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금지애(禁止愛)

금지애(禁止愛) (7)

오늘의 쉼터 2014. 9. 25. 16:45

금지애(禁止愛) (7) 

 

   
  
 
2월의 바람은 차가우면서도 어딘가 수줍은 느낌을 부여한다.
 
 바이크에 탄 동하의 허리를 붙든 채, 바람을 느끼고 있던 시연은 그래설까, 
 왠지 얼굴을 들 수가 없다. 
 
 그래도, 입가에 미소가 흐르게 되는 건 또 어째서일까.
 
 " 오늘, 알아요? "
 
 헬멧을 통해서 전달되는 탓인지, 약간 울려 들리는 동하의 음성.
 
 " 응…? 뭐가? "
 " 오늘, 무슨 날인지 알아요? "
 " ……? "
 
 시연은 가만히 생각을 더듬다가, 알아차리고선 
 아… 하고 고개를 숙여 버렸다.
 
 동하도 더는 말하지 않은 채 그저 가만히 웃을 뿐이다. 
 실은 동하 자신도 방금 생각이 났다. 
 오늘이 특별하다면 특별할 수도 있는 날이란 사실. 
 
 아마 일생 최고의 발렌타인 데이가 될 거란 생각을 하고 있는 참이다. 
 그래, 이보다 더 행복한 기분을 맛볼 수 있는 날은 반드시 발렌타인 데이가 
 아닐지라도 앞으로 얼마 되지 않을 것라고 생각한다.
 
 그런 생각에 젖어 있는 이 순간은, 싸늘한 바람조차 따뜻하게 느껴졌다.
 
 앞으로 어떤 일이 일어날 지 짐작도 할 수 없는 지금은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더… 행복한 것인지도 모른다. 
 
" 어떻게 된 거야? "
 
 카페에 막 들어선 동하를 본 연석의 제1성이다.
 
 책임감 하나는 알아줘야 할 녀석이라, 그럴 리 없을 거라 생각했으면서도 
 혹시 아르바이트하러 안 올까 봐 수업 끝나자마자 카페에 들러 
 기다리고 있는 참이다. 
 
 시연의 말이 마음에 무척 걸려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전화를 끊은 그 후부터 계속 걱정을 해 온 연석이었다.
 
 하지만…
 
 " 뭐가…? "
 
 동하는 별다른 표정변화 없이 태연하기만 하다.
 그런 친구의 얼굴을 본 순간, 그대로 맥이 풀려 버렸다.
 
 " 아… 아냐, 됐어. "
 
 연석은 아무렇지 않게 행동하는 동하를 보고 어쩐지 캐묻는 것도 
 어색하단 생각이 들어, 자기 쪽에서 이야기를 접어 버렸다.
 
 " 미안하다, 나 땜에. "
 " 알면 밥이나 한끼 거하게 사. "
 " 물론이지. 근데, 준구형이랑 영란 누나는? "
 " 내가 오니까 마침 잘됐다구 너 올 때까지 카페 좀 봐달라구 하면서 
  나갔다. "
 " 원래 장사엔 뜻이 없는 사람들이잖아. "
 
 동하의 표정이 묘하게 밝았다. 
 평소 그닥 표정 변화가 많은 편이 아닌 동하라는 걸 알고 있는 연석은 
 힐끗힐끗 친구를 살피고 있는 중이다. 
 커피를 만들고 있던 동하가 그런 연석의 시선을 알아차린 것처럼 
 고개를 들었다.
 
 " 오늘 학원 없나 보지? "
 " 안 가. "
 " 왜? "
 " 그냥. "
 
 연석의 말투가 약간 퉁명스러웠다.
 걱정시킨 것에 대한 죄책감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양, 아무렇지도 않게… 
 아니, 오히려 평소보다 한결 밝은 모습으로 일하고 있는 친구를 보는 기분이 
 그리 썩 좋지가 않다. 
 
 커피 메이커 앞에 서 있던 동하가 그런 친구를 알아차린 듯, 
 테이블에 앉아 있는 연석 앞으로 다가왔다.
 
 " 뭐 만들어 줄까? 손님도 없구. "
 " 됐어, 마. "
 " 왜 그래, 대신 일할 때 무슨 사건이라두 있었어? "
 " ……. "
 
 연석이 기가 막히다는 듯, 동하를 빤히 올려다 본다.
 
 바보취급 당한단 기분이 이런 건가.
 
 갑자기 정말로 화가 나기 시작했다.
 
 연석은 그대로 픽 하고 묘한 웃음을 흘리더니 의자에 있던 가방을 들곤, 
 앞에 서 있는 친구를 그대로 지나쳐 문쪽으로 향했다.
 
 " 대체 왜 그래? "
 
 동하의 의아한 목소리에 걸음을 멈춘 연석은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싸늘하게 뱉었다.
 
 " 너 왔으니까, 나 여기 더 있을 필요 없잖아. …간다. "
 " 진연석…! "
 
 
 넌 항상 그런 식이야.
 절대 네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주는 법이 없지.
 
 내쪽에서 먼저 친해지고 싶다고 생각한 건, 
 거짓말 안 보태고 네가 첨이었다.
 
 하지만 말이지… 
 이런 식의 일방적인 관계는 설사 '우정'이라는 근사한 두글자를 
 건다 하더라도 지탱하기 힘들어.
 우정이란, 적어도 쌍방적인 교류를 전제로 행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네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네게 무슨 일이 있는지에 대해 
 전혀 모른 채로, 의심도 갖지 않은 채로 허울좋은 친구 역할을 하는 것도 
 이제 진절머리난다.
 오늘 네 녀석의 미소를 보고 있노라니 하루를 꼬박 걱정한 내가 
 천하의 멍청이인 듯한… 그런 생각까지 들었다.
 
 결국 친구가 되고 싶어한 쪽도 나… 그리고 너에 대해 알고 싶어하는 쪽도 
 나란 결론인가. 
 난 꽤나 끈질긴 놈이니까 너한테서 손을 떼거나 하진 않겠지만 
 오늘만은 정말이지 널 쳐다보고 싶지 않다.
 
 
 " 부산 고모님 댁 갔다 왔어, 됐어? "
 
 어느 새, 동하가 팔을 붙들고 있었다.
 
 " 월요일 수업까지 빠져 가면서? "
 " 알아서 핑계거릴 만들어 줬으리라 생각했는데. "
 " 가장 고전적인 핑계다. "
 
 연석은 팔을 뿌리치면서 동하의 얼굴을 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 내일 마스크라도 쓰고 가야 하나? 암튼 고맙다. 
  근데, 내가 사정 설명 안해서 그렇게 삐진 거야? "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하… 부산 고모님 댁?
 
 
 딸랑.
 연석이 황당함에 뭐라 할 말을 잃은 채 그저 서 있는 데, 
 예의 종소리와 함께 낯익은 두사람이 문을 열고 들어 오는 것이 보였다.
 
 " 둘이 거기서 뭐해? "
 
 언제나의 2인조, 미은과 마리였다.
 마리가 넉살좋은 웃음을 흘리며 두사람 쪽으로 걸어와 얼굴을 들여다 본다.
 
 " 동하, 어제 뭐한 거니? 연석이한테 카페일 죄다 맡겨 놓구 말야. "
 " 아, 친척집에 가야 할 일이 있었어. "
 " …에스프레소로 둘. "
 
 미은이 뭔가 더 물어보고 싶은 듯 서 있는 마리를 끌고 
 맨날 앉는 창가자리 - 그들의 지정석이다 - 로 걸어간다. 
 동하가 평소에 잘 짓지 않는 표정, 즉 괜스레 씩 하고 웃더니 
 연석을 툭 치며 말했다.
 
 " 너도 쟤들한테 가 봐. "
 
 화낼 포인트고 뭐고 다 놓쳐버린 연석은, 자신의 쓸데없는 인정머리를 
 속으로만 한탄하며 두 소녀가 앉아 있는 테이블 쪽으로 향하다가 
 문득 뒤돌아보며 뱉었다.
 
 " 커피. 돈은 니가 내라. 그리고 엄청 찬 얼음물. "
 " 알았어, 알았어. "
 
 동하가 커피 석잔과 물을 쟁반에 받쳐 테이블로 갈 때까지 
 카페 안엔 네사람 외엔 아까부터 죽치고 앉아 있던 두명의 손님 뿐이었다.
 
 " 짜잔~ "
 " 뭐야, 뭐. "
 
 미은과 마리가 포장된 상자를 내밀자,
 마치 정말 몰랐던 듯 얼떨떨하게 웃으며 연석이 커피잔을 내려 놓았다. 
 연석 오른쪽에 주저앉은 동하가 입끝만 가볍게 올리더니 상자를 받아든다.
 
 " 의리의 초콜렛… 그런 거냐? "
 " 너희랑 우리랑 무슨 그리 의리가 있겠냐만은, 글쎄…? 그것도 그렇고… 
  원래 난 발렌타인에는 확실히 투자하는 스타일이야. "
 
 마리가 왼쪽 뺨을 손바닥으로 받치며 말했다.
 
 " 투자? "
 " 사수가 총을 쏘는 것 같은 거지. 
  하늘에 날아가는 새떼들을 무작정 겨눠 쏘는 거야. 
  그러다 보면 그 중에 한마리라도 떨어지겠지? "
 
 그제서야 이해한 듯, 연석이 떨떠름한 표정을 짓는다.
 
 " 그런 얘길 표적인 새들한테 막 해 줘도 되는 거야? 그리고 그렇게 
  마구잡이로 쏴서 한마리도 안 떨어지면 그거야말로 비참할텐데. "
 " 진연석. 날 똑바로 봐라. 뭐가 떨어지는 게 있어 겨냥에 실수하겠니. 
  다 자신 있으니까 총을 겨누는 거라구. "
 " …졌다. "
 
 연석이 쓰게 웃으며 이마를 짚었다.
 
 " 그래서, 우리가 오늘의 마지막 표적인가? 이미 한바퀴 돌고 온 거야? "
 " 마린 어떤지 모르겠지만 난, 귀찮아서 관뒀어. 너희 둘이 전부야. "
 
 던지듯 말하는 미은을 보며 동하가 재미있단 듯 웃는다.
 그런 동하를 미은 역시 빤히 들여다 봤다.
 
 " 오늘 묘하게 기분이 좋아 보인다, 동하. 
  맘에 둔 여자한테 초콜렛이라도 받은 거 아니니? "
 
 사실은 지금의 대사를 물으려 온 것이나 다름없다.
 
 " 아… 남고라는 환경적 특성상 유감스럽게도…. "
 " 그럼 우리가 준 게 전부? "
 " ------그래. "
 " 절대적 빈곤에서 구원해 줬으니,
  화이트 데이엔 뭔가 뻑적한 보답을 기대해도 되겠구나? "
 " 최선을 다해 보지. "
 
 평소답지 않게 시원시원하게 뱉어내는 동하를 보며 
 연석은 이젠 화고 뭐고 우선 일말의 불안감을 느끼고 있는 중이다.
 
 
 …다르다.
 그래… 확실히 달라.
 하루 낮밤 사이,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것은 동하와 함께 강으로부터 돌아온 그 다음 다음날의 저녁의 일.
 
 은영선배와 함께 만나 식사를 했던 그 중국집. 
 시연과 현우는 그닥 이렇다 할 대화를 나누지 않은 채, 
 그저 묵묵히 음식을 목구멍으로 넘기고 있을 따름이다.
 
 하지만 드디어 답답한 느낌을 주던 젓가락 부딪히는 소리가 멈췄고 
 정지상태는 그대로 무겁게 두사람의 어깨를 짓눌러 버렸다.
 
 " 제게 하실 말 있지 않습니까. 
  다 먹어 가는데 이제 그만 말씀해 주십시오. "
 
 현우의 시선은 시연을 향해 있지 않았다. 
 이미 시연이 할 말을 모두 예상한 듯, 그저 덤덤한 자세로 앉아 있다. 
 시연이 먼저 전화해 만나자고 한 건… 이번이 처음이었으므로.
 
 " 짐작하실 거라 생각하지만… "
 " 확실히 안된다는 말씀이시죠? "
 " ……예. "
 
 현우가 나지막한 한숨을 내쉬더니 약간 씁스레한 미소를 올렸다.
 
 " 그렇게 고인의 위력이 큰 줄 몰랐군요. 그 분이… 부럽습니다. "
 " 아니요…. "
 
 시연이 고개를 가볍게 저으면서 시선을 내리깔았다.
 
 " 그런 이유가 아니에요. 저는… "
 
 어두운 그림자가 그녀의 얼굴을 살짝 스쳐 지나갔다.
 뭔가 떳떳치 못한 감정…… 
 언제까지 이렇게 힘들어야 할까. 
 
 하지만 현우와의 문제는 어떻게 되든 간에 
 우선적으로 해결해야 할 숙제 같은 것이다.
 
 " 전 가장 한심한 이유로 현우씨를 거절하고 있는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말씀드릴 수가 없습니다. 
  저도 제 자신에 대해 당혹해 하고 있는 중이니까요. "
 
 현우가 고개를 끄덕거렸다.
 
 " 알겠습니다. 예… 안된다는 결론이면 충분합니다. 
  말해 주셔서 고마와요. "
 
 그걸로 몇달을 흐지부지 끌어오던 두사람 사이의 매듭은 
 일시에 끊어져 나갔다.
 
 하지만, 시연에게 있어 문제는 아직도 산더미처럼 쌓여 있었다.
 
 전형적인 공식만을 대입해선 절대 풀리지 않을 그런 문제들이 말이다.

 

 

- 둘 사이에 있었던 일--- 사람들에겐 비밀로 해야 해.
 
 굳이 시연이 이 말을 입 밖에 낸 것은 아니지만,
 그것은 암묵적인 약속으로 동하와 시연 사이에 자리잡고 있는 생각이었다.
 
 믿을 수 없는 일일 수도 있지만, 그 뒤로 봄방학이 올 때까지 
 두사람 사이엔 별다른 변화가 존재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쑥스러웠는지 
 연인들이 흔히 하는 행동을 한다든지 대사를 말하지도 않았다. 
 
 키스 이전도 이후도 가족으로서의 두사람의 관계는 변하지 않았던 것. 
 다만 눈이 마주칠 때마다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그런 행복한 미소가 
 두사람의 얼굴을 바꿔 놓는다는 사실을 제외하고 말이다.
 
 한편으로는 밑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어떤 죄의식이 
 혼자가 될 때마다 각자를 무겁게 짓누르곤 했지만… 
 지금은 이대로도 만족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숨겨진 자신과 상대의 감정을 확인했다는 그 한가지 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다고.
 
 지금은 이대로도 좋아…
 이대로 충분해….
 
 
 
 2월 25일은 시연의 생일이었기 때문에, 촬영을 끝낸 동료 기자들에 
 편집장 두분까지 회사 근처 한식당에 모여 뽀짐하게 저녁을 먹었다. 
 
 식사가 끝나고 동료들의 잘 먹었단 인사를 받고 난 후, 
 지하철로 향하는 시연에게 옆에서 걸음을 맞추고 있던 은영이 말했다.
 
 " 현우 땜에 곤란했지? "
 
 그 대사는 아까 먹은 음식 맛있었지? 하고 말하는 것이나 다를 바 없이 
 천연덕스러운 말투여서 시연은 오히려 놀랐다.
 
 " …곤란하게 한 쪽은 저예요. "
 " 후후… 또 우리 시연이 성격에 거절하느라고 얼마나 진땀을 흘렸겠니. 
  이해해 줘라. 현우 말야, 생김샌 그렇게 멀쩡해도 의외로 연애경험이   
  거의 없어서 눈치도 없어. 연애도 시험공부 하듯 꾸준히 몰아 붙이면 
  된다고 생각하는 애란다. "
 " 예. 그런데 선배… 어떻게…? "
 
 " 너, 토요일 날 현우 만났었다며. 일요일 날 대뜸 나한테 술 마시자구 
  전화 왔다. 걔 술에 약하고 추한 모습 보이는 거 싫어하는 성격이라, 
  지가 먼저 술 마시자고 하는 적, 거의 없거든. 좀… 놀랬다. "
 
 은영은 지하철 입구 계단을 조심스레 밟으며 말했다.
 
 " ……. "
 " 아예 작정한 듯 마시더라구. 그러더니 너한테 차였단 얘기 해주는데… 
  현우가 안스럽다는 생각 이전에 너한테 미안하단 감정이 먼저 생기더라. 
  나도 여자라서 그런가. 
  내가 아니었으면 너랑 현우랑 얼굴 마주칠 일도 없었을 텐데…. "
 
 시연은 은영의 얼굴을 쳐다보지 않고 앞을 본 자세로 나지막하게 대답했다.
 
 " 아녜요. 제가 죄송해요, 선배. 그보다… 현우씨, 괜찮아요? "
 " 다 그런 거지, 뭐. 걱정 마. 것보다, 동하는 이제 너한테 잘해주니? "
 " ……네. "
 
 문득 씁쓸한 미소가 흘렀다. 
 
 그런 시연을 보더니 더 묻지 않고 지하철 패스를 개표기에 집어 넣으며 
 은영이 하는 말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따뜻한 대사였다.
 
 " 주변 사람 신경쓰지 말고 너만 생각해. 알았지? "
 " 네, 선배. "
 
 은영이 격의없는 웃음을 보냈다.
 
 " 그럼 낼 보자, 나 갈게. "
 
 반대방향으로 향하는 은영선배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시연은 가만히 중얼거렸다.
 
 
 선배… 지금의 감정을 뭐라 설명해야 할까요.
 행복하지만 불안하고… 달콤하지만 쓴……
 
 감추고 있는 비밀이 있단 사실이 참 고달프고 힘들어요.
 언제쯤 선배에게 이런 내 감정에 대해 말할 수 있을까요.
 
 지금은 당혹스럽기까지 한 행복에 쉽게 취해버린 나지만…
 
 갑작스럽게 찾아온 행복이 또 갑작스럽게 떠나가 버릴까봐 무서워요.
 이전에 잡았던 행복도 그랬듯이, 운명이 기대를 배반할까봐 두려워요.
 
 무섭고… 두려워요….
 무섭고… 두려워요….
 
 
 몇번이나 같은 대사를 되뇌이면서 몇개의 역을 지나쳐 목적지에 도착했다.
 
 무거운 발을 끌고 지하철에서 내려 집으로 걷는 동안.
 굉장히 날이 빨리 풀리는 것 같다고 문득 생각했지만, 
 그건 혼자만의 느낌일지도 모른다고 피식 웃어 버렸다.
 
 자신을 감싸고 있던 바깥의 공기는 온기완 별개로 메마른 채였고
 낮동안 비워져 있던 집안의 공기도 역시나 마찬가지로 말라 있다.
 
 그저 불만 켠 채 소파에 주저 앉았다.
 
 문득 전화를 올려 놓은 수납장으로 신경이 미친다. 
 안에 들어 있는 건 너무나 닮은 아버지와 아들의 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 
 
 시연은 무심코 손을 뻗어 수납장을 열곤, 그 안에 들어 있는 앨범의 표지를 
 손가락으로 훑다가 흠칫, 하고 놀라 얼굴을 한손으로 감쌌다. 
 전부터 줄곧 자신을 내리 누르고 있던 꺼림직함이,
 혼자가 된 자신을 다시 공격해 들어왔기 때문이다.
 
 
 나… 뭘 하고 있는 거지? 
 나… 지금 뭘 생각하고 있는 거지?
 
 난… '그'와 '그'를 겹쳐서 보고 있는 걸까…? 그런 걸까…?
 내가 죄스러워 하는 건, 단지 '가 버린 그'에 대한 것만이 아닌 걸까?
 
 지금 내 옆에 존재하는 '현재의 그'에 대해서도 
 나… 죄를 짓고 있는 걸까…?
 
 뭣보다, 내가 한 행동… 옳은 건지 모르겠어….
 
 
 생각하고 있을 때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나, 앨범을 집어 넣었다. 
 
 건조한 공기의 흐름이 일순 변화하기 시작한다. 
 공기의 구조를 순식간에 바꿔 버릴 정도의 젊은 향기가 집안을 채우는 걸 
 느끼고 돌아 보니, 거실 입구에 언제나의 덤덤한 표정을 지은 채 
 동하가 서 있었다. 
 
 시연과 시선이 마주치자, 뭔가 들어 보인다.
 
 " 케익… 드실 거죠? "
 
 손에 든 건 포장된 케익 박스. 
 
 생일… 기억하고 있었어. 
 
 무심한 것 같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결코 잊지 않고 놓치지도 않는다. 
 그런 섬세함과 용의주도함이 겨우 17살인 이 소년을 어른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이유. 
 
 역시… 타고난 걸까.
 
 " 응…! "
 
 계속 가슴을 채우고 있던 감정을 누르고, 밝게 미소지어 보였다.
 그런 시연을 보고, 동하도 어색하니 입끝을 조금 움직여 마음을 표시한다.
 
 항상 그랬다. 
 이젠…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별다른 에너지를 요하지 않을 사소한 표정 변화가 
 동하에겐 유난히 힘든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시연은 상대에게 들키지 않게끔 살짝 웃었다.
 
 홍차를 끓이고… 케익을 2인용 식탁의 한가운데 놓아두고… 
 옷을 갈아 입으러 들어간 소년을 기다리는 지금 순간… 
 
 두근거림과 불안과 그리고 그 이상의 뭔가가 마구 뒤섞여, 
 연약한 자신을 주체할 수 없을 만치 헤집고 있다.
 
 그런 자신을 추스리려 애쓰는 시연의 눈에
 동하가 부엌에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아직 미완(未完)이다. 
 아무리 어른스럽다 해도, 아무리 확실한 자신을 갖고 있다 해도, 
 아무리 늘씬한 몸을 편 채 의연한 시선으로 자신을 내려 보고 있다 해도, 
 아직 17세. 아직은 미완…이다. 
 완전한 성인으로 거듭나려면 적어도 3년은 지나야 할 것이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 지금조차…… 때때로 놀랄 만치,
 성인남자의 숙성함을 지니고 있어 그것이 덜 자란 소년의 풋풋함과 섞이면 
 보고 있는 사람의 눈을 아찔하게 만들 정도의 특별한 뭔가를 드러낸다. 
 
 그리고 그 특별함은 같이 사는 시연의 눈에도 또렷이 느껴질 만큼, 
 하루가 다르게 그 깊이를 더해가는 것이다….
 
 
 믿을 수가 없어… 
 지금도 무척이나 눈에 띄는, 하지만 앞으로 더욱 매력적으로 변모할 
 가능성을 지닌 저 애가 내게 말했다… 
 
 당신이 좋다고…. 
 
 믿을 수 없지만, 분명 사실이다. 
 사실…이다. 
 
 하지만… 
 하지만… 
 나는……
 
 
 " 연석이 녀석, 염탐하는 눈치에요. "
 
 등을 돌린 자세로 커피잔에 물을 붓고 있는 뒤에 앉아 있던 동하가 
 생각난 듯 던진 말에 조금 당황한 시연이다. 
 잔을 식탁으로 가져다 놓으며 물었다.
 
 " 알아차린 건 아니겠지? "
 " 설마--- 겁나요? "
 
 소년의 눈이 장난스럽게 빛났다.
 당혹스러움을 더하게 만드는… 작은 변화.
 
 "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
 " 난, 남들이 알아도 상관없는데… 역시 곤란하겠죠? "
 " 그럴 거야…. "
 
 케익을 자른 다음, 플라스틱 칼을 내려 놓은 그녀의 중얼거림에 
 낮지만 또렷한 대답이 들려 와, 그 말에 고개를 들었다.
 
 " 남들이 우리에게 무슨 시선을 그렇게 줄 것 같냐고 처음에 말했었죠? "
 
 동하가 보고 있다. 
 입가는 미소를 짓는 것처럼 들려 있지만 눈은 시연의 머리와 가슴 깊숙한 
 곳을 투시하려는 듯, 강하게 이쪽을 향해 멈춰 있다.
 
 " 그 때와 지금관 상황이 틀리잖아. 너, 잘 생각해 봤어…? "
 " 무슨 뜻이에요…? "
 " 네 감정… 확실히 알고 있는 거니? 진심이야… 그 때…? "
 " 그쪽이 한 말은----- 진심이 아니란 거에요? "
 
 억누르고 있는 듯한 음성이다.
 
 " 동하야… "
 " 말해요. "
 
 소년의 눈을 가만히 보았다. 
 시선을 절대 피하지 않은 채, 마치 삼킬 듯 자신을 응시하는 깨끗한 동공. 
 그 까만 동공을 본 순간------ 
 
 그대로, 힘이 풀려 버렸다.
 
 " 진심이라고 생각해…. "
 
 멍하니 중얼거렸다.
 
 
 불안해도… 불안해도… 어쩔 수 없어.
 
 이젠… 거짓을 말할 수 없어… 
 부정할 수가 없다.
 
 그것이 어디서 나온 것이든… 난, 저 애를 원해…
 그래… 아주 깊은 곳에서부터 갈망하고 있다…
 
 설령, 그것이 저 애를 위한 게 아니라 할지라도.
 
 
 소년이 쑥스럽게 고개를 돌리며 웅얼대듯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 안아… 봐도 돼요? "
 
 그 날 이후, 10일이 지나도록 서로 손도 잡지 않은 두사람이다.
 
 고개를 숙인 시연은, 순간 자신이 동하와 마찬가지로 
 아직껏 고교생에 머물러 있는 듯한, 그런 기분마저 들었다. 
 그런 그녀의 기분이 전해졌는지는 모르지만… 
 
 천천히 일어선 동하는 한발짝 다가서서 멀쭘히 앉아 있을 따름일 여자를 
 그대로 가슴에 끌어 당겼다.
 
 
 괜찮을까.
 어째서지?
 막을 수 있어?
 
 
 그렇게 머리가 묻는다.
 
 
 모르겠어.
 모르겠어.
 …막을 수 없어.
 
 
 그렇게 가슴이 대답한다.
 
 그래서… 포기해 버렸다.
 
 일단 복잡한 매듭은 가장자리로 밀어 버리기로 마음먹은 시연은 
 마음이 요구하는 대로 단단한 몸에 자신을 붙인 채, 눈을 감아 버렸다.
 
 상대의 체온와 더불어 뭐라 말할 수 없이 미묘한 감각이 
 머리와 신경을 감싸기 시작한다. 따뜻함이 전신으로 퍼지자, 
 놀랄 만큼 빠르게 아까까지 자신을 지배하던 불안이 희미해져 간다. 
 이런 거구나… 스스로도 믿을 수 없을 만치.
 
 
 그래… 이것으로 충분해… 그렇게 생각했다.
 그 순간… 정말로, 그렇게 생각했다.
 
 
 …충족감. 
 
 홍차가 다 식도록 그렇게 한 자세로 몸을 붙이고 있던 두사람이 
 겨우 떨어졌다. 
 
 그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예상했던 것이다.
 
 …미소. 
 케익을 접시에 덜고 포크로 찍어 맛보는 동안, 줄곧 이어지는….
 
 그러나… 
 
 무한이란 
 현실에서 존재하는 단어는 아니다.
 
 불안은 
 잊혀질 수는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행복은,
 세계가 진동하는 리듬의 한순간이며
 삶의 흔들거림이 오가는 양극의 한가지다.
 
 이 흔들거림을 멈추게 하려면,
 부수어 없애는 수밖엔 없다. 
 
로망 롤랑/ 장 크리스토프 

 

 

신학기가 시작되고도 한달이 지나간 4월의 밤.
 
 여느 때와 다를 바 없이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동하는 집으로 가는 걸음을 재촉하고 있었다. 
 길쭉하니 자신의 뒤로 뻗은 희미한 그림자를 단 소년의 스텝은 
 힘든 하루를 지나 보낸 사람의 그것이라기엔 꽤나 힘이 실려 있다.
 
 " 훗… "
 
 저도 모르게 걸음을 빨리 하는 자신을 깨닫고선 막 웃음을 흘린 참. 
 
 물론 신경 쓰이는 일이 집이라고 없는 건 아니지만… 어째설까, 
 혼자 살던 무렵과는 다르게 집으로 가는 시간이 기다려지는 걸 
 어쩔 수가 없다.
 
 하루 일상을 어떻게 보낼 수 있는지 자신도 신기할 정도로, 
 머리 한켠은 누군가에 대한 생각으로만 꽉 차 있는 것이다. 
 
 마치 자신이 두가지로 분리된 듯한 기분… 
 잘 프로그래밍되어 있는 기계 인형처럼 매일을 흘려 보내는 육체지만, 
 그 뒷면에 존재하는 건 1초 1초 호흡하는 순간조차 
 그녀를 생각하고 있는 '진짜' 자신. 
 
 분명, 자신의 몸은 뭔가를 하고 있고 자신의 입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말하고 있는데, 마음은… 영혼은… 한순간도 그녀를 놓치지 않고 애타게 
 갈구하고 있다. 한순간도 떨어지고 싶지 않다고 되풀이해 말하고 있다.
 
 …한편으론 무거운 뭔가가 자신을 누르는 듯한 그런 감각도 존재하지만.
 
 ( 나도 별 수 없는 남자인 건가…. )
 
 동하는 무의식 중에 입술 안쪽을 꾹 하고 물었다.
 
 좋아하는 사람과 한집에 살고 있다는… 그 한가지 만으로도 
 믿을 수 없을 만치 행복한 지금이지만, 또 한편으론 뭔가 다른 것을 
 자꾸 기대하고 또 원하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 들어 그녀와 함께 있을 수 있는 얼마 안 되는 시간, 
 얼굴을 마주한 때에도 키스를 하지 않았다. 
 요구할 용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멈출 수 없게 될 자신이 눈에 보여서다.
 
 거기… 거기까지… 밀려가는 흐름을 멈추는 것, 선을 긋는 것이 
 절대 쉬운 일이 아니란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녀의 감정을 확인한 순간엔 두사람의 흐름이 일치한다는 자체만으로 
 충분할 것 같았건만 지금은… 자신에 대한 확신이 50% 정도로 엷어져 버렸다.
 
 게다가… 그녀는 아직 옛 사랑의 흔적을 완전히 지우지 못한 것 같다. 
 그 상대가 얄궂게도 자신의 아버지란 사실은… 
 행복감 깊숙이 존재하는 무게를, 몇십배 아니, 몇백몇천배나 증폭시킨다.
 
 그 지독한 무게를 실감하게 된 건, 
 며칠 전 아버지의 사진을 들여다 보고 있는 그녀를 발견했을 때. 
 내가 뒤에 있는지도 모르고, 멍하게 시선을 사진으로 보내고 있던 그녀를 
 본 그 때… 처음엔 안타까움, 그리고 질투, 그리고 슬픔, 그리고 
 호흡조차 힘겨운 옥죄임이 뒤섞인 감정에, 그만 몸을 돌렸던 것이다.
 
 …지독히, 아팠다. 
 긁힌 상처는 숱하지만 그토록 아프다고 절감한 건 그 순간이 처음이었다. 
 가슴 한쪽이 너무도 욱신거리고, 너무도 따갑고, 너무도 쓰려와… 
 그날 밤, 잠을 이룰 수 없었던 자신.
 
 그리고, 깨달았다. 
 
 이것이 함부로 건드려선 안될 감정에 손을 뻗은 댓가… 
 이것이 금지된 영역에 겁없이 발을 디딘 댓가인가.
 
 하지만… 인정하기로 했다.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것이 그녀다. 
 한번 마음 준 것은 쉽게 잊지 못하는 그런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그녀다. 
 
 그 사실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지금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녀의 창상(創傷)이 아물 만큼 아물고, 
 내 손으로 그녀를 보듬어 줄 수 있을, '제대로 된 한 인간'이 되기 전까진… 
 그녀에게 내 감정만으로 뭔가를 요구하지는 않을 거라 다짐했다.
 
 지금은… 지금은… 안된다고 생각한다.
 기다려야 한다.
 …기다려야 해.
 
 
 
 " ……? "
 
 생각에 잠겨 걷고 있던 소년의 긴 그림자가 아파트 앞에 거의 다 다다른 
 그 때, 뭔가가 등에 닿은 듯한 감각에 걸음을 멈췄다.
 
 " ……? "
 
 이어폰을 귀에서 떼고, 뒤돌아 보았다.
 
 " …동하야. "
 
 자신을 향한 채 엷게 미소짓고 있는 사람은 단발머리의 소녀였다.
 놀라서 - 왜냐면 시간이 시간이니까 - 빤히 그녀를 쳐다 보았다.
 
 " …여기서 뭐해. "
 " 너, 정말 대단하다. 어쩜 그렇게 부르고 불러도 못 알아듣니? 
  아무리 이어폰을 끼고 있어도 그렇지, 정말 너무하다. 
  몇번 불렀는지 기억도 안 나. "
 " 아… 미안. 여기서 뭐하는 거야? "
 " 으응. 그냥 친구랑 놀다가 좀 늦어졌어. "
 
 그러고 보니 약간은 혀가 꼬인 듯한 음성이다.
 
 술… 제법 한다고 마리가 그랬었던가. 
 하지만, 그래도 특별히 너그러운 부모님 밑에 있는 것 같진 않은데 
 이렇게 늦도록 술 마셔도 되는 건가.
 
 " 집 안 가냐. "
 " 그냥… 이 근처에 온 참에 니 생각이 나서… 음… 그래서… "
 " ……. "
 
 무슨 말을 하려는 거지…?
 어쩐지 불안하다.
 …불안하다.
 
 " 저기… 잠깐 앉아서 얘기하지 않을래? "
 
 머뭇거리던 미은은 동하와 눈이 마주치자, 결심한 듯 손가락을 들어
 한 곳을 가리켰다. 
 동하는 솔직히 좀 곤란하다 생각했지만 일단 미은이 가리킨 곳, 
 아파트 한구석에 위치해 있는 놀이터로 걸음을 옮겼다.
 
 
 
 한밤의 놀이터는 조용한 공기로 뒤덮여 있다. 
 허나 그 고요함은 이제 무르익어 가는 봄의 온기로 인해설까, 
 그리 싸늘하지만은 않았다. 
 콘크리트 벽이 죽 둘러진 아파트 단지 건물 사이로 
 그다지 빛이 강하지 않은 달이 엷은 빛을 뿌리고 있다.
 
 한구석이 부서진 낡은 시소와 페인트 칠이 벗겨진 미끄럼틀을 지나 
 길게 늘어진 그네 위에 두사람은 앉았다. 
 발 아래 푹 패인 모양을 한 모래흙을 버릇처럼 걷어 차면서 말없이 앉은 
 미은을 힐끗 본 동하 역시, 옆 그네에 앉은 채 앞으로 고개를 돌렸다.
 
 " 너, 오토바이 타지? "
 " 어. "
 " 나 한번 타보고 싶은데, 태워줄 수 있어? "
 
 의외다 싶을 만치, 무뚝뚝한 대답이 이어진다.
 
 " 아… 미안한데, 여잔 뒤에 태우지 않기로 했어. "
 
 너무 솔직하잖아… 하지만 네 그런 점을 좋아하니까.
 그러니까… 난 여기 앉아 있는 거야.
 그러니까… 널 보게 된 거야.
 하지만 너무 오래 참았다고 생각지 않아…?
 
 " 너, 나 어떻게 생각해? "
 " …어? "
 
 느닷없는 공격에 소년은 움찔…한다.
 소녀는 꽤나 침착한 목소리였다.
 
 " 알 줄 알았는데… 모르고 있었니…? "
 " ……. "
 " 나, 너… "
 " …미안. "
 
 동하의 대답이 짧고 낮지만 분명하게 이어진다. 
 이렇게까지 단도직입적으로 나올 줄은 생각지도 못했다. 
 아니겠지… 하는 감정이, 한방 얻어맞자 우선은 당혹스러웠지만, 
 이내 바로잡았다. 
 
 미안한 마음은 어쩔 수 없지만, 상대에게 자신의 기분을 
 솔직히 전부 말해주지 않으면 안된다고 느낀다. 
 그래서 일부러 소녀를 똑바로 보고 대답했던 것이다. 
 
 고개를 들어 상대를 바라본 미은은 자신을 보고 있는 동하를 보고,
 픽 하니 쓴 미소를 흘렸다.
 
 " …훗. 그렇구나… 역시. 사귀는 사람, 있어…? "
 " …응. "
 " 그래… "
 
 소녀의 목소리가 잦아 들어간다.
 앞 저편을 응시하고 있던 동하는 고개를 한쪽 방향으로 숙이면서 
 자신의 짧은 대답에 나직하니 부연설명을 덧붙였다.
 
 " 사귄다기 보단…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야. "
 " …행복한 사람이구나, 부러워. "
 " …그렇지도 않아. "
 " ……? "
 " 그 사람은 이제까지 살아오면서 너무 상처입을 일을 많이 겪어서 
  어떤 사건이 새로이 자기 앞에 놓이는 게 두려운 것 같아. "
 " 그 사람도 너… 좋아한대? "
 
 미은의 음성이 조금 메이는 것처럼 떨린다.
 냉정을 유지하려곤 하고 있지만 그래도… 힘들다. 
 술기운을 빌었든 어쨌든간에 자기 쪽에서 상대에게 고백한 건 
 정말 이번이 처음이었니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정말, 처음이었다. 
 
 항상 유리한 위치에 있었고, 데이트 해 본 상대가 없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이처럼 누군가에게 끌린다는 사실을 절감한 적, 처음이었다. 
 
 참고, 참고, 참다가 겨우 용기를 내어 고백했는데… 
 상대는 다른 누군가를 생각하고 있다고 말한다.
 
 그래도 후회는 안할 것이다. 
 그야 창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래도 용기를 낸 사실에 대해서 후회하진 않을 것이다.
 
 " 그렇게 말해는 줬지만… 그래도 힘든 모양이야. 
  부담스러워 하는 것 같기도 하고…. 하지만, 그렇다 해도… "
 " ……? "
 " 포기할 수 없어. "
 
 뭐랄까… 소년의 말투는 조금쯤 슬픈 기색을 담고 있어서 소녀는 
 자신이 고백을 했었고, 그리고 차였단 사실마저도 잊은 것처럼 느꼈다.
 마치 고민을 들어주는 카운셀러가 된 듯한 기분.
 
 " 그렇게 힘든 상황이야? "
 " 아직은 아니지만 앞으로 어떻게 될 지 몰라. 하지만 별 수 없어. 
  이대로 감정을 밖으로 밀어 두거나 하면 평생 후회하고 살 것 같으니까, 
  그래서… "
 
 지금 내가 갖고 있는 감정은 절대 왜곡할 수 없는… 그런 거야.
 누군가를 좋아하는 괴로움을 나 역시 아니까, 네게 상처주고 싶진 않았지만, 
 하지만… 그렇다고 솔직하지 않을 수도 없으니까.
 
 " 정말 좋아하는구나. "
 " ……. " 
 
 말없이 웃었다.
 
 
 여자로서 끌리기 이전에 인간으로서 존경해.
 여려 보이지만 한없이 강하고, 
 내가 갖고 있지 못한 그런 반짝임을 갖고 있는….
 그래, 사랑할 수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야.
 
 
 " …부럽다. 너한테 그렇게까지 사랑받는 그 사람이. "
 " …그렇지 않아. "
 
 
 난 아직 어린애인 걸.
 아직은 너무 어려서 그녀에게 해줄 수 있는 게 없어.
 지금은 그녀에게 요구할 수밖에 없는… 그렇게 무력한 응석받이가 나야.
 하지만… 언젠가는 분명 내게 기대게 할 수 있겠지.
 그럴 수 있을 거라 믿고 싶어….
 
 
 " 그 사람은… 네 오토바이 뒤에 앉을 수 있겠지? "
 " …응. "
 " 정말… 솔직하구나. "
 
 피식 웃음을 터뜨린 미은은 툭툭 엉덩이를 털면서 그네에서 몸을 일으켰다.
 언뜻 보기엔 그다지 충격받거나 한 표정은 아니지만…
 
 " 나 이제 가볼께. "
 " 어… "
 
 따라 일어선 동하는 조금 미안한 기색을 담은 목소리였다.
 
 " 데려다 줄께. "
 " 으응… "
 
 소녀가 고개를 가로로 세게 흔들었다.
 
 " 오늘은 혼자 돌아가고 싶어. …혼자 갈께. "
 " 정말 괜찮…겠어? "
 " 응. "
 
 억지로임이 분명하지만… 그래도 있는 힘을 다해 웃어 보이는 미은에게 
 동하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어정쩡하게 서 있을 뿐이다.
 
 " 가 볼께, 안녕. "
 " 아아. "
 
 소년을 뒤에 세워 둔 채, 20m 쯤 걸어가던 미은이 문득 뒤돌아 보았다.
 
 " 참… "
 " ……? "
 " 그 사람이랑 잘 되었음 해…! "
 " 아아… "
 
 동하가 미소지어 보였다.
 
 저편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소녀의 모습. 
 환하게 웃고 있지만… 아마 아플 거다… 
 그래… 꽤나… 그 아픔, 완전히는 아닐지라도, 적어도 짐작은 할 수 있다.
 
 저 애…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어른이었어…….
 
 " 미안…. "
 
 입속으로 가만히 중얼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아파트 안으로 들어갔을 때, 소년은 여느 때나 다름없이 탄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려 하다 문득 동작을 멈추고 말았다.
 
 ' 아까… 간 방향… '
 
 몸을 돌려 걸어간 방향… 한길 쪽이 아니었다… 
 지름길이긴 하지만… 위험한 길이었다.
 
 …가로등도 거의 없는 어둑한 골목. 
 그래서 유별나게 이런저런 사건들이 많이 일어나는 위험한 골목길로 
 소녀가 가버린 것이다.
 
 ' 젠장…! '
 
 동하는 열림 버튼을 누르고 쏜살같이 뛰어 나갔다.

 

 

지독한 악운…
 그래, 운이 나쁘게 풀렸다고 밖엔 할 수 없을 것이다.
 
 불길한 예감 그대로 좁은 골목길, 아무도 지나가지 않는 그 어두운 공간 
 속에서 한떼의 남자들에게 붙들려 있는 미은을 발견했을 때, 
 오히려 맥이 풀려버린 동하였다. 
 
 게다가 그 중 한명은 꽤나 낯익은 얼굴…
 
 " 도… 동하야… "
 
 남자애한테 붙들려서 거의 꼼짝도 못하고 있는 와중에서도 
 소녀는 이쪽을 알아차리고선 가느다란 소리를 냈다.
 
 " 동하…? "
 
 노랑머리가 쇳소리를 내며 소년을 돌아 본다. 
 얼룩덜룩한 검은 피부에 붉은 여드름이 뒤덮인 그는 
 이내 동하의 얼굴을 알아차렸는지 얼굴을 찌푸렸다.
 
 " 강동하, 여긴 왠일이냐? "
 
 붙들려 있는 미은을 내려다 본 노랑머리 시욱은 미은과 동하의 시선이 
 부딪힌 걸 알아차리고선 씨익 뭔가가 담긴 웃음을 흘렸다.
 
 " 아… 니 깔이었냐? 짜식, 퍽도 이쁜 냄빌 주웠잖아. 재주 좋다…? "
 " 걔, 놔 줘. "
 " 하…? "
 
 시욱이 썩은 미소를 보내더니 표정을 금새 고쳤다.
 
 " 미쳤냐? 너랑 관계된 냄비람 더더욱 놔줄 수 없지. 
  원랜 그냥 돈만 뺏고 보내 줄 작정이었는데 말야… "
 
 명치를 손바닥으로 슬슬 만지면서 동하를 노려 본다.
 입가는 들려 있지만 눈은 매섭게 이쪽을 응시하고 있다.
 오래 묵은 감정은 단 한번의 주먹조차 용납할 수 없는 건가.
 
 " 지난번에 맞은 데 땜에라두 안되겠다, 새꺄. 지금껏 시큰거려. "
 " …김시욱. "
 
 당혹스런 감정을 애써 감추며 소년은, 어떻게 해서든 
 이 사태를 해결해야겠단 생각에 입을 열었다.
 
 " 왜 이래야 하는지 정말 모르겠다. 
  만일 지난 번 일 때문이라면 내가 보상하면 되잖아.
  여자애, 놔 줘. 쟤, 나랑 얼굴만 알지 아무 사이도 아냐. "
 " 헐, 아무 사이도 아니라? 그걸 말이라 내뱉고 자빠졌냐? 
  기사 났구먼, 그래서 널 싫어하는 거야, 새꺄! "
 
 시욱이 동하를 향해 주먹을 내질렀지만 무심코 주먹을 피한 상대의 모션 
 때문에 그의 주먹은 허공을 향해 묘한 포물선을 그렸을 뿐이다.
 확실히 일대일이라면 시욱은 아직도 동하에게 미치지 못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지금은 일대일이 아니다.
 
 " 이 새끼가…? "
 
 얼굴이 시뻘개진 시욱이 미은을 붙들고 있는 다른 패거리를 돌아보자, 
 한명이 잭 나이프를 꺼내 미은의 아래에 들이 밀었다.
 
 " ……! "
 
 손으로 입을 막혀 아무 말도 못하고 있는 소녀의 얼굴은 공포 때문일까 
 이상한 모양으로 일그러져 있다. 
 울음이 나오려 하는 것을 간신히 참고 있는 모습이었다. 
 
 그런 소녀를 보자, 소년은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뭔지에 대한 확신이 섰다.
 
 ' 어쩔 수 없잖아…. '
 
 속에서 욱, 하는 것이 올라 왔지만 이 순간 그냥 눈을 감아 버리기로 했다.
 상대가 원하는 게 뭔지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치사하지만…
 치사한 기분은 이루 말할 수 없지만…
 그냥… 목석이 되자.
 …이 순간엔.
 
 
 골목 틈새로 보이는 좁은 하늘, 
 빛을 잃어가는 별들이 흐리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찬찬히 시선을 내리자 보이는 것은 울먹이는 소녀의 눈…
 그 눈에서 시선을 떼고 무방비한 자세로 몸을 폈다.
 
 ' 제발 이걸로 끝났으면… '
 
 
 이젠 나로 인해 상처입는 건… 그게 누구든 싫어.
 더이상 내 자신을 혐오하면서 살고 싶지 않아.
 
 아버지… 그에 반항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던 것들…….
 어째서 나는 그렇게 살았던 걸까.
 
 만일 오늘 밤의 일로 인해 그런 '과거의 나'를 지울 수만 있다면…
 조금은… 그래… 조금은 자신을 신뢰할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이내 단단한 무언가가 명치에 꽂히며, 숨이 탁 끊길 것만 같은 감각이 
 정신을 아득하게 무너져 내리게 만들었다. 
 
 이상하리만큼 상대가 밉다거나 그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대신, 처음엔 불쌍한 놈…이라고 생각하고, 귀찮아…라고 두번째로 생각하고, 
 언제까지일까…하고 마지막으로 중얼거리면서,
 동하는 꺾이려는 무릎에 간신히 힘을 주었다.
 
 
 이걸로 어린 시절은 졸업이다…
 그러니, 괜찮다고 믿을 수 있어…
 분명 이걸로 끝날테니…

 

 

붕대를 칭칭 감은 머리 아래 퉁퉁 부어오른 얼굴.
 처참한 몰골로 잠들어 있는 동하를 내려 보며 시연은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방금 병원에 찾아 온 어머니와 함께 미은을 집에 돌려 보낸 참이다. 
 흐느낌과 더불어 더듬거리며 말을 이어간 소녀의 설명을 종합해 보면, 
 전부터 안 애들에게 호되게 당한 모양이었다.
 
 불행 중 다행인 것은 미은에겐 아무 상처도 없다는 사실. 
 동하만 당하고 있던 중, 때마침 순찰 중이던 방범대원이 달려왔기 때문에, 
 미은에겐 아무런 해꼬지도 하지 않은 채 문제의 패거리들은 도망친 것 
 같았다.
 
 별표정 없는 얼굴로 담당의사가 한 말에 의하면 전치 2주라고.
 
 뒷머리는 열바늘도 넘게 꿰맸고, 눈썹 바로 윗 자리엔 땅바닥에 심하게 
 긁혔는지 진물이 흐를 정도로 심한 상처가 남아 있다. 
 입술은 온통 터져 있고 얼굴은 차마 보기 안스러울 정도로 부어 있었다. 
 이불 아래 보이지 않는 부분의 상처는 말할 것도 없을 정도.
 
 " 후우…. "
 
 저도 모르게 나직하고 무거운 한숨이 흐른다. 
 그 소리를 들었는지 모르겠지만,
 누워 있던 동하의 입술에서도 신음소리 비슷한 것이 새어 나왔다.
 
 " 아… "
 
 소년이 눈을 뜬 걸 알아차리고 시연은 천천히 손바닥을 얼굴로부터 떼어냈다.
 
 " 괜찮니…? "
 " 여긴… "
 
 괴로운 듯 눈을 찌푸리며 동하가 묻는다.
 
 " 병원이야. "
 " ……. "
 
 소년은 팔을 들어 시야를 가리려다가 그만 동작을 멈췄다.
 몸 전체가 불에 데인 것처럼 따갑다. 
 제길 소리가 절로 입에서 나오려다 말았다.
 
 " 움직이지 마. "
 
 말하는 여자를 올려다 보면서, 동하는 입끝을 들어 힘들게 웃었다.
 정말 다행이라 생각했다, 방금.
 
 
 만일 혼자 살았다면…
 그녀의 존재가 처음부터 없었다면…
 지금 자신의 옆에 있을 사람은 누굴까.
 과연 있기나 했을까.
 
 
 " 미안… "
 
 고맙다는 말 대신 다른 대사가 나와 버렸다.
 
 " 다친 사람이 할 말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많이 아프니? "
 " …당연하죠. "
 
 괜찮다고… 말로라도 그렇게 말할 줄 알았는데, 
 의외의 대답이 떨어진 걸 보면 어지간히 괴로운가 보다.
 
 " 물이라도 갖다 줄까? "
 " 으응… 됐어요. "
 
 고개를 저으려 하다가 동작을 멈췄다. 
 움직이는 것 자체가 고역일 만치, 몸 전체가 욱신거린다. 
 티내고 싶진 않은데, 얼굴이 저절로 일그러지고 
 힘들단 한마디가 혀끝에 대롱대롱 매달려 있다. 
 
 어어… 그렇다 해도, 그렇게까지 걱정스런 표정을 보일 건 없잖아. 
 어떤 식으로든 당신에게 짐이 되는 건, 절대 참을 수 없으니까.
 
 " 뭐 해줄 것 없어? "
 " 음…… "
 
 소년이 고개를 약간 옆으로 숙이며 생각에 잠겼다가, 
 약간 장난기 어린 미소를 머금는다. 
 괜찮다는 걸 보여줘야 한단 생각에서 나온 행동이긴 했지만.
 
 " 아픈 거 잊을 수 있게, 얘기해 줘요. "
 " ……? 무슨 얘기? "
 " 응… 첫사랑 얘기 같은 거. "
 " 뭐…? "
 
 시연은 어이없다는 듯 동하를 쳐다 보다,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린다.
 정말이지 가끔 뜬금없이 엉뚱해지는 애라고 생각하는 그녀를 보며 
 소년은 조금쯤 진지하게 표정을 바꾸었다. 
 그냥 입에서 툭 튀어나간 말인데, 쑥스럽게 웃고 있는 그녀를 보자 
 외려 궁금증이 피어 오르기 시작한다.
 
 " 아버지 전에 달리 사귄 사람 없어요? 없는 게 더 이상한 거 아닌가? "
 " ……. "
 
 자신을 보는 동하의 표정이 퍽 진지함을 알아차린 시연도 얼굴을 고쳤다.
 
 
 그런 표정을 하면… 웃어 넘길 수가 없잖니.
 아직 어린 주제에… 표정도 별로 많지 않은 주제에… 
 아주 사소한 표정변화 만으로 내 반응과 행동을 조절한다, 저 앤.
 
 
 " …있었어. 꼭 한명. "
 " 얘기해 달라고 하면 실롄가? "
 
 그러면서 얘기해 달라고 하고 있잖아, 너.
 
 " 으응… 별로 특별한 얘기도 아닌데…. "
 " 듣고 싶어요. "
 " ……. "
 
 뚫어지게 이쪽을 응시하는 동하를 보며 시연은 입술 안쪽을 살짝 물었다가 
 조금 어색하게 웃고, 그리고 이야기를 시작했다.
 
 " 대학교 때 선배야. 
  내가 3학년 때 군대에서 막 복학해서 같이 3학년이었던. "
 " 첫사랑이 꽤나 늦었네요. "
 
 베개에 몸을 기댄 자세로 누운 채 놀리는 듯한 투로 말하자, 
 여자도 그에 반응해 장난기 어린 눈을 가늘게 만든다.
 
 " 아아… 내가 정상 아닌가? 허긴 요즘 애들은 중학교 때부터 
  애인을 만든다며? 이상하게 그 전엔 남자란 존재에 눈이 안 갔어. 
  학비 걱정 하느라 여유도 없었구. 그런데 개강해서 첨 선배를 봤을 땐… 
  음… 좀 다른 느낌을  받았지. 그 땐 아직 어려서 암것두 몰랐지만… "
 " 대학 3학년이 어려요? "
 
 눈을 동그랗게 뜨는 동하의 볼을 시연이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 어리지, 그럼. 아, 너 같은 애늙은이는 별개로 치고 하는 얘기야. "
 " 많이 좋아했던 것 같은데… "
 " 그래두 소용없어. 헤어질 사람은 헤어지게 되어 있는 거야. "
 " …왜… "
 " 나, 고아잖아. 선배… 꽤나 알아주는 부잣집 아들이었거든. 나처럼 
  암것두 없는, 부모도 모르는 애는 며느리 후보로조차 싫었던 모양이야. 
  졸업할 때가 되서 취업준비에 눈코뜰새 없이 바빴던 때, 
  선배 어머님이랑 누님이랑 번갈아 가면서 날 찾아오셨더랬지. 
  외동아들인 선배한테 거는 기대가 크다, 그러니까 놔 달라고 
  참 힘들게 말씀하셨어. 차라리 뭐라고 심한 말씀을 하셨으면 
  달리 행동했을지도 모르는데, 너무 품위있고 설득력 있게 말씀하시니까 
  정말 할 말이 없었어. "
 
 너무나 담담한 말투에 외려 이야기를 조른 자신이 원망스럽게 느껴진다.
 
 " 그래서, 헤어지자고 선배한테 그랬어. 나 선배 감당할 자신 없다구. "
 " …힘들었어요? "
 
 바보같은 질문이다.
 
 " 그럼… 그렇지만, 다 잊을 수 있어. 세월이 지나면 해결되는 문제야. "
 " …그럴까요. "
 
 소년은 무의식 중에 아픈 것도 잊고 붕대를 감은 머리를 흔들었다.
 
 
 난 아니야.
 
 당신이 없는 생활 따위 이젠 생각할 수도 없어.
 내 가족이고 어머니고, 그리고 연인인 당신이 없는 생활 따위 
 이젠 생각할 수도 없어.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내 곁에서 떠나지 말아 줘.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가슴 안쪽에 흐르고 있는 대사를 뱉어내는 대신, 
 동하는 이불 위에 올려져 있던 손을 들어 시연의 오른손 위에 얹었다. 
 
 시연도 미소짓고… 눈을 살짝 내리깔고… 
 그리고 자신의 왼손을 오른손 위에 올려진 동하의 손 위에 얹는다.
 
 
 신이시여… 
 지금 이 행복을… 부디 파괴하지 말아 주소서.
 오랜 미로를 거쳐 기댈 수 있는 상대를 찾아 낸 지금의 이 작은 기쁨을… 
 부디 가져가지 말아 주소서.

 

그러나…
 
 무한이란,
 현실에서 존재하는 단어는 아니다.
 
 불안은,
 잊혀질 수는 있을지 모르나
 완전히 지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 바쁘진 않았지만 늘 같이 일하던 한사람이 없다는 사실은 
 괜스레 영란의 마음을 분주하게 만들었다. 
 가장 중요한 순간에 도움이 안되는 성준구란 인간은 사장인 주제에 
 새로 산 오토바이를 시험해 본답시고 자리를 비워, 
 지금 가게엔 영란 혼자 뿐. 
 
 아르바이트하던 동하가 아파서 못 나온다고 하면 
 자기가 대신 일을 하던지 해야 할 것 아닌가. 
 아무리 책임감이 없어도 그렇지 이건 수준 이하다. 
 저런 인간을 어떻게 믿고 앞날을 개척하지, 정말?
 
 ' 이 인간, 정말… 확 애인을 갈아버려? '
 
 홧김에 물에 담궈 놨던 재떨이를 수세미로 북북 문지르고 있는데 
 마침 종소리가 들리고 손님이 들어온다.
 
 " 어서 오세요! "
 
 아무리 화딱지가 나도, 단련된 얼굴 근육을 스윽 풀며 
 카랑한 목소리로 언제나의 대사를 외칠 수 있는 나란 여자, 
 아무래도 성준구 따위한텐 아깝지 않아?
 
 
 영란이 재떨이와 메뉴판을 테이블에 놓자, 
 방금 들어온 손님이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 저… "
 " 예? "
 " 여기, 강동하란 사람… 아르바이트하지 않나요? "
 " 동하요? "
 
 영란은 예상 밖의 질문을 듣고 자신 앞에 멀쭘히 앉아 있는 남자를 
 다시 한번 쳐다 보았다. 
 
 자신과 비슷하거나 조금 어릴 듯도 한 남자다. 
 대학생이겠지…?
 
 " 동하, 지금 없는데요. "
 " 아르바이트 관뒀습니까. "
 " 아… 아뇨, 그런 건 아니고요… 저, 동하랑은 어떻게 되세요? "
 " 동하 사촌형인데요. "
 
 그 말을 듣고서야 납득이 가는 듯도 싶었다. 
 인상이나 느낌은 완전히 다르지만 자세히 뜯어 보니,
 동하랑 닮은 곳이 있는 것 같아서 말이다. 
 
 군살없이 약간 마른 듯한 스타일이라든지, 얼굴윤곽이 약간 비슷하달까. 
 물론 동하가 언뜻 근접하기 어려울 정도로 샤프한 인상을 풍기는데 반해서 
 동하 사촌형이라는 사람은 지극히 선하고 부드러운 느낌이다.
 
 " 동하, 지금 병원에 있는데요. 모르셨어요? "
 " 예…? "
 
 선량 그 자체인 약간 처진 눈을 어설프게 크게 뜨며 동하의 사촌형 
 - 민규다 - 이 소리를 낸다. 
 서울에 올라온지 얼마 안된 사람치곤 놀랄 정도로 정확한 표준 억양이었다.
 
 " 무슨 일 있습니까? "
 " 별일이람 별일일 수도 있지만… 
  음, 그러니까… 깡패 애들한테 당했단 거죠. "
 " 예…? 얼마나 당했는데 병원에 있다는 겁니까. "
 " 전치 2주래나… 
  저도 들은 얘기고 아직 병원에 한번도 못 가봐서 잘은…. "
 
 민규는 순간 정신이 어찔했다.
 
 대학 때문에 서울에 올라와 있긴 하지만 대학생활이란 게 
 워낙에 하는 일 없이 바빠선지, 처음 있는 중간고사를 마치고 나서야 
 동하에게 생각이 미쳤고 녀석이 아르바이트 한단 얘기를 들은 기억이 
 있는지라, 전에 받은 성냥갑에 그려져 있는 약도를 보고 
 대충 길을 더듬어 찾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이게 왠 봉창이란 말인가…!
 그러지 않아도 엄마가 이번 주말을 기해서 온다고 난리셨는데, 
 이 사실을 알게 되면 한바탕 회오리가 일겠는걸?
 
 민규는 그가 항상 초조할 때 하는 버릇대로 탁자를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리다 문득 자신의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영란을 겨우 깨닫고 
 올려다 보며 말했다.
 
 " 저,  마운틴 듀>요. " 
 

 

날씨가 기가 막힐 정도로 좋다.
 작은 택시 안에서 지나쳐 뵈는 도시의 정경은 
 여느 때보다 훨씬 부산하고 생기넘쳐 보였다. 
 보도블럭에서 반사되는 빛이 유난히 시원해 뵈는, 그런 맑은 날씨.
 
 " 정말 똥고집이야. "
 
 두사람이 사는 아파트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르면서,
 시연이 한숨을 토하듯 중얼거렸다. 
 누굴 지정한 것처럼 말하진 않았지만, 옆에 서서 무심한 시선으로 
 층표시 램프를 바라보는 소년을 가리킨 것임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 이렇게 의사 선생님 말 무시하고 막 퇴원해두 되니? "
 " ……. "
 
 아주 나쁜 버릇이다.
 본인은 편하겠지만 옆에서 당하는 사람은 열불나게 만드는 버릇.
 다 알면서 눈치없는 것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행동하는.
 
 178cm의 키에 비해서도 길고 곧은 다리를 쭉 뻗어 벽을 툭툭 차고 있는 
 소년의 갸름한 얼굴은 시연의 투덜거림 따윈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것 같다.
 훈장처럼 남은 상처자국이 아직 가라앉지 않은 그 가무스름한 얼굴에 자리한 
 입술엔 조금 즐기는 것 같기까지 한 미소가 떠올라 있다.
 
 " 너 말야, 가끔 때려주고 싶은 거 아니. "
 " 이제 막 병원에서 퇴원한 환자한테요? "
 " 아, 말은 잘하네. 그러니 참지. "
 
 병원 생활이 즐거울 리가 없다. 
 
 하루만 있어도 탈출하고 싶을 만치 지긋지긋한 공간이 병실이란 거, 
 나도 모르는 바 아니라구. 
 그렇다곤 해도 어쩜 그렇게까지 나오겠다고 바득바득 우길 수가 있는 건지. 
 
 의사 선생님도 나도 졌다, 졌어.
 
 " 참, 벨 고장난 건 고쳤어요? "
 " 어… 아니. 너 땜에 무슨 정신으로 그런 것까지 챙겼겠어. "
 
 대체 뭐가 문젠지 알 수 없지만 언젠가부터 현관벨이 말을 듣지 않는다. 
 하지만 워낙 두사람 다 집을 비우는 일이 잦은 데다, 
 열쇠를 둘 다 갖고 있는 탓에 고친다 고친다 하면서도 
 까맣게 잊고 지금까지 왔다.
 
 " 역시 집이 좋아. "
 
 문을 열자, 신발을 벗고 들어가며 동하가 기분좋은 듯 중얼거린다.
 
 " 저녁 뭐 먹을래? "
 " 어… 된장찌개요. 병원 찌갠 정말 맛없었어. "
 " 좋아, 간만에 실력 발휘해서 맛있게 해줄게. 
  앉아서 쉬고 있어요, 환자께선. "
 
 " 웃… "
 
 명랑하게 몸을 돌려 부엌으로 가는 시연의 뒤에서 
 갑자기 신음소리가 들린다.
 
 놀라 돌아 보니, 약간 몸을 구부린 채 동하가 아픈 표정을 짓고 있었다.
 
 " 괜찮니? 동하야, 괜찮은 거야? 괜히 퇴원했나 봐… "
 
 깜짝 놀라, 동하의 팔을 잡고 부축하려 한 시연의 몸에 갑자기 
 손이 둘러오고, 앗 하는 사이에 그녀는 자신이 붙들려 한 그 몸에 
 찰싹 안긴 모습이 되었다. 
 
 팔이 단단하게 그녀의 몸에 둘러쳐진다. 
 당황해서 시연은 말도 잘 나오지 않았다.
 
 " 뭐야, 너… "
 " 잠깐만요… "
 
 소년의 음성은 낮고 조용하다.
 
 " 잠깐만 이대로 있어요… 잠깐만. "
 " ……. "
 
 시연은 어색한 입술을 꼭 다물며 따뜻한 향기가 나는 단단한 몸에 
 자신의 몸을 댄 채, 서 있었다. 
 상대의 심장에서부터 퍼져 나오는 온기가 자신에게 전해지자, 
 조금쯤 놀랐던 가슴의 맥박이 리듬을 빠르게 전개하기 시작한다.
 
 
 …역시 좋다.
 …역시 좋아해.
 
 이런 기분… 이런 숨결… 그리고 이 체취.
 
 상대의 존재를 통해 이 순간 난… 
 가끔 잊곤 하는 자신의 존재, 그 소중함까지 깨닫게 된다.
 
 
 그녀를 단단히 껴안고 있던 팔의 힘이 조금 풀리는 듯 해서 
 시연은 자신도 동하에게 붙였던 몸을 조금 떼고 위를 올려다 봤다.
 
 동하도 시연의 얼굴… 그리고 눈으로 초점을 맞춘다. 
 상대의 눈동자, 한정된 듯 무한한 영역에서 조용히 뿜어져 나오는 
 그 투명한 광택을 응시하고, 그리고 아까부터 줄곧 흔들리고 있던 자신을 
 더는 붙들고 싶지 않다고… 판단한다.
 
 
 알아요…? 
 나 무척 참고 있던 거.
 나도 나 자신을 잘 못 믿겠으니까 그런 이유도 있지만…
 그래도 이 순간, 이 정돈 괜찮겠죠? 
 그렇죠…?
 
 
 소년의 얼굴이 서서히 아래로 내려 오고, 입술이 겹쳐진다.
 짐작하곤 있었지만… 키스할 때마다, 입술이 겹쳐지는 바로 그 순간엔 
 어쩔 수 없이 죄의식을 떨칠 수가 없는 시연이었다. 
 
 그러나 그 입술이 자신을 흡수할 듯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하면 또,
 어쩔 수 없이 두눈을 감게 되고, 죄의식을 잊게 되고, 그리고 
 그 자리에 존재하는 자기 자신마저 잊게 되는 것이다.
 
 그것은 최초에 따뜻하고 촉촉한 봄비를 맞는 듯한 감각이었다. 
 
 오랫동안 말라 있던 마음을 적시고, 
 그 안에 굳어 있던 고통과 상실감을 녹여 버리고, 
 자신의 몸 안에 존재하는 생명력을 일깨우는… 비. 
 
 오직 한가지 만을 제외하고 모든 것을 잊게 만드는 달콤한 설레임. 
 몸 전체를 나른하게 적시는 공기의 진동. 
 
 이 순간, 두사람의 감정은 그 진동을 통해 서로에게 전해지고 
 그 진동을 통해 그 모습을, 형태를 드러내기 시작한다. 
 
 오랫동안 내부에 잠자던 감정은 비를 통해 동면상태에서 벗어나고 
 달콤한 흔들림에 한발짝 앞으로 나가 스스로를 적시도록 만든다.
 
 
 가끔 놀라게 돼…
 어떻게 이런 세계가 존재하는 거지…?
 어떻게 이런 감각을 느낄 수 있는 걸까….
 
 
 그리고 처음, 가볍게 서로를 빨아들이던 정도였던 키스는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점점 깊숙한 것으로 변해간다. 
 
 그리고 가느다란 봄비에서 어느 사이엔지 조금씩 굵어진 빗줄기를 
 머리 위로 쏟아 부어, 정신은 아까까지의 평형을 잃고 조금씩 
 공기의 진동과 더불어 흔들리고 있다. 
 
 점점 강도를 더하는 내면의 동요.
 
 
 여기까지만… 더는 안돼.
 여기까지만… 여기까지만…
 
 
 시연은 마음 속으로 연신 중얼거리면서도 좀처럼 멈추지 못한 채 
 흐름에 자신을 내맡기고 있었다. 
 그것은 동하도 마찬가지였다. 
 
 어느 샌가 너무 몰입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런 두사람은 등 뒤에서 난 문소리도 듣지 못하고 있었다.
 
 " 하아… "
 
 긴 키스의 끝, 겨우 이성을 발동시켜 현실로 돌아온 두사람은 
 호흡을 고르면서, 힘겹게 서로로부터 자신을 떨어 뜨렸다.
 
 " ……? "
 
 그 때서야 뭔가 이상한 감각을 느끼고, 아직도 완전하게 균형을 잡지 못한 
 몸을 천천히 돌려 문쪽으로 시선을 보낸 그들이었다.
 
 그리고…
 
 " ……! "
 
 순간, 호흡이 멎는 것 같았다.
 
 눈이 크게 떠졌다. 
 어깨가 굳어진다. 
 머리가 텅 비어 버린다.
 
 …아까완 다른 의미의 휘청임.
 
 
 이럴 수 있는 걸까… 
 이럴 수….
 
 
 문 열린 현관… 
 두사람의 눈에 들어온 것은.
 
 …동하의 고모가 망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 …금, 지금 이게 대체…?! "
 
 한동안 말을 못 잇고 있던 고모는 겨우겨우 입을 열어 짧게 뱉었다.
 
 " 저……. "
 
 시연의 얼굴이 파랗게 질린다.
 
 건조하다.
 몸이 싸늘해진다.
 머리만, 머리만, 뜨거워진 감각.
 
 
 이건 혹 꿈이 아닐까…?
 이게 현실일 수 있을까…?
 
 
 문을 잠궈 놓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초인종까지 고장난 와중.
 응답이 없으니 그냥 문고리를 돌려 보았던 고모는 예상 밖으로 
 수월히 돌아가는 문고리를 잡곤 안으로 몸을 들였던 것이다. 
 
 그리고… 상상도 못했던 광경을 시야에 맞닥뜨린 것이다. 
 정말이지 상상도 못했던 광경을. 
 
 
 엄마, 동하가 다쳤댄다. 응… 괜찮은 것 같긴 해도…
 
 
 여기 올라와 마주한 아들의 조심스런 한마디. 
 
 수업이 있단 아들을 뒤로 하고서, 부리나케 달려온 이곳. 
 병원에 전화해 봤더니, 퇴원했다고 해서 내심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도 
 걱정으로 한달음에 달려왔는데… 
 
 상상도 못했던 광경을 시야에 맞닥뜨린 것이다. 
 그 때까지의 근심걱정 따윈, 일순 뒤엎을 정도로 황당한 광경을.
 
 동생하고 결혼했던 여자와… 10살 어린 동생의 아들이…
 
 
 이게 가당키나 한 일이란 말인가…!
 
 
 "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주실래요? 이시연씨. "
 
 정신을 겨우 가다듬었는지 고모가 약간 날카로운 어조로 질문을 던진다.
 그 소리가 꽤나 높아서 고모가 흥분해 있단 사실이 그대로 느껴졌다.
 
 " 아… 저……. " 


 " …고모. "
 
 입을 연 시연을 막듯, 동하가 약간 잠긴 듯한 소리를 낸다.
 동하라고 놀라지 않았을 리 없지만, 흥분해 있는 고모에겐 
 자기가 얘기하는 편이 낫겠다고 생각한 것이다.
 
 " 두사람, 어떻게 이런 일이… " 


 " 고모. " 


 " 이럴려구, 부산에 내려오지 않겠다고 고집부린 거니? " 

 " 제 말 좀… " 


 " 정말 대단하군요. 어떻게 이럴 수가 있죠? 한참 연상인 남자와 
  사귀어 봤으니, 이번엔 열살 아래인 애까지 손을 뻗치는 건가요? " 


 " 고모……!!! "
 
 동하의 입에서 외침에 가까운 소리가 터져 나왔다.
 기가 막히다는 듯, 뾰족한 인상의 얼굴을 약간 움직여 소년을 응시하다, 
 고모는 짧게 한숨에 가까운 대사를 뱉었다.
 
 " 동하, 너… " 

 " 제가, 제가 먼저 좋아했어요. 
  그게 뭐가 잘못이죠? 그게 뭐가 나쁜 거죠? "
 
 숨길 게 아니다.
 이렇게 된 거, 숨길 것이 아니야.
 어차피 이런 거, 내 방식은 아니었어.
 
 " 아니, 얘가…… " 


 " 부산에 가지 않겠다 했을 땐, 아직 이런 사이가 아니었어요. 
  저 혼자 마음 속으로 좋아하고 있었을 뿐. 
  이제 겨우 마음을 돌려 줬다구요. "
 
 말하자…
 그래, 말해 버리자…
 고모에게… 세상에게… 전부…
 내 감정 전부를.
 
 " 그래, 좋다. 
  그 땐 그런 사이가 아니었으니 부산에 가지 않아도 괜찮았겠지만 
  이젠 상황이 다르단 말이구나. 그래, 당장 짐 싸서 내려가자. "
 
 " …싫어요. "
 
 
 나는… 아버지의 여자를… 사랑한다.
 그것이 나쁜가…?
 
 그녀도… 죽은 남편의 아들인 날 사랑한다고… 말했다.
 그것이 나쁜가…?
 
 아니다.
 우리는… 잘못하지 않았어.
 
 
 " 동하야…! 지금 이게 말이나 되는 거니?

 이 여잔 너보다 연상이란 걸 따지기 이전에 네 아버지랑 결혼한 사람이야! " 

 " 아니요.
  고모님이 생각하시는 정도로 우리 두사람, 나쁜 짓 한 거 없다 생각해요. 
  아버지랑 식만 올렸지, 실제론 남이잖아요? 아버진 돌아가셨어요. 
  죽은 분까지 배려하며 제 마음 부정하는 거, 싫어요. "
 
 
 그래, 우리는 잘못하지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에 솔직했을 뿐이다.
 우리는… 거짓을 말하지 않았을 뿐이다.
 
 그것이… 죄인가…?
 진실을 받아들인 것도 죄인 건가…?
 
 
 " 동하야…! "
 " 분명히 말하겠어요, 전 여기 계속 있을 거예요. "
 
 
 나, 필요해.
 나에겐 이 사람이 필요하다.
 
 이 순간, 분명히 알았다.
 나…

 이 사람이 없으면 한발짝도 움직이지 못해.
 
 
 " …동하야, 그만. "
 
 차분한 음성이 들린다.
 
 " …그만해. "
 
 다시 한번,

그녀가 말한다.
 조용하고 맑은…

내가 좋아하는 목소리.
 
 그 소리에 난, 고통스런 소용돌이에서 겨우 자신을 끄집어 낸다.
 
 " ……. "
 
 소년이 시선을 옆으로 돌리며 입술을 꾹 물었다.
 처음 생각하곤 달리, 어느 사인가 자신의 감정에 휘말려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그래도 자신의 행동이 잘못이라곤 생각지 않는다. 
 조금 어른스럽지 못했단 건 인정하지만

 그래도 진실을 내보인 자체에 대해선 잘한 짓이라 생각한다.

 고모가 받아들여 줄지는 별론으로 치더라도.
 
 시연은 입술을 문 동하를 보다가 조용히 고모에게 시선을 돌렸다. 
 말문이 막힌 채, 질린 표정을 하고 서 있는 중년 여자도 
 자신을 벨듯이 쳐다보고 있다.
 
 차가운 시선. 
 경멸과 당황과 혐오가 뒤섞인 눈빛.
 
 그 시선에 잠시 고개를 숙이긴 했지만,

 정신은 놀라우리만치 차분하게  돌아와 있었다. 
 동하의 격앙된 목소리에 외려 지금의 이 상황을 현실로 받아들일 수 있도록
 돌아온 그녀였다.
 
 
 이건 꿈이 아니다.
 그건 나의 바램일 뿐.
 
 어차피 일어날 일이었다…
 우리의 예상보다 조금 빨랐을 뿐.
 
 현실이다…

 이것이 현실…
 고모님을 눈앞에 둔 지금이 바로 현실이다…
 
 마치 벌레를 보는 것 같은 시선…

그것이 현실…
 아프지만 직면해야 할 현실…

그래, 올 것이 왔어.
 
 
 눈을 꼭 감았다 서서히 떴다.
 그리고 시연은, 얼굴을 하얗게 해서는 자신의 앞에 경직된 듯 선 
 중년 여자를 똑바로 응시하며 조심스레 말했다.
 
 " 제가 설명드릴게요. 저랑 얘기하세요, 고모님. "

 

 그저… 짧다고만 생각했다.
 빛을 잡으려고는 하지 않았다.

'소설방 > 금지애(禁止愛)' 카테고리의 다른 글

금지애(禁止愛) (9)   (0) 2014.09.25
금지애(禁止愛) (8)   (0) 2014.09.25
금지애(禁止愛) (6)   (0) 2014.09.25
금지애(禁止愛) (5)  (0) 2014.09.25
금지애(禁止愛) (4)   (0) 2014.09.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