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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애(禁止愛) (4)

오늘의 쉼터 2014. 9. 25. 16:39

금지애(禁止愛) (4) 

 

   
  
 
아버지는 말했었다.
 
 - 힘들게 살아온 사람이다. 
  이제 너도 이런 말, 할 수 있을 만큼 자랐다고 생각하니까--- 
  뭐랄까, 지켜주고 싶고… 그리고, 나 자신도 위로받고 싶다. 
  너도 언젠가 그런 사람이 생기리라 생각한다. 
  아버질 이해해 주었으면 해-----
 
 고아--- 라고 했다.
 
 '고아'란 단어는 어딘가 황량하고 지쳐 있는 어감이 연상되어, 
 나는 선입관 속에 어떤 스테레오 타입을 상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눈 앞에 선 그녀는, 예상을 완전히 부수고, 남이 다 가진 걸 가지지 
 못한 채 자라온 환경에 원망이나 아쉬움 같은 것은 하나도 비치지 않는 듯한
 맑은 눈으로 나를 보았다.
 
 - 동하라고 했지? 잘 부탁해.
 
 그리고 환하게 웃었다. 
 
 어디까지나 투명한 미소. 
 그 미소를 본 그 순간부터 빌어먹을 반감이 생겨 났는지도 모른다. 
 
 그래, 틀림없다.
 
 어느 쪽이든… 두글자로 간단하게 요약할 수 있는 감정이다.
 
 『 질. 투.  』또는 『 동. 경. 』.
 
 왜 이제껏 해답을 찾지 못한 것일까. 
 
 아니… 알면서도 거부한 거다.
 더 나은 환경에 있으면서, 그처럼 웃을 수 없다는 사실이 분했던 거다.
 
 줄곧 막을 쳤던 이유는 상처입기 싫어서라기보다 
 자신의 상처자국을 들키는 게 두려워서였다. 
 심한 상처도 아니었는데 계속 들여다 보며 다시 벌려 놓는 자신의 연약함이 
 지긋지긋해서였다. 
 
 ' ---비겁해. '
 
 그리고, 무지했다. 
 상대에게 상처를 준다고 그 사람이 자신과 같은 레벨로 추락하는 것도 
 아니고, 자신의 추함을 감출 수 있는 것도 아닌 것을.
 
 겨우… 알았다.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약함도… 상처도… 그리고 감정도…
 
 '진짜' 어른의 방식으로. 
 
 
 진연석(陳連碩·Jin Yun Suk)
 
 동하의 제일 친한 친구로 반장이다. 
 동하와 같은 중학교를 나왔지만 같은 반이 되고 친해진 것은 
 고교에 들어와서부터. 
 
 한마디로 괜찮은 녀석. 
 기본적으로 여러 사람들과 어울릴 줄 아는데다가 
 배려심도 있고, 세상 살기 아주 수월한 성격이라 할 수 있다. 
 
 물론, 노력에 의해 얻어진 결실이겠지만.
 
 ● DATA ●
 
 나이(Age) : 17(고1)
 생일(Birthday): 4.18·양자리(Aries)
 혈액형(Blood Type) : O형
 키(Height) : 177.5cm(최근에 별생각없이 잰 것)
 몸무게(Weight) : 64kg
 
 
 

 
 
 
 겨우… 알았다.
 
 똑바로 응시하지 않으면 성장할 수 없다는 것을.
 약함도… 상처도… 그리고 감정도…
 
 '진짜' 어른의 방식으로. 
 
  
 
 다음날 아침.
 
 시연이 눈을 떴을 때는 겨울인데도 이미 환하게 밝아 있었다.
 꿈을 꾼 것 같기는 한데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푹 잠을 자고 난 뒤라, 
 어제 일이 믿어지지 않을 만큼 몸이 개운했다.
 
 ' 어제 일… '
 
 생각이 미치자, 자신을 제외한 다른 사람이 오래간만에 집안에 머물고 
 있단 사실까지 더불어 깨닫게 되어, 시연은 이불을 젖히고 몸을 일으킨 
 자세에서 자신도 모르는 사이, 아랫입술을 가볍게 물고 있었다.
 
 ' 별로… 어색할 것도 아닌데… 어쩌면 당연할 일인데…. '
 
 그렇게 자신에게 반복해서 말하면서 그녀는 일단 방에 붙어 있는 욕실에 
 들어가 물을 틀었다. 
 평소보다 조금 더 물을 뜨겁게 해서 몸을 적시고 있자니 그를 보내고 
 처음 일어설 것을 결심한, 그 비오는 날의 독백이 되살아 난다.
 
 
 그래… 
 이것이 내가 서 있는 자리, 현실인 거야.
 외면해도 소용없다는 거… 알고 있어. 
 …사실은, 외면하고 싶지 않아.
 굳이 봐달라고 하는 게 아니고, 해야만 하고 또 하고 싶으니까…
 후후… 하지만 어제 도움받은 건 누구지…?
 
 
 면셔츠와 바지를 입고 머리를 묶었다.
 거울에 비쳐진 핼쑥한 얼굴에 최대한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어본 다음, 
 시연은 마치 전장에 나가는 병사처럼 방문을 열고 나갔다. 
 
 문을 열자마자 먼저 발동한 오감은 후각이었다. 
 뭔가, 아주 구수한 냄새가 부엌에서부터 흘러 나오고 있었고 그 반응인지 
 시연의 배에서도 시원스레 소리가 나, 픽 웃어 버리고 말았다.
 
 ' ……? '
 
 부엌에 동하가 있었다. 
 
 어제 입었던 옷이 아닌, 아버지의 트레이너로 갈아 입은 모습. 
 앞치마를 두르고 있거나 하진 않았지만 묘하게 부엌과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국자를 들고 있는 게, 마침 국물 맛을 보고 있던 모양이다.
 
 " 깨셨어요? "
 
 이미 변성기를 경과한 저음의 목소리에선 어른 티가 났다.
 그 말에 쳐다 본 벽시계는 벌써 11시를 가리키고 있다.
 
 ' 후… 너무 자버렸어… '
 
 " 아침 차릴게요. "
 
 부엌에 만들어진 2인용 식탁 위에 수저를 가지런히 놓으며 동하가 말했다. 
 이미 김치며 몇 안되는 밑반찬도 놓여 있다.
 
 " 미안해… 진작 일어나서 차렸어야 하는데…. "
 " 간만에 해서 맛이 있을지 의문이니까 그런 말은 다 드시고 하세요. "
 
 배려가 담긴 대사는 여전히 무뚝뚝하긴 해도 여느 때보다 훨씬 길어, 
 왠지 자신의 눈 앞에 있는 소년이 동하란 확신이 서지 않을 정도다. 
 
 시연은 자신이 지금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을 찾았다. 
 그릇을 꺼내 전기밥솥에 있는 밥을 퍼서 식탁 위로 가져간 그녀는 의외의 
 음식이 이미 자리하고 있음을 알고 무의식 중에 동하를 빤히 보고 있었다.
 
 " 미역국… 싫어한다고 했잖아. "
 " …거짓말이었어요. "
 
 ' 빈혈에 좋다는 것 같아서…. '
 
 말투는 오히려 담담했으나 표정엔 어느 정도 쑥스러움이 담겨 있어 
 시연은 더 묻지 않고 잠자코 식탁 앞에 앉았다.
 
 미역국 외에 계란말이도 동하의 솜씨인 음식은 예상보다 더 맛이 있었다. 
 배가 고픈 탓도 있겠지만 경험의 축척임이 분명하다.
 
 " 나보다 훨씬 나은 거 같아. "
 
 망설이다 한마디 던지자, 김치를 얌전히 집던 젓가락이 조금 흔들렸다. 
 얼굴을 들여다 보니, 살짝 웃고 있다. 
 놀랐다… 아주 소년다운 미소여서.
 
 ' 저렇게 웃는구나…. '
 
 시연도 웃었다. 
 이제까지처럼 형식적인 것이 아니라 자신도 느끼지 못할 정도로 마음에서 
 우러 나오는 미소. 상대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 지어본---
 
 " 언제나 이렇게 혼자서 해먹었어? "
 " 일하는 아주머니가 오신 적도 있었지만요. "
 " ---좋아해? "
 
 튀어나온 것은 자신이 생각하기에도 멍청한 질문.
 
 " 좋아할 리 없잖아요. ---좋아해요? "
 " 나도 별로…. 같은 입장인가? 
  해야 하니까, 안하면 곤란하니까… 그런 거지? "
 " 그래서 맨날 대충 때우다가 어제처럼 된 거에요? "
 
 툭 던지듯 대꾸하긴 해도 악의는 없어 보인다. 
 약간 놀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하다. 
 
 그 말 다음부터는 계속 침묵이 흘렀지만 이렇게 마주 보고 앉아 있는 
 공간의 공기는 꿈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따뜻했다.
 
 식사가 끝나고 설거지는 자기가 해야겠다며 막무가내로 부엌에서 
 자신을 내쫓은 여자가 잠시후 커피를 마시겠냐고 물어와 동하는 
 얼떨결에 긍정의 대답을 했고, 그리고 얼마 안돼 과일과 찻잔을 올린 
 쟁반을 들고 시연이 나타났다. 
 
 자신의 몫인 원두커피에 언제나처럼 설탕만을 넣어, 녹는 걸 
 기다리지도 않고 한모금 마신 소년의 눈에 상대 찻잔이 들어왔다. 
 자신의 것처럼 진한 갈색 물이 아니라 녹차 티백이 들어 있다. 
 
 어느 정도 우러 나오는 걸 기다려서 티백을 꺼낸 찻잔을 입에 가져간 시연을 
 바라보며 물었다.
 
 " 커피 싫어해요? "
 " 아… 사실 굉장히 좋아하는데, 하루에 한잔 이상은 마시지 않기로 
  하고 있어. 잡지사 다니는 사람들은 전부 위나 장이 안 좋아. 
  마실 땐 좋은데, 속이 쓰려서… 그래서 녹차로 바꿨어. 
  물론 가끔은 커피도 마시지만. "
 
 몸이 성한 데가 없구만….
 
 " 저기… 말야…. "
 
 망설이는 듯한 음성이 들려 다시 고개를 들자 결심했다는 표정으로 
 입을 놀리는 여자가 보인다.
 
 " 지금 있는 곳… 괜찮니? 왜 옮긴 거야? "
 " 그냥요. 혼자보다 아는 형이랑 지내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 같이 사는 사람이, 다른 사람--- 여잘 자주 부른다구 그러던데…. "
 
 연석이 녀석!
 
 " 그 누나도 아는 사람이에요. 걱정 마세요. 살긴 편하니까. 어차피 밤늦게 
  들어 와 잠만 자고 바로 학교가니, 걱정할 정도로 불편한 건 없어요. "
 " …그래. "
 
 역시 이 집에 들어오라 설득하는 건 무린가….
 
 " 저--- "
 " …응? "
 " 아, 됐어요. "
 " ……? "
 
 지난 번 같이 있던 남자… 그 남자에 대해 묻고 싶은데…
 후… 관두자. 괜한 참견이야. 
 이쪽에서 신경을 쓰는 게 더 이상하게 비치겠지….
 
 " 하긴… 혼자보단 다른 사람이랑 있는 게 낫겠지… 쓸쓸하구…. "
 
 여자가 중얼거리듯 말하는 소리가 들린다.
 
 왠지 자기 자신에게 하는 말처럼 들리는 건… 착각일까?
 별로 할 말이 없다… 일어서야겠다.
 
 " 가 봐야겠어요. …조금 아까 카페 주인형이랑 통화했는데 어제 빠진 거, 
  오늘 나가서 하기로 했어요. 어차피 할 일도 없고. …몸은 괜찮은 거죠? "
 " …그래. 참, 아래까지 바래다 줄게. "
 " 됐어요. 쉬세요. "
 
 1층에서부터 올라온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동하가 엘리베이터 안으로 발을 디딘 그 순간…
 뒤에서 힘을 짜내는 듯한 목소리가 들려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 …저, 정말 안되니…? 내가 그렇게… 싫어? 같이 지낼 수 없는 거야? "
 
 뒤로 천천히 돌아 엘리베이터의 열림 버튼을 짚은 소년의 눈이 똑바로 
 여자를 향했다. 
 
 마주 본 상태에서 이어지는 잠깐의 침묵. 
 그리고---
 
 " 주말이나 돼야, 짐 옮길 수 있을 거예요. 
  주중에 연락드릴게요. …갈게요. "
 
 쿵--- 하고 가볍게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 ……. "
 
 한동안 말을 잃은 채 서 있던 시연은 또 당했구나… 하고 
 얼굴을 찡그리면서도 방금 소년이 남긴 말의 의미를 확실히 깨닫자,
 올라가는 입끝을 주체하지 못하고 한손을 얼굴에 댄 채 허탈하게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하여, 무척 길어질 듯 했던 두사람 간의 전쟁은 
 시연의 승리와 동하의 항복으로 끝이 났다. 
 
 하지만--- 
『끝』이란 또 다른 시작을 의미하는 것이다. 
 
 
 
 " 시연씨, 오늘 진짜 이상하네? 무슨 기분좋은 일 있어? "
 
 토요일 오후 2시 30분. 
 압구정동 맥도널드 앞.
 
 어제 잠깐동안 첫눈이 내리긴 했지만 그리 춥지 않은 날씨다.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바닥에 조심스레 내려놓은 재훈은 
 오늘의 파트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평소 잘 웃는 편이 아닌 사람이 압구정동에서 바로 만나도 될 걸 
 아침부터 스튜디오로 데리러 오질 않나, 썰렁 그 자체인 김차장의 조크에 
 크게 웃질 않나, 안하던 행동을 연신 보여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 그냥. 오래간만에 스트리트 촬영 나오니까 기분 좋은데? "
 " 것도 그래. 이젠 거리촬영 안하는 줄 알았는데.
  2년 지나면서 프리랜서한테 맡기기로 한 거 아니었어? 짬밥이 되잖아. "
 " 시간이 모자라 그렇지, 내가 거리촬영 얼마나 좋아하는데. 
  이 동네로 놀러오는 고딩들 내가 꽉 잡고 있단 소리 못 들었어? "
 " 그건 내가 잘 알지. '유'랑 나올 때 거리촬영이 얼마나 빨리 끝나는진. 
  그치만 인제 안해도 될 짬밥이다 이 말이야. "
 " 가끔 나와 보고 싶을 때가 있다, 이 말이지. 
  어, 초장부터 예쁜 애 보인다! 잡아 올게. "
 
 재훈은 시연과 같은 나이라 일찌감치 말을 트고 지내는 사이다. 
 물론 현역으로 군대를 다녀온 재훈은 시연보다 잡지경력으론 후배지만, 
 같은 나이끼리 선배님 어쩌구 하는 게 좀 그렇지 않냐며 시연 쪽이 
 먼저 말틀 것을 제의해 왔고 재훈 쪽에선 거절할 이유가 없어 
 그 뒤로는 야자하고 지낸다.
 
 촬영이 막 시작된 주의 토요일 오후는 거리 촬영을 하기로 정해져 있다.
 압구정동 등 애들이 많이 모이는 장소로 일단 떠서 옷 잘 입은 애들이 
 지나가면 잡아다 찍는 것 말이다. 
 
 재훈의 경우, 스튜디오의 막내이기 때문에 이런 노가다 작업은 
 절대 그의 몫이다. 
 왜 노가다냐 묻는다면 오후 내내 무거운 카메라 가방을 들고 
 한 자리에 서 있어 보라고 권하겠다. 
 이게 아니라도 잡지 일이란 다 노가다지만.
 
 지금 총알처럼 횡단보도 쪽으로 달려가 사진 찍으라고 '꼬시고' 있는 
 이시연이란 여자를 말하자면 상당한 이중 인격자라고 생각한다. 
 무슨 말인고 하면, 첫 인상은 지극히 얌전한 청순가련형으로 보였는데 
 촬영에 들어가면 아주 뻔뻔하고 터프해진다는 소리다. 
 첨 보는 사람을 포섭해야 하는 거리촬영에서 그녀의 뻔뻔스러움은 
 진가를 발휘하는데, 평소 거의 볼 수 없는, 친근하기 이를 데 없는 
 그녀의 미소를 잔뜩 볼 기회이기도 하다.
 
 시연이 데려온 힙합소녀를 앞에 세운 채 셔터를 눌러대고 나서 
 재훈은 괜찮았다는 오케이 사인을 그려 보였다.
 
 " 요즘 애들은 다 모델이란 말야. "
 " 카메라 앞에서 쑥스러워하는 애들이 없지, 응. …어머! "
 
 시연이 소리를 지른 이유는 두사람의 앞으로 걸어온 두명의 소녀들이 
 아는 모델이었기 때문이다. 
 바로 미은과 마리였다.
 
 " 시연언니! "
 " 니들, 왠일로 압구정으로 떴니. 강남역이 니들 아지트 아냐? "
 " 그냥, 왠지 오고 싶어서요. 언니 만나려 그랬나 봐. "
 " 어쨌든 오늘 촬영 일찍 끝나겠다. 
  서 봐. 찍어줘야지, 아주 포맷에 맞게 비슷하게 입었구먼. "
 " 둘이서요, 아니면 따루따루요? "
 " 어떡할까… 재훈씨. 둘이서 한컷씩 가고 따로 한컷씩만 더 찍어줌 어때. 
  얘넬 좀 크게 실어볼까 하는데. "
 " 오케이. 단, 반드시 그렇게 해야 해. "
 
 재훈이 미은과 마리를 찍고 있을 때, 시연의 핸드폰이 울렸다. 
 이시연입니다--- 하고 받자 이젠 꽤나 귀에 익은 음성이 흘러 나온다.
 
 [ 아, 시연씨. 서현웁니다. ]
 " 아…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이네요. "
 [ 무슨 기분 좋은 일 있으세요? ]
 " 후후… 그렇게 들려요? "
 [ 예. ]
 " 그냥… 조금요. "
 [ 마침 기분도 좋은데, 오늘 시간 있으세요? ]
 " 아, 죄송. 오늘은 안돼요. 엄청 중요한 일이 있거든요. "
 
 ' 오늘 저녁엔 남편의 아들이 집에 들어 오거든요. '
 
 [ 휘유… 모처럼 틈이 났건만… 안되겠네요. 또 촬영 중이세요? ]
 " 네. "
 [ 그럼 나중에 또 전화드리죠. ]
 
 ' 현우란 사람에 대해 은영선배한테 물어봐야겠어… 
  무슨 생각으로 이러는지… '
 
 생각하면서 핸드폰을 가방에 집어 넣고 있는데, 
 재훈이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저, 시연씨. 오늘 남자애들은 안 찍어?
  저기 두명, 키도 비슷하고 그림이 괜찮은데. "
 " 어디…. "
 
 시연이 몸을 돌리자 그녀 옆에서 수다를 떨던 미은과 마리도 
 반사적으로 시선을 그쪽으로 향했다. 
 두 소녀의 큰 눈이 갑자기 더 커진다.
 
 " 풋…! "
 
 시연이 웃음을 터뜨렸다. 
 재훈이 왜 그래… 미쳤어? 하며 입을 삐죽 내미는 걸 무시하고 
 두 소년쪽으로 걸어간다.
 
 " 두사람, 여기 왠일이야? "
 " 어…! "
 
 이야기에 열중하느라 미처 시연을 깨닫지 못했던 두 소년은 깜짝 놀라 
 그녀를 보았다. 키가 더 큰 쪽--- 즉, 연석이 씩 웃으며 묻는다.
 
 " 여기서 뭐하세요? "
 " 응, 거리 촬영. 여기서 만날 줄은 몰랐네. 압구정동 자주 나와? "
 " 아뇨. 어쩌다가 나왔는데, 딱 부딪힐 줄은 몰랐는데요? "
 " 두사람, 사진 찍히는 것 좋아해? "
 " 에…? "
 " 보는 눈이 있으신 우리 포토그래퍼께서 두사람 그림이 좋대는데.
  이번 주제 중 하나가 '비슷한 스타일로 입은 친구들'이거든. "
 
 그 말에 동하랑 연석은 서로를 쳐다 보았다. 
 확실히 비슷한 복장이다. 
 컬러풀한 점퍼에 청바지, 그리고 야구캡과 운동화.
 
 " 찍자. "
 " 싫어요! "
 
 동하의 입에서 나온 소리다. 
 거의 방어의 수준.
 
 " 왜… 좋잖아. 잡지에 나오는 거 싫어? "
 " 싫어요. "
 
 연석이 제3자처럼 킥킥 웃는 게 보인다. 
 시연은 재미있단 생각이 들어 일부러 짓궂게 매달렸다.
 
 " 한번만 찍자, 응? "
 " 어후… 싫다니까요. "
 
 난처한 표정을 짓는 동하가 정말 귀엽다고 시연은 생각했다.
 
 " 뭐 어때서 그래, 한번만인데. "
 " 안된다니까요. 야, 진연석. 너도 뭐라 말좀 해. "
 " 난 별루… 상관없는데. 전에도 한번 찍힌 적 있는데, 기분 좋던데. "
 " ------야. "
 
 결국 잠시 후, 두사람은 사진기자의 카메라 앞에 서 있었다. 
 재훈이 카메라에서 시선을 떼더니 엄숙하게 말한다.
 
 " 어이, 파랑점퍼(동하). 제대로 한번에 안하면 쪽팔리는 시간이 길어진다. 
  표정 좀 잘 지어 봐. "
 
 동하가 후--- 하며 한숨을 토하는 것을 시연이 빙글빙글 웃으며 바라보고 
 있는데 옆에서 팔을 잡는 것이 느껴졌다.
 
 미은이다.
 
 " 언니, 쟤네 누구에요? 언니랑 아는 사이에요? "
 " 어…? 응. "
 " 누군데요? "
 
 똑바로 그녀를 쳐다보며 질문하는 소녀에게 뭐라 대답해야 할 지 
 잠깐 망설이던 시연은 사실을 말해주기로 용단을 내렸다.
 
 " 내 아들. "
 " …에에?! "
 
 미은의 얼굴이 일그러진다. 
 시연이 재빨리 덧붙였다.
 
 " 친아들은 아니구… 나 결혼했던 거 알지? 잘 안됐지만… 
  남편의 아들이야. "
 " …아아…… 예. "
 
 소녀가 괜한 걸 물었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푹 수그렸다.
 
 " 근데, 왜? "
 " 낯이 익어서요. 전에 왜 언니 회사 앞에서 본 적 있잖아요. "
 " 아참, 그랬지. "
 
 시연은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편의점 앞에서 나누었던 - 아니, 일방적으로 그녀 쪽이 당했지만 - 대화를. 
 어디까지나 싸늘하기만 했던 소년의 모습을. 
 그리고, 어쩔 줄 몰랐던 그 때의 자신을.
 
 - 당신 돈까지 받을 필욘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짓 하지 마세요. 
  그 말씀 드리려고 왔어요. 
 
 - 전 미역국 안 먹어요. 감자 사라다도 싫어하구요.
 
 하지만… 이제, 괜찮다.
 오늘, 드디어 동하는 집으로 들어온다---
 
 결국, 마음을 열어주었다.
 앞으론 모든 게 잘 될 것 같단 생각이 든다. 
 아아… 정말 기뻐….
 
 " 그럼, 언니랑 같이 살아요? "
 " 어? …으응. "
 
 실은 오늘부터지만 말야.
 나도 믿을 수가 없어.
 
 " 흐으으으음. "
 " 근데, 왜 꼬치꼬치 캐묻니? "
 " 그냥요. "
 
 미은의 얼굴에 귀엽지만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오른다.
 촬영이 끝났는지 동하랑 연석이 이쪽으로 걸어왔다. 
 소년의 얼굴에 곤욕스러워 죽는 줄 알았다구요…… 라고 씌어 있는 걸 보고 
 시연은 기분좋은 웃음을 연신 흘렸다.
 
 " 됐어요? "
 " 아니, 몇마디 물어봐야지. "
 " 다 알면서 뭘 또요. "
 
 이것저것 시연과의 질문과 대답이 끝나 인사를 하고 자리를 뜨려는 
 두 소년을 섀기커트를 한 소녀가 불렀다. 
 줄곧 시연 옆에 서 있었던 아이다.
 
 " 저기요--- "
 " 예…? "
 
 연석과 동하가 돌아 보자 이번엔 긴머리 소녀가 생글거리며 묻는다.
 
 " 전에 우리 본 적 없어요? "
 " …글쎄요…… 아! "
 
 연석의 두뇌가 기억을 되살려 냈다.
 
 " 그 때… 회사 앞에서 본… "
 " …정답. "
 
 긴머리 쪽, 그러니까 마리가 애교만점인 목소리로 대답했다.
 
 " 몇학년이에요? "
 " 고1. "
 " 우리랑 똑같네. 지금 어디 가? "
 
 미은이 기분좋다는 듯 약간 들뜬 소리로 질문.
 
 " 밥먹으러…. "
 " 와, 잘됐다. 우리랑 같이 갈래? 시연언니랑 아는 사이니까. "
 
 네사람의 대화를 가만히 듣던 시연은 푸웃--- 하고 또다시 웃고 나서 
 어색하게 자신을 쳐다보는 동하에게 말해 주었다.
 
 " 그래, 그렇게 해. 어차피 오늘 달리 만날 사람들 있는 것도 아니지? "
 " 그렇긴 하지만… "
 " 미팅 주선자가 된 기분이네. 넷이서 오늘 재밌게 놀아. "
 
 동하와 연석은 골치아픈, 하지만 그렇게 싫지만도 않은 표정으로 
 앞에 서 있는 두 소녀를 힐끗 보았다. 
 섀기 커트의, 눈 큰 소녀와 긴 머리의 키 큰 소녀는 소년들에게 
 약간 쑥스러운 듯하면서도 반은 장난기가 어려 있는 미소를 보냈다.
 
 ' 여우과들이군…. '
 
 생각한 동하와 연석은, 그러나 알지 못하고 있었다. 
 
 눈 앞에 있는 여우과 소녀들이 처음 본 전철 안에서부터 두사람을 
 찍어 놓았었단 사실까진 말이다. 
 
 
 
 마음은 팔고 사지는 못하지만 줄 수는 있는 재산이다. 
 
플로베르 
 
 

 
 전연 남남이던 두사람이 한 식구가 되면 뭔가 특별한 일이 일어날 듯도 
 싶지만 의외로 아무 변화 없이 하루하루가 흘러가고 있었다. 
 
 의식해서 그렇게 행동한 것이 아니라, 같이 살기 시작한 11월 말부터 
 12월 중순까지 동하도 시연도 정말 힘들게 하루하루를 보내느라 
 서로에 대해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기껏해야 아침에 시연이 만들고 동하가 거들어 완성한 식사를 마주 보고 
 앉아 바쁘게 입에 집어 넣을 때와 동하가 아르바이트에서 돌아오는 
 야심한 시각에 잠깐 이야기를 주고 받는 때가 서로의 얼굴을 볼 
 유일한 기회였다. 
 
 밤에 잠깐 가벼운 대화를 하고 - 실은 그럴 틈조차 없는 날도 많았지만 - 
 각자 방으로 흩어져 죽은 듯이 잠에 빠지는 매일이 계속되었던 데다 
 동하가 모처럼 집에 일찍 돌아오게 된 기말시험 기간은 때 맞춰 
 시연의 잡지 마감기간이어서 두사람은 함께 살긴 했어도 얼굴 마주칠 일이 
 드물었다. 
 
 어떻게 생각하면 서먹해야 할 두사람의 사이가 별 노력없이도 자연스럽게 
 가까워진 것은 오히려 두사람이 각자의 일상에 충실했던 까닭인지도 
 모르겠다.
 
 12월 중순이 넘어가자 잡지 마감이 끝나고 동하의 학교도 겨울방학에 들어가 
 두사람은 겨우 숨을 돌리게 되었고, 그동안 흐른 한달이라는 시간은 
 두사람의 관계를 꽤 발전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었다. 
 그 날 일어난 일에 대해 짧게나마 자연스럽게 대화할 수 있는 누나 - 동생 
 같은 사이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건 속깊은 대화를 할 수 있을 정도까질 말하는 것은 아니었다.
 
 
 마감이 끝난 주 토요일.
 
 시연은 여느 때와 다름없이 밤 늦게 돌아올 동하를 기다렸다. 
 기말시험도 끝나고 막 겨울방학을 시작한 터라 늦게 들어올 거라 
 예상했었지만 의외로 동하가 들어 온 것은 이른 시간이었다. 
 
 그녀는 아침에 동하가 오늘 늦게까지 카페형이랑 친구들이랑 있다 올 거라 
 한 말을 떠올렸다.
 
 " 더 늦게 온다고 하지 않았어? "
 " 피곤해서요. "
 
 동하의 대답은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간결하다. 
 
 쓸데없는 말은 절대 붙이지 않는 성격. 
 좋게 말하면 담백하고, 나쁘게 말하면 정이 없어 보인다고나 할까. 
 어쨌든 그게 동하의 스타일이라면 익숙해져야지--- 하고 시연은 생각한다.
 
 " 뭣 좀 먹을래? "
 " 우유나 한잔 마실래요. "
 
 우유를 따른 컵을 갖다 준 시연이 물었다.
 
 " 내일도 아르바이트 하니? "
 " 안해요. "
 
 격주 일요일은 쉬는 날이다. 
 이외에 어차피 시간제라 월급에서 뺀단 조건이지만, 중간·기말시험 때도 
 쉴 수 있는 것은 오래 안 사이인 준구형의 배려이다. 
 본인이 고교시절 전혀 공부를 안한 것에 대한 후회가 남아 있어 
 동하에겐 공부하라고 어울리지 않는 잔소리까지 늘어 놓곤 하는 것이다.
 
 " 그럼… 낼 시간 좀 내 줄 수 있니? "
 " 무슨 일인데요? "
 " …어디 좀 같이 가자구. "
 
 동하는 여자의 얼굴을 가만히 쳐다 보다가 고개를 끄덕했다. 
 '어디' 라고 말하는 것으로 보아 이야기하기 쑥스러운 듯 싶다.
 
 식탁 의자에 앉아 우유를 마시던 동하는 문득 불을 꺼놓은 거실로 
 눈을 보냈다. 
 여느 때와 다른 것이 눈에 띄었기 때문이다. 
 
 정식 트리는 아니지만 거실 화분 중 제일 큰 나무에 별이며 금줄, 
 반짝이는 전구까지 달아 놓았고  커튼 위에도 꼬마 전구가 색색이 
 빛을 발하며 매달려 있다. 
 전구의 빛은 인공적일지라도 나름대로의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어 
 눈을 끌어 들였고, 예쁘다고--- 무심결에 생각했다.
 
 " 잊고 있다 뒤늦게 장식했어. 
  잡지촬영 때 썼던 물건들이야. 좀, 어설프지? "
 " 아버지랑 살 땐 트리 같은 거, 한번도 만든 적 없었어요. "
 
 시연은 가만히 동하를 봤다. 
 
 어둑한 속 전구들의 가느다란 빛을 뚫어지게 응시하는 동하의 눈동자가 
 참 깨끗하다고 느낀다. 또… 외로워도 보인다.
 
 ' 나도 누군가에게 저렇게 보일까…? '
 
 형태는 다르지만 두사람은 비슷한 류의 외로움을 간직하고 있다. 
 하지만 짐은 아직 어린 동하에게 더 버겁게 느껴질 것이다. 
 시연은 문득 그 짐을 나눠 가지고 싶다고 생각한다. 
 
 자신이 동하의 아버지와 만나 사랑에 빠지고, 결혼하고, 그리고 
 그 사람을 잃은 지금, 동하에게 뭔가를 해준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만남에 
 대한 가장 중요한 의미를 얻을 수 있는 방법일 거라고. 
 
 그러나, 지금 이 순간 동하 쪽도 그런 시연의 마음을 희미하게나마 읽었단
 사실을 그녀는 미처 알지 못했다.
 
 말은 하지 않아도,
 특별한 것은 아닐지라도,
 그 나름의 행복을 손에 넣었다….
 
 집안의 고요한 공기를 뚫고 마음 속 깊은 곳으로부터 아주 낮게 
 캐롤의 멜로디가 들려와, 각자의 생각 속에 미소지으며 방으로 향하는 
 두사람이었다.
 
 하지만… 마음의 평화란, 
 어떤 방식으로든 깨지기 쉬운 것이다. 
 
 
 지하철을 타고… 버스를 타고… 그리고, 꽤 걸었던 것 같다.
 포장이 안 돼 있는 길에 쌓인 눈이 밟힐 때마다 뽀득뽀득 소리를 낸다. 
 
 앙상하게 뼈만 남은 나무들이 간간히 서 있고 멀리 눈덮인 산이 보이는 
 길 한켠으로 가끔 드문드문 집들도 몇채 있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조용한 
 분위기. 
 
 서울에서 조금만 벗어나도 이렇게 한적한 시골길이 존재한단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두사람 사이에 대화가 끊긴 지도 오래다. 
 어딜 가는 건지 여자 쪽에서 먼저 말해 주진 않았고, 
 망설이던 소년도 물을 기회를 어느 사이엔가 놓쳐 버렸던 것이다. 
 
 한켠에서 불어온 바람이 얼굴을 때리지 않도록 하기 위해 머플러로 감싼 
 시연의 뒤를, 주머니에 손을 넣은 자세로 동하는 잠자코 따라갈 따름. 
 
 그렇게 한참을 걸은 두사람 앞에 작은 학교처럼 생긴 집이 나타났고,
 마침내 시연이 멈춰섰다.
 
 낡지만 깔끔한 인상을 주는 그 집은---
 
 " …내가 자란 곳이야. "
 
 시연이 걸음을 멈추고 이틀 전에 내린 눈이 가득 덮인 지붕을 올려다 보면서 
 말했다. 
 
 때마침 문에서 누군가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50대 후반 정도 되어 보이는, 키가 작고 통통한 체구의 아주머니다.
 
 " 에구머니나! 시연이 왔구나? "
 
 아주머니는 슬리퍼를 끌면서 부지런히 뛰어 와 귤이 담긴 비닐봉지를 든 
 시연을 끌어 안았다.
 
 " 올 거면 연락 좀 하지 그랬어. …뭘 또 이런 걸 사오구…. "
 " 그동안 너무 격조했죠. 죄송해요. 곧 크리스마스고 해서 왔어요. "
 " 춥지, 이 손찬 것 좀 봐. "
 
 시연의 손을 자신의 손으로 감싸던 아주머니의 눈이 
 옆에 선 동하로 옮겨졌다. 
 의아한 표정을 본 시연이 재빨리 설명을 붙인다.
 
 "저… 동하라고… 결혼식 때 보셨던 거 기억하세요?"
 
 아주머니는 한참 기억을 더듬다 겨우 생각난 모양으로 
 아, 그래 그래…… 하며, 소년을 본다. 
 동하도 어색한 미소를 올리며 고개를 꾸벅하고 숙였다.
 
 "선생님은요?"
 "잠깐 나가셨어. 금방 오실 거야. 어쨌든 춥겠다, 어여 들어가."
 
 아주머니의 안내에 따라 복도를 지나 들어선 큰 방에는 20명 안팎의 
 아이들이 몇명씩 그룹을 지어 모여 뭔가 하고 있는 모습이 보인다. 
 
 4살 정도부터 중학생까지 다양한 나이의 아이들. 
 바닥에 엎드려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있고 공기놀이를 하고 있는 아이들도 
 있고 소파에 앉아 책을 읽고 있는 아이도 보인다.
 
 " 얘들아, 시연이 왔다. "
 
 그 말에 몸을 일으킨 그들의 눈이 커지고 이어 커다랗게 함성이 터졌다.
 
 " 언니이…. "
 " 누나…! "
 
 부르는 명칭은 조금씩 다르지만 다들 달려왔고 시연과 동하는 순식간에 
 아이들이 만든 원으로 둘러 싸였다. 
 꼬마 한명이 몸을 굽힌 시연의 목을 끌어 안자, 그녀의 얼굴 하나 가득 
 미소가 떠오른다.
 
 " 다들 잘 있었어? "
 
 시연에게 매달린 아이들의 시선이 동하에게로 옮겨졌다. 
 목을 끌어 안은 채 시연에게 안긴 꼬마 여자아이가 어정쩡 서 있는 동하를 
 빤히 올려다 본다.
 
 " 이 오빤 누구야? "
 " 동하 오빠라구 해. "
 " 됴아 오빠? "
 " 아니, 동. 하. 오. 빠. "
 
 동하는 얼떨떨한 표정을 감추지 못한 채 고개를 꾸벅 움직인다. 
 
 아이들이 안녕- 하고 인사하며 생글생글 달려들자, 
 순간 놀란 얼굴로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렸다.
 
 ' 이런 곳에서 자란 건가…. '

 

 

시연과 아주머니가 차린, 약간 뒤늦은 점심 후 설거지를 마칠 무렵이나 
 되어서야 원장 선생이 돌아왔다.
 이야길 들었는지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환하게 웃음띈 시선을 보낸다.
 
 " 선생님. "
 
  시연은 원장을 선생님이라 부른다. 
 
 이곳은 '고아원'이라든지 비슷한 뉘앙스를 주는 간판이 붙어 있지 않아 
 언뜻 보면 보통 시골학교나 큰 집처럼 보인다. 
 
 원장과 지금은 돌아가신 그의 부인이 몇명의 고아들을 모아 돌보기 시작한 
 것이 이곳 역사의 시작이고 엄밀하게 말하면 정식 고아원은 아닌 지라 
 '원장'이라 불리는 걸 본인이 어색하게 생각하고 펄쩍 뛰는 탓인지 
 이곳 아무도 원장을 '원장'이라 부르지 않고, 대신 '선생님'이라 부른다.
 
 " 어이구, 우리 꼬마 왔구나. "
 " 선생님두, 참. 아직 그 말투 못 고치셨어요? 저 내년임 스물일곱인데. "
 " 볼 때마다 처음 봤을 때가 떠올라서 말이지… 
  아기 때부터 얼굴이 하나도 안 변해. 
  참, 여기 있는 이 양반이 새 가족인가? "
 
 나이에 비해 그다지 살집이 잡히지 않은 체구지만,
 역시 주름은 감출 수 없나 보다. 
 원장의 허허 웃음이 가득한 표정을 본 소년은 예의바르게 몸을 숙여서 
 인사했다. 
 그 모습을 본 시연의 얼굴에도 여러 의미가 뒤섞인 미소가 비친다.
 
 " 점심 소화도 시킬 겸 부탁 좀 해야지. 맨날 하는 부탁이긴 해두--- "
 " 어우 참, 맞다. 시연이 연주 들은 지 정말 오래됐네. 
  성탄절 기념으로 부탁 좀 해야것다. "
 " 요즘 통 쳐본 적이 없어서 자신없는데…. "
 
 원장과 아주머니의 말에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동하를 보던 시연은 
 결국 맨 처음의 큰 방에 떠밀리듯 들어갔다. 
 잘 보니, 그 큰 방 귀퉁이에 피아노가 있는 것이 보인다. 
 
 시연을 피아노 앞에 억지로 앉힌 아주머니가 흩어져 놀고 있는 아이들을 
 큰소리로 불러 모았다.
 
 " 얘들아, 시연언니 피아노 친단다. "
 
 그 말에 모두들 하던 일을 중지하고 피아노 가까이로 모여 앉는다. 
 시연이 의자에 앉은 채 몸만 돌려 아이들을 본다.
 
 " 신청곡 받을게. 뭐 쳐줄까? "
 " 고요한 밤 거룩한 밤! "
 
 초등학교 고학년 정도 나이가 되보이는 소녀가 눈을 반짝이며 지른 소리다.
 
 " 유경이 신청곡 칠게요. 틀려도 비웃지 마세요. "
 
 제대로 돌아 앉아 뚜껑을 올린 시연은 오른손 검지로 건반의 '도' 음을 
 가만히 짚어 본다. 
 댕… 울린 맑은 소리를 확인하고 그녀는 숨을 한번 쉬었다가 피아노를 
 연주하기 시작했다. 
 그리 크지 않은 양손은 차분하게 움직이면서 크리스마스에 어울리는 곡을 
 만든다. 
 
 음대를 나온 사람만은 못하겠지만 제법 감정을 담은 연주. 
 좋은 연주의 기준을 동하는 모르지만, 지금 귀에 들려오는 멜로디에 
 맑고 깨끗한 아름다움이 있다는 것 정돈 어렴풋이 느낄 수 있다. 
 
 피아노현이 익숙한 멜로디를 고막에 실어 보냈고, 그것이 뇌로 전해지자 
 따스한 손난로를 가슴 속에 넣은 것처럼 훈훈한 감각… 
 
 소년에겐 참으로 오래간만에 듣는 피아노 연주였다.
 
 연주자의 엄살과 달리 큰 실수없이 연주가 끝나자 아이부터 어른까지 
 모두 힘을 주어 박수를 보냈다.
 
 " 앵코올! "
 " 선생님도 참…. "
 " 언제나의 것으로 부탁하마. "
 " 네. "
 
 시연이 알겠다는 듯 피아노 앞으로 고개를 돌리고 연주하기 시작한 곡은 
 조지 윈스턴의  December>에 들어 있는  Thanksgiving>. 
 동하도 알고 있는 곡이다. 
 
 오늘 걸은 길에서 본 12월의 풍경이 멜로디 속에 뚜렷이 떠올라, 
 소년은 가만히 마루에 앉은 채, 마음 속 영상을 응시하고 있었다.
 
 멀리 보이는 산에 덮인 눈…
 서글프도록 앙상한 나뭇가지에 쌓인 눈…
 그리고 앞서 걸어가는 낮은 굽의 구두에 밟혀 정다운 소리를 내는 눈….
 코를 얼게 만들 만큼 싸늘한 공기 속, 한동안 걸어 아픈 다리의 감각을 
 잊은 채 감미로운 생각에 빠져들게 만들었던… 그 풍경의 멜로디다.
 
 동하의 옆에 앉아 있던 원장이 조용히 미소지으며 말한다.
 
 " 저 피아노, 소리 괜찮지? "
 " 예. "
 " 시연이가 월급 모아다 선물한 피아놀세. 정말… 착한 아이지. "
 
 그 말을 하는 원장이 약간은 씁쓸하고 약간은 흐뭇한… 설명하기 불가능한 
 주름을 만드는 것이 보였다. 
 
 악보없이 건반만을 보며 손을 부지런히 움직이는 시연과 
 그녀가 돈을 아껴 사왔다는 피아노. 
 천진한 미소를 짓고 있는 아이들. 
 그 아이들을 돌보며 보낸 세월을, 언제나 떠나지 않는 입가의 미소로 
 대변하고 있는 원장과 아주머니. 
 
 천천히 고개를 돌려 살핀 동하의 눈에 들어온 모든 것은,
 비칠 듯한 투명함이 있어 자신을 돌아보게 만든다. 
 
 그리고, 알 것 같았다… 
 
 가진 것 없이 자란 저 여자에게, 어째서 다른 이들에게 나누어 줄 넉넉함이 
 존재하는지….
 
 원장의 신청곡에 이어서 두곡 정도를 더 연주한 시연은,
 
 " 이번을 마지막으로 끝낼게요. 신청곡을 받을 사람은… "
 
 동하를 가리켰다. 
 손가락으로 자기를 말하냐는 시늉을 하자, 웃으며 끄덕인다. 
 
 소년은 잠시간 침묵한 채 가만히 고개를 숙이고 있다가 다시 들어 
 시연을 똑바로 응시하면서,
 
 " 가장 좋아하는 곡. "
 
 천천히 말했다.
 
 " ……응? "
 " 치는 분이 가장 좋아하는 곡 말예요. 그 곡을 신청합니다. "
 
 시연은 동하를 본다. 
 동하도 시연을 봤다. 
 
 순간, 공기의 흐름이 일순 정지한 것처럼 느껴지고 숨까지 멈출 정도의 
 감각이 머리를, 그리고 가슴을 스쳐 지나갔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그것은 마주 본 두사람을 당황하게 만들기엔 
 충분할 정도의 묘한 감정… 
 
 그리고, 시연은 피아노 건반 위로 시선을 떨구었다. 
 
 
 돌아오는 길 내내 침묵이 흘렀다.
 
 각자의 생각 속에 얽혀 서로에게 말을 건넬 여유도, 용기도 남아 있지 
 않았다.
 어둠이 깔린 속을 걸어 돌아온 집은 잠깐의 외출로 인해 생기를 잃고 
 있다. 
 
 ---결국, 먼저 입을 연 것은 동하쪽이었다.
 
 " 피아노, 선물했다면서요. "
 
 커튼을 열고 있던 시연은 돌아보며 쑥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 선생님이 그러셔? "
 " 예. "
 " 어릴 적 무척 갖고 싶었거든. 내가 자랄 땐, 아주 낡은 올갠 밖에 없어서 
  이담에 돈 벌면 꼭 피아노를 사오리라 결심했었어. 중고긴 하지만… "
 " …오늘, 왜 절 데려간 거죠? "
 
 시연은 동하를 올려다 보았다. 
 화내고 있는 얼굴은 아니다. 
 무표정하지만 시연에 대한 호의를 잃은 듯 보이진 않아 우선 안심했다.
 
 " …선생님이랑 아주머니 뵙기가 겁이 났어. 
  혼자서 가면, 불쌍하게 볼 것 같기도 하고, 그리고 같이 가고 싶었어. 
  사랑하는 사람은 비록 잃었지만, 이젠 가족이 생겼어요, 
  더 이상은 혼자가 아닙니다--- 하고 말하고 싶어서…. "
 " ……. "
 " 그리고, 나에 대해 알려주고두 싶었구… 너무 욕심냈지? 나. "
 
 " …알려 주세요. "
 " ……응? "
 " 알고 싶어요. "
 
 동하의 표정은 어디까지나 진지하다. 
 마주 본 두사람의 눈은, 그러나 피아노를 사이에 둔 그 때처럼 힘들게 
 부딪히진 않았다. 
 
 서로를 인정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을 뿐. 
 
 따끈한 밀크 코코아가 담긴 머그컵을 손에 들고 베란다로 나온 두사람은 
 샷시문을 열고 밖을 내다 보았다. 
 
 한길이 내려다 보인다. 
 조금 싸늘한 기운이 느껴졌지만 코코아를 마시고 있으려니,
 금새 몸이 따뜻해져 왔다.
 
 " 피아논 어디서 배웠어요? "
 " 이전에 자원봉사해 주시는 분중에 피아노과 졸업한 분이 계셨거든. 
  그분한테 올갠으로 한곡 배우고 나면 연습하고 또 연습하고 ……
  밤새 종이건반을 두드리며 되풀이 했었어. 
  생일 땐 항상 선생님이 악보 선물을 해주셨구. "
 " 정말 좋아했나 봐요. "
 " 음대 가고 싶었어. 재능은 별로 없지만... "
 " …잘 치던데요. "
 
 칭찬을 잘 못하는 성격이라 머뭇머뭇거리긴 했지만,
 동하는 진심을 담아 말했다.
 
 시연은 달콤한 코코아를 삼키며 웃었고, 그리고 고개를 흔들었다.
 실은 스스로의 재능에 대해 확인해 보기도 전에 포기했던 피아노였다. 
 
 음대에 가려면 돈이 많이 든다. 
 그 사실을 알았을 때, 시연은 음악에 대한 소망을 완전히 지워 버렸다. 
 그렇지만 가끔 레코드 가게에서 악보를 보았을 때나 악기상 진열대에 
 전시해 놓은 피아노를 볼 때, 아직도 조금은 가슴이 아파온다.
 
 가질 수 없었던 것에 대한 한숨. 
 미련…이라 불리는 것.
 
 " 마지막에 쳤던 것… 많이 들어봤어요. 쇼팽인가? "
 " 아는구나. 그래,  즉흥환상곡>. 
  처음 들은 건 12살 때였을 거야. 내가 음악을 좋아하는 걸 아니까, 
  자원봉사하시는 분이 테입을 가져다가 들려주곤 하셨거든. 
  처음 듣고… 울었어. 왜 그랬는지 지금도 잘 모르지만…
  첫 부분에선 넋을 잃고 있다가 중간에 느려지는 부분에 들어가서 말야. 
  다시 빠른 부분으로 돌아와 정신이 들어보니, 내가 울고 있더라구. 
  …우습지? "
 
 이해할 수 있다. 
 그런 경험이--- 내게도 아주 없는 것은 아니니까. 
 눈물이 흐르진 않더라도, 비슷한 감정을 느낀 적이 있으니까.
 
 실은, 오늘도 그랬었다… 
 맑은 멜로디에 취한 듯 가슴이 아려왔었다…….
 
 " 대학 들어와서는 안 쳤어. 학비 벌기만도 바빴으니까. 
  한동안 잊고 있던 그 곡을 오래간만에 처음 쳤던 그 날은 아버지와 함께 
  있던 때였어. 아버지가, 똑같은 부탁을 하셨었거든. 
  제일 좋아하는 곡을 쳐 보라고…. "
 " ……. "
 " 오늘, 그 말 들었을 때, 꼭 살아 돌아오신 것 같아서… 그래서…. "
 
 말꼬리가 점점 흐려진다. 
 동하는 시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머그잔을 든 손과 작은 어깨가 가늘게 떨리고 약간 등을 돌린 옆얼굴이 
 눈물을 감추느라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이 보인다.
 
 
 언제나 혼자서 참고 있어요, 저 여자는.
 
 그립기도 하고, 해드린 게 없단 생각에 죄송함도 느끼지만…
 지금 이 순간은 아버지가 원망스러워요.
 
 남겨 두고 갈 바엔 추억 따위 만들지 말았어야 했다구요…!
 저에게도… 저 여자에게도…
 아버진 정말 잔혹한 일을 하신 거라구요…!
 
 
 자신도 모르는 사이 시연에게 손을 뻗고 있는 자신을 알아차린 동하는 
 급하게 올린 손을 거두었고, 그리고… 주먹을 꽉 쥐었다. 
 
 자신의 감정을 제어하려는 듯한 행동. 
 
 가슴 속에 정체불명의 감정이 소용돌이쳤고, 
 그 소용돌이는 아주 깊숙한 곳에서부터 이런 소리를 끌어내 전해 와---
 입술을 깨물며 눈을 감았다.
 
 『 …안고 싶다……. 』 
   
 
  
 눈물의 다음엔 하얀 눈이 내린다…
 누군가의 마음에 오늘 밤 방울이 울린다…….
 
                       Southern All Stars/ 크리스마스 러브 
 
 
 
 20세기 마지막 크리스마스 이브엔 눈이 내렸다….
 
 길거리엔 하늘에서 떨어지는 투명한 눈꽃을 맞는 낭만을 즐기며 
 연인들이 걷고 있었고, 유리창이 있는 카페들도 눈을 감상하고자 
 자리잡고 앉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이 날만큼은 언제나 북적대던 스튜디오와 편집부도 텅 빈다. 
 아무리 촬영이 급하기로서니 크리스마스 이브에까지 스케줄을 잡진 않는 
 것이다. 편집기자들도 포토그래퍼들도 크리스마스만큼은 가족이나 연인과 
 함께 보낼 시간을 비워 두는 것이 보통. 
 
 지금 애엄마인 희경·정란 선배는 남편·아이들, 경하·수정 선배와 
 막내 난희는 각자의 남자와 함께 시간을 보내고 있을 것이고 
 태일선배는 그저께 싸웠다는 여자친구를 달래고 있을 것이다. 
 지방 출신인 동기 선미와 연주·은영·형준선배는 아마 집에 내려갔거나 
 동성친구들을 만나고 있을 거라 짐작한다. 
 
 그러나 연인은 이미 이 세상에 없고 하나 뿐인 가족은 자기 아르바이트하기 
 바쁘다면 집에서 빈둥거리기보단 편집부에 남아 원고를 쓰는 게 나을 지도 
 몰랐다.
 
 그래서 시연은 1999년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느지막히 10시 반 경부터 
 편집부에 나와, 하루종일 앞으로 있을 촬영에 대한 자료를 찾거나 
 원고를 정리하거나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그녀도 이런 날 만날 친구가 아주 없는 건 아니었지만 
 이번 크리스마스는 이상하게 누굴 만난다든가 하는 것이 전혀 내키질 않아, 
 그냥 혼자 시간을 때우기로 마음먹었던 것이다. 
 
 하지만 역시 편집부 창문으로 보이는 눈을 바라보고 있자니,
 어쩔 수 없는 외로움이 밀려온다.
 
 
 지난 크리스마스엔 그랑 함께 보냈었다… 
 정말 따뜻했어.
 눈은 내리지 않았지만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가슴이 뿌듯했던…
 그런데… 그건 언제 일이었지…?
 너무나 까마득하게 느껴져….
 
 
 ' 동하는 지금쯤 아르바이트 하느라 정신없겠구나…. '
 
 크리스마스 이브에 카페가 꽉꽉 찬다는 것은 기정 사실이므로 
 무척 바쁘게 움직이고 있을 것이 분명했다.
 
 시연도 일을 하려고 노력해 보지만, 역시 진도는 전혀 나가지 않고 
 제자리에서 겉도는 기분이 든다. 
 
 정신이 들어 보면 키보드 위에 손을 얹은 채,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을 뿐….
 
 ' 역시 관두고 집에 가야겠어. '
 
 이것저것 복사한 종이뭉치와 다운받은 자료가 들어 있는 디스켓을 
 가방에 집어 넣고 옷걸이에 걸려 있는 코트를 집으려 몸을 일으켰을 때, 
 핸드폰이 유난히 큰 소리로 울렸다. 
 아무도 없는 편집부에 혼자 있던 시연은 순간, 놀란 가슴을 쓸어 내리면서 
 플립을 열었다.
 
 [ 시연씨세요? ]
 " 아… 현우씨군요. 놀랐어요. 이 시간에 전화할 사람이 없는데…. "
 
 [ 지금 회사에 계세요? ]
 " …네. 어떻게 아셨어요? "
 [ 왠지 그럴 것 같아서요. 지독한 일벌레라고 은영누나가 그러던데…. ]
 " 달리 할 일이 없으니까 그래요. "
 
 [ 그럼, 저랑 같이 저녁식사합시다. 프랑스 요리집에 예약해 뒀는데… ]
 " 저기요… "
 [ 지금 회사 앞이거든요. 금방 내려오실 수 있죠? ]
 " …네? 아, 알았어요. "
 
 시연은 말하면서 코트를 걸치고 책상에 놓여 있던 가방을 들었다. 
 이런 식으로 뒤통수를 치는 서현우의 태도에 화가 난다기 보다는 
 좀 난감한 것이 그녀의 입장이었다. 
 
 시연은 문으로 걸어 나가면서 단단히 결심했다.
 
 ' 오늘이야말로 얘기해야지…. ' 
 
 
 크리스마스 이브엔 유난히 핫초코가 많이 팔린다.
 작년에도 그랬고 올해도 그런 것 같다.
 
 동하가 렌지 위에 올린 우유가 끓길 기다리고 있는데 막 테이블을 치운 
 연석이 컵이며 재떨이가 잔뜩 얹힌 쟁반을 서투른 솜씨로 들고 걸어왔다. 
 오늘 하루만 지원병으로 일하고 있는 것이라 역시 손에 익지 않아 
 쟁반을 들고 오는 폼이 영 위태로워 보인다.
 
 재빨리 쟁반을 넘겨 받아 싱크대 위에 놓고 다 덥혀진 우유를 
 머그컵 안에 든 코코아 가루에 부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코코아 위에 크림과 계피가루를 얹는 동하에게 
 세제를 스폰지에 묻히면서 연석이 묻는다.
 
 " 이거 쟤네가 시킨 거야? "
 " 응. "
 
 '쟤네'란 지난 번에 우연히 알게 된 모델 여자애들을 말한다. 
 
 시연과 함께 압구정 거리에서 만나 넷이서 점심 먹은 날, 
 아르바이트가는 동하를 따라와 저녁 내내 말을 붙이더니 
 이후, 이 카페에 자주 와 앉아 매상을 올려준다. 
 준구형은 물이 좋아진 것 같다며 은근히 흡족해 하는 눈치지만, 
 이쪽은 솔직히 신경이 쓰여 귀찮단 것이 동하의 솔직한 속마음이다.
 
 " 쟤네 자주 오지, 여기. "
 " 꽤. "
 " 너한테 맘있는 거 아니야? "
 " 그러는 너한테도 자주 전화온다며. 야, 이거 다 됐다. 갖다 줘. "
 " 왜 서빙은 다 나한테만 시키냐? "
 " 주방 일은 내가 훨씬 익숙해. 넌 집에서 그릇이나 닦아 봤냐? "
 
 그 말에 연석은 입으로만 궁시렁대면서 머그잔을 얹은 쟁반을 들고 
 운좋게 창가 자리를 잡은, 예의 모델 여자애들 쪽으로 향했다.
 
 " 와, 맛있겠다. "
 
 긴 머리의 마리가 생글거린다.
 
 " 이거 니가 만든 거야? "
 " 아니, 나 이런 거 못해. 동하가 한 거야. "
 " 동하는 무척 바쁜가 봐. "
 
 미은이 한손에 턱을 괸 채 주방쪽을 응시하면서 말했다.
 
 " 꽉 찬 사람들 봐. 안 바쁘게 생겼나. "
 " 좀 있다 시간 나면 걔도 좀 불러 줘. 
  이렇게 왔는데 말도 못 붙이고 감 섭섭하잖아? "
 " 알았어. "
 
 저쪽 테이블에서 사람들이 일어서는 걸 보고 
 황급히 쟁반을 들고 치우러 가는 연석을 보며 마리가 말했다.
 
 " 미은이 너, 언제까지 멀찍이서 바라만 볼거니. 찍었다며. "
 " 일단은 내 존재에 대해 신경쓰게 만들거야. 
  괜히 초반부터 설치다 바보되긴 싫어. 천천히 여율 갖고 접근할 거야. "
 " 난 연석이가 더 괜찮은 것 같은데. 키도 더 크잖니. 
  글구 동하 쟨 너무 인상이 차가워. 말도 별로 없구. 
  저런 앤 멀리서 볼 땐 좋은데 친해지면 싫증날 걸? 
  …야, 너 내 말 듣고 있는 거야? "
 
 미은의 시선은 여전히 주방을 향해 있다. 
 뒤를 돌아 친구의 시선을 쫓아간 곳에 동하가 옆얼굴을  보인 채,
 믹서에 뭔가 넣고 갈 채비를 하는 게 보인다. 
 마리는 어깨를 들어 올리며 한숨 쉬었다.
 
 " 완죠니 맛 갔구먼…. "
 
 
 ' 왠 줄담밸 이렇게 피워대는 거야.
  아무리 봐도 고딩 밑으론 안 보이는 여자들이. 
  머리가 띵해 죽겠다. 
  이런 곳에서 맨날 죽치는 동하 녀석도 대단한 놈이야. '
 
 카운터 쪽으로 걸어가는 손님들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연석은 생각했다. 
 
 재떨이엔 그 동안의 역사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꽁초들이 수북이 쌓여 있고 
 테이블 한켠에 빈 말보로 레드곽이 덩그러니 남아 있다. 
 주방으로 돌아간 연석은 바쁘게 손을 움직이는 친구를 향해,
 자신의 감상을 간단하게 읊었다.
 
 " 간접흡연만으로 질식사하겠다. "
 " 내가 담배피게 된 이유다, 임마. 
  연기 땜에 머리가 어지러울 바엔 차라리 이쪽도 피는 게 더 낫다구. "
 " 너도 그런 변명할 줄 아냐? 
  건 그렇구 너, 쟤네가  와도 전혀 안 챙겨주는 것 같다. "
 " 쟤네라 할 것도 없어. 머리 짧은 쪽이 맨날 친구 바꿔가며 오는 거지 
  긴 머리 앤 그렇게 자주 오진 않아. 이번이 네번짼가? "
 " 혹시… 너한테 관심있는 거 아냐? 저 미은이란 애. "
 
 그 말에 동하는 힐끗 저편에 앉아 수다를 떨고 있는 여자애들을 
 넘겨다 보았다. 
 뭐가 그리 재밌는지 큰 눈을 가늘게 만들며 킥킥 웃고 있는 미은의 모습이 
 눈에 들어온다. 
 솔직히 자신도 연석이 한 말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던 참이다. 
 하지만 조크로 받아 넘겼다.
 
 " 나한테 관심있는 애가 한둘이냐? "
 " …새끼. 물어본 내가 바보지. 
  하… 여기 난방 잘 안되냐. 디게 썰렁타. "
 
 친구가 씻은 컵을 집어 수건으로 닦으며 연석은 말과는 달리 
 땀이 나는 얼굴을 설레설레 젓다가, 생각난 듯 화제를 돌렸다.
 
 " 오늘 새 엄마 뭐 하신대? "
 " 몰라. 회사간다고 하는 것 같던데. "
 " 오늘두? "
 
 연석도 느낄 정도로 확실히 시연과 같이 살기 시작한 이후, 
 동하의 태도가 바뀌었다. 
 이전처럼 '새 엄마'에 대해 물어봐도 차갑게 반응하지 않는다. 
 어느 사인가 보통의 가족에 대해 말하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대꾸하고 있다. 
 
 녀석이 결국 같이 살게 되었다는 말을 담담하게 했을 때 
 내심 걱정이 되었던 게 사실이지만 의외로 별일없이 잘 지내는 것 같아 
 다행이라고 연석은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친구라 해도 가슴 속까지 들여다 볼 수는 없는 일.
 
 그 때, 동하의 감정은 연석이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잡하게 꼬여 있었다…. 
 
 
 정식 코스요리를 주문했기 때문에 한입에 들어갈 정도의 적은 양의 음식이 
 담긴 접시가 지겹도록 이어진 끝에서야 겨우 주요리인 스테이크가 나왔다. 
 
 그냥 보통 요리를 주문하려던 시연은 합심해서 코스요리를 고집하는 현우와 
 웨이터를 당해내지 못했고 그 바람에 결국 식사는 길어지고 말았다.
 
 전채… 스프… 농어와 새우의 소스요리… 식용 달팽이… 오렌지 셔벗… 
 그리고 송아지 고기로 만든 스테이크가 사우어 크림을 얹은 감자를 곁들여, 
 막 나온 참이었다. 
 
 맛은 확실히 좋았지만 자라온 환경 탓일까, 이렇게 비싼 요리를 먹는 것이 
 못내 불안한 시연이다. 
 
 그래도 동하의 아버지와 데이트할 무렵에 몇번 먹어본 경험이 있어 
 비싼 프랑스 요리가 그리 생소하지만은 않아 다행이었다.
 
 사실 시연의 취향은 이런 고급 양식보다 얼큰한 매운탕쪽이지만.
 
 " 여기 맛있죠. "
 " 그렇네요. "
 
 현우가 하는 말에 고기를 썰고 있던 시연은 끄덕였다. 
 실은 계속 기회를 찾고 있던 참이다. 
 
 음식은 반쯤 먹어치운 참이었고 더 기다릴 수 없다고 판단한 그녀는 
 이번에야말로 칼질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 저… 여쭤볼 게 있어요. "
 " 예? "
 
 고기를 우물거리던 현우가 이쪽을 쳐다본다. 
 
 어디까지나 선량하기 그지 없어 뵈는 생김새. 
 언제나 웃는 인상을 만드는, 그리 크지 않은 반달형의 눈.
 
 "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아서요… 제가 착각하는 건지 모르지만…. "
 " 제가 시연씨한테 호감을 갖고 있는가 여부 말입니까? "
 " …예? "
 
 시연은 저도 모르게 현우의 얼굴을 빤히 바라 보았다. 
 온화한 인상을 지닌 현우의 얼굴은 이 순간엔 진지하게 굳어져 있었다. 
 반달형 눈도 지금은 똑바로 시연을 응시하고 있다.
 
 " 뻔한 거 아닙니까. 호감도 가지지 않고 상대한테 전활 건다던가 
  크리스마스 이브에 불러내어 식사하자고 할 만큼 한가한 녀석 아닙니다,    
  전. "
 " 전… 결혼경력이 있어요. "
 " 알고 있습니다. "
 " ……? "
 " 은영이 누나한테 다 들었어요. 실은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맘에 있어 
  누나한테 소개시켜 달라고 졸랐더니 누나가 결혼할 상대가 있다더군요. 
  아쉽지만 그 땐 포기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혼자 아닙니까. "
 
 다 알고 있었던 것이다. 
 하긴 그런 얘기도 안하고 무턱대고 소개시킬 은영선배가 아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이건 좀 심하다고 생각한다.
 
 " 제 남편이 죽은 뒤 얼마 지난 줄 아세요? 이제 4개월 됐어요. "
 " 그래서 아무 소리 안한 겁니다. 다만 위로하고 싶었어요. 
  말은 꺼내지 않아도 일단 친구부터 되고 싶었습니다. 
  그런 다음에 시연씨에게 제 감정을 풀어 놓아도 된다고 생각했어요. "
 
 현우의 말투는 흐트러짐 없이 침착했다. 
 말할 준비를 늘 해 온 것처럼 침착하고 조리있게 천천히 이어간다. 
 당황한 것은 오히려 시연 쪽.
 
 " 그렇게 말씀하시면 제가 부담스러워요. "
 " 부담 느끼실까봐 아무 말 안했는데 먼저 얘길 꺼내려 한 건 
  시연씨 아닙니까. "
 " …미안해요. 하지만 저, 지금은 돌봐야 할 가족이 있어요. "
 
 그 말에 비로소 현우의 표정에 작은 파문이 인다.
 
 ' 이건 몰랐구나… 하긴 은영선배가 이 얘기까지 할 여윤 없었을테니…. '
 
 " 남편의 아들이에요. 그러니까… 제 아들도 되죠. "
 " 몇살인데요? "
 " 열여섯이에요. 이제 곧 열일곱이 되구요. "
 " 스물 여섯살 여자가 열 여섯 남자애의 엄마 노릇을 한다구요? 
  벌써 인생을 포기한 겁니까. 그 앤 다른 친척도 없나요? "
 " …제가 그 애 엄마가 되는 게 왜 인생을 포기하는 게 되죠? "
 " 시연씨는 아직 젊어요. 자기 애도 아닌, 그것도 다 큰 아이의 엄마가 되어 
  뒷치닥거릴 하다 늙는 거, 인생을 포기하는 게 아닙니까. "
 
 현우의 목소리가 약간 높아진다. 
 반면에 시연은 오히려 낮고 야무지게 그 말을 받았다. 
 자기 생각과 다른 말을 상대가 뱉었을 때 나오는 습관 같은 것이다.
 
 " 말씀이 좀 지나치시네요. 또 한가지, 제가 고아인 건 아세요? "
 " 예. 알아요.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
 " 아무 것도 없는 고아, 그것도  결혼경력이 있는 여자를 사귀는 거,
  집에서 뭐라 그러지 않으실까요? "
 " 누굴 사귀고 안 사귀고 하는 건 제 문젭니다. 
  부모님이 뭐라 하실 성질의 것이 아니죠. "
 
 시연은 약간 입끝을 들어 올려 미소지었다. 
 순수하면서도 현실적인 면을 버리지 못하는 상대와 그의 모순된 주장이 
 우스웠던 것이다. 
 한마디로, 앞뒤가 안 맞는다 생각했다.
 
 " 상당히 이상적인 사고방식을 갖고 계시네요. 
  그런 분이 제가 죽은 남편 아들의 엄마가 된다는 걸 왜 나쁘게 보시나요. 
  그 앤 지금 어릴 때의 저처럼 아무 것도 없어요. 
  완전히는 아니어도 저라면 그 애의 감정을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돕고 싶구요.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라면 최선을 다하고 싶어요. 
  누구보다 제 행복을 위해 하는 일이에요. "
 
 " 제가 말하고 싶은 건… "
 
 빠르게 말하던 현우는 조금 격해진 감정을 반영하듯 빛을 반사하는 
 시연의 눈을 보고서야 한 템포 낮췄다.
 
 " 그래요, 좀 지나치게 말했습니다. 사과할께요. 
  솔직히 그런 말 한건 제 이기심 때문입니다. 
  이렇게 된 거 정리해서 말할게요. 
  저, 시연씨랑 정식으로 사귀고 싶습니다. 
  시연씨 자라온 환경, 결혼 경력, 저한텐 아무 상관 없습니다. 
  물론… 강요하는 것도 아니고 급한 것도 아닙니다. 
  천천히 여유를 갖고 생각해 달라는 겁니다. 
  시연씨는 아직 젊고 나이에 맞는 행복을 누릴 권리가 있다는 걸 
  말씀드리고 싶어요. "
 " 저--- 현우씨. "
 
 상황이 의도한 것과 다르게 나가자 할 말을 떠올리려 애쓰는 여자완 달리 
 현우는 어떤 공격을 받아도 말을 잃지 않고 자기 페이스를 유지한다. 
 일견 온순하게만 보이는 그가 왜 정확함을 생명으로 하는 회계사 일을 하게 
 되었는지 이 순간 알 것도 같다. 
 
 뭣보다 이런 식으로 나오면 거절하기가 불가능하단 말이다.
 
 " 급한 거 아니니까, 천천히 생각하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이렇게 친구처럼 얘기하는 것까지 싫은 건 아니시겠죠. 
  그러다가 시연씨 맘이 내키면 사귀자는 거지,
  일방적으로 제 생각만을 고집하진 않을 테니까요. "
 
 결국 크리스마스 이브의 대화는 현우의 승리로 끝난 셈이 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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