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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애(禁止愛) (12)

오늘의 쉼터 2014. 9. 25. 16:50

금지애(禁止愛) (12) 

 

   
  
 
그가 누워 있다.
 그가 잠들어 있다.
 그가 움직이지 않는다…….
 
 툭……. 
 툭……. 
 
 링거 병에서 액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린다.
 
 마치 그 작은 음 외엔 다른 일체의 소리를 죄다 먹어버린 양 
 사방은 고요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있는 단정한 얼굴은 
 마치 감정이란 걸 싸그리 걷어낸 것처럼 무심하다. 
 
 회색의 병실. 
 본래 이곳의 사물들은 일체가 흰색이련만… 
 드리워진 그림자에 밴 탁한 물이 
 공간 자체를 회색으로 바꿔 버렸는지도 모르겠다. 
 
 
 ……어둡다.
 
 
 
 감은 눈. 
 바싹 마른 입술. 
 지독히도 창백한 얼굴빛. 
 
 언젠가 다쳐서 입원했던 그 때도 저런 얼굴은 하고 있지 않았는데… 
 어째서 이 순간 넌, 그렇게 생소한 표정을 내게 돌리고 있는 거지……?
 
 보고 싶었다… 다시 만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론 아니었는데… 이런 식으로 보고 싶진 않았는데…… 
 찌푸려도 좋으니, 마구 화내도 좋으니, 
 움직이는 모습으로 보고 싶었는데…….
 
 
 " 잠깐 나가 주셔야 합니다. "
 " ……. "
 
 간호사가 말했지만 시연은 마치 청각, 아니 감각 일체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붙박힌 듯 한자리, 동하가 누운 침대 앞에 서 있을 뿐이었다. 
 
 연석이 다가와 그녀의 어깨를 조심스레 붙든다.
 
 " 나가셔야 한대요. "
 
 빛을 버린 듯 공허한 여자의 눈은 그 말을 알아들은 것 같진 않았지만, 
 힘을 주자 순순히 끌려 병실 밖으로 나왔다. 
 마치 의지 없는 마리오네트가 끌려가듯이. 
 
 그렇지만 시연은, 식사하러가자는 연석의 말은 듣지 않았다. 
 그것이 의지에서 나왔는진 알 수 없지만, 
 그녀는 병실 앞 의자에 주저앉아 한발짝도 움직이지 않았다. 
 아니, 움직일 수 없었는지도 모른다…….
 
 
 
 " 이게… 이게, 어찌된 일이에요…? 사고라뇨…! "
 
 연락을 받고 동하의 고모가 큰아들과 함께 달려 온 건,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병실 안에 죽은 듯 누워 있는 동하, 
 그리고 병실 앞 의자에 앉아 있는 시연을 차례로 발견하고 
 그녀는 평정을 잃은 듯 소리질렀다.
 
 " 이게 어떻게 된 일이죠? 시연씨, 말 좀 해 봐요…! 
  의사 선생님, 어떻게 된 건가요? 예?! "
 " 오늘 아침에 수술은 끝났습니다…만, 의식이 돌아올지는 아직 미지숩니다. 
  헬멧이 깨질 정도로 심하게 지면에 부딪쳤기 때문에……. "
 
 때마침 병실에서 나오던 담당의사의 말이… 마치 환청처럼 들려온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이는 기척이 느껴지고, 이내 발소리가 멀어져 갔다.
 고모가 휙 하고 시연을 돌아본다.
 
 " 동하가 왜 여기 있나요? 동하, 왜 서울에 와 있죠?! 
  시연씨 만나러 온 건가요? 그런 건가요?! 
  시연씨 말했잖아요, 나한테 약속한다 그랬잖아! 
  어째서 여기 동하가 있는 거죠?! 너무하다 생각지 않아? 
  동생, 당신 만나고 사고로 가 버렸어… 
  당신하고 살게 되고 그리 빨리 가 버렸다구!
  것도 모자라 이젠 동하까지 망칠 작정인가요…?! "
 
 " 엄마! 무슨 소릴 하시는 거예요!? " 
 
 옆에 서 있던 동하의 사촌형 민규가 당황한 듯 가로막곤, 
 흐느끼기 시작한 고모를 다른 곳으로 데려간다. 
 가면서 죄송하단 표시로 고개를 숙였지만, 
 여자는 그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 듯 멍하니 앉아 있을 뿐이었다. 
 예기치 않은 소식으로 쇼크를 받은 탓인지 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쥐고 
 민규는 어째서 엄마가 저토록 여자를 몰아붙이는지 모르겠다 생각했다. 
 
 저 분이 잘못한 게 뭐가 있단 거지? 
 외삼촌과 동하의 사고는 우연일 뿐인데… 
 저 분에게 무슨 잘못이 있다는 거야? 
 한데 엄마…… 방금 뭐라셨더라? 
 
 - 동하, 왜 서울에 와 있죠?! 시연씨 만나러 온 건가요?
 - 시연씨 말했잖아요, 나한테 약속한다 그랬잖아!
 
 ' 무슨… 약속……?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동하는 어째서 우리한테 말도 없이 저 분을 만나러 왔던 거지? 왜……? '
 
 하지만 민규는 엄마에게 아무 것도 묻지 못했다. 
 병실 앞에 그 자신이 시체인 것처럼 앉아 있는 여자를 보고 있으려니, 
 왠지 아무 질문도 하지 말아야 할 듯한 기분이 들었던 것이다. 
 
 다만, 죽은 남편의 아들인 동하가 
 그녀에게 있어 퍽 소중한 존재인 것만은 분명했다.
 피 한방울 섞이지 않은 관계라 할 지라도 그럴 수도 있단 사실을, 
 민규는 어렴풋이 깨닫고 있었다. 
 물론, 그 진짜 의미를 그로선 상상도 하지 못했지만.
 
 
 
 
 
 하루… 이틀… 사흘…… 시간은 무심하게 흘러간다.
 
 시연은 거의 아무 것도 먹지 않았다. 
 아니, 먹지 못했다. 먹을 수가 없었다. 
 뭔가 먹으면 그대로 토해버릴 것 같아 먹을 수 없었다.
 
 그저 병실 의자에 죽은 듯이 앉아서… 
 그것이 전부였다. 
 
 잠도 자지 않았다. 
 아니, 자지 못했다. 잘 수가 없었다. 
 자신마저 잠들어 버리면 동하가 영영 그대로 깨어나지 못하게 될 것 같아 
 잠이 오지 않았다.
 
 
 
 은영이 병원에 들렀다 갔다. 
 꼼짝 않고 앉아 있는 시연을 보고 그녀는 울먹였다.
 
  " 너 있는 곳이 어디냐고 나한테 물으러 왔었어. 
    그 때, 어쩌자구 그렇게 매몰차게 대꾸했는지…
    미안해, 시연아…… 미안해…………. "
 
 선배, 선배 잘못이 아니에요… 
 책임은 나… 피해버린 나한테 있어……. 
 
 - 동생, 당신 만나고 사고로 가 버렸어…… 
  당신하고 살게 되고 그리 빨리 가 버렸다구!
  것도 모자라 이젠 동하까지 망칠 작정인가요…?! 
 
 그래, 나한테 있어…….
 
 - 그렇지만 한가지만은 약속해요. 
  절대 헤어지는 건 아니라고… 절대 날 버리지 않겠다고 약속해요…. 
 
 그 약속을 깨 버린 대가인 걸까, 이것은… 
 하지만, 만일에 그렇다 해도 그 대가는 내 쪽이 감당했어야 옳았는데… 
 동하에겐 아무 잘못이 없는데…….
 
 
 
 " 일단 각오는 해 두셔야겠습니다. "
 
 의사는 그렇게 말했다. 
 
 오랜 세월동안 타인의 죽음을 보는 것에 단련돼 있을 만큼 단련된 
 중년의 그도 파리한 얼굴의 시연을 똑바로 쳐다보긴 힘들었는지, 
 그 말을 하는 동안 줄곧 다른 사람들 쪽으로 시선을 돌리고 있었더랬다.
 
 이대로 의식이 돌아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했다. 
 의식이 돌아오지 않은 채로 영영 떠나버릴지도 모른다고 했다. 
 
 만일… 만일에 그것이 사실이 된다면… 
 그 땐, 어떻게 하지? 어떻게 살아갈 수 있을까? 
 
 이미 한사람을 같은 방식으로 잃었을 땐, 
 그가 남기고 간 그 누군가가 있었기에 삶의 의미를 찾을 수 있었는데 
 이젠 그 누군가까지 잃게 될 지도 모른다는 거……. 
 
 
 
 " ……뭐라도 드셔야죠. 벌써 며칠째…… "
 
 연석이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미은의 걱정스런 시선도 느껴진다.
 
 그쪽을 보며 답하고 싶은데, 괜찮다고 말하고 싶은데, 
 하다 못해 고개라도 젓고 싶은데… 
 
 움직여지질 않는다. 
 몸이 마치 태엽을 미처 감지 않은 오래된 장난감 같아서…….
 전혀, 움직이질 않아.
 
 " 그럼, 아무 거나 사다드릴게요. 괜찮죠? "
 
 미은이 시연의 바로 옆까지 와서 얼굴을 들여다보듯 몸을 내렸다.
 
 " ……고마워. "
 
 시연은 필사적으로 입을 열어 그것만을 토해내듯 말했다.
 
 " 그럼 다녀올게요. 연석아, 가자. "
 
 고개를 끄덕이며 일어선 미은이 
 옆에 서 있던 연석에게 눈짓을 하며 잡아끌었다. 
 
 시연을 혼자 놔두는 게 조금 걱정스러웠지만, 
 연석은 그 말을 따라 일단 병실을 나왔다. 
 지하 식당으로 내려가던 중, 미은이 물었다.
 
 " 언제 왔니? "
 " 좀 아까. 너 오기 바로 전에. "
 " 그 때도 병실에 시연 언니뿐이었어? 동하, 고모님도 계시잖아. "
 
 그 질문에 연석은 병실에 함께 있었음에도
 여전히 시연에게 냉냉한 태도를 견지하고 있는 고모의 모습을 떠올렸다. 
 그 태도에 신경 쓸 수 없을 만큼 지친 모습의 시연. 
 그리고 언제 깨어날 지 기약할 수 없는 동하. 
 진실을 알고 있기에, 그 광경은 연석의 가슴을 참으로 답답하게 만들었다. 
 
 - 진짜로 원하는 건 말이지… 어째서 이토록 갖기 힘든 걸까.
 
 이걸로 정말 끝인 걸까.
 두사람은 지금도 많은 것을 갖고 있지 않은데…
 이런 식으로 끝이 나야만 하는 걸까.
 
 " 담당의사한테 가셨대. "
 " 시연언니, 계속 저러고만 있는 거니? "
 " ……그런 것 같아. "
 
 적어도 연석이 볼 때는 그랬다. 침대 옆 의자에서 움직이지 않는 모습. 
 사흘동안 매일 들렀던 연석이 본 시연은 항상 똑같았다. 
 지친 표정. 그러나 아직은 희망을 버릴 수 없는 듯한. 
 
 침통하게 미은이 고개를 끄덕이고, 한동안 침묵이 계속되었다.
 소녀가 다시금 말을 꺼낸 건, 식사를 거의 마쳐가던 즈음이었다.
 
 " 연석이 너, 자주 오네. "
 " 너야말로. 촬영 같은 것도 있을 텐데……. "
 " 동하를 발견한 사람, 나잖아. 책임감도 있고… 
  그리고 나, 동하 좋아하니까. "
 
 식판에 눈을 둔 채 고개도 별로 들지 않고 있던 연석은 
 마지막 한마디에 갑자기, 그러나 별로 놀라지는 않은 듯한 표정으로 
 시선을 미은에게 돌렸다. 
 조용한 얼굴을 하고 있는 소녀의 목소리는, 
 그럼에도 수줍은 듯 들릴락말락 하는 정도의 크기.
 
 " 나 동하한테… 고백했었다…? "
 " 어? "
 
 연석의 반문에 미은은 조금 더 크게, 조금 더 빠른 말투로 덧붙인다. 
 
 " 좋아한다구, 동하한테 말했어. 
  근데, 좋아하는 사람이 따로 있다고 하더라. "
 " ……. "
 " 생전 첨 한 고백인데, 보기 좋게 채였어. "
 
 쑥스러운 웃음기가 배인 말투에 가득 배인 쓴 맛.
 
 " ……혹시… 그 상대가…… 시연언니야…? "
 
 정곡을 찌르는 미은의 질문에, 연석은 저도 모르게 눈썹을 조금 찌푸렸다. 
 당황하며 망설이는 연석을 보면서, 
 미은은 이제 전부가 확실해졌단 듯 입술을 꼭 다물며 고개를 끄덕인다.
 
 " 맞구나……. "
 
 - 그 사람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너무 상처입을 일을 많이 겪어서 
  어떤 사건이 새로이 자기 앞에 놓이는 게 두려운 것 같아.
 
 '그 사람' 이 시연언니였구나. 
 동하가 절대 포기할 수 없다던 그 사람이 시연언니였구나. 
 
 그럴지도 모른다고, 
 시체 같은 표정을 한 채 달려 온 시연언니를 봤을 때 
 왠지 직감했었는데…….
 
 분명, 시연언니도 같은 감정이겠지. 
 언니도 동하에게 같은 감정을 갖고 있는 거야. 
 보면, 알 수 있다. 그런 거였어. 
 
 그런데, 지금의 상황은 부럽다거나 질투의 감정을 만들지 않는다. 
 그저 두사람이 너무 안됐다는 생각만 들어. 
 그저 안타깝고, 그저 측은할 뿐.
 
 - 포기할 수 없어. 
  …이대로 감정을 밖으로 밀어 두거나 하면 
  평생 후회하고 살 것 같으니까…
 
 이걸로 정말 끝인 걸까.
 두사람은 지금도 많은 것을 갖고 있지 않은데…
 이런 식으로 끝이 나야만 하는 걸까.
 
 
 
 
 
 약간 열린 커튼 틈새로 눈부신 여름 햇살이 스며들고 있다.
 동하가 누운 침대 옆 의자에 앉아 있던 시연은 
 문득 일어서서 창가로 걸어갔다.
 
 여름답게 땀이 흐르긴 하지만, 
 그 땀도 식혀줄 만치 시원한 바람도 간간이 부는, 
 한마디로 젠장 맞게 좋은 날씨. 
 
 침대에 누워만 있기에는 아까운 하늘이 창을 통해 살짝 비치고 있었다.
 힘이 빠진 손으로 가만히 창문을 연다. 아주 조금만. 
 그리고 여지껏 회색의 공간만을 응시하던 눈을 돌려 
 마치 난생 처음 보는 것처럼 아름다운 창공을 바라본다.
 
 푸르다… 그 날의 하늘처럼 푸르다.
 이 세상에 푸른 하늘과 푸른 바다와 
 그리고 그들 두사람 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느껴지던 공간.
 아직도 바로 그 자리에 있는 것처럼 생생하기만 한 순간.
 
 - 신을 벗고 맨발로 밟아 봐요, 진짜 기분 좋아.
 
 그 날 얕은 물에 발을 담그고 미소짓던 그 순수한 모습이 
 바로 눈앞에서 움직이는 것 같은데, 
 실제의 그는 꼼짝하지 않은 채 잠들어 있다… 
 정지화면처럼 움직이지 않는 모습.
 
 믿을 수가 없다… 
 믿고 싶지 않은데… 
 
 그런데, 현실이 그렇단다.
 ……현실은, 그렇단다.
 
 - 우리 둘은, 그냥 두사람일 뿐이야.
 
 그래, 그 말대로였어.
 우리 둘은, 두사람일 뿐인데…
 함께 있어 행복한 두사람일 뿐인데…
 어째서 겁부터 냈던 걸까.
 어째서 싸워 보지 않았던 걸까.
 어째서 말없이 도망부터 쳤던 걸까.
 이런 순간이 돼서야 그 소중함을 알게 되다니…….
 
 언제나 그랬다, 언제나…….
 떠나가 버린다. 
 정말 필요로 하는 건, 잡고 싶다고 속에서부터 원하는 건, 
 모두 애당초 나한텐 과분한 것이란 듯 안타깝게 쳐다보는 사이… 
 날아가 버린다. 
 전부, 날아가 버린다.
 
 사라질까 두렵다. 
 내가 돌아가기도 전에 사라질까 두렵다. 
 마지막 기회도 부여받지 못한 채, 이대로 끝이 날까 두렵다. 
 두려워서, 두려워서, 두려워서…….
 
 - 다시 이렇게… 맨발로 같이 걸어 줄 거죠?
 
 다시 깨어나 준다면,
 이번에야말로 그 약속을 지킬텐데.
 적어도 내 쪽에서 저버리진 않을텐데.
 아니, 포기해선 안돼.
 더 이상 약해져선 안돼.
 
 
 
 눈을 감고 창문 사이로 들어오는 공기를 들이켰다. 
 마치 자신을 다잡으려는 듯 길고, 깊숙히. 
 가슴에 손을 얹고 한껏 힘을 주어.
 
 그래, 희망을 버리지 마.
 동하는 아직 여기 있으니까…….
 다른 모두가 포기해도,
 다른 모두가 깨어나지 않을 거라 말해도,
 나만은, 믿어야 하는 거야.
 나만은.
 
 
 
 ……그 순간이었다.
 
 " ㅡㅡ. "
 
 뭔가가 느껴진 것은. 
 
 ……?
 시연은 가슴에 대고 있던 손을 천천히 미끄러뜨렸다.
 
 " ㅡㅡ. "
 
 알아들을 순 없지만, 분명히… 
 그것은 중얼거림. 신음에 가까운, 너무도 미약한 중얼거림.
 머리를 크게 한 방 얻어맞은 것 같은 느낌이 든다.
 천천히, 몸을 돌렸다.
 
 " 동하……? "
 " ㅡㅡ. "
 
 눈에 들어왔다.
 누워 있는 소년의 입술이 움직이는 것이.
 아주 미미했지만, 동하의 입술은 분명 움직이고 있었다.

 

 

A mother's heart is always with her children.
 어머니의 마음은 항상 그녀의 아이와 함께 있다. 
 
영국 격언

 

 

 

 

 " 고비는 일단 넘겼습니다. "
 
 아마 평생토록 잊지 못할 것 같다. 
 
 " 뺑소니 사고였으니 만약 조금만 늦게 발견돼 처치가 늦어졌다면 
  어떻게 됐을지 모를 일이고, 일단 헬멧의 보호를 받은 덕도 있겠지요. "
 
 동하의 입술이 움직인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동하의 한쪽 손가락 끝이 가볍게 떨리던 순간을 잊지 못할 것 같다. 
 동하의 의식이 돌아 온 순간…… 그리고, 처음으로 동하가 눈을 뜬 순간을 
 절대 잊지 못할 것 같다.
 
 " 어쨌든, 의식이 돌아와서 정말 다행입니다만… 
  환자로서는 이제부터가 시작이군요. "
 
 그 순간 순간의 환희와 안도감은 아마 평생토록 잊을 수 없을 것 같은데… 
 그러나 그런 환희와 안도감은 쉬이 절망으로 바뀔 수도 있단 사실을 알았다.
 
 " 즉, 환자의 왼쪽 팔다리는, 현재 마비된 상탭니다. 
  앞서서도 말씀드렸듯이 오른쪽 머리를 워낙 심하게 다쳤기 때문에……. "
 
 X 레이를 들어 듣는 사람들에게 보여주며 의사가 천천히 말을 잇는다. 
 언뜻 듣기에 인자한 의사의 목소리는 너무도 또렷해서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내용을 믿을 수 없게 만들었다.
 시연 옆에 앉아 있던 고모가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음을 터뜨리는 것이 보인다.
 
 운명은 잔혹해…… 잠시의 평안함도 허락하지 않는다. 
 생각해선 안될 상대를 사랑한 대가치고도 이건 너무, 잔혹하다.
 
 " 다행히도 희망은 있습니다. 
  머리… 즉, 뇌가 회복되고 있으니, 
  이런 경우 보통 뇌의 회복은 3개월 안에 결정되는데 
  환자의 경우는 아마 회복할 것으로 보입니다. " 
 
 어느 쪽이 보다 행복할까.  
 
 " 하지만, 운동신경은 뇌의 회복관 상당한 편차가 있어서ㅡ 
  즉, 환자의 왼쪽 손발이 어느 정도 움직여 줄지는 
  지금으로선 저도 장담하지 못하겠군요.
  ……최악의 경우, 거의 움직이지 않을 수도 있고……, "
 
 어느 쪽이 보다 행복할까. 
 어떤 방향도 완전할 수 없는 기로에서 
 과연 어느 쪽을 선택하는 것이 보다 나은 길일까.
 
 " 운이 좋으면 아무래도 사고 전처럼은 안되겠지만, 
  예, 상당한 회복을 기대할 수도 있겠습니다. 시간은 걸리겠지만…….
  물론 그렇게 되려면 재활에 대한 환자 자신의 뼈를 깎는 의지가 
  필요할 겁니다. 아시겠습니까? "
 
 어느 쪽이 보다 행복할까.
 사랑하는 사람과 헤어져 번민 일체를 잊으려는 쪽이 행복한 걸까.
 아니면… 
 죽을 듯이 힘들더라도 사랑하는 사람 곁에 남아 있는 쪽이 행복한 걸까. 
 
 희망과 고통이 공존하는 쪽이 나을지, 
 아니면 안정과 포기가 공존하는 쪽이 나을지. 
 한치 앞도 보지 못하는 인간에게 있어 그보다 어려운 질문이 또 있을까……?
 
 
 
 동하가 의식을 회복한 후 처음 단 둘이 얼굴을 마주한 것은,
 더위가 제법 가셨다곤 하나 아직 후덥지근한 느낌도 약간은 남아 있는 
 초가을의 어느 날이었다. 
 동하 자신이 의사로부터 스스로의 상태에 대해 통보받은 다음이기도 했다.
 
 상체가 닿는 부분을 20도 정도만 접어 올린 침대. 
 등을 기댄 자세인 동하는 창 밖 너머로 시선을 던진 모습이다. 
 그 눈동자에 담긴 것이 참으로 조용해서 시연은 아무 말도 못한 채, 
 한참을 문가에 서 있을 따름. 
 
 이젠 누군가를 원망할 기운도 없는 듯 힘없이 일어선 고모는, 
 그러나 여전히 아무 말도 않은 채 조용히 시연을 스쳐 방을 나간다. 
 동하에게 무슨 말을 들었던 건지, 
 환자 곁을 지키고 있던 그녀는 잠자코 자리를 비워 주었다.
 
 " ……. "
 
 막상, 단 둘이 되니 아무 말도 할 수 없다. 
 
 줄곧 감정을 억눌러 왔었는데, 
 주변 누구한테도 말할 수 없어서 기쁨도 아픔도 그저 삭이고만 있었는데, 
 막상 둘이 된 이 순간… 말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그저 기다렸다……
 상대가 먼저 말을 꺼내는 순간까지.
 
 " 왜… 계속 여기 있어요. "
 
 소년의 음성은 건조했다. 
 일체의 수분을 배제한 듯 메말라 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 음성을 다시 들을 수만 있다면 
 어떤 것도 감당할 수 있다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막상 소원이 이루어진 지금은 신경을 찌르는 것처럼 아프다.
 
 " 이제 끝났다고 했으면서… 왜 다시 온 거죠? "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으니까. 
 
 " 동정…인가요? "
 
 여전히 창 밖을 응시하는 눈동자는 조용할 뿐. 
 그래서, 대답…할 수가 없다. 가슴이 아파서, 대답할 수가 없어.
 
 " 알고 있죠… 나, 왼쪽 손발이 움직이지 않는다는 거. "
 
 창 밖에서 시선을 떼, 여자를 바라보는 눈에는 
 그러나 원망… 그 이상의 감정들이 마구 뒤섞여 있었다. 
 일견 목소리와 마찬가지로 건조한 듯 보이지만 
 그 속에 오만가지 감정들이 응집돼 있는. 
 보고 있으면 선명하게 각인되어 그대로 내면을 침식해 들어오는…… 눈. 
 
 그 눈을 본 시연은 고개를 숙였다 다시 천천히 들었고, 입을 열어 대답했다.
 
 " ………………알고 있어. "
 " 한데 어째서 여기 있는 거야……. "
 
 동하의 음성이 커졌다. 
 눌러 참고 있는 걸 의지로도 어쩔 수 없이, 내보내는 듯한 소리.
 
 " 그렇게 말없이 가버렸으면서 이제 와서 왜 돌아온 건데…!
  몸조차 제대로 못 가눌 내가 불쌍해서야?! "
 " 동하야……. "
 
 그게, 아냐. 그런 게, 아냐. 
 다시 돌아 온 건, 내가 틀렸다는 걸 알았기 때문이야.
 그 어떤 빛도 파고 들어갈 수 없는 심연이 존재하는 게 아니라, 
 그 어떤 심연도 막을 수 없는 빛이 존재한단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야. 
 아무리 포장하고 또 포장해도, 
 거짓은 진실을 가릴 수 없단 사실을 알았기 때문이야.
 
 " ……그만둬요. "
 
 하지만 지금 자신을 추스리기도 힘든 넌, 내 말을 믿기 힘들겠지. 
 언제든 앞을 똑바로 바라보던 너로선, 
 이미 한번 거짓말을 했던 날 믿기 힘들 거야.
 
 그걸 알면서도 여기 있는 건, 역시 내 이기심 때문이겠지.
 다시 한번 기회를 얻고자 하는 나의 이기심 때문일 거야.
 
 " 남인 주제에… 당신은 우리 아버지랑 결혼했던, 
  그것도 혼인신고도 안 올린 남일 뿐이잖아…!
  당신은 당신 갈 길을 가면 돼… 
  손발 못 쓰는 어린애 따윈 가볍게 웃어넘기면 되는 거야. 
  그냥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다시 시작하면 되는 거야. "
 " 동하야……. "
 
 짐작은 했었다. 동하가 이런 식으로 말할 거란 거, 짐작했었다. 
 스스로 말하듯 아직 어린 주제에 다 큰 어른인 양 
 자존심만은 누구 못지 않은 그의 입에서 저런 말이 나오리란 거, 
 알고 있었다.
 그런데… 알고 있었는데…… 지독히 목이 아파 왔다. 
 아까부터 줄곧 메여 있던 목이 '남'이란 한마디를 듣는 순간, 
 콘크리트를 바른 것처럼 칼칼하니 아파 오기 시작했다.
 
 " 날 조금이라도 좋아했다면, 그냥 가 줘요. 동정 따윈 필요없어. 
  당신의 동정까지 받는다면 내가 너무 비참해져. 원했던 대로 놔줄게요. 
  나… 어린 주제에, 아무 능력도 없는 주제에, 
  이런 몸이 되서까지 당신을 붙들려는 그런 찰거머리는 아니니까……. "
 
 동하는 이를 악물었다. 
 스스로의 대사에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아니, 이를 악물고 있는 자신을 들키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이건 분명히 내가 하고 싶었던 대사다. 아니, 해야 할 말이다. 
 그런 식으로 보지 말아, 그렇게 연민이 가득 담긴 눈으로 보지 말라구요.
 당신이 옳았어요. 
 어떻게 그럴 수가 있냐고,
 이렇게까지 날 아프게 하냐고 그렇게 생각했었는데 
 지금 와서 분명히 알게 됐어, 당신이 옳았어요. 
 
 처음부터 다가서지 말았어야 했지만… 
 이제 와서 알게 된 것도 다행이라 생각해. 
 이런 식으로라도 당신을 보내 줄 수 있어 다행이라 생각해.
 
 일체의 대사를 묻어두었다.
 해야 할 말은 단 한마디로 끝나는 것이므로. 단 한마디면 족한 것이므로.
 
  " …………끝났어요. "
 
 이젠, 정말 끝났어. 
 당신이 원했던 대로, 끝났어요.
 
 상대를 보진 못했다. 
 그렇게까지 무딘 신경을 가진 건 아니니까. 
 
 " ……. "
 
 툭……. 
 
 뭔가가 부서지는 듯한 감각이 느껴진다.
 잠시동안… 그러나 그들에겐, 꽤나 긴 시간으로 느껴지는 분초가 지나갔다.
 무한한 탄력을 지닌 고무줄처럼 길게 늘어나는, 
 기실 겨우 몇미터에 지나지 않으련만 우주공간처럼 급속도로 팽창해 가는, 
 두사람 사이의 거리.
 
 그 공백을 깨고 여자의 목소리가 가늘게 터져 나왔다. 
 
 " ……말했잖아……. "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 같이 걷자고 했잖아… 같이 맨발로 걷자고 했잖아……! "
 
 시연은 눈을 크게 뜬 채 동하를 응시하고 있었다. 
 눈물 같은 건 전부 마른 듯 비치지도 않는데, 
 갸날프게 떨리는 입술 위 자신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눈동자가 
 마치 피를 흘리는 것처럼 보인다. 
 
 하나로 묶여 드러나는…… 안타까움. 두려움. 고통. 
 그리고 희망.
 
 포기할 수 없다고. 
 절대, 포기할 수 없다고.
 
 " 절대 헤어지지 않겠다고… 약속해 달라고 했잖아……. " 
 
 갸날픈 음성이, 그럼에도 고막을 뚫고 깊숙이 파고들어 메아리친다.
 
 그런 식으로 흔들지 말아요. 
 이제까지 그랬듯 내 안을 그런 식으로 헤집어 놓지 말아.
 지금만으로도 충분히 힘들어…… 모르겠어요……?
 
 " ……나가줘요……. "
 
 동하는 말했다. 
 간신히, 있는 힘을 다해, 그렇게 말했다.
 상대에게서 시선을 떼어, 
 이불 위에 힘없이 얹혀 있는 자신의 손만을 응시하며, 그렇게.
 
 " ……. "
 
 시연은 뭐라고 말하려 했지만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소년에게 뻗으려 했던 손이…… 다시금 힘없이 내려간다. 
 앞이 잘 뵈지 않아 손을 뻗을 수도 없다. 
 
 그대로 돌아섰다. 
 천천히 돌아서서… 휘청거리는 걸음으로 걸어…… 
 병실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고……
 
 그리고, 나갔다.
 
 ……그가 바라는 대로.
 
 
 
 병실 문 앞으로 사람들이 바삐 지나간다.
 링거 병을 들고 걸음을 재촉하는 간호사.
 차트를 들여다보며 가고 있는 의사. 
 그리고 휠체어를 타고 있는 환자.
 소독약 냄새 속, 웅성거리는 소음 속.
 
 그녀만이…… 홀로…… 울고 있었다………….
 
 
 
 그리고, 핸드폰이 진동한 건 바로 그 순간이었다. 
 

 

꿈을 꿨어요… 아주 긴 꿈을.
 어딘가에 간 것 같은데… 
 어떤 누군가를 만난 것 같은데…
 또 다른 누군가를 부른 것 같은데…
 지금은 잘 기억나지 않아…….
 
 
 
 두려워하고 있는 듯 보였다. 
 자신의 의지로 이 자리에 왔으면서도 막상 병실 앞에 선 이 순간, 
 중년 여자는 두려움으로 가득한 듯 한참을 망설이고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다. 최악의 상황이었다. 
 혹 아무 일도 없었다면 여자와 여자의 아들의 재회는 
 좀 더 매끄럽고 기쁘게 이뤄졌을 수도 있으련만. 
 그런데 수년만에 돌아온 한국에서 드디어 만나 볼 수 있게 된 
 아들에 대한 소식은, 한마디로 절망적인 것이었다.
 
 
 
 " 무슨 일이죠? "
 
 잠든 동하를 남겨 두는 것이 못내 꺼림칙한 듯 시연을 따라 나오던 고모는, 
 병원 대기실 안에 비치된 소파에 앉아 있던 여자를 보고 이내 굳어졌다. 
 여자, 동하의 엄마가 일어선다.
 
 " 당신… 어떻게…… 시연씨, 어떻게 된 거죠?! "
 " 고모… 오랜만이에요. "
 
 전부 각오한 양 담담하게 여자는 말했다.
 그에 대응하는 것처럼 고모의 음성은 싸늘해진다.
 
 " 무슨 일로 여기ㅡ "
 " ……동하를 보러 왔습니다. "
 " 무슨 염치로……!!! "
 
 고모가 감정을 눌러 죽이려다 실패한 듯한 소리를 질렀다.
 
 " 시연씨, 뭐예요. 이 사람, 왜 여기 와 있는 건데? 
  시연씨 언제 이 사람과 연락했죠? 어떻게 알고서……! "
 " 죄송합니다… 고…… "
 
 사과한 시연이 채 말을 잇기도 전에 여자가 먼저 대답했다.
 
 " 우연히 만났습니다. 
  시연씨에겐 잘못 없어요. 제 쪽이 보고 싶다고 졸랐습니다. 
  염치없단 거 알아요, 압니다. 
  하지만 동하에게 그 동안 연락하지 못한 거, 제 탓만은 아니에요.
  연락이 끊겼던 거예요. 
  동하 아버지가 모든 연락을 끊어서,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었어요. "
 " 일부러 연락을 끊을 만큼의 상처를 당신이 동생에게 주었던 거겠죠. "
 " 왜 꼭 일방적으로 당했을 거라고만 생각하시나요. 
  부부간의 상처는 서로 입히는 겁니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확실히 구분되는 게 아니에요. "
 
 고모가 못마땅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다.
 
 " 제가 잘못했던 거, 인정하지 않는 거 아니에요. 
  죄송하다고 말하러 온 겁니다. 고모께도 동하에게도 사과하러 온 거에요. 
  무슨 소릴 들어도 좋아요. 동하만 만나게 해 주신다면……. "
 " 안돼요. " 
 
 고모의 목소리는 어디까지나 딱딱했다.
 
 " 지금 끔찍한 일을 겪고서 몸도 그렇지만 마음이 상할 대로 상한 앱니다. 
  가뜩이나 그 애한테 오는 모든 사람이 그 애를 어지럽히기만 하는데, 
  또 한번 충격을 주라구요? "
 
 '그 애한테 오는 모든 사람이 그 애를 어지럽히기만 하는데' 란 한마디가 
 옆에서 듣고 있던 시연의 가슴을 무섭도록 아프게 찔러왔다.
 
 " 부탁드립니다. 에미로서 그 애한테 해 준 게 없어요. 
  지금이라도 늦지 않게 해 주세요… 
  한번 얼굴이라도 보게 해 주세요……. "
 
 여자는 고개를 돌린 고모 앞에 깊숙이 고개를 숙였다.
 
 " 부탁드려요……. "
 
 고모는 한동안 침묵한 채 여자를 보려고도 하지 않았지만,
 그러나 결국은 휴우… 하며 무거운 한숨을 토해냈다.
 
 " 가 보세요. "
 " 네……? "
 " 병실에 가 보시라구요. "
 " 고모. "
 " 막을 권리가 나한테 어데 있겠어요… 
  하지만, 동하를 너무 괴롭히진 말아 줘요. "
 " 고마워요, 고모……. "
 " 시연씨, 모셔다 드리세요. 
  동하 지금 자고 있으니까 깨지 않도록 조심해서. "
 " ……예. "
 
 시연은 자신에게 일을 맡긴 고모에게 조금 놀라 멍하게 있다 
 금방 정신을 차려 대답한 후, 동하의 어머니를 병실 앞으로 안내했다. 
 여자는 긴장된 표정으로 시연의 뒤를 따라온다. 
 두사람 모두 걸음이 흔들리고 있는 것은 
 역시 마음의 동요가 반영된 때문이리라. 
 
 병실 앞에서 돌아선 시연과 눈이 마주친 여자는 
 마비된 양 뻣뻣한 걸음으로 문 앞에 다가섰다. 
 
 " 시연씨, 나……. "
 
 결심한 듯 용감하게 손잡이를 잡았던 그녀는,
 좀처럼 그걸 돌리지 못하고 있다가 
 뒤에 선 시연에게 긴장으로 굳어진 얼굴을 돌렸다. 
 그렇지만 시연 역시 그녀에게 해 줄 수 있는 말은 아무 것도 없었고, 
 그 사실을 그녀 역시 알고 있는 듯 다시 앞으로 몸을 돌린다.
 
 " ……. "
 
 딸깍ㅡ 
 손잡이 돌아가는 소리가 유난히 크게 느껴진다. 
 
 동하는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마치 푹 자고 일어나면 멀쩡히 두다리를 지면에 대고 일어설 수 있을 것처럼 
 평화롭게 잠들어 있다.
 
 " 지네 아버지 모습 그대로네요……. "
 
 침대로 다가선 엄마가 침묵 후 처음으로 한 말이었다. 
 그 목소리는 아주 낮았지만 병실의 정적 속에 아주 뚜렷이 들려왔다. 
 아주 조금 열려 있는 커튼 틈 새로 가늘게 새어 들어오는 한줄기 빛이 
 환자의 얼굴을 하얗게 비추고 있다.
 
 엄마는 천천히 손을 올려 잠든 아들의 얼굴에 갖다대려 했다. 
 평온해 보이는 이마와 감겨 있는 눈꺼풀, 
 긴 속눈썹 아래 선이 명료한 콧날과 창백해진 뺨과 허옇게 변한 입술을 
 만져보려 했다.
 
 하지만 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허공에서 가늘게 떨린 손은 이내 중심을 잃은 듯 아래로 늘어져 내렸다. 
 그리고 대신 자신의 입을 가리기 위해 올라간다. 
 입을 손으로 가린 채 그녀는 침대에서 떨어져 문으로 몸을 돌렸다.
 
 " 갈게요. "
 " ……. "
 " 나, 여기 설 자격이 없어요. 동하 옆에 붙어 있을 자격이 없어요. 
  볼 면목이 없어요……."
 
 시연은 말을 찾을 수 없어 침묵했다. 
 
 알 수 없었다. 
 과연 동하 옆에 이 분이 모습을 드러내는 것이 나을지, 
 아니면 그냥 없었던 일로 돌리는 게 나을지 그녀로선 알 수 없었다. 
 
 만일 사고가 없었다면 이렇게 돌아서려는 여자를 만류했겠지만
 지금에 와서는…….
 
 그래서 그녀는 여자가 문 쪽으로 걸어가는 걸 
 그저 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순간, 등에 싸늘한 감각이 있었다. 
 그것을 느낀 건 시연만이 아니고 
 막 문을 열려고 하고 있던 엄마 또한 마찬가지였다. 
 두사람은 흠칫 몸을 떨며 침대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 …………. "
 
 역시, 그랬다. 
 
 동하가 깨어나 있었다. 
 약간 들어올린 침대 머리맡에 기댄 채, 눈을 뜨고 있었다. 
 자신이 보고 있는 걸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렇게 앞을 보고 있었다.
 
 …………정적.
 
 숨이 막힐 듯한 침묵이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고 지나간다. 
 마치 포즈를 누른 정지 화면처럼 세사람 모두 굳어져 있었다. 
 전부가 멈춰버린 듯한, 그런. ㅡ그리고. 
 
 " 엄……마…………? "
 
 겨우 목구멍을 비집고 나온 듯 가느다란 소리가 동하의 입에서 흘렀다. 
 정말로 새 나온 것처럼 그렇게 작은 소리가 
 병실 안 무거운 공기를 뚫고 들려왔다. 
 작지만 명료한 소리가.
 
 그 소리에 반응한 것처럼, 막 문을 나가려던 엄마의 몸이 돌아섰고… 
 그리고 튕겨 나온 것처럼 소년에게 걸어가고 있었다. 
 중간에 선 시연을 지나 정신없이 걸어간다.
 
 마치 나무토막이 된 양 굳어버린 동작으로
 그녀는 자신을 부른 아들 앞에 섰다. 
 
 " 엄마… 맞아요? "
 " …동하야. "
 " 맞아요……? "
 
 확인이 이어진다.
 
 " 미안……. "
 
 대답은 흐느낌이 섞인 사과의 말. 
 8년의 공백동안 쌓인 감정을 한데 모은 사과의 말. 
 
 그리고 그에 이어지는 대답, 8년의 공백동안 쌓여버린 감정이 
 소년의 입을 뚫고 나오고 있었다.
 
 " 왜요. 왜……. "
 " 미안… 미안해…… 동하야…… 미안해……. "
 
 여자는 반쯤 흐느끼면서도 
 이불 위에 놓여 있던 소년의 오른손에 자신의 손을 갖다댔다. 
 그것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닌, 
 스스로 막을 수 없을 만큼 자연스레 나온 동작이었다. 
 
 그리고 그 손이 닿자, 
 마치 막혀 있던 둑이 터진 것처럼 동하의 입에서 말이 흘러나오기 시작했다.
 
 " 왜 이제 온 거예요, 왜 하필 이제서 온 거예요, 
  왜 하필 이렇게…… 한심한 모습을 하고 있을 때…………. " 
 
 여자는 아무 말도 못한 채 그저 몸을 굽혀 
 붙들고 있던 아들의 손에 자신의 얼굴을 갖다댔다.
 아까부터 흐르고 있던 눈물로 온통 젖어 있는 얼굴을.
 
 " 미안해…………. "
 
 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그리고 돌아서서 병실을 나왔다. 
 고요함 속, 간간이 흐느낌만이 들리는 병실을. 
 막 닫힌 문에 힘이 빠진 몸을 기댄 채, 그녀는 가만히 눈을 감았다. 
 
 
 ……연인도 해 줄 수 없는 것을, 어머니는 할 수 있다.

 

 

 

  So never mind the darkness  
 We still can find a way      
 'cause nothin' lasts forever  
 Even cold november rain     
 
 Don't ya think that you need somebody 
 Don't ya think that you need someone
 Everybody needs somebody
 
 You're not the only one
 You're not the only one
 
 
 그러니 어둠을 겁내지 말아요
 우리는 아직 길을 찾을 수 있는 걸
 그 어떤 것도 영원토록 지속되진 않는 거니까
 차가운 11월의 비조차도 말이에요
 
 당신이 누구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지 않나요
 당신이 누군가를 필요로 한다고 생각지 않나요
 모든 사람은 누군가를 필요로 하죠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
 당신만 그런 게 아니에요
 
  Gun's N Roses/ November Rain

 

 

 

 " 자격지심이었어요. "
 
 하늘은 아주 맑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비가 쏟아질 정도로 어둑하지도 않은 
 중간색을 띄고 있었다. 
 병원 뒤편에 위치한 풀밭에는 회복기에 접어든 환자들과 그 가족들, 
 그 밖의 여러 사람들이 한데 섞여 산책을 하거나 이야기하고 있다. 
 동하의 엄마와 시연도 그 속에 섞인 모습으로 벤치에 자리하고 있었다.
 
 " 자격지심이었어요. "
 
 라고, 중년여자는 조용히 말했다. 
 그 한마디에 내포된 진심을 파악하기에는 너무도 무미건조한 어조였다. 
 뭘 말하고 싶은 건지 알 수 없었다.
 
 " 가끔 생각해요. 옛날로 되돌아갈 수 있다면 과연 나는 다른 선택을 할까.
  지금 이 자리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가고 있을까. 
  그렇지만, 어차피 되돌릴 수 없으니 소용없는 생각이지요. "
 
 그녀, 동하의 엄마가 병원에 들른 지는 꼭 이주째였다. 
 
 " 시간이 흘러야만 알게 되는 사실이 있나 봐요. 
  자신에 대한 반성 같은 건데… 
  그렇지만 되돌릴 수 없는 시기에야 알게 되는. 
  동하 아버지와 갈라설 때의 나는 
  더 이상은 어쩔 수 없을 거라 생각했었어요. "
 " 왜… 동하 곁에 남아 주시지 않으셨나요. "
 
 말에는 원망조가 섞여 있었다. 
 
 시연은 알고 있었다. 
 동하가 얼마만큼 힘들어했을지, 
 완전하진 않을지언정 적어도 다른 사람들보다는 알 수 있었다. 
 그녀 자신이 버림받았던 사람이었다. 
 처음부터 낳아준 사람으로부터의 '정'을 받지 못한 그녀는 
 그나마 상처가 덜했을 지도 모른다. 
 쉬이 포기할 수, 아니 포기라는 자각조차 하지 못한 채 성장하며 
 상황을 받아들인 그녀는 그래도 나았다. 
 가지고 있었던 것, 잃어버릴 거라 생각도 못했던 존재가 자신을 떠나가는 
 아픔을 겪었던 소년보다는 나았다. 
 
 그렇지만 상실감은 마찬가지다. 
 그래서 떠나간 사람에 대한 원망의 감정을 주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 이기적이었거든요, 나. 내 생각만 했어요. 
  동하 아버지와 결혼했을 때, 그는 자기 집안의 독자였고, 
  여러가지 점에서 참 버거웠어요. 
  시집살이를 해서 그런 것만은 아니고… 가장 힘들었던 건, 
  그게 우리 아버지가 아프신 와중에 쫓기듯이 한 결혼이었다는 거였죠. 
  아버진 암이셨어요. 3년이나 버티셨지만… 3년이 끝이었죠. 
  딸은 그래요, 같은 자식인데도 해드릴 수 있는 것에 한계가 있어요. 
  그걸 알았을 때 너무너무 분하고 억울했지요. 
  차도가 있었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실은 눈속임이었다는 걸 알게 된 것도 그렇고……. 
  물론 아버지가 돌아가신 건 그의 탓이 아니었죠. 
  하지만 내 의식이 많이 변했던 탓일까요. 
  신경이 날카로워져 있었고, 그게 시간이 갈수록 짙어져서… 
  마음먹기에 달린 문제가 아니냐고 그는 말했지요. 
  그렇지만 그게 아니었어요, 나한테는 그런 문제가 아니었어요. "
 
 전부를 얘기하기에는 사연이 너무 길었던 모양이다. 
 그녀는 이야기를 멈추고 뭐라고 말해야 할지 숨을 고르는 듯 보였지만, 
 결국 쓰게 웃었다.
 
 " 하지만 결국 다 자격지심이었던 거죠. 
  아주 사소한 문제에서부터 골이 깊어져 갔지만 결국은,
  다 자격지심이었던 거예요. "
 " ……. "
 " 동하는, 새 길을 가기 위해서 내가 포기해야 할 첫번째였달까…… 
  모든 어머니들이 다 절대적인 모성애를 가질 수는 없는가 봐요. 
  자신의 다른 자아 전부를 포기하면서까지 
  동하를 내 옆에 둘 수는 없었어요.
  뭣보다 그와의 골이 너무 깊어졌었고……. 
  그 때의 결정을 후회하는 건 아니에요, 하지만……. "
 
 많이 괴로웠어요.
 
 …라고, 쓰여진 얼굴이 시연의 시야에 비쳤다. 
 시연은 동하가 아버지를 쏙 빼다 박았다고만 생각했었는데, 
 지금 보니 엄마도 많이 닮았단 사실을 깨달았다. 
 지금 눈앞에 보이는 얼굴은, 
 동하가 아주 가끔씩 비치는 쓸쓸한 표정의 요소를 아주 많이 갖고 있었다. 
 언제였던가… 저 표정을 처음 본 것은. 그래, 그때였다.
 
 - 재미없을 거예요. 전부 한사람 사진뿐이니까. 
  아, 참… 아버지 것도 있지… 눈치채셨겠지만… 엄마 건 없어요. 
  ……아버지가 전부 버렸으니까.
 
 차분히 가라앉은 눈. 낯선… 조용한 얼굴. 
 무표정한 듯, 그러나 그 자체만으로도 너무나 많은 걸 담고 있어 
 사람의 마음을 아리게 만드는 저 표정.
 
 그래, 그 때였다…… 저 표정을 처음으로 본 것은.
 
 " 그런데 동하는, 이해해 주더군요. 
  용서해 줬는지까진 모르지만…… 이해해는 주더군요. 
  그 애가 그러더라고요. 어쩔 수 없었을 거라고요. 
  엄마도 많이 괴로웠을 거라고요……. "
 " ……. "
 " 그러면서 그 애… 시연씨 이야기를 했어요. "
 
 아주 살짝 몸을 떨었을 지도 모른다. 머리가 조금 흔들렸다. 
 그러나 그런 하나하나에 일일이 놀라고 번민하기에는 
 너무 지쳐 있었나 보다. 
 스스로도 아주 많이는 놀라지 않는 자신에게 외려 놀랐다. 
 그저 차분히 상대를 바라봤을 뿐.
 
 " ……놀랐어요. 예상치도 못했던 말이라……. 
  그 애, 시연씨를 좋아했다고 하더군요. 여자로… 좋아했다고. "
 
 그런가. 좋아'했'다는 걸까. 그 애에겐 과거형이 되 버린 걸까. 
 그런 거니. 너한테는 이미 지나가 버린 일에 불과한 거니.
 나는 노력해도 불가능했는데, 
 너는 그토록 빨리 상처를 아물릴 수 있었던 거니. 
 상처를 만든 나나 다른 사람들이 굳이 처방전을 갖다주지 않아도 
 스스로를 치유할 수 있었던 거니.
 
 " 시연씨는 어떤가요? 동하……. "
 " 좋아했습니다……. 아뇨, 지금도 좋아합니다. "
 
 담담하게 말했다. 심장이 저린 만큼, 담담하게 말했다. 
 숨겨서 무엇하겠는가. 그것이 자신인 것을. 
 욕을 먹더라도 별 수 없을 솔직한 자신의 감정인 것을. 
 
 " 그렇군요. "
 
 잠시 생각하는 듯했던 여자는, 입술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입을 다물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 ……시연씨를 나쁘게 생각한단 뜻은 아니에요. 
  그저 껄끄럽지만 물어야 하겠다 싶어서……. 
  저… 두사람 사이에, 필요 이상으로…… 
  그러니까, 넘지 말아야 할 선을 넘었다거나 그런 건 아니죠? "
 " ……? "
 
 그건 예상치 못한, 한마디로 너무나 단도직입적인 질문이었기 때문에 
 시연은 저도 모르게 앞에 선 여자의 얼굴을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었다. 
 
 " 같이 살았다고 했었죠. 동하와……. "
 " 아닙니다. "
 
 말했다고 해도 그런 질문이 나올 만큼의 대화를 했다는 건가…….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 수년간의 공백에도 불구하고 
 단 일주일 동안 그런 속 깊은 얘기를 할 수 있을 만큼의 존재였던 걸까. 
 그래, 그랬어. 역시 동하에게 필요한 건…….
 
 " 그런 일, 없었어요.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억지로 미소지어 보였다. 
 
 이해한다. 
 이해할 수 있다. 
 자신의 일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지극히 통속적인 상황이 되 버리기 마련이므로. 
 그 누구라도 다를 바 없다. 
 
 그리고 어머니로서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으리라. 
 아무리 오랫동안 얼굴을 마주하지 않았더라도, 어머니는 어머니인 것이다. 
 아들이 가장 소중할 수밖에 없는 어머니인 것이다.
 그리고 아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 역시 어머니일 테지.
 
 " 역시 내가 말을 잘못 꺼낸 것 같네요. 
  두사람 사이에 그런 일이 없기를 바란 건 사실이지만… 
  나, 그렇다고 해서, 시연씨를 이해 못한단 얘기는 아닙니다. 
  8년동안 내 의식도 많이 변했으니까요. "
 
 미소로 감추려 해도 굳은 얼굴은 드러나는 모양이다. 
 수치스럽다기보다, 죄송스럽다기보다, 그저 쑤셔왔다. 
 그 통증을 연하게 만들기 위해 몸을 굽혀, 
 실제로 존재하지 않을 지도 모를 눈앞의 빈 공간을 응시한다.
 
 " 동하는 말이죠… 시연씨를 정말 좋아하고 있더군요. 
  그 애가 말했어요, 더 이상 시연씨를 보지 않겠다고. "
 
 스스로 만들고 스스로 받아들인 통증이지만, 
 그래도 아픈 것은 아픈 것일까. 
 
 " 그래서 내가 물었죠, 그게 정말로 네가 원하는 거냐고. 
  정말로 괜찮아질 자신이 있는 거냐고. 그 애는……. "
 
 바람이 불었다. 
 어느 새 완연해진 가을을 실감케 하듯, 더운 기는 조금도 섞여 있지 않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고 손끝부터 그 존재를 알려온다.
 
 " 아니라…고, 대답하더군요……. "
 " ……. "
 
 전신을 훑고 지나가는 서늘한 감각에 몸을 움츠린 시연은 
 그제서야 빈 공간에서 눈을 떼어 여자를 마주봤다. 
 그리고, 그녀가 아주 부드러운 눈을 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는다.
 
 " 지금 남편과 만나서 결혼하기까지 참 많이 망설였어요. 
  그… 나보다 8살 연하에요. 
  어쩌다 보니 가까워졌고 프로포즈까지 받게 됐지만ㅡ. 
  나는 또 상처 입을까 겁이 났어요. 
  이미 한번 사랑에도 인생에도 실패해서, 
  더는 자신을 망치고 싶지 않았던 거죠. 
  나이 차도 그렇구, 게다가 그는 외국인이구……. 
  전에 사랑 없는 결혼을 했던 것도 아닌데도 결국 깨져버렸는데, 
  그런 주제에 이런 악조건을 버틸 수 있을까. 
  현상유지로 충분하다 생각했어요. 
  사랑이 꼭 필요한 건 아니라고요. 그 생각을 남편에게 말했죠. 
  그가 대답하더군요. 한번 실패했다고 해서 뒤로 물러서면 안된다고요. 
  실패했으니 더 성숙할 수 있는 거고, 
  실패했던 사람이기에 이번에야말로 행복해질 권리가 있는 거라고요. 
  그리고… 적어도 나는, 그의 말을 듣길 잘했다 생각해요. "
 
 그랬다. 여자의 눈은 부드러웠다. 
 벽을 두지 않은 곧은 시선이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없이 부드러웠다. 
 그리고 그 시선은 이 순간, 자신을 향해 있다.
 
 " 그러니까 적어도 난, 시연씨를 책망할 권리도 없고 책망할 생각도 없어요. 
  다만 좀 더 먼저 알았으면 좋았을 걸.
  동하가 이런 일을 당하기 전에 말이에요……. "
 " 제 탓이에요. 저 때문에 생긴 일입니다. "
 
 기도하듯 한데 모아 그러쥐고 있던 시연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 그거야말로 시연씨 자격지심이에요, 그런 생각은 하지 마세요.
  엄마로서 아무 것도 못해줬던 나보다 더한 죄인이 있으려고요. 
  다만 내가 묻고 싶은 건…… 시연씨. 
  지금, 동하에게서 떠나기를 원하시나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미뤄두고, 지금 바로 떨어지길 원해요? 
  두사람의 감정 문제와는 별개 이야기로, 그러고 싶다고 생각해요? "
 
 목이 막힌 것 같았다. 
 
 그것은 안타깝고, 슬프고, 그러면서도 버릴 수 없을 만큼 사랑스런 감각. 
 잠시동안 코드를 뽑아두고 있었던 무언가에 
 다시금 에너지가 흘러 들어와 자신을 충만하게 만드는 그런 감각. 
 
 나는 살아 있구나, 
 나는 이렇게 살아 있구나, 
 나는 이래서 살아갈 수 있구나, 
 스스로의 존재를 인식하게 만드는 바로 그 감각. 
 
 누르려 해도 누를 수가 없는. 
 막으려 해도 막을 수가 없는. 
 
 어째서, 어느 새 난 이렇게 된 걸까. 
 
 희미한 상처자국으로 그칠, 그런 사랑은 이제 할 수 없는 것이다. 
 적어도 이번에는, 이번만큼은… 내 쪽에서 버릴 수가 없어.
 
 모두가 손가락질한다 해도, 모두가 돌을 던진다 해도, 
 아니 세상이 완전히 뒤집혀 버린다 해도, 그것만은 불가능하다……. 
 절대, 절대, 불가능해……!
 
 " 아니요……. "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강해진다는 건, 노력한다고 되는 것이 아니었다. 
 그저 자신이 약한 존재란 사실을 부정하지 않는 것만으로도 족한 것을. 
 의지가 아닌 이해인 것을. 이해에서 우러나온 믿음인 것을. 
 
 믿어도 괜찮을까. 
 다른 아무도 인정해 주지 않더라도 나, 이제 믿어 보고 싶어.
 
 " 저는 동하 곁에 있고 싶습니다. "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내가 필요로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 동하가 저를 원치 않는다 해도, 저는 지금 동하 곁에 있고 싶습니다. 
  동정도 아니고, 책임감만도 아니에요. 그저 그러고 싶어서……. 
  그것이 설령 잘못된 일이라 하더라도, 한번만 더 기회를 준다면… 
  한번만이라도……. "
 
 어떤 결과를 맞더라도 상관없어…… 그 사실 하나로 충분하다, 이젠.
 
 " …그래요. "
 
 한숨을 머금은 대답이 동하의 엄마에게서 흘러나왔다.
 
 " 솔직히 말하면, 저는 두사람이 계속되는 걸 원하는 건 아니에요. 
  동하를 위해서만이 아니라 시연씨를 위해서도……. 
  혼인신고는 안 했다 했지만 
  그래도 시연씨는 엄연히 동하 아버지랑 결혼했던 사람이니까. 
  편견이란 장벽은 쉽게 무시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두사람 모두 더 이상 상처입지 않았으면 하니까. 
  그렇지만, 그렇지만 동하, 지금 너무 위태롭게 보여서… 
  지금 이런 식으론 위험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그 애… 시연씨에겐 말하지 말라고 했지만……. "
 
 숨을 들이키는 것처럼 여자는 말을 이었다.
 
 " 동하… 재활치료센터로 옮긴다더군요. "

 

 

 아직 비가 눈이 되기엔 이른 시기인 모양이다. 
 작년, 언제 처음 눈이 왔었지?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제까지 눈이 왔었던가도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알고 있는 건 금방이라도 비가 내릴 듯 하늘이 흐려져 있단 사실. 
 그리고 기억하고 있는 건 그 언젠가의 눈의 기억.
 
 작년 크리스마스의 눈의 기억. 
 한사람의 가족을 잃고 다른 한사람의 가족을 맞아들인 
 그 크리스마스의 눈의 기억. 
 마음을 전할 선물을 주고받은 그 날 내리던 눈의 기억. 따뜻했던 기억.
 
 아직 11월 초. 
 아직 눈이 오려면 멀었다…….
 
 고모는 자신 때문에 그 동안 챙기지 못한 당신의 집을 돌보러 
 잠시 부산에 돌아갔다. 
 머잖아 있을 수능시험을 치룰 둘째아들이 저으기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수능만 끝나면 돌아오겠다고 했다. 
 어차피 선규도 서울로 대학을 진학할 예정이라며, 
 형들과 함께 지낼 작은 평수의 아파트 전세도 이미 계약해 두셨다고.
 
 " 동하야, 나 잠깐만 뭣 좀 사러 갔다올게. 
  참, 아까 친구 온다고 전화 왔었는데……. "
 " 알았어요, 다녀오세요. "
 
 고모 대신 수족처럼 동하 곁에 붙어 있는 사람은 다름 아닌 엄마였다. 
 8년 동안이나 그리워했던 엄마. 이런 식으론 만나고 싶지 않았던 엄마. 
 정말이지 이런 식으론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아니, 이제 엄마에 대한 미련에서 완전히 벗어나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런데,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나 그리웠던 모양이다. 미치도록 그리웠던 모양이다.
 
 
 
 그 날… 눈을 떴을 때. 
 처음 비쳤던 건 옆 윤곽뿐이었음에도 금새 알아 볼 수 있었다. 
 사진을 빼곤 8년만에 처음이었는데도 불구하고, 많이 변했음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엄마ㅡ라고 불러 버렸던 것이다.
 
 아주 많이 울었다. 
 눈물 흘리는 따위 바보짓인 거 아는데… 
 언젠가부터 정말로 바보가 된 모양이었다. 
 제어할 수 없는 자신을 그저 내맡긴 채 눈물이 흘러나오도록 내버려뒀다. 
 엄마도 같이 울었지만 그 얼굴은 잘 보이지도 않아서
 거의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산가족 상봉하는 것처럼 엉엉 소리내기엔 너무나 힘이 없어서 
 소리도 내지 못하고 두사람은 그저 물기만 흘려 보냈다.
 
 눈물이 마른 다음, 많은 얘기를 했다. 
 아들은 엄마가 없던 8년간의 이야기를, 
 엄마는 아들이 없던 8년간의 이야기를. 
 아버지에 대해… 
 3년 전에 돌아가신 할머니나 고모, 그리고 고종사촌 형들에 대해…
 엄마의 새로운 가족, 자신의 동생일 수도 있는 귀여운 여자아이에 대해. 
 
 - 그래도 네 자리는 항상 남아 있었어.
 
 다이어리에 끼워둔 사진의 마지막 한 장을 뚫어지게 보고 있는 아들에게 
 엄마는 말했었다. 
 아들도 자신이 어느 날 날려보낸 그 조각들이 
 자신의 마음까지 가져가진 못했음을 알고 있었다. 
 
 결국 인화된 종이 한 장은 상징 이상의 것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무형무색, 보이지 않는 어떤 것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사람에 대해 이야기했다. 
 너무나 소중했지만, 이제는 잊기로 결심한 그 사람에 대해서.
 
 - 좋아했어요.
 
 라고. 
 그 말에 엄마는 놀라는 듯 보였지만 그 놀람은 생각보단 경미한 것이었다. 
 마치 조금은 짐작하고 있었다는 듯,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말했다.
 
 - 그게 그런 뜻의 말이었구나.
 - 무슨…….
 - 미국서 만났을 때, 시연씨가 그러더라. 
  너와 계속 같이 지낼 수도 있었는데 그걸 파괴한 게 자신이라고. 
  무슨 말인지 그 땐 몰랐는데…….
 - …….
 - 그런 뜻이었구나… 그랬구나.
 - ……어차피 다 지난 일이에요.
 - ……?
 
 동하는 자조기가 섞인 미소를 떠올렸다. 
 그녀에 대한 감정은 처음엔 가족이었고, 
 그 다음엔 그 이상이 돼 버렸지만……. 
 아니, 처음부터 지금의 감정은 숨어 있었던 거겠지. 
 스스로 봉인해서 묻어 두었을 뿐. 
 그래, 최초부터 좋아했었지만…….
 
 - 이젠 남이니까. 이젠 더 안 볼 거에요.
 
 엄마는 아들의 얼굴을 붙들고 한참 들여다보더니 나직한 질문을 던졌다.
 
 - ……그게… 네가 원하는 거니?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그래야 한다고 생각하니까. 
 그래야 해요. 더 이상 그녀를 상처 입힐 수 없어. 
 그녀를 지켜주긴 커녕 나… 줄곧 상처만 입혀 왔는 걸. 
 첨부터 그랬어요. 
 나, 정말로 사랑하지만… 
 내 나이가 아무리 어려도 앞으로 그보다 더 사랑할 사람을 만나지 못할 거란 
 정도는 알지만… 그래도 할 수 없어. 
 
 그녀를 만나서 내가 그녀에게 준 건 처음부터 끝까지 상처 뿐이었는 걸. 
 
 지켜주고 싶다고, 시간의 여백정도는 얼마든지 따라잡아서 
 누구보다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생각했지만. 
 첫사랑인 선배란 사람도, 두번째 사랑이던 아버지도, 
 그들로부터 받은 상처들도 전부 덮어버릴 수 있을 만큼 
 행복하게 해 주고 싶다 생각했지만. 
 
 결국 내게 있던 건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보면서도 모르고 있던 
 쓸모없는 눈과 마음 뿐. 
 결국 지금 내게 남은 건 이토록이나 한심한 몸 하나인 걸요. 
 그녀에게 있어 짐,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닐.
 
 - …….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 딱한 것…….
 
 아들의 얼굴을 손으로 쓸던 엄마의 입에서 한마디가 흘러나오고, 
 그녀는 어미새가 알을 품는 듯한 동작으로 동하를 부드럽게 안아서 
 토닥거렸다.
 
 - ……딱한 내 새끼…… 불쌍한 내 새끼…….
 
 체온이 따뜻하다. 
 좋은 냄새가 났다. 달콤하고 부드러운 향기. 줄곧 그리워해 왔던 감각. 
 그런데, 이거 하나면 정말 행복할 것 같았는데… 
 자신은 어느 새 또 다른 향기를 생각하고 있다. 
 제어할 수 없을 만큼 그리워하고 있다. 
 이성 따윈 순식간에 마비시켜 버릴 것 같던 그 향기. 
 평생 가도 잊을 수 없을 향기.
 
 엄마는 어쩌면 아들의 마음을 읽었을 지도 몰랐다. 
 피의 연결이란 그런 힘을 갖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자신조차 모르고 있던 미세한 흔들림을 알아차린 것인지. 
 그녀는 토닥이던 손을 멈췄다.
 
 - 자신 있니…?
 
 나직하고, 강요 따윈 실리지 않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병실 안 공기는 밀도를 키웠다.
 …지독히 무겁고 저리도록 아파. 
 어딘가에서 끊임없이 피가 흘러나오는 것처럼 참담하고 고통스런 기분. 
 부자유스런 몸이 다시금 쑤셔 와 이를 아려 물었다.
 
 - 괜찮아질… 자신…… 있는 거니? 
 
 현기증이 일면서 머리 한구석이 욱신했다. 
 그래, 자신이 다친 건 머리였다.
 움직이지 못하는 건 몸이지만 다친 건 분명히 머리였어. 
 회복됐다곤 하지만 겨우 몇 달이 지난 지금, 아무래도 예전 같진 않을 테지. 
 그래, 지금 내가 흘러나오는 대로밖에 말하지 못하는 이유는 
 다쳤기 때문이야. 
 좀 더 흘러가면 아무렇잖게 말할 수 있을 테지. 
 그러니까 지금은, 그냥 나오는 대로 받아들여… 그냥.
 입술이 움직이는 대로 내어 맡겼다.
 
 - …………없어요.
 
 솔직히 자신 없어요. 그럴 자신 없어. 
 시늉은 할 수 있을 지도 모르죠. 그래요, 그런 척 하려는 거에요. 
 마음으로부터 그녀를 잊다니, 그건 의지와는 별개의 영역인 걸. 
 그러고 싶어도 안 되는 일이 세상엔 있다는 거, 알게 해준 사람인데. 
 치워버릴 수도, 외면할 수도 없는 감정이 있단 사실을 알게 해 준 사람인데. 
 그래도 놓아줘야 해요, 그것만이 내가 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인 걸.
 
 ……그것뿐인 걸.
 
 
 
 생각에 잠겨 있는 것조차 고통스러워서 
 동하는 움직일 수 있는 오른 팔을 휠체어 쪽으로 뻗었다. 
 단지 그것뿐인데도 땀이 흘러내릴 정도로 버겁다. 
 자신이 이렇게까지 짐짝처럼 느껴지긴 처음이었다. 
 마비된 몸 왼쪽이 고철을 달고 있는  것처럼 무겁다. 
 그래도… 차라리 몸이 힘든 게 낫다고 생각했다. 
 
 다른 일체의 생각을 잊고 싶다.
 
 " 강동하! "
 
 때마침 병실에 들어서던 연석이 놀라 달려왔다.
 
 " 지금 뭐 하는 거야…! 혼자 움직이다니, 너 돌았어?! "
 " 왔어. 아, 시험이랬지. 잘 쳤냐? "
 " ……. "
 " 어이, 좀 도와 줘. "
 
 연석은 잠시 황당한 표정을 한 채, 싱긋 웃는 동하를 보다 
 이내 답답기가 섞인 한숨을 푸욱 하고 내쉬곤, 
 안간힘을 쓰는 동하를 몸으로 받치다시피 부축해서 휠체어로 옮겼다. 
 동하가 한쪽 팔다리를 거의 쓰지 못하는 탓에 
 그 작업을 마치는데는 꽤 오랜 시간이 걸렸고, 
 겨우 휠체어에 앉았을 땐 동하 뿐 아니라 도운 연석의 얼굴과 목에도 
 땀이 흐르고 있었다.
 
 " 훗, 꼴이 말이 아니구만. 앞머리가 거슬리네. 좀 잘랐음 좋겠는데……. "
 
 말수가 적은 친구의 입에서 이런 식으로 말이 길게 계속해서 나올 때는 
 오히려 주의해야 한다. 
 거추장스런 듯 앞머리를 쓸어 올리는 동하를 보며, 
 연석은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굳어지는 걸 감추려고 애썼다.
 움직여지는 한쪽 팔에 한껏 힘을 주어 휠체어를 움직이려 노력하는 친구에게 
 묻는다.
 
 " 나가려구? "
 " 응. "
 
 연석은 동하의 휠체어를 밀어 병원 복도로 나갔다.
 
 " 참, 7차전 할 시간이지. "
 
 병원 휴게실 안 대형 TV 앞에 사람들이 가득 모여 있여 
 야구 경기 - 한국시리즈 - 를 시청하고 있다. 
 연석은 동하의 눈짓에 따라 그쪽으로 휠체어를 가져갔다.
 
 " 나 넘 놀랬대니깐? "
 " 아아, 두X답지 않다구? "
 " 두X 팬으로서도 이런 모습 첨이다. 
  첫 세 겜을 내리 지고도 여까지 오다니, 정말 언빌리버블이야. 
  두X은 항상 한번 무너지면 그걸로 꽥이었는데. "
 " 현O, 벙쪘을 걸. 적어도 6차전에선 쫑날 거라 생각했을 텐데.
  근데 오늘 선발 누구지? 어디 보자……. "
 " 조계X. 좀 무릴 텐데. 나이가 있잖아. 
  4차전 때 나오고 오늘 또 뛸 수 있나? "
 " 그러게……. "
 
 게임이 시작되었다. 
 2-2로 팽팽한 분위기가 이어지던 4회 말, 
 응원하는 팀이 스리런 홈런을 얻어맞는 걸 보고 연석은 절규했다.
 
 " 돌겠다, 정……. "
 
 머리를 싸매고 괴로워하던 연석은 
 문득 휠체어에 앉아 있던 동하를 발견하고 그대로 동작을 굳혔다. 
 아까까지 TV 스크린에 집중하는 듯 보이던 두 눈이 공허하게 흐려진 얼굴은, 
 사람들의 환호, 또는 경악에 묻혀 잘 드러나지 않고 있다. 
 하지만 그건 실로 찰나였고 그는 이내 여느 때의 표정으로 돌아왔다.
 
 
 
 응원하는 팀의 패배로 게임이 끝나는 걸 확인하고 
 두사람은 복도 끝에 위치한 계단 옆 창가자리, 아무도 없는 장소로 향했다. 
 
 창문 너머로 밖을 내다보며 동하가 생각난 듯 말했다.
 
 " 나 낼 옮겨. "
 " 들었어, 어머니한테. "
 
 연석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어색함을 느끼며 대꾸했다. 
 생각해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 일이다. 
 2년에 걸쳐서 연석은 동하의 엄마를 두명이나 만났던 것이다. 
 그것도 그 바로 전까진 있지도 않았던 어머니란 사람을 연달아 둘씩이나. 
 그러고 보니, 다른 한명이 보이지 않는다.
 
 " 고모님, 부산 가셨다며. 그럼 너, 죽 어머니 '한분'하고만 있는 거냐? "
 
 '한분'에 자신도 모르게 힘을 주며 연석은 물었다.
 
 " 응. "
 " 둘이서만? 내내? "
 " 오지 말랬어, 내가. "
 
 항상 그랬다. 
 항상 미리 읽어서 자신이 미처 묻기도 전에 
 민망할 만큼 직선적으로 대답하는 친구. 
 다치고 나서도 저 얄미운 성격은 변함없는 모양이다.
 연석은 이제 그런 친구의 태도에 너무도 익숙해 있었다.
 
 " 그러는 거 아냐. "
 
 중요한 부분은 건드리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도, 
 연석은 그래도 할 말을 안 하면 숨 넘어가는 성격이 발동하고 있었다.
 지금 동하의 처지를 생각할 때 다그치면 안 된단 거 알고 있지만, 
 그래도…….
 
 " 네가 깨어나지 않는 동안, 내내 널 지키고 있었어. 
  식사도 안 하고 잠도 안 자고, 덩달아 쓰러지는 게 아닐까 생각했다구. "
 " ……. "
 " 여기 올 때마다 밖에 서 계신 거 봤어. "
 " ……. "
 " 듣고 있어? "
 
 놓을 수가 없다고 말했던 건 너였어. 진짜라고 했던 건 너였다구. 
 왜인진 짐작할 수 있지만… 정말 그러는 거 아니야, 너.
 
 " ……비온다던 거, 정말이네. "
 " ㅡ강동하. "
 
 항의의 소리를 내면서도 연석은 동하의 시선을 따라 창 밖을 내다 봤다. 
 여름비처럼 진하진 않지만 한번 내리고 나면 지상의 온도를 확 낮춰버릴 
 초겨울의 비가 가늘게 내리고 있었다. 
 너무 가늘어 잘 보이지도 않을, 어둠 속의 빗줄기.
 
 " 내 기분이 지금 어떤 지 알아? "
 
 중얼거림에 가까운 소리가 들려, 
 연석은 움찔해서 휠체어에 앉은 친구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상대의 얼굴은 아무 것도 담지 않은 것처럼 무표정하다. 
 그 무표정으로 동하는 가만히 읊듯이 덧붙였다.
 
 " ……칼의 다리 앞에 서 있는 것 같아. "
 
 호흡이 멎을 듯한 한마디ㅡ 그리고.
 그들의 공간만 남겨 둔 채 일체의 다른 것들이 가라앉은 듯한 고요. 
 
 " 어릴 때 책에서 봤어. 
  거길 건너야만 왕비가 끌려 간 성으로 갈 수 있는, 칼로 만든 긴 다리. 
  살을 베이지 않으면 건널 수도 없고 떨어지면 그걸로 끝인. "
 
 머리로 말의 의미를 정확히 잡기 전에 
 감정으로 먼저 느끼고 침묵할 수밖에 없었다. 
 연석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동하도 말을 찾고 있는 것인지, 입을 다물고 수초간 정지상태에 머문다. 
 
 무표정 그대로 창 밖, 아니 어딘지 모를 지점을 응시하는 눈을 보다, 
 무겁게 새어나오려는 호흡을 눌러 참고 고개를 약간 옆으로 비튼 순간.
 
 ' 아……. '
 
 연석의 시야에 누군가가 비쳐 들어왔다. 
 그러나 내내 한곳을 보고 있던 동하는 연석의 눈동자가 움직이는 것도, 
 그 앞 가까운 곳에 서 있던 사람도 알아차리지 못한 모양이다.
 다시금 울리기 시작한… 조용하고, 담담하고, 
 그렇지만 그대로 압사해 버릴 것처럼 무게를 머금은 대사.
 
 " 건너편까지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내 힘으론 무린가 봐. 
  기다려 달란 말… 못해. 
  얼마가 걸릴 지 모르고, 끝까지 갈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우니까. 
  아니, 이젠 안돼. 안 된단 거 알면서 붙들 염치가 있다고 생각해? "
 
 마치 자신에게 다짐하는 것처럼 동하는 중얼거렸다.
 
 " ……지금 뿐이야. "
 
 그리 크지 않은 사각의 공간 사이로 어둠이 비친다. 
 그냥 앞이 보일 정도로만 불을 켜 논 데다 워낙 자리 자체가 어둑한 장소인 
 그곳은 점점 더 묻혀가고 있었다. 
 반쯤 열린 창문 반대쪽 문으로 가는 빛이 
 이미 자리잡은 어둠을 방해하지 않을 만큼만 스며든다. 
 
 ……?
 
 그 빛을 저쪽에 두고 길게 늘어진 누군가의 그림자를 그제서야 알아차린 
 동하는, 확인할 만큼만 한쪽 손으로 휠체어를 돌렸다.
 
 시연이 있었다. 
 회색기가 도는 야명(夜明) 속, 뚫어지게 동하를 보고 있었다. 
 
 빛이 바랜 어둠 속, 그런데도 그 모습은 소년의 시야에 선명하게 새겨진다. 
 봄 바다에서 보았던 얼굴관 딴 사람 같은, 
 더 이상 그 때처럼 흐린 색을 담지 않은 시선은
 절대 놓치지 않겠다는 듯 맑게 자신을 보고 있다.
 
 그리고 그 입술은, 시선보다 더 맑은 음성을 내보냈다…… 
 너무나 간절했기에 동하 자신도 느끼지 못할 만치 바라고 있던 한마디를.

 

  " 건너자. ……둘이서. "

 

  인생은 중단되지 않는 기적이다. 
 
  토마스 맬로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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