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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애(禁止愛) (3)

오늘의 쉼터 2014. 9. 25. 16:37

금지애(禁止愛) (3) 

 

   
  
 
 " 저기 마리랑--- 지난 번에 네가 이쁘다고 한, 미은인가 하는 애 아니니? "
 
 편의점에 들어가려는 시연의 팔을 은영선배가 붙들었다. 
 시연은 은영선배의 손가락이 가리킨 방향으로 눈을 옮겼다. 
 때마침 자신을 부르는 소리도 들렸기 때문에 
 그것은 아주 자연스러운 반응처럼 느껴졌다. 
 
 " 시연언니! "
 
 그러나 그 다음 동작은 어딘가 부자연스럽게 진행되었다. 
 시연의 눈이 멈춘 곳은 자신과 은영선배를 부른 두 소녀, 
 마리와 미은이 아니라 그 앞쪽에 서 있는 소년의 얼굴이었다. 
 
 가무스름한 얼굴이지만 결코 촌스럽다거나  경박하게 보이지 않는 깨끗한 
 인상. 노려 보면 절대 대항할 수 없을 것 같은, 의지가 강해 보이는 
 그의 눈도 지금은 시연을 향한 채 약간 놀란 듯 크게 뜨여져 있다.
 
 " 시연아…? "
 
 은영은 시연을 보고 이어, 그녀의 시선이 멈춘 곳을 보았다. 
 짧은 동안이었지만 은영은 시연이 말을 하기도 전에 알아 차렸다. 
 시연의 입으로부터 두글자의 이름이 흘러 나오기도 전에.
 
 " 동하…? "


 " 아, 쟤가 그… "
 
 시연의 얼굴은 긴장으로 굳어 있었다. 
 은영은 그런 시연이 안스럽게 느껴졌지만 이 경우, 자신이 해 줄 수 있는 
 일은 뒤에서부터 이쪽으로 다가오는 마리와 미은을 데리고 먼저 자리를 
 피해주는 것뿐이다.
 
 " 시연아. 그럼 내가 얘네 데리고 편의점에서 먹을 것 사갈테니까, 
  천천히 얘기하고 와. 
  …마리구나. 그리고 니가 미은이구. 회사에 놀러 온 거지? 
  잠깐  바이더웨이 들렀다 가자. "
 
 모델들이 은영의 계속되는 말에 얼떨떨한 표정을 짓다가 시연에게 제대로 
 인사도 하지 못한 채 은영에게 끌려 편의점으로 들어가고 있는 동안, 
 연석도 동하의 어깨를 툭 치더니 아무 말도 않고, 눈으로만 만화가게에 
 가 있겠다는 신호를 보냈다. 
 
 동하는 고개를 끄덕하고 시연이 서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시연도 이쪽으로 오고 있었다. 
 두사람의 거리가 금새 좁혀졌다.
 
 " 오래간만이네? 어떻게 알고 왔어, 여긴? "
 
 동하 앞에 서 있는 시연이 웃었다. 
 기쁜 표정이다. 
 수줍으면서도 기쁜 표정…
 
 ' 일주일 전에도 저렇게 웃는 것을 봤었다…. '
 
 그리고, 그 옆에는 젊은 남자가 있었다. 
 정말이지--- 빠르다고  생각했다. 
 그럴 줄은 알았지만 이토록 빨리--- 
 
 정말, 대단하다. 
 얼굴값하는 건가.
 
 " 아버지 회사도 여긴걸요. "


 " 아--- 그렇구나… 그런데…? "


 " 돌려드릴 게 있어서 왔어요. "
 
 동하의 음성은 다시금 건조해졌다. 
 얼굴을 보고 나니 자신이 얼마나 이 여자를 싫어하는가 
 새삼스럽게 실감할 수 있다.
 
 " 돌려줄 거라니…? "


 " ……. "
 
 동하는 대답하지 않은 채 배낭에서 흰 봉투를 꺼냈다.
 
 " 지난번에 놓고 간 돈이에요. "


 " 아, 저… 이건 말야… "


 " 쓸데없는 일을 하셨더라구요.  
제 방은 치워봤자 사흘이면 도로아미타불이라는 거

말씀드렸어야 했는데… 
그리고 용돈 정돈 저도 버니까,

괜찮아요.

아버지 유산 관리하면서 
부산 고모님이 돈 부쳐주시기도 하고, 저도 돈 많아요. 
당신 돈까지 받을 필욘 없어요. 그러니까, 이런 짓 하지 마세요. 
그 말씀 드리려고 왔어요. "
 
 마지막 말에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동하는 몸을 돌려 아까 연석이 들어간 만화가게로 가려 했다. 
 
 빨리 이곳을 벗어나고 싶단 생각이 들었다. 
 빨리 연석을 데리고 저 여자의 눈앞에서 사라지고 싶다.
 
 시연은 봉투를 손에 쥔 채 더듬거렸다.
 
 " 저… 동… "


 " 참, "
 
 걸어가던 소년이 뒤를 돌아 다시 그녀를 쳐다 보았다. 
 입가에 조소가 담겨 있다. 
 그 조소가 동하 특유의 날카로운 눈과 합쳐지자 이제까지보다 더욱
 압도적으로 보였다.
 
 " 전 미역국 안 먹어요. 감자 사라다도 싫어하구요. "
 
 그리고, 시연은 멍하니 선 자세로 그 자리에 남겨졌다. 
 일심동체의 친구는 천사람의 친척보다 낫다.
 
                          에우리피데스/ 오레스테스
 
 
  새벽 6시. 
 연이은 철야 끝에 마침내 마감이 끝났다.
 
 " 후우… "
 
 시연은 택시를 잡아 타고 집으로 향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눈은 모래라도 뿌린 것처럼 따갑고 
 온몸의 기운이 다 빠져나간 것처럼 정신이 몽롱했다. 
 하지만 잠은 오지 않는다. 
 
 6시인데, 아직도 어둑어둑한 광경이 눈에 들어왔다.
 
 이제 조금 지나면 정말로 겨울이 오겠구나.
 적막한 겨울, 언제나와 마찬가지로 완전히 혼자인 겨울이.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그랬는데… 
 조금 열린 윈도우 틈새로 침입하는 아침 공기가 이토록 차게 느껴지는 건,
 다시 벌어지기 시작한 상처 때문일까. 
 아니면, 끊임없이 리플레이되는 선명한 머릿 속 영상 때문일까.
 
 - 전 미역국 안 먹어요. 감자 사라다도 싫어하구요.
 
 그 말을 할 때의 동하의 얼굴… 조소가 어린 표정… 잊을 수가 없다.
 
 그 날, 멍하니 서 있는

그녀의 눈에 만화가게가 있는 건물에서 다시 나오는  동하와 연석이 보였다. 
 연석은 조금 당황한 표정을 하고 그녀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지만 
 정작 동하는 이쪽으로 시선도 주지 않았다. 
 그리고 그대로 그녀를 놓아둔 채, 지하철 역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 버렸다. 
 발이 땅에 붙은 것처럼 꼼짝하지 못한 채 서 있는 그녀를 
 그 자리에 놓아둔 채로…….
 
 그렇게, 그렇게, 내가 싫으니…?
 내가 해주는 모든 것이 그토록 끔찍히도 싫은 거니…?
 
 땅으로 끌려 들어갈 것처럼 몸이 무겁다.
 먹은 것도 없는데 체한 것처럼 가슴이 답답해 온다.
 그리고--- 몸이 차다.
 
 마감을 하는 도중에도 몇번이나 연석이 가르쳐 준 핸드폰 번호로 
 동하에게 전화를 했었다. 
 그러나 언제나 들리는 것은 다음과 같은 소리 뿐.
 
 [ 연결되지 않습니다. 메시지를 남겨 주십시오. ] 
 
  낮에는 거의 꺼놓고 삐삐처럼만 이용하는 것 같아요.
 
 연석이 한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아니, 밤에 걸어도 언제나 마찬가지.
 
 이렇게 되면 안돼.
 이런 건 싫어.
 이래선---
 
 " 아가씨, 괜찮아요? "
 
 운전수 아저씨가 조수석에 앉은 시연을 힐끗 쳐다 보며 걱정스레 물었다. 
 시연은 자신이 좌석에 등을 기댄 자세로 계속 식은 땀을 흘리고 있단 
 사실을 깨달았다. 
 이런 식으로 나가다간 계속 마음에 짐을 지닌 채 매일을 보내게 될 지도 
 모른단 생각이 스쳤다. 
 
 마음을 좀 먹는 이 고민의 원인부터 없애지 않으면 안된다. 
 가슴이 타들어 가는 것처럼 답답하다. 
 움직이지 않는 자신이, 싫다.
 
 그래, 지금 가면 만날 수 있을 거야. 
 잠시라도 얘기를 해야겠어. 
 지금이 아니면 안될 지도 몰라--- 
 아니, 안돼.
 
 시연은 몸을 일으켜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리고 운전기사를 쳐다보며 또렷하게 말했다.
 
 " 아저씨, 죄송한데요… 다른 곳으로 가 주실 수 있으세요? " 
 
 동하의 원룸이 있는 건물 사무실 아저씨는 상당히 부지런한 성격인 것 
 같았다. 
 아직 7시가 채 안되었는데도 원룸 건물 바깥쪽에 죽 늘어서 있는 화분들에 
 물을 주고 있다.
 
 ' 후… 너무 일찍 왔나? 어쩌지? '
 
 머뭇거리며 건물 앞에 서 있는 시연을 아저씨가 알아차릴 때까지는 
 약간의 시간이 소요되었다. 
 마침내 고개를 돌리고 시연을 알아차린 아저씨가 물뿌리개를 손에 든 채, 
 지극히 정중한 목소리로 물었다.
 
 " …무슨 일이십니까. "


 " 아… 예, 저… 강동하 학생 찾아왔는데요. "


 " 203호 강동하 학생 말입니까. "


 " 네. "


 " 그 학생, 나갔는데요. "


 " 네? "
 
 순간, 피곤이며 잠이며 다 달아나 버렸다. 
 눈을 동그랗게 뜬 시연을 안경을 들어 올리며 유심히 살핀 아저씨가 
 이제 알았다는 듯 말했다.
 
 " 아… 누군가 했더니 지난 번에 왔던 아가씨구먼. 
  그 때 동하 학생 친구랑 같이 왔던… "


 " 예. 그런데, 저… 나갔다니요? 전세기간이 다 됐나요? "
 
 그럴 리 없을 텐데… 눈앞이 아득하게 느껴졌다. 
 
 " 몰랐어요? 우리 원룸은 전세 아니고 월세에요. 
  지난 달부터 나가겠다고 말했구, 입주하고 싶어하는 사람이 마침 있길래 
  방 비워달라구 했죠. "


 " 저기… 어디로 옮겼는지는 모르시구요? "


 " 글쎄… 누가 그런 걸 말하구 가나… 
  참, 아가씨 그 때 누나…라고 하지 않았나? 
  동하 학생이 방 옮긴단 말 안했어요? 누나 맞아요? "
 
 아저씨는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듯, 시연의 아래 위를 죽 훑어 보았다. 
 다른 때 같으면 창피하기도 하고 해서 뭔가 변명이나 그럴 듯한 거짓말을 
 했을 테지만 지금의 시연의 머릿 속은 완전히 백지 상태였다. 
 아무 생각도 나지 않고, 아무 말도 할 수 없이 그저 멍하기만 한…
 
 이건… 너무해…! 
 
 마음을 추스릴 사이도 없이 다시 한달이 시작되었다.
 
 시연은 기획안을 내고, 그에 따른 기사 배당을 받고, 스튜디오에 팩스를 
 보내서 촬영 스케줄을 잡고, 패션이나 뷰티칼럼에 쓸 모델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자료실과 인터넷을 뒤지면서 칼럼에 필요한 정보들을 찾고, 
 인터뷰할 연예인 매니저들에게 전화를 넣고, 그리고 촬영을 시작했다.
 
 물론 그 동안에도 동하의 핸드폰에 계속해서 메시지를 남겼다.
 
 " 할 얘기가 있는데 한번 만났으면 좋겠어. 연락 부탁할께. "
 
 물론 전화는, 단 한번도… 오지 않았다. 
 시연은 서서히 지치기 시작했다. 
 그러나 자신도 놀랄 정도의 끈기를 발휘하여 하루 한번은 메시지를 남겼고, 
 아무 연락도 받을 수 없는 허무함은 일로 풀려고 했다.
 
 그 달, 시연은 정말 무지막지하게 일했다. 
 거의 일을 찾아 했다는 표현이 옳을 것이다. 
 
 패션촬영 전날이면 괜히 코디네이터와 함께 새벽 동대문시장을 누비며 
 같이 옷을 빌렸고, 혼자서는 도저히 소화불가능한 복잡한 성질의 기사가 
 있어도 일체 프리랜서의 도움을 빌리지 않았다. 
 연예인 인터뷰를 위해서 전화도 않은 채, 아예 에이전시에 찾아가 
 스케줄을 잡기도 했다. 
 촬영이 없는 날은 회사에 남아 컴퓨터 자판을 두들겨 댔다. 
 통 식욕이 없었기 때문에, 아침에 출근하면서 사온 샌드위치로 
 점심저녁을 때우는 일이 허다했다.
 
 …시연은 눈에 띄게 말라가고 있었다.
 
 마감이 임박한 어느 날 아침, 시연은 출근하기 위해 옷을 입다가 
 갑자기 어떤 사실을 알아 차렸다.
 
 ' 지난달… 이번달… '
 
 놀라, 방에 걸려 있는 달력을 보았다.
 
 ' 안 했어… '
 
 늘 칼처럼 일정한 주기로 찾아오던 '그 날'이 결혼한 이후, 
 한번도 찾아오지 않은 것이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 설마…? '
 
 시연은 동작을 멈춘 채 얼굴을 찌푸렸다. 
 그럴 리가… 하고 생각하면서도 그녀는 일단 그 날 퇴근하는 길에 
 집 근처 상가의 약국에 들렀다. 
 
 앉아 있던 약사 아주머니가 보고 있던 책을 내려 놓고 일어섰다.
 
 " 뭐 찾으세요? "


 " 저어… 임신진단하는… "


 " 아, 유 테스트 말씀이시죠? "


 " 네. "


 " 6천 5백원입니다. "
 
 아주머니는 아무렇지도 않게 약 봉투에 담은 임신진단약을 건네 주었다. 
 약 봉투를 받아쥔 자신의 손이 조금 떨리는 걸 깨닫고 
 시연은 스스로도 놀랐다.
 
 정말 속썩이는 것도 가지가지구나…
 
 ' 아침의 첫번째…로 해야 진단의 정확도가 가장 크다…고? '
 
 다음날 아침, 일어나자마자 시연은 화장실로 들어갔다. 
 사실은 긴장했는지, 어젯밤에 한숨도 자지 못했다.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해야 한다고 설명서에 씌어 있어 
 할 수 없이 기다렸던 것이다. 
 고민한다고 별다르게 달라질 것도 없는데, 괜스레 예민한 자신이 
 한심해 보였다.
 
 어쨌든 가장 중요한 것은 플러스 표시면 임신, 마이너스 표시면 
 임신이 아니란 것이다. 
 설명서에 씌어진 대로 따라 한 후에 3분 정도의 시간을 기다려야 
 결과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기다리는 시간이 정말이지 너무나 길게 느껴진다. 
 변기뚜껑을 내리고 그 위에 앉아서 뚫어지게 진단기를 보고 있는 
 자신의 얼굴이 전에 없이 진지하다고 생각한 시연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면서 
 이마를 짚었다.
 
 ' 후… 난 뭘 기대하고 있는 걸까…? '
 
 마이너스 표시? 
 아니면--- 
 플러스 표시…? 
 
 
 누구를 위해선지 모르겠지만 아침 자율학습 시간이 끝나는 종이 울렸다.
 
 " 연석아, 농구 안 때리냐? "


 " 어, 먼저 나가 하고 있어. "


 " 자식, 쉬는 시간 끝나버린다. "
 
 주변 녀석들이 20분이란 짧은 시간동안 담배를 태우러,

또는 농구를 하러, 
 또는 매점이나 식당으로 부산히 흩어지고 있는 동안,

 연석은 책상 위에 널부러진 샤프며 볼펜 등을 필통 안에 대충 쓸어 넣고 나서

 깍지낀 팔을 앞으로 뻗어 늘어지게 기지개를 켰다.
 
 " 내놔 봐. "


 " 우씨, 나도 아직 다 못 봤단 말야. "


 " 대체 한권을 자율학습 내내 붙들고도 모자라냐. 대충 보구 빨랑 넘겨. "
 
 옆에 앉은 현철과 지우가 뭔진 모르지만서도 책 한권을 놓고 실랑이질을 
 벌이는 모습에 연석은 피식 웃었다. 
 
 보나마나  레몬 엔젤 비스무리한 포르노 만화임에 분명하다. 
 번역이 되어 나온 것도 아니고 일본 원판을 어디서 입수했는지, 
 일주일에 한 종류씩 구해다가 눈에 핏발이 선 채 보고 있는 걸 
 한두번 본 것도 아니다. 
 독어를 제2외국어로 선택하는 학교에 다니면서 일어라곤,
 '아리가또 고자이마스'랑 '사요나라' 정도 밖에 모르는 놈들이 말이다.
 
 뭐, 오버로드되는 성적욕구 충족이라든지, 
 미래를 위한 예비지식 확보차원이라면 그것도 나쁠 것 없겠지만… 
 정작 근처 여고애들이 지나가면 바스트가 어느 정도인지 상상하면서 
 힐끗거리며 보는데 그치는, 지극히 건전한 쑥맥들인 것이다.
 
 연석도 녀석들이 보고 있는 걸 한두번 뺏아서 본 적도 있지만 
 결국 모두 같은 내용… 엄밀히 말하면 내용 따윈 필요가 없는 걸 
 알게 되었을 따름이다. 
 그럴 바엔 실제 남녀를 찍은 동영상이 더 나을 것 같은데, 
 녀석들이 '그건 그런 게 아니다, 넌 아직 뭘 모른다. 알고 보면 내용이 있다' 
 라면서 매니아답게 말도 안되는 언변을 늘어놓는 데는 웃을 수 밖에 없었다.
 
 연석은 고개를 빼서 동하가 뭘 하는지 살폈다. 
 지금 보이는 것처럼 다이어리에 뭔가 적고 있는 동하의 모습을 
 연석은 자주 발견하곤 한다. 
 실은 그게 돈 나가고 들어오는 것에 관해 정리하는 거라는 걸, 
 최근 들어서야 알았다.
 
 ' 자식, 나와 살기 시작한 이후로, 은근히 쫀쫀해졌어… '
 
 동하가 어떤 생활을 하고 있는지 눈칫밥으로 대충 알고 있는 연석의 마음은 
 그리 편할 수가 없었다. 
 전에 지내던 원룸을 나와 어디서 살고 있는지 알고 나선 더욱 그랬다.
 
 ' 바보 녀석. 그러게 같이 살면 이래저래 편할 걸… 
  도대체가 고1 밖에 안된게 팔순노인보다 더 똥고집이란 말야. '
 
 연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으며 동하의 자리로 갔다. 
 친구가 오는 걸 알아차린 동하가 뭔가 보던 것을 다이어리 속으로 
 스윽 끼워 넣는 것을, 연석은 순간적으로 알아 차렸다. 
 쪽지인지 사진인지, 뭔진 잘 알 수 없었지만 종이인 것 같았다.
 
 동하가 자연스럽게 보이려는 게 다 읽히는 미소를 어색하게 흘리며 말했다.
 
 " 어, 나갈까. "


 " 골대는 벌써 점령당한 것 같은데. "
 
 창 밖을 내다보며 연석이 대꾸했다.
 
 " 진작 나갔어야 했는데. 그나저나, 나 핸드폰 번호 바꿨다. 적을래? "


 " 아, 여기 적어줄래? 나 한대만 피고 올께. "


 " 강동하, 너… 요즘 흡연량이 부쩍 는 것 같다? "


 " 한갑도 안돼. 오다 커피 뽑아다 줄까? 금방 올게. "


 " 그래. "
 
 연석은 아예 담배를 피우지 않지만, 동하도 골초라고 말할 수준은 못된다. 
 그러던 것이 요즘 들어 확실히 담배 자판기로 향하는 횟수가 늘었다. 
 그게 전에 살던 원룸에서 이사한 후부터라는 것을 연석은 알고 있다. 
 
 연석은 문쪽으로 걸어가는 동하의 뒷모습을 보다가 휴대폰 전화번호를 
 적으려 동하가 아까까지 들여다 보던 다이어리의 뒷부분을 펼쳤다. 
 
 그 때, 뭔가가 팔랑거리며 책상 밑으로 떨어졌다. 
 연석은 허리를 굽혀 떨어진 것을 집어 들었다.
 
 ' 명함이잖아…? '
 
 OO일보 출판법인
 편집기자 이시연
 TEL : 02-360-6XXX
 FAX : 02-360-6XXX~X
 H.P : 011-495-XXXX
 
 ' 녀석, 뭐야… 이런 것도 갖고 있었으면서…. '
 
 가만히 명함을 들여다 보던 눈이 뭘 생각했는지 빛났다. 
 
 연석은 책상 위에 펼쳐 놓은 동하의 다이어리에서 종이 한장을 뜯어 
 그 위에 빠른 동작으로 명함에 적혀 있는 전화번호를 옮겨 적기 시작했다. 
 
 
 강동하(姜冬夏·Kang Dong Ha)
 
 시연의 죽은 남편의 아들이며 시연과는 10살 차이인 고교 1년생.
 현재 원룸에 혼자 살면서, 방과후에는 아르바이트를 하는 바쁜 생활을 
하고 있다. 독립심과 자존심이 강한 성격.
 
 시연을 그리 좋게 생각하지 않으면서도 은근히 의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읽은 분들이라면 다 아실 것. 얌전한 성격이지만 의외의 취미를 갖고 있다. 
 앞으로 알게 되시겠지만---
 
 
 ● DATA ●
 
 나이(Age) : 16(고1)
 생일(Birthday) : 1.4·염소자리(Capricorn)
 혈액형(Blood Type) : AB형
 키(Height) : 175cm(이야기 초반 기준. 나중에 좀 더 자랍니다)
 몸무게(Weight) : 61~3kg(추정) 
  
 
그 자리에,
 누군가 서 있는 게 느껴졌다…
 
 절대,
 뒤돌아보지 않으려 했는데…
 멈추지 않고,
 그대로 걸어가려 했는데…
 
 보지 않아도,
 눈빛이 보이고…
 말걸지 않아도,
 목소리가 들려서…
 
 …그래서……. 
 
 다시 새로운 마감이 끝나가고 있었다.
 
 이미 다른 기자들은 모두 대지(기사와 사진, 일러스트 등을 합쳐서 
 매킨토시로 편집한 것)를 전부 마무리짓고 퇴근한 참이었지만 
 은영과 시연은 아직도 회사에 남아 있었다. 
 이번 달의 마감 교정조였기 때문이다. 
 
  교정조>가 하는 일이란 인쇄돼 나온 기사의 마지막 오탈자, 
 사진이 제대로 나왔는가, 인쇄상태 등을 체크하는 것인데 매달 2명씩 
 한조를 이루어 돌아가면서 마감 마지막까지 남아서 하게 되어 있다. 
 이번 달에는 은영과 시연이 마지막까지 남게 되었다.
 
 " 아후우… 더 이상은 못 버티겠다. "


 " 그래. 얘들아, 나랑 한차장이랑 사우나 가서 한잠 자고 올게. 
  니들한테 편집부 맡기고 가두 되겠지? "
 
 연속 철야의 끝에 드디어 한차장이 이마를 감싸쥐며 죽는 소리를 한데 이어, 
 이국장이 일어서며 말을 던졌다. 
 
 은영이 대답했다.
 
 " 예, 걱정마세요… 흐흐흠! "
 
 가능한 한 명랑하게 내려고 한 것 같은데,

목이 쉬어 있어 더 불쌍하고 피곤하게 들리는 음성이다. 
 애써 목을 가다듬는 은영을 보며,

시연은 금방이라도 눈알이 빠질 것 같은 
 눈 언저리를 손가락으로 쿡쿡 누르며 피식 웃었다.
 
 " 저, 교정지 왔는데요. "
 
 데스크 두사람이 나가기가 무섭게 인쇄소에서 사람이 왔다.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맨들맨들하게 인쇄된 종이 한뭉텅이를 들고 있다. 
 
 보기만 해도 숨이 턱 막히는 종이뭉치들.
 
 " 255부터 4페이지. "


 " 255, 256, 257, 258. "
 
 표를 보아가며 빨간 매직으로 페이지수를 표시.
 
 " 선배, 이거 (글자) 급수가 이상하죠. "


 " 그렇네. 휴우… 이건 왜 같은 사진이 두개나 있냐. "
 
 페이지 체크가 끝나면 뚫어져라 보며 오탈자나 기타 편집·인쇄상태를 확인.
 
 " 끝난 것 같죠? "


 " 그렇긴 한데, 이놈의 교정진 죽어라 체크해도, 
  책 나온 뒤에 보면 꼭 잘못된 게 남아 있대니까. 
  (인쇄소) 오빠! 이거 끝났어요~ 가져 가세요~ "
 
 은영이 체크가 끝난 교정지 뭉치를 흔들며,

의자에 앉아 졸고 있는 인쇄소 사람을 불렀다. 
 
 시연이 힘이 빠진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체크한 것들만 제대로 나와도 문제 없을텐데. "


 " 그러게. 근데 말야, 시연이 너… "
 
 은영이 추궁하는 듯한 표정으로 쳐다 보자 시연은 좀 놀란 듯, 
 얼떨떨하게 대꾸했다. 
 은영선배의 입에서 '시연이 너…' 라는 말이 나오면 
 항상 정수리 끝을 찌르는 대사가 이어지기 때문이다.
 
 " ---예? "


 " 체중이 좀 줄지 않았니? "


 " 안 재봐서 모르겠는데요? 살이 빠져 보여요? "


 " 그래. 너, 밥 잘 챙겨먹고 다니니? "


 " 그냥--- 대충요. "

 " 빵 같은 거 먹고 다니는 거 아니니? "


 " ---촬영나갈 때는 사진부 선배들이랑 같이 제대로 먹어요. "


 " 그거야 당연하구. 혼자 있을 때, 아침이나 저녁 말야. "


 " ……. "


 " 언뜻 봐도 몸이 많이 상한 것처럼 보여. "
 
 책상 앞에 팔꿈치를 대고 한손에 옆얼굴을 기댄 채 옆눈으로 
 시연을 응시하는 은영선배의 표정이 날카롭다.
 
 " …선배. "


 " 응? "


 " 나… 석달간 생리가 없어요. "


 " …뭐? "
 
 은영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 그게 뭔 소리야, 너! 결혼하고서 한번도…? "
 
 시연이 고개로만 끄덕했다.
 
 " 너… 설마…?! "
 
 파랗게 질린 은영에게 시연이 고개를 저으며 낮게 대꾸했다.
 
 " 약국에서 테스트 사서 진단해 봤어요. "


 " 그랬더니, 아닌 걸루 나왔어? "


 " 예. "


 " 휘유우… 다행이다.

심장 날라가는 줄 알았잖어.  
다신 그렇게 사람 놀래키지 마라. "
 
 은영은 가슴에 손을 얹으며 숨을 내쉬다가 이상한 느낌이 들어 
 시연 쪽으로 시선을 돌렸다. 
 시연은 이마에 주먹 쥔 손등을 댄 채, 고개를 수그린 상태였다. 
 그 모습을 본 은영의 목소리도 다시금 줄어든다.
 
 " 왜… 그래? 문제없는 거잖어. 아님, 다른 고민있니? "


 " 나 말예요, 선배… "
 
 시연이 고개를 들어 아주 조그맣게 미소지었다. 입으로만---
 
 " 조금 기대했었나봐요… "


 " ……? "


 " 이성으로는 안된다…

생각하면서두,

마음 깊은 곳에선 아기를 원하고  있었나 봐요…

그렇게라도,

그와의 실을 끊고 싶지 않았나 봐요…  
 바보처럼……

임신이 아니란 사실,

알았을 때 가슴을 쓸어내리면서도 한편으론 마음이 왠지 모르게…

허전하구 허전해서……. "
 
 은영은 할 말을 잃었다. 
 뭔가 말을 찾으려는 듯 얼굴을 손바닥으로 몇번 문지른 그녀는 
 차분한 목소리로 물었다.
 
 " 그--- 동하란 애가,

너한테 뭐라 그랬니? 편의점 앞에서 봤던 날 말야. "


 " 으응… 아니요. "
 
 시연은 고개를 저었다.
 
 " 그치만… 절 귀찮아 하는 건 확실해요. 
  벽을 두른 채, 시선도 주지 않아요. "


 " 그럼 너도 상대하지 마. 오는 정이 있어야 가는 정도 있지. "


 " 그게요, 그렇게 생각처럼 쉽지가 않아요. 
  누가 뭐래도, 그 앤 제 남편의 아들인 걸요. 
  제가 그에 대한 기억을 현실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인걸요… "
 
 시연은 책상 위에 엎드렸다. 
 머리를 손으로 쓸어주고 있는 은영의 눈에 눈물이 고이기 시작한다.
 
 " 으이구--- 이 바보야…. 
  넌, 정말이지 스물 여섯씩이나 된 애가 어찌 그리 미련하니. 
  내 속이 다 터질려 그런다. 좀 쉽게 사는 방법을 찾아 봐… 응…? "
 
 은영은 손을 들어 눈가를 쓱 훔치며 일어섰다.
 
 " …배고프지 않니? 내가 먹을 것 좀 사 올게. 
  너 맨날 먹는 쥬스랑… 아니, 그냥 알아서 사올게, 기다려. "
 
 은영이 허둥지둥 지갑을 들고 나간 후에도, 
 시연은 한 자세로 가만히 엎드려 있었다. 
 
 꼼짝할 수가 없다. 
 눈물은 나오지 않았다. 
 힘이 너무 없기 때문일까.
 
 바보, 지친 거야?
 이 정도로… 지친 거야?
 벌써, 포기한 거야…?
 
 째깍 째깍 째깍…
 
 시간이 조용히 흘러갔다.
 
 시연이 마침내 천근같이 느껴지는 몸을 일으킨 그 때, 
 마침 고요한 공기를 뚫고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들렸다. 
 그녀는 막혀 있던 목소리를 가다듬으며 책상 위에 놓여 있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 여보세요? "


 [ 저… 이시연 기자님 핸드폰입니까. ]


 " 네, 이시연입니다. "


 [ 저… 기억하실런지 모르겠는데요, 동하 친구인 진연석이라고 합니다. ]


 " 아, 예. 저, 동하, 지금 어디 있어요?! "
 
 놀라고 반가와서 방금까지 처져 있던 사실조차 잊었다. 
 저절로 소리가 높아진다.
 
 [ 실은 그것 땜에 전화 드렸어요. 
  제가 전화한 거 알면 그 녀석, 화낼 지도 몰라요. 
  하지만 아셔야 할 것 같아서… 연락도 않고 이사가서 황당하셨죠? ]


 " 지금 어딨는지 알아요? "
 
 전화 너머로 연석이 망설이는 것이 보이는 것 같았다.
 
 [ 아르바이트하는 카페 주인형이랑 같이 살아요. ]


 " 어떤 곳이에요, 거긴? "


 [ 작은 평수의 아파튼데 전에 살던 원룸보단 적은 돈을 내고 있는 것 같아요. ]


 " 살긴 편하대요? "


 [ 특별히 불편한 건 없다고 그러는데요---
  문젠 같이 사는 형이 아파트로 여자를 자주 끌어들이는 것 같아요. ]


 " ---네? "


 [ 물론 각방 쓴다지만 그래도, 제 생각엔 좀 안 좋다구 생각돼서--- 
  그래서 연락드린 거에요. ]
 
 시연의 머릿 속에 여러 생각이 뒤섞이기 시작했다. 
 그 생각을 하나로 접어버린 그녀는 전화에 대고 행여 연석이 듣지 못할까 
 한마디 한마디 힘을 주어 말했다.
 
 " 오늘 마감 끝나는데, 저녁에 만날 수 있어요? 만나서 얘기해요. " 
 
 
 사람들이 도미노가 된 것처럼 열린 문을 통해 밀려 들어왔다. 
 그러잖아도 텁텁한 전철 안 공기가 더욱 탁해지려 한다. 
 
 방금 들어온 아줌마 중 한명이 거의 순간이동을 방불케 하는 속도로 
 시연 앞의 빈 자리로 슬라이딩했다. 
 앉을 생각은 처음부터 없었지만 훨씬 나이들어 보이는 할머니가 
 어정쩡한 위치에 서 계시는 걸 본 시연에게는 앞에 앉은 아줌마의 얼굴이 
 그리 기분좋게 보이진 않는다. 
 
 처음 탔을 때부터 몸이 힘들었다. 
 문 고리에 매달리다시피 서 있으려니 얼굴을 타고 땀이 흘러내리는 것이 
 느껴진다. 
 
 ---에너지가 고갈된 것 같은 느낌.
 
 회사에서 바로 연석을 만날 장소로 가는 중이다.
 실은 어제부터 한숨도 자지 못해설까, 영 몸이 좋지 않다. 
 하지만 만나서 이야길 들어야 한단 생각이 너무 강해서 그런 것쯤 
 대수롭지 않게 생각되었다.
 
 토요일 오후.
 이 많은 사람들은 어디로 가는 걸까. 
 어쩐지 모두들 여유로와 보인다….
 
 " 오빠, 이번 크리스마스 때 우리 뭐할래? "


 " 녀석. 아직 한달도 더 남았는데, 뭔 벌써 크리스마스? "


 " 그래두, 음… 오빠랑 나랑 첨 같이 보내는 크리스마슨 걸. "


 " …글쎄. 뭘해야 잘했단 소릴 들을까? "
 
 저편에 서 있는, 대학생으로 보이는 연인들의 대화.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소녀가 입은 흰 코트가 유난히 깨끗하고 눈부시게 
 보인다. '오빠'라 불린 남자의 얼굴 가득 미소가 올라 와 있다. 
 거의 몸을 기대듯이 꼭 붙어 선 그들의 모습을 보니 힘든 속에서도 
 조금쯤 부럽다는 생각이 먼저 떠오른다. 
 
 저런… 따뜻한 감정이나 여유로움 같은 것… 
 이젠 느낄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
 
 왜 말도 안 하고 그런 곳에 이사한 걸까.
 의논 한마디조차 하기 힘들 정도로 내가 어려운 상대인 걸까.
 그렇게… 내가 싫은 걸까.
 이럴 때,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
 방법을 찾고 싶어… 아니, 찾아야 해.
 
 오른쪽에 서 있는 여자한테서 나는 진한 향수 냄새가 코를 찌른다. 
 금방이라도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지만 얼굴을 돌린 채 애써 참았다.
 
 다리가 자꾸 떨린다. 
 몸을 곧게 세울 수가 없다.
 앞에 앉아 있는 아줌마의 얼굴이 왜 이렇게 앞뒤로 왔다갔다 하는 걸까.
 
 앞이 자꾸 흐려지려 한다. 
 가슴이 답답하다. 
 호흡이 힘들다. 
 머리가 띵한 느낌.
 
 아…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버텨야 해.
 밖에 나가면 괜찮아질테지. 
 조금만 더 버티면 괜찮을 거야.
 오늘따라 왜 이렇게 전철이 느리게 움직이는 걸까. 
 빨리 내리고 싶은데….
 
 지하철이 목적지인 역에 도착했다. 
 떠밀리다시피 내린 시연의 얼굴에 식은 땀이 끊임없이 흐르고 있었다. 
 
 휘청거리며 걷고 있는 그녀의 앞에 계단이란 장애물이 보인다. 
 몸이 말을 듣지 않는다. 
 …난간을 붙들고 벽에 기대다시피 하여 겨우겨우 올라갔다. 
 
 개표기에 전철 패스를 넣었다. 
 잘 들어가지 않는다. 
 …겨우 들어갔다.
 
 " 하아… "
 
 숨이 잘 쉬어지지 않는 느낌.
 폐 전체에 나쁜 공기만이 가득한 기분.
 
 답답해… 
 아… 왜 이런거지…?
 머리가 자꾸 흐려져… 
 몸의 신경이 풀어지는 것처럼 느껴져……
 
 흑백필름을 보는 것 같아… 
 주변 모든 것이 색을 잃었어… 명암만 느껴져…
 그리고… 바닥이 다가오고 있어… 
 눈에 보이는 면적이 자꾸만 줄고 있어…
 이대로 나… 눈이 보이지 않게 되는 걸까…?
 
 이젠…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힘들어… 죽을 것처럼……
 까만 공간이 시야를 가리고 있어……
 결코… 벗어날 수 없을 것처럼 막막한 감각…
 이젠 더 이상 빛을 볼 수 없게 되는 거… 
 …그런 걸까…? 
 무서워… 무서워… 무서워… 
 유리 문을 열고 동하가 들어서자 키득거리며 만화책을 읽고 있던 
 주인형의 눈이 일순 놀란 듯이 커졌다.
 
 " 오, 일찍 왔구나. "


 " 낼 휴가잖아요. 토요일이라두 일찍 나와 거들어야 맘 편히 쉬죠. "


 " 자세가 됐다. …킥. 야, 근데 이거 다시 봐도 웃긴다. "


 "  동경 캡짱>? 그거 형 얘기잖아. "


 " 뭐라고라고라? 내가 이렇게 촌티였다구? "
 
 동하가 일하는 카페 주인형의 이름은 성준구. 
 올해 20세. 
 
 1년 전까진 그도 팔팔한 고딩이었을 뿐더러 지나치게 건강해선지, 
 다니던 고교 짱으로서 그 지역 일대를 주먹으로 누비고 다녔었다. 
 아무튼 좀 컸다 싶은 싸움엔 이름이 빠지는 적이 없었으니까. 
 때문에 은퇴한 지 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성. 준. 구. 란 이름 석자는 
 자주 후배들의 입으로 회자된다고 한다. 
 그러나 그건 화려한 과거 일일 뿐, 역시 20세라는 버전업된 숫자 아래서는 
 그도 그저 앞으로 먹고 살 걱정이 앞서는 한량일 따름.
 다행히 집은 잘 살아서 돈 많은 부모님이 차려주신 카페의 명목상 
 주인으로 오픈 시간인 낮 12시부터 이곳에 와서 죽 치고 있는 것이 
 요즘 그의 하루 일과다. 
 
 집을 나와 살 아파트까지 내 주신 걸 봐선 아주 내논 자식인 것 같지만 
 카페를 떡 하니 차려주신 걸로 볼 때 부모님과의 관계를 아주 끊은 것 
 같지도 않은, 적당히 껄렁하고 귀여운 구석도 있는 사람이다. 
 
 일견 날카로운 데가 있는 동하랑은 전혀 맞지 않을 것 같은 성격인데도 
 동하가 중1때부터 줄곧 친분을 유지하고 있는 걸로 보아 뭔가 통하는 게 
 있을 법도 한데…
 
 " 어, 동하 왔구나? "
 
 준구형의 애인이자 카페에서 같이 일하는 영란이 누나가 새우깡 한박스를 
 든 채 들어왔다. 
 동하가 재빨리 누나에게서 박스를 받아 부엌 쪽으로 옮겨 놓으러 가고 
 있는데 영란 누나가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동하야, 네 점퍼 주머니에서 핸드폰 울리는 소리 나는데? "


 " 메시지로 돌려 놨으니 괜찮아요. "


 " 그럴 거면 왜 핸드폰 써? 삐삐가 낫지. "


 " 바아보. 이쪽에서 걸 수가 없잖어. 글구 누가 요즘 삐삐 쓰냐? "


 " 누구더러, 누구더러, 바보래. 또 만화책이야? 
  진짜, 너, 대학은 완전히 포기한 거야? "


 " 이씨, 왜 때려? 이건 시바, 여자친구 갈아치든지 해야지, 원… "


 " 뭐야 뭐야 뭐야? "
 
 영란 누나는 그래도 대학을 다닌다. 
 D대 C 캠퍼스. 
 미대생인데, 아무리 1학년이라지만 거의 학교를 가질 않는다. 
 
 그래도 권총박힌 적은 한번도 없다고 은근히 자랑인 이 여인의 고민은 
 고교시절부터의 애인인 준구형이 도대체 앞으로 뭐가 될지… 
 즉, 불투명한 두사람의 미래에 대한 것이다. 
 이런 고민이 폭발하여 준구형을 자주 윽박지르곤 하는데, 
 그 말투라든지 몰아 붙이는 태도를 잘 보면 미달이랑 좀 비슷하다는 것이 
 입밖으로는 낸 적이 없는, 동하 만의 생각이었다.
 
 맨날 저러면서도 오래도록 사귀는 걸 보면 천생연분 같기도 해….
 
 동하는 웃으면서 점퍼 주머니에 든 핸드폰을 꺼냈다.
 
 ' 또… 그건가…? '
 
 시연의 번호일 거란 짐작이 빗나갔다. 
 핸드폰에 찍힌 번호는 연석의 것이었다. 
 번호 끝에 '8282'라고 덧붙여져 있다.
 
 ' 뭔데, '빨리빨리'야? '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숫자를 눌렀다. 
 귀찮은 절차를 몇번 거치고 나자 다음과 같은 소리가 들린다.
 
 [ 첫번째, 메시지입니다. 
  …동하냐? 나 연석이. 미리 말해두겠는데 만일 니가 이 메시지 씹으면, 
  나랑 친구사인 끝장난 걸루 알아 둬. ]
 
 ' 뭐, 뭐야? 이 자식. '
 
 그러나, 다음 말을 듣기 시작하고나서부터 동하의 얼굴 표정은 
 점점 변해갔다. 메시지를 듣고 플립을 탁 접자마자 그는 빠른 속도로 
 점퍼를 걸치면서 말했다.
 
 " 형, 저 급한 일이 생겨서 도저히 오늘 일 못할 것 같아요. "


 " 뭐? "


 " …죄송해요. 나중에 설명드릴게요. 오늘 못한 건 월급에서 빼세요. 
  전화할게요. …누나, 가볼게요. "


 " 동하야! "
 
 유리문이 끼익 소리를 내며 열렸다 닫혔다. 
 카페 안에 남은 두사람은 멍한 표정을 지으며 얼굴을 마주 보았다.
 
 " 저 녀석… 좀 오버하는 것 같지 않아? "


 " 글쎄…? 뭔지, 진짜 급한 건가 봐… " 
 
 
 고요한 밤공기를 뚫고
 어디선가 아주 작은 멜로디가 들려
 가만히 잃어버렸던 음에 귀를 댔다.
 
 문득 올려다 본 밤하늘은
 언제나처럼 멀게 보이지 않고,
 그곳에 빛나고 있는 달은
 오래 전에 상실한 꿈을 찾아줄 것 같은,
 그런… 감각.
 
 절대 벗어나기 싫은,
 투명한 마법에 걸려 있었다…. 
  
 사람에겐 직감이랄지 예감이랄지 그런 것이 있어 
 때때로 인생의 한 부분에 작용하여 중요한 구실을 하곤 한다.
 
 연석의 직감은 오늘, 제 몫을 해냈다.
 
 병원이라 하면 보통 조용하고 소독약 냄새가 진하게 나는, 그런 싸늘함을 
 상상하게 되지만 지금 연석이 서 있는 응급실은 조금 과장해 표현하자면 
 돗대기 시장을 연상케 할 정도로 어딘가 정돈이 안된 부산함이 느껴지는 
 곳이었다.
 
 " 빈혈… 같군요. 혈압이 너무 낮은데요. 링겔을 맞고 환자 상태 봐서 
  입원할 지 결정합시다. 근데 이 아가씨, 직업이 뭐라 그랬죠? "

 " 잡지사 기자--- 라고 들었어요. "


 " 가족 아니에요? "


 " 저는 아니구요, 가족한텐 좀 아까 전화했어요. 곧 이리 올 거예요. "
 " 그럼, 링겔로 혈압부터 올려 보고 얘기하죠. "
 
 인턴 정도 나이로 밖에 보이지 않는 젊은 의사는 이것저것 검사해 본 후, 
 그렇게만 말하고 가버렸다. 응급실이라 그런지 무척 할 일이 많은 듯 하다. 
 곧 간호원이 와서 시연의 팔을 잡고 링겔 자리를 찾기 시작했다.
 
 연석은 응급실 한켠에 위치한 침대에 눈을 감은 채 누워 있는 
'친구의 새 엄마'의 얼굴을 들여다 보았다. 
 놀랄 만치 창백한 얼굴, 눈 아래 검은 그림자가 드리워진 모습이 안스럽단 
 감정 이전에 좀 생소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북적북적 소란스러움이 가득한 응급실의 현실감 속에 별개의 막을 치고 
 홀로 존재하는--- 그런 인상. 
 
 '이시연'이란 이름 외에 '친구의 새 어머니'라는, 그닥 평범하지 않은 
 설명을 달고 있지만, 실은 '누나' 정도 이상의 호칭을 부르기엔 무척 
 꺼림직한… 그래, 이 20대의 여자에겐 확실히 그런 생소함이 있다. 
 친구가 그토록 필사적으로 방패막을 치는 이유가 거기 있는지도 
 모르겠다고 연석은 생각했다. 
 
 그렇다고 해도, 그건 이 여자의 잘못은 아닐 것인데….
 
 간호원이 주사바늘을 꽂고 링겔을 조절하더니 말한다.
 
 " 이거 다 들어가면 벨 눌러 부르세요. "


 " 예. "
 
 연석이 이마를 짚으며 낮은 한숨을 쉬고 있는데 
 배낭 안에서 핸드폰이 진동하는 소리가 났다. 
 가방을 뒤져 꺼내서 커튼 밖으로 나가자마자 연 핸드폰에서,
 
 [ 지금 응급실 앞이야, 어디 있어? ]
 
 다급한 목소리가 울려 나왔다.
 
 " 기다려. "
 
 연석은 말하면서 응급실 문 앞으로 향했다.
 
 동하의 앞머리는 바람에 흐트러져 있었고 
 뛰어 온 듯 겨울이 다 된 날씨에도 이마에 땀이 송송 맺혀 있었다. 
 호흡이 흐트러진 듯 말하는 숨소리가 거칠다.
 
 " 어떻게 된 거야? "


 " 내가 묻고 싶다, 정말. "
 
 연석은 약간 친구를 쏘듯이 노려보다 몸을 돌려 시연이 누워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동하도 잠자코 연석을 따라 온다.
 
 " 의식을 잃은 상태야. "
 
 커튼 안으로 들어간 연석은 동하를 돌아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동하는 말을 잃은 듯 뚫어지게 시연을 보고 있다.
 
 " 가방 거기 두고, 잠깐 나와 봐. "
 
 연석이 침대 옆에 놓인 의자를 가리키며 말하고 커튼 밖으로 먼저 나오자 
 동하도 금새 따라 나왔다. 
 두사람은 응급실 앞에 놓인 긴 의자에 앉았다. 
 
 동하가 길게 숨을 토해내더니 묻는다.
 
 " 어디서 발견한 거야…? "


 " 오늘 만나기로 했었어. "


 " ……? "


 " 간섭이라고 핀잔들을 각오하고 연락한 거야. 너 땜에 걱정하실 것 같아서. 
  학교 근처 전철 역 앞에서 만나기로 했는데, 시간이 지나도 
  안 오시더라구. 기분이 이상해서 아래로 내려가 봤는데… 
  사람들이 웅성웅성 모여있고… 거기 바닥에… "


 " ……. "


 "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얼마나 놀랬는지. 
  정신없이 들쳐업고, 택시잡아 바로 병원으로 온 거야. 
  도착하자마자 너한테 메시지 남겼구. "


 " …미안하다. "


 " 나한테 미안할 건 없어. 건 그렇고 들어가 보자. 깨셨을 지도 몰라. "
 
 연석의 말이 맞았다. 
 두사람이 커튼을 젖히고 들어가자 시연이 얼굴을 찌푸리며

눈을 뜨는 것이 보였던 것이다.
 
 " …아… "
 
 시연은 조금 놀란 표정을 하고 누운 채 두사람을 올려다 보았다. 
 눈에 들어온 광경이 믿기지 않는다는 얼굴이다.
 
 " …저기… "


 " 쓰러지신 거예요. 기분이 좀 어떠세요. "
 
 미처 입을 떼지 못한 동하 대신에, 연석이 싹싹하게 말했다.
 
 " …후우… 꼴사나운 모습을 보였네… 이젠 괜찮아요. "
 
 연석은 시연의 눈이 줄곧 동하를 보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옆에 선 동하의 눈도 꼼짝않고 시연에게 향해 있다. 
 시연이 힘없이 미소지었다.
 
 " 동하… 아직도 나한테 화났니…? "


 " …이게 대체 어떻게 된 거예요. 나한테 사 먹는 건 몸에 안 좋다느니, 
  아침을 꼭 먹으라느니, 잔소리한 주제에… "


 " 미안… 근데, 별거 아냐. 잠깐 어지러웠을 뿐이야… "
 
 동하가 한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힘이 빠진 듯 어깨가 축 처진다. 
 긴장이 풀린 것이다.
 
 시간이 어느 정도 흐르자, 의사가 커튼을 열고 들어왔다.
 
 " 깨셨어요? "


 " 예. "


 " 어떠세요. "


 " 괜찮아요. "


 " 그닥 문제될 건 없을 것 같은데… 
  요즘 몸이 이상하다고 느낀 적 없어요? "


 " 아뇨. 그다지… 계속 철야해서 그런 것 같아요. 잠을 못 자서… "
 
 석달간 생리가 없었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 식사 제때제때 안하셨죠. "


 " 네… "
 
 의사의 추궁하는 듯한 말에 시연이 기어 들어가는 소리로 대답한다. 
 연석은 웃음이 나오려는 걸 참았다. 
 소녀처럼 얼굴을 붉히는 시연의 모습도 그렇지만 그 말을 듣고 
입술을 깨무는 동하가 정말 걱정하고 있는 것이 보였기 때문이다.
 
 ' 이럴 때 웃으면 안되는데…. '
 
 그건 연석이 안심했다는 증거이기도 했다. 
 오늘 일에 대해서도, 그리고 동하와 시연의 문제에 대해서도.
 
 "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 데다 안 먹고 안 자고… 몸이 버티질 못한 겁니다. 
  링겔 다 들어갔네요. 어디 혈압 다시 한번 재봅시다. "
 
 의사가 직접 혈압을 재더니 아까보다는 많이 나아졌군요… 하고 말한다. 
 시연이 고개를 필요 이상으로 끄덕거리며 재빨리 대답했다.
 
 " 이제 괜찮아요. "


 " 제가 봐도 입원할 필욘 없겠는데. 의료보험 있어요? "


 " 지금 안 갖고 있는데… "


 " 그럼 일단 계산하세요. 나중에 영수증이랑 의료보험 가져오시면 
  차액을 환불해 드리거든요. 그러고 나선, 퇴원하심 되겠네요. 
  물론 일단 지금은 괜찮아졌어도 가까운 시일내에 아무데서나 한번 
  건강진단 해보셔야 합니다. …가족이세요? "
 
 동하를 쳐다 보며 의사가 물었다. 
 동하가 고개를 끄덕하고 몸을 일으키려는 시연에게 평정을 되찾은, 
 여느 때의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했다.
 
 " 제가 다녀올게요. 누워 계세요. "


 " 돈… "


 " 위층에서 뽑으면 돼요. 일단 누워 계세요. "
 
 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걸어가는 친구의 뒷모습과 조금 당혹스런 감정을 
 창백한 얼굴에 드러낸 여자를 번갈아 보며, 낙관주의자인 그다운 감상을 
 떠올린 연석은 적어도, 이번 만큼은 자신의 예감을 믿고 싶었다.
 
 ' 왠지… 일이 잘 풀릴 것 같은데…? 전화위복일지도 몰라…. ' 
 
 
 『 언제쯤이면 상처를 아무 반응없이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날이 올까…? 』
 
 " 저, 가볼게요. …아, 일어나지 마세요. "
 
 침대에 방금 눕혀 놓은 여자를 향해 연석이 말했다. 
 시연은 쑥스러운 듯 일으켰던 몸을 연석이 시키는 대로 도로 눕히며 
 중얼거렸다.
 
 " 정말… 볼 면목이 없네. 고마워요…. "
 
 시연의 집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동하와 아버지가 살던 아파트이기도 하다. 
 정말이지 썰렁한 분위기라고, 연석은 들어선 그 순간부터 생각하고 있었다. 
 혼자 살기엔 물론 둘이 살기에도 조금 큰 듯한 평수의 아파트는 
 집 주인의 상황을 반영하듯 꽤나 쓸쓸하고 스팀이 들어오는 데도 추웠다.
 
 현관문 옆에 서서 엘리베이터를 기다리며 동하가 말했다.
 
 " 오늘 정말 고마웠어. "


 " 계속 여기 있을거지? "


 " …응. "
 
 자식, 힘내…! 그리고……
 
 연석은 이제 완전히 평정을 되찾은 동하의 얼굴을 응시한 그 자세로 
 엘리베이터에 탔다. 
 동하는 연석의 표정이 뭘 말하는지 금새 알았다. 
 미소지은 친구의 얼굴이 우지끈 흔들리며 아래로 내려가고 나서도, 
 그는 한 자세로 가만히 엘리베이터 앞에 선 채 한참을 생각에 잠겨 있었다.
 
 ' 그래… 내 속좁음의 결과야…. '
 
 
 저쪽도 힘든 건 마찬가지인데… 
 어쩌면 더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왜… 인정하지 못했을까. 
 힘없이 누운 모습을 보고서야 도움이 필요한 건 외려 상대일지도 
 모른다는 걸 알게 되다니.
 
 되먹지 않은 내 자존심 때문에 저쪽은 연달아 상처를 입은 거다.
 피해자인 척, 칼을 든 쪽은 바로 나였던 거야…….
 
 
 시연은 가만히 누운 채 천장을 올려다 보고 있었다. 
 힘은 하나도 남아 있지 않았지만 잠도 오지 않았다. 
 이제까지와는 다른 의미의 긴장감이, 쏟아져야 할 잠을 가로막고 있다. 
 동하는 연석을 배웅하려 나간 다음부터 한참을 보이지 않았지만 
 그녀 자신도 이쪽에서 먼저 말 걸 용기는 없다. 
 스스로도 소심하다고 생각하지만, 정말로 두려웠다. 
 
 …바보라고 조롱당해도 할 말이 없다…….
 
 눈을 감았다. 
 그러나 의식은 오히려 또렷해지기만 한다.
 
 ' 또… 화난 걸까…? '
 
 병원에서 택시를 타고 오며 거의 한마디도 하지 않은 동하였다. 
 시연의 얼굴을 보려 하지도 않은 채 열심히 창밖만 보고 있는 모습. 
 외려 앞자리 조수석에 앉은 연석이 어색한 분위기를 느꼈는지 
 몇마디 말을 걸곤 했었다.
 
 돌봐 주겠다고 말한 쪽이 이런 꼴을 보이다니… 
 얼마나 속으로 비웃고 있을까.
 …보기 흉해, 정말이지… 후…….
 
 그리고, 시연의 생각은 이상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두번째다… 쓰러진 것은.
 전에 쓰러졌을 때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그 때, 난 누군가를 지금과는 다른 방식으로 잃었었고… 
 그 상실감을 주체하지 못해, 미친 듯이 일을 찾아 다녔다. 
 그러면 왠지 구원받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후… 같은 실수를 또 해버리고 말았어….
 정말 한심해, 나란 사람은…
 언제쯤이면 상처를 아무 반응없이 나의 일부로 받아들일 날이 올까…?
 
 ' 그 상처는 정말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어째서 다시 생각이 나는 거지…? '
 
 지금은 웃으면서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해 줄 수도 있다고 자신했던… 
 첫 실연의 상처--- 어째서 이 순간, 다시 되살아나는 걸까…?
 
 시연이 이불을 끌어 당겨 얼굴까지 뒤집어 쓴 그 순간, 
 문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 자요? "


 " …아, 아니…. "
 
 그녀가 이불을 내려서 어색 그 자체인 얼굴을 들고 위를 올려다 보았다. 
 동하는 뭔가를 쟁반에 받쳐 들고 서 있는 모습이다. 
 침대 옆에 있는 탁자에 쟁반을 내려 놓으며 말했다.
 
 " 죽인데, 드실 수 있겠어요? "


 " ……. "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선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미소라곤 찾아볼 수 없는 표정이지만 말끝에 자상함이 배어있는 걸 
 느끼고 조금 놀라 동하를 올려다 보았다. 
 그녀가 빤히 올려다 보자 소년의 표정도 조금 쑥스러운 듯 굳어진다.
 
 " 드시고 싶지 않으면… 할 수 없지만요. "


 " 아, 아냐… 먹을래. "
 
 시연은 재빨리 말했다. 
 
 동하가 베개를 시연의 등 뒤에 대주고 쟁반을 들어 무릎 위에 올려 준다. 
 동작 하나하나… 낯설은 그 모습에서 눈을 뗄 수가 없다. 
 고개를 숙일 때 보이는, 살짝 내리감은 속눈썹과 쟁반을 잡은 긴 손가락. 
 
 무엇이나 아주 섬세하고… 그리고, 다정하다.
 
 ' 이쪽이… 원래 모습인지도 몰라…. '
 
 냉장고에 있던 야채를 잘게 썰어 만든 죽.
 미리 조각조각 썰어 먹기 쉽게 담아 온 열무김치. 
 솜씨도, 배려도, 이미 초심자의 것은 아니었다.
 
 ' 혼자서도 할 수 있다던 거, 빈 말이 아니었구나…. '
 
 따뜻한 죽을 목구멍으로 넘기면서 시연은 
 죽과는 다른 것이 목에 느껴지는 걸 깨달았다. 
 소년이 계속 서 있는 걸 알아차린 그녀는 앉아 하고 의자를 가리키며 
 말했다. 동하가 대답없이 의자를 조용히 끌어당겨 앉는다. 
 자신과 애써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는 걸 알아차린 시연은 
 다시 죽이 담긴 그릇으로 시선을 떨구었다.
 
 " 참, 아르바이트는…? "


 " 월급에서 빼면 돼요. 오늘 못한다고 말해 두고 왔으니까, 괜찮아요. "

 " 아… 어떡해…. "


 " 괜찮아요. 저 하나 없다고 영업 못하는 거 아니니깐. "
 
 동하의 입가에 아주 조그맣게 미소가 스친 것 같았다. 
 그건 시연의 착각인지도 모르지만… 
 계속 가슴에 감추어 두었던 대사가 튀어 나오게 만든다.
 
 " 저…. "


 " 예…? "


 " 아, 아니야…. "
 
 순간의 망설임이 용기를 앗아가 버렸다.
 
 바보…!
 
 " 맛있었어. 싹 비운 거 보이지? 그릇, 부엌에 갖다 둬야…. "


 " 제가 할께요. 이리 주세요. "


 " 저, 집에 갈… 거니? "


 " 오늘은 여기 있을게요. 걱정 말고 쉬세요. "
 
 소년의 음성에 이제까지 포함되어 있던 적대감은 어느 샌가 사라져 
 시연을 안심시키기에 충분했다. 
 
 쟁반을 들고 나가는 등을 보면서 그녀는 아주 오랜만에 '정말로' 
 미소지었지만 정작 방을 나온 동하는 방금 닫고 나온 문에 
 뭔가 생각하는 양 잠시 기대 있다가 부엌으로 움직였다. 
 
 개수대 위에 그릇을 놓고 스폰지에 세제를 적시던 그의 시선이 
 문득 옆쪽으로 향했다. 
 좁은 부엌 창문 사이로 들어온 달이 망막에 뚜렷이 비쳐 왔고, 
 그 빛은 소년의 눈을 관통하여 아래로… 아래로… 흘러 내려갔다. 
 
 빛이 아래에서부터 올라와 가슴까지 찼을 때, 
 지금까지 시야를 뿌옇게 흐리게 만들고 있던 무언가가 
 벗겨져 나간 듯한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숨을 몰아 쉬었고… 
 정신이 들었을 땐, 순도 그 자체인 결정만 가슴에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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