시는 분이 미국에서 굉장히 큰 음식점을 한다는 건 
 시연도 익히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단순한 음식점이 아니라, 외국인들이건 한국인들이건 
 부유층 사람들이 많이 들르는 정통 한식집이라고 했었다. 
 
 원장의 집안이 퍽 부자란 사실을 시연도 알고 있었다.
 
 " 예. 하지만 어떻게 거길 가요. 신세 지는 거… "
 
 " 오전엔 학교 가서 영어 배우고 오후엔 일을 거들면 
  그 놈도 좋다고 받아 줄 걸? 
  게다가 동생 놈, 전에 너 봤을 때도 아주 맘에 들어 했었지. 
  동생 부부네도 애들 다 키워서 대학 보내서 좀 심심할 거다. 
  한두달 그렇게  머리 식히고 오면 어떻겠냐, 내 말은 이거다. 
  너, 외국 촬영도 간혹 나가고 그랬지? 
  여권도 있으니 나가는 데 별 문제 없을 거구. "
 
 " ……. "
 
 갑자기 머릿 속에 픽…하고 뭔가가 꽂히는 듯한 감각이 들었다. 
 그것이 뭔지는 시연 자신도 잘 알 수 없었지만… 그렇지만… 
 지금 원장의 제안은 자신이 지금 필요로 하는 한가지란 생각이 들어 
 무심코 손에 든 머그 잔을 벤치에 내려 놓고 있었다. 
 
 머그 잔에서 홍찻 물이 넘쳐 흐른다. 
 잔 안에 들여다 뵈는 자신의 얼굴이 
 붉은 그림자 속 묘하게 일그러져 보였다. 
 이상한 얼굴… 탁하게, 어둡게, 흐려져 있다… 
 
 고개를 들어 정면에 있는 꽃과 나무들을 보고,
 그리고 더 시야를 올려 하늘을, 
 엄밀히 말하면 그 속에 있는 빛을 들여다 봤다. 
 아니, 보려고 한다------
 
 " 때로 사람에겐 휴식이라는 게 필요한 법이다. 
  그렇게 쉬고 나면, 정말 자신에 필요한 게 뭔가를 알게 되는 게다. "
 
 선생님 말씀대로다… 내가 정말 필요한 건 변화였는지도 몰라. 
 이제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을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연결되지 말아야 할 이를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나를 바꿀 수 있는 아주 작은 계기를 마련하는 것. 
 
 그랬다. 
 나는, 27살이나 된 나는, 왜 그런 계기를 스스로 만들지 못하고 
 무용한 뭔가를 줄곧 쫓고 있었던 것일까. 
 
 바보 같다… 
 정말, 바보 같아.
 
 " 내 경우는 말이다…  딸 윤아를 잃었을 때였지… 
  그 전까지 난 매일에 쫓기며 살아가고 있었단다. 
  그걸 당연시 여기고, 그게 살아가는 방법이라 생각했지. 
  아니, 생각할 여지도 없었다. …우스운 일이구나…… 
  하나를 잃고서야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단 것은. "
 " 선생님…… "
 
 내 앞에 서 계신 이 분은, 담담하게 과거를 토로할 수 있는 이 분은 
 그 얼마나 강한 사람인가. 
 
 내가 17세… 지금 동하와 같은 나이였을 땐, 
 17에 10을 더했을 때 자신의 자리는 어떻게든 탄탄하게 잡혀 있을 거라 
 멋대로 생각했었지. 
 
 자신 곁에 존재하지 않는 부모의 그림자를 그리워한다던가 
 붙들지 말아야 할 상념을 계속 쥐고 있는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자신은 한사람의 어른이 되어 그 어떤 손도 필요로 하지 않고 
 바닥에 발을 대고 설 수 있을 거라고… 
 선생님처럼.
 
 지금 와 생각해 보면 그 얼마나 오만한 발상이었던가. 
 시간이 가면 나, 자연히 달라질 거라고… 
 성숙해져 있을 거라고… 단단해져 있을 거라고…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어리디 어린 환상에 지나지 않았던 것. 
 
 그로부터 10년이 지난 27세의 난 여전히 약하고, 여전히 쓰러져 있으며, 
 여전히 어둠 속에 갇혀 있고, 여전히 타인의 손을 빌려야 하는… 
 빛을 볼 수가 없는…….
 
 - 시연이도 이젠 어린애가 아니잖겠어?
 
 ' 저는 어린애에 지나지 않아요… 지금도…… '
 
 " 선생님… "
 
 시연은 자신에게 등을 돌린 자세로 서 있는 원장에게 걸어갔다. 
 그리고… 어릴 적보다 한결 좁아 보이는, 그렇지만 
 여전히 자신에게는 든든한 버팀목인 어른의 어깨에 살짝 머리를 기댔다.
 
 " 힘 내라. "
 
 나지막한 음성은 그 이상이 필요치 않았다.
 지금의 시연에게 가장 필요했던 걸 은인은 다시 주었다. 
 자신은 언제가 되어야 이 빚을 다 갚을 수 있을까.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볕은 사뭇 따스하기만 하다. 
 그 따스함을 온 몸으로 받아 들이면서 시연은 조용히 중얼거렸다… 
 지금 순간, 그녀가 할 수 있는 한마디를.
 
 " 고맙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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