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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지애(禁止愛) (2)

오늘의 쉼터 2014. 9. 25. 16:36

금지애(禁止愛) (2) 

 

 
  
 
 동하에게
 
 미안해, 아무 말 안하고 멋대로 왔다가서.
 연석이에게 화내지 말았으면 해.
 학교 앞에서 우연히 만나 열쇠 받았거든.
 어제 네가 집에 놓고 갔다고 해서, 내가 부탁했어.
 
 집안을 대충 치웠는데 맘에 안 들까 걱정이다.
 참! 아무리 급해도 아침은 꼭 먹고 나가야 해. 아직 성장기잖니.
 아침에 먹으라고, 감자 샌드위치랑 미역국 만들었어.
 밤에라도 출출하면 먹어. 입에 맞을까 걱정이긴 하지만---
 우유랑 과일은 잘 상하는 거라서 안 사놓았지만,
 여기 얼마 안되지만 돈 놓아두고 갈테니까 자주 사먹구.
 
 음--- 그리고, 혹시라도 나한테 연락할 일 생길지도 모르니깐
 여기 명함 놓아두고 갈게. 
 
시연

 

 

" 이거 전부 3페이지짜리에요. 
  홀수쪽부터 시작이니까 1페이지엔 도비라(속표지)를 깔고 나머지 페이지를 
  쫀쫀하게 구성할까 하고요. 요기랑 요기쯤 모델 이미지 컷을 두개 정도 
  박고, 나머지는 제품 누끼(배경없이 잘라 넣는 것)랑 일러스트. 
  그러니까 컷수는… "
 " 어우, 이거 상당히 많은데? 꼭 이렇게 많이 넣어야 해? "
 
 언제나 비슷한 패턴이다. 
 시연과 최근 애아빠가 된 한수선배의 실랑이. 
 진행기자 쪽은 만일의 실패가 없도록 가급적 많이 찍으려고 하고, 
 포토그래퍼 쪽은 필름을 아끼고 한컷 한컷에 집중할 수 있게끔 
 컷수가 적기를 바란다. 
 
 필름을 끼우고 있는 한수선배의 언제나의 투정을 시연은 
 아우트라인을 그려놓은 종이를 흔들면서 받아주는 중이었다. 
 실은 속으론 피식피식 웃고 있다.
 
 어차피 말한 대로 해줄 거면서.
 
 " 그렇다고 제품 누끼가 크게 들어가면 보기 흉하잖아요. 
  봐줘요. 절대, 찍은 거 안 쓰는 일은 없을 테니까. "
 " 시연씨, 그거 알아? 지지난달에 같이 한 네페이지짜리 누끼컷 숫자. "
 " 겁나네? 몇컷이었어요? "
 " 당당 1백컷을 마크했습니다. "
 " 후… 내가 생각해도 좀 심했네요. 근데 할 수 없었어. 
  주제가 '여름용품 정리'인데 아무래도 크게 싣기에는 예쁘지 않잖아요? 
  그래도 내가 사정해서 네페이지로 간거에요, 그 거. 
  이국장님은 세페이지에 넣어야 되는 거 아니냐고 하시던데. "
 " 아욱, 정말. 그것도 정신병이야. 무조건 쫀쫀하게 해야 한단 강박관념. "
 
 한수선배가 혀를 날름 내민다. 
 전혀 애아빠답지 않지 않은 행동. 그것도 쌍동이 아빠면서--- 
 어째 부인이 출산한 이후로 아빠인 한수선배 쪽이 아기처럼 변하는 
 느낌이다. 
 
 시연은 웃음을 간신히 참으면서 최대한 진지하고 상대를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을 지어보였다.
 
 " 그래도 이제 점점 시원해지는 추세니까… 사진부도 득볼 날이 올거예요. "
 " 오케이! 나에게 무슨  권한이 있겠어. 시키는 대로 해야지… 
  그럼 모델부터 가 볼까. 세트 오늘 좋은데? 미은이 준비됐니? "
 " 네에. "
 
 모델이 피팅룸에서 나와 세트 쪽으로 가 섰다. 
 한수선배가 모델 쪽으로 가서 노출을 재고 있는 사이, 
 은영선배가 와서 시연을 툭 쳤다. 
 
 역시 사시사철 리바이스 청바지에 만년 커트머리. 
 아무리 잡지일이 노가다라지만 저래서야 누가 29살이라고 믿겠는가. 
 나도 동안이지만 은영선배, 좀 심하다니깐.
 
 " 깜짝이야, 선배. 촬영 안해요? "
 " 세팅 다 마치고 모델 메이크업 끝나길 기다리고 있어. 
  하나, 그 기집애가 또 지각했거든. "
 
 " 뭐예요, 늦잠? "
 " 뻔하지… 어제 밤 늦게까지 CF 찍느라 잠을 거의 못 잤대. 
  불쌍해, 걔두. "
 
 " 자기가 원해서 그러는 건데요… 스타가 되려면 할 수 없죠. 
  아, 미은아, 굳은 거 풀어. 이건 예쁜 척, 깜찍한 척보다두 시원하고, 
  그래, 해방이야---! 하는 느낌이어야 한다구. 최대한 발랄하게 해! "
 " 쟤, 괜찮네. "
 " 이쁘죠, 선배. 쟤 좀 키워봐요. 
  거리 캐스팅인데 왠만한 경력자보다 더 잘해. "
 
 " 그래? 나중에 연락처 알려줘. ---것보다 너, 오늘 나랑 저녁하자. "
 " 그러죠, 뭐. 선배랑 나랑 둘이서만? "
 " 아니, 내 후배 하나가 더 낄거야. "
 " 괜히 나 있어서 어색해지는 거 아녜요? "
 " 아아, 아냐. 너도 한번인가 두번 본 사람이야. "
 
 은영은 묘하게 머뭇거리는 표정을 지었다. 
 그러나 시연은 모델 쪽에 정신이 팔려 그런 그녀를 미처 보지 못하고 
 지나쳐 버렸다.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있는 은영을 오늘의 파트너가 부르러 왔다.
 
 " 은영씨, 여기 준비 다 됐어! "
 " 어, 미안해~ 그럼, 시연아, 촬영 끝나고 보자! "
 " 네, 선배. "
 
 은영은 포토그래퍼에게 끌려 옆방으로 가면서 뒤를 돌아 보았다. 
 시연은 그녀의 시선을 전혀 알아 차리지 못한 채 모델과 아우트라인을 적은 
 종이를 번갈아 보고 있다. 
 은영은 머리를 긁적거리며 세트장으로 걸어갔다.
 
 …내가 잘하는 건지 모르겠다…
 괜히 겨우 마음 다잡고 일하고 있는 애한테 혼란만 주는 건 아닌지…
 휴--- 모르겠다…
 진짜로 옆구리가 썰렁한 건 내쪽이라구…!

 

낮의 학교. 점심시간.
 
 농구를 마친 동하와 연석은 얼굴에 수돗물을, 웃옷셔츠가 다 젖을 만큼 
 퍼붓고 나서 운동장 한 켠에 위치한 스탠드에 앉아 있었다. 
 9월도 거의 다 지나갔음에도 한낮의 태양은 소년들에게 제법 뜨거운 빛을 
 내려 보내고 있었고, 그다지 길지 않은 정오의 그림자가 두사람의 몸 밑에 
 깔린 채 조용히 존재하고 있다.
 
 연석이 드디어 침묵을 깼다.
 아침부터 줄곧 두사람 사이에 벽을 만들었던--- 침묵.
 
 " 나한테, 할말 없어? "
 " ---어제 그 여자에게 키 주고 간 거? "
 
 연석은 동하의, 어디까지나 담담한 반응에 내심 놀랐다. 
 그러나 자세히 보니 그 눈이 자신을 책망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연석은 
 다시 물었다.
 
 " …그래. 화…낼 줄 알았는데? "
 " 그 여자에 대한 일로 화내고 싶지 않아. "
 
 단 하나뿐이라고 생각하는 친구.
 네게 그 여자에 대한 일로 화내고 싶지 않아.
 
 " …그렇게 싫은 거야? "
 " …모르겠어. 다만… 내게 간섭하지 말아줬음 좋겠어. 
  방을 치우고  음식을 해 놓고 가는 따위,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어. "
 " 음식? 너… 설마… "
 " 버렸어. 냄새만으로도 싫어, 그 여자가 만든 음식 따윈. "
 
 연석은 동하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눈을 맞춘 채, 동하의 굳은 얼굴을 응시한 연석은 이번엔 시선을 돌려,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연석의 입가는 들려 있는 듯 보이지만, 눈동자는 웃고 있지 않다.
 
 강동하.
 내가 너랑 친구가 되고 싶었던 이유는--- 
 넌, 어딘가 쿨해 보이는 구석이 있었기 때문이야. 
 뭐랄까… 강해 보인다는 것보단, 의연해 보였다고나 할까. 
 다른 애들과 달리 넌 두다리로 지면에 서 있는 것처럼 느껴졌거든.
 그런데, 지금 아니라는 걸 알았어.
 넌, 응석을 부리고 있어. 
 네 새 엄마에게 응석을 부리고 있다구.
 
 그러나 연석은 그 대사를 입 밖으로 내뱉지는 않았다. 
 그렇게 말한다면 그거야말로 동하와 맺은 무언(無言)의 룰을 어기는 것이기 
 때문에. 
 
 다만 이렇게 말했을 뿐이다. 
 ---그것조차도 조심스러웠지만.
 
 " 잘해 드리는게 어떨까. 그게--- 널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 "

 

 

H대 골목에 있는 중국집은 시연과 그녀의 회사 동료들이 즐겨 찾는 
 곳이었다. 요리가 깔끔하면서도 맛이 있다. 
 
 문을 들어선 은영과 시연에게 웨이터가 물었다.
 
 " 저… 황은영씨 되십니까? "
 " 네. "
 " 일행 분이 먼저 와 기다리고 계십니다. "
 
 작은 방으로 들어가자 한 남자가 이미 자리에 앉아 있다가 일어서서 
 인사했다. 큰 키에 작은 눈이 선량해 보이는 느낌. 
 아… 전에 은영선배랑 지나다 두번인가 인사한 적이 있는 사람이다. 
 
 키가 워낙에 크지 않은 데다 단화를 신어 더 작아 보이는 은영선배가 
 키 큰 남자의 등을 탁탁 두드리는 모습이 좀 우스웠다.
 
 " 짜아식, 오래간만. "
 " 누나, 오랜만이에요. "
 " 회계사 일은 할만하니? "
 " 괴로워, 묻지 마요. "
 " 너처럼 덜렁대던 인간이 그런 일 할려니까 죽겠지? 
  참, 여긴 내 후배 이시연. 시연아, 너 전에 현우랑 만난 적 있잖아. "
 " 예. 안녕하세요? "
 " 아, 안녕하세요. 서현우라 합니다. "
 
 은영의 대학 후배라는 남자는 약간 긴장한 듯 혀로 윗입술을 축이면서 
 인사한다.
 
 시연에게는 왠지 어려운 자리였다. 
 은영은 분위기를 살리려는 듯 음식을 먹으면서 신나게 떠들어댔고 
 현우라는 사람은 은영의 개그에 필요 이상 과장해서 웃으면서 반응하고 
 있다. 그러나 시연은 평소에 그렇게도  재미있던 은영의 농담이 
 오늘따라 머릿 속에 하나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것은 아마도--- 
 그녀가 방안에 흐르는 이상한 공기를 감지했기 때문인지도 몰랐다.
 
 " 그나저나 현우, 너도 참 불쌍한 인생이다. 어제 몇시에 퇴근했다구? "
 " 어제가 아니고 오늘 새벽이야. 프로젝트가 오늘 새벽에 끝났거든요. 
  아예 하루 휴가내고 종일 집에서 뻗어 있다가 나온 거예요. "
 " 들었어, 시연아? 수시로 밤새고 힘들어하는 인생이 여기도 있단다. "
 " 네. "
 " 현우, 너도 위장 조심해. 밤 자꾸 새다 보면 내 꼴 난다. 
  수시로 화장실 왔다리 갔다리 하는 게 얼마나 괴로운--- "
 
 은영의 핸드폰이 울렸다. 
 
 띵띵띠리디라~ 띵띵띠리디라~
 
 " 누나, 그 핸드폰 소리 좀 바꾸지 그래요? "
 " 조용히 해, 너. 네, 여보세요? ------응. …어어. …그래? 
  휘유우… 할 수 없지, 뭐. 지금 갈께. "
 
 은영은 펼쳤던 핸드폰 폴더를 탁, 하고 접었다. 
 시연이 의아한 표정으로 은영을 바라 보자 골치 아파--- 하는 표정으로 
 은영이 말했다.
 
 " 야, 나 가봐야겠다. 사정은 나중에 설명할께. "
 " 선배! "
 
 시연은 놀라서 황급하게 가방을 챙기는 은영을 바라보고 있었다. 
 현우란 사람도 당황한 듯 웅얼거리며 묻는다.
 
 " 어, 누나… 가는 거예요? "
 " 그려. 나 갔다고 썰렁하게 헤어지지 말구, 현우 너, 
  시연이 에스코트 잘해야 한다. OO대 영문과의 명예를 실추시키지 말구. 
  오늘 저녁은 내가 사는 걸로 할 테니까. "
 " 누나… 그럴 필욘… "
 " 하튼 나 갈께! "
 
 은영은 빠른 말투로 말하더니 정말 급한 듯 중국 집을 빠져나가 버렸다.

 

 

오해, 
 이것이 역사를 만들어낸다.
 
 때로는 성자를, 
 때로는 영웅을, 
 때로는 반역자와 죄인을---
 
 오해의 밑바닥에 있는 것, 그것은
 인간의 고독이다.
 
                             이어령/ 하나의 나뭇잎이 흔들릴 때 
 
 

 

은영선배가 휭하니 떠나버리자 자리에 남겨진 시연과 현우는 
 한 10초 정도 시간동안을 멀거니 앉은 채, 눈도 맞추지 못하고 있었다. 
 시연의 머릿 속에는 어떻게 해야 마음 편히 헤어질 수 있을까 하는 
 생각 뿐이었다.
 
 현우가 초조한 듯 이마를 주먹으로 문지르더니 겨우 시연에게 말을 건다.
 
 " 저--- 은영누나, 회사에서도 저렇게 수선스럽죠? "
 " …쿡…. "
 
 시연은 현우가 한 말의 내용보다도 그의 굳은 표정이 더 우스웠다. 
 현우도 시연이 웃는 것을 보더니 자신도 따라 웃어 버린다. 
 그 바람에 딱딱했던 분위기는 그럭저럭 부드럽게 변한 듯 싶었다.
 
 " 그러잖아도 대충 다 먹었는데, 우리 여길 나가서 차라도 한잔 하죠? "
 
 같이 웃고 난 다음, 적이 안심이 되었는지 현우가 제안했다. 
 시연은 그리 내키는 것은 아니었지만 아까 은영이 하고 간 말도 있고, 
 또 별의미없이 제안했을, 현우의 호의를 거절하는 것도 좀 미안하고 해서 
 고개를 끄덕여서 긍정의 의사를 표시했다. 
 
 두사람이 막 일어서려 했을 때, 
 시연의 가방 안에서 핸드폰 진동음이 느껴졌다.
 
 " 잠깐만요. "
 
 그녀는 이미 일어서 있는 현우에게 말하면서 가방에 든 핸드폰을 꺼냈다. 
 '여보세요?' 하고 말했지만, 대꾸가 없다. 
 이어, 뚝 끊기는 소리가 났다.
 
 순간이었지만 시연은 가슴이 철렁했다. 
 왜 그런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뭔가, 중요한 것을 놓쳐버렸다는 아쉬움이 그녀의 마음을 지배하고 있다.
 
 ' 요즘 너무 감상적이 됐나… '
 
 시연은 핸드폰을 도로 가방안으로 집어 넣었다.
 
 " 뭡니까. "
 " 잘못 걸린 건가 봐요. "
 
 그러나 그녀는 왠지 잘못 걸린 게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지 몰라도 시연에게 뭔가 말을 하려 전화를 건 것이라는. 
 
 '혹시…?' 생각하다 '희망사항이지…' 하며 
 시연은 씁쓸한 미소를 떠올리고 있었다.

 

 

 ' 잘해 드리는게 어떨까. 그게… 널 위해서도 좋을 것 같아. '
 
 그렇게 연석이 말했었다…….
 
 
 알아, 그래야 한다는 걸.
 네가 뭘 생각하고 있는지, 그 한마디로도 충분히 알아차렸어.
 어린애 같다고, 응석받이라고, 생각하겠지… 
 당연해, 나 자신도  스스로에 대해 비웃음이 터져나올 것 같으니.
 
 그런데도… 그녀 앞에 있으면 밸런스가 무너져 내려.
 아버지에게 다른 소중한 사람이 생겼다는 사실까지는 좋았어.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어, 그런데…
 
 내 감정.
 언제나 일직선을 그리며 고요히 흘러가던 감정은, 이제… 
 때론 자신도 감지하지 못하는 곡선을 그리며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어.
 미워하는, 단지 그것만은 아닌… 여지껏 지켜 왔던 균형이 사라져 버렸어.
 
 그게 싫은 거야, 난.
 아니, 싫다기보다 무서웠는지도 모르지.
 
 
 동하는 손에 들려 있는 핸드폰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플립을 열면 보이는 0에서 9까지의 숫자들과 그 밖의 버튼들을 보면, 
 힘주어 눌러보고 싶다. 
 핸드폰을 처음 샀을 때부터 한동안, 그의 미지의 통화상대는 미국에 있단
 사실만 알고 있는… 그가 결코 연락할 수 없는 엄마였었다.
 그런데 오늘은--- 조그만 직사각형 모양의 빳빳한 종이에 인쇄되어 있는 
 숫자들로 자꾸만 눈이 간다.
 
 이시연
 H.P 011-495-XXXX
 
 왜일까.
 엄마완 달리 이건, 확실히 연결될 번호이기 때문에…?
 
 실은 조금 아까 눌렀었다, 그녀가 두고 간 명함에 적혀 있던 10개의 숫자들.
 하지만 목소리가 들린 순간 어느새 난, END 버튼을 누르고 만다.
 
 End & Repeat.
 
 " 동하야, 4번 테이블 치워라. 돈, 내가 받을께. "
 " 아, 미안해요. "
 " 자식, 그럴 수도 있지. "
 
 카운터에 멍하니 앉아 있던 동하에게 주인형이 와서 툭 치며 말했다. 
 평소 때는 빨랑빨랑 움직이라며 잔소리를 해대는 형이었지만 최근, 
 그런 소리가 싹 줄어든 건 동하의 현재 사정을 알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동하는 행주와 쟁반을 들고 테이블 쪽으로 걸어갔다. 
 언제나 그렇지만 앞치마를 걸친 자신의 모습이 어쩐지 우스꽝스럽게 
 느껴진다. 
 하지만 어쩌면… 어정쩡하게 선 자신의 겉모습보다 더 웃기게 보이는 건, 
 어쩔 줄 몰라 하는 내면의 긁힌 상처자국일지도 모른다…….
 
 ' 정말이지, 꼴불견이군… '
 
 End & Repeat.
 
 끝이 보일 것 같은 감정들은 어느 새 원점으로 돌아가 되풀이되고 재생된다.
 
 마치- 
 뫼비우스의 고리처럼---.

 

 

시연이 동하의 집을 청소하고 음식을 해 놓은 날로부터 일주일, 그리고 
 은영선배와 은영선배의 대학 후배라는 서현우와 저녁을 같이 먹은지 
 엿새가 지났다.
 
 시연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동하의 전화를 기다렸다. 
 기대는 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기다리고 싶었다. 
 설사 자기에게 차가운 말만 하고 끊는다 할지라도 
 완전한 무관심보다는 나을 것 같았다. 
 그러나 전혀 연락이 없는 것을 보아, 은영선배와 저녁먹던 날의, 
 받자마자 뚝 끊긴 전화는 역시 동하로부터 온 것은 아닌 모양이었다.
 
 
 역시 주제에 맞지 않는 짓을 한 걸까.
 같잖게 가족행세를 하는 군… 이라고 생각했을까.
 
 너무… 낙관적으로 생각했던 걸까.
 이쪽에서 먼저 웃어보이면 그쪽도 미소를 건네주리라고 생각했던 것…
 나만의 생각이었을까. 역시 안되는 걸까… 
 
 그렇다고 해도, 어쩔 수 없어.
 맘에 들지 않는다면… 그래도, 좋아. 싫다고 말해도 좋아.
 사실은, 널 위한 게 아니고 내 만족을 위한 행동인지도 모르지…
 
 너무나 많은 걸 주고 떠난 그에게 보답할 수 있는 방법은 이것 뿐인 걸.
 
 
 10월 초.
 매달 17일경에 나오는 잡지라 10일경까진 원고 마감을 끝내야 하기 때문에 
 월초인데도 벌써 모두들 회사에 모여 원고를 쓰고 있는 시기다. 
 
 하지만 시연의 경우는 패션이나 뷰티만 전문으로 맡는 다른 기자들과 달리 
 토요일인 그날도 인터뷰를 잡아 놓았기 때문에 우선 그걸 마친 후, 
 다시 회사에 들어가서 원고를 써야만 했다. 
 
 패션, 뷰티, 그리고 연예인 인터뷰까지 '되는 대로' 다 맡는 
 올라운드 플레이어인 시연은 이런 일정에는 아주 익숙해 있었다. 
 물론, 한 1~2년 정도 더 짬밥을 먹으면 자기 전문분야를 갖게 되겠지만 
 아직 2년차인 그녀는 '되는 대로' 일을 맡아 하고 있었다.
 
 주로 촬영초에는 맘대로 스케줄을 잡을 수 있는 패션이나 뷰티촬영을 하고, 
 그동안 매니저들과 접촉을 시도해 마감이 가까와 올 때쯤 되서야 
 겨우 본 인터뷰에 들어가는 것이다. 
 때로, 그 연예인이 아주 스케줄이 바쁜 유명인일 경우는 
 원고 마감 사흘 전에 인터뷰를 해서 겨우 마감에 댄 적도 있었다.
 
 오늘의 인터뷰 상대는 요즘 한창 주가를 올리고 있는 CF모델인 전XX였다. 
 실은 잡지모델 출신이기 때문에 시연의 칼럼모델로 몇번 같이 일한 적도 
 있고 매니저와도 낯이 익은 얼굴이긴 하지만, 뜰 대로 떠버린 그녀의 
 인터뷰 스케줄 잡기는 정말 하늘의 별따기였다.
 
 간신히 매니저를 꼬드겨 오전 중으로 청담동 카페에서 만나기로 한 시연은 
 약속시간인 10시보다 10분 정도 일찍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파트너인 포토그래퍼는 카페에 들어오는 빛이 어느 정도인가, 
 어디서 찍어야 그림이 될까, 부지런히 살펴보고 있었고, 
 시연 자신은 사진 촬영을 빼면 30분도 안될 인터뷰 시간동안 최대의 
 정보를 뽑아내기 위해 수첩을 들여다 보며 질문내용을 체크하고 있었다.
 
 그런 중, 문득 핸드폰의 진동을 느낀 그녀는 은근히 겁을 내며 
 플립을 열었다.
 
 ' 혹시 인터뷰 취소하자구 그러면, 어떡하지? '
 
 수시로 일어나는 일이었다. 
 약속시간이며 장소까지 다 정해 놓고서, 막상 그 날 그 시간이 되면 
 매니저로부터 '오늘은 죽어도 못하겠다. 정말 유감이나 다음 기회를 
 기다려 주시오' 식의 전화를 받은 적이, 한달에 한번 꼴로 발생하기에 
 일단 그쪽으로 먼저 생각이 미칠 수밖에 없다.
 
 " 여보세요, 이시연입니다. "
 " 아, 여보세요? 저… 이시연씨 핸드폰입니까. "
 
 분명히 자신의 이름을 댔는데도 상대방은 한번 더 확인한다. 
 일단 그 목소리가 오늘 만날 연예인 매니저가 아님을 깨닫고 
 시연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예, 그렇습니다만… 누구세요? "
 [ 저, 기억하실까 모르겠는데요… ]
 " ……? "
 [ 지난번에 은영누나랑 같이 뵌 서현우라고 합니다. 바쁘세요? ]
 " 아, 예… 이제 목소릴 알겠어요. 
  지금은 괜찮아요, 아직 일 시작하지 않았으니까. 
  근데, 제 번호 어떻게 아셨어요? "
 [ 기억 안 나세요? 그날 명함 주고 받았던 거. ]
 
 생각이 났다. 그 날 차를 마신 뒤, 집까지 바래다 주려는 현우를 
 한사코 만류했던 기억. 
 결국 시연의 고집이 이겼다. 
 진 쪽인 현우는 그럼 다음에 혹시 볼 수 있으면 좋겠다는 멘트를 하며 
 자기 명함을 주었고, 시연도 그에 대한 예의로 자신의 것을 건네주었던 
 것이다.
 
 " 아, 참, 그랬죠. 왠일이세요. "
 [ 오늘 저녁시간 어떠세요. ]
 " 네? "
 [ 아… 저… 시연씨랑 같이 식사하고 싶은데…. ]
 " 은영선배는 아무말 없었는데요? "
 [ 저, 은영누나하곤 관계없이 시연씨랑만 같이 식사하고 싶어서요. ]
 
 시연은 '곤란하군…' 하고 생각했다.
 물론 별 뜻없이 청하는 것일 수도 있으나 대부분 남자들의 경우, 
 이런 말을 할 때는 '교제 신청'의 의미를 담는 경우가 많다는 걸 
 그녀도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 은영선배… 내 얘길 전혀 안했나 보군. '
 
 " 오늘은, 어려울 것 같은 데요. 
  오전 중엔 인터뷰가 있고, 오후부턴 마감이 코 앞이라 회사에 들어가 
  원고를 쳐야 해요. "
 [ 그러세요… ]
 
 수화기 너머로 들리는 현우의 목소리가 실망한 듯 잠잠해졌다.
 
 [ 그럼 오전 스케줄은 어떻게 되는데요? ]
 " 글쎄… 이제 인터뷰 상대가 오면 인터뷰하고… 
  그리고 좀 늦겠지만 점심 먹구, 그리고 회사에 들어가겠지요? "
 [ 그럼, 점심 같이 먹읍시다. 주말에 모처럼 시간이 났는데, 
  혼자 보내기가 아쉬워서 그래요. 
  담주부턴 저도 새 프로젝트가 시작되어 휴식은 꿈도 못 꿀 처지거든요. 
  당분간 쉴 수 없으니 토요일이라도 좀 잘 보내고 싶은데요. ]
 
 " 저, 지금 청담동인데요. "
 [ 그럼, 제가 지금 청담동으로 갈께요. ]
 " …예? "
 [ 점심만 같이 먹는 거니까 부담 가지실 것 없어요. 
  그 후엔 얌전히 회사로 보내드릴 테니까. 
  오늘은 차도 갖고 왔고, 편히 회사로 모실게요. ]
 " 언제 인터뷰 끝날지 몰라요. "
 [ 걱정마세요. 끝날 때까지 기다릴테니. 그럼 그러는 걸루 합시다. 
  인터뷰 끝나면 전화 주세요. 명함 갖고 계시죠? ]
 " 예… 하지만… "
 
 대답할 새도 없이 전화가 끊겼다. 
 기가 막힌 채, 핸드폰을 들여다 보는 시연에게 오늘의 파트너인 한수선배가 
 물었다.
 
 " 시연씨, 오늘 점심 약속있어? "
 " 어떻게 하죠, 선배? 선배랑 같이 점심 못 먹을 것 같은데… 
  괜찮으시겠어요? "
 " 으와… 마침 잘 됐다. 
  나 이거 촬영 끝나면 신사동 '포토피아'에 들러 슬라이드 필름 현상한 것 
  좀 찾고,  거기 아는 사람이랑 식사하기로 했거든. 
  진작 말했어야 했는데 까맣게 잊고 있었지 뭐야. 
  시연씨도 마침 약속 생겼으니 우리, 촬영 끝남 쪼개지자구. "
 " 휴우--- "
 
 한숨을 쉬고 있는데 저편에 전XX와 그 매니저가 눈에 들어와 
 시연은 어느 새, 고민을 잊고 손을 흔들며 그들을 맞았다. 
 일단 일이 시작되면 고민 따윈 깡그리 잊어 버리는 것이 시연의 강점이었다. 
 
 실은, 잊은 척 하는지도 모르지만.
 
 " 여기에요! "

 

" 오늘, 같이 영화보고 누나 선물 고르는 것좀 도와줄래? "
 " 좋아. "
 
 수업이 일찍 끝난 토요일.
 
 연석의 부탁을 동하는 선선히 승낙했다. 
 아르바이트만 제 시간에 맞춰 가면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집에 들어갔다가 아르바이트를 가느니 바로 아르바이트 장소로 
 가는 게 더 편할지도 몰랐다. 아르바이트엔 7시 전까지만 가면 된다.
 
 토요일 오후의 압구정동은 사람들로 북적거렸다. 
 영화티켓을 끊고 나니 시간이 좀 남아, 그 시간에 두사람은 바로 다음 날인 
 연석의 큰 누나 생일 선물을 고르러 갤러리아 백화점으로 들어갔다. 
 백화점 내에 꽉찬 인파 속에서, 두사람은 진땀을 뻘뻘 흘린 끝에 
 결국 카키색의 가을용 스카프를 골랐다.
 
 " 휘유… 용돈 반이 날아갔다, 야. 
  그나저나 여자 물건은 고르기가 왜 이리 까다롭냐. 
  그렇다고 안 사 주면 앞으루 석달간은 갖은 구박을 날릴테구. 
  아무래도 여자친굴 하나 사귀어야 될까 보다. "
 " 자식. 누나 선물 잘 고르려고 여자친굴 사귀냐. "
 
 말도 안된다는 듯 받아친 동하였지만, 사실 물건을 고르는 일은 그 자신도 
 가장 곤욕스러운 것중 하난지라 연석의 심정을 이해할 만도 하다고 
 내심 중얼대고 있었다. 
 
 두사람은 백화점을 나와서 횡단보도 쪽으로 걸어갔다. 
 횡단보도 맞은 편의 '파파이스'에서 아무거나 가볍게 사 먹고 
 영화관 쪽으로 갈 작정이다. 
 
 횡단보도를 건너가는 도중, 문득 동하는 실없는 웃음을 흘려 버렸다.
 
 ' 줄곧 이런 상태라니… 나도 정말 웃긴 놈이야… '
 
 저편에 시연과 너무 닮은 여자가 보였기 때문이다. 
 
 뒤로 모아 하나로 묶은 긴 머리.
 그 밑으로 보이는 가는 목선. 
 하얀 얼굴. 차분한 옆모습. 
 
 최근 들어서 거리서건, 아니면 아르바이트하는 카페에서건, 
 비슷한 이미지의 여자가 보이면 뒤를 돌아 보는 것, 
 시선을 그쪽으로 돌리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 버렸다.
 
 두려워하고 있다… 분명… 마주치는 것을…….
 
 연석에게 들키지 않게끔 살짝 고개를 돌려 여자를 쳐다 보았다.
 
 ' ……? '
 
 동하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춰 섰다.
 닮은 여자--- 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다. 
 …진짜 시연이었다.
 
 오늘은 얇은 베이지색 니트 웃옷 아래 롱스커트를 입고 있는 모습이지만 
 어쨌든 진짜였다. ---확실히 진짜 시연의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동하가 설마--- 하고 눈을 의심한 이유는 자신의 눈에 들어온 여자의 옆에 
 젊은 남자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키가 크고, 눈에 확 들어 오는 외모는 아니지만 깔끔한 인상의 남자였다. 
 남자는 여자에게 뭔가 말을 걸고 여자는 수줍은 듯한 미소를 얼굴에 띄우며 
 답하는 것이 보인다.
 
 ' 그런 거였어…? '
 
 차를 세워 둔 곳으로 걸어가자 남자는 여자에게 지극히 정중한 태도로 
 조수석의 차 문을 열어주고, 여자는 몸을 구부려서 차 안으로 들어간다. 
 누가 보아도 데이트하는 모습으로 보일 장면.
 
 동하의 입술은 그대로 굳어지고 말았다.
 
                      …………………………………
 
 이시연(李詩聯·Lee Shi Yun)
 
 잡지 편집(취재/진행)기자.
 천애고아인데다, 결혼하자마자 17살 연상의 남편을 잃은 악운의 주인공.
 자신보다 10살 어린 남편의 아들에게 무시당하면서도, 그냥 놔두지 못한 채
신경써주려고 나름대로 애쓰지만 상대방은 그다지 달가와하지 않는 듯.
 나이에 비해서 상당히 동안인 얼굴로 어느 정도 외유내강형이라 할 수 있다.
 말수가 많이 줄었으나 원래는 명랑한 성격이라고 함.
 일할 때와 평상시 태도가 아주 다르다.
 
 ● DATA ●
 
 나이(Age) : 26
 생일(Birthday): 2.25·물고기자리(Pieces)
 혈액형(Blood Type) : A형
 키(Height) : 161.5cm
 몸무게(Weight) : 45~8kg(추정) 
  
 
 꽃을 보았습니다.
 꽃잎을 뜯었습니다.
 
 찬란히 빛을 발하던 아름다운 흰색은,
 어느 새 노랗게 바래 버렸습니다.
 
 가슴속에서 조금씩 피어나는 이 감정도
 언젠가 슬프게 바래버릴까요…?
 
 그럴바엔 난,
 아무 것도 갖고 싶지 않다고---
 반복해서 자신에게 들려주었습니다.
 
 **
 
 시원한 바람이 불기 시작한 10월 초의 토요일 오후지만,
 편집부의 분위기는 후끈후끈 달아 있었다. 
 
 원고 마감이 코 앞으로 다가온 것이다. 
 기자들은 모두 모니터 앞에 앉아 옆에 놓인, 사진이나 일러스트들을 
 컴퓨터로 스캔받아 대충 얹은 것을 프린트한 대지와 슬라이드 필름, 
 그리고 자료들을 들춰 가며 원고를 쓰기에 여념이 없었다. 
 
 대부분 귀에 이어폰이나 헤드폰을 꽂고 각자 자기 취향의 노래를 들으면서 
 원고를 치는 것이다. 
 가장 노땅인 희경선배는 '김장훈'을 지치지도 않고 듣고, 키무라 타쿠야의 
 열성팬인 수정선배는 SMAP의 노래를 달고 산다. 팀 막내인 난희는 절대 
 막내답지 않은, '조수미'의 광팬.
 
 " 끝! "
 
 시연의 옆자리에 앉아 있던 은영선배가 들으란 듯이 소리쳤다. 
 모니터에는 '인쇄중'이라는 글씨가 떠 있다. 
 
 원고를 마무리지은 것이다. 
 물론 원고를 다 끝내더라도 아르바이트생에게 오자를 수정받고 편집장에게 
 원고내용을 검토받아야 하고, 그러고 나서도 미술부의 맥킨토시 편집작업을 
 기다리는 일이 아직 남아 있다.
 
 " 선배, 지금 누구 약올리는 거유? "
 
 저편에 앉아 있던 수정선배가 귀에 이어폰을 꽂은 채,
 키보드 위에 얹은 손가락을 바람처럼 움직이면서 말했다. 
 말하면서도 시선은 어디까지나 모니터를 떠나지 않는다. 
 항상 원고를 일착으로 끝내던 수정선배가 이번에 은영선배에게 
 선두자리를 내준 것이다. 
 
 한차장이 기특하다는 듯 생글생글 웃으며 저편에서 말을 던졌다.
 
 " 끝났니? 와, 이번 달 은영이 기합들었다? "
 " 지난 달, 40페이지가 넘었잖아요. 
  이번 달에 시연이의 컴백으로 양이 팍 주니까 마감할 맛 나는 거 있죠? "
 " 오오… 그래? 일이 부족한게 아니고? 다음 번엔 은영이 일 좀 늘려볼까? "
 " 차장님. 농담으로라도 그런 말은 하지 말아 주시옵소서. 
  더 이상은 일 때매 잠자리에서 가위 눌리고 싶지 않아요. "
 " 시연이는 어떻게 되가니? (원고) 두개 남았는데. "
 
 차장이 시연 쪽으로 고개를 빼며 한번 찔러 본다. 
 언제나 마감 때면 최소 열번은 듣는, 지긋지긋한 대사라 
 시연은 아무렇지도 않게 키보드를 두들기며 대꾸했다.
 
 " 하나는 지금 프린트 중이고 하나는 좀만 더 치면 될 것 같아요. "
 " 오… 듣던 중 기쁜 소리구나. "
 
 " 시연아, 목마르지 않니? 
  차장니임~ 돈좀 주세요. 귤이랑 음료수 사오게요오. "
 
 은영이 차장님 쪽 자리로 가서 간식비를 챙겨왔다. 
 주로 이렇게 먹을 것을 챙기는 짓은 은영선배가 떠맡아 한다.
 
 " 우리 막낸 어디 갔나? 언니랑 같이 가야 될텐데. "
 
 은영선배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편집부의 막내기자인 난희를 찾자 
 옆자리에 앉은 시연이 이어폰을 귀에서 빼며 말했다.
 
 " 난희, A4용지 떨어졌다고 윗층에 가지러 갔을걸요. 
  선배, 잠깐만 기다려요. 나 이거 인쇄걸고 같이 갈게요. 
  한줄만 더 치면 되니까. 맨날 막내만 시키기 그렇잖아요? "
 " 그래, 그러지 뭐. 근데, 너 뭐 듣니? "
 " 수정선배한테 빌려온 SMAP CD. "
 " 솔직히 얘네, 노랜 못하지 않니? 5명이나 모였는데 화음이 하나두 없어. "
 
 은영이 시연의 귀에서 뺀 이어폰 한쪽을 자기 귀로 가져가며 말했다.
 
 " 쉿, 수정선배 들어요! "
 " 다 들렸어, 선배.  Long Vacation 보구, 키무타쿠 잘생겼다고 난리쳤던 
  기억 다 잊었나 보죠? 앞으로 '키무타쿠' 비디오 절대 안 빌려 줘. "
 " ---수정아. 한마디 했다구 치사하게… "
 " 뭐… 요쿠르트랑 하겐다즈 아이스크림도 사다 주시면 용서해 드릴게요. "
 
 수정선배는 아이스크림 킬러이다.
 세상에서 키무타쿠가 제일 좋고 그 다음이 아이스크림이라고 한다.
 
 " 으… 차장님이 주신 돈으로 될랑가 모르것네? "
 " 선배, 중얼중얼 그만하구, 나 프린트 걸었으니까, 가요. "
 
 시연이 피식 웃으며 은영선배의 옷자락을 잡아 끌었다. 
 두사람은 의자에 걸려 있던 재킷을 몸에 걸치고 지갑을 손에 든 채 
 엘리베이터로 향했다. 
 엘리베이터 안에서 시연은 들키지 않을 정도로 살짝 고개를 돌려서 
 은영선배의 옆 얼굴을 바라 보았다. 
 
 일주일 전인 지난 토요일, 선배의 대학 후배인 서현우와 점심식사를 같이 
 했다는 것, 이번 주에도 몇번인가 전화가 왔었다는 것은 아직 말하지 못했다. 
 실은 은영선배에게 묻고 싶은 게 몇가지 있었지만 그것도 막상 물어 보려면 
 입이 떼어지지 않는다.
 
 ' 설마, 선배… 내가 결혼경력이 있다는 얘길 '안'한건 아니겠지? '
 
 솔직히 서현우가 전화를 자주 걸어대는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러나 전화 너머의 그는 언제나 지극히 정중했고 
 별뜻없이 시연과 은영선배의 안부를 물어보는 것 같았기 때문에 
 자신이 넘겨짚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다. 
 말하자면, 귀찮긴 하지만 그렇다고 싸늘하게 대하기도 힘든 상대였다.
 
 ' 은영선배에게 물어보는 건 좀 미루는게 좋겠어… '
 
 빌딩을 나서자, 얼굴로 상쾌한 바람이 불어와 
 시연은 몽롱했던 머리가 깨어나는 것을 느꼈다. 
 기지개를 켜듯 팔을 앞으로 쭈욱 뻗었다. 
 가을 오후의 미풍이 그녀를 어루만지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가 다시 떴다.
 '행복'이라는 말보다는 '안락함'이란 단어가 이 경우엔 더 어울릴 것 같다고 
 생각하며 시연은 앞을 향해 걸었다.
 
 상처가 완전히 아문 건 아닐 지 모르지만
 잠드는 것이 무서울 때도 가끔씩은 있지만
 그래도… 살아있는 게, 지금은 기쁘다는 생각이 들어… 
 
 
지하철 안에 서 있는 사람들이 모두 쳐다볼 만큼 예쁜 아이들이었다.
 와인색으로 염색한 긴 머리에 헤어밴드를 한 키 큰 소녀와 
 삐죽삐죽하게 섀기 커트를 한, 눈이 큰 소녀. 
 섀기 커트를 한 쪽은 문고리를 잡고 서 있고 
 키 큰 쪽은 옆의 철기둥에 기대 서 있다.
 
 " 야, 언니들 마감인 거 맞지? 지금 회사에 있는 거. "
 " 그렇대니깐. 내가 아까 분명 수정이 언니한테 전화했어. 
  오늘 최소 밤 12시까진 다들 회사에 있을 거래. "
 
 긴 머리 소녀의 이름은 '마리'. 
 그리고 섀기 커트를 한 쪽의 이름은 '미은'.
 
 둘다 촬영경력이 몇개월 되지 않은 모델들이다. 
 둘 다 헐렁한 청바지에 흰 티셔츠, 그리고 단색점퍼만 걸쳤는데도 
 눈에 팍 뜨일 만큼 예뻤다. 
 둘이 같이 서 있으니 더 도드라지는 것 같다.
 
 " 야, 미은아, 우리 오늘 나이트 안 갈래? "
 " 공부 좀 해라, 공부. 
  중간고사가 얼마 남았다구 어째 넌, 맨날 그놈의 나이트 타령이냐. 
  그러니까 매번 바닥에서 잠수중이지. 연영과는 뭐, 그냥 들어가냐? "
 " 에이, 참. 니가 울 엄마니. 글구 고1이 무슨 공부야. 
  언제 입시가 바뀔지 모르는데 벌써부터 공부해 뭐하냐. "
 " 내신을 잘 받아두래잖니. 
  허긴 나두 20등 안에 들어가 봤으면 소원이 없겠다. 
  엄마가 불쌍해. 과외한다구, 이놈의 석두가 뭐, 말랑해지겠니. "
 " 야, 야…! "
 
 갑자기 마리가 미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지하철 문고리에 매달려 종알대고 있던 미은은 의아해 하며 
 마리의 얼굴을 쳐다 보았다.
 
 " 방금 들어온 애들… 괜찮지 않니? "
 " 또오… 시작이니. 너 눈, 아래붙은 거 알구 있으니깐 됐어. "
 
 미은은 좌석 뒤편에 뚫려 있는 지하철 창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이 
 어떻게 보이는지 열심히 체크하면서,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 야, 아니야. …봐봐, 진짜 괜찮아. "
 
 마리가 미은의 팔을 잡아당겼다. 
 미은은 별 생각없이 마리의 낮은 눈이 이번엔 어떤 '킹카'를 발견했나 
 생각하며 가리키는 쪽으로 눈을 돌렸다.
 
 ' ……! '
 
 고교생으로 보이는 두명의 소년이 눈에 들어온 순간, 미은은 저도 모르게, 
 정말 그림같다--- 고 속으로 중얼거렸다.
 
 178cm 정도의 키, 진한 하늘색 맨투맨 티셔츠에 회색 면바지를 입고 
 안경을 쓴, 약간은 모범생 같은 인상의 소년이 우선 눈에 들어왔다. 
 그 때까진 그냥 깨끗하게 잘생겼다고 감탄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러나…
 그 옆에 있는 친구인 듯한 소년을 각막을 통해 뇌에 입력시키자 그에 대한 
 아웃풋 작용일까, 미은의 가슴이 갑자기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키는 175cm 정도일까. 
 옆에 선 친구보다는 조금 작지만 균형잡힌 늘씬한 체구. 
 어딘가 약간 날카로운 인상이 느껴지는 것은 아마 짙은 눈썹에서 이어지는 
 미간 언저리 때문일 것이다. 
 눈은 시원하게 큰 편이지만 서늘하면서도 결코 부담스럽지 않은 느낌. 
 날카롭지만 꼭 그런 것만은 아닌, 단정하고 침착한 분위기도 갖춘 
 얼굴 윤곽은 뚜렷하면서도 어디까지나 섬세했다. 
 베이지색 면바지에 선명한 빨강 폴로점퍼도 뚜렷한 얼굴선과 늘씬한 체형을 
 더욱 돋보이게 해준다.
 
 " 둘 다 넘 괜찮지 않니? 
  스튜디오에서 본 남자 모델들보다 더 나은 것 같애. "
 
 마리가 귓전에 대고 속삭이듯 말했지만 미은의 귀에는 이제, 
 아무 소리도 들어오지 않았다. 
 그저 멍하게, 저편에 서 있는 소년을 바라보고 있을 뿐이었다.
 
 ' 하느님 맙소사--- 이런 걸 첫눈에 반했다고 하는 건가? '

 

[ 다음 역은 시청, 시청 역입니다. 내리실 분은… ]
 
 전철이 역에 도착했다. 
 갈아타는 지점이라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문쪽으로 썰물처럼 빠져 나간다. 
 두 소년도 밀리다시피 문 밖으로 나갔다.
 
 " 진짜 지금 가도 괜찮은거야? 전화 안해 봐도 돼? "
 
 계단을 올라가며 연석이 물었다. 동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 만에 하나, 자리에 없으면 어떡할건데. "
 " 돌려줄 게 있어. 그것만 전해주고 오면 충분해. "
 " 화를 내거나 할 건… 아니지? "
 " …그래. "
 
 화를 낼 처지도 아닌 걸.
 
 동하가 입가에 미소를 떠올리자 연석도 안심한 듯 앞으로 시선을 돌렸다.
 
 " 미안하지만… 가는 도중에 근처 아무데서나 기다려 주지 않겠어? 
  역시 나 혼자 가는 게 나을 것 같아서. "
 
 개찰구를 빠져나가자 동하가 말했다. 
 연석은 픽 웃으며 끄덕였다. 
 
 ' 짜아식, 은근히 쑥스러운 모양이군…. '
 
 동하 쪽이 제 발로 시연을 찾아가겠다고 말할 때, 무척 놀랐지만 
 한편으로 안심이 되었던 것이 연석의 솔직한 심정이었다. 
 진심으로 잘 됐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건, 연석의 착각이었던 것이었다---
 
 계단을 올라가 지하철 역을 완전히 벗어나자 두사람을 감싸고 있던 
 후덥지근한 공기는 어느 샌가 사라졌다. 
 비록 주변에 차 클랙션이나 엔진 소리 등으로 귀가 좀 따갑긴 했지만, 
 훨씬 가뿐한 기분이 된 소년들은 한쪽 어깨에 걸친 쌕을 고쳐 메고 
 속도를 내어 앞으로 걷기 시작했다.
 
 연석은 지하철에서 같은 칸에 타고 있던 두명의 소녀들이 
 자신들 뒤를 따라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보통을 훨씬 넘을 정도의 외모의 소유자들이라 처음부터 눈에 띄었었다. 
 아마 저들도 이 근처에 볼일이 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연석은 친구의 옆에서 나란히 걷고 있었다. 
 
 그녀들과 목적지가 같으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한 채.
 
 죽 걸어가다 보니  Buy the Way>가 보였고 그 앞에 
  소설·만화>라고 씌어진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연석은 한손으로 동하의 팔을 가볍게 건드리듯 잡고, 
 다른 한손으로 방금 본 간판을 가리켰다.
 
 " 난, 저기서  베르세르크>나 보련다. 천천히 얘기하구 와. "
 " 미안하다. 대신 오늘 맛있는 거 사줄께. "
 " 자식, 그럼 기다린… "
 
 말하며 연석이 몸을 돌리려 한 순간, 동하가 갑자기 걸음을 멈췄다. 
 의아한 표정을 지으며 동하를 본 연석은, 동하의 눈을 따라 
시선의 위치를 바꾸었다.
 
 ' 어…? '
 
 연석의 두뇌가 미처 인식하기도 전에 뒤에서 먼저 소리가 들렸다. 
 아까부터 두사람과 같은 방향으로 계속 걸어온 두명의 소녀들이 
 손을 흔들며 외친 소리였다.
 
 " 시연언니! "
 " 은영언니! "
 
 연석은 먼저 뒤를 돌아 보고, 소리지른 주인공이 아까의 여자아이들임을 
 확인한 후, 다시 앞에 서 있는, 이름이 불린 두 여자 쪽으로 
 시선을 움직였다.
 
 숏커트 머리에 리바이스 청바지를 입고 있는 키 작은 여자는 
 처음 보는 얼굴이었지만, 조금 더 키가 크고 면바지에 재킷을 걸친 쪽은 
 연석의 눈에도 낯익은 얼굴이었다. 
 
 그는 친구가 왜 그토록 급하게 멈췄는지 알았다.
 
 ' 동하의 새 엄마다…! '
 
 너무나 안 어울리는 호칭이라고, 그 순간에도 연석은 생각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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