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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애(禁止愛) (10)

오늘의 쉼터 2014. 9. 25. 16:48

금지애(禁止愛) (10) 

 

   
  
 
 " …참. "
 
 시연은 혀를 차면서 슬롯 머신 앞에서 일어났다.
 자신은 도박엔 재주가 없는 게 분명하다.
 아무래도 땀 흘려 돈을 벌어야 할 팔잔가 보다. 
 대학 때 MT를 가서도 고스톱을 치든 원카를 하든 돈을 따 본 기억이 없다. 
 슬롯 머신에 투자한 20달러는 순식간에 날아가 버렸다. 
 
 끝내자. 여기서 괜히 희망을 갖고 더 매달릴 필요없다. 
 미련없이 일어나야지, 음.
 
 " …언니! "
 
 뒤에서 누가 장난스런 투로 툭 건드리는 것을 느끼고 뒤를 돌아봤다.
 
 " 어, 누군가 했네. 많이 땄니? "
 " 2백 달러. "
 " 응? ……거짓말. 정말루 땄단 말이야? "
 " 언니는요? "
 " 당연 잃었지. 너, 대단하다. "
 " 원래 이런 거 잘해요. 돈 긁는 능력이 있나 봐. "
 
 진영은 얄밉지 않게 잘난 척을 하며 환하게 웃었다. 
 170cm에 가까운 늘씬한 키에 다리가 서양사람 못잖게 긴 이 아가씨는 거기다 
 불공평하게도 대한민국에서 이름만 대면 다 아는 기업 회장의 막내딸이었다. 
 고생을 모르고 자라온 탓일까 누구에게나 스스럼없고 
 약간 철없는 것처럼 보이는 태도는 외려 애교로 비쳐져 
 선배건 후배건 동갑내기들이건 모두에게 사랑받는 요인이다.
 
 " 언니, 이제 뭐할 거에요? "
 " 뭐하긴. 그냥 잠이나 자러 갈래. 졸리다. "
 " 에이. 그러지 말구, 나랑 칵테일이나 마시러 가요. 내가 낼게, 응? "
 
 진영이 애교스레 팔짱을 낀다. 
 키도 큰 녀석이 몸에 기대오니 영 거북스럽지만, 그리 싫지 않은 건 
 아마 자신도 유진영이란 아이를 좋아하게 되었단 뜻이겠지. 
 
 이렇게 아예 최초부터 몸에 밴 우아함과 사랑스러움을 소유한 사람이 있다. 
 주위에서 항상 사랑받고 지낸 사람의 여유가 저절로 풍겨 나오는 
 그런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을 보면 약간의 질투는 접어 두고, 기분이 좋아지게 돼.
 
 " 몇시야, 지금? "
 " 언니는 참, 몰라요? 라스베가스에 없는 물건이에요, 시계. 
  여기선 원래 시간을 잊고 사는 거야. 즐기는 곳이라구요. "
 " …풋. "
 
 시연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웃었다. 
 
 정말 귀여운 아이다. 
 나한테도 이렇게 귀여울진대 남자들 눈으로 보면 어떨까. 
 
 민우가 폭 빠진 것도 이해가 간다……
 
 
 ( 아, 민우…… )
 
 시연은 생각의 실을 잡자 혀끝이 씁쓸해졌다. 
 
 민우는 끝끝내 같이 오지 않았다. 
 다른 사람들한텐 전에 와 봤다며 핑계를 댄 모양이었다.
 
 하긴 괴롭겠지. 
 좋아하는 여자가 딴 남자랑 같이 있는 모습을 보는 거, 
 어지간한 정신력 아니고선 참고 보기 힘들 거다. 
 지울 수 있단 사실은 별론으로 치더라도 
 지금 겪는 통증은 만만치 않은 것일테니. 
 혼자 틀어박혀 정리하는 것이 민우의 방식이라면… 
 그건 나랑 비슷한 건가.
 
 
 " ……남자친구는? "
 
 무심코 물어 버렸다. 생각하고 물은 게 아니라, 그냥.
 
 " 블랙잭에 미쳤어요. 어차피 잃을텐데, 바보들이래니깐? 
  이곳 딜러들한테 놀아날 뿐일 거야. 그 뿐 아녜요. 
  아까 보니 영석이 오빤 룰렛으로 조금 따더니 
  완전 폭 빠져선 헤어나질 못하고 있던대요.
  두고 봐요. 나중에 우리한테 돈 꾸러 올 거니까. 
  그 땐 시치미 뚝 떼고 없다 하세요. 그게 상대를 위하는 거라구요. "
 " 후후… "
 
 진영의 어조에는 괴로움 같은 건 전혀 묻어 있지 않았다. 
 민우의 짝사랑이었던 건가.
 하긴 남자들은 상대의 사소한 반응에도 
 자신에게 호응해 주는 거란 착각에 쉬이 빠지는 속성이 있다. 
 실은 진영이 쪽은 전혀 관심이 없는데 
 지레 민우 혼자 감정에 빠지고 혼자 번민하는 것인지도 모르지. 
 
 시연은 진영이의 약간은 호들갑스런 말투가 우습고, 
 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우스워졌다. 
 그래서, 웃었다.
 
 " 웃을 일이 아녜요. 분해 죽겠어. 
  나, 원래 시저스 팔레스서 하는 쇼를 볼 생각이었다구요. 
  그래서 오빠들 죄다 꼬셔 놨는데, 
  아… 시연 언닌 어차피 안 간다고 할 것 같아서 안 물어 봤어요, 미안…, 
  근데 지금은 도박에 폭 빠져서는 일어나려 들질 않잖아요. 
  결국 타이밍을 놓쳐 버렸어. "
 " 쇼? '쇼 걸'들이 하는 그… 쇼? "
 " 언니 표정 넘 웃긴다. 당연하죠. 재밌대요. "
 " 그거, 옷 벗고 그러는 거 아니야……? "
 " 그럼요, 라스베가슨데. 아, 하지만 그것만은 아니래요. 
  굉장히 화려하대요. 뭐, 지금은 이미 늦었는 걸. 
  그냥 칵테일이나 마셔야지, 사랑하는 언니랑. "
 
 너스레를 떠는 진영에게 끌려 시연은 바로 가까운 바로 향했다. 
 도수가 없는 걸로 칵테일 두종류를 주문하고 난 뒤, 진영이 말했다.
 
 " 어머, 이 주위에 전부 커플 뿐이네. 분해라. "
 " 너두 남자랑 왔잖아. "
 " ……그렇긴 하지만. 
  아, 언니. 지난번에 내 노트북으로 멜 보낸 사람 누구에요? 
  남자지? 응? 애인, 맞죠? "
 " 아니야. "
 
 이젠 아니야. 
 원래도 아니었어야 했고. 
 붙들어서는 안될 감정이었어. 
 전부 정리했으니 이젠 아니야.
 
 " 애인인 줄 알았어. 
  언니가 하두 진지한 표정으로 몇번이나 곱씹어 가며 편질 쓰길래.
  언닌 애인 없어요? "
 " ……없어. "
 
 동하에게 메일을 보냈었다. 
 그것이… 잘한 건지, 잘못인진… 나도 잘 모르겠다. 
 다만 동하가 이 이상 쓸데없는 감정에 빠지지 않길 바랬다.
 그래서, 눈앞에선 절대 할 수 없던 거짓을 가득 써 보냈다. 
 
 이젠 눈을 마주쳐도 똑같이 말할 수 있어. 
 그것이, 여기 와서 얻은 한가지 소득일까. 
 이 여행, 헛된 건 아니었구나.
 
 
 
 칵테일은 목이 말랐었던 탓일까, 맛이 썩 좋았다. 
 이거 마시고 바깥에 나가 오색으로 반짝이는 라스베가스의 야경이나 
 구경해 볼까, 하고 시연은 생각했다. 
 
 이런 도시가 있다니. 
 사람을 순식간에 황홀경에 빠뜨리는 공간이다. 
 
 걱정 따윈 없어요, 당신도 이곳에서 분명 한 밑천 잡을 수 있다구요, 
 아니면 어때? 그냥 즐기고만 가도 좋은 곳 아닌가요, 
 자아, 오세요, 오셔서 이곳에서 즐기세요, 
 마음놓고 근심 걱정 따윈 싹 잊어 버려요, 
 라고 주변 모든 것이 속삭이는 듯한 감각.
 
 
 
 " 민우 오빠가 무슨 얘길 하던가요? "
 " 응……? "
 
 칵테일에 집중하던 시연은 진영의 약간 가라앉은 말투에 
 빨대를 입에서 뗐다. 
 무슨 의미일까 하고 마주 본 진영의 눈이 진지한 걸 확인하고 
 대충 얼버무리지 않기로 한 그녀는 
 상대가 이해할 수 있을 한마디를 짧게 해 줬다.
 
 " 많이 힘든가 보더라. "
 " ……알아요. 나도 그 자리에 있었으니까. "
 
 진영의 말투는 담담했다.
 
 " 바보야, 민우오빠는. 당당하면 되잖아. 
  종강파티에서 눈이 몇번이고 마주쳐도 난 절대 눈을 피하지 않았어. 
  피한 건 그쪽이었다구요. …언니한텐 얘기한 거죠? 
  그 날 테라스에서 둘이 앉아서 얘기하는 거 봤어요. "
 " 많이 들은 건 아냐, 나도 아는 거 없어. "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진영에게 변명 비슷한 말을 하고 있었다. 
 진영이 웃었다. 
 여전히 담담함과 여유로움을 잃지 않은 표정, 그리고 대사. 
 
 " 걱정하는 거 아니에요…… 언니가 알아도 난, 상관없어. 
  어차피 민우오빠와는 안될 사인 걸요. "
 " 정말… 확신해? 너, 약혼자를 민우보다 더 좋아한다 확신할 수 있니? 
  민우… 괜찮은 아이잖아.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
 " 언니. "
 
 시연을 똑바로 보며 하는 진영의 한마디 한마디는 야무졌다. 
 
 평소 그렇듯, 늘상 생글생글 철없이 가볍게 웃음을 날리는 부잣집 아가씨는 
 어디론가 사라지고, 이 순간 이기적인, 하지만 
 마냥 그것을 책할 수만은 없는 뼈 있는 대사를 뱉어내는, 
 괴로움을 문득문득 내비치는 한 사람이 그 자리에 있었다.
 
 " 이곳은 한국이 아니에요. 현실이 아니라구요, 환타지 세계지. 
  잠깐 꿈을 꾸고 지나가는 공간이야, 이곳은. 
  나는 분명 이곳에서 지금 같이 있는 약혼자보다 민우오빠를 좋아했어요. 
  그 감정은 분명한 진실이야. 
  하지만, 서울에 돌아가서까지 그 감정이 지속될까요? "
 
 한 호흡 끊고 칵테일을 마신 진영은 자신의 질문에 자신이 대답했다.
 
 " 아뇨. 현실이 개입되기 시작하면 죽고 못 살 것 같은 감정도 
  희미해져 버릴 거야. 나는 분명 민우오빠를 좋아하지만, 
  내가 현실적으로 만족할 수 있는 세계를 그는 제공 못해요.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부모님이 골라 주고 선을 본 그 남자는 
  그걸 내게 해 줄 수 있어. 
  나와 비슷한 환경에서 자라난 사람이니까 잘 맞는 부분도 많고요. 
  6개월 간의 잠깐 타오르는 감정에 내 인생을 맡길 수는 없어요. 
  언니한테는 변명처럼 들릴 지도 모르고 얄밉게 비칠 지도 모르지만,
  나는 서울에 돌아가면 여기서 있었던 일은 모조리 잊어버릴 거에요. "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그것이 진영의 사는 방식이겠지. 
 
 겉으로 보기에 언제나 생글생글 웃고 있는 그녀에게도 
 포기해야 할 것은 있었던 것이다. 
 물론 자신의 결심에 의한 포기지만, 
 저토록 또박또박 말하는 진영이라 해서 민우보다 덜 번민했으리라고 
 시연은 감히 생각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 후회할 지도 모르죠… 그래요, 언니 말대로 후회할 지도 몰라. 
  언니가 내 입장이었다면 다른 길을 선택하겠어요? "
 " …… 모르겠어. "
 
 솔직하게 말했다. 
 
 정말 모르겠다. 
 나는 처음부터 포기라는 걸 배우면서 살아온 사람이니까 
 진영의 케이스에 자신을 끼울 수가 없어.
 
 " 언니는… 적어도 나처럼 이렇게 속되게 물들어 있진 않으니까. "
 " 아니야… 그렇지 않아……. "
 " 그러니까, 나는 민우오빠랑 어울리지 않아. 
  그는 로맨티스트라구요, 현대에는 별로 도움이 안되는. 
  아들 딸 낳고 가족끼리 알콩달콩 사는 걸 
  최고의 행복으로 생각하는 사람이야.
  하지만요… 나는 그 이상을 원해요. 
  그러니까 우린 근본부터 맞지 않아요. 그래서 끌렸던 거겠지만…… " 
 " ……그래. "
 
 시연은 진영을 이해할 수 있었다. 
 적어도 이해는 할 수 있었다. 
 6개월의 감정에 불확실한 미래를 거는 건, 
 힘든 걸 모르고 살아 온 진영에겐 무리다. 
 
 무엇보다 나 자신도 생각했지 않은가. 
 시간이 지나면, 다 잊을 수 있다고…… .
 
 순간 시연은, 잠시간 자신이 민우와 진영을 생각하느라 
 자신의 괴로움을 조금쯤 잊고 있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속으로 피식 웃었다. 
 
 이런 식으로 상처는 치유되는 것이다. 
 이런 과정이 반복되고, 또 반복되면서.
 
 
 
 " 한국 사람이에요? "
 
 갑자기 옆에서 전혀 다른 소리가 들려 와, 시연과 진영은 고개를 들었다. 
 그것은 분명한 한국말이었다. 
 소리가 들려 온 곳, 자신들의 바로 앞에 세련된 복장을 한, 
 그러나 한국에서 온 건 아님이 여실히 느껴지는 중년 여자가 서 있었다. 
 
 교포…?
 
 " 그런데요. "
 
 진영이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하자 
 여자는 자신도 약간 당황한 듯 수줍게, 그러나 여유있게 말을 이었다.
 
 " 한국서 온 아가씨들 같아서, 저도 모르게 말을 걸어 버렸네. 
  여기 사는 사람 아니죠? "
 " 예. 교포세요? "
 " 응. 산 지 벌써 수년 됐으니까. 
  그 동안 한국을 한번도 가 보질 못해서, 
  한국에서 누가 왔다면 괜히 반가운 기분이 들거든. 
  이상하게 이 바에 들어오자마자 아가씨들한테 눈이 가서 
  계속 보고 있었더랬어요. 대화를 방해해서 미안해요. "
 " 아, 아니에요. "
 " 그럼 실례했어요. 재밌게 놀다 가요. "
 
 여자는 친근감 어린 미소를 지어 보이며 두사람에게 가볍게 인사하곤 
 바 입구로 걸어갔다. 
 
 진영이 웃었다. 
 난데없는 여자의 침입에 외려 기분이 좋아진 모양.
 
 " 어딘가 귀여운 분이네요. 그죠? 
  나도 저렇게 나이 먹으면 좋겠어. 굉장히 지적인 인상이잖아요. "
 " ……. "
 
 시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칵테일에 도수도 별로 없을 텐데,
 이상하게 머릿 속이 뒤섞이는 느낌이 들었다. 
 
 이유는… 이유는… 방금 말을 건 저 분 때문이다. 
 확실한 건 아니지만… 그렇지만… 
 정확히 생각나는 건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는, 저 분을… 알고 있어, 그렇지… ?
 그래… 내가 알고 있는 사람이야… 분. 명. 히.
 
 
 
 두근거림이 가슴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사람은 운명을 피하려다 비켜 간 길에서 종종 운명을 만난다. 
 
J. 라 퐁텐/ 우화시집

 

 

 

" 우와……. "
 
 누구의 입에서 흘러나온 대사였는지 모른다. 
 눈앞의 광경은 대체 시선을 어디로 돌려야 할 지 모를 정도였다.
 
 " 젠장, 땅덩어리가 넓은 나라는 이래서 부럽다니깐. "
 
 시연이 서 있는 자리에서 5미터 정도 떨어진 위치에 있던 영석이 
 중얼거린다. 
 같이 온 다른 사람들도 입을 벌린 채 다물지를 못했다. 
 기껏해야 땅에 구멍 뚫린 거 무슨 볼 게 있겠냐 투덜거리던 인규도 
 그 순간만은 넋을 잃은 채, 사방을 둘러보고 있는 모습.
 
 이런 곳에 서 있어, 아래 이어지는 가파른 바위들과 
 시야 저편에 뻗어 있는 적갈색 암벽을 둘러보고 있노라면 
 넓은 세상에서 자신이 얼마나 왜소한 존재인가를 절감하게 된다. 
 엽서 사진으로 몇번이고 본 풍경이었지만, 
 그런 것관 감히 비할 수도 없는 느낌이다. 
 
 ' 역시 오길 잘했어. '
 
 시연은 짧게 자른 머리카락을 정신없이 흩날리는 바람 속, 
 입고 있던 얇은 점퍼를 여미며 생각했다.
 
 " 바람이 상당히 많이 부네. 
  이렇게 싸늘할 줄은 몰랐어. 라스베가스와는 기온이 천지차이잖아."
 " 아으, 춥다. 우리 한시간은 구경했잖아. 사진도 찍을 만큼 찍었고. 
  지금 떠나야 오늘 내 호텔에 닿을 것 같은데? "
 " 그래, 이제 슬슬 출발하자구. 가다 요기할 시간도 필요하니까. "
 
 다른 사람들의 대화를 듣고 차로 몸을 돌리던 시연은 
 문득 고개를 틀어 저쪽을 쳐다봤다. 
 
 진영과 그녀의 약혼자는 아직도 저편에 선 채 
 뭔가 얘기를 주고받는 모습이다. 
 카메라를 손에 든 약혼자와 야구 캡을 발랄하게 쓴 진영은 
 만일 사정을 몰랐다면 망설임 따윈 전혀 없는 듯한, 
 지극히 사이좋은 커플로 보였을 것이다. 
 
 하지만 시연은 보곤 했다. 
 가끔씩 차안에서나 잠시 혼자 서 있을, 
 자신에게 시선이 전혀 돌아가지 않을 그런 때, 
 문득문득 진영의 표정이 어둡게 흐려지는 장면장면, 순간순간을. 
 
 ……그런 것, 이다.
 
 
 
 햄버거로 간단하게 저녁 요기를 하고, 
 렌트한 밴을 계속 몰아 시연 일행은 미리 예약해 뒀던 호텔에 도착했다. 
 라스베가스에서 본 호화 호텔과는 다른 여관급의 작은 호텔이었다. 
 
 도착하자마자 남자들은 어제 밤을 샌 것이 무리였는지 
 다들 앞 다투어 침대로 들어가는 모습들이었다. 
 시연과 진영 등 여자들도 일단 방에 돌아갔다. 
 
 워낙 대규모로 팀을 짜서 온 여행이었다.
 한국 여자만 해도 진영과 시연 외에 두명이나 더 있었고, 
 그 외 브라질, 프랑스, 스페인, 독일, 일본 등 여러 국적 사람들이 
 잔뜩 섞여 북적거리는 분위기. 
 
 진영과 시연은 브라질 여자 둘과 함께 넷이 방을 같이 쓰기로 했지만 
 방값이 워낙 비싸 방 하나에서 여자들 몇명이 옹기종기 모여 잤던 
 라스베가스에서완 달리 큰 방 하나를 두개로 구분해 논 형태를 하고 있었고 
 둘씩 더블 베드를 나눠 쓸 수 있어서 한결 편했다.
 
 진영과 시영이 문가 쪽을 쓰기로 했다. 
 진영의 약혼자는 한국에서 같이 온 친구와 다른 남자 둘과 
 다른 방을 쓴다고 했다. 
 스스럼없이 같이 온 남자친구와 한방을 쓰겠다고 선언한 브라질 커플과 달리 
 진영과 약혼자는 여행 내내 각방을 쓰고 있다. 
 어쩔 수 없는 한국 커플. 
 
 주위 시선을 의식하게 되는 점도 있을 것이고, 그리고…….
 
 " 언니. "
 
 일단 씻고 침대에 누웠지만 잠이 쉬이 오지 않는 시연에게 
 옆에 누워 있던 진영이 나직한 소리로 부르는 게 들렸다.
 
 " …응? "
 " 졸려요…? "
 " 아니. "
 " 우리 아래 층 로비에 내려가서 잠깐 얘기하지 않을래요? "
 
 시연은 눈을 떠, 옆에서 몸을 반쯤 일으킨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진영을 보고 
 고개를 끄덕였다. 
 두사람은 칸막이 하나 사이를 두고 잠들어 있는 브라질 여자들이 
 깨지 않도록 옷을 걸치고 살금살금 밖으로 나왔다.
 
 " 피곤할 텐데, 안 졸려? "
 " 운전한 사람들한테 미안하네. 
  낮에 차에서 좀 졸았더니 지금은 통 잠이 안 와요. 
  언니는 전혀 안 자던데 괜찮아요? 나 땜에 나온 거 아냐? "
 " 괜찮아, 나도 잠이 안 와 괴롭던 참이었어. "
 
 두사람은 밑으로 내려 와 그리 넓지 않은 로비로 들어섰다. 
 앉을 수 있는 소파도 그리 많지 않아서, 
 두사람처럼 늦게까지 대화를 나누는 관광객들로 
 이미 자리는 어느 정도 차 있었다.
 
 " 어떡하죠? 언니? 앉을 자리가 없는 것 같애. 
  아, 저기 저 사람 옆에 자리가 좀 비어 있는데, 
  가서 앉아도 되냐고 물어 볼까요? "
 
 라고 말하더니, 진영은 시연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1인용 소파에 혼자 앉아 있는 여자 쪽으로 걸어 가, 
 Excuse me, 하고 대뜸 말을 걸었다.
 
 " …어머…! "
 " …어. "
 
 진영이 탄성을 지름과 동시에 상대도 놀라움의 표시인 소리를 뱉었다. 
 진영이 반가움이 가득한 눈을 크게 뜬다.
 
 " 기억하세요? 어제 라스베가스에서…… "
 " 물론 기억하죠. 다니는 코스가 같은가 봐. 자리 없으면 여기 앉아요. "
 
 여자는 보고 있던 책을 덮으며 웃었다. 
 놀란 사람은 그녀에게 말을 건 진영이 아니라 뒤에서 쫓아 온 시연이었다. 
 
 진영이 붙임성 있게 질문했다.
 
 " 혼자 오신 건 아니죠? "
 " 아니. 다른 사람들은 산책을 간다는데 난 피곤해서 남았어요. 
  아가씨들은 둘이 붙어 다니네? 
  여자 둘이서만 온 거에요, 젊은 사람들이 재미없게? "
 " 아니에요, 둘이 한 방을 쓰고 있을 뿐이죠. 
  어제 교포라 하셨죠? 여긴 몇년 사셨어요?"
 " 몇년이지? 음… 8년 됐나?
  유학 와서 공부만 하다가 완전 눌러 앉은 케이스죠. 
  그럴 생각은 굳이 아니었는데 직장도 여기서 잡았고. "
 
 여자는 차분한 말투로 답했다. 
 역시 다시 봐도 꽤나 지적인 인상이었다.
 
 " 뭐하시는지 여쭤 봐도 될까요? 
  아. 저희부터 소개해야지. 저는 K대학 4학년 유진영이고, 여기 언니는… "
 " ……이시연입니다. "
 
 " 김경희에요, 
  여기 사람들이 발음을 어려워해서 다들 케이라고 부르고 있지만. 
  일리노이에서 민속학을 연구하고 있어요. " 
 
 즉, 가르치고 있단 이야기다. 
 특별히 자랑이 섞이거나 하는 느낌은 없는, 담담한 투로 
 여자는 자신에 대해 설명했다.
 
 " 여긴 혼자 오셨어요? "
 
 진영이 계속 질문을 이어간다. 
 시연은 말도 잊은 채 정신없이 여자를 쳐다보고 있었다.
 분명 어디서 본 듯한 인상이다. 
 
 아니, 난 저 사람을 본 적이 있어… 
 저 사람을 알고 있는 거야, 나.
 
 " 아니, 친구들과 왔어요. 
  남편은 대학에 일이 있어서. 같은 대학 공대에 있어요. 
  남편은 한국인이 아니고 영국 출신이랍니다.
  나도 겨우 시간 나서 온 거에요.
  7년 있으면서 그랜드 캐넌을 처음 봤으니. 
  딸애는 방학이라 캠프 보냈고. "
 " 어머, 따님도 있으세요? "
 " 응, 아가씨들처럼 예쁘게 자랄 진 모르지만 암튼 말괄량이 하나 있어요. 
  아, 참, 사진 볼래요? 우습지만 늘 갖고 다닌답니다. "
 " 어머, 보여 주세요. 무지 예쁠 것 같은데. "
 
 여자는 허리에 감고 있던 작은 백에서 작은 다이어리 수첩을 하나 꺼내, 
 거기서 몇장의 사진을 끄집어내 진영에게 주었다. 
 가족 사진을 갖고 다니는 미국인들이 꽤 많은 건 알고 있다. 
 아마 미국에 살며 이곳 문화에 물든 여자도 
 딸의 사진을 항상 갖고 다니는 모양.
 
 " 어머, 너무 귀여워요. 그지, 언니? "
 " 정말 예쁘네요. "
 
 진영이 탄성을 지르고 시연이 감탄할 가치가 있을 정도로 
 여자아이는 귀여웠다. 
 
 뭐라 해도 혼혈인 것이다. 
 동양과 서양의 느낌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묘한 분위기가 
 어린 소녀의 사진에 있었다. 
 물론 이곳 미국에서 그런 분위기의 사람을 찾는 건 
 그리 힘든 일은 아니지만 말이다. 
 
 자기 몸 크기 만한 농구공을 들고 있는 사진이나 
 발레 코스튬을 입고 있는 사진. 
 엄마와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고 있는 사진. 
 어느 것이나 무척 귀염받고 있는 '딸'의 모습이다. 
 
 이게, 보통인 거겠지. 
 나는 경험해 보지 못한 행복, 이것이 보편적인 거겠지. 
 
 시연은 사진을 보며 문득 생각했다. 
 그런 감상은 그러나, 다음 순간 진영의 한마디로 지워져 버렸다.
 
 " 어머, 아들도 있으세요? "
 
 그리고 시선을 내려 사진을 본 순간. 
 
 사진을 보고 그 안에 담긴 소년… 
 반바지를 입고 서 있는 어린 소년의 모습을 발견한 순간…… 
 시연의 머릿속은 종이를 구겼다 편 것처럼 뒤섞였다 되돌아왔다. 
 
 자신도 언젠가 본 사진. 
 언젠가 들쳐 봤던 앨범에서 발견한 사진. 
 낯익은 얼굴. 자신이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의…. 
 
 그랬구나… 
 역시 그랬었어……!
 
 " 이 아이는…… "
 
 여자는 당황한 낯빛을 하고 진영의 손에서 사진을 뺏다시피 받았다.
 
 " 죄송해요…… "
 
 진영이 당황한 듯 영문도 모르고 사과한다.
 
 " 아뇨, 아니에요. 이 애는…… "
 
 여자는 말을 잇지 못했다. 
 
 그녀가 말을 채 잇기도 전에,
 자신을 제어하지 못한 시연의 대사가 날아들었기 때문이다.
 
 " 동하… 동하를…… 아세요…? " 

 

 " ……그랬군요. "
 
 여자, 아니 동하 엄마의 목소리는 착 가라앉아 있었다. 
 
 밤이 깊었고, 어느 샌가 불 켜진 로비엔 두사람만 자리하고 있었다. 
 진영도 자러 들어갔고, 주변 다른 관광객들도 그새 대화를 접은 모양이다. 
 
 시연은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꺼림직할 이유가 없건만… 왜 그런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 그이가 죽었군요…… "
 
 여자는 주머니에서 담배를 꺼내 물었다. 
 그리 자주 피우지는 않는 듯, 담배갑은 두개피만 빼고 꽉 차 있었다. 
 그녀가 담배를 피는 건 오늘 대화하며 처음 보는 모습이다. 
 
 힘을 빼듯 뱉어내는 연기가 허공에 실려 올라갔다.
 
 " 사람일이란 참… 알 수 없군요. 
  자기 자신한테 그토록 엄격하고 열성적으로 생활하던 사람이 
  그리 허무하게 가 버리다니…… 우스운 일이네요. "
 " ……. "
 
 " 그래도 다행이네요, 마지막엔 행복했을 테니. 
  시연씨…가 함께 있었으니 그 사람, 행복했겠죠. 네, 그럴 거에요…… "
 
 자신을 위로하듯 그녀는 힘을 주어 중얼거렸다.
 
 " 나는 그이랑 몇년을 같이 살면서도 아무 것도 못해 줬는데… 
  마지막 몇달동안 시연씨가 가장 필요한 걸 해 줬군요. 고마워요……. "
 " 아니에요, 저는…… "
 
 저는 무력했어요. 
 저는… 그에게 뭔가 한가지는 해 줄 수 있을 줄 알았습니다. 
 적어도 그의 아들, 그가 남기고 간 사람을 
 가족처럼 소중히 돌봐 줄 수 있으리라 생각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런 과거의 저는 그 얼마나 자만심에 가득 차 있었던 것일까요.
 
 " 동하는… 잘 있나요? 많이 컸죠? "
 
 당연히 나올 질문이었는데 시연은 그 말을 듣는 순간 흠칫했다. 
 그리고 그런 그녀의 반응을 상대도 알아차린 모양. 
 
 시연은 대답했다. 
 그것은 절반은 거짓이었다. 
 실은 그녀 자신도 동하가 지금 어떤 감정으로 생활하고 있을 지 
 알 수 없었으니까. 
 
 그리고, 그 말은 희망사항이기도 했다.
 
 " 잘 있을… 겁니다. "
 " 남편이 가버렸으니, 이제 그 애랑은 연락하지 않는가 보군요. 
  아아, 그게 당연한 건가. "
 " ……. "
 " 신경 쓰지 마세요. 그냥 물은 거니까. 
  시연씨에게 책임 느끼라고 한 소리 아니에요. 
  우선 난 그럴 자격도 없으니까. 그 애를 먼저 버린 건 나인 걸요… "
 
 여자는 억지 웃음을 지어 보였다.
 
 " 재혼하고 또 아일 낳았어요. 
  그 땐 나도 여기 와 많이 안정이 돼 있었던 터라 
  아이를 가졌단 사실이 기쁘기만 했지요. 
  하지만… 우습게도 그 때서야 한동안 지우려 노력했던 다른 아이 생각이 
  되살아난 거예요. 
  아니죠, 아니에요… 사실은 한번도 잊은 일이 없었던 거죠. 
  레이니… 딸을 볼 때마다 동하를 생각했어요. 
  동하에겐, 레이니의 반만큼도 사랑을 주지 못했으니까. 
  지지리도 복 없는 아이죠. 
  걔를 낳고 나선 몸이 너무 안 좋아져서 젖이 나오질 않았어요. 
  할 수 없이 분유만 타 멕였죠. 
  한데 레이닌 늦게 가진 아인데도 하나 힘들질 않았더랬어요. 
  몸도 건강해서 모유만으로도 충분했을 정도였고. 
  참 한심하죠. 레이니가 내 젖을 물때마다 동하가 오버랩되서… 
  그 앤 이제 날 아예 기억도 못할지 모르는데… "
 
 " 기억하고 있습니다. "
 " ……? "
 " 기억하는 정도가 아니고… 그 이상으로 엄마를 생각하고 있어요. "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똑바로 쳐다 본 채 
 말 하나하나에 힘을 주고 있었다.
 
 " 기억하고 있다면 분명 미워하고 있겠죠. 
  자기를 버렸다고, 미워하고 있겠죠. "
 " 아뇨…… 미워하고 있지 않았어요. 이해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오히려 잊으려고 노력하고 있었어요. 
  지금 위치에서 엄마가 행복하길 바라는 것 같았고요… "
 
 시연을 고쳐 보는 여자의 눈에 뭔가가 스쳐간다.
 
 희망.
 기대.
 아니, 그 이상의 뭔가.
 
 " 시연씨… 생각보다 동하를 많이 알고 있군요. 
  아까 말로는 얼마 같이 살지 못했을 거라 생각했는데. 
  남편이 그렇게 빨리 죽었는데… "
 " 6개월 정도, 같이 살았습니다. "
 " ……지금, 지금은요? "
 
 말하는 여자의 목소리는 조용했지만, 
 미간엔 긴장을 알리는 주름이 살짝 져 있었다.
 
 희망과 기대…… 그리고, 그 이상의 감정.
 나는 이 분에게 무엇을 말할 수 있을까.
 
 " 지금은… 아닙니다. "
 
 시연의 목소리가 메어 들어갔다. 
 목이 탁 막힌 듯한 느낌이 든다.
 
 같이 있고 싶었습니다… 
 예, 이렇게 말하고 있으니 그리워서, 그리워서ㅡ 
 저 자신을 감당 못할 그런 기분까지 듭니다. 
 
 피하기 위해 여기 왔어요. 
 그런데 어째서 이렇게 다시 생각나게 만드는 겁니까…
 어째서… 여기 와서까지 생각나게 하는 사건과 부딪히는 걸까요…?
 
 " 고모님 가족과 같이 있습니다. 부산에요… "
 " 그래요…… "
 
 손가락 사이에서 낀 담배 끝, 재가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 쌓여간다.
 너무도ㅡ 조용하다.
 
 " 그게 당연한 일이겠죠. 
  남남인 두사람이 함께 사는 거, 아무래도 좀 껄끄런 일이니까. 
  동하랑 같이 있는 거… 시연씨 입장에서 많이 불편했을 테니까. "
 " ……. "
 
 할 말이 없다…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그런데, 말이 나왔다.
 
 " 아뇨, 동하는 저한테 최대한의 배려를 해 주었어요. 
  아마 계속 그대로 지낼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걸 파괴한 건, 그건…… "
 " 시연씨……? "
 " 저입니다… "
 
 여자는 놀란 동작으로 담배를 눌러 껐다. 
 
 무언가를 막으려는 듯, 입가에 대고 있는 시연의 손이 
 제어할 수 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싸늘한 밤 공기 탓만은 아닌, 희미한 떨림이 몸을 스쳐갔다.

 

 

한낮의 여름은 괴롭다. 
 
 쉴 틈 없이 에어컨이 돌아가고 있던 건물에서 
 숨이 막힐 것 같은 거리로 나오려니 참으로 막막한 감정이 가슴을 덮었다. 
 더군다나, 이 몸은 방금 지긋지긋한 마감 전쟁을 마친 참이란 말이다. 
 
 아으, 참자. 
 조금만 참으면 택시가 잡힐 것이고
 그 안엔 분명 빵빵하게 에어컨이 틀어져 있겠지. 
 그래, 평소엔 머슴처럼 일하는 나래두, 
 오늘은 집 앞까지 공주처럼 가서 미친 듯이 한 잠 때릴 거다. 
 참자, 참아……
 
 " 후우…… "
 
 은영은 한 팔에 멘 커다란 백을 휘두르며 엘리베이터를 빠져 나와 
 빌딩 입구로 걸었다. 
 
 매번 겪는 일인데 매번 이렇게 지긋지긋할 수 있을까. 
 하지만 상쾌하다,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래, 이 맛에 잡지 일을 하는 거다. 
 마감을 마쳤을 때의 그 짜릿함. 
 그리고 책이 나왔을 때의 설레임. 쾌감.
 
 " ……?! "
 
 그 쾌감은 빌딩 입구의 자동문 쪽에 다가섰을 때, 
 순간적으로 부서져 버렸다.
 은영이 밀고 나가려던 그 자동문을 밀고 누군가가 들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상대도 은영을 물론 알아봤다. 
 아니, 기회를 놓치지 않겠단 듯이 다가왔던 것이다. 
 키가 마지막으로 언뜻 봤을 때보다 훨씬 자라 있었지만 
 꽤나 임팩트가 강한 얼굴이라 분명히 기억하고 있다.
 
 이런, 어떡하지…?
 
 은영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다 이내 고개를 들고 물었다.
 
 " 동하…니? "
 
 상대는 입을 열어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무슨 질문을 할 지 알고 계시죠?… 하고 묻듯, 
 똑바로 은영의 눈을 보고 있었다.
 
 은영은 가만히 숨을 토해냈다.
 
 " 시연이… 여기 없어. 알고 있니? "
 
 
  
 禁止愛(금지애) (26)
 
 
 나의 어깨를 두드리면서 한없이 먼길을 가라 했지
 그 길은 너무 먼 곳이기에 멍하니 그대 눈만 보았어
 
 그대가 나에게 숨겨왔던 맘 날 위해 떠나보내리라던…
 나 몰래 흘려왔었던 눈물 아직도 그댈 울리고 있어
 
 그대가 나에게 말해왔던 얘기 내게는 중요하지 않았어
 이렇게 나를 떠나보내기 위한 얘긴 줄 몰랐던 거야 
 
이승철/ 그대가 나에게

 

 

 

『 동하에게 
 
 
    뭣부터 말해야 할까... 우선 사과부터 해야겠지.
    얼굴을 보고 말할 수 없었던 건 내게 용기가 없기 때문이었지만 
    그에 대해선 변명하지 않을래.
 
    다만... 생각해 봤어. 그리고, 결론이 났어.
    아무리 생각해도, 너와의 일은 실수였어. 
    있어서는 안될 거였고 하루라도 빨리 지워야 하는 감정이라고...
 
    그래, 고모님의 말씀은 구구절절 옳으신 것뿐이었어.
    너와 떨어지고 나서야 비로소 내가 눈을 뜰 수 있었던 건지도 모르지.
 
    이렇게 일방적으로 말하는 거, 잘못이라는 건 잘 알지만
    이렇게라도 말할 수 있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
 
    당분간은 너도 부산에 있고 나도 사정이 있어 만나지 못할 거야.
    그러니까 연락하지 말아 줬으면 해.
 
    물론 언젠가는 만나야 할 테지만...
    아마 너도 그 때까지 네 감정을 정리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해.
 
    어쩌면 너도 비슷한 생각을 하고 있을 지 모르지만,
    더 이상 힘들 거 없이 매듭짓기로 하자.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을게. 
 
 
                                                          시연. 』
 
 
 
 
 
 낮이 긴 여름 거리는 저녁시간에도 아직 환했지만, 
 동하가 들어선 차고는 문을 열어두지 않으면 
 낮조차 전구를 군데군데 켜 놔야 할 만치 어둑했다. 
 
 성호형 집에서 운영하는 바이크 숍 옆으로 붙어 있는 제법 큰 차고는 
 준구형을 통해 성호형과 알게 된 중학교 시절부터 
 동하가 자주 들르던 곳이었다. 
 가득 쌓인 타이어와 바닥에 흩어져 있는 도구와 상자들, 
 그리고 구석에 세워진 원색의 바이크들… 
 내부를 가득 메우고 있는 오일 냄새까지 너무나 익숙한 것들뿐.
 
 " 어… 너, 설마… 동하냐?! "
 
 기름때가 잔뜩 묻은 회색 나시 티와 색 바랜 청바지를 걸친 채, 
 누운 자세로 바이크를 손보고 있던 성호형의 굵은 목소리가
 차고 안에 크게 울렸다. 
 무뚝뚝하고 남자다운, 선이 굵은 얼굴이 조금 놀랐다는 듯 
 미간을 찡그리며 목장갑을 낀 손을 들어 이마의 땀을 닦는다.
 
 " 형. "
 
 입가에 거의 뵈지 않을 만큼 미미한 미소를 띄운 채 
 자신을 보고 있는 인물을 보고, 
 성호형은 손에 들고 있던 공구를 내려놓고 일어섰다. 
 
 둔탁한 소음이 차고 안에 울린다.
 
 " 너 그새 더 컸구나. 근데, 웬일이냐. 지금 부산에 있어야 되는 거 아냐? "
 " 그냥 왔어요. "
 
 자신보다 3살이 어린 후배는 조용히 서 있을 뿐이었다. 
 항상 말수가 적은 녀석이지만 오늘따라 유난히 대답이 짧은. 
 그리고, 바로 자신의 질문으로 넘어간다.
 
 " 제 바이크 어딨죠? "
 
 부산에 내려가기 전, 동하는 성호형의 가게에 바이크를 맡겼다. 
 부산까지 바이크를 가져 갈 수 없어서였다. 
 
 가게 옆에 작은 격납고가 있어, 
 전에 아르바이트하던 카페 주인이자 성호형의 친구인 준구형도 
 거기다 바이크를 맡겨 두고 있었다. 
 
 준구형과 성호형에게 바이크를 한동안 봐 달라고 부탁하고 
 부산에 갔던 것이다.
 
 " 아프릴리아? 저기 있는데. ……어, 지금 나가려구? "
 
 위치를 가리키자마자 차고 뒤편으로 걸어 가 바이크를 문으로 끌고 나가려는 
 동하를 보고 당황해서 묻자, 그는 조용히 반문한다. 
 
 " 안되나요? "
 " 어? 아까도 손 봤으니 괜찮을 거야. 근데, 너…… "
 " 잠깐 몰고 다시 올게요. 미안해요, 형. "
 
 그 말만 남겨 놓고 바이크를 차고 문까지 끌고 나간 동하는 
 헬멧을 쓰더니 바이크에 올라 시동을 건다. 
 
 아까보단 한결 빛이 흐려진 차고 밖. 
 문 앞으로 엔진음이 한번 크게 울렸다 이내 낮은 소리로 변해 사라져 갔다. 
 
 " ……. " 
 
 성호가 황당함을 느끼며 아까 벗은 목장갑을 손에 든 채 서 있으려니,
 바이크 숍과 연결된 안쪽 문을 열고 들어 온 동료가 
 입구를 쳐다보며 고개를 갸우뚱거린다. 
 
 " 방금 걔, 동하지? 준구 놈 가게에서 알바하던…… 
  웬일이래? 지금 갖고 나간 거야? "
 " 응. "
 " 어, 뭐 급한 일 있대? 
  구름이 잔뜩 낀 게 오늘 저녁도 비올 것 같던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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