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애(禁止愛) (5)
' …피곤해…. '
저녁부터 죽 카페에 앉아 - 물론 눈치가 보이는지 주문을
더 하긴 했지만서도 - 있던 두 여자애들을 막 떼어 놓고 오는 참이다.
통금도 없는 지 - 하긴 성당에 갔다 온단 핑계를 댔다고 했다 -
밤새도록 네명이서 놀자는 것이었다.
겨우 설득하여 연석과 한명씩 맡아서 데려다 주고 집에 도착했을 땐
이미 새벽 3시가 넘어 있었다.
그 성격에 또 걱정하다 잠도 못 자고 기다리는 게 아닌가 생각하며
올려 본 집의 불이 꺼져 있는 것으로 보아 '새 엄마'는 잠이 든 모양이다.
다행이라고 생각하며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들어 갔을 때,
동하는 완전히 컴컴해야 할 집안에서 희미한 빛이 나고 있는 것을 깨달았다.
' 장식용 전구--- 인가? '
생각이 났다.
아마 끄는 걸 깜박하고 그냥 잠든 모양이었다.
슬리퍼를 신고 거실 쪽으로 살금살금 걸어 갔다.
시연의 방문을 언뜻 보니 꽉 닫혀 있는 걸로 보아
마루 불을 켜도 될 것 같아 거실 형광등 스위치를 찾아 눌렀다.
거실 불을 켜고 전구 스위치를 찾을 생각이었다.
' …어…? '
조금 놀라고… 그리고, 저절로 미소가 흘렀다….
거실에 있는 소파에 시연이 담요를 몸에 두른 채 앉은 자세로
잠들어 있었던 것이다.
장식용 전구에서 나는 색색가지 빛이 얼굴과 몸에 비쳐
무지개 같은 무늬를 그리고 있다.
어지간히 피곤했던 듯 불을 켰는데도 전혀 느끼지 못한 채
잠에서 깨어나질 않는다.
보통 땐 항상 묶고 있는, 어깨에 내려온 머리카락과 흘러 내린 담요 사이로
보이는 흰 티셔츠--- 그 위로 뻗은 화장기없는 흰 얼굴을 소파에 기댄 채,
아기처럼 자고 있는 모습을 본 동하는 픽 웃고 난 후, 소파 쪽으로 가서
담요를 고쳐 덮어주며 다시 한번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저렇게 무방비한 주제에… 남을 돌보겠다고…?
' 훗… 하지만… 어른인 척하는 것보단 낫군…. '
생각하는 소년의 머릿 속에 며칠 전,
시연이 자란 고아원에 갔다 왔던 날 저녁의 충동이 다시 되살아 난다.
그 때… 그건… 분명…
' 바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손을 뗐을 때 여자가 눈을 떴다.
" …음…… "
겨우 뜬 눈에 조금 당황한 기색을 한 채 서 있는 모습이 비친다.
" …후… 언제 왔어…? "
" 깨워서 미안… 이런 곳에서 잠들면 어떡해요. "
" 언제 여기서 잠이 들었지…? 몇시야? "
" 벌써 크리스마스에요. 새벽 3시가 넘었어요. "
" …그래? 참, 이거 받아. "
옆에 놓인 종이봉투에서 포장된 걸 꺼내 동하에게 주면서,
시연은 맘에 안 들면 어떡하나 조금 긴장한 모습이다.
하지만 그걸 받기 전에 우선 자신의 배낭에서 뭔가 부스럭대며
꺼내고 있던 소년은 시연의 긴장을 미처 눈치채지 못한 채,
역시 아무 말 없이 다른 포장을 내밀었다.
시연의 얼굴에 웃음이 서서히 번진다.
잠이 완전히 깨 버렸다.
놀라서도 아니고 기뻐서 잠이 깨 보긴 이번이 처음인 것 같다.
동하를 보니 약간 쑥스러운 미소를 띄운 채 자신을 보고 있다….
" 같이 끌러 볼까? "
각자 조심스레 포장을 끌러 내용물을 확인한 두사람은 다시 한번 놀라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고, 그리고 이번엔 소리를 내서 쿡쿡 웃어 버렸다.
포장 안에 들어 있던 것은 둘다 짙은 고동색의 가죽장갑이었던 것이다.
" 와… 너무 기쁘다… 어떻게 이걸 살 생각을 했어?
나야, 언뜻 보니 장갑다운 장갑이 없는 것 같길래 샀지만…. "
" 장갑낀 걸 한번도 못 본 것 같아서…. "
색깔도 디자인도 비슷하다.
실은 같은 브랜드에서 산 것이니 당연할 수 밖에 없지만.
꼭 커플 장갑 같다고 생각하며 시연은 장갑을 낀 동하의 손을,
역시 장갑을 낀 자신의 손으로 잡았다.
맞는지 살피려는 의도에서 나온 자연스런 행동이었지만 '딱 맞네…?' 하며
소년의 얼굴을 본 순간, 그 얼굴이 너무나 굳어 있어 그만 움찔했다.
마주친 시선을 황급히 피하면서 동하가 손을 빼낸다.
시연도 당황해서 눈을 돌린 채 장갑을 벗었다.
" 고마워요. 잘 낄게요. "
" …나두. 고마워. "
몸을 일으킨 동하는 등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린다.
그 뒷모습을 본 시연은 방금 벗은 장갑으로 시선을 떨구고,
아까 두사람의 손이 닿았던 부분에 가만히 손가락을 댔다.
' 또 무슨 실수를 한 걸까…? 하지만… 방금 그건 뭐였지…? '
한편 방으로 들어간 소년도 코트를 옷걸이에 걸며,
책상 위에 놓은 가죽장갑으로 시선을 보냈다.
파자마로 갈아 입은 그는 침대 위에 앉아 왼쪽 장갑을 다시 끼고
오른손으로 아까 시연이 한 것처럼 장갑낀 쪽 손을 천천히 쥐어 보았다.
이윽고, 뭐라 한마디로 표현하기 힘들 정도의 복잡한 표정이
얼굴을 스쳐 간다.
' 오버했어…. '
네모진 창문에 가득찬 어둠 사이로 아직도 눈이 조금씩 흩날리고 있다.
…20세기 마지막 크리스마스 아침이 다가오고 있다…
늚음과 헤어짐에 대한 깨달음을 강요하는 잔인한 증인……
김태길/ 사진첩
" 그 애들… 잘 있겠죠? "
크리스마스 티를 내느라 여느 때보다 좀 잘 차린 아침식사를 앞에 둔 채
의자에 막 앉은 시연에게 들려 온 소리였다.
방금 구운 갈비와 어제부터 푹 끓인 곰국.
식사가 끝나면 먹을 생크림 케익도 사두었다.
" 그 애들…? "
" 지난 번에 갔던 곳…. "
소년은 잘 차린 음식을 보고 갑자기 며칠 전 같이 갔던 고아원 아이들
생각이 난 모양이다.
알아들은 시연이 차분하게 말했다.
" 그럼… 잘 지낼 거야.
거기, 서울에서 떨어져 있고 잘 알려지지 않아 이런 날 티내려고 방문하는
사람들은 없어도 늘 꾸준히 도와주시는 분들이 있거든.
선물도 꽤 쌓였을 걸. 나도 얼마 안 되지만 돈 드리고 왔구. "
" 미리 말해 주었으면 뭔가 준비했을텐데. "
" 그런 것보다두… 누군가 찾아와 준다는 것 자체로
그 애들은 행복해 하니까… 걱정하지 않아도 돼. "
" 다음에 또 같이 가도… 괜찮아요? "
" …물론이지! 정말 기뻐할 거야.
애들이 동하 참 좋아하던데. 특히 여자애들이… 잘생긴 오빠라구. "
실없는 소리하기에요… 하는 듯 피식 웃으면서도,
소년의 얼굴은 조금 붉어졌다.
같이 살면서 또 하나 알게 된 사실…
칭찬받으면 굉장히 거북해 하는 타입이라는 것.
기복이 거의 없는 성격으로 보이지만 알고 보면 수줍음이 많은 것이
동하란 소년의 또 다른 특징인 것이다.
" 내가 선생님이 길러주신 첫번째 아이란 사실은 몰랐지? "
아직 싱겁다고 생각하며 곰국에 소금을 뿌리고 있던 동하가 고개를 들었다.
" 역사가 짧네요. "
" 엄밀히 말하면 고아원이라 하기도 그래.
선생님이 그 집을 짓고 사모님이랑 같이 나를 포함해 3명의 애들을
기르기 시작한 게 시작이니까. "
" 어떻게 하다 시작하게 됐어요? "
시연은 잠시동안 생각하다가 마침내 정리된 듯 찬찬히 설명하기 시작했다.
" 선생님이랑 사모님에게도 아기가 있었대.
그런데 돌이 조금 지나 뭐가 잘못됐는지 죽은 거야.
처음부터 인큐베이터에 두어야 할 정도로 약하긴 했었지만
이젠 괜찮아졌거니 생각했는데--- 병원에 부랴부랴 갔지만
이젠 가망이 없다고, 곧 숨이 멎을 거라고 하더래.
아길 그렇게 보내고, 정말 망연자실하셨던 모양이야, 두 분.
게다가 사모님이 몸이 약해서 유산을 두번이나 한 끝에 늦게나마 겨우
얻은 아기였거든. 아길 또 가지면 그 땐 목숨이 위태로울지 모른다는
의사의 충고까지 받은 터라 정말 소중한 아기였는데…. "
동하가 숟가락을 국그릇 안에 내려 놓고 이야기를 하는 여자를 바라 본다.
" 선생님은 그 때 꽤 잘나가는 중소기업을 하고 계셨대.
그렇게 아기를 보내고 도저히 일로 돌아갈 힘이 나지 않으셨던 모양이야.
그럴 때 우연히 날 줍게 된 거야. 늦은 저녁, 어느 공원에 버려져 있더래.
미아신고소에 갔지만 부모는 나타나지 않고 아기 포대를 뒤져 보니
내 이름이랑 생일, 나이 그런 게 적혀 있더라 하셨어. 그래서,
날 기르기로 하신 거구, 그러다 고아들을 더 모아 기르기로 하자구
의견이 모아져 두명을 더 데려왔고, 사업을, 처음 같이 시작했던 선생님
동생 분께 완전히 넘기고 그 집을 지어 우릴 돌보기 시작하셨어.
그게, 시작. "
시연은 이야기를 끝내고 동하를 보며 조용히 웃었다.
" 아주머니는요? "
" 워낙 몸이 약하셨거든, 사모님. 나 고등학교 때 돌아가셨어.
그 무렵쯤이었을 거야. 아주머니가 오셨던 건.
남편 돌아가시고, 따님 시집 보내고 그러고 우연히 이곳을 알게 되셨는데,
그 뒤부턴 죽 머물면서 우리를 돌봐 주셨어.
우리가 간 날 우연찮게 다른 분들이 집에 가셨던 모양인데,
실은 돌봐주시는 분들이 두명 더 계셔. 그 외 자원봉사하는 분들도
가끔 오시구. 나한텐 누구 한분 가릴 것 없이 부모님 같은 분들이야…. "
감상에 젖은 듯한 모습을 하고 있다가 시연은,
전혀 줄지 않은 동하의 밥그릇을 보고 깜짝 놀랐다.
" …얘길 너무 길게 했지. 어서 먹자. "
" …운이 좋군요, 전. "
" ……? "
" 첨 알았어요… 바보처럼. "
생각에 잠긴 것처럼 눈을 내리깐 채 중얼거리듯 말한 동하를 응시하며
시연은 마음 속으로만 그 말에 대답했다.
운이 좋은 건 나야.
난생 처음… 내 가족을 얻었는 걸….
넌, 아마 잘 모르겠지만… 나… 지금 무척 행복해.
누군가를 위해 음식을 하고, 누군가랑 함께 식사하는 이 순간이
눈물이 날 정도로… 그렇게….
고마워… 이런 행운을 나에게 허락해 줘서…
정말, 고마워…….
5, 4, 3, 2, 1…
그리고 폭죽 터지는 소리가 들려온다.
20세기를 보내고 2천년을 맞이하는 것에 대한 축하의 폭죽소리.
그러나 밀레니엄이 왔다는 것에 대한 감흥보다도
시연의 머릿 속에 먼저 떠오른 생각은---
' 동하가 돌아올 때가 되었는데…? '
때마침, 시연을 부르는 전화 벨소리가 있었다.
거실에 앉아 TV를 보면서 다음 촬영에 대해 생각하고 있던 그녀는
벌떡 일어나 전화기 쪽으로 향했다.
" 여보세요? "
" 시연아, 내다. "
어딘가 맥이 빠진 것처럼 들리는 것은 은영선배의 목소리.
" 선배, 왠일로 이 시간에 전활 다 해요? "
" 시연아, 나 드디어 서른이다…?
위기의 스물 아홉도 결국 가버리고 말았어. "
" 선배두 참. 그래, 소감이 어때요? "
" 근데 말야, 별 느낌이 없다? 굉장히 우울할 줄 알았는데,
내가 꽤 오래 전부터 서른이었던 것처럼 익숙하게 느껴져.
…그게… 조금 슬프다. "
말관 달리 심란함… 허무함이라고 해야 할까?
뭐 그런 것이 가득 찬 은영선배의 목소리를 듣고 시연은 쿡쿡 웃었다.
정말 선배다운 전화라 생각하며.
겉으로 보기엔 소년처럼 씩씩해 보이지만 은근히 겁도 많고 감상적인
성격의 은영선배인 것이다.
심정을 모르는 바 아니지만 일부러 명랑하게 받아쳤다.
" 음… 뭐가 어때서 그래요. 선배, 나한테 그렇게 처량한 목소리로 말해도
위로같은 거 절대 안할 테니까. 이 몸도 머지 않은 걸. "
" …못된 것. 허긴 나두 3년 전 다른 선배 전화 받구 너랑 똑같이 말했다.
그 때 선배가 이렇게 말하더라. 당해 보면 알 거라구.
시연이 너, 지금 여유있다고 그렇게 냉정하게 굴면 벌 받는다.
서른 넘은 선배들 저주받아서. "
" 미안해요… 무서워라. "
" 에휴, 그래. 그 때 그 선배… 다른 잡지에 있는 그 선배한테나
걸어 봐야겠다. 내 한탄 들음 아마 웃겠지…? "
그래도 전화를 하다 보니 조금 기운이 난 모양인지
처음보단 한결 가벼운 말투로 마무리짓는 은영선배였다.
전화를 끊은 시연은 전화기를 올려 놓은 작은 수납장으로 시선을 내리다가
수납장 문에 붙은 동그란 놋쇠 문고리가 헐거워져 있는 걸 발견했다.
' 그냥 놔두면 머잖아 떨어질 텐데… 고쳐야겠어…. '
생각해 보니, 한번도 수납장 안에 뭐가 들어 있는지 본 적이 없다.
바쁜 중 겨우 틈이 날 적에도 청소기 돌리고 걸레질하고 화장실 청소하면
이내 시간이 순식간에 지나가 장에 든 물건까지 꺼내 정리할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갑자기 궁금증이 발동한 시연은 문고리가 떨어지지 않게끔 주의하며
수납장 문을 열었다.
별다른 게 들어 있을 리 없어… 하고 생각했지만 의외로 수납장 안은
두꺼운 커버로 싸인, 보기만 해도 묵직한 책들로 가득했다.
' 앨범이잖아…? '
먼지가 쌓인 앨범을 끄집어 냈다.
왠지 비밀스런 것을 엿보듯 두근두근거리는 가슴을 억누르며
시연은 앨범의 첫 장을 펼쳤다.
첫 페이지는 비어 있었다.
자세히 보니 이전에 사진을 붙였다가 시간이 흐른 후 떼어낸 듯,
꽤 큰 직사각형 형태가 누렇게 남아 있다.
고개를 갸우뚱하며 다시 또 페이지를 넘겼을 때 시연은 그만 풋… 하고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눈에 들어온 것은 남자아기의 돌 사진.
누군지 뻔한 꼬마 아기가 정말 귀여웠다.
제법 의젓한 모습으로 손에 떡을 쥔 채 카메라를 노려보고 있다.
' 이랬단 말이지… 후후… 앞을 똑바로 쳐다보는 건 어릴 때부터였나…? '
페이지를 넘길수록 눈을 즐겁게 만드는 사진들이 속속이 등장했다.
자랑스럽게 고추를 내 놓고 서 있는 사진은 특히 압권이었다.
시연은 마치 바닷 속 깊은 곳에 숨겨져 있던 보물을 우연히 발견한
뱃사람처럼 웃음이 터지는 것을 참지 못했다.
뒤로 넘어 갈수록 사진 속 사내아이는 성장하고 있었다.
풀밭에서 뒹굴기도 하고 놀이터에서 놀고 있는 모습도 있고
회전목마 위에서 열심히 손을 흔드는 모습도 있다.
같은 또래 친구들이랑 찍은 사진들도 보인다.
정신없이 한권을 다 훑어 본 시연은 안에 남아 있던 나머지 네권도 꺼내
차례로 펼쳤다.
어린 동하는 앨범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었다.
유치원 시절의 사진들은 한없이 천진하고 초등학교 학예회의 우스꽝스런
삐에로 분장은 보는 이로 하여금 미소짓게 만든다.
그런데… 앨범을 넘기고 있던 시연은 갑자기 한가지를 깨달았다.
사진 속 사내아이가 언젠가부터 미소를 짓지 않고 있단 사실…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부터일까?
더 이상 사진 속 소년의 얼굴에선 미소를 찾을 수가 없다…
중학교 입학식… 소풍… 수학여행… 졸업식… 그리고 고교 입학식으로
네권째의 앨범이 끝났지만 사진 속의 주인공은 어느 것이나
그저 앞을 보고 있을 따름이다.
같이 찍힌 친구들이 모두 웃는 모습이었으므로 그건 더 두드러져 보였다.
가슴 위로 찌릿… 하고 통증이 느껴져 왔다.
전부는 아닐지라도 여자는 이 통증이 '이해'라는 것으로부터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다.
한편으로 '고아'라는 단어가 따라다닌다 할지라도 학교에서 돌아왔을 때
기다리고 있다 이쪽을 향해 웃어주는 사람들이 몇명이나 있던
자신의 환경이 더 나았던 건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뭣보다, '웃는 척'조차 못하는 소년의 직선적인 성격이 더 가슴 아프다….
다섯권 중 마지막 한권은 동하 아버지의 사진을 모아놓은 것이었다.
시연은 그리움에 숨이 꽉 조이는 감각을 느끼면서 조용히 책장을 넘겨 갔다.
첫 몇페이지엔 젊은 날 동하 아버지의 모습이 담겨 있었고 그것만으로
페이지를 더 이상 넘기지 못한 그녀는 앨범을 가슴에 끌어안은 채
잠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꼼짝도… 할 수 없다….
같이 보내지 않은 시간속에 존재하는 모습인데도…
마치 같이 있었던 것처럼 그립게 느껴지는 것…
역시, 잊을 수 없는 걸까요…?
이젠 힘들지 않을거라 몇번이나 되풀이해 말해 주었건만
여전히 생각이 잠시 지나가는 것만으로…
그대로… 시간이 정지해 버려서…
그만… 숨을 쉴 수 없게 되버리고 말아요….
바보죠…
저… 그렇죠…?
사진 속의 남자는 지금의 동하와 너무나 닮아 있었다.
마치 몇년 뒤 동하 모습을 미리 보는 듯한 착각이 들 정도로,
그렇게 닮아 있다.
다른 사람이라고 깨닫게 만드는 점은--- 물론 입고 있는 옷이라던지
배경 같은 것도 그렇지만, 사진 속의 남자, 젊은 날의 동하 아버지 -
강우현이라는 이름이 있지만 - 는 지금의 동하에 비해 한결 부드러운 인상.
이지적인 얼굴 윤곽은 확실히 흡사하지만 뭐랄까, 훨씬 안정되어 보인다.
그건, 동하가 아직 어리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동하는--- 불안정해 보인다.
장례식 후 처음으로 교문 앞에서 다시 만났던 날, 그 사실을 깨닫고
시연은 어떻게든 소년을 도와주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단지 사랑한 사람의 아들이기 때문이 아니라---
강한 척하는 소년의 태도로부터 왠지 모를 연민을 느꼈던 것이다.
그래… 그 마음만으로 물러서지 않았었다.
그 애에게 한 가득 웃음을 줄 수 있다면…
그럴 수만 있다면…….
진심으로 시연은 바랬다.
소망이 가슴을 채우자 떠나간 이의 사진을 보는 고통도 조금이나마 완화되는
것처럼 느껴져 다시금 책장을 넘길 수 있었다.
마침내 다섯권을 다 보았을 즈음 또 다른 생각이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갔다.
' 설마…. '
다시 앨범을 넘기기 시작했다.
동하가 어렸을 때 사진을 모아 놓은 앨범.
보이지 않는다.
다른 앨범도 빠른 속도로 넘겨 보았지만, 없었다.
몇장이나마 있어야 할 동하 어머니의 사진이 단 한장도 존재하지 않는다.
시연은 처음 넘기며 드문드문 눈에 들어왔던 누런 흔적이 무엇인지
확실히 깨달았다.
그건 동하의 어머니가 담긴 사진을 떼어낸 자국들인지도 모른다…
아니, 아마도 확실히 그럴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동하의 부모 사이에선 어떤 일들이 있었던 것일까.
일부러 사진까지 버릴 정도로 두사람 사이에 깊은 골을 만들 만한 일들이
존재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런 사건들은 어린 동하에게 상처를 입혀
미소를 잃게 만든 것임이 틀림없다….
생각에 잠겨 있던 시연을 깨운 것은 요란스런 전화벨 소리였다.
' 또 누구지…? 이 시간에…. '
" 여보세요? "
[ 거기 이시연씨 되세요? ]
들어 본 목소린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카랑카랑하고 야무진 느낌이 나는, 중년 여자의 하이 톤 음성.
" 네, 그렇습니다만…. "
[ 나, 동하 고모에요. ]
" 아, 예…. "
부산에 산다는 유일한 남편의 혈육--- 동하의 고모.
동하 아버지보다 한살 위라 했다.
동하 아버지의 재산을 관리하고 있는 분이기도 하다.
동하 아버지와 결혼한 시연이 재산을 전혀 받지 못한 이유는
미처 혼인신고를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신혼여행을 다녀온 후, 두사람이 시간날 때 느긋하게 신고하러 같이 가자고
얘기했었다.
하지만 동하 아버지를 죽음으로 몰고 간 교통사고는 신혼여행을 다녀온지
일주일도 안되서 두사람을 덮쳤던 것이다.
결론적으로 말하자면 법률상으론 시연은 동하의 아버지와도 동하와도
아무 관계도 아닌 남남인 것이 현실.
다만 지금 그녀와 동하가 같이 살고 있는 아파트는 무슨 생각인지,
동하 아버지가 결혼 전에 시연에게도 말하지 않은 채
그녀의 명의로 해 놓았기 때문에 그것만은 시연의 몫이지만
그 밖의 다른 재산, 통장에 예금된 돈이며 간간이 사놓은 집이나 땅은
전부 아들인 동하가 물려받게 되어 있고, 아직은 상속인인 동하가
미성년자이기 때문에 가장 가까운 친척인 고모가 유산을 관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 고모가 동생의 아들인 동하를 통 돌보지 못하는 것은 그쪽 집안에
최근 여러가지 골치아픈 일이 많아 미처 신경쓸 틈이 없기 때문일 거라고
시연은 내심 짐작하고 있었고, 또 사실이기도 했다.
[ 이 밤중에 실례해요. 물어본다는 것도 우습지만---
동하 핸드폰으로 연락이 잘 안되네요. 혹시 그 애 요즘 본 적 있어요?
지금 우리집 형편상 같이 살 수 없어 돌봐주지 못하는 것도 속상한데,
통 연결이 안되니…. ]
" 동하, 오늘 핸드폰 두고 나갔거든요. "
[ …네? 어떻게 아시나… ]
" 아, 죄송합니다. 전혀 연락을 못 드려서. 모르시는 걸 깜박 잊었어요.
동하는 지금 저랑 같이 이 집에 살고 있어요. 예전에 살던 집에요. "
" ……네? "
저쪽은 많이 놀란 듯 하다.
시연이 뭐라 설명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는데 마침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누군지 안 봐도 뻔한 인물이다.
시연은 속으로 안도의 숨을 내쉬었다.
같이 살면서 늦게 다니는 것을 방관하고 있다고 오해받을까 봐
지레 겁먹고 있는 중.
" 다녀왔어요. "
신발을 벗고 집으로 막 들어선 동하를 보고 눈짓한 시연은
다시 수화기에 대고 물었다.
" 동하, 바꿔드릴까요? "
[ 바꿔 주세요. ]
딱딱한 목소리가 들린다.
처음에 만났을 때도 그리 날 탐탁해 하는 것 같지는 않은 것이
확연히 느껴지는 눈길을 보내오던 분.
여전히 그런 걸까…?
상대의 반감을 은연 중에 느낀 시연은 조금 착잡한 기분으로 동하를 불렀다.
" 고모님이셔. 받아 봐. "
점퍼를 막 벗던 소년이 별로 놀라지도 않고 걸어와 수화기를 건네받는다.
" 예, 고모. 안녕하세요? ……아버지와 결혼한 분이잖아요.
이상할 거 있어요? …잘 지내요. …아니요, 혼자 살 때보단 훨씬 편해요,
여러모로…… 예, 알겠어요. 구정 때 찾아 뵐게요.
……제 일은 걱정하지 마세요. ……예, 들어가세요. "
동하의 대답은 어쨌든 간결했지만 말과 말 중간의 텀이 꽤 긴 것으로 보아
고모님께선 꽤 할 말이 많으셨던 모양이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동하의 시선이 바닥에 흩어져 있는 앨범으로 향하는 걸
보고 시연은 가슴이 철렁했지만 소년은 아무 말 않은 채 방금 벗은 점퍼를
손에 쥐고 방으로 가버린다.
뭔가 말해야 한다고 생각한 시연은 뒤를 쫓아갔다.
" 옷 갈아입는 중이니까 기다리세요. "
노크를 하기도 전에 닫힌 문 사이로 담담하기 그지없는 음성이 흘러 나와
멈칫했다.
화가 난 것 같지는 않다.
어정쩡 서 있는 자신에게 픽 웃음이 나왔다.
정말이지 흐트러짐 없는 애야.
대체 어느쪽이 어른인지….
잠시 후, 밤에 잘 때 잠옷과 번갈아 입는, 트레이닝 복을 걸친 소년이
문을 열고 들어오라 한다.
확실히 방학이 된 이후로 여유가 생겨선지 언젠가 보았던 자취방과는
비교도 안 되게 깔끔해졌다.
시연이랑 같이 살게 되어 신경쓰는 건지…
아무튼 전기청소기를 돌리는 것 말곤 동하 방은 치울 게 없다.
책도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고 침대도 깔끔히 정리하고 나가기
때문이다. 세탁만 해도 자기 속옷은 곧 죽어도 자신이 빨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시연은 조금은 그런 면이 섭섭했다.
' 조금쯤은 맡겨줘도 좋으련만…. '
" 고모가 구정 때 내려오라 하셨어요. "
책꽂이에 꽂혀 있던 책을 빼들며 말한다.
동하도 보통 소년들처럼 과학잡지나 기타, 그녀가 전혀 본 적도 없는
잡지들을 보는데 언뜻 넘겨 본 그 책은 자동차 아니면 오토바이에 관한 것
같았다.
그런가 보다 하며 시연은 별로 눈여겨 보지 않은 채 침대에 앉아
책상 앞에 선 동하를 올려다 보았다.
" 으응… 나랑 같이 사는데 대해 별말은 없으시구? "
" 그냥 살기 편하냐고 하시던데요. 그래서 잘 지낸다고 했어요. "
" 진작 연락드렸어야 했는데… 왜 이렇게 정신없이 살까, 난. "
" 제 잘못이에요. 고모가 집안일 땜에 정신없을 거라 생각하고
나중에 전화해야지… 하다 한달을 넘겨 버렸으니. "
" …화나신 것 같지? "
약간 쫄은 듯한 시연에 비해 동하는 별로 변화가 없는 표정이다.
이제 고2가 될 나이치곤 키가 크다.
약간 가무잡잡하지만 깨끗한 인상.
모양이 잘 잡힌 코.
약간 뾰족한 턱.
얇다고는 결코 말할 수 없지만,
그리 무겁게도 보이지 않는 적당한 두께의 입술.
그리고, 그리 풍부한 표정이 아님에도 강한 인상을 남기는 눈과
그 눈을 감싸고 있는 긴 속눈썹.
…정돈되어 있으면서도 흔치 않은 느낌….
' 그리고… 아버지와 정말 닮았어. '
다시 한번 깨닫고 나니 제대로 마주 볼 수가 없어져
시연은 괜히 방 한구석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 걱정하실 거 없어요. 그보다, 앨… "
" 응, 앨범 봤어. "
" 후… 어릴 적 이상한 사진들까지 다 본 거에요? "
" 귀여워… 푸훗……. "
시연은 사진 속 천진한 어린 동하를 떠올리고 다시 한번 웃음을 터트렸다.
동하는 난감한 듯 잠깐 이맛살을 찌푸렸지만 이내 평소의 모습으로
돌아온다.
" 재미없죠. "
조용한 목소리였다.
" …응? "
" 재미없을 거예요. 전부 한사람 사진 뿐이니까…
아, 참… 아버지 것도 있지… 눈치채셨겠지만… 엄마 건 없어요.
……아버지가 전부 버렸으니까. "
" 한장도…? "
" …필름도요. "
시연이 고개를 들었다.
책상에 기대 선 동하는 창밖을 응시한 모습.
차분히 가라앉은 눈과 강한 윤곽을 지닌 옆선…
이렇게 가까이서 이런 각도의 옆얼굴을 본 적은 처음이라는 걸 깨달았다.
낯선… 조용한 얼굴.
표정은 별로 없지만 그런 무표정이 더 가슴을 친다.
시연의 생각 따윈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아무렇지 않게 동하가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 ---참. 4일 밤, 퇴근하고 준구형 카페로 올 수 있어요? "
뭔가를 먼저 제안하는 일이 거의 없는 소년의 한마디에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
" 1월 4일…? …왜? "
" …별거 아니에요. 차나 잠깐 마시고 가라고… 참, 마감기간 시작인가요? "
" 아니, 아주 늦게 퇴근할 정돈 아니야. …갈게. "
" 핸드폰하면 지하철역으로 데리러 갈게요. "
" 혼자 찾아가도 되는데…. "
" …데리러 갈게요. "
시연은 입가에 미소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잊지 않을테니까 걱정 마. 그럼… 잘 자. "
" 안녕히 주무세요. "
방을 나오며 시연은 고개를 돌려 뒤를 보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억눌렀다.
자신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에 있을 때 동하가 어떤 표정을 짓는 걸까.
표정만으로 감정을 파악할 수는 없다 해도…
언제나 보는 고요 속에 저 아인 어떤 격렬함을 숨기고 있는 걸까.
어떤 고통이 저 아이를 지배하고 있는 걸까….
뭘 생각하고 있니…?
알고 싶어… 네가 뭘 생각하는지….
너의 슬픔… 괴로움… 알고 싶어….
전부가 아니라도 좋아…
네 영혼의 백분의 일… 아니, 천분의 일을 내게 보여 줄 수 있겠니…?
그 깊은 내면 속… 가장 작은 퍼즐 한조각을 집어줄 수 있겠니…?
…………………………………
황은영(黃銀榮·Hwang Eun Young)
시연의 선배.
명랑발랄한 성격으로 편집부의 분위기 메이커적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시연과는 아주 다른 스타일이지만 그래서인지 묘하게 마음이 잘 맞는다.
다소 다혈질적인 측면이 있지만 의외로 선후배·동기들을 잘 배려하기
때문에 사내에서 남녀불문하고 인기가 있는 타입.
아직 미혼.
● DATA ●
나이(Age) : 30
생일(Birthday): 9.24·천칭자리(Libra)
혈액형(Blood Type) : B형
키(Height) : 155.5cm(본인의 주장이므로 더 작을수도)
몸무게(Weight) : 45kg
매력 포인트(Charming Point) : 의외로 가늘고 곧은 종아리
Yesterday - Yes a day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Like any day, alone again for every 여느 때처럼 다시 혼자서
Day seemed the same sad way 언제나처럼 슬프게 느껴지는 매일
To pass the day 그 매일을 보내고 있었어
The sun went down without me 태양은 나 없이 져버렸는데
Suddenly 갑자기
someone else 다른 누군가가
has touched my shadow 내 그림잘 건드렸고
He said 그가 말했지
Hello 『 안녕 』
제인 버킨/Yesterday - Yes a day·1절
시간이 빨리 가는 게 기쁘게 느껴질 때도 '가끔' 있다.
" 동하야, 너 면허시험 언제냐? 오늘 신청했다며. "
카페 구석진 곳 소파에 푹 기대 앉은 준구형이
레모네이드를 새로 만들고 있는 동하에게 물었다.
아직은 손님이 한 테이블 밖에 없어 한가한 지금, 미리 이런 걸 해두어야
나중에 당황하지 않는다.
어느 사이엔가 먹을 것과 마실 것에 관한 한,
일가견을 자랑하게 되어버린 동하였다.
환경이 사람을 만든다는 걸 이런 때 절감하게 된다.
관심도 없던 요리가 특기가 되어 버리다니….
' 이젠 내가 봐도 프로군. ---감사해야 하는 건가? '
" 담주 화요일인데요. "
드디어 대망의 1월 4일.
다른 해와 달리 올해의 생일은 의미가 지대하다.
오늘로 바이크 면허를 딸 수 있는 만 16세가 되었기 때문.
얼마나 이 날을 기다려 왔는지 모른다.
아침에 눈뜨자 마자 면허시험을 신청하러 갔다 왔다.
1학년에겐 방학 보충수업이 없단 것이 하늘의 도우심.
대부분 평일에 시험이 있는지라 보충수업은 면허 따는데 장애가 될 것이
뻔하다. 중2 때부터 무면허로 준구형의 125cc 바이크를 몰았고
고교 들어와 900cc까지 타 본 동하로선, 원동기 면허쯤이야 일단 치면
십중팔구 붙겠지만 말이다.
" 하긴… 너야 뭐, 걱정할게 있겠냐. 필기만 열심히 해가라. "
" 히히… 원동기 필길 두번이나 떨어진 사람이 여기 말고 누가 또 있겠니. "
영란누나의 낄낄대는 소리가 창고 안에서부터 들려온다.
3년 전 원동기 면허시험때 필기만 두번을 떨어지고 세번째 가서야
겨우 붙었던 준구형을 비웃고 있는 것이다.
물론 실기는 한번에 붙었지만.
그 때의 아픈 기억이 있는 탓인지 고교 졸업 후에 치룬 자동차 면허와
2종소형은 필기시험 전날 밤새도록 공부해 댓바람 한번에 필기·실기를
모조리 패스하는 저력을 보였다.
본인 말로는 수능시험 전날도 이렇게 열심히 하진 않았다고 한다.
" 이씹, 끼어들지 마! …면허 따면 바이크 살거냐? "
" 엑십(EXIV) 정도로 할까 해요. 더이상은 바라기도 힘들고. "
실은 이 날을 위해 꾸준히 저축해 왔다.
괜히 원룸을 나와 준구형 집에 들어갔던 게 아니다.
다 한푼이라도 아껴 바이크 사는데 보태기 위해서였다.
사실 제법 많은 돈이 통장에 들어 있지만
아무래도 국산 레플리카(바이크 스타일의 하나) 이상은 무리일 듯 싶다.
" 내 꺼 어떠냐? 나도 중고로 샀던 거니 꽤 싸게 줄 수 있는데…. "
" …예? 형은요? "
" 다른 놈이 들어올 것 같애. 이젠 125 졸업해야지.
2종소형 딴지도 꽤 됐고. "
" 다른 놈… 뭔데요? "
" 후보가 둘 있는데… 스래드(SRAD·스즈키 GSX-R750의 별칭)랑 혼다.
…지금은 혼다로 저울이 기울고 있는 중이다. "
" CBR? 몇cc에요? "
" …아아, 900. 400을 안 거치는 게 좀 찝찝하지만. "
" 성호형 걸 많이 탔으니 괜찮겠죠.
400이나 600은 형한텐 좀 아담할 걸요? "
" 나도 그렇게 생각한다. 그래서, 넌 어때? 네 의견 묻고 있는 거잖아. "
" 얼마루요? "
" 일루 와봐. "
동하를 손짓해서 부른 형은 탁자 위에 냅킨을 올려 놓고 그 위에 사인펜으로
숫자 3개를 그려 보였다.
동하의 눈이 순식간에 커졌다(얼마를 불렀길래?).
" ---형. 괜찮아요? "
" 엑십을 사느니 좀 비싸두 이쪽이 훨씬 남는 장사 아니냐?
명색이 알에슨데. 게다가 키트 머플러까지 달았단 말야.
힘들면 몇번에 나눠 내게 해줄게. "
" 진짜에요, 이거? "
" 대답해, 임마! "
" …하…. "
동하가 숨을 몰아 쉬었다.
믿을 수가 없다.
아프릴리아(Aprilia)를 이 가격에 얻을 수 있다니---
이 순간, 준구형에게 입맞춰 주고픈 심정이다…!
엑시브나 RX 정도로 만족하려 했건만 첫 바이크가 RS 125라니…!
RS 125는 원동기 면허로 탈 수 있는 최상의 바이크라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게다가 준구형이 고2 여름방학 때, 그동안 죽도록 일해서 번 돈이랑
학원비 띵까논 돈이랑 합쳐 할부로 겨우 산, 목숨'만큼' - '보다'는 아니다
- 사랑하는 바이크이기도 했다.
" …형! "
" 으아… 더워, 새꺄…! 으… 저리 가! "
" 혀엉, 고마워요…. "
" 대신 진짜 이뻐해 줘야 한다. 2년반 동안 영란이보다 더 아낀 녀석이니."
준구형이 씨익 웃으면서 앞에 앉은 동하의 이마를 톡, 하고
손가락으로 튕겼다.
이마의 따가움도 모른 채 실실거리는 동하에게 카운터에 앉아 있던
영란누나가 심술궂게 덧붙인다.
" …진짜야. 그 동안 타면서 나 태워준 적이 몇번 안된다.
겉멋은 디게 들어갖구, 첨부터 외제 바이크 산 주제에.
참, 이 인간이 막노동판 다니길래 데이트 자금을 구하려 그러는 줄 알구
나 감동해서 울었단 얘기 했었니? 그랬더니 기껏 돈벌어 바이크나 사갖곤
여자친군 가뭄에 콩나듯 태우질 않나. "
" 허 참. 50킬로를 훨씬 웃도는 앨 맨날 태우면,
쇼바 수리빈 누가 감당하라구.
게다 어쩌다 태워도 궁디(히프) 아프다고 우는 소리나 해대구 말야. "
" ……뭐야!? "
" 실은 동하야, 이 말 안할려 그랬는데, 내가 바이크 바꾸는 이유가
그거다. 하도 저 여인네가 태워 달래서.
나랑 쟤 합친 무겔 연약한 아프릴리아가 버티겠냐? 둘다 한 등빨 하는데.
그래서 눈물을 머금고 너한테 보내는 거다. "
" 성 - 준 - 구… 너어…! 동하야, 나 50kg 많이 안 넘어, 알지? "
" 아… 예…. "
무슨 배짱인지, 붉으락푸르락하는 영란누나 - 솔직히 살집이 많이 있는
편이라 몸무게 얘기엔 굉장히 민감한 누나다 - 를 무시한 채,
준구형이 말한다.
" 너도 그 녀석 뒷자리에 50킬로 많이 넘는 여잔 태우지 마라.
특히 아스팔트 위로 질주하고 싶을 땐. 근데… 너 진짜 여자 없냐?
왠만함 하나 구해. 불타는 청춘을 그렇게 건조하게 보내고 싶을까. "
" …그만해요, 형. 알바하며 여잘 무슨 수로…. "
" …짜식. 아주 생각없는 건 아니구먼. 난 너, 수도승인줄 알았다.
암튼 면허증 나는 즉시 나한테 키 가지러 와라, 알았지? "
옙…! 하고 여느 때완 다르게 흥분된 목소리로 짧게 끊어 대답했다.
준구형의 RS는 동하 자신도 여러번 타 보았지만
그 때마다 침흘리던 녀석인 것이다.
중고긴 해도 주인의 지극정성으로 아직까지 새 것처럼 건재하다.
게다가… 미형(美形)이란 말이 딱 어울리는 그 생김새…
햇빛을 반사하는 그 컬러…
가속을 붙여 달려나갈 때의 그 쾌감…!
---춤추고 싶을 정도로 기쁘다…!
뜻밖의 행운을 손에 쥔 소년은 순간, 최근 들어 자신을 채우고 있던
골치아픈 생각들을 잊어버리고 있었다.
…잠시동안만 말이다.
연석이 준구형 카페에 도착한 것은 10시가 다 되어서였다.
평일 밤이라 그런지 빈 테이블도 드문드문 보이는 가운데
카페 분위기는 퍽 조용했다.
" 어어이, 연석이 왔냐? 일루 와서 앉아. "
카운터에 있던 준구형이 반갑게 맞는다.
언제나 그렇듯 책을 장부 위에 펴들고 있는 게 보인다.
물론 책이라 해봤자 십중팔구 만화책--- 이라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왠일인지
무협지를 보고 있다.
예상을 깬 건 그것 뿐이 아니다.
카운터와 연결된 부엌에서 뭔가 하고 있어야 할 친구의 모습도
보이지 않는다.
창고에서 고개만 내놓고 이쪽을 향해 웃어 보이고 있는 영란누나는
입 언저리를 바쁘게 손으로 문지르는 품이 언제나처럼 손님에게 서비스하기
위해 사놓은 새우깡을 먹고 있던 듯.
새우깡 킬러라고 동하 녀석이 귀띔했던 기억이 난다.
- 가게에 있는 새우깡 절반을 영란이가 먹는 거 아냐?
준구형이 투덜대는 것도 일리가 있다.
" 동하는요? "
" 새엄마 데리러 나갔는데…. "
" 이렇게 늦게 퇴근하시나요? "
" 뭐라더라… 마감이 시작되었다나? 잡지일도 디게 바쁜가보더라. "
" …아. 그래서 이렇게 늦게 오라고 한 거군요. "
" 그리고 10시가 넘어야 자리가 좀 나서 생일축하든 뭐든 하지.
건 그렇구 너, 기말시험 때 동하랑 같이 공부했다며.
그 자식, 성적 안 처졌냐? 알바하면서. "
" 쳐지긴요, 5등이나 올랐는 걸요. "
" 으아… 너도 그 자식도 정상은 아니야. "
고교 시절, 성적이 바닥을 기던 준구형은 공부 잘하는 인간들에게
은근한 적개심 같은 게 있어서 전교 10등을 벗어나지 않는 연석은
형의 반발을 사기에 충분한 조건을 갖추고 있지만 동하를 사이에 두고
어느 사이엔지 가까워져 지금은 카페일을 가끔 돕기도 할 정도로 친하다.
연석의 최대 장점은 사람들을 자기 편으로 만드는데 재능이 있다는 것,
다른 말로 하면 세상 살기 수월한 성격이란 것이다.
어쨌든 동하가 이번 기말 때 성적이 오른 것은 사실이다.
원래도 그리 성적이 나쁘지 않은 놈이지만 10등에서 5등으로 올랐다는데는
연석도 놀랐다.
이런 걸 보면 시간이 없어 공부 못한단 말은 핑계임을 알 수 있다.
" 전교에서 노는 놈이랑 공부하니 도움이 되나 부다.
이런 씹… 나도 학교 다닐 때 친구나 가려 사귈 걸. "
연석은 준구형의 말을 듣고 쿡 하고 웃었다.
자신이랑 공부한 게 방해가 되었음 되었지 도움이 되었을 리는 만무했던
것이다.
첫 날 시험을 치루고 돌아와 점심을 먹자마자, 동하는 결심한 듯
식탁 의자에 앉아 책을 펼쳤지만 연석은 일단 평소 습관대로
학교에서 돌아올 때 빌린 비디오 테입을 들고 거실로 갔다.
「 야, 강동하. 이거 안 봐? 」
「 너, 매 시험 때마다 이러냐? 」
「 응. 난 시험 때 비디올 하루 한편씩 안 봄 안정이 안돼. 」
「 ……. 」
물론 잠시 후엔 두사람 모두 정신없이 화면에 집중하고 있었다.
「 연석아, 니네 TV, 브라운관이 커서 그런가? 액션이 그냥 꽂힌다. 」
「 너, 플레이 스테이션으로 '역습의 샤아' 안해 봤지.
사촌동생한테 빌려왔는데… 해 볼래?
여기다 연결하면 거의 가상현실인데. 」
결국 비디오 2시간, 오락 1시간에 잠 1시간을 때리고 나니,
저녁을 먹고 나서야 공부를 시작할 수 있었다는 이야기다.
연석이야 항상 그래왔지만 동하가 성적이 오른 것은 어째서일까.
어쨌든 학교마다 연석과 같은 놈들이 있다는 건 입증된 사실이다.
『시간은 쪼개써야 잘 쓸 수 있다』는 지론 아래,
중간·기말시험 기간 중엔 매일같이 오락실이나 비디오방에 진출해
낮시간을 몽땅 보내고도 전교 수위를 지키는 그런 녀석 말이다.
" 야, 너 그건 뭐냐? "
준구형이 연석이 손에 든 종이봉투를 가리키며 물었다.
" 동하 생일선물요, 바이크 탈 때 끼는 장갑. "
" 한 살림 장만하는구나.
나랑 영란이랑 성호랑은 보호대하구 통신기기 샀는데. "
" 통신기기요? "
" 바이크 타면서 핸드폰 받을 수 있는 거 말야.
참… 너, 김시욱이란 놈 아냐? "
준구형이 갑자기 화제를 바꾸었다.
" 김시욱… B고 다니는 김시욱 말예요? "
" 그래. 너와 동하랑 같은 중학 다녔던…
그 새끼, 요즘 이 근방에서 꽤나 소란 피우는 모양이다.
이전 같음 손 좀 봐주었을텐데, 이건 원…
스물 하나나 돼 갖고 그런 애새낄 상대할 수도 없구. "
준구형이 1년 전까지만 해도 J고 짱이었단 사실을 연석은 잠시 잊고 있었다.
" 연석이 넌, 중학교 다닐 땐 동하랑 별로 안 친했지? "
" 한번도 같은 반을 한 적이 없었으니까요. 물론 알곤 있었죠.
자식, 중학교 땐 꽤 거친 걸로 유명했으니까.
김시욱… 아마 동하랑 한번 붙었었을 걸요? "
" 그리구 깨졌지. 동하, 꼭 상처입은 사자 새끼 같았어.
그 땐 키도 작았는데. 그 자식 크기 시작한 거 중3 때부터잖냐.
뭐… 동하 쪽이 밟혔으면 이 내가 가만 안 있었겠지만.
그러구 보니 동하 녀석, 고교 들어와선 외려 얌전하다?
범생이 친굴 사귀어서 그런가…? "
약간 가시돋힌 형의 말에 연석은 쓴웃음을 지었다.
" 놀리지 마요, 형. …근데, 형은 동하 어디가 그렇게 맘에 든 거에요? "
" …너도 알텐데. 글쎄, 뭐랄까?
악바리 같은 성격도 그렇고 고지식한 점… 약간 애어른 같은 거 있잖냐.
난 하도 말썽만 피고 살아서 그런지 녀석의, 홀로 서려는 모습이라
해야 하나… 그런 게 참 좋게 보이더라구. …예에, 갑니다! "
준구형은 말을 채 끝내지 못하고 저편 테이블에 앉아 있는 손님이 부르는
소리에 답하면서 뛰듯이 나갔다.
비슷한 이유로군--- 생각하며 연석이 미소짓고 있을 때,
유리문에 매달려 있는 종이 딸랑 하고 소리를 냈고,
예상대로 동하와 시연이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연석도 일어섰다.
" …오셨어요. "
" 아… 연석이도 있네. 잘 됐다, 말 좀 해 줘.
무슨 일로 여기 오라고 한거니? "
시연이 카운터 쪽을 보면서 반가운 듯 빠른 말투로 묻는다.
" …모르셨단 말이에요…? "
연석이 더 황당해 했다.
옆에 선 친구를 빤히 쳐다보니 다른 쪽을 보며 딴청을 피우는 모습.
정말 녀석답다고 생각하며 연석은 픽 웃어버린 후,
어안이 벙벙해 서 있는 여자를 보고 짧게 대답했다.
" 오늘 동하 생일이에요. "
" ……?! "
시연이 정말 놀란 듯 눈을 크게 뜨며 연석과 동하를 번갈아 봤다.
" 1월 4일이… 생일이었어? "
" 예. "
" 맙소사… 말 좀 해주지 그랬어… 이건, 너무하다. "
" 그래, 강동하. 너 좀 심했어. 미리 말씀 드리는게 예읜 거야. "
" …죄송해요. "
" 아, 안녕하세요? 아… 저… 뭐라고 해야…? "
연석의 핀잔에 순순히 사과하는 동하의 옆으로 어정쩡 걸어온 영란누나가
시연을 보며 머뭇머뭇했지만 그 머뭇거림은 뛸 듯 다가온 준구형의
수선스러움에 금새 파묻혀 버린다.
" 동하 새어머니 맞죠? 우와아… 진짜 미인이시네요------.
정말 새엄마 맞아요? 동하 깔, 아니 여지친구라 해도 믿겠네…
으윽, 왜 그래…?! "
" 죄송해요, 이 인간은 무시하세요. "
손톱을 세워 준구형의 엉덩이를 힘껏 꼬집은 영란누나가 어색한 미소를
흘리며 이쪽을 본다.
처음 보는 얼굴이지만 왠지 낯설지 않은 따뜻함을 지닌 두사람의 모습에
아까까지의 섭섭함은 사라져 버렸다.
잠깐 같이 살았다던 형이 이 사람인가…?
나이도 별로 많지 않고 질 나쁜 사람 같아 보이지도 않는 걸?
아, 옆의 아가씨가 여자친구.
그냥 보통의 커플일 뿐인데 괜한 걱정했던 거였어….
어쩐지 미안해진 시연은 마음 속 죄의식을 감추느라
얼굴에 약간 홍조를 띄며 눈 앞에 있는 젊은 커플에게 고개를 숙였다.
" 믿지 않아도 사실이에요.
하지만… 그냥 누나 하나 생긴 거 정도로 봐 주세요.
누나나 언니 정도로 불러주시면 어떨까요. 나이가…. "
" 스물 하납니다, 둘 다. "
" 음… 그럼 저랑은 여섯살 차이네요. 저, 이제 스물 일곱 됐거든요. "
" 아… 그럼 누나라 부르겠습니다. 저기 빈 테이블 가서 앉으세요.
뭐 드실래요? 참, 메뉴판 보고 주문하는 게 낫겠다.
동하랑 연석이도 저기 가 앉아. "
" 아… 형, 됐어요, 전… "
" 두테이블 밖에 없으니 우리가 알아서 할께. 나랑 영란인 손 아니냐?
넌 새엄… 아니 누나나 챙겨드려. "
" 그래, 얼른. "
손을 내젓는 동하를 준구형과 영란누나가 억지로 떠밀다시피 하여
테이블 쪽으로 보냈다.
때마침 요란한 발소리를 내며 걸어 들어오는 누군가가 있었다.
" 성호형. "
" 엽. 조성호, 늦었다. "
" 하… 미안…. "
동하와 비슷한 키에 건장한 체구.
가죽재킷을 입어설까, 어딘가 '김보성'을 연상케 하는 젊은 남자가
동하와 준구형의 인사에 찔린 듯 사과했다.
시연이 얼떨결에 일어서서 고개를 숙이자 상대도 누군지 바로 알아차린 듯
씩씩하게 응답한다.
"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준구 친구구요, 동하 선배뻘 되는 조성호라 합니다.
야, 성준구. 나 시원한 냉커피 한잔 주라. "
열이 많은 체구인지 한겨울에 냉커피를 대뜸 시키고는
테이블로 성큼성큼 걸어와 풀썩 주저 앉는다.
' 조성호… 그래, 몇번 지나가듯 얘기한 이름인 것 같아, 친한 형이라구. '
이렇게 시연이 생각하는 사이, 마실 것들과 케익을 쟁반 위에 받쳐 들고
등장한 주인 내외(?)가 긴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시연과 마주 보는 자세로
앉았다.
시연은 약간의 어색함을 애써 감추면서 동하와 가장 가까운 사이임이 분명한
4명을 차례로 훑어 보았다.
큰 키에 가다가 잡힌 체구에는 전혀 안 어울리게 약간 수다스런 말투지만
거슬리지 않는 친근감을 지닌, 이 카페의 주인인 21살의 성준구.
약간 덩치가 있고 숱이 많은 긴 생머리를 한,
지극히 보통의 여대생으로 보이는 준구의 여자친구 박영란.
그리고 준구 친구이며 동하의 선배라고 자신을 소개한,
무뚝뚝하고 남자다운 인상의 조성호.
이 세사람에 대해 동하로부터 지나가는 말로 들은 기억은 있지만
이렇게 실제로 보긴 처음이다.
그리고 이제까지 동하랑 가까워지는데 줄곧 도움을 받아온,
어른스런 인상의 학교 친구 연석.
각자 개성이 다 다른데 동하를 가운데 두고 있으니 묘하게 어울리는 데가
있다.
만으로 따졌는지 큰 초 한개와 작은 초 여섯개.
방금 라이터로 붙인 불이 예쁘게 흔들리고 있다.
쑥스러움 그 자체인 표정을 한 채 가운데에 앉은 동하를 싱글거리고 보며
다섯명이 생일 축하 노래를 부르기 시작한다.
소리가 제대로 맞지 않아 늘어진 테입같은 노래가 끝나자,
동하가 볼을 있는 대로 부풀려 후욱~ 하고 촛불을 불어 껐다.
가장 가까이 앉은 준구형이 얼굴을 문지르며 너스레를 떤다.
" 우욱~! 강동하, 침 튀겼어. "
" 지난번 형 생일 때 소나기 맞은 거 복수야. "
" 오늘은 조신하게 그냥 먹는 거다?
매 생일 때마다 얼굴에 던져 범벅 만드는 거 이젠 그만 하자, 엉?
이번 케익은 진짜 신경써서 골랐단 말야.
동하가 모카크림을 좋아해서 특별히 고른 거니까, 얌전히 먹읍시다~ "
" 알았다 알았어, 박영란~ 케익은 니가 좋아하는 거잖아.
하튼 단것만 밝히고, 그러니 살이 빠질 수가 있냐?
동하야, 영란이 건 좀 작게 잘라라~ 읏! "
말을 하면 이내 꼬집힐 거라는 걸 알면서
준구형은 항상 입을 가만히 못 놔두는 모양이다.
어느 사인가 어색함은 모두 사라져 버리고
입을 크게 벌려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 시연이었다.
조용한 밤이었다.
왁자지껄 웃고 떠드는 분위기에서 벗어난지 얼마 되지 않은 탓일까,
침묵이 무척 길게 생각되는… 밤.
그런 밤의 고요를 뚫고 아파트에 도착했을 때,
이미 생일의 하루는 끝나 있었다.
" 좋은 사람들이구나. "
엘리베이터에 타자마자 들려온 한마디에 약간 텀을 두고 소년은 대답했다.
" 첨 보는 사람들인데… 어색하지 않았어요? "
" 아니, 다들 신경 써주려고 하는 게 좀 미안할 정도여서…
마음에 걸린 건…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니라 미처 알지 못했단 사실,
네 생일을 나만 몰랐다는 거야. 그래두… 이젠, 가족인데……. "
종이봉투를 보았다.
나중에 풀어 본다며 포장된 그대로 담아놓은 선물이 든 종이봉투를 보다가
반대편으로 시선을 돌리며 시연은 섭섭함을 감추지 못한 말투로
중얼거렸다.
하지만, 이어진 상대의 짧은 대답은---
" 그렇게 생각지 않았다면… 오라 하지도 않았어요. "
시연의 얼굴에도 어쩔 수 없는 미소가 번진다.
평소 별로 말이 없는 동하의 한마디는 언제나 순식간에 감정을 움직이기에
충분할 정도로 밀도가 있지만…
그래도 금새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이 바보같이 생각된다.
하지만, 뭐… 아무래도 좋다.
마음이면… 그리고 그 마음을 담은 한마디면 충분하다.
단순하다고 해도 좋아… 기쁜 건 기쁜 거니까.
" 항상 이렇게 하는 거야? 학교 친구들이랑 따로 안 만나? "
" 항상은 아니고, 언젠가부터… 일단 생일이 방학이니까,
어릴 때부터 따로 생일잔치 같은 걸 해 본 적이 없어요.
생일, 방학 아니죠? "
" 아니, 나도 봄방학에 항상 걸렸었어. "
" 언젠데요? "
" 2월 25일. "
" 어, 얼마 안 남았네요. "
" 그러니까 더 챙겨줬어야 했다구.
그 날 제대로 챙기려면 먼저 베풀었어야 했는데, 이런.
오늘 내가 해준 것 없다구, 내 생일 때 피장파장이라구
입 싹 씻을 거 아니지? "
" 글쎄요…? 워낙에 돈없는 아르바이트생이다 보니…
괜히 언제냐고 물어 봤네. 그냥 넘겨버림 될 걸…. "
" 앗, 역시… 방금 가족이라 했으면서. "
별다른 감정은 담겨 있지 않은, 겉으로 보기에만 살짝 토라진 듯한 대사를
하며 엘리베이터에서 먼저 내리는 여자를 쿡쿡 웃으면서 봤지만,
상대가 등을 돌리자마자 소년의 얼굴에선 웃음이 지워져 버렸다.
상대가 자신을 보지 않을 때조차 감정을 감춘 채 웃을 순 없다….
그건 엄청난 에너지를 요하는 일이기에.
하지만, 자신의 마음을 부정하고, 그리고 외면하는 건
또 다른 고통을 수반하는 행동….
어깨가… 좁다.
뒷모습을 보고 있으면…
나보다 한참 연상이라는 생각도…
내 아버지와 결혼한 여자란 생각도…
어느 사이엔가 잊어버리게 된다.
자꾸만 앞으로 나가려는 팔을
의지의 힘으로 거둬 들이는 자신을 발견하고
문득문득 놀라게 된다.
어째서 이런 생각에 빠져들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이대로 같이 지내도 괜찮은 걸까…?
후… 정말이지 나란 놈은….
말도 안 되는 생각을 하고 있어, 강동하.
정신차려.
눈앞의 사람이 여자이기 이전에 아버지와 결혼한, 네 '새엄마'란 사실,
잊어선 안돼.
지금 이건 단지 충동일 뿐,
저 여자에게 특별한 감정을 가지고 있는 건 아니라구, 넌.
그래, 특별한 감정… 절대, 아니야.
단지 가까이 있는 사람에 대한 관심일 뿐.
어쨌든… 접어 버려.
허접한 감상 따위, 지금의 네겐 사치일 뿐야…….
바람이 귓전에 불어
가벼운 현기증과 아득한 마비상태를 만들자
모든 악, 괴로움, 그릇된 행위, 욕구, 혹은 힘든 추억이
힘없이 흐뭇하게 사라져 버렸다.
토마스 만/ 토니오 크뢰거
새해를 맞이하고서 다시 또 정신없이 한달이 지나가 버린 1월 말의 일요일.
그만 늦잠을 자버리고 말았다.
전날 촬영이 상당히 지연되어 집에 늦게 들어온 탓도 있다고 핑계대기엔
다른 사람을 돌봐줘야 한다는 생각이 너무 강해, 몽롱한 의식 속에서
이미 10시도 한참을 넘겼다는 걸 알아차리곤 몹시 당황해 버린 시연이다.
하긴 정작 돌봐 주려는 상대방은 사실,
도움 따위 그다지 바라거나 기대하는 것 같지도 않지만.
" 아…! "
주중이고 주말이고 일찍 일어나는 동하의 습관을 알고 있는 터라
시연은 벌떡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5분만에 후딱 샤워를 해치우고
동하의 방쪽으로 향했다.
노크를 해도 인기척이 없는 것이 자든가 나갔든가 둘중 하나다.
문을 열어 보니 방은 깨끗이 정리된 채 비어 있었다.
' 아침은 먹고 나갔나…? '
부엌에 가보니 토스트기에 넣어 구운 식빵에 딸기쨈을 발라 우유랑 함께
아침을 때우고 나간 듯한 흔적이 있다.
언제나 알아서 챙겨먹는다는 것도 알고 있지만
그 사실이 뭔가 해주어야 한다는 의무감을 지워주지는 않는다.
저도 모르게 자신을 책망하는 한숨을 토하면서 마지막 남은 두쪽의 식빵을
마찬가지로 해치우고 설거지를 하는 중, 문소리가 들렸다.
" 동하니? "
시연은 타월에 물묻은 손을 문지르고 나서 현관으로 나갔다.
1월의 차가운 바람에 흐트러진 머리를 한 동하가 이미 들어와 있다.
" 어디 갔다 왔어, 일요일 아침부터. "
동하는 아주 기분이 좋아 보였다.
기복이 별로 없는 그의 성격에 그동안 익숙해진 터라 시연은
' 뭣 때매 저렇게 들떠 있지? ' 의아한 표정으로 소년을 살폈다.
" 좀 가져올게 있어서요. "
" …응? 뭘? "
동하는 대답 대신에 팔을 쭉 위로 뻗어올려 기지개를 켠다.
시연은 갑자기 궁금증이 머리에 차오르는 걸 느꼈다.
" 뭔데 그래. "
" 음… 몸무게, 50킬로 넘어요? "
" 무슨 소리야… 참…. "
엉뚱한 질문에 어이가 없어 그냥 웃어 버리자 소년도 피식…하고 넘긴다.
" …아무래도 상관없지만. 바람쐬러 나가지 않을래요? "
" 갑자기 뭔 소리니? 어디로… 뭘 하러? "
" 가고 싶은 곳 있음 말하세요. 너무 멀면 곤란하지만…
두발짜릴 가져왔으니. "
……?
시연은 가만히 생각하다 설마--- 하며,
여느 때와 달리 줄곧 미소를 흘리고 있는 소년을 뚫어지게 보았다.
" 오토바이? "
" 몸무겐 몰라도 아이큐는 50 넘겠는데요? "
10살 위인 상대를 귀엽게 보는 듯한 느낌.
약간은 건방지지만 악의없는 말투.
평소보다 약간 높은 상쾌한 목소리.
문득 동하에게 보통의 친근감과는 다른 어떤 끌림을 느낀다.
평소의 애어른 같은 모습에서 살짝 비껴난 소년다운 천진한 표정을 지을
때… 그런 일이 너무도 드물기 때문에 순간적으로 맥박이 빨라질 때가 있다.
그럴 때 아무리 부정하려 해도 두사람은 원래 아무 관계도 없는 타인이란
사실, 누구보다 자신이 강하게 인식하게 되는 것이다.
곤란해… 하며 머릿 속에서 주책맞은 감상을 털어내려 고개를 젓고 있다,
갑자기 깨닫게 된 듯 이맛살을 찌푸리며 자신보다 한참 높은 소년을
올려다 봤다.
진한 갈색기가 도는,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 아래 빛나고 있는
까만 눈동자는 이쪽과 마주치자 놀라 시연의 시선을 피했다가
정신을 차린 듯 다시 제자리로 돌아갔고 이어 여느 때와 다름없는
평온한 표정이 보인다.
최근 들어 눈이 자주 부딪히고 그 때마다 이상한 감각에 한쪽이 먼저
시선을 피하는 그런 패턴이 반복되는 것을 두사람 모두 알고 있다.
다만… 내색하지 않을 뿐.
" 너… 아르바이트하구 집 옮기구 그런 거 오토바이 사려구 그런 거였니? "
" 타 보고 싶지 않아요? "
동문서답…도 아니고 질문에 아예 대답을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알았다.
" 참… 미리 말을 해줬으면 조금이라두 보태줬을텐데…. "
" 안 탈 거에요? "
별 소용없는 대화는 빨리 끊자는 투다.
시연은 동하를 흘겨 보았지만 호기심이 먼저 앞서는 걸 어쩔 수 없다.
잠깐 기다리라고 말하고 방으로 들어가 옷을 챙겨 입었다.
헐렁한 빈티지 청바지에 연한 보라색 스웨터, 흰색 점퍼.
" 다 마친 거에요? "
" 응. 오토바이 탈 거면 코트같은 거 입긴 그렇잖아. "
" 추워요, 밖은. "
" 안에 내복 입었으니 괜찮을 거야. "
" 그게 아니고…. "
말을 맺지 않고 자기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소년의 손에는
연한 푸른색 머플러가 들려 있었다.
" 목으로 바람 들어가요. 자…. "
브이넥 스웨터 위로 목을 드러낸 시연의 앞으로 다가와 머플러를 둘러주는
동하에게서 시연은 어느 새 그리운 누군가의 감각을 끌어내고 있었다.
그래… 기억해.
아니, 어떻게 잊을 수 있겠어.
동하의 아버지도 이렇게 가까이 서서,
이런 자세로 머플러를 둘러 주곤 했다는 걸.
저녁식사를 둘이 같이 하고 밖으로 나설 때면,
행동이 느린 나를 재촉하는 대신 머플러를 목에 걸어 주셨었지.
그 느낌이 너무 좋아서 한심하다고 생각하면서도,
매번 둘러줄 때까지 기다리곤 했어…
꼭 지금처럼 가까이 선 채…
그 분의 맥박에 내 것을 맞추면서, 그렇게….
그런데 달랐다.
아버지와 비슷한 키.
제법 성장한 한 남자의 느낌을 갖춘 어깨.
앞에 선 소년에게 죽은 남편의 모습을 겹치고 있던 여자의 의식에
제동을 건 것은 다름아닌 향기였다.
당연한 일이지만 동하에게서는 훨씬 젊은 향기가 풍겼던 것이다.
그 또래의 소년들이 흔히 풍기는 퀴퀴함이 아닌, 젊지만 은은한…
그러나 결코 미약하지 않은 상쾌함을 지닌 그런 향기.
그것은… 그대로 다가서서 가슴에 기대고 싶은 충동을 느낄 만큼
매력적인 것으로 다가온다.
하지만, 잊어선 안돼…
내 앞에 선 이 남자는 나보다 열살이나 아래,
죽은 남편의 아들일 뿐이란 사실…….
시연은 뒤로 물러섰다.
" 내가 할께. "
" ……. "
소년이 당혹스런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것은
상대의 마음을 알아차렸기 때문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 때문이다.
여자의 머리에서 나는 달콤한 샴푸냄새에 이끌려 무심결에 한걸음 다가서고
있던 것을 혹시 들켰을까… 심장이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뛰고 있는 걸
애써 억누르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하지만 이미 움직이기 시작한 엔진은 더욱 가속을 받을 뿐,
좀처럼 진정할 기미를 보이지 않는다.
순간, 생각했다….
어떻게 저런 달콤함을 소유할 수 있을까….
이성 따윈 금새 마비시켜 버릴 듯한…
어떻게 저런 향기를 몸에 지닐 수 있는 거지…?
심장박동과 별개로 가슴에 치밀어 오른 답답함을 지우려는 듯
동하는 시연에게 두툼한 스키 장갑을 건네 주었다.
시연은 왜 이런 걸 주냐는 듯한 표정을 지으며 점퍼 주머니로부터
가족의 첫 선물인 고동색 장갑을 꺼낸다.
" 지난번에 사준 장갑 끼려 했는데…. "
" 아, 그것 가지곤 손 많이 시릴 걸요? 이거 끼세요. 좀 크겠지만…. "
" …응, 고마워. "
사소한 데까지 신경쓰는 배려는 아버지랑 똑같아….
아파트 아래에 세워져 있는 오토바이는 제법 근사했다.
문외한인 시연이 보아도 보통 길에서 보아온 스쿠터 같지는 않다.
소년이 던져 준 묵직한 헬멧을 받아 쥔 시연은 갑자기 생각난 듯 멈칫했다.
" 너… 면허…있어? "
" 걱정마세요. 무면허로 따지면 중2 때부터 탔으니까. "
" …순 날라리 중학생이었구나, 너. "
" 그래서, 안 탈래요? "
동하가 재미있단 표정을 짓고 있는 걸 알아차린 시연은
결심한 듯 그다지 크지 않은 목소리로 조심스레 말했다.
" 나… 가고 싶은 곳 있는데…. "
장소를 들은 소년의 표정은 잠깐 굳어졌지만 곧 알았다는 듯
가볍게 미소하고 엔진을 걸었다.
헬멧을 서툰 솜씨로 뒤집어 쓰는 시연의 귀에 들린 엔진소리에선
뭔가를 예고하는 것처럼 아슬아슬하면서도 빨려들어갈 수 밖에 없는
두근거림이 느껴졌다.
실은 그 때부터 깨달았는지 모른다…
이미 가슴은 한 방향으로만 호흡하기 시작하고 있었으니까.
얼음장 같은 바람이 두사람을 치고 지나간다.
그런데… 춥지 않았다.
온기라는 것은 안에서부터 솟아나는 것이므로.
몸을 붙인 상대에게서 전해지는 체온이 환각처럼 자신을 감싸는 것이
느껴진다.
라이더 시트에서 몸을 구부린 자세로 앉아 있는 동하와
텐덤(보조석)자리의 시연은 어느 샌가 몸을 꼭 붙인 채 바람을 맞고 있었다.
점점 빨라지는 스피드에 첨엔 그저 무서울 따름이었지만 뭔가에 의지하려는
것은 본능일까, 어느 사이엔가 동하의 허리를 꼭 붙들고 있는 걸 깨닫고
자신에게 당황한 시연이다.
하지만… 뭘까.
이 어쩔 수 없는 안도감은.
앞에 앉은 상대의 심장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오자 두려움은 바람과 함께
어디론가 날아가 버리고 뭐라 말할 수 없는 안락한 기분만이 남는다.
머리 주위를 바람과는 다른 싸아한 감각이 지배하는 것을 느끼고,
등에 헬멧을 살짝 기댄 채 눈을 감았다.
' 기분이 좋아…. '
입을 열지 않고 전했다.
소리로 들은 것은 아니지만… 영혼의 힘을 실은 대사는
딱딱한 헬멧을 뚫고 상대의 등으로 전해져 가슴으로 서서히 퍼져 간다.
앞에만 집중하고 있는 듯 보이던 동하의 입술에 잠시 미묘한 떨림이 스쳤다.
럼주를 넣은 초콜릿을 한 입 베어 문 것처럼 달콤하면서도 씁쓸한 감각이
혀를, 그리고 머리를 감싸고 있다.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그런 감각.
취할까 봐 두려울 정도의…
그러나… 놓치고 싶지 않다.
바이크가 멈췄다.
헬멧을 벗은 두사람의 머리카락이 금새 바람을 타고 올라가기 시작한다.
바이크를 남겨 둔 채 조용히 몸을 내려 앞으로 걸어가는 시연을
동하도 말없이 따라갔다.
고개를 들자, 두사람 모두에게 아픔을 상징하는 풍경이 앞에 전개되어
있었지만 지지 않으려는 듯, 눈을 떼지 않고 앞을 응시했다.
일요일임에도 불구하고 한겨울이라 그런지 근처에 간간이 눈에 띄어야 할
낚시꾼들도 전혀 보이지 않고 말없는 두사람만 한 자리에 서 있을 따름이다.
멀리 저편에 흐릿하게 눈덮인 산이 보이고 그 앞쪽으로 투명한 푸른 물이
맑게 맑게 시야를 메우고 있었다.
제법 추운 날씨이긴 해도 물은 얼어 있지 않다.
소중한 사람을 손에서 날려보낸 그 날처럼 슬프도록 고요히 흐르고 있을 뿐.
다만 푸르른 풀숲이 가득 펼쳐져 있었던 그 때와 달리 오늘은 언제
내렸는지도 모를 눈밭이 발 밑에서 소곤소곤 수줍게 소리를 만들고 있었다.
…현기증이 일 정도로 아름다운 풍경이다…….
그 날……
몸을 지탱할 수 없을 정도로 저려오는 아픔을 꾹꾹 억누르며 손가락 사이로
그 사람을 태운 재를 날려보낸 하루는 어느 새 과거가 되었지만,
그러나 추억은 아직도 가슴에 남아 눈을 시리게 만든다.
세찬 바람 때문이라고 핑계를 대고 싶지만,
거짓말이란 걸 자신이 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눈물 흘리진 않을 것이다.
강 아래 잠들어 있는 그도 나의 눈물을 바라진 않을 것이기에.
시연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앞을 바라 보고 있었다.
' 춥지 않으세요? 그래도 며칠 전보단 날이 풀렸는데…
저는, 괜찮아요. 당신이 준 소중한 선물… 가족이 있으니까.
고맙단 말을 전하려고 왔어요.
그동안 너무나 오고 싶었지만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용기가 나지 않아서… 처진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서…
하지만, 이젠 괜찮아요. 강해졌으니까. 이젠, 강해졌어요. '
동하는 앞만 보고 서 있는 여자를 바라보다 자신도 물로 시선을 돌렸다.
길게 호흡하고 있는 시연과 달리, 소년이 마음 속으로 중얼거린 대사는
단 한마디였다.
' 죄송해요… 아버지……. '
자신도 무슨 소릴 하고 싶은지 알 수 없었다.
하지만 그리움 이전에 먼저 밀려드는 감정은 죄책감이다….
그 날 이후로 한번도 오지 않았다.
아니, 오늘도 저기 서 있는 여자가 오자 하지 않았다면
이 자리에 서 있는 일… 없었을 것이다.
실은… 두려웠다.
물과 그 아래 존재할 아버지의 환영을 응시하는 게 두려웠다.
아니, 그로 인해 자극받을 자신의 감정이 더 두려웠다.
과거… 자신은 왜 그렇게 아버지를 원망했던가.
어머니란 존재를 거둬버린 장본인이 아버지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지금 와 생각해 보면 아버지도 운명의 피해자였던 것이다.
그 때, 그리고 현재의 자신처럼 갖가지 감정들을 이성으로 압박하며
힘들게 존재하는… 아버지이기 이전에 평범한 한 인간이었던 것이다.
' 하지만… 그걸 인정하기에 난, 너무 어렸어…. '
한번 뚜껑을 여니 계속 잡다하게 빠져 나오는 상념들을 지워 버리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얼굴로 파고 드는 바람의 어퍼컷보다는,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
이런 생각들이 아직 어린 동하에겐 훨씬 힘들게 다가온다.
시간도… 강물도… 그저 흐를 뿐이다.
남편을 잃은 여자와 아버지를 잃은 소년은 한동안 한마디 말도 없이
한자리에 선 채, 말없이 물을… 모든 것을 받아들여 줄 듯 그저 상냥하게
흘러가는 강물을 바라보고 있었다…….
항아리 안에서부터 뿌연 김이 올라오는 것이 보인다.
찬 바람에 꽁꽁 얼었던 몸도 뜨뜻한 아랫목에 올려진 방석 위에서
조금씩 녹아가는 듯 싶었다.
수제비보다 먼저 나온 감자전 한 접시는 이미 깨끗이 비워져 있다.
멍하니 서 있다 보니 어느 샌가 점심시간이 지나 있었다.
자기야 아침을 늦게 먹어서 괜찮다손 쳐도 아침 일찍, 그것도 식빵 쪼가리로
배를 채우고 나갔다 온 동하에게 미안한 짓이었다고, 시연은 오래도록
생각에 잠겨 서 있던 자신을 내심 야단치는 중이다.
그렇다곤 해도 배가 고프다는 한마디 정도 짧게나마 해줬으면
자신도 일찍감치 깨어났으련만 참을성있게 기다려 준 동하의 배려가
가슴에 와 부딪는다.
어쨌건 간에 배가 어지간히 고팠던 성장기의 소년은 감자전 한 접시를
순식간에 혼자서 먹어 치우더니, 젓가락을 거의 대지도 않은 채 가만히
자신을 보는 시연의 시선을 느끼고 어색한 미소를 입가에 살짝 띄운다.
" 아… 혼자 다 먹어 버렸다… 미안해요…. "
" 괜찮아. 먹을 자신 있으면 한 접시 더 시킬까? "
방금 나온 따끈한 수제비를 국자로 가득 퍼 동하에게 내밀며 말했다.
" …김치전으로요. "
절대 못 먹겠단 소린 하지 않는다.
잘 먹는 사람은 확실히 주위 사람까지 행복하게 만드는 것 같아.
시연은 빙그레 웃고 서빙하는 아주머니를 불러 김치전 한 접시를
추가주문했다.
" 맛있어? "
" 예. "
아닌 게 아니라 손으로 쭉쭉 찢은, 쫄깃한 수제비의 맛이 정말 일품이다.
상 위에 올려진 총각 김치도 적당히 익은 것이 입안에서 사각사각 씹혔다.
손님이 많은 것엔 다 이유가 있는 법.
한동안 먹기만 하던 시연이 생각난 듯 말했다.
" 오토바이 좋아하는진 전혀 몰랐네.
지금 와 생각해 보니 책장에 잡지도 꽃혀 있었는데 말야.
언제부터 관심있었어? "
" 중학교 때, 준구형을 알게 되면서요. 저것도 원랜 준구형 거예요.
준구형이 딴 걸로 바꾸면서 저한테 왔지만. "
" 잘은 모르지만 멋진 것 같아, 그 오토바이. "
동하가 기분좋은 표정을 지었다.
알아 주니 기쁘다.
오늘만은 자신을 칭찬하는 것보다
바이크에 관심을 가져주는 것이 훨씬 좋은 그였다.
" 이담에 제 손으로 만들고 싶어요. …자동차랑 오토바이. "
" 아, 벌써 뭘 할지 정한 거야? "
" 정확힌 아녜요. 원랜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만… 미대에 가긴 좀 그렇고,
일단 공대에 진학해서 이것저것 배운 다음에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러다 그냥 전공대로 나갈 수도 있고…. "
" 참, 문과 이과 선택할 때구나. 좋겠다, 확실한 목표가 있어서.
난 고등학교 때 엄청 고민했거든, 뭐가 나을까… 뭐가 나한테 맞을까.
결국 문과 갔지만 말야. "
" 왜 문과로 했어요? "
" …수학을 못해서. "
솔직한 대답에 웃음을 터뜨렸다.
쿡 하고 맞웃음을 지은 시연의 표정이 소녀처럼 귀엽다.
그렇게 잠시동안 웃던 시연이 생각난 듯 말했다.
" 참, 미은이 말야. 너 일하는 카페에 자주 들른다며? "
" 누가 그래요? "
" 마리가. 자기도 몇번 같이 갔었다는 말도 했어. "
" 아… 예. "
" 후훗, 은근히 인기좋은가 봐. 미은이, 관심있는 거 아냐? "
" 그러는 그쪽은요. "
" ……? "
무슨 말을 하는 지 선뜻 짐작이 가지 않는단 표정을 지으면서,
시연은 아무렇지 않은 척 태연하게 수제비를 입에 넣는 소년을
그저 응시할 따름이다.
" 전에… 어떤 남자 차에 타고 있는 걸 본 거 같은데…
그 남자, 가끔씩 전화도 걸곤 하는 사람 아닌가요? "
이제서야 납득이 간다.
" 아… 서현우씨 말이구나. 으응, 아니야.
그냥 몇번 식사를 같이 했을 뿐이구,
우리 회사 선배의 학교 후배라서 우연히 알게 된 사람이야. "
" 별로… 상관없어요. 사귀는 사이여도. "
이젠… 거짓말도 정말 쉽게 뱉을 수 있게 된 건가.
마음을 감추는데… 어느 샌가, 익숙해져 버렸다….
" 아니… 당분간 누굴 좋아한다든지 하는 일 없을거야. 겨우, 4개월인 걸. "
입으론 상관없다고 하면서도 약간은 굳어 있는 상대의 얼굴을 살피며
담담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로 시연이 말한다.
" '벌써' 4개월일 수도 있죠. "
" 응,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 그 동안 참 정신없이 시간을 보냈던 것 같애. "
도저히 버틸 수 없을 것 같았는데…
사람은 다 어떻게든 살아가는 존재였어….
" …괴로워요…? "
" 아니라면… 거짓말이겠지….
그래, 생각보다 더 힘들었어. 하지만, 넌…?
훨씬 오랫동안 아버지와 같이 지낸 쪽의 무게가 더 무겁지 않을까. "
" 내 무게는요… "
말을 꺼내려던 동하는 왜일까… 숟가락을 그릇 속에 내려 놓음과 동시에
갑자기 침묵해 버렸다.
약간 날카로운 인상을 주는 눈을 아래로 내리깐 채,
잠자코 입을 다물고 있는 소년의 모습…
언제나 보아왔던 의지가 강한 모습이 아니라
이 순간 만큼은 순수하면서도 여려 보인다.
왠지… 안아주고 싶을 정도로 여려 보인다.
김치전이 나왔다.
말없이 접시를 동하 쪽으로 밀어주는 여자에게,
마음을 다잡은 듯 차분한 음성이 들려온다.
" 아버진 어떤 사람이었어요? "
" …응? "
" 아… 다른 사람 눈에 비친 아버진 조금 다를 것 같아서요. "
" 그냥 보통 사람… 자상하고 따뜻한… 하지만 연약한 면도 있었어.
그렇지만…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상대를 배려할 줄 아는
그런 사람이었어… 내겐. "
시연은 기억을 더듬어 보았다.
아니, 실은 힘들게 찾을 필요도 없을 정도로
그와의 만남은 그녀의 기억 속에 선명히… 남아 있었다.
첫 만남은 자료실이었다.
매일 일에 치여 사는 신출내기였던 난,
그 날도 책들을 한아름 짊어진 채 복사기 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앞이 보이지도 않을 만큼 많은 책을 들고 힘겹게 발을 옮기던 팔의 압박감이
갑자기 줄어들어 옆을 보니 그가, 내가 들어야 할 책 절반을 받아 든 그가,
격의없는 미소를 띈 채 날 응시하고 있었지.
당황해서 무작정 고개를 숙이다 들고 있던 나머지 책들조차 바닥으로
떨어뜨려 버렸다.
" 죄송합니다……. "
" 잡지 쪽 신입인가? "
" 네. "
" 벌써 10신데 몸 생각하며 일해. 맘대론 안되겠지만…. "
기껏해야 30대 후반 정도일 거라 생각했었다.
그런 그가 중학생 아들까지 있는, 40대 남자란 사실을 전해 듣고는
얼마나 놀랐던지….
당연히 처음부터 호감을 가진 것은 아니었다.
그냥 까마득한 선배에 불과했을 뿐.
뭣보다 입사한 지 얼마 안된 나에겐 하루하루가 고역이었다.
준비가 부족하진 않았을까… 뭔가 실수를 저지르진 않았을까…
긴장한 채 매일을 보내는 것만으로 머리가 꽉 차서
다른 생각할 여유가 없었던 탓도 있었을 것이다.
게다가 같은 회사일지라도 그는 신문기자였고 나는 잡지기자…
일하는 영역도, 출근하는 건물도 달랐다.
처음 만났을 때처럼 자료실에 갈 때 아니고서는 만날 기회도 별로 없었다.
두번째 만남은 사내 체육대회였다.
출전한 사람들은 젊은 기자들이 대부분인 족구시합에 어디서 본 듯
반은 낯익고 반은 낯선 사람이 보여 기억을 더듬어 보니… 그였다.
왜 그랬을까… 시선을 뗄 수 없었다.
17세 연상의 남자를 멋있다 생각하다니…
현실의 냉정함에 묻혀 살아온 내 눈에 들어 온 그는,
눈을 시원하게 만들 정도로 그 순간만큼은 자유로워 보였다.
땀을 흘리며 짓던 미소도 인상적이었다.
그러나…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같은 방향인 관계로 얻어타게 된 차 안에서
본 그는 역시나 여러가질 겪을 만큼 겪은 어른의 표정을 하고 있었다.
" 몇살이지? "
" 스물 넷…인데요. "
" 하… 열 여덟이나 아홉으로 보이는데.
주위에서 동안이란 소리 못 들었어? "
마음을 편하게 해주는 미소를 지녔다고… 순간 생각했다.
" 마찬가지신 걸요. 30대로 밖에 안 보이시는데…. "
" 무슨 소리.
오랜만에 입고 나온 청바지 배부분이 낑겨 숨도 못 쉬고 있구만. "
" 쿡…. "
엄살관 달리 폴로셔츠가 꽤 시원하게 어울렸다.
" 어쨌든 아직 젊으니 나보단 애들 생각을 이해하겠군.
요즘 애들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건지…
아들 녀석 땜에 아주 죽겠어. "
" 왜요? "
" 중2 밖에 안된 놈이 애빌 완전 장애물 취급하거든.
요즘 무슨 생각하고 사는 지 넌지시 떠 보면 대답은 항상
'그냥 좀 내버려 둬요…. '라니까. "
점잖은 말투와는 달리 그는 그다지 자신을 포장하거나 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내가 처음 본 그는 가볍게 한숨을 내쉬며 아들과의 갭을 걱정하는
그저 보통의 아버지일 뿐이었다.
그런 그의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고 싶다고 생각하면서 대답할 말을 고르고
있을 때 좌회전 차선으로 들어선 차가 멈췄다.
잘 모르는 사람 옆에 앉은 긴장감이 어느 새 풀어진 걸 깨닫고 입을 열었다.
" 그 나이 땐 자신이 세상에서 젤 힘든 것 같이 느껴지잖아요.
그냥 앉아 있는 것조차 힘든 나이기도 하구요.
그래도 이렇게 젊어 보이는 아버지를 왜 장애물 취급하는지 모르겠네요.
운동도 잘하시는 멋진 아버진데. "
" 아… 아들 녀석 만나서 그렇게 좀 말해 줘.
하여튼 녀석, 아주 문제아야. 틈만 나면 싸움질이니, 원.
며칠 전에도 정학먹을 뻔한 걸 빌고 빌어 간신히 근신으로 넘겼거던. "
신호가 바뀌고 핸들을 가볍게 꺾는 그의 옆얼굴.
그 날 차 안에서 나누었던 대화가 하나하나 자세하게 기억나는 건 아니지만
확실히 남아 있는 건 그 옆얼굴과…
그리고 그가 시종일관 아들의 이야기를 했었다는 것.
그것이 시작이었다.
물론 첫 '데이트'를 하게 된 것은 한참 후가 되었지만….
처음으로 각인된 그의 기억은 앞으론 절대 볼 수 없을,
따뜻하면서도 지적인 인상의 옆얼굴…
그리고 아들을 사랑하는, 그러면서도 조금은 거리를 두고 있는 듯한
아버지의 모습이었다.
어디까지나 과거 일일 뿐… 이젠, 현재가 될 수 없는 기억.
하지만…
대신 그와 닮은, '문제아' 아들이 그 때보단 좀더 성장했을 모습으로
내 곁에 있다.
볼 적마다 가슴이 뛸 정도로 닮은,
그리고 점점 더 닮아가는 얼굴을 한,
그의 아들이.
잊으려고 원하는 것만큼 기억에 강하게 남는 것도 없다.
몽테뉴/ 수상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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