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애(禁止愛) (13)
Do you remember me
I set upon your knee
I wrote to you with childhood fantasy...
어김없이 캐롤 송이 울려 퍼지는 시기가 왔다.
병원은 왠지 크리스마스완 거리가 먼 곳인 듯한 느낌이 들지만
실은 그렇지도 않다.
불운의 그림자가 항상 드리워져 좀처럼 떠나지 않는 곳이기에
오히려 이런 탄생과 축복의 날을 더욱 민감하게 받아들이는 것이다.
덧붙여 사시사철 뛰어야 하는 의사며 간호사들도
몇몇 가엾은 이들을 제외하곤 모처럼 쉴 수 있는 연말은
그 기대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는 것일지도.
징글벨 소리와 간호사를 호출하는 소리가 뒤섞인 12월 중순의 병원은
그래설까, 여느 때보다 훨씬 들뜬 분위기였다.
복도 입구 쪽엔 제법 근사하게 장식된 크리스마스 트리가
지나가는 사람들의 시선을 붙든다.
I'm all grown up now
Can you still help somehow
I'm not a child but my heart still can dream...
' ……? '
동하는 눈을 떴다. 아무래도 낮잠을 좀 오래 잔 모양이다.
오전 트레이닝이 힘들었던 탓일까. 점심 먹자마자 바로 곪아 떨어져 버렸다.
" 동하 깼니? "
침대 옆에 앉아 뭔가를 들여다보고 있던 엄마가 고개를 들었다.
아마 연구자료겠지.
1년 동안 강의를 쉬고 한국에 연구를 하러 왔다던 엄마는
아무래도 자신 때문에 전혀 시간을 내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남편과 딸까지 두고 왔을 정도면 정말 맘먹고 온 것일 텐데.
" 몇시에요? "
" 3시. "
물리치료실에 갈 시간이었다.
하루에 한번은 물리치료사가 병실로 오고,
두번은 환자인 동하 쪽이 치료실로 가게 돼 있다.
마비된 왼쪽 손발을 마사지하고 인공적으로 움직이게 하는 기본치료와
치료사가 제시하는 과제를 수행하는 작업치료 등이,
재활 전문인 이 병원에서 동하가 받고 있는 것이었다.
" 도와줄까? "
"혼자 할 수 있어요."
엄마의 말을 거절하고 동하는 오른손으로 침대 가장자리의 버팀대를 잡고
천천히 휠체어에 몸을 옮겼다.
엄마가 자신을 딱한 듯 보고 있단 걸 알고 있었지만,
의도적으로 그쪽을 보지 않으려 하면서.
…그렇게 안타까워하실 것 없어요, 엄마.
혼자 할 수 있는데 기대고 싶지 않아요.
그래도 이렇게 혼자서 할 수 있다니, 생각해 보면 장족의 발전이었다.
처음엔 혼자 힘으론 돌아눕지도 못했으니까.
재활센터로 옮기기 전, 막 깨어났을 때의 충격은 아직도 잊지 못한다.
아픈 것도 아픈 것이었지만, 자기 몸을 맘대로 움직일 수 없단 사실은
정말이지 끔찍할 정도로 절망적이었으니까.
단순히 몸이 아프기 때문이 아니라 왼쪽 팔다리가 마비되었기 때문이란
사실을 알았을 때 고함이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렇게 할 수 없었던 건 의지가 아니라
입조차도 맘대로 움직일 수 없어서였지.
다행히 팔다리완 달리 얼굴과 입 근육은
비교적 빠른 시간에 제 움직임을 찾았지만 말이다.
" 엄마, 저 다녀올게요. 혼자 갈 수 있으니까 걱정 마세요. "
뭔가 말하려는 엄마에게 그렇게 선수를 친 다음,
동하는 한 손에 힘을 주어 휠체어를 밀면서 병실을 나섰다.
왼쪽 손발은 아직도 뻣뻣하게 굳어
다른 손으로 자극을 주지 않으면 움직이지도 않았지만.
' 이 정돈 걸 감사해야 하나. '
씁쓸하게 생각했다.
몸 한쪽만 쓰긴 해도 어쨌든 혼자 움직일 수 있게 됐으니까.
처음엔 부목을 댄 채 보조하는 사람의 도움을 받아 서는 것도 힘들었지만
지금은 혼자서도 바를 붙들고 설 수 있을 정도가 됐으니까.
병원에 있으면서 자신보다 더한 사람을 많이 본 동하였다.
고칠 수 없을 만큼 심각하게 팔다리가 휘어진 환자,
입 근육이 마비되어 말도 제대로 못하는 환자,
심지어는 혼자 힘으로 먹고 마실 수조차 없는 환자도 있었다.
간질 같은 합병증으로 수시로 경련을 일으키는 환자도 봤다.
부분적으로 기억을 잃어버리는 경우도 숱하다고 했었지.
" 하아……. "
환자용 엘리베이터 안에서 동하는 길게 숨을 내쉬었다.
차라리 자신도 기억을 잃었다면…….
그랬다면, 이렇게까지 괴롭진 않았을까.
그녀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면, 조금은 덜 괴로웠을까.
- 건너자. ……둘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죠.
그게 얼마나 힘든 길인지 알면서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어.
나라면 그렇게 못해. 나라면 미련 없이 떠날 거야.
- 난, 널 놔둘 수 없어. 어떤 방법으로든 널 챙길 거야.
하지만 그 말을 한 사람은 강동하가 아니었다.
다른 누구도 아닌 이시연이란 사람이었다.
누구보다 가진 게 없으면서 남에게 주고만 싶어하는 그 사람이
한 말이었다.
그래요, 당신은 항상 처음 했던 그 말을 지켰어요.
자신도 힘들면서 그냥 내버려둬도 좋을, 죽은 남편의 아이를 돌보려고
먼저 손 내밀고, 쳐내는 손을 잡아서 위로 끌어올려 주었죠.
일찍이 느끼지 못했던 따스한 손길로.
이제서야 알았어, 떠난 것조차 날 위해 그랬던 것임을.
『 더 이상 힘들 거 없이 매듭짓기로 하자.
미안하단 말은 하지 않을게. 』
얼마나 힘들었을까. 얼마나 힘들게 한 말이었을까.
언제나 속으로만 삭이는 그 성격에 얼마나 힘들어했을까.
그런데 나는. 나란 놈은.
- 남인 주제에… 당신은 우리 아버지랑 결혼했던,
그것도 혼인신고도 안 올린 남일 뿐이잖아…!
나란 놈이 할 수 있는 말은 고작 그것뿐이었던가.
그녀를 놓아줘야 한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생각과는 별개로 결국 상처 하나를 더했을 뿐이었던.
이런 한심한 녀석에게 그녀는 다시 한번 손을 내밀어 줬다.
같이 건너자고 했다.
그렇지만.
원치 않는다. 그녀가 나 때문에 또다시 자신을 상처 입히지 않기를.
그녀가 나를 돌보느라 자신의 인생을 낭비하게 하고 싶지 않다.
일어서는 것만은 혼자 힘으로 하고 싶어.
더 이상 상대를 가시 어린 말로 찌르지는 않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게 묶어 놓고 싶지도 않다.
" ……. "
치료실에 들어가기 한박자 전, 동하는 휠체어를 멈췄다.
자신은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는 언제나 그렇게 하고 있었다.
물러서고픈 충동이 안에서부터 피어오르는 건
스스로 인식하지도 못할 만큼 자연스런 현상이었던지.
재활훈련은 질리도록 고통스런 과정의 연속이었다.
이 병원으로 옮겨오기 전에도 그랬지만,
사고 나기 전엔 지극히 당연하게 생각하던 한가질 해내기 위해
들여야 하는 노력은 상상을 초월하는 것이었다.
전기자극기를 붙이고 바에 의지해 걸음을 옮기며
겨우 겨우 기십미터를 채우는 동안,
이마에선 풀코스 마라톤을 뛸 때의 그것 같은 땀이 흐르곤 했다.
그렇지만.
- 건너자. ……둘이서.
문득 깨달았다. 자신도 모르는 새, 칼의 다리 위에 올라서 있었음을.
이미 시작한 이상, 피 흘리기 시작한 이상은
뒤돌아 봐야 별 수 없는 것이다.
저편에서 자신을 마주 보고 있는 누군가를 편하게 해 줄 수 있는 방법은,
자신이 조금이라도 빨리 진행하는 것뿐임을 알았다.
그래서 난, 전부를 걸고 다시 시작한다.
그녀가 원하는 것만큼, 아니 그 이상으로
난 이 다리를 건너길 원하기 때문에.
다른 누구도 아닌 바로 내가 그녀 곁에 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죽을 힘을 쥐어 짤 거다.
그녀가 스스로 떠난다면 할 수 없지만,
억지로 그녀를 붙들고 싶지는 않지만.
적어도 마지막 기회를 부여받은 지금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보겠어.
나가떨어지는 걸 두려워하지 말자.
이런 순간까지 곁에 남아 준 그녀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and love would never end...
저편에서 희미하게 들려오던 캐롤 소리를 가로막듯
둔탁하게 자동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멈췄던 손에 다시금 주어지는 힘.
This is my grown up christmas list
This is my lifelong wish
This is my grown up christmas list...
정지했던 흐름은, 의지를 싣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 일부러 오게 해서 미안하다. 아무래도 나 혼자선 할 수가 없어서. "
" 제 일인데요, 뭐. "
원고를 대조해가면서 사진 스캔에 번호를 매기던 시연은 고개를 들고,
답지 않게 조심스런 표정을 한 은영에게 웃음 띈 얼굴로 대답했다.
휴게실 한쪽.
두사람이 앉아 있는 소파 앞 유리탁자엔 자료 뭉치가 잔뜩 흩어져 있다.
1월 초, 어쩔 수 없을 만치 바쁜 마감기간이었다.
" 근데, 너 언제까지 이렇게 프리로만 뛸 거니. 이게 편하니? "
은영이 방금 온 슬라이드를 들여다보며 물었다.
이게 뭐야. 작게 들어간다고 이 따위로 찍어도 되는 거야?
이러구선 인쇄가 개판이니 어쩌고 하며 투덜대기나 하구,
인간들이 태도가 되먹잖았어 증말.
" 생각보단 수입도 좋고, 편하긴 하네요.
근데 기분이 좀 붕 뜬 느낌이라서…
조만간에 유진언니한테 넘어갈 거 같애요. "
" U출판이 봉 잡았네? 잘 생각했어.
프리랜서로 아무리 많이 벌어봤자, 회사에 적 두는 것 같진 않잖니.
나두 경험 있어 안다. 의료보험이 틀린 걸. "
" 그러게요. "
묘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은영의 말을 듣고 시연은 또 웃었다.
그러고 보니 오늘 해 줄 말이 있었다.
" 참, 선배. 축하해요. 날짠 잡았어요? "
" 어? 아직……음. 쑥스럽다 야. 어떻게 알았니? "
" 이 바닥에서 하나 알면 짜하고 바로 퍼지는 거 알면서.
그 중에 내가 젤 늦게 안 것 같아 섭했다구요.
어쨌든 선배도 현우씨도 제 짝을 찾아서 기뻐요.
좀 늦게 알아차린 것 같긴 하지만……. "
" 윽, 자꾸 쑥스럽게 그러지 말어. 근데 말이지,
막상 결혼하려니까 싱글 라이프의 이점이 자꾸 눈에 들어오고 그런다.
원래 이런 건가? 나 잘 살 수 있을까? "
" 하나를 잃어야 다른 걸 얻을 수 있는 거래잖아요.
대가만큼의 가치는 있을 거라 생각하세요.
시부모님 될 분들은 어떠세요? "
" 그냥 보통 분들이지 뭐.
나중엔 '시'자만 들어가도 치가 떨린다곤 하던데, 아직은 잘 모르겠어.
좋은 분들 같애.
아무리 요즘 추세라 해도 연상 며느리 싫으실 텐데,
흔쾌히 허락하신 걸 봄……. "
하다가 은영은 핫, 하고 입을 다물었다.
눈앞의 시연은 별로 동요한 것 같지 않았지만
내심 가장 민감한 영역을 건드린 자신이 원망스럽다.
당황한 은영은 나오는 대로 다른 화제를 끄집어냈지만,
그 역시 최상의 질문은 아니었다.
" 동하는… 좀 어떻대니. 나아지고 있대니? "
" 그냥 그래요. 선생님 말씀으론 잘 따라해 주고 있다던데……. "
정확히 말하자면, 담당 치료사는 이렇게 말했었다.
- 보통의 경우,
저희가 애를 먹는 건 환자가 힘들다며 치룔 거부하기 때문인데,
동하의 경우 그 점에 대해선 뭐라 불평할 건덕지가 없네요.
하지만 반쯤 의식이 나갈 정도까지 하는 건 좀 문제가…….
암튼 이렇게 독한 환자는 첨 봤습니다.
" 별 차도는 없고? "
" 아직 눈에 띄게는……. 그래도 많이 좋아졌어요. "
" 너 말고도 고모랑 어머니가 계시지? 다행이다.
그래도 한사람은 줄곧 붙어 있어야잖아.
너도 일하는 마당에 마냥 거기 있을 순 없잖니. "
" 어차피 제가 도울 수 있는 것도 별로 없는 걸요. "
" 응…? "
시연은 다 정리된 원고를 스테이플러로 집었다.
" 동하, 자기한테 손도 잘 못 대게 해요.
저 뿐 아니고 고모나 어머니한테도요. 혼자 움직일 수 있어야 한다면서.
치료하는 선생님도 그래야 한다고 하긴 했지만,
그래도 확실히 좀 무리하는 건 사실이에요.
워낙 다치기 전까지 자기 일은 자기가 해야 한단 주의였으니
답답도 하겠지만……. "
" 넌 어떤데. "
" 예……? "
자료를 들어올리던 시연의 손이 공중에서 멎는다.
은영은 슬라이드 필름이 담긴 비닐봉투 위에 싸인펜으로 뭔가를 갈겨쓰면서
태연한 어조로 덧붙였다.
" 너, 그랬지. 딱 여기서 멈추고 싶다, 편해지고 싶다구.
그러구선 너 결국 돌아왔잖아. 앞으로 어떡할 거니. "
참견장이 할머니가 된 것 같다고 스스로도 생각하면서
은영은 그래도 묻고 있었다.
그런 은영을 보다 생각난 듯 시연도 그제서야 손을 내린다.
" 동하는, 혼자 해 보고 싶다고 했어요. "
" 혼자? "
" 혼자 이겨 보겠대요. 만일에 자신이 이기지 못하면
그 때는 정말로 떠나달라고, 덤덤하게 그러데요. "
은영은 싸인펜 뚜껑을 닫고 고개를 들었다.
" 너는, 너는 어떤데. 내가 묻고 싶은 건 너야, 시연아. "
" 저는……. "
시연은 조용히 미소지었다.
" 포기하지 않아요. 포기 안 해요. 동하가 이길 거라고 믿어요. "
" 혹시 낫지 못하면……. "
" 처음, 의사 선생님이 그랬었어요.
각오하는 게 좋겠다구요, 의식이 다시 돌아오지 않을 것 같다고요.
근데 동하, 깨어났어요.
깨어나서두 한동안 혼자 돌아눕지도 못했는데…
말할 기운도 없는 것 같고 얼굴도 맘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계속 토하고….
그러던 게 이젠 얼굴도 예전하고 별 다를 바 없구,
더 이상 토하지도 않고, 혼자 휠체어로 옮겨 탈수도 있어요.
아직 왼쪽 손발은 못 움직여도, 옷도 혼자 입고 벗구요.
깨어나지도 못한다구 그랬었는데…
어느 새, 혼자 할 수 있다고 고집부리는 동하로 돌아온 걸요. "
" 시연아. "
이 바보야.
니가 힘들까 봐 그러지. 니가 고생할까 봐 그러지.
꼭 내 입으로 그런 말을 해야겠니.
니가 걱정되서 그런단 말, 입밖에 내서 해야겠어?
은영은 그러나 그저 침묵한 채, 이어지는 시연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 만일에 원래대로 돌아오지 못한대도……. "
눈에 비쳐 들어온 상대의 얼굴엔,
놀랍게도 미소가 어려 있었다.
" 그게 무서워서 일찌감치 포기하는 일은 이제 안 할 거에요.
나중을 생각하고 미리부터 겁먹지 않기로 했어요.
그 때 제 마음이 어떻게 될지, 동하가 뭐라고 할지 지금은 잘 모르겠지만,
그건 그 때 가서 생각하고 지금은 믿을 거에요.
기회를 받은 이상, 전 포기 안 해요. "
알 수 없었다.
후배는, 누구보다 지쳐 있어야 할 후배는,
이 순간 결코 불행해 보이지 않았다.
아니, 그저 살아가고 있을 뿐인 다른 어떤 사람들보다
훨씬 환한 얼굴로 그 자리에 있었다.
알 수 없었다.
어디서 저런 힘이 나올까. 억지로 만들어 낸 것이 아닌 그저 우러나온.
정말 강하구나, 넌. 시연아.
은영은 다만 끄덕였을 뿐이었다.
시연이 일을 마치고 돌아왔을 때, 예상대로 동하는 병실에 없었다.
학교에 가셨는지 어머니도 자리를 비웠고,
고모만이 옆 침대에서 조는 모습으로 병실을 홀로 지키고 있다.
시연의 기척에 그런 건진 몰라도 졸던 그녀는 금방 눈을 떴다.
" 저 때문에 깨셨나 봐요. "
" 아니, 괜찮아. 잘 잤어요. 간만에 푹 잔 것 같어. 건 뭐유? "
시연의 손에 들린 종이봉투를 본 고모가 묻는다.
" 내일 동하 생일이라서…… 백화점에서 운동화 하나 샀어요. "
" 어이구. 낼 동하 생일이었지. 깜박 지나칠 뻔했네.
엄마도 뭔가 사러 가는 것 같더니만. 세상에, 나만 잊어버린 거에요? "
고모는 얼굴을 찌푸리며 말하다가 갑자기 자세를 굳히며 시연을 봤다.
" 기억하고 있었군요. "
" ……. "
시연은 가만히 있었다.
- 마음에 걸린 건…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미처 알지 못했단 사실,
네 생일을 나만 몰랐다는 거야. 그래두… 이젠, 가족인데…….
-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면… 오라 하지도 않았어요.
재작년 이맘 때,
1월 4일은 나한테 아무 의미도 없는 그저 연초의 하루에 불과했었지.
그런데 작년부터 1월 4일은 소중한 기념일이 되었어.
살아간다는 것, 나이를 먹는단 건 이런 거구나.
예전 같으면 아무렇지 않게 지나치던 하루의 무게가
어느 새 커진다는 거구나. 그래, 그런 거구나.
1월 4일. 그 애가 날 가족으로 받아들여 준 날.
잊을 수 없을 작년의 그 날, 소중한 추억이 담긴 하루.
차라리 거기서 시간이 멈췄으면 좋았을 지도 몰라.
그랬으면 동하를 보다 편하게 해 줄 수 있었을 지도 모르는데.
그렇지만 시간은 되돌릴 수 없어. 이젠 되돌릴 수 없는 거야.
" 나두 뭐라도 준비해서 와야겠네. 나 집에 갔다 올게요,
아, 나올 거 없어요. "
서두르는 동작으로 코트 단추를 잠그면서 걸어가던 고모는
따라 나오는 시연을 만류했다.
몸을 돌려 자신의 뒤에 선 젊은 여자를 본다.
그리고는 머뭇거리는, 그러나 진심이 담긴 음성으로
가만히 중얼거리듯 말했다.
" ……고마워요, 시연씨. "
그리고, 그녀는 병실을 나갔다.
남겨진 시연은 그 자리에 꼼짝 않고 서 있었다.
다리를 움직이는 대신, 손을 가슴으로 가져간다.
심장이 뛰는 걸 느꼈다. 따뜻하다.
단 한마디의 말은 얼마만큼이나 사람의 마음을 훈훈하게 덥힐 수 있는 걸까.
행복해.
그래. 우린 행복해지기 위해 태어났다고… 그렇게 믿어도 되는 거겠지.
영원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건 무릴 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영원의 가능성을 꿈꾸면서 살아갈 만큼은 행복할 수 있다고
믿어도 되는 거겠지.
그걸로, 충분해.
" 고모, 가셨어요? "
그리고, 얼마만큼 시간이 흘렀는지 모른다.
짧은 겨울의 해는 이미 자취를 감추고
어둠이 드리워진 병실은, 그럼에도 여전히 따뜻했다.
돌아 본 시연의 시야에 휠체어가 자리한 것이 들어온다.
그 위에 있는 소년은 잠자코 자신을 올려 보고 있었다.
언제나 그랬듯 언뜻 보기엔 무표정으로 보이지만,
자세히 들여다보면 그건 나름대로 편안한 기색을 갖춘 얼굴이라
시연은 다행이라 생각했다.
" 좀 아까. "
" ……. "
동하는 말없이 휠체어를 밀어 침대 옆으로 다가왔다.
여느 때라면 재활훈련에 지칠 대로 지친 몸을 바로 침대 위로 올렸을 터일,
그러면서 도와주려는 시연을 여지없이 잘라 버렸을 그는,
웬일인지 침대 옆에 휠체어를 멈춘 채 못 박힌 듯 조용히 있었다.
움직이지도 못할 만큼 피곤한가…….
" 동……. "
거부당할 걸 알면서도 휠체어 옆으로 조심스레 다가갔을 때.
" ……였어요. "
" ……? "
무슨 말을 들었는지 알 수 없었다.
아니, 들은 것 같기도 한데 고막으로 들어온 소리를 전하는 작업을
뇌가 미처 이어주지 못한 것 같기도 하다.
시선을 살짝 내리깐 탓일까 소년의 속눈썹이 희미한 음영을 만들고 있었다.
그 속눈썹 안쪽 깊숙하게 자리한 눈동자에 엷게 물기가 어려 있다고 느낀 건
자신의 착각일까.
느릿하게 눈을 한번 깜빡이고 그대로 고개를 들어 시연을 똑바로 보면서,
동하는 나직이, 읊조리듯 조금 전의 대사를 되풀이했다.
" 조금…… 움직였어요. "
Yesterday - Yes a day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But today 그러나, 오늘
No I don't care if others say 아니, 난 다른 이들이
It's the same sad way 언제나처럼 슬프게 느껴지는 매일을
To pass the day 보내고 있대도 개의치 않아
'cause they all live without it 그들은 모두 그림자 속에서
Without making love 사랑하는 법을 모른 채
in the shadows 살아가고 있는 걸
Today 오늘,
I know 알았어…….
제인 버킨/Yesterday - Yes a day·5절
오랜만에 아주 잘 잔 것 같았다.
-라기 보단, 행복한 꿈을 꾼 것 같기도 한데
기억은 전혀 나지 않는다.
크리스마스도 지나고, 설도 지나고, 발렌타인도 지났다.
2월도 거의 다 가버린 지금.
조금 지나면 3월이 오고, 그러면 봄은 바로 코앞이겠지.
날씨도 조금은 풀린 것 같았다.
바람을 맞으면서 거리를 걷는 것이 그렇게 힘겹지만은 않다.
사람이 원하든 원치 않든 시간은 흘러간다.
지나가는 삶이 행복인지 불행인지 확실히 인식하기도 전에
시간은 흘러가, 흔적만을 남긴다.
그것이 기쁨의 여운이든 치유된 상처자국이든.
" 늦었네요. "
병실 문을 열고 들어선 시연은 조금 벙벙한 표정으로
휠체어에 앉은 채 자신 쪽으로 몸을 향하고 있는 동하를 바라봤다.
정말이지 의외였다.
입원해 있는 동안, 동하는 한번도 시연이 와서 기쁘다거나 고맙다거나,
또는 왔으면 한단 식의 말을 한 적이 한번도 없었으니까.
외려 병원에 매일이다시피 들르는 시연더러
회사 일은 어떻게 하고 있는 거냐, 빨리 가보라며
귀찮은 듯한 반응만 보였을 뿐.
자신이 시연의 일에 방해가 될까 봐 어지간히 신경이 쓰이는 모양이었다.
그런 점도 어디까지나 동하다워서, 그렇지만 마음이 아팠다.
그런데,
" 기다렸어요. "
라고.
" 저, 저기, 고모님이랑 어머니는? "
놀라긴 놀란 모양이다. 대꾸에는 허둥거림이 섞여 있었다.
" 고몬 부산 가셨어요. 엄마도 가시라고 했구요.
꼭 누가 붙어 있어야 할 필요 없잖아요? "
" 그래두……. "
" 좀 전까지 연석이가 있다 가긴 했어요. "
동하의 얼굴엔 미소가 어려 있는 듯도 했다.
" 연석이 잘 지낸대? "
" 이제 고3이잖아요. 싫어서 죽을려고 하던데요. "
" ……. "
생각해 보니 사고만 없었다면,
동하도 이제 졸업반에 올라갈 참일 것이었다.
학교에 일단 휴학계를 던져두긴 했지만 언제 끝날지 모르는 치료 때문에
복학을 기대하긴 아무래도 힘들 테지.
시연의 마음은 조금 무거워졌다.
" 오늘 누구 만났어요? "
" 응? 아니. 그냥 퇴근했는데, 왜? "
반문하면서 보니 동하가 외려 황당하단 표정이다.
코트를 벗고 있는 시연을 보다가 동하는 픽 웃더니,
오른손으로 병실 탁자에 놓인 뭔가를 가리켰다.
" 웬 케익? 연석이가 사왔어? "
" 제가 부탁했어요, 사다달라고. "
" 어머나, 먹고 싶음 진작 말하지 그랬어. "
상대가 뭔가를 원한단 사실이 기뻐서 목소리가 커졌다.
" ……하. "
동하가 기도 안 찬다는 듯 웃는다.
" 누굴 위한 건지 정말 모르겠어요? "
" ……아. "
시연은 눈을 깜박이다가, 겨우 생각난 듯 머쓱하게 웃었다.
" 오늘, 2월 25일. 생일이잖아요. 정말 몰랐던 거예요? "
" 글쎄, 아침엔 생각했던 것 같기도 한데. "
새로 옮긴 회사에 적응하느라 정신없는 사이 순식간에 한달이 가버렸다.
웬만하면 아는 친구나 선후배들하고는
이메일이나 전화로 축하를 주고받았을 텐데,
메일은 체크 안한 지 꽤 됐고,
오늘은 충전이 다 된 핸드폰을 들고 다니느라
전화 같은 건 받을 여유도 없었지.
하긴 자기 자신도 못 챙긴 생일을 어느 누가 챙겨 주겠는가.
냉장고에서 쥬스를 꺼내오고, 케익 상자를 열었다.
연노랑빛의 작은 케익이 먹음직스럽게 모습을 드러낸다.
" 고구마 케익이네. 맛있겠다. "
" 단 거 싫어하죠? 이게 좋을 것 같아서 이걸로 사오라고 했어요. "
" 딴 것도 괜찮은데……. "
그렇게 말하면서도 시연은 쿡쿡 웃었다.
동하에겐 의외로 달짝한 걸 좋아하는 어린애 같은 면이 있었다.
슈크림을 아주 좋아하고 케익을 살 땐 주로 모카나 초콜릿을 고른다.
비교적 맹숭한 맛인 고구마 케익이 취향일 리 없는 것이다.
" 불 안 붙일 거에요? "
케익 상자 속에 들어 있던 초를 보는 시연에게 동하가 묻는다.
" 내키지가 않네. "
시연은 씁쓰레한 숨을 내쉬며 가볍게 웃었다.
긴 초 두개와 작은 초 여러개. 참 심플한 방식으로 표시하는구나.
나 이만큼 버티고 살았어요, 하고.
" 이 나이에 걸맞는 건 하나도 쌓은 기억이 없는데,
시간만 너무 빨리 가 버려.
언젠가부터 나이 먹는 게 하나도 반갑지 않아. "
" 그럼 생각하지 말아요. "
조용한 음성이 울린다.
동하는 말하면서 초뭉치를 집어 저편으로 던져 버렸다.
" 나이 같은 거 무시하면 되요. 그냥 지금을 살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지금' 이렇게 존재하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고,
'지금' 이렇게 누군가랑 함께 있다고 생각하면 되는 거에요.
어차피 시간이란 것도 나이란 것도 사람이 만든 개념이니까,
그런 개념에 굳이 얽매일 필요는 없는 거야. "
길게 말하더니, 그는 숨을 조금 들이켜고 조심스럽게 덧붙였다.
" 난 그렇게 생각해요. "
시연은 미소했다. 그것이 옳던 틀리던 그런 건 상관없었다.
그렇게도 생각할 수 있는 걸로 충분하다고.
그렇게 케익을 자르고 있는 동안 문득 생각이 났다.
" 어젯밤, 아버지 꿈을 꿨어. "
" ……. "
동하는 가만히 시연을 보고 있었다.
일견 담담한 표정,
그러나 잘 들여다보면 뭔가를 생각하고 있는 것처럼도 보이는.
" 길게 꾼 건 아니고 그냥… 얼굴만, 웃고 계신 거.
그렇지만 그걸로도 기뻤어. "
" 나도 봤어요, 아버지. "
케익을 접시에 옮겨 담던 손이 멈췄다.
" 깨어나기 바로 전이었던 것 같아요.
바이크를 몰고 가다 보니 강가가 보여서,
충동이었던 것 같은데… 그쪽으로 꺾어 들어갔어요.
아버지를 뿌린 그 강변과 굉장히 닮았는데
맞은 편엔 유채꽃이 피어 있었죠. 굉장히 근사했어요.
멈춰서 그쪽을 정신없이 보는데
바로 거기 아버지가 서 있는 거예요.
이쪽에서 저쪽은 굉장히 먼 거린데,
아버지의 얼굴까지 똑똑히 알아 볼 수 있었고
왠지 거기 아버지가 있단 사실이 별로 놀랍지도 않았어요.
그쪽을 향해서 뭐라고 말하려는데…….
나더러 안 된단 듯이 고개를 흔들더라고요.
내 등뒤를 보면서 고개를 으쓱하길래 돌아봤더니, 거기……. "
가슴이 두근거린다.
눈물이 날 만큼 두근거린다.
" 누군가가 서 있었어요.
그 사람을 부르려다가 다시 정신이 들어서 돌아보니,
이미 아버진 거기 없었고……. 그게 끝이에요. "
" 누가…… 있었는데? "
" ……기억, 안 나요. "
동하는 그렇게만 말하고 케익 접시를 들어 올렸다.
그 때 휠체어 밑으로 뭔가가 떨어졌다.
어, 하고 동하가 당황하고 있는 사이,
먼저 발견한 시연이 허리를 굽혀서 집어든다.
그것은 흰 봉투였다.
" 봐도 돼? "
" ……. "
동하는 긍정도 부정도 하지 않은 채,
난감한 기색을 담은 눈으로 봉투를 노려보고 있었다.
시연은 그런 동하를 보다가 더 이상 묻지 않고
봉투를 열어서 그 안에 담긴 카드를 꺼냈다.
특별한 장식이나 그림 없이 Happy Birthday, 라고만 씌어 있는 흰색 카드.
그 카드를 펼쳤을 때.
숨이, 멎었다.
" ……그것뿐이에요. 선물을 하고 싶었는데,
내가 지금 할 수 있는 게 달리 아무 것도 없어서……. "
몸이 굳어서, 그런데 너무 훈훈해서,
그런데도 눈물이 아주 깊은 곳에서 솟아나려고 하는 것 같아서……
견딜 수 없이 자신이 부끄럽다.
동하의 음성이 귀로 들려오는 게 아니라
마음으로 부딪혀 공명하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 따스함이 한없이 행복한데, 대꾸조차 할 수가 없어.
사랑합니다.
글씨는 마치 글씨를 처음 배우는 어린아이의 그것처럼 삐뚤빼뚤했다.
" 웃기죠? 왼손으로 써서 그래요.
원래도 글씨는 오른손으로 썼었지만,
그래도 이렇게까지 못 쓸 줄은 몰랐어요.
별 거 아닐 거라 생각했는데, 꼬박 두시간이 걸리더라고요.
도저히 못 줄 물건이 되 버려서 그냥 버리려고 했었는데……. "
시연은 눈을 들어 동하를 바라봤다.
눈앞의 그는 수줍고 어색하게,
그렇지만 똑바로 자신을 보며 미소짓고 있었다.
그 미소가 금방이라도 자신의 시야를 벗어나 버릴 것처럼
흐려져 당황하는 사이, 느끼지도 못할 만큼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린다.
다신 울지 않기로 했었는데…… 한번만 봐 주자.
지금까지 운 것만큼 앞으로 나, 웃으면서 살아갈 거니까……
한번만은 자신을 용서해 주자.
카드를 가슴에 대고 꾹 눌렀다.
고개를 숙인 시연의 눈꺼풀에 입술이 닿아온다.
깃털처럼 가벼우면서도 확실하게 느껴지는 온기.
" 생각해 보니 한번도 말한 적이 없었죠, 나…….
사실은 두려워서 그랬어요.
말하면 꼭, 사라져 버릴 것 같아서 그랬어요. "
눈꺼풀에 있던 온기가 천천히 콧날을 타고 내려와
아주 작은 텀을 두고 멈추더니, 엇박자를 타고 입술 위로 떨어졌다.
분명히 자신은 눈을 감고 있는데
빛은 감긴 눈꺼풀을 뚫고 안식처럼 전부를 감싼다.
오직 하나만이 느껴져. 다른 아무 것도 필요가 없다, 이 순간엔.
그래, 달리 아무 것도 필요치 않아.
닿아 있는 입술의 감촉만으로도 떨리는 고동 음이 그대로 전해져 왔다.
그런 그녀의 호흡을 덮으려는 건지, 아니면 더욱 끌어내려는 건지,
온기가 들어온다.
숨이 빨려 들어갔다.
저도 모르게 굳어지는 스스로를 붙들 듯 얽어 오는 감촉에
움츠러드는 손과는 반대로,
머리는 붕 뜨며 입술 틈으로 달콤한 반응을 내보낸다.
억누르고 있던 전부는 아닐 지라도
참을 수 없는 최소한의 몫만큼은 던져 버리고 싶다고,
그렇게 고백하듯 그는 그녀를 휘감아 파고들었다.
속에 쌓여 있던 감정이,
겹겹이 쌓인 파이처럼 층을 이뤄 모여 있던 짙은 갈망이,
얽혀 있던 실타래 같은 안타까움이, 조금씩 풀려 들어온다.
그리고 그 몫만큼 자신의 맥박도 상대에게 이끌려 팽창하며 흐른다.
이대로 녹아 내리고 싶다고…….
혹, 이 순간 세상이 멈춘다 해도 상관없다고.
그래.
나는 지금 이렇게 존재해.
살짝 열린 창문 틈을 비집고 들어온 건지, 어딘가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그 바람은 결코 거세지 않아,
신이 연인들만을 위해 부여하는 한조각 미풍과도 같이
머물렀다 가볍게 흩어진다.
흐린 기가 남아 있던 저녁 하늘도, 그런 식으로 완전히 저물어갔다.
공원을 덮은 하늘은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만큼 맑았다.
단풍도 벌써 지워지듯 다 떨어져 내리고
추위가 서서히 다가서고 있긴 했지만,
아직은 시원함이 더 많이 남아 있는 계절이었다.
" 으……. 안에 뭣 좀 받쳐입고 나올 걸. "
" 추워? "
" 조금요.
병원에서 나올 땐 쪄죽는 줄 알았는데 벌써 이렇게 추워졌나…….
뭐, 괜찮아요. 움직이면 금방 땀이 날 테니까. "
동하가 퇴원한지도 벌써 석달이 지났다.
손발이 처음으로 움직이고 나서 그 여름까지도
되살려 보건대 매일이 참으로 더디게 느껴지곤 했지만,
지금 와서 돌이켜 보면 정말이지 빠른 속도로 회복이 진행되었단
사실을 알았다.
물론 완벽한 상태로 퇴원한 건 아니다.
휠체어에서는 벗어날 수 있었지만,
다리는 걸음마를 디딘 지 얼마 안 되는 어린아이처럼 위태로운 상태였다.
당연히 지금까지도 통원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다.
그래도 많이 좋아졌다.
목발도 필요 없었고,
불가능한 듯 보이던 계단도 수월히 오르내릴 수 있으니 말이다.
" 제가 할 게요. "
자전거 빌리는 곳에서 자신의 몫까지 꺼내 주려던 시연을 만류하며
동하는 바로 앞에 있는 자전거를 끌어당겼다.
" 괜찮아? 혼자 끌고 갈 수 있어? "
" 이거 꼭 보행틀 같아요. "
" ……? "
" 첨 걷기 연습할 때 이런 식으로… 붙들고 걸었거든요.
그 땐 평생 이래야 하나, 앞이 캄캄했는데. "
저절로 나오려던 미소를 감췄다.
오늘따라 말을 많이 하는 동하다.
평소와 다른 식으로 바깥 공기를 만끽하는 지금, 기분이 좋은 모양.
줄곧 병원과 집만을 왕복했으니, 그럴 만도 하다.
물론 오늘도 그냥 나온 것만은 아니었지만.
자전거 타기도 다리 회복운동의 한 방법이었다.
시연의 생각을 아는지 모르는지, 동하가 뚝뚝하게 덧붙였다.
" 즉, 그냥 걷는 것보다도 편하단 얘기에요. 아셨죠? "
" 그래 그래. "
시연은 끄덕여 주면서 손가락으로 저쪽을 가리켰다.
" 저기, 벤치에 잠깐 앉았다 가자.
여까지 걸어 와서 그런지 좀 힘드네. "
물론 그것은 상대를 배려한 행동이긴 했지만 전혀 거짓말만도 아니었다.
바로 어제 마감이 끝난 탓에 전신이 노곤하다.
" 자전거 많이 타 봤어요? "
" 국민학교 때 이후로 전혀. 넌? "
" 어릴 때야 많이 탔죠. 원래 타는 거 좋아하는 걸요.
중학교 때부터는 그 관심이 바이크로 옮아갔지만. "
그랬지 참. 다시 생각이 났다.
" 이젠 오토바이… 보기도 싫어졌니? "
자전거를 벤치 옆에 멈추던 동하는 나직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상대방의 눈에 담겨 있는 근심과 배려를 파악하고,
그 얼굴에 서린 구름을 걷어내려는 것처럼 맑게 웃는다.
" 절대. 사고가 난 건 내 실수였잖아요.
사람이 잘못한 거지, 바이크엔 잘못 없는 걸.
아, 하지만 사실 지금은 자동차 면허를 따고 싶어졌어요.
요즘 들어선 바이크보다 차가 더 좋아져서. "
" 아직도 자동차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거야? "
" 물론이죠. "
목소리는 경쾌했다.
한차례 시련을 겪고 동하는 되려 더 명랑해진 것 같았다.
처음 만났을 때 느꼈던 위태로운 인상은 언젠가부터 찾아 볼 수 없다.
물론 내면 깊숙한 곳에 숨겨 놓았을 지도 모를 일이지만,
적어도 지금 눈앞에 보이는 그는
마음으로부터 행복한 웃음을 짓는 법을 익히려 하고 있었다.
천천히, 그렇지만 확실하게. 그리고 그 노력은 조금씩 성과를 드러내 간다.
" 미국에 그쪽을 전문으로 가르치는 학교가 있어요.
어차피 올해 입시도 못 치게 됐고,
여기서 대학가도 나중에 다시 유학을 가고 싶다 생각했으니까,
이렇게 된 바엔 뛰어넘고 바로 가는 게 낫지 않나 하고.
이건 엄마가 해 준 말이지만요. "
" 어머니, 건강하시대? "
" 그런 것 같아요. "
동하의 엄마는 미국에 돌아갔다.
1년이 채 안 되는 짧은 기간이었지만,
그걸로도 동하의 외롭던 시간들은 어느 정도 보상받은 것 같다고,
시연은 감사했다.
시간에게, 그리고 자신이 절대 해 주지 못할 것을 해준 동하의 어머니에게.
가끔씩 자신을 비집고 나오던 질투란 감정은 그냥 넘어가자.
그런 감정을 느끼게 만들어 준 것조차 운명에게 감사하고 싶은 지금이니까.
한때는 도망치고 싶다고 그렇게나 되풀이해서 생각했던 시간들이
지금은 씁쓸하게나마 떠올릴 수 있는 기억이 돼 가고 있으니까.
그리고 언젠가는 정말로 웃으면서 떠올릴 수 있는 시간이 오겠지.
그렇게 믿고 싶다.
" 연석이는? 어느 학교 칠지 정했대? "
" 당근 서울대죠, 그 자식이야. 법대 갈 거래요. "
" 미은이는 연영과 간대던데. "
" 아아, 그래요. "
동하가 뭔가를 떠올리는 것처럼 엷게 미소짓는다.
그 얼굴을 지금 바로 옆에서 볼 수 있단 사실이 아직도 믿을 수가 없어서,
시연은 자신도 모르게 물끄러미 응시하고 있었다.
그 시선을 깨달았는지 쑥스러운 듯 동하가 몸을 일으킨다.
" ……? "
따라 일어나는 시연의 볼에 가볍게 입술이 와 닿았다.
" 나, 아직은 같이 속도를 낼 자신이 없으니까,
저쪽에 먼저 가서 기다려 주세요. 되도록 빨리 쫓아갈게요. "
" 그래. "
제대로 걸을 수 있는 것도 신기한 지금,
자전거까지 수월하게 탄단 건 아무래도 무리한 설정이겠지.
자전거에 올라 페달을 막 밟으려는 시연의 뒤에서
나직한 한마디가 덧붙여진다.
" 너무 멀리 가지 말아요? 나보다 앞서 가는 건 좋은데,
힘들게라도 잡을 수 있는 위치 이상은 절대 안돼. 아셨죠? "
시연은 안장에 앉은 채 고개만 돌려 상대를 보고,
조그맣게 웃으며 대꾸했다.
" 정말 기다려야 할 쪽은 내가 아니고 너일 걸? "
" ……. "
" 난 이미 네가 날 추월했다 생각해. "
촤르르륵…….
페달을 돌리는 소리가 활기차게 울리기 시작한다.
동하는 마지막 말을 되짚어 생각하다 고개를 숙였고,
자신도 자전거에 올라탔다.
먼저 길이 꺾어지는 지점까지 간 시연은 자전거를 멈췄다.
돌아보니 동하는 아까 자신들이 있던 지점을 그닥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다.
왼발에 힘을 주어 페달을 밟을 때마다 이를 악무는 모습이
이쪽에서도 선명하게 들어온다.
보통사람이 걷는 것보다도 느린 속도.
바람이 역으로 불어서 더한 걸까.
몸을 앞으로 수그리고 한껏 힘을 실어 페달을 밟는 동하의 모습.
이마에 한줄기 땀방울이 흐르고 있다.
왼발 쪽 페달이 돌아갈 때마다 안타까움이 칼날처럼 가슴을 찔러 와서.
하느님, 제발. 그에게 힘을 주세요.
천천히 돌아가는 페달. 한번. 두번. 위태롭게, 금방이라도 정지할 것처럼.
그런데도 멈추지 않고 끈질기게 계속한다.
흘러내린 머리카락 아래 힘껏 깨물고 있는 아랫입술이 보인다.
그래, 잘하고 있어. 동하야. 계속해. 너무너무 잘하고 있어.
아니, 아니야. 힘들면 더 하지 않아도 돼.
정말이야, 힘들면 더 버티지 않아도 돼.
네가 여기 있는 것만으로도 난 더 바라지 않으니까,
그렇게 무리하지 않아도 돼.
그 때 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어 이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미소…….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내가 여지껏 붙잡고 싶었던 것은 손이 아니라 그 미소였음을
나는 깨달아 버린다.
자신의 얼굴에도 똑같은 미소가 떠오르는 걸 느끼면서.
그래, 웃자.
저렇게 힘든데도 웃어 보이는 그에게 해줄 수 있는 단 한가지.
서로의 미소를 붙드는 것.
" 하아…… 하아……. "
저절로 숨찬 소리가 새어나온다.
더 이상 그럴 수 없을 것처럼 힘들어하면서도 동하는,
그래도 저편에서 손을 모은 채 자신을 바라보는
시연의 미소를 보면서 또 한번 다리에 힘을 주었다.
생각지 못했었지만, 아니 생각지 않으려 했었지만.
자신은 언제나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자신을 감싸고 있는 족쇄를 벗겨 줄 수 있는 마법을 베풀 누군가를.
단 한사람, 그것을 가능케 만들 단 한사람이 저기에 있어.
그 한가지로 나는 살아갈 수 있다. 힘을 낼 수 있어.
그러니까 늘 그렇게 웃어 주기를. 행복하게, 웃어 주기를.
빛을 머금은 공기를 뚫고,
짙푸른 하늘 속 희게 피어오른 뭉게구름이 내려보고 있는 공간.
사람이 그리 많지 않은 공원의 산책로 위로.
한 대의 자전거가 천천히 움직이고 있었다.
지독하리 만치 청량한 어느 늦가을의 아침이었다.
바다였다.
봄의 바다였다.
여름의 활기와 부산함을 거쳐, 가을의 성숙함을 지나,
겨울의 고요한 수면에서부터 조금씩 깨어나기 시작하는
수줍은 봄의 바다였다.
물에 젖어 부드러워진 모래사장 한 끝에 두사람 몫의 신발이 놓여 있다.
거기에서부터 죽 이어진 발자국을 죽 따라가
길게 늘어진 그림자와 맞닿은 지점.
투명하고 온화하게 흩어지는 햇살을 받으며, 그들은 말없이 앉아 있었다.
촉촉하고 시원한 감촉이 발바닥을 간지른다.
한단 접어 올린 면 팬츠 아래.
계절이 무르익지 않은 탓일까.
별로 그을리지 않은 발목과 그 밑으로 이어지는 맨발이 닿은 지점에,
모래가 푹 패인 모양을 만들고 있었다.
……그 어느 해인가의 봄이었다.
빛은 그 언젠가와 마찬가지로 눈부시게 반사되고 있었지만,
결코 아련하게만 느껴지지는 않는 봄이었다.
" 여기서 물었던 말, 기억나요? "
한동안 침묵한 채 바다만을 보고 있던 동하가 그렇게 질문을 던졌다.
뭘? 하고 되묻지 않고 시연은
시야를 차지하며 나란히 늘어선 자신들의 맨발을 가만히 응시했다.
동하도 더 말하지 않고 시연이 보는 방향을 따라가 바라본다.
눈부신 햇살 아래 드러난 자신과 여자의 맨발을.
소금물에 젖은 갈색 흙 아래,
자연 그 자체처럼 노출되어 있는 두사람의 일부를.
- 다시 이렇게… 맨발로 같이 걸어 줄 거죠?
만일 그 질문을 다시 받는다면 자신은 뭐라고 대답할까.
한치 앞도 파악할 수 없는 내가 감히 할 수 있는 말이 있는 건지.
그 때는 어떻게 해서든 거짓을 말해야 한다는 생각에 '응'이라고 말했었지만.
지금의 나는 어떤 식으로 대답할 수 있을까.
그렇게 수많은 사건을 지나치고도 자신은 아직도 알지 못한다.
어떤 게 옳고 어떤 게 그른 건지.
내가 그 순간 어떻게 행동했어야 했는지.
그저 어렴풋이나마 인식한 건 단 하나였다.
절대 놓을 수 없는 어떤 것이 있다는 것.
옳든 그르든, 그런 판단은 접어놓고
마음에서부터 놓을 수 없는 존재가 있다는 것.
그런 마음이 있다는 것.
그렇지만 동하는, 이젠 더 묻지 않았다.
그저 시연의 어깨를 끌어당겨 부드럽게 입술을 갖다댔을 뿐.
그런 것이다.
물을 필요도, 굳이 대답할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약속 따위는 하지 않아.
그저 자신의 내부를 받아들이고 인정하면 되는 거니까.
말없이 그의 입술을 받아들이면 되는 거니까.
그러면 그 순간엔,
주변에 떠도는 유일한 소리였던 파도의 음도 사라지고
단 하나의 여과된 진실만이 남겠지.
하나로 묶어 진해진 그림자.
그 속에 내가 존재하고 있다는 것.
그래, 그런 것일 거다.
끝없을 것 같던 순간이 어느 봄의 시간으로 돌아오고,
그들 위로 내려오던 햇빛이 좀 더 밀도를 키우며,
사라졌던 파도가 다시금 속삭이기 시작했을 때.
그가 몸을 일으켰다.
맑게 웃으며 손을 내민다.
" 뭣 좀 마시러 안 갈래요? "
그녀도 웃으면서 내민 손을 마주잡고, 몸을 일으켰다.
바람이 지나치게 파고드는 것을 막기 위해 대충 걸친 점퍼를 고쳐 입는다.
" …오늘은 커피가 좋겠어. "
그리고 그들은, 손을 잡은 채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다시 혼자서
언제나처럼 슬프게 느껴지는 매일,
그 매일을 보내고 있었어
태양은 나 없이 져버렸는데
갑자기 다른 누군가가 내 그림자를 건드렸고
그가 말했지
『 안녕 』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여느 때처럼 다시 혼자서
언제나처럼 슬픈 매일을 보냈지
그는 말하려 했어
나 없이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왜 자신의 그림자를 밟은 채
혼자 울고 있습니까
그가 말했지
『 알고 있어… 』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혼자서
언제나처럼 슬프게 느껴지는 매일
그 매일을 보내고 있었어
태양은 당신 없이 져버렸는데
팔로 나를 안아 그림자 속에 감추고
그는 말했지
『 가요 』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여느 때처럼 혼자서
언제나처럼 슬프게 느껴지는 매일
그 매일을 보내고 있었어
그 없이 살아가면서…….
그를 보내지 마
내 그림자를 찾아 주었는 걸
그를,
보내지 마…….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그러나, 오늘
아니, 난 다른 이들이
언제나처럼 슬프게 느껴지는 매일을
보내고 있대도 개의치 않아
그들은 모두 그림자 속에서 사랑하는
법을 모른 채 살아가고 있는 걸
오늘,
알았어…….
끝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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