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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애(禁止愛) (6)

오늘의 쉼터 2014. 9. 25. 16:43

금지애(禁止愛) (6) 

 

   
  
 
낮보다도 훨씬 내려간 기온… 
 그리고 차디찬 바람….
 
 마지막 인사를 남기기 위해 다시 한번 찾아온 강변의 저녁은 
 그렇게 싸늘하게 두사람을 감싸고 있었다.
 
 언제 또 올 수 있을까….
 
 아쉬움이 마음 한구석을 지배하고 있다.
 
 서울에서부터 겨우 2시간이 될까 말까한 거리인데도 
 바쁜 일상 속에 시간을 따로 내는 것이 의외로 어려운 걸 알기 때문에 
 좀처럼 발이 떼어지지 않는다. 
 
 어쨌든 지금은 마음 속 물결이 잔잔해져 있음을 느낀다. 
 자연이란 정말이지 신비로운 힘을 지닌 것이어서,
 지친 마음을 평온하게 쉬도록 하는 마력을 발휘하곤 한다.
 
 이제 괜찮다.
 상처를 건드려도 다시 곪거나 하지 않는다… 이 곳에선.
 
 " 내 이름은, 엄마 아버지 두분이서 같이 지은 거래요. "
 
 먼저 화제를 꺼내는 일은 좀처럼 없는 동하다.
 조금… 놀랐다.
 
 " 무슨 뜻인데? "
 " 겨울 동(冬)에 여름 하(夏). 
  아버진 사계절 중 겨울, 엄마는 여름을 제일 좋아했다나요. "
 " 와… 멋있는데. 그런 뜻이 있을 줄이야. "
 
 감탄한 시연은, 그러나 이어진 씁쓸한 한마디에 그만 할 말을 잃었다.
 
 " 헤어진 게…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르죠. "
 " ……? "
 
 " 좋아하는 계절부터 극과 극이었으니… 
  모든 면에서 다른 두사람이 같이 사는 것, 
  두사람 모두에게 어지간히 피곤한 일이었을테죠. "
 
 " 두 분… 왜 헤어지신 거지? "
 
 " 모르겠어요. 그저… 이해해 달라고만 했던 기억이 나요. 
  이젠 돌아갈 수 없다고 엄마가 그랬어요. 그리곤 미국에 가버렸고… 
  마지막으로 들은 소식은 엄마가 미국에서 재혼을 했다는 거… 
  그 때까진 아버지도 엄마 사진 몇장이랑 필름까진 없애지 않았었는데, 
  그 말을 전해준 날, 나머지 사진이랑 필름까지 전부 버리는 걸 봤어요. "
 
 동하는 얼굴에 엷은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바람 속 시린 망막 위에 새겨진 소년의 엶은 미소엔 
 중요한 뭔가가 결여된 대신, 상처자국이 뚜렷이 드러난다.
 
 숨겨져 있던 상처를 소년은 일부러 꺼내 보여주고 있었다.
 기쁘지만… 미안하고… 물어도 될까, 꺼림직했지만… 묻고 싶었다.
 
 " 엄마가 보고 싶은 거지? …그렇지? "
 " ……. "
 
 대답 대신 아래를 내려다 보며 운동화 끝으로 땅을 톡톡 찬다.
 
 …침묵.
 
 역시 괜한 질문을 했어… 후회하고 있을 때 
 갑작스런 낮은 음성이 이어져 놀라 쳐다 보았다.
 
 " 전에 엄마 사진, 한장도 없냐고 물어봐서 그렇다구 대답했었죠. 
  …기억나요? "
 " 응. 필름도 없다구 그랬잖아. "
 " 그거, 거짓말이었어요. 꼭 한장… 지갑에 넣어 뒀었어요. "
 
 시선은 여전히 땅을 향한 채 말만 하고 있는 동하는 느슨한 자세였지만 
 주머니에 넣은 손과 그 손으로부터 이어진 어깨가 조금 경직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 지금도 가지고 있니? "
 " 보실래요? "
 
 건네받은 사진 속엔 발랄한 인상의 30대 여성이 환하게 웃고 있다. 
 시연이 봐도 어딘가 매력이 흐르는 사람이었다. 
 재치있고 지적이면서도 귀여울 듯한 인상의, 커트머리가 잘 어울리는 
 여자였다.
 
 " 미인이시다. 다행이네, 한장 남아서. "
 
 한참을 들여다 본 시연은 사진을 동하에게 돌려 주었다. 
 아까 들어 있던 지갑 속에 바로 돌려 놓으리라 생각했던 시연의 예상과 
 달리 소년은 자신도 그 사진을 잠시간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사진을 고쳐 잡은 손가락에 힘을 준다. 
 
 앗 하는 사이의 일… 
 정신이 들었을 땐, 사진은 이미 세로로 부욱 찢겨 있었다.
 
 " 어…? 왜…?! "
 
 시연이 말도 제대로 못하고 있는 사이, 한번 더 찢긴 사진은 
 네조각으로 나뉜 채 동하의 손에서 떠나 허공으로 너울너울 날아가 버렸다. 
 강쪽으로 날아간 조각들은 이내 시야에서 벗어났고… 
 바람을 타고 강물 위로 떨어져 갔다.
 
 " 왜, 왜 그랬어… 한장 남은 거라면서…. "
 " 잊을려구요. 얼굴도 기억도 다 없애버리려구요. "
 
 현재의 가족만 기억할 작정이다.
 지금 내 곁에 있는 사람만 기억하려 한다.
 가족으로… 남남도 이성도 아닌… 소중한 가족으로 받아들이려 한다.
 상대도 그래 주었으면 좋겠어… 상처를 없앴으면 좋겠다.
 
 " 아버지… 빨리 잊어 버려요. "
 
 소년의 입술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보인다. 
 시연 뿐만 아니라 말을 꺼낸 동하 자신도 놀란 대사였다. 
 
 하지만 한번 뱉은 말을 줏어담을 순 없다. 
 그리고 적어도 지금 한 말은 진심일 것이다. 
 깊숙이 감춰져 있던 진심일 것이다.
 
 " 왜… 그런 말…. "
 " 어차피 가버린 사람 따위… 이젠… "
 
 왜 안타까운 걸까. 
 왜 이렇게 저 여자의 사는 방식이 답답한 걸까. 
 동경하면서도 한편으론 제동을 걸고 싶은 마음이 결국 입을 열게 만든다. 
 
 그러나 상대는…
 
 " 잊지 않아도 버틸 수 있다면… 그 편이 낫지 않을까…? "
 
 아주 조용히 미소짓는다. 
 마치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 일을 말하듯 담담한 모습.
 
 동하의 눈에는 부서질 듯 연약한 존재로 보인다. 
 쓰러졌던 날 이후, 그 사실을 깨닫고 
 더 이상 기스내지 않으려 조심하고 있었다.
 
 그런데… 문득문득 느끼게 된다. 
 
 옆에 서 있는 여자는 가혹한 운명을 가느다란 몸 자체로 받아내는 용기를 
 지닌… 강한 사람이라는 걸. 
 자신의 과거와 현재를 포장하거나 덧칠하지 않고 그저 있는 힘을 다해 
 매일을 부딪쳐 받아들일 줄 아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어떤 면에선 나보다 훨씬 강할지도 모를… 
 미래를 맞이할 자격이 있는 그런 사람이라는 걸.
 
 ' 나는…? 나는 자격이 있는 걸까……? '
 
 곧 어두워질 듯 하늘은 회색을 섞은 듯한 푸른 빛으로 변해가고 있고,
 소녀처럼 가냘픈 해는 마치 방금 붓으로 그린 수채화 위에 물을 떨군 듯 
 붉은 빛을 연하게 만들며 서서히 퍼져 간다. 
 
 무한의 공간 안, 아주 미세한 점으로 박힌 두사람의 상념과는 관계없이 
 시간은 흘러가고 또 흘러간다….
 
 …일상으로 돌아갈 시간이 다가오고 있다. 

 

 

부산역.
 구정 휴가 전날이라 그런지 귀성객들로 역 안은 무척이나 북적대고 있었다.
 
 이제 막 개찰구를 빠져 나온 소년은 이리저리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피는 모습이다. 
 한참을 둘러 보던 그의 눈동자가, 마찬가지로 시선을 움직이고 있는 
 한 청년에게 고정되고, 이어 반가운 미소가 번졌다.
 
 " 민규형…! "
 
 소리를 들었는지 청년은 금새 시야에 상대의 모습을 넣고 
 기분좋은 웃음을 터뜨리며 이쪽으로 다가온다.
 
 " 이야, 동하. 니, 진짜 많이 자랐다. 쫌만 지남 내도 따라잡겠다. "
 
 경상도 사투리가 약간 섞인 억양. 
 굵직한 목소리를 내며 소년의 등을 퍽 하고 치는 모습이 
 친근하기 이를 데 없다.
 
 " 형, 진짜 오랜만이야. 아… 참, 합격 축하해. "
 " 쑥스럽담 마. …가자, 내 들 거 없나. "
 " 하루 자구 갈건데 가져올 게 어딨어. "
 
 역을 빠져 나오니 서울관 달리 겨울치곤 따스한 공기가 
 사방을 메우고 있었다. 
 부산에서 태어나 죽 자란 민규형은 그리 좋지만도 않은 모양이지만 
 몇년에 한번 눈이 올까 말까한 이곳의 온기가 다정한 느낌이라고 
 동하는 생각한다.
 
 택시를 잡아 탄 후, 한숨돌린 동하가 먼저 말을 꺼냈다.
 
 " 그럼 이제, 형 서울 오는 거네? "
 " 아, 기숙사 신청했다. "
 
 계속 부산에서 자란 사람치고는 사투리가 아주 심하진 않다. 
 게다가 가끔 서울에 올 때면 신기할 정도로 완전한 표준말 발음을 하는 
 민규형이다. 
 아마도 서울서 자라 부산에 시집간, 역시 표준말을 쓰는 고모 덕분일 
 것이다.
 
 창밖 풍경이 휙휙 변하고 이어 바다가 보이기 시작했다.
 소금 냄새가 코를 기분좋게 자극한다.
 새우깡을 연상시키는, 동하가 아주 좋아하는 냄새.
 
 " 올 때마다 변하는데, 여기. "
 " 그렇제. 대학가서 방학 때 내려온 형들이 그러더라, 진짜 달라졌다고. "
 " 이제 곧 형도 그렇게 말하게 되잖어. "
 " 그러게 말이다. 울엄마 나 서울 보내는거 억수로 걱정되나 보다. 
  니도 알잖냐. 내, 밥이고 뭐꼬 암것두 못하는 거. 
  앞으로 어떻게 할지 막막타. "
 " 기숙사라며. "
 " 2학년 때부턴 자취해야 된댄다. 맨날 사먹을 수도 없고 말이다. 
  동하 닌 요리 잘해 좋겠다. "
 " 다 닥치면 하게 돼. 걱정 마, 형. "
 
 고모에게는 아들만 둘 있는데 민규형과 선규형이다.
 
 올해 대학에 입학하는 민규형은 동하보다 키가 조금 크고 
 아무리 먹어도 살이 찌지 않을 듯한 호리호리한 몸매의 소유자이다. 
 그 몸매는 생각컨데 동하의 친가 쪽, 즉 민규형의 외가쪽 체구를 닮은 듯 
 싶었다. 동하의 아버지도 고모도 나이에 비해 키가 크고 살이 잘 붙지 않는 
 체질인 것이다. 
 
 뭣보다 자그맣고 통통한 체구에 늘 생글거리는 인상의 고모부와 
 살이 안 쪄서 고민인 민규형과는 전혀 닮지 않았기 때문에 
 굳이 따지자면 아무리 생각해도 고모 쪽이다. 
 그러나 얼굴은 고모부를 더 닮았다. 
 잘생긴 윤곽이지만 날카로우면서 약간은 차가운 인상의 고모와 
 닮은 것은 순한 느낌의 민규형보단 오히려 동하 쪽일 것이다.
 
 해안을 따라 이어진 고속도로를 벗어나 좀 더 들어간 후, 
 드디어 택시가 멈췄다. 
 고모네 가족이 사는 곳은 남천동 광안리 바닷가에 세워진 한 아파트다. 
 
 내일이 구정인지라 그런지 문을 열고 들어서자,
 갈비나 전 부치는 냄새 같은 것이 바로 코로 흘러 들어 온다. 
 예민한 후각은 젊은 위장을 자극하고 바로 '배고픔'이라는 결론을 
 도출해 냈다. 
 옆에 선 민규형도 마찬가지인 모양.
 
 " 어우, 배 억쑤 고프다. 엄마, 밥! "
 
 열쇠로 문을 따고 들어가자마자 형이 내지른 소리였다. 
 하지만 아들의 소리엔 대꾸도 않은 채 부엌에서 나온 고모는 
 옆에 선 동하에게만 한마디 한다. 
 약간은 딱딱하지만 잘 살펴 보면 정이 담겨 있음을 알 수 있는 소리다.
 
 " 동하 배고프겠다. 어여 들어와. 식사 준비 다 됐다. "
 " 제사 준비하시느라 바쁜 거 아니에요? "
 " 아니, 올핸 작은 집에서 하기로 했다. 
  하기사 전 같은 건 좀 들고 가기로 했다만. 
  그런 걱정은 말고 어서 들어와. "
 " 어이, 동하 왔나. "
 " 선규형. "
 
 올해 고3이 되는 선규형이 생선전을 입에 물고 이쪽으로 걸어와 
 동하의 어깨를 툭 하고 두드린다.
 
 " 또, 또 건들거리네. 식사 전에 뭐하는 짓이야? "
 
 작은 아들의 등을 사정보지 않고 퍽 친 고모는 화장실을 가리키며 
 손씻으라는 시늉을 한다. 
 그러잖아도 큰 키에 허우적거리는 게 영 보기 흉하다며 볼 때마다 
 입버릇처럼 작은 아들의 몸동작에 대해 지적하는 고모다. 
 이미 익숙해져 있는지 머리만 긁적일 뿐, 별 상관없다는 듯,
 화장실로 들어가며 선규형은 동하에게 장난스런 미소를 지어 보였다. 
 
 키는 큰 형인 민규형보다 크지만 몸무게는 오히려 덜 나갈 듯 보이는 
 마른 체구. 
 확실히 몸매는 두사람 다 고모를 닮았다. 
 어떻게 보면 감사해야 할 일일 수도 있건만 이들 훌쭉이 형제에게는 
 아무리 먹어도 몸무게가 늘지 않는 것이 심각한 고민이고 공통된 관심사는 
 마른 몸에 어떻게 해서든 근육을 붙이는 것이라 두사람의 방에 가보면 
 항상 발 밑에 아령 같은 게 뒹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동하는 어릴 때부터 이 두 형이 좋았다. 
 멀리 떨어져 사는 까닭에 자주 볼 수 없긴 하지만 
 형제가 없는 동하에겐 진짜 형 같은 존재들이다. 
 
 아버지와 함께 부산에 내려올 때면 고모네 아파트 근처 농구대에서 
 농구를 하기도 하고 이어진 바닷가를 쭉 따라서 자전거를 타기도 했다. 
 무엇보다 셋이 같이 있으면 언제나 마음이 잘 맞았다. 
 
 볕에 그을린 얼굴 아래 흰 이를 보이면서 웃는 두사람의 얼굴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오랜만에 두 형을 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
 
 " 거기 좀 앉아 있어라. 니들 먼저 들어가. 
  동하랑 둘이서 할 얘기 있으니. "
 
 식사를 마치자마자, 고모의 말에 거실 소파에 앉은 동하에게 찡긋 하고 
 민규와 선규형이 눈신호를 보냈다. 
 다 끝나면 자기네들 방으로 오란 의미다.
 
 배를 깎아 내온 고모가 접시를 넘겨 주며 입을 열었다.
 
 " 저, 얘기 들었니? "
 " 예? 무슨…? "
 " 민규 할머니 돌아가셨다. "
 " 아… 예. "
 
 민규형의 할머니, 즉 동하 고모의 시어머니는 중풍으로 오랫동안 
 몸을 움직이지 못했고 맏며느리인 고모는 그 병수발을 2년에 걸쳐 
 해오고 있었다. 
 
 유일한 친척은 고모 뿐인 동하를 걱정하면서도 선뜻 부산에 내려오게 
 하지 못한 이유도 고모네 집이  동하를 돌봐 줄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리고 여유가 없던 제1원인은 아무래도 집안에 손이 많이 가는 병자가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 고모의 시어머니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것이다.
 
 " 그래서 말인데, 이제 부산에 내려오렴. 이쪽은 대충 다 정리됐구, 
  이번에 민규도 대학 입학해서 서울로 올라가니깐 
  어차피 동하 너 하나 여기 온다구 달라질 일 없으니 부담갖지 말구, 
  그래, 아예 2학년부턴 여기서 학교 다니는 게 어떻겠니. 
  갑자기 전학 수속하기 힘든 건 알지만 말이다. "
 
 아버지의 갑작스런 사고, 시어머니 병수발에 이어 장례까지 연이은 일들을 
 처리하느라 수척해진데다 주름살이 늘어난 고모의 모습. 
 자신이 자라갈수록 어른들은 늙어간다. 
 
 고모의 키를 추월한 것은 꽤 오래 전 일이지만 그 뒤로도 
 부산에 올 때마다 점점 더 고모가 작아져 있단 사실을 깨닫는 것은, 
 소년으로 하여금 꽤나 묘한 기분이 들게 만든다.
 
 " 지금은 새엄마랑 사는 걸요. "
 " 이제 스물 여섯, 아니 올해 겨우 스물 일곱된 여자가 뭘 알겠니. 
  밥이나 제대로 할 줄 알어? "
 " 그런 걱정이라면 안하셔도 돼요. 아, 정말이에요. 
  의심나시면 한번 서울 올라오셔서 둘러 보세요. 
  전보다도 훨씬 정돈된 생활을 하고 있단 느낌인 걸요. "
 " 어쨌든 그 아가씨, 따지고 보면 너랑 생판 남남이잖니. 
  피도 안 섞인 사람이랑 가족처럼 잘 살 수 있다고는 생각지 않는다만. "
 " ……고모. "
 
 동하는 가만히 미소짓고는, 걱정섞인 눈을 하고 자신을 응시하는 고모를 
 똑바로 쳐다보며 말했다.
 
 " 지금이 편해요. 생각해 주시는 건 고맙지만… 지금 이대로가 좋아요. "
 
 진심으로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기에 더 걱정을 끼칠 수는 없다. 
 하지만 겨우 익숙해진 현재를 바꾸고 싶지도 않다. 
 그걸 알아 주셨으면 해요, 고모.
 
 " …동하야. "
 " 만일 이대론 안되겠다 싶으면 연락드릴게요. 
  어차피 민규형도 서울 올라오니 형하고도 연락 자주 할 거고요. "
 
 또박또박 열심히 설득하는 소년의 말. 
 
 그 미소에 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그런 고모의 머릿 속엔 왠지 모를 한줄기 불안이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그 예감은 비교적 정확하게 맞아 떨어졌던 것이다.
 
 그것은 그닥 많은 시간이 지나지 않은 어느 날의 일이었다. 
 
 " 이런 날 여는 식당이 다 있네요. "
 
 구정 휴가의 마지막 날 저녁.
 김이 모락모락 나는 아구찜을 먹고 있는 중이다.
 
 회사에 틀어박혀 원고를 쓰고 있던 시연에게 은영선배의 대학후배인 
 서현우가 전화를 걸었다. 
 옆자리에 은영선배가 있었다면 어떻게 해서든 같이 나갔겠지만 
 은영선배는 막바지 촬영이 있어 때마침 회사에 없었다. 
 
 그 동안 만나자는 전화를 쭉 거절해 왔기 때문에,
 미안한 마음에서라도 어쩔 수 없이 나갈 수 밖에.
 
 " 그러게 말입니다. 전화 걸어보고 저도 놀랬어요. 
  근데 시연씨, 아구찜을 좋아하시나 봐요. "
 " 아, 예. 매운 거 좋아해요. "
 " 아하, 괜히 이제껏 만날 때마다 특이한 거 고르려 애썼군요. 
  실은 저도 한식 취향이거든요. "
 
 현우는 눈을 가늘게 만들며 예의 트레이드 마크인 선량한 미소를 짓는다.
 
 참 좋은 사람이다. 
 편한 느낌을 주기도 한다. 
 
 하지만---
 
 " 구정 휴가까지 회사일이라니 말이 됩니까. "
 " 잡지는 죽어도 제 시간에 나와야 하니까요. 그런데 왠일이세요? 
  회계법인도 그리 휴일을 지키는 것 같지는 않던데요. "
 " 구정 전까지 매일 새벽 3시에 들어갔었거든요. 
  그렇잖으면 제때 프로젝트를 끝낼 수 없으니까 말이죠. "
 " 대기업도 다를 바 없나 봐요. 정시 퇴근한단 사람 본 적이 없어요. "
 
 분위기는 겉보기에는 언뜻 자연스러운 듯 보였지만 잘 살펴 보면 
 어딘가 어색한 데가 있었다. 
 그런 지극히 피상적인 대화로 일관된 저녁식사가 끝나고
 현우의 차에 탄 후부터, 왠지 모를 침묵이 흐르기 시작했다.
 
 " 지하철 역까지만 부탁할께요. "
 " 집까지 바래다 드리겠습니다. "
 " 아, 아니에요. "
 " 지난번… 크리스마스 때 한 말 때문에 그러시는 겁니까. "
 " …예? "
 " 그 이후 전화하기만 하면 일 있다는 말만 하고, 역시 절 계속 피하고 있는 
  것 같다고 느낍니다. 그렇게 귀찮습니까, 제가? "
 " …그런 건 아니에요. 다만…. "
 
 시연은 어떻게 말해야 할 지 몰라 입술을 깨물며 윈도우 한쪽 구석에만 
 시선을 두고 망설이고 있었다.
 현우도 앞만 본 채 차를 몰고 있었다. 
 그렇게 두사람이 말을 잃은 사이, 차는 그만 시연이 내려야 할 지하철 역을 
 지나쳐 버렸다.
 
 " 저… "
 " 어차피 같은 방향이니까요. "
 
 시연은 무작정 거부하는 것도 어색한 짓이다 싶어 
 이번엔 그냥 잠자코 고개만 끄덕였다. 
 문제는 매번 이런 패턴이 반복된다는 것이지만. 
 왠지 아슬아슬한 기분. 
 
 현우가 시연을 힐끗 보더니 다시 앞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렇게 아무런 대화도 없는 상태가 시연의 아파트 근처에 닿을 때까지 
 계속 이어졌다. 
 
 팽팽하게 잡아 당겨진 실이 금방이라도 끊어질 듯한, 그런 위기감이 
 그녀를 감싸고 있다. 
 누군가 말을 먼저 꺼낸다면 지금의 연약한 균형은 금새 깨어지고 말 것이다.
 
 " 오늘 고마웠습니다. "
 
 차가 아파트 앞에 멈췄고 시연이 문을 열고 내린 순간,
 
 " 저, 잠깐만요…! "
 
 현우가 따라 내렸고, 차 앞으로 뛰듯이 돌아 시연이 서 있는 자리로 걸어간 
 그는, 조금 놀라 굳어진 몸을 하고 있는 시연을 그대로 껴안았다.
 
 균형은… 순간 깨졌다. 
 그건 시연이 절대 바라지 않던 일이었다. 
 일어나선 안 될 일이었고 일어난다 하더라도 상대가 현우이길 
 바라지는 않았다.
 
 상대가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달콤해야 할 포옹이 
 오히려 거북하게 느껴져 호흡까지 곤란해져 왔다. 
 
 벗어나야 된다고 머리는 생각하는데… 
 갑작스런 사건에 몹시 당황한 것일까. 
 몸이 전혀 반응하지 않는다.
 
 자리에 선 채 완전히 돌부처처럼 굳어져 버린 시연에게 
 끌어 안은 자세 그대로 현우는 찬찬히 말했지만, 
 그 목소리가 미세하게 떨리고 있는 게 느껴진다.
 
 " 저 무척 후회했습니다, 그런 말 한 것 말입니다. 
  너무 일렀어, 거절당하더라도 좀 더 뒤에 했어야 했는데 하고요. "
 
 그 말을 듣자 겨우 경직되어 있던 몸이 풀리는 것 같았다.
 
 " 예, 너무 일렀어요. "
 
 차분한 음성으로 말하며 시연은 현우를 천천히 밀어냈다. 
 그녀의 동작은 남자의 무안함을 조금이라도 덜어주기 위한 배려가 
 담긴 것이다.
 
 " 죄송해요… 현우씨, 너무 좋은 분이라고 생각해요. 
  아마 다른 사람들이 알면 이렇게 말할 거예요. 
  저한텐 분에 넘치는 행운이라구요. 그렇지만 지금 전 여유가 없어요. 
  아주 다른 환경에서 살아온 현우씨와 저완 서로를 이해하기만도 
  오랜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해요. 제 말 뜻, 아시겠어요? "
 
 남자가 고개를 수그리며 이마를 짚었다. 
 긴장이 풀리자 방금 한 자신의 행동에 대해 겨우 인식한 듯 
 얼굴색이 변해 있다.
 
 " 미안…합니다. 왜 이런 행동을 한 건지 저도 모르겠군요. 
  생각으론 기다리자 기다리자 하면서도… 바보같은 짓을 했습니다. "
 " 아, 아니요…. "
 
 시연 쪽이 더 미안해서 어쩔 줄 몰랐다. 
 안절부절못하는 그녀의 마음을 읽었던지, 
 현우가 고개를 들어 어색하게 웃어 보인다. 
 당혹감이 가득 담긴 웃음이었다.
 
 " 시연씨를 곤란하게 했군요. 이만 가보겠습니다. "
 
 자기쪽이 더 미안하다고 말하고 싶은데 입에서 말이 나오지 않는다. 
 차가 출발하고 시야에서 벗어날 때까지 시연은 그저 멍하니 한자리에 
 못박힌 듯 서 있을 따름이다. 
 
 이 순간 할 수 있는 건 스스로를 반성하는 일 뿐.
 
 
 좋은 사람인 걸 알아.
 하지만 조금도 감정이 생기지 않는 걸.
 어쩌다 이렇게 된 거지?
 처음부터 이런 일을 만들지 않도록 했어야 했는데…
 항상 느슨하게 일을 처리해서 결국 다른 사람을 상처입히고 만다….
 
 정말이지… 바보구나, 난.
 
 
 시연은 감은 눈 사이 미간을 문질렀고 이어 한숨을 내쉬며 뒤로 돌아섰다. 
 눈을 뜨고 앞으로 한발짝 뗀 그녀는 갑자기 금방이라도 숨을 멈출 것처럼 
 놀라, 눈을 크게 뜬 채 걸음을 멈췄다.
 
 시야 저편에 낯익은 얼굴이 보였던 것이다.
 
 …굳은 자세 그대로 동하가 서 있었다.

 

두사람을 둘러싼 사각지대. 
 그 안을 채운 공기의 흐름이 일순, 정지했다.
 
 놀라 크게 뜨여진 시연의 눈. 
 일견 잔잔해 보이는 동하의 눈. 
 
 눈이 마주친 바로 그 순간, 
 가슴은 커다란 쇳덩이가 떨어진 것처럼 철렁 내려 앉았다.
 사이에 흐르는 침묵은 길고 길어서 시간이 흐르고 있는 지조차 의심스럽다.
 
 눈조차 깜박이지 않은 채 꼼짝않고 선 동하의 표정에선 별다른 변화를 
 읽을 수 없었지만 무겁디 무거운 뭔가가 두사람 사이를 가로막고 있어, 
 방금 있었던 일을 다 보았음을 시연도 이내 알아차렸다.
 
 새까만 겨울밤 하늘 아래 가로등 만이 희미한 빛을 뿜고 있는 시각. 
 저녁 9시. 
 
 허공에 붕 떠 있는 듯한 착각조차 느끼게 만들 만큼 
 오랫동안 정지해 있던 흐름을 다시금 움직이게 한 쪽은 동하였다. 
 자신을 보고 있는 여자의 시선에서 자신의 것을 거두고,
 천천히 몸을 움직여 한쪽으로 걸어간다. 
 
 정신을 차리자 동하의 손에 분리수거용 봉투가 들려 있는 것이 보였다. 
 쓰레기통과 분리수거용 박스들이 죽 늘어선, 아파트 앞 주차장 한 켠으로 
 걸어가고 있다.
 
 평소대로라면 동하는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을 시간. 
 그러나 구정 휴가라 오늘은 집에 일찍 들어왔다. 
 모처럼 일찍 들어온 날, 빈 집에 혼자 느긋하게 있다 생각난 참에 
 시연 대신 쓰레기를 버리러 나온 것이다.
 
 
 하지만 하필 이런 때에 나오다니… 정말이지…
 
 참으로 절묘한 타이밍이다. 
 아마 이 이상 절묘할 수는 없을 것이다.
 
 기가 막혔지만 그래, 그럴 수도 있다고 인정한다. 
 차에서 내렸던 남자, 전에도 본 적이 있는 그 남자에게선 엘리트 냄새가 
 났다. 똑똑하고 유능하고 좋은 학벌일 것이고 외모도 평균 이상이다.   
 여자들에게 은근히 인기있을 스타일이다. 
 17살이나 나이많은 아버지보다 나으면 나았지 못하다곤 절대 말 못한다. 
 
 하지만…
 
 
 - 솔직히 화가 난다. 저 여잘 볼 수가 없어.
 
 뭐야, 강동하. 
 그런 일에 신경쓰지 않기로 했잖아. 
 대체 뭐가 불만인 거지?
 다른 사람을 만난다는 건 새 '가족'의 행복이 될 수도 있잖아.
 
 - 하지만 싫은 건 싫은 거야.
 
 아버지를 잊으라고 말한 건 너였잖아.
 그래서 그녀는 네 말대로 실천하고 있는 걸 수도 있는데.
 그녀를 비난할 자격이 너에게 있다 생각해?
 그렇게 이중적인 인간이었어, 너?
 
 - 그게 아냐… 그게 아니고… 내가 이러는 건…
 
 
 " 동하…?! "
 
 답답하게만 느껴지는 공간 틈을 뚫고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와서 박힌다. 
 돌아 보고 싶진 않았지만 평정을 가장하며 애써 몸을 돌렸다.
 
 시연이 이쪽으로 걸어오는 게 보인다. 
 빠른 걸음으로 걸어온 여자가 3미터 정도의 간격을 남겨두고 멈췄다. 
 더 이상은 올 수 없는 모양이다.
 
 
 그렇게 어색하게 행동하면 곤란하다구…!
 왜 이렇게 가슴이 답답한 거지…?!
 이런 건 곤란해… 곤란해……
 
 
 " 화났지… 하고 싶은 말 있다면… 해도 좋아. "
 
 무슨 말이죠…? 묻고 싶었지만 대신 눈을 보았다. 
 
 시연에게는 이미 당황한 표정도 놀란 모습도 남아 있지 않았다. 
 지극히 평정을 유지한 자세로, 게다가 하나도 모르는 주제에 
 다 이해한다는 그런 표정을 짓고 있다. 
 
 이전의 동하였다면 그런 그녀를 비웃어 주었겠지만,
 지금은 그럴 여력도 남아 있지 않다. 
 그저 억지로 입을 열어 겨우겨우 한마디를 반문했을 따름.
 
 " 뭘요…? "
 
 여자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인다.
 
 " 쓰러졌던 후부터, 나한테 의식적으로 잘해주려고 하는 것 같아서… 
  꼭 그러지 않아도 돼. 마음에 안 드는 것이 있다면 전부 말해 줘. 
  오늘처럼 보고도 모른 척 하는 거… "
 " 정말…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요? "
 
 채 말이 끝나지도 않았을 때 의외의 반응이 나왔다. 
 시연은 흠칫 놀라 숙였던 고개를 들었고, 
 조금 떨어진 자리에 서 있는 소년을 응시했다. 
 
 그 단정한 얼굴에 기쁨이나 즐거움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묘한 미소가 
 퍼져가고 있는 것이 보인다.
 
 " …응. "
 
 그 대답은… 막고 있던 둑을 부수고 감정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자신의 마음은 이미 오래전부터 깨닫고 있었다… 
 애써 부정했을 뿐.
 
 남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러나 자신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은 정말이지 독하게 마음먹지 않고선 
 불가능한 일.
 
 …될대로 되라.
 
 
 - 툭.
 
 소년의 손에 들려 있던 봉지가 땅에 떨어지는, 약간 둔탁한 소리가 
 시연의 귀에 들어온다. 
 
 마치 꿈에서 듣는 것처럼 낮고… 그리고, 몽롱함과 당혹감을 수반한 소리. 
 
 동하가 걸어오고 있다.
 천천히 이쪽으로 걸어오는 걸 보며 한발짝도 움직일 수 없었다.
 
 왜 그 순간 상대를 올려다 본 걸까.
 
 긴장감을 살짝 드러낸 아주 조금 벌어진 입술.
 자신을 내려다 보느라 약간 내리깔은 긴 속눈썹.
 감정을 억누르지 못하는 내면을 알려주는 눈동자, 그 맑은 빛.
 확실한 자신을 지니고 있는 듯한 단정한 얼굴 윤곽과 넓은 어깨.
 
 인정할 수밖에 없는, 성인 남자의 모습이었다.
 
 마법에 걸린 것처럼 그렇게 시선을 떼지 못하고 
 바로 앞에 선 그를 올려다 보고 있는 자신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완전히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고 말았다.
 
 입술만 댄 키스였다.
 
 그것 뿐이었다.
 그 이상은 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걸로 충분했다.
 
 모든 마음의 평화는 순간 무너져 내렸다.
 있는 힘을 다해 쌓아 올린 모래성은 단 한번의 파도로 무너져 내렸다.
 
 존재하지 않는 듯 가볍디 가벼운 자신이, 사실은 
 땅 위에 발을 딛고 서 있는 한 생명체라는 사실을 
 겨우 인식하게 되었을 그 때는, 이미 안겨 있는 상황이었다. 
 
 언젠가부터 간혹 조금씩 느끼고 있던 젊은 향기가 풍긴다. 
 은은하지만 미약하지 않은 그 향기가 믿을 수 없을 정도로 가까이에 있다. 
 
 일정한… 아니, 조금 빠른 듯한 속도로 뛰고 있는 상대의 맥박. 
 진공의 세계 속에 상대의 향기와 맥박소리만이 존재감을 지닌 채,
 자신을 감싸고 있다.
 
 소년은 자신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엎지른 물, 후회하지 않겠다고 생각한다. 
 자신을 깨닫게 되자 외려 팔에 더 힘을 주게 될 뿐. 
 
 참을 수 없다는 것은 거짓말일 것이다. 
 아마 이 경우엔 더 이상 참지 않았다는 표현이 어울릴 것이다.
 
 팔 안에서 굳어 있는 몸을 가늘게 떠는 것이 전부인 상대의 머리로부터 
 달콤한 향기가 전해져 온다.
 
 스포이트로 종이 위에 떨어뜨린 동그랗고 투명한 물방울. 
 툭 건드리면 그대로 번져 버릴 것처럼 연약한 감정. 
 그 감정이 쌓이고 쌓여 어느 새 큼직한 빗방울을 형성해 버렸다.
 
 결국, 이렇게 되어 버렸다….
 
 아주 약한 빗줄기 하나가 두사람의 머리 위에 얹혔다. 
 
 벌써부터 날씨가 풀리기 시작한 것일까. 
 
 짧은 동안이었지만 왠지 길게 느껴진 시간의 터널을 지나,
 겨우 정신을 차리고 몸을 떼었을 때, 조금씩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있었다.
 
 하지만 두사람은 선뜻 움직이지 못했다. 
 
 한마디로 표현할 수 없는 감정을 얼굴에 담은 채,
 서로를 뚫어지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의 안에 흐르는 투명한 강
 흐름에 눈 돌리지 않고
 소리에 귀 맞추지 못했다…
 
 아니,
 
 눈감은 것도 나이고
 귀막은 것도 나…
 
 실은, 이미 인지했던 것일까…?
 
 
 " 시연아, 이시연! "
 
 정신차리고 보니 은영선배의 얼굴이 30cm 전방에 있다.
 
 " 아… 선배, 놀랐잖아요. "
 " 너, 원고 몇개 넘겼니? "
 " 두개… "
 " 스캔은. "
 " 다 받았어요. "
 
 은영선배가 풋- 하고 웃더니 시연의 귀에 꽂힌 이어폰을 잡아 빼서 
 자기 귀에 가져 갔다.
 
 " 뭐야, 너… 암것두 안 듣고 있으면서. "
 " 그냥 꽂고만 있었어요. "
 " 난 니가  음악에 취해서 속도가 느린가 했지. 
  야, 영애선배가 너 좀 긁으랜다, 이번 달, 니 걸 젤 많이 맡았는데 
  원고가 안 오니깐 미술작업을 할 수가 없다구. 
  슬라이든 젤 빨리 넘겨 놓구, 원고 속도가 왜 그래. 무슨 고민있니? "
 " …아뇨. "
 
 시연은 고개를 떨구며 피식 웃어 보였다. 
 
 
 편집실의 패쇄된 공간 안. 
 다른 기자들은 전부 바쁘게 손가락을 움직이고 있다. 
 간간이 조크도 섞어가며 여느 때와 별다를 게 없는 마감을 보내고 있다. 
 
 언뜻 시연도 그들 틈에 섞여 자연스럽게 대화하고 있는 듯 보이지만,
 그건 자신의 의지로 빚어낸 동작일 뿐.
 
 도무지 진전이 안 된다. 
 머리가 따라가 주질 않는다. 
 
 촬영이 여느 때보다 일찍 끝나서 마감도 빨리 끝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다른 사람들이 4~5개의 원고를 넘긴 지금, 시연은 겨우 2개를 마무리지은 
 참이다. 원고도 다른 사람들보다 빨리 쓰기 시작했는데 말이다. 
 지금 상태로 봐선 쫑순이가 될 가능성이 짙어 보인다. 
 
 미술부 선배가 눈치줄 만 하다. 
 슬라이드를 스캔받아 얹은 프린트를 보낸지 한참이고 한시라도 빨리 
 원고와 사진을 맞춰서 미술작업을 해야 하는데 가장 중요한 원고가 
 넘어 오질 않으니 답답도 하겠지.
 
 그런데 손가락이 움직이질 않는다. 
 글자들이 촘촘히 이어진 모니터 스크린 위로, 얼굴을 클로즈업한 정지화면이
 떠올랐다 사라지길 반복하며 시야를 가로막는다. 
 
 단지 착각이라는 걸 알면서도 순간, 
 숨이 콱 멈추는 듯한 기분이 드는 것은…
 
 " 자, 그럼 이거나 들어 봐. 지난번 일본 현지촬영가서 선물받은 CD야. "
 " 뭔데요? "
 " 나도 잘 모르는 가수야.  드림스 컴 트루(Dreams Come True)>라고 
  일본에선 '도리카무'라 부른다던데. 포토그래퍼 이지마씨가 
  자기가 젤 좋아하는 그룹이라고 하면서 줬어. 노래, 괜찮더라. 
  기분전환이 될 거야. "
 
 언제나 그렇듯 더 이상 묻지 않는 은영선배. 
 
 책상 서랍에서 꺼내준 CD를 받아 컴퓨터에 넣고 플레이 표시를 클릭했다. 
 이어폰을 다시 한번 고쳐 끼자…
 
 
 輕いHUG 短いKISS それだけで
 全身が心臟になったみたい
 
 가벼운 HUG 짧은 KISS 그것만으로
 전신이 심장이 된 것 같아
 
                                 Dreams Come True/ Romance
 
 
 전주에 이어 약간 허스키하고 낮으면서 파워가 넘치는 여자 가수의 음성이 
 귀로 파고 들었다. 
 시원한 음색이다. 
 자신의 답답한 감정과는 비교도 안될 만큼 시원한 음색. 
 쌀쌀한 겨울 속 위축되어 있는 현재의 자신과는 다르게 
 화려한 갈색으로 그을린 태양의 냄새가 난다. 
 
 그러나, 노래를 듣고 있는 시연은 여전히 높은 벽에 막혀 있었다. 
 빛이 들어오지 않는 어두운 음지 속에 웅크린 채, 숨어 있었다. 
 

기억을 지워 버렸으면 좋겠다. 
 그 순간의 일이 꿈이었으면 좋겠다. 
 이도저도 안된다면 차라리 나란 인간의 감정이 어떤 갑작스런 사건도 
 아무렇지 않게 넘길 수 있을 만큼 아주아주 무뎌져 버렸으면 좋겠다.
 
 동하의 얼굴. 
 그 날 그 순간 홀린 듯 올려다 봤던 그 얼굴과 실루엣이 
 눈 앞에 비칠 때마다 그 다음 벌어진 일이 살아나고 만다. 
 단지 기억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순간 맡았던 그의 체취, 
 들었던 그의 맥박소리, 느꼈던 감정까지 전부 한 세트로 딸려 나온다. 
 부정하고 부정해 보려 해도 그 날의 그 일은 현실이었다. 
 지우려 해도 불가능한 현실.
 
 난 어쩌면 좋을까.
 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어떤 얼굴로 그 애를 마주 봐야 하는 걸까.
 
 5일.
 꼭 5일이 지났다.
 납덩이처럼 무거운 5일이 지났다.
 
 아침에 일어나 보면 이미 집에 없고 마감기간 중 늦은 밤에 들어와 보면 
 또한 이미 방의 불을 꺼놓은 채 잠들어 있는 동하였다. 
 자고 있는 척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결국 그 일에 대해 아무 대화도 하지 못한 채 5일이 흘렀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웃어 넘기고 싶지만 상대가 자신을 의식하고 피하는 
 이상, 아무 의미가 없다며 넘어갈 문제는 아니다.
 
 분명히 그 날… 그 앤 내게 키스했다. 
 입만 댄 짧은 키스였다곤 하지만 엄연한 키스. 
 
 그건 뭘 의미하는 것일까. 
 호감? 충동? 아니면… 조롱?
 
 그 날… 그 앤 날 끌어 안았다.
 벗어 나려는 대사나 몸짓을 차마 할 수 없을 정도의 절실함이 느껴지는, 
 그런 동작으로… 날 안았다. 
 그건 또 뭘 의미하는 것일까.
 
 아니, 별 의미없는 그저 충동이었을지도 모른다. 
 그럴 것이다.
 그 애의 의미 따윈 나중 문제다. 
 정말 혼란스러운 것은 나 자신.
 
 가벼운 포옹,
 짧은 키스,
 그것만으로…
 
 느낀 감각은 우선 쇼크였고 다음은 두려움, 
 그리고 표현불가능할 정도의 이상한 형태의 기쁨. 
 
 그렇다, 여러가지의 감각이 어지럽게 뒤섞인 속,
 분명히 기억하는 한가지는 기쁨이었다. 
 하지만 짧은 기쁨, 그 야릇한 감각을 가졌다는 사실이 
 더 자신을 혼란하게 만든다…
 
 현우씨의 포옹은 거부할 수 있었던 그 날의 나였다. 
 기댈 무언가를 굳이 바라고 있던 건 절대 아니었다. 
 혼자가 낫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동하의 것은 거부하지 못했어. 
 거부할 수가 없었다. 
 아니, 거부하고 싶지 않았다.
 
 내면을 짓누른 자의식만 없었다면 아마 난, 
 더 오래 그 애에게 매달려 있었겠지. 
 사랑한 사람의 아들인 그 애에게 분명 난 매달려 있었다.
 
 …안기고 싶었어. 
 단지 충동만이 아닌, 힘들고 힘든 감정을 터뜨리고 싶었어.
 
 그 애라면 받아줄 거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끄집어 내는 걸 두려워했을 뿐… 
 아아… 난 그 애에게 끌리고 있었던 거야.
 
 그 순간, 알았다. 
 그래서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했고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더 이상 인정해서는 안된다.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감정을 숨긴 채 결국 본심과 다른 소리를 내뱉고 말았다.
 
 - 안돼…
 
 그 말을 듣고 내게서 몸을 뗀 그 앤, 긴 침묵 후--- 
 뒷모습을 내 눈 앞에 세운 채로 낮고 건조한 목소리를 냈다.
 
 죄송…하다고.
 
 그리곤 저편에 놓아 둔 비닐 봉지를 집어들고 
 천천히 쓰레기통으로 걸어갔지. 
 그 애의 어깨는 처져 있지도 않았고 자세는 더할 나위없이 반듯했다. 
 
 아주 단정한 동작으로 그걸 처리한 그 애와 난, 말없이… 
 마치 아무 일 없었다는 듯 집으로 들어갔고, 그 앤 '주무세요' 하고 
 짧은 대사를 뱉고 자기 방으로 들어가자마자 문을 잠궈 버렸다.
 
 그 후, 5일간… 얼굴을 마주 보고 말한 적이 없다.
 
 드러난 걸로 보면 그 애가 날 피한 거지만 만일 그렇지 않았다 해도 
 먼저 말을 걸 자신이 내게 있었던가. 
 그래, 사실 그 애가 없다는 걸 알 때마다 안도하는 나였다. 
 그 애가 피하지 않았다면 내가 먼저 피했을 지도 모른다.
 
 사실, 정말로 대화를 간절히 원했다면 불가능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일어나 말을 걸고 웃어 넘길 수 있을  정도로 자연스럽게 
 대화를 끌고 갈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지난번의 예기치 못한 사건을 없었던 일로 만들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난 그렇게 하지 못했다. 
 
 도망치지 말자고, 앞을 똑바로 응시해야 한다고 그렇게나 다짐했건만 
 또 다시 등을 돌리고 있다.
 
 『 안된다, 이대로는 안돼.
    그 애와 말을 해야 해.
    이번 일을 무(無)의 상태로 돌려 놓아야 한다.
    어떻게든 없었던 일로 덮어 두어야 해.
    그래, 그 애도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그런 행동을 하진 않았을 거야.
    같이 살자고 먼저 말한 쪽은 나다.
    그 애의 감정이 무엇이든 그 감정을 안겨준 것도 나.
    그렇다면 해결할 수 있는 사람은 결국 나 자신이다.
    그래, 이제부턴 피하지 않겠어.
    그 앤, 「내 남편의 아들」인 걸… 』
 
 
 머리가 핑핑 돌 정도로 생각한 결과물이라기엔 참으로 안이한 다짐.
 
 비겁했다. 
 참으로 비겁했다, 나는.
 
 마음 속으론 현실을 직시한다 하고 있을지라도,
 실은 그것도 또다른 도피인 것을 나 자신, 부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거짓이 섞인 눈으로 그를 보려 했던 것이다.
 
 나는 어느 샌가, 내 감정에 진흙을 바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동하는 내게 도피할 기회조차 주지 않았으니까.
 보란 듯, 등을 돌린 그였다.
 
 그날 밤… 동하는 돌아오지 않았다.

 

Yesterday - Yes a day                      어제 - 그래… 그 어느 날
 
 Like any day, alone again for every  여느 때처럼 다시 혼자서
 Day seemed the same sad way        언제나처럼 슬픈 매일을 보냈지
 He tried to say                                  그는 말하려 했어
 
 What did you do without me              나 없이 당신은 무엇을 했나요
 
 Why are you crying alone                왜 자신의 그림자를 밟은 채
 on your shadow                                혼자 울고 있습니까
 
 He said                                            그가 말했지
 I Know                                            『 알고 있어… 』
 
                                             제인 버킨/ Yesterday - Yes a day·2절 
 
 
 RS를 처음 봤을 때. 
 예고없이 입술을 갖다대면 그대로 손바닥이 날아올 것처럼 
 기가 센 10대 소녀를 연상했었다. 
 전부터 바이크에 관심이 있었지만 직접 만들어 보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 때가 처음이다.
 
 언제부터였을까. 
 사람에게 쏟을 애정을 버리고 대신 무생물에 집착하기 시작한 건. 
 내게 있어서 바이크는 애정을 쏟을 대상이자 무조건 나를 받아줄 상대였다. 
 일종의 연인을 추구하는 것과 같은 감정으로 RS를 갖고 싶었다.
 
 그래, 
 일견 말도 안되는 그 따위 생각이 오히려 현명한 것이었는지도 모른다.
 사람에게 뭔가를 기대해 봤자 남는 성과표는 겨우 흉터자국에 불과할 것을.
 
 
 잊고 있었어.
 
 어차피 상처입으리란 걸.
 응답받지 못하고 상처입으리란 걸.
 감정을 내보여 봤자 비웃음만 돌아오리란 걸.
 
 하긴… 미친 짓이었지.
 그 순간, 제어가 불가능한 건 아니었잖아.
 
 바보, 뭘 기대한 거야…?
 
 
 토요일. 
 밤의 거리.
 
 바이크 위의 동하는 그저 앞을 응시한 채 달리고 있었다.
 왠만하면 야밤 주행은 하지 않는 그였지만 오늘은 정말이지 
 달리고만 싶었다.
 
 처음부터 집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생각했던 건 아니다.
 그런 건 아니었는데… 
 어느 순간, 집으로부터 멀어지고 있는 바이크와 
 그 위에 몸을 얹은 자신을 발견하게 되어 버렸다.
 
 바람이 매섭게 몸을 공격해 온다. 
 머리까지 울리는 것 같다.
 
 갑자기 담배 생각이 간절해진 그 때, 마침 편의점이 눈에 들어 와 
 길 가장자리에 바이크를 세우고 캔커피를 사서 나왔다. 
 일단 뜨거운 커핏물을 뱃속에 흘려 보내자 체온이 좀 올라간 듯 
 훈훈한 기분이 들었다.
 
 편의점 밖에 덩그러니 세워진 파라솔 옆 흰 의자에 기대 앉은 동하는 
 담배연기를 최대한 깊숙이 빨아 들였다. 
 
 다섯개피째의 꽁초를 빈 캔 안에 집어 넣었을 때는, 웃기지도 않게 
 기분이 편안해져서 그냥 이대로 담배나 피우다 죽어 버릴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런 땐 철저하게 혼자인 게 낫다. 
 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유일한 친구나 선배라 생각하는 
 연석이나 준구형에게도 이런 기분은 차마 설명할 수 없다.
 
 하지만 혼자만의 공간을 즐길 수 있는 시간은 그다지 길지 못했다.
 
 " 흐압, 죽이잖아…? "
 " 이 근처에 이런 거 몰고 다니는 놈도 있었나. "
 " 시팔, 기분도 엿 같은데 그냥 콱 밟아주고 갈까. "
 
 녀석들은 전부 5명이었다.
 
 고교생 이상은 절대 돼 보이지 않는 덜 익은 외모에 
 한껏 폼을 잡는 것만 봐도, 그리 질 좋은 녀석들 같아 보이진 않는다. 
 어깨에 있는 대로 힘을 준 채 건들대며 서 있는 품이
 이미 한잔 걸쳤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었다. 
 
 그들은 여자를 훑어보는 듯한 야리꾸리한 눈동자를 RS에 박은 채 
 손을 대서 만져보는 중이었다.
 
 ' 여유를 안 주는 군…. '
 
 동하는 마지막 담배를 천천히 눌러 끈 다음,
 바이크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녀석들은 뒤편에 앉아 있던 동하의 존재를 미처 인식하지 못했던 듯한 
 표정으로, 고개를 들어 걸어 오는 소년을 쳐다 본다. 
 동하도 지나가는 사람을 보는 것 같은 자연스런 시선으로 
 5명을 조용히 훑었다. 
 
 그 중 한놈의 입에서 다음과 같은 대사가 나왔을 때는, 
 이쪽도 이미 상대의 정체를 알아차린 시점. 
 한때, 그다지 좋지 않은 기억을 함께 만든 인물이 담배연기를 뱉듯 
 훅, 하고 말을 뱉는다.
 
 " 하… 강동하 아냐? "
 
 다니는 학교에 교칙도 없는 지, 본인 딴엔 꽤나 신경써서 스타일링한 듯한 
 노랑머리가, 불빛 아래 드러난 동하의 얼굴을 보더니 약간은 떨떠름한, 
 그러면서도 속마음을 감추려는 듯한 꼬인 미소를 지었다.
 
 " 아는 새끼냐, 시욱아? "
 " 중학 동창. 어이, 아는 척 좀 해줘라. 섭하게시리. "
 
 느물느물한 표정으로 김시욱이 동하의 시야 앞으로 얼굴을 들이 밀었다. 
 동하도 도저히 작다곤 할 수 없는 키인데 - 최근 들어 2cm 정도 더 큰 것 
 같으니까 177cm 쯤 될까 - 이 자식은 고등학교 들어와서 키랑 덩치만 
 자랐는지 동하보다 눈높이가 꽤나 높다. 
 
 아, 여드름도 늘은 것 같군. 
 정성들여 탈색하고 염색한 노랑머리에 정말이지 안 어울리는 
 얼룩덜룩한 느낌의 검은 피부. 
 얼굴 뿐만 아니라 목까지 보기 거북한 붉은 것이 온통 뒤덮고 있는 
 우락부락한 인상이다.
 
 " …오래간만이다. "
 
 동하도 결코 호감에서 나오지 않는 게 빤히 들어오는 미소를 떠올렸다.
 그렇다고 하여 특별한 악감정은 가지고 있지 않다. 
 
 중학 때의 일은 그 때로서 끝난 거니까. 
 중학 때 녀석이랑 피터지게 싸운 기억은 어디까지나 과거일 뿐이다.
 
 녀석이 지극히 고전적인 수법인 도라이버까지 갖고 다니며 얌전한 아이들 
 목젖을 위협해 삥 뜯어내는 걸로 이 근방에서 꽤 알려져 있는 것 따위, 
 지금의 나에겐 관계없는 일이다. 
 
 하지만 녀석 쪽은, 그렇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 이거 니가 키우는 거냐? …이야, 중학시절의 정도 있겠고… 
  우리 좀 빌려주지? 곱게 쓰고 돌려 줄게. "
 
 고막에 상당한 부담을 주는 쇳소리다. 
 변성기 때 목 좀 잘 굴릴 것이지.
 
 " 하는 거 봐서. 바쁘니 이만 가 보마. "
 
 녀석들을 제치고 바이크 쪽으로 가려 한 순간, 
 김시욱이 돌덩이처럼 생긴 면상을 앞에 세워 가로막았다. 
 다른 놈들도 띠껍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면서 빙 동하를 둘러싼다.
 
 " 아, 새끼. 토끼 좆같이 성질 급한 건 여전하네. 쭈글거리지 말고 힘 빼. 
  중학 동기로서 애정을 표시해 줘야 쓰것냐? "
 
 아아… 기분 더럽게 만드는 군.
 
 동하는 한쪽 입끝을 들어 올리면서 눈을 내리 깔았다.
 
 그 다음 순간이었다.
 동하의 주먹이 앞에 서 있던 시욱의 명치에 정확히 명중한 것은. 
 
 너무나 불의의 일격인데다 주먹에 실린 힘이 꽤나 강해서, 맷집 그 자체로 
 보이는 시욱도 배를 움켜쥔 채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다른 놈들도 이런… 하며 멍하게 서 있는 사이, 
 소년은 빠르게 몸을 움직였다.
 
 " 이… 쓰벌……! "
 
 시욱이 간신히 몸을 고쳐 잡고 앞을 노려 보았을 때, 
 이미 바이크는 시동소리를 내며 출발한 뒤였다. 
 
 괜히 화로 안을 쿡쿡 쑤시다가 불똥을 맞은 시욱은 쪽팔림을 지우려는 듯, 
 뒤늦게 깨진 소리를 질러댔다.
 
 " 뒤질려고 환장했냐?! 이 씹쌔끼가…!!! "
 
 뒤에서 쏟아지는, 한바가지의 욕지꺼리는 꽤나 요란스러웠다. 
 그 소리들을 흘려 들으면서 동하는 속력을 높였다. 
 
 헬멧을 쓰지 않아 바람에 눈이 꽤나 시렸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은 대신 
 터져나온 것은 웃음이었다. 
 뭐가 그리 우스운지 그는 킬킬대며 웃기 시작했다.
 
 " 크그그극…. "
 
 자신이 듣기에도 이상하리 만큼 웃음은 계속해서 터져 나왔고 
 귓전을 마구 때린 바람 소리와 경쟁이라도 하듯 
 소년은 더욱 더 큰 소리로 웃어 젖혔다.
 
 스스로를 비웃기라도 하듯,
 한참동안 뱃속에서부터 끌어낸 웃음을 토하고 난 후,
 아랫입술을 깨물고 무거운 침묵 속에 잠겨버린 동하는
 차가 거의 없는 밤거리를 홀린 듯한 감각 속에 질주해 갔다. 
 
 자신도 바이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그저 되는 대로 몸을 맡기고 있을 따름이다.
 
 머릿 속에 떠오른, 단 한가지 생각.
 
 ' 그래, 도망쳐 버려… 도망쳐 버리라구…! '

 

 

종이 딸랑 하고 울리는 소리가 났다. 
 또 손님이 들어온 모양이다.
 
 ' 제길, 내가 오니까 왜 이리 손님이 많아진 거야? '
 
 그런 연석의 마음을 읽기라도 하듯 커피 메이커를 들여다보고 서 있던 
 영란누나가 한마디 가볍게 던진다.
 
 " 연석이 계속 여기서 일함 안되니? 너 사람 모으는 재주 있지, 그지? 
  동하가 있을 때보다 손님이 배는 많아진 것 같다, 얘. "
 " 우연의 일치에요, 누나. 넘겨짚지 마세요. "
 
 아무리 일요일이라곤 해도 오늘따라 손님, 
 특히 평소엔 그리 많지 않던 술손님이 유별나게 많아 
 카페 안 분위기는 빈말로도 조용하다곤 할 수 없었다.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정신이 산란해질 분위기 속, 
 게다가 밀린 주문과 설거지에 치인 연석은 반쯤 맛이 가 있는 상황. 
 
 그런 중, 얼굴을 들어 방금 들어온 손님들 쪽을 힐끗 살핀 그는 또야… 
 생각하며 고개를 가볍게 젓고 난 후, 다 씻은 컵을 개수대에 올려 놓고 
 주문을 받으러 갔다.
 
 " 오랜만이다. "
 
 코트를 벗고 있던 두 소녀는 연석의 인사에 고개를 들더니 
 반가워 죽겠단 표정을 짓는다. 
 빨간 코트를 옆에 말아둔 채, 털썩 앉으면서 마리가 픽 웃었다.
 
 " 뭐야, 연석이 아냐. 또 임시투입된 거니?
  특별한 날도 아닌, 이런 보통 일요일에? 발렌타인 데인 내일이잖아. "
 " 동하는 어디 있어? "
 
 똑같이 반가운 표정을 지어 보이긴 했지만 연석에게 계속해서 말을 거는 
 마리완 달리 여전히 미은은 들어오자마자 동하부터 찾는다.
 
 ' …지극정성이군. '
 
 미은이 동하에게 호감을 갖고 있다는 건,
 제3자인 연석조차도 알만한 사실이다. 
 
 저렇게 아닌 척, 티를 다 내고 다니는데 모르기가 더 힘들지.
 동하 녀석, 정말 눈치채지 못한 걸까?
 
 " 동하, 오늘 없어. "
 " 어머, 왜? "
 " 모르겠어, 그냥 전화로 오늘 대신 일해 달라고만 하던데. "
 " 어디 아프대? "
 
 걱정스런 표정으로 미은이 눈썹을 살짝 찌푸렸다. 
 아무렇지 않게 묻는 한마디에 숨겨진 감정은, 괜스레 더플코트의 단추를 
 만지작거리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을 봐도 짐작이 간다. 
 생김을 봐선 주저함 없이 상대에게 접근할 것 같은데,
 은근히 소극적인 성격의 소유자였다.
 
 " 글쎄… 목소리 봐선 그런 것 같진 않던데. "
 " 핸드폰도 꺼놨더라. "
 " 어디 가볼 데가 있는 것 같더라구. 근데, 뭐 시킬래? 좀 있다 올까? "
 
 그대로 서 있으면 별별 질문이 다 쏟아질 것 같아서 일단 끊었다.
 
 " 아니, 버드 아이스 둘. 그리고 물 좀 갖다 줘. "
 " 뭐야, 술 시키는 건 첨 보는데? "
 " 후후… 연석이 니가 몰라서 그렇지, 미은이 얘가 얼마나 잘하는데. 
  아마 너랑 내기해도 지진 않을 걸? "
 " 하… 그래? 근데 겨우 맥주 갖고 되겠어? "
 " 빨리 갖고나 오셔. "
 
 오늘 술이 당기는 날이야, 뭐야. 
 뭐… 아무래도 좋지만 말이다. 
 
 귀찮게 뭔가를 만들지 않아도 된단 생각에 일단 마음이 편해졌다. 
 미은이 이쪽 편의를 봐주느라 그런 건 결코 아니란 사실을 알면서도 
 감사의 기분이 들 정도.
 
 분무기를 들고 냅킨에 물을 뿜은 다음, 병뚜껑 위에 덮고 있는데 
 전화가 울렸다. 준구형은 잠시 자리를 비운 참이고 영란누나는 
 방금 손님이 일어선 테이블을 치우느라 바삐 손을 움직이고 있다. 
 전화기에 가장 가깝게 서 있던 연석은 일을 하다 말고 몸을 뻗어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 예,  로그인>입니다. "
 [ 저… 이시연이라 하는데요, ]
 " 아, 안녕하세요? 저, 연석이에요. "
 
 전화 저편의 여자는 잠깐 멈칫하는 기색이다.
 
 [ 아… 동하, 거기 있어요? ]
 " 아뇨. "
 
 의아한 생각에 짧게 대답했다가 저쪽의 당황을 눈치채고 길게 덧붙였다.
 
 " 동하, 아무 말씀 안 드렸어요? 
  어제 전화 와서 저한테 카페 일을 부탁한다고 했었는데요. "
 [ 다른 말은 없었어요? ]
 " 예. 시간이 없다고 해서 알았다고만 하고 바로 끊었죠. 
  전 동하가 부산이라도 내려갔나 했는데, 아니에요? 
  무슨 일 있는 건가요? "
 [ 준구씨는 아무 말 안하던가요? ]
 " 저한테 오히려 물어 보던데… 무슨 일 있냐구요. 진짜 무슨 일 있어요? "
 [ 아… 됐어, 별일 아니에요. ]
 
 상대의 말과는 달리 심각한 분위기를 흘리면서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 놓은 채 가만히 선 연석은 뭔가가 있단 사실을 인식하곤
 얼굴을 찌푸렸다.
 
 ' 뭐야… 이 자식, 또 무슨 일을 저지른 거야…?! '

 

 

동하가 집에 들어오지 않고 있었다.
 
 다 큰 남자앤데 그럴 수도 있지… 하고 넘겨 버리기엔 
 상황이 너무 안 좋았다. 
 
 들어오지 않은 그날 밤.
 놀라 핸드폰으로 전화를 수십번 걸어 보았지만 계속 꺼놓은 상태. 
 
 때마침 막바지 마감 중이라 회사를 나올 수도 없는 상황이어서 
 다음날 저녁, 동하가 일하는 카페로 전화해 보았다. 
 하지만--- 혹시 준구형 아파트에 가 있는 게 아닌가 하던 짐작도 빗나간 
 것임을 연석과의 통화로 알게 된 지금, 거의 절망적인 기분이다. 
 
 집이건 핸드폰이건 전화를 절대 받지 않는 것으로 보아,
 토요일 밤에 이어 어제인 일요일 밤에도 집에 들어오지 않은 것 같다. 
 이제까진 주말이라 괜찮았다 쳐도, 
 월요일이 된 오늘은 학교도 가야 할 텐데 말이다.
 
 인정이라기보단 지금에서야 겨우, 실감하고 있는 중이다.
 
 겨울이라 더디 찾아온 아침 햇살이 편집부 창문을 덮은 블라인드를 통해 
 새어 들어왔다. 
 그 햇살의 움직임을 컴퓨터 너머로 느끼면서 시연은 옆의 사람은 
 들을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참고 있던 만큼이나 무겁게 숨을 내쉬었다.
 
 체력을 소모할 대로 소모한 탓에 무거운 동작들이 그래도 이어지고 있다. 
 전화를 걸다 마지막 마감 대지를 챙기다가 하며 밤을 샌 시연은 
 완전히 지친 상태. 
 마감 막바지엔 그러지 않아도 육체적으로 지치게 마련인데 
 고민거리가 마음을 억누르고 있으니 완전히 고갈된 듯 하다.
 
 ' 어딜 간 걸까. 혼자서 갈 만한 곳, 어디에도 없을 텐데. 부산? 
  아냐, 그건 아닐 거야. 그렇다면 고모님이 전화를 주셨을 거야. 
  아무리 생각해 봐도 모르겠어…. '
 
 오자나 탈자가 있는가, 사진이나 일러스트는 제자리에 붙어 있는가 
 꼼꼼히 점검해야 하는 마지막 작업은 가득 찬 잡념 때문에 제대로 
 진척되지 않았다. 
 
 완성된 마지막 대지를 미술부 영애선배와 함께 체크하고 나니,
 벌써 아침 7시 30분.
 
 " 시연이 끝냈니? "
 " 예. 프린트 보세요. "
 
 한차장이 죽 훑어 보더니 고개를 끄덕인다.
 
 " 다 고쳤구나. 된 것 같은데? 이국장님 보시겠어요? "
 " 어디. 음… 됐다. 넘겨 버리자. 시연이, 원고 속도 좀 분발해야겠더라. 
  아무튼 수고했다, 가 보렴. "
 
 대지를 인쇄한 프린트에 완성되었다는 표시인 사인을 하면서 
 이국장이 따끔하게 한마디 한다. 
 
 시연 자신이 생각해도 이번 마감은 도대체 어떻게 끝냈는지 
 모를 정도로 정신없이 지나갔다.
 
 지친 몸에 그저 겉옷을 걸치고 가방을 집어 들었다.
 
 " 저, 가볼게요. 수고들 하세요. "
 " 수고했어, 시연아. "
 " 에구, 부럽다…. "
 " 가세요, 선배. "
 
 이번 달 교정조로 남아 있는 수정선배와 막내 난희, 그리고 
 미술부 사람들에게 인사하고 시연은 힘이 풀린 걸음으로 엘리베이터를 탔다. 
 건물 밖으로 나와 택시를 잡아 타고 집에 도착했을 때는 
 8시가 꽤 많이 넘어 있었다. 혹시 하는 마음에 살펴 보았지만,
 주차장 한켠에 세워져 있어야 할 동하의 바이크는 여전히 없다.
 
 역시 들어오지 않은 건가.
 
 시연은 힘없이 눈 언저리를 문지르면서 열쇠로 문을 따고 집에 들어갔다.
 현재 자신의 마음을 비추고 있는 것처럼 썰렁한 집안.
 들어가자마자 가장 먼저 동하의 방을 열어 보았다.
 
 역시 깨끗하다. 
 사흘 전의 모습, 하나도 변하지 않은 그대로다.
 
 
 대체 어디 있는 걸까.
 겨우 가족이 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안되는 건가.
 결국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받을 수 밖에 없는 걸까.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 입고 난 후, 
 다시 동하의 방으로 들어간 시연은 며칠간 전혀 잔 흔적이 없는 침대 위에 
 올라가 딱딱한 벽에 등을 대고 앉았다. 
 방안을 멍하니 둘러 보던 그녀의 눈이 문득,
 책상 옆에 길게 자리잡은 책장에 멎는다.
 
 책장에 가득 꽂힌 이런저런 책들. 참고서와 문제집… 
 소설책과 교양서적… 잡지… 그리고… 노트들이 꽂혀 있다. 
 그닥 생각이나 기대가 담기지 않은 동작으로 침대에서 내려선 그녀가 
 책장 앞으로 가 꽂혀 있는 책들을 손가락으로 훑어본 그 때, 
 크기가 다른 여러 책들 위에 길게 8절지 크기의 스케치북이 얹혀 있는 것이 
 바로 눈에 띄어 무심코 꺼내 펼쳤다.
 
 「 성호형의 바이크 HONDA CBR 400RR 」
 
 첫 페이지에는 연필로 세세하게 음영을 넣은 오토바이 데생이 
 그려져 있었다. 
 꽤나 섬세한 터치의 그림.
 
 ' 이런 것도 그리는구나…. '
 
 의자에 앉아 페이지를 넘겼다. 
 또 다른 오토바이의 그림이 이어진다.
 
 「 모터쇼에 갔다 온 기념. BMW K1200RS 」
 「 KAWASAKI 닌자 ZX-7R. 그런데 난 연두색은 싫어한다. 」
 
 구석에 작은 글씨로 간단한 코멘트까지 써 놓았다.
 오토바이만 그린 것은 아니다. 차를 그린 그림도 간간이 눈에 띄었다.
 
 「 FERRARI 360 modena. 곡선이 많아 그리는 게 즐겁다. 」
 「 MITSUBISHI 이클립스. 
    일본 차들은 모터 사이클처럼 맘에 들진 않는다. 」
 
 하지만 역시 주된 소재는 오토바이. 
 여러 각도에서 그린 그림들은 데생도 있고 크로키도 있다. 
 어느 쪽이나 상당한 솜씨. 
 
 지난번에 들려준 말이 떠올랐다.
 
 - 이담에 제 손으로 만들고 싶어요.  …자동차랑 오토바이. 
  원랜 디자인을 하고 싶었지만… 미대에 가긴 좀 그렇고, 
  일단 공대에 진학해 이것저것 배운 다음에도 늦지 않을 것 같아서요. 
  그러다 그냥 전공대로 나갈 수도 있고…. "
 
 이런저런 이야길 나눈 그 때는 가족처럼 가까워졌다고 생각했는데….
 
 「 Harley-Davidson 883 스포스터. 역시 근사하다. 」
 「 YAMAHA YZF-R1. 새로 장만했다면서 진성형이 얼마나 자랑하던지…. 」
 「 Aprilia RS-125. 머지 않아 내 것이 된다. 얏호! 」
 
 이 부분에서 웃고 만 시연은, 그러나 지금 현재 상황으로 생각이 돌아가자 
 그만, 다시 침울해져 버렸고 잠자코 또 한장을 넘겼다.
 
 ' 이건…? '
 
 역시 데생인 그림의 소재는 차도 오토바이도 아니었다. 
 그것은 아주 섬세하게 잘 그린 사람의 얼굴. 
 
 시연은 그림 속의 인물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동하가 찢어 버린 사진. 
 그 사진 위에서 환하게 웃고 있었던 30대 여자, 
 바로 동하의 엄마를 그린 그림을 시연은 보고 있었다.
 
 책상 위에 팔꿈치를 댄 손으로 이마를 짚었다. 
 숨막힐 듯 가슴이 답답해져 온다.
 
 - 잊을려구요. 얼굴도 기억도 다 없애버리려구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정말은 엄마가 그리웠던 거구나.
 정말은 없애고 싶지 않았던 거였어….
 
 감정이 반영되어 종이를 넘기는 손이 경직된 것 같았다. 
 그리고, 그림이 그려져 있는 마지막 페이지인 그 다음 장을 보았을 땐… 
 시선까지 경직되어 버렸다.
 
 종이 위에 그려진 것은 역시 오토바이가 아닌 사람이었지만, 
 이번에는 앞장에 있던 인물인 동하의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이었다. 
 하지만, 역시 여자의 그림….
 
 정면에서 아주 약간 오른쪽으로 각도를 튼 지점에서 잡은, 
 여자의 얼굴 데생.
 그림 속 사람은 고개를 숙여 눈을 살짝 아래로 깐 채 조용히 미소짓고 있다.
 
 긴 속눈썹. 
 가볍게 뒤로 묶은 머리. 
 그 밑으로 드러난 가는 목덜미. 
 상냥한 표정이지만 어딘가 중요한 부분을 상실한 것처럼 아파 보이는….
 
 시연은 순간 비틀거렸다. 
 머리를 뭔가에 세게 얻어맞은 것 같은 그런 감각.
 
 낯익은 듯 낯설은 모습… 
 자신이 2차원 위에 그려져 있었다.
 
 거울이나 사진이 아닌 다른 매개체로 자신을 보기는 처음이다. 
 그것은 앞페이지의 그림보다 더 잘된 것이라 누가 봐도 바로 알아차릴 만한 
 솜씨… 부정할래야 할 수가 없을 만큼 실물의 자신과 비슷했다. 
 아니… 거울에 비친 것보다 더 실물다운 느낌을 지니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파… 아파….
 어째서 넌, 내가 내 자신을 주체할 수 없게끔 만드는 거니.
 
 어째서 이렇게 된 거지? 
 어째서, 우리… 이렇게 된 걸까.
 너무 갑작스러워 균형을 잡을 수가 없어….
 
 내가 네게 해줄 수 있는 건 정말 없는 거니?
 그래, 이젠 거부당해도 할 수 없겠지….
 필요없다고 말해도 좋아, 가버려도 좋으니깐…
 눈을 볼 수 있는 위치로 돌아와 대답해 줘…
 
 제발…….
 
 
 툭… 소리를 내며 스케치북이 바닥에 떨어졌다.
 그대로 책상 위에 엎드린 시연의 눈에서 눈물이 나오려 한 그 순간, 
 갑작스레 뇌리를 스쳐 지나간 생각에,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아주 강한 직감이었다.
 …확실했다. 
 왜 진작 깨닫지 못했는지 알 수 없을 정도.
 
 벌떡 몸을 일으켰다.
 
 ' 아아… 그래… 분명해…! '

 

 

그럴 줄 알았다.
 
 그럴 줄 알았지만… 
 막상 곤색 반코트에 싸인 등이 눈에 들어온 순간에는 힘이 풀려 버렸다. 
 전신의 기운이 모두 빠져나간 듯 서 있는 것이 고작.
 
 부를 수가 없다. 
 이름을 불러 이쪽의 존재를 알릴 수가 없다.
 돌아봐 달라고… 그렇게 소리내어 말할 수가 없다.
 
 동하의 아버지를 뿌렸던 그 강을 앞에 세운 채 시연은 그저 서 있을 뿐.
 지난번에 왔을 때와 달리 강에는 시선도 가지 않는다. 
 
 강과 시연 사이에 있는 약한 존재가 그녀의 마음을 뿌리채 뒤흔들어 버렸다. 
 시연의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마 자신의 세계에 깊이 빠져 있는 때문일까. 
 
 바이크가 빛을 반사하며 길 한켠에 세워져 있었다. 
 뒷모습을 보인 채 미동도 없이 앉아 있는 소년 앞으로 
 강이 가로선을 그리며 이어져 있다. 
 
 그 풍경은 마치 원래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지극히 자연스러워 보이는 동시에 숨막힐 정도로 가슴 저미게 만들어… 
 강가에 앉아 있는 동하의 뒷모습을 그저 시연은 보고 있을 따름이다.
 
 춥지 않은 걸까. 
 감각이란 걸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그렇게 앉아 있다.
 그 뒷모습은 주위에 서 있는 헐벗은 나무들보다 더 여리다.
 
 영원히 움직이지 않을 듯 앉아 있는 소년의 눈은 
 초점을 잃은 채 강물에 고정돼 있다. 
 그런 소년의 속에 끊임없이 흘러가던 의식이 잠깐 정지한 그 때….
 
 ……?
 
 동하는 앉아 있는 상태에서 천천히 몸을 돌려 시선을 뒤로 보냈다.
 
 그녀가 여기 서 있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그런데… 소년은 놀라지 않았다. 
 
 실은 지쳐서, 놀랄 기운조차 없다. 
 약한 바람에도 바로 흔들릴 것처럼 힘이 빠진 상태. 
 
 그다지 강하지 않은 바람이 이마에 살짝 흘러내린 소년의 앞머리와 
 여자의 긴 생머리를 자신의 흐름으로 가져 간다. 
 
 태양이 선명한 빛을 보내와, 시연의 눈은 소년의 얼굴 위에 
 아직까지 남아 있는 눈물자국을 발견할 수 있었다. 
 아니, 지금은 새로운 것이 남아 있던 자국을 지워내며 아래로 내려가는 중. 
 
 미미한 변화로, 그것도 아주 드물게 밖에 감정을 표시하지 않던 
 그 단정한 얼굴에, 내면의 고통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그런 흔적이
 생겨나고 있어, 그것은 어떤 말보다 적극적인 행동보다 
 더 빠르고 더 아프게 중심부를 찔러 온다. 
 
 그러나, 정작 동하는 자신의 눈물을 인식조차 못하는 듯, 
 시선을 힘없이 올려 상대에게 고정시켰다.
 
 " 왜 왔어요…. "
 
 내버려 두면 될 것을… 어째서요….
 
 눈물과 함께 동하의 연약한 고동소리가 그대로 전해져 왔다.
 몸을 붙이고 있는 것도 아닌데… 그대로… 그대로… 전해져 와서… 
 붙들고 있던 모든 상념을 지워 버렸다.
 
 " 전하러… 왔어. "
 
 그 말은 너무도 편안하게 입에서 새어 나왔다.
 
 다른 모든 감정이나 자신을 여지껏 괴롭혀 오던 생각들이 전부 사라져 버린 
 듯 싶을 정도로 그렇게 편안한 기분이다….
 
 동하는 눈도 깜짝하지 않은 채, 서 있는 시연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 눈이 '무엇을요…?' 하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시연은 소리를 내어 대답하지 않았다.
 걸음을 옮겨 상대의 앞으로 갔고 천천히 무릎을 꺾어 앞으로 몸을 숙였다.
 아직도 눈물이 마르지 않은 소년의 뺨에 입술을 가볍게 댔다.
 
 그리고… 소년을 끌어 안았다.
 그리고… 어깨에 머리를 묻었다.
 그리고… 그 때서야 말할 수 있었다.
 
 " 사랑해…. "
 
 그 소리는 속삭이듯 낮았지만, 안겨 있는 상태인 동하의 몸은 
 바로 반응했다.
 
 " 사랑해…. "
 
 확인하듯 두번째 대사가 이어진 것과 
 동하가 몸을 일으켜 시연을 꽉 끌어안은 것은 거의 동시였다. 
 자신에게 몸을 붙인 시연을 동하는 힘을 다해 끌어 안았다.
 
 망설임도, 두려움도 그 순간엔 없었다.
 상대만이 보일 뿐. 
 거짓이 섞이지 않은 진심만이 있을 뿐.
 
 몸을 살짝 뗀 두사람은 가깝게 이어진 그대로, 서로의 눈을 들여다 보았다.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입술이 닿았다.
 
 …눈을 감는다. 
 떼지 않은 그대로 서로의 입술이 열린다.
 
 입술을 연다는 것은 서로를 연다는 것을 뜻한다. 
 적어도… 두사람에게는 그랬다.
 
 부드럽게… 부드럽게… 서로가 얽히기 시작했다.
 달콤한 무언가가 자신을 이끌어 늪으로 안내한다.
 늪의 감각은 따뜻해서… 따뜻해서… 따뜻해서… 
 영원토록 잠겨 있고 싶을 정도로 행복해서… 
 저도 모르게 상대를 더 힘을 주어 끌어안게 만든다.
 
 잔잔하디 잔잔한 강의 흐름.
 강과 비슷한 느낌의 푸른 하늘과 그 하늘로부터 쏟아지는 나른한 2월의 빛.
 나름대로의 생명력을 감추고 있을, 앙상한 나무와 시들은 풀잎… 마른 흙. 
 그리고…그 흙 위에 무릎을 댄 채 겹쳐진 그림자.
 
 그렇게… 문은 열렸다.
 
 두사람의 마음은… 그렇게 이어졌다….

 

용기를 가지고 고백할 수 있는 날.
용기를 가지고 대답할 수 있는 날. 
 
CLAMP/ 내가 사랑하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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