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지애(禁止愛) (1)
26세.
하나의 사랑이 끝나고 다음 사랑이 찾아오기까지
시간이 걸릴 거라 생각했었다.
…적어도 나에게는.
그러나, 사랑은 그 색채를 완전히 바꾸어
새로운 모습으로 단장을 마치고 나를 찾아왔다.
그것은 너무나도 갑작스러운 감정,
준비가 미처 되어 있지 않던 나를 찾아온 폭풍우였다.
움직일 수 있을까.
…두려워졌다.
나를 가로막고 있던 콘크리트 벽 사이로 가늘게 빛이 날아오고 있다.
그 빛은 내 얼굴에 정면으로 비쳐 왔고…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나에게로 날아온 빛을 맞이한다.
빛이 있는 곳으로… 갈 수 있을까.
…움직여야 해.
멍이 든 무릎을 감싸쥔 채, 나는 일어서려 한다.
누군가가 손을 내밀었다.
얼굴도 모르는 그의 손으로 나의 손을 뻗어 붙잡고,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킨다.
그의 얼굴이 보였다.
미소…
이제까지도, 앞으로도,
그렇게 아름다운 미소를 다시 볼 수 있을까.
내가 여지껏 붙잡고 싶었던 것은 손이 아니라 그 미소였음을
나는 깨달아 버린다.
나의 26세는… 그렇게 나를 스쳐갔다.
사망 1명.
부상 1XX명.
지나가며 아무 생각없이 보던 교통사고 현황판의 숫자가
누군가에겐 가슴철렁한 사건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시연은 처음 알았다.
기대고 싶은 사람을 겨우 찾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것조차도 사치였을까.
난생 처음, 가족>이라는 단어를 제대로 자신의 사전에 넣을 수 있다고
희망에 부풀어 있었는데…
그러나… 언제나 운명은 기대를 배반했다.
슬. 프. 다.
이. 대. 로. 숨. 이. 멎. 는. 것. 이. 더. 나. 을. 까.
하늘은 놀랄 만큼 푸르고 물은 맑게 그녀의 모습을 비추고 있었다.
바람이 시원할 정도로 부는 화창한 오후.
작별인사를 던지기에는 너무나 아름다운 날이었다.
그러나, 보내야 한다…….
그의 시체는 어느 새 재가 되어 그녀의 손에서 흩날려 갔고 그녀는
순간 마지막 희망을 떠나 보낸 것처럼 참고 있던 눈물샘을 터뜨렸다.
아무렇지도 않게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손에 한번 닿았던 그 따뜻함이 없이도 살아갈 수 있을까.
그의 사고는 신혼여행을 다녀온 그 다음주의 일이었다.
신문사에 근무하는 그와,
같은 계열의 잡지사에 근무하는 그녀의 나이차는 17살이었다.
하지만 사람들의 수근거림도, 친구들의 만류도,
그녀가 그를 사랑하는데는 장애가 되지 못했다.
많은 사람들의 반대를 물리치고 결혼식장에 선 26세의 신부는
마치 아버지 같은 신랑을 바라보며 환하게 미소지었다.
막 행복해지려 하고 있었다.
그런데, 다 잡은 것 같던 그 행복은 순간, 손에서 날아가 버렸다.
재와 함께. 바람과 함께.
- 죽음도 우리를 갈라놓을 순 없어.
그런 말을 누가 자신있게 했을까.
남은 자의 상실감을 진정 알고 있다면 감히 그런 말을 노래할 수 있을까.
장례가 끝나고서 그녀는 자신의 아픔을 다스리느라
다른 어떤 생각도 하지 못하고 집에 처박혀 있었다.
머리는 하얗게 흐려져 갔고 이대로 소멸할 것처럼
자신의 존재가 덧없게만 생각되었다.
회사에는 휴가를 냈지만 돌아갈 수 있을지 자신이 없다.
아무렇지도 않게 삶의 치열함 속에 다시 몸을 맡길 수 있을까.
그렇게, 꼬박 일주일이 흘렀다.
소파에 몸을 반쯤 눕힌 채 멍하니 결혼식 사진들을 바라보고 있던
그녀의 눈에 무언가가 들어왔다.
그것은 그의 뒷편에서 무표정하게 카메라 렌즈를 응시하고 있는
한 소년의 모습이었다.
갸름한 얼굴.
아직 어린 표정.
의지가 강해 보이는 눈매.
꼭 다문 굳은 입술.
약간 흘러 내린 앞머리.
키만은 주변에 선 남자들에 뒤지지 않을 정도로 컸지만, 역시 어린애다.
그의 아들.
16살이었다.
병원 분향실에도 제대로 들르지 않았던 아이.
처음 인사했을 때, 차가운 눈으로 나를 보고 있었지.
화장이 끝난 재를 나누어 뿌릴 때도 나에게 눈길 한번 주지 않았어.
' 아버지와ㅡ 닮았어. '
처음에는 느끼지 못했는데 지금 보니… 닮았다는 걸 깨달았다.
지금 이 아이는 뭐하고 있을까.
아버지의 신혼을 방해하기 싫다며 혼자 나가 살고 있는 이 아인.
6개월이 지나면 들어오기로 했었다.
하지만 나를 보던 이 아이의 표정에서 날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금새 느낄 수 있었다. …6개월이 지나도 들어올지 의심스러웠어.
하지만 그 순간엔 자신이 있었다.
그가 있었으니까.
그만 있다면 그의 아들도 언젠가 내게 마음을 줄 수 있을 거란
희망이 있었다.
해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었다…….
이 아이, 제대로 밥은 챙겨먹고 있는 걸까.
그러고 보니, 한번도 제대로 말해 본 적이 없어.
난 이 아이의 어머니가 될 사람이었는데…….
그래…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이 생각났어.
시연은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16세.
그 순간의 나는 인생을 알 만큼 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제 내 앞에 미지의 영역은 더 이상 존재할 수 없으며,
나의 인생이란 빛보다 어둠이 더 많이 포함되어 있다고.
스스로가 약하다는 사실을 인정하기 싫어 입술을 깨문 채,
딱딱한 껍질을 쓰고 누구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도 없는 것이었다.
내 주변 누구도 나를 들여다 보려고는 하지 않았으니까.
자기 인생을 괴로워 하기만도 바쁜 사람들은 그들 나름의 막을 두른 채,
나를 힐끔 쳐다보고 그대로 스쳐 지나갔다.
인정하긴 싫었지만,
나의 내면에선 커다란 외침이 소리없이 터져 나오고 있었다.
제발 바라봐 달라고, 말을 걸어 달라고.
원하고 있었던 것이다.
시공간을 공유할 수 있는 누군가의 존재를.
자신을 감싸고 있는 족쇄를 벗겨 줄 수 있는 마법을 베풀어 줄 누군가를.
하지만 운명은 얄궂게도 하나의 족쇄를 풀자,
다른 감옥에 나를 감금해 놓았다.
달콤하지만 한편으로 너무 써서 고개를 돌리고 싶을 정도의,
마약이 든 초콜렛.
나의 16세는… 그렇게 나를 스쳐갔다.
고교의 저녁은 어딘가 썰렁하다.
한동안 소란스럽게 진동하던 책상 움직이는 소리도 어느샌가 가라앉고
남아 있던 학생들도 차례로 교실 문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청소분단이었던 동하도 책가방을 막 어깨에 걸친 참이었다.
같은 반 친구 연석이 물었다.
" 오늘 저녁, 어떡할거냐. "
" 글쎄. "
" 나가다 뭣좀 사먹을래? "
" 그러지, 뭐. "
연석의 배려를 동하는 알고 있었다.
집에 돌아가면 어머니가 만든 따뜻한 식사가 기다리고 있을 그가
굳이 밖에서 먹고 들어갈 필요는 없는 것이다.
하지만 연석은 언제나 그 쪽에서 먼저 동하에게 '뭔가 먹자'는 제의를 했고,
동하는 그 제의를 조금은 미안하고 기쁘게 받아 들였다.
두사람이 막 나가려던 참이었던 그 때, 열린 교실 문 사이로
동하의 중학동창인 승렬이 되돌아 오는 게 보였다.
승렬은 동하를 보자마자 질문을 던졌다.
" 너, 누나 있었냐. "
" ㅡ없는데. "
호기심이 어린 표정으로 선 승렬에게
동하가 높낮이가 없는 음성으로 대꾸했다.
" 그럼 사촌누난가 보군. 교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댄다. 이쁘더라. "
" 날? "
" 그래. 1학년 강동하. 너 밖에 없잖냐, 우리학년에 그 이름은.
스물 하나나 둘쯤 되어 보이든데, 너한테 그렇게 이쁜 사촌누나가 있다니
다시 봤다. "
동하는 창가로 걸어가서 교문 쪽을 쳐다 보았다.
그러나 역시 누가 서 있는지, 이 거리에선 잘 보이지 않는다.
동하는 조금 떨떠름한 표정을 지으며 빠른 걸음으로 교실 문을 빠져 나갔다.
승렬과 연석도 뭐야ㅡ 하고 중얼대며 동하를 뛰듯이 쫓았다.
운동장을 지나서 교문 쪽으로 향하던 동하는 문득 걸음을 멈췄다.
설마 했는데 짐작이 들어맞은 것이다. 하지만…
' ㅡ어째서? '
긴 머리를 하나로 모아 뒤로 묶고 까만 바지에 그리 높지 않은 굽의 신발.
그리고 하늘색의 재킷을 걸친, 20대 초반으로 보이는 여자가
교문 한구석 뒤편에 몸을 기댄 채 바닥을 내려다 보고 있다.
앞에 서 있는 동하를 느꼈던지 그녀는 고개를 들었다.
" 아--- "
그녀의 얼굴에 조그맣게 어색한 미소가 번졌다.
상대적으로 동하는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
여자가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 동하… 맞지? "
" …네. "
" 후… 저, 진작에 연락해야 했는데… 미처 여유가 없어서.
저녁이라도 같이 먹으면서 얘기하고 싶어서, 기다렸어. …바쁘니? "
" 바빠요. "
동하는 무뚝뚝하게 대꾸하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다음 지나가려 했다.
맞은 편에 서 있는 여자의 당황스런 표정을 본 연석이
그런 그를 붙잡고 툭 하고 핀잔을 던졌다.
마음 속에 짚이는 게 있는 연석이었다.
" 뭐가 바빠, 니가.
여기까지 오신 분인데, 잠깐 얘기라도 해야 예의 아냐? "
" 너 좀 빠질래. 아르바이트 있어요. "
" 아르바이트는 저녁이잖아. 저기요ㅡ 얘, 지금은 괜찮아요, 누님.
그럼 나 먼저 간다. "
연석은 얼떨떨하게 옆에 서 있던 승렬의 팔을 끌고
동하에게 가볍게 인사를 던진 다음, 뛰듯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멍하게 그들의 등을 보고 있던 동하는 시선을 여자 쪽으로 돌렸다.
여자는 아랫입술을 문 채, 어색해 하며 수줍은 듯한 표정으로
동하를 보았다가 눈을 내리깔았다.
긴 속눈썹.
옅은 색의 립스틱.
재킷 안쪽으로 내려다 보이는 쇄골로부터 이어지는 가는 목과 목덜미,
그리고 하얗고 고운 피부가 마치 대학생처럼 보이는 얼굴.
정말이지 결혼한 여자라기엔, 너무 어려 보인다.
동하는 고개를 돌리고 낮게 한숨을 토해냈다.
' 어쨌든, 새 엄마인가……. '
식사를 하자는 시연의 제안을 동하가 거부했기 때문에 온 커피 전문점은
그렇게 조용하진 않았다.
북적대는 사람들의 음성과 음악소리가 어지럽게 뒤섞인 가운데,
두사람은 한동안 앉아만 있었다.
침묵을 깬 것은 소년의 딱딱한 음성이었다.
" 무슨 할 말 있어요? "
" 으응. 요즘… 누구랑 지내니. "
동하는 커피를 한모금 마시다가, 픽 하고 웃었다.
나이보다도 한참을 어려 보이는 얼굴을 하고서,
어른인 척 자기 앞에 앉아 있는 여자가 우습게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정말 걱정하는 듯한 표정으로 앞에 앉아 있는 시연을 보며 동하는 생각했다.
' 마치 가족처럼 얘기하는 군. '
" 혼자 살아요. "
" 친척들이 같이 살자고 하지 않니? "
" 우리 아버지랑 결혼했으면서, 우리 집 사정 그렇게 몰라요?
아무도 없어요, 나 돌봐줄 사람 따윈. "
" 그럼ㅡ 밥은? 도시락은. "
" 사먹어요. 아르바이트도 하고 있고,
이전에 아버지에게 받은 돈 저축해 둔 것도 있고요. "
" 사먹는 거… 몸에 별로 좋지 않을텐데……. "
"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거죠? "
동하가 고개를 들어 시연을 똑바로 쳐다 보았다.
쏘아보는 눈빛에 시연은 당황해서 앞에 놓인 컵에 꽂힌 빨대를 물고
쥬스를 꿀꺽꿀꺽 마셨다.
" 으응. 저… 그러니까… 난, 누가 뭐래도, 네 아버지랑 결혼했잖니.
난, 네 엄만 아니지만 비슷한 존재잖아?
어떻게 사는가 궁금할 수 밖에 없지. "
" 맘에도 없는 소리하지 말아요. "
" ……? "
동하의 눈빛은 싸늘하기만 했다.
" 당신같은 사람이 내 엄마, 아니 엄마 비슷한 존재라도 될 수 있을 것
같아요? 괜히, 나한테 관심갖는 척 할 것 없어요. 위선으로 비치니깐. "
" 그래… 네 말이 맞아.
나처럼 아이도 없는 사람이 엄마 흉내를 낼 수는 없지.
하지만, 누나는 가능하지 않을까. 적어도 가족은.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집… 원래 너랑 아버지가 함께 살던 집이잖아?
그 집, 지금 내가 혼자 지내긴 좀 넓어…. "
" 그래서, 나랑 당신이랑 같이 살기라도 하자는 소리에요? "
" …안될까? "
" 당신, 정말 순진한 여자군.
정말이지, 어떻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랑 결혼까지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결혼했다 해도 당신처럼 젊은 여자랑 클대로 다 큰 남자,
것도 죽은 남편의 아들과 같이 살면 주위에서 고운 시선을 줄 것 같아? "
" ……. "
시연은 동하의 핀잔에 일시에 할 말을 잃었다.
동하는 시연을 똑바로 쳐다 보며 계속 말을 이었다.
" 당신이랑 아버지, 아직 혼인신고도 안 올렸을텐데… 다행스러운 일이죠.
아직 처녀로 행세할 수 있으니까 당신은 당신 갈 길을 가면 돼요. "
" …너…! "
동하의 말이 지나치다고 생각한 시연은
화가 난 표정으로 눈앞의 소년을 노려 보았다.
동하는 전혀 위축되지 않은 채, 그녀의 시선을 똑바로 받아냈다.
한동안 눈싸움이 이어진 끝에 결국 시선을 떨군 쪽은 시연 쪽이었다.
조금 침묵하다가 그녀는 다시 입을 열어 담담하게 말했다.
" 그렇다면, 내가 나가야 되는 거 아냐?
내가 지금 있는 집, 네 아버지 집이고,
이제 네 아버지랑 관계없는 인물인 내가 거기에 살 자격은 없겠네.
좋아. 네가 들어와. 내가 나갈게.
나랑 사는 게 싫은 것 같으니까, 내가 나갈게. "
" 나가든 말든 나랑은 상관없어요. 난 그 집에는 안 들어갈 거니까.
혼자서 그렇게 큰 집에 살 이유도 없고. "
" 그러니까 같이 살자는 거야. 날 누나라고 생각하고…
이상한 일 아니잖아. 남들이 우리에게 무슨 그렇게 시선을 줄 것 같니? "
" 무엇보다 내가 싫어요. "
" 밥은? 혼자서 모든 걸 제대로 챙길 수 있니? 너, 이제 고1이야. "
" 아버지랑 둘이서만 산 것도 벌써 7년이에요.
혼자 챙기는 것 따위, 익숙해요. …자, 이제 나랑 할 얘기 끝난 거죠?
아르바이트 늦으니까 이만 가봐야 돼요. "
일어서서 냉정한 태도로 천천히 걸어 나가는 동하의 팔을 시연이 잡았다.
동하가 그녀를 내려 보았을 때,
시연의 눈은 동하를 똑바로 응시한 채 나직하게 말했다.
" 좋아. 하지만 난, 널 놔둘 수 없어. 어떤 방법으로든 널 챙길 거야. "
동하는 팔을 거칠게 잡아 빼고, 돌아보지도 않은 채
커피 전문점 밖으로 걸어 나갔다.
시연은 동하가 아까까지 마시던 커피잔을 내려다 보았다.
그 곳에는 정확히 동하가 마신 커피값 만큼의 돈이 놓여져 있었다.
시연은 한숨을 쉬며 팔을 뻗어 돈을 집은 뒤, 자리에서 일어섰다.
거짓말을 했다.
하지만 거짓말을 했다는 걸 몰랐다.
부정했다.
하지만 부정했다는 것도 몰랐다.
똑바로 쳐다볼 수 없었다.
그래야만 하는 줄 알았기에.
진실을 자신조차 모르는 거짓 속에 감추고,
불안을 흘러가는 시간 속에 숨기면서,
그 무렵의 나는 그저 살아 있었다…
뚜르르르…
귓전에 들리는 신호음이 왠지 낯설게 느껴졌다.
모든 연락을 차단한 채 한동안 혼자서만 지냈던 탓일까.
여덟… 아홉…… 아홉번 신호음이 갔을 때서야 상대편이 나왔다.
은영선배는 자다 깬 목소리였다.
" 으음… 여보세요…? "
" 여보세요, 은영선배네 집이죠? "
" …어머! 시연이구나. "
" 선배, 자다 깬 것 아녜요? "
" 으응, 오늘 촬영이 일찍 끝나서 현지퇴근하고 집에 오자마자
곯아 떨어졌나부네. 시연이, 넌? "
" 전, 잘 지내요. "
시연은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넌?' 이라고 되묻는 말 속에
은영선배의 걱정과 배려를 짐작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걱정할 것 없어요, 선배. 이제, 괜찮아요.
" 그래, 쉬니까 어때? "
" 좋아요. 몸도 편하고…
근데, 솔직히 지겨워요. 다시 회사에 나가려구요. "
" …훗. 너도 어쩔 수 없는 잡지체질인가 부다.
하긴 너도 이 길에 들어서 벌써 2년째니깐.
지겹다 지겹다 생각해도 이젠 중독된 거야. "
" 그런가 봐요. "
시연은 미소를 떠올렸다.
은영선배의 걸걸하고 약간 수선스런 말투는 시연이 좋아하는 것 중
하나였다. 듣고 있노라면 몸이 따뜻해져 온다.
" 내일 차장님이랑 국장님께 연락 드리겠지만,
선배가 먼저 전해 주실 수 있죠? 저 다시 나간다구요. "
" 우와… 솔직히 너무 기쁘다.
너 빠지고 나머지끼리 만든 지난달 배당량, 정말 치어 죽는 줄 알았어. "
" 지난 달, 선배, 몇 페이지 했어요? "
" 40페이지가 넘었다, 야.
게다가 니가 하던 칼럼들 하나같이 손 엄청 많이 가는 것들 뿐이잖아.
그걸 우리가 나눠 하려니 정말 마감 때 가선
눈 앞에 별이 왔다갔다 하더라구. "
" …후훗. "
" 목소리 건강하게 들리니 기쁘다. "
" 선배. "
" ㅡ응? "
" 보구 싶었어요. "
" 참, 얘두. 나두다. 나, 항상 시연이 편인 거 알지? "
" 고마워요, 선배. "
전화가 끊겼다.
수화기를 내려 놓은 시연은 부엌으로 가서 냉장고 문을 열었다.
냉장고 안은 텅 비어 있었다.
' 장도 안 보고ㅡ 참, 내 정신 좀 봐. '
팩 바닥에 조금 남은 오렌지 쥬스를 전부 따르자 컵은 겨우 반이 찼다.
시연은 쥬스를 마시면서
집에 커피며 녹차도 전부 떨어졌다는 사실을 생각해 냈다.
옷 갈아 입고 마켓에 다녀와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시연은 부엌에 만들어 놓은 2인용 식탁의 앞에 앉아,
의자 위에 다리를 구부려 발을 올려 놓았다.
무릎을 팔로 감싸 안은 그녀의 귓가에 맴도는 대사들.
- 당신, 정말 순진한 여자군.
정말이지, 어떻게 아버지 같은 사람이랑 결혼까지 가게 되었는지
모르겠지만, 결혼했다 해도 당신처럼 젊은 여자랑 클대로 다 큰 남자,
것도 죽은 남편의 아들과 같이 살면 주위에서 고운 시선을 줄 것 같아?
- 당신이랑 아버지, 아직 혼인신고도 안 올렸을 텐데… 다행스러운 일이죠.
아직 처녀로 행세할 수 있으니까 당신은 당신 갈 길을 가면 돼요.
- 아버지랑 둘이서만 산 것도 벌써 7년이에요.
혼자 챙기는 것 따위, 익숙해요. ㅡ자, 이제 나랑 할 얘기 끝난 거죠?
아르바이트 늦으니까 이만 가봐야 돼요.
자존심과 냉소로 가득 차 있던 소년의 얼굴이 떠올랐다.
자기보다 10살이 어린, 그의 아들은 16년이란 짧은 세월동안
이미 세상에 대해 다 알아버린 듯, 그녀를 거들떠도 보지 않는다.
하지만, 자기 자신, 그 말에 아무 반박도 할 수 없었다.
26살이 될 때까지 자신도 상처를 받을 만큼 받았다고 생각했건만,
새로운 상처는 생각도 못한 자리에 생겨 곪아간다.
단순히 아픈 게 아닌, 비참한… 감각.
못된 녀석.
너만 괴로운 줄 아니.
그런 식으로 사람에게 상처주면… 마음이 후련하니.
나도… 나도… 너무 힘들어…
네가 그런 식으로 상철 굳이 안 줘도, 힘들어 죽겠단 말야…….
부엌 창문으로 내다 보이는 하늘이 묘하게 흐리다.
잠시 후, 어둑했던 하늘에서 무색의 가느다란 줄기가 쏟아지고 있었다.
그 소리만을 느끼면서 어느 샌가
시연은 무릎에 얼굴을 묻고 조용히 흐느끼고 있었다.
마지막이야… 정말, 마지막.
가슴에 찬 고름 따위는 흘려 버리자.
빗물에 깨끗하게 녹여버리는 거야.
비가 그치면 크게 심호흡을 한번 하고,
내 자리로 다시 돌아가겠어…….
" 안선생님이 급한 일이 생기셔서 오늘 마지막 시간은 자습으로 한다.
조용히 하고 이 프린트를 풀도록. "
" 와아… "
순식간에 함성이 쏟아졌다.
못 미더운 표정으로 옆반 담임인 영어선생이
문을 드르륵 닫고 나가기가 무섭게, 교실 분위기는 시끄럽게 변했다.
사내 놈들이 가득한 교실은 비가 오면 더 후덥지근하고 퀴퀴한 냄새가
나는 것이, 흡사 사우나에 쓰레기들을 담아 놓은 것 같다.
" 야, 너 어제 걔랑 나갔잖아. 어떻게 됐냐. "
" 어떻게 되긴. "
" 너, 설마…. "
" 짜샤, 해냈구나! 야, 야, 어떻든? "
" 니들같이 젖비린내 나는 새끼들에게 말해준다 한들 알아나 듣것냐? "
" 왜케 깝죽거리냐? 맞고 후회말고 빨랑 까. "
" 그 기집애 존나 말랐더라. 누르면서 아파 죽는 줄 알았어. "
" 마른거랑 아픈 거랑 뭔 상관이야? "
" 골반뼈가 툭 불거져 있드라구.
나중엔 아프다 못해 베개를 몸 사이에 끼우고 했다. "
" 으아… 날씬한 것도 정도가 있어야 되는구나. 그리고? "
" 좋았지. "
" 얼마나 좋냐? "
" 죽여줘. 마스터베이션의 한 2백배 정도. 기집애, 물건 좋든데. "
시덥잖은 새끼들.
옆분단에 모여 있는 놈들의 들으란 듯 떠들어 대는 소리에,
연석은 입가에 고소를 떠올렸다.
반장이란 직책이 귀찮은 때가 바로 이렇게 자율학습을 하고 있는 때다.
선생이 쫓아오기 전에 적당한 정도로 볼륨을 조절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교실을 대충 돌면서 소리를 줄여 떠들 것을 당부하고 있던 연석의 눈에
동하가 들어왔다.
연석은 5초 정도 한자리에 서서 구석에 앉은 친구를 관찰했다.
창가 자리의 동하는 빗줄기를 감상하고 있는 건지,
멍하게 창밖을 응시하고 있다.
아니, 아무것도 보지 않고 있는지도 몰랐다.
연석은 망설였지만 친구를 방해하기로 결심하고 옆으로 갔다.
동하 옆자리에 앉은 녀석은 화장실이라도 갔는 지 자리에 없다.
연석은 빈 자리에 털썩 주저 앉았다.
연석을 알아차린 동하가 옆얼굴에 대고 있던 손을 떼고 눈을 돌린다.
" 어제, 얘기 잘 했어? "
" 무슨. "
메마른 목소리.
언젠가부턴지 모르지만, 동하의 목소리 톤은 변화없이 일정하다.
연석은 친구를 보면서 다른 사람들이 들을 수 없을 정도로 낮게 말했다.
" 새 어머니 말야. "
" 이젠 아냐. "
" 그럼, 아는 누나 정도라고 치자. "
" ㅡ진연석. 다른 사람의 일엔 간섭할 수 있는 한계가 있어.
그런 룰 정도는 아는 녀석이라 생각했는데. "
동하의 말은 날카로왔다.
그러나 이런 정도에 주눅들 연석이 아니다.
싱긋 웃으며 받아 넘겼다.
" 그래. 하지만 이 정도의 질문이 간섭이라 생각지 않으니까 물었던 거야.
과잉반응이구나, 너. "
" ……. "
" 관두자, 미안하다. "
" 같이 살재. "
" …뭐? "
" 자길 누나라 생각하라나? 뭔가 착각하고 있는 여자야. "
" 뭐라고 했어? "
" 길게 얘기할 것도 없었어. 싫다고 했지. "
" 왜…? "
" 더 보고 싶지 않으니까. "
동하는 책상 위에 올려진 책을 응시하며 던지듯 말한다.
연석은 뭐라 대꾸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
그 때, 자리 주인인 민수가 돌아왔기 때문에
그는 도피하는 기분으로 자리를 비켜 주었다.
복도 쪽 분단에 위치해 있는 제 자리로 돌아온 연석은
창 밖으로 고개를 돌린 동하를 힐끔 바라 보았다.
아까와 같은 자세.
아니, 지금은 이어폰까지 귀에 꽂고 주위의 소리를 차단하고 있다.
음악이 미친 듯이 울어대고 있었다.
음악과는 별개로 귓전에서 윙윙거리며 동하를 방해하는 소리들.
여자가 남긴 한마디 한마디가 또렷이 머릿 속에 남아 계속해서
그를 향해 말하고 있다.
마치, 소녀처럼 느껴지는 차분한 음성.
- 으응. 저… 그러니까… 난, 누가 뭐래도, 네 아버지랑 결혼했잖니.
난, 네 엄만 아니지만 비슷한 존재잖아?
어떻게 사는가 궁금할 수 밖에 없지.
- 그래… 네 말이 맞아.
나처럼 아이도 없는 사람이 엄마 흉내를 낼 수는 없지.
하지만, 누나는 가능하지 않을까.
- 그러니까 같이 살자는 거야. 날 누나라고 생각하고…
이상한 일 아니잖아. 남들이 우리에게 무슨 그렇게 시선을 줄 것 같니?
- 좋아. 하지만 난, 널 놔둘 수 없어. 어떤 방법으로든 널 챙길 거야.
밉다…
앞에 있으면 가슴으로부터 올라오는 반감을 어찌할 수 없다.
어째서일까.
아버지랑 마지막까지 같이 지낸 사람이라서일까… 뺏긴 기분이 들어서?
집을 나가겠다고 말했던 것은 내 쪽이다. 그런데ㅡ
그저 앞에 있으면 어떤 식으로든 상처를 주고 싶어서, 견딜 수 없었다.
첫 인사 때 수줍게 웃던 그녀를 보았을 때도.
결혼식에서 환히 미소짓는 그녀를 보았을 때도.
장례를 치르며 눈물을 떨구는 그녀를 보았을 때도.
미움의 감정을 추스릴 수가 없다…
하지만 이제 끝이야.
보지만 않으면 상처를 주고 받지 않을 수 있다.
젠장, 이런 감정 따위 느끼고 싶지 않아…….
시연은 정말로 은영선배에게 전화한 그 다음 다음 날부터 회사에 나갔다.
이미 촬영이 진행되고 있는 상황이라,
여느 때보다 적은 20페이지 정도의 배당량이 주어졌지만,
지금부터 마감 전까지 진행하기엔 꽤 벅찬 분량.
시연은 일단 외주를 주고 있는 스튜디오에 전화를 걸어 촬영 스케줄을 잡고,
패션이나 뷰티칼럼에 쓸 모델들에게 전화를 돌리고,
자료실과 인터넷을 뒤지면서 칼럼에 필요한 정보들을 찾고,
그리고 촬영을 시작했다.
정말 숨돌릴 틈도 없이 시간이 지나갔다.
그 날도 여느 때처럼 오전 9시에 스튜디오에 도착한 그녀에게
사진부 김차장이 다가왔다.
김차장은 키가 크지 않고 마른 체구에 약간 날카로운 윤곽을 지닌,
무뚝뚝한 인상의 남자였다.
진행기자들에게 좋은 소리를 한 적이 거의 없는 반면,
온갖 악역은 다 맡기 때문에 기자들 중에 김차장과 한번쯤 부딪쳐 본 적이
없는 사람은 거의 없을 정도였다.
" 시연씨. 오늘 파트너, 나야. 스튜디오 촬영 맞지? "
" 네, 차장님. "
시연은 속으로 좀 걱정되었다.
김차장과 같이 진행할 때면 여전히 떨리는 그녀이다.
갓 회사에 들어온 햇병아리 기자시절부터 어찌나 야단을 많이 맞았던지
김차장과 마주친 그 날, 아무 일 없이 하루가 지나가면
왠지 허전해지기까지 하는 것이다.
오늘이 바로 그런 날이었다.
모든 것이 완벽하게 진행되었다.
코디네이터는 딱 시연이 원하는 의상 플러스 알파를 빌려왔고,
메이크업과 헤어 담당자는 모델을 딱 원하는 스타일로 알아서 꾸며 주었으며,
모델들은 시연과 김차장의 주문에 딱 맞게 포즈를 취했다.
덕분에, 상당히 시간이 걸리리라 예상했던 촬영은
오후 4시 반에 끝나 버렸다.
시연은 어지러워진 스튜디오를 정리하며
오늘의 일등 공신인 코디네이터에게 말을 걸었다.
" 윤희씨, 너무 잘됐지. "
" 글쎄말야. 오X세컨에서 죽어도 오늘 반납해야 한다고 난리쳐서
나 내심 걱정하고 있었거든요. "
" 맨날 오늘처럼만 해줘요. 나 오늘 너무 감동했어. 정말 고생했겠다.
내가 미안하더라구요. 소품까지 이렇게 빌려오구. "
" 언니, 저 갈께요. "
" 그래, 수고했어. "
고교생 모델인 미은이 스튜디오 문 쪽으로 나가며 인사했다.
손을 흔들어 보이고 있던 시연의 어깨를 김차장이 툭 건드렸다.
" 시연씨, 오늘 수고했어. "
" 차장님도 수고하셨어요. "
" 말야, 역시 시연씨는 일하고 있을 때가 제일 멋있는 거… 알지? "
" …차장님. "
시연은 웃었다.
칭찬을 말하는 것이 어지간히 어색했던지
김차장의 얼굴에 홍조가 올라와 있었기 때문이다.
" 아세요? 차장님한테 이렇게 칭찬 받은 거, 저… 회사 들어와 첨이에요. "
" …그런가? "
김차장은 쑥스럽게 웃더니 자리로 돌아가
슬라이드 필름을 들여다 보기 시작했다.
시연의 가슴에 오래간만에 행복감이 차오른다.
스튜디오에 막 들어온 은영선배가 같이 저녁 먹으면 어떠냐고 제안해 왔지만,
시연은 다음 기회로 미루자고 거절했다.
촬영은 일찍 끝났지만 시연의 하루 일과가 그대로 끝난 것은 아니었다.
가 봐야 할 곳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일어나려고 합니다.
함께 있었던 지난 1년 6개월간은 너무나 즐거웠어요.
항상 보호받기만 했던 저였죠.
그 땐 어떻게 그걸 당연하다 생각했던 걸까요.
허공에 뜬 채 모든 걸 그저 받기만 하고 있었던 그 때.
이제 땅에 뿌리를 내리고 스스로 양분을 찾으려고 합니다.
불행하다 생각하는 일, 이젠 없을 거예요.
눈물샘을 지우고 강해지려 합니다.
언젠가 당신 앞에 당당하게 설 수 있을 만큼.
수업은 끝난 지 오래였지만 반장인 연석은 임원 회의 때문에
여느 때와 달리 늦게 귀가하고 있었다.
빠른 속도로 교문을 막 지나던 연석의 등을 누군가 건드린 것 같은
느낌이 들어, 그는 걸음을 멈추고 뒤돌아 보았다.
' 어…? '
지난 번에 본, 동하의 새 어머니>가 서 있었다.
정말 젊다고 연석은 생각했다.
21살인, 연석의 큰 누나가 더 나이들어 보이는 것 같다.
" 저, 동하 친구 맞죠? 지난 번에 한번 본 것 같은데… "
" 예. 진연석이라고 합니다. "
" 저… 동하, 집에 벌써 갔나요? "
" 아르바이트 장소로 바로 갔을 텐데요. "
" 그래요… "
시연의 얼굴이 실망으로 굳어졌다.
' 아르바이트하는 곳으로 가 봐야 하나? '
" 동하, 집에 몇시에 오나요? "
" 글쎄요… 꽤 늦게 오는 걸루 아는데… 한 11시… 12시나 되야 올걸요? "
" 그래요… 그럼 아르바이트하는 곳 알아요? "
" 가셔도 너무 바빠서 제대로 말 붙일 시간도 없을 거예요.
그리고… 동하, 요즘 좀… "
시연은 연석이 뭘 말하려 하는지 바로 이해했다.
친구도 동하가 자기를 싫어하는 정도는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뭐라 말을 이어야 할 지 몰라, 머뭇거리며 서 있는 연석을 보고
시연은 안되겠구나ㅡ 생각했다.
' 내가 대뜸 아르바이트 장소로 가면 가르쳐 준 친구 쪽이 곤란하겠지…. '
대신 시연은 동하의 핸드폰 번호를 받아 적었다.
여지껏 번호조차 모르던 자신을 한심하게 생각하며.
다이어리 위로 펜을 놀리는 그녀를 보며 연석이 덧붙였다.
" 낮에는 거의 꺼 놓고 삐삐처럼만 이용하는 것 같아요. "
" 그래요. 먹을 거라도 해주고, 방이라도 치워주고 싶었는데… 안되겠네요.
그럼 가보겠어요. …고마워요. "
그녀는 펜과 다이어리를 가방 안에 집어 넣고 인사를 건넨 다음,
몸을 돌려 걸어가기 시작했다.
열 발자국 정도를 떼었을 때,
등 뒤에서 연석이 시연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 저, 잠깐만요! "
시연은 걸음을 멈췄다.
두려웠다…
뱃속에 조금 남은 꿈마저 토해 버릴까봐.
꿈과 현실이 떨어져 있다 생각했기에.
고개를 들어 응시하면,
그건 꿈이 될 수 없다고 생각했기에.
그러나…
그건 그대로 새로운 구역질이 될 뿐.
스스로 몸을 차게 만드는 바보 짓을
오랫동안, 되풀이하고 있었다…….
한밤중.
지쳤다.
머리가 핑 도는 것 같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몸을 혹사시키는 것이 좋다.
딴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에.
생각에 몰입하게 되면 괴로워진다.
마음이 힘든 것보다 몸이 힘든 게 낫다.
" 가볼께요, 형. "
" 그래, 낼 보자. "
주인형에게 인사하고 동하는 카페를 나섰다.
낮엔 커피와 생과일쥬스를, 저녁에는 술도 마실 수 있는 카페가
바로 그가 아르바이트를 하는 곳이다.
이 시간이 되면 항상 눈이 침침해 온다.
담배 연기가 눈의 각막으로 침입한 느낌이랄까.
머리도 어찔거린다.
동하 자신도 담배를 전혀 입에 안 대는 건 아니지만 요즘은 직접 피는
것보다 카페에서의 간접흡연으로 더 많은 연기를 들이마시는 것 같다.
돈을 벌기 위해선 희생이 필요하군… 하고 생각하며 눈과 콧등 사이를
한번 가볍게 손가락으로 문지른 뒤, 자취방으로 향하는 동하였다.
동하가 지금 지내고 있는 원룸은 카페에서 그리 멀지 않은 거리에 있다.
여느 때와 다름없이 이어폰을 낀 채 걸어가고 있던 그는,
문득 자신이 방열쇠를 가지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 아차… 연석이네 집에 두고 왔구나… '
어젯 밤 늦게, 아르바이트하는 카페로 연석이 찾아 왔었다.
집에 부모님도 누나도 없는데 놀러 오지 않겠냐는 것이었다.
별 생각없이 연석의 집에 놀러가서 자고 오늘 아침, 그 집에서 바로
등교했었다.
그 때, 열쇠를 연석이 방 책상 위에 올려 둔 채 그냥 나온 것이다.
동하는 스스로 '혼자 사는 놈이 이렇게 정신이 없어서야…' 하고 자책했다.
' 스페어 키가 사무실에 있었지, 아마?
아무래도 키를 하나 복사해 둬야겠어…. '
동하는 머리를 톡톡 치다가 귀에서 느슨하게 빠져 달아나는 이어폰을
바로 꽂고 다시 걸음을 빨리 했다.
청바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 별이 별로 없는 밤하늘을 바라보고 있으면
여러 생각들이 떠오른다.
엄마… 잘 계시는 걸까.
아버지가 돌아가셨단 사실, 연락하지 않았다.
연락할 수도 없고 연락한다 한들 장례식에 참석할 수도 없다.
비행기를 타고도 십여시간이 걸려야 갈 수 있는 미국이란 나라에서
두번째 남편과 아이들에 둘러싸여 행복하실까…?
아주 가끔은, 나와 아버지 생각을 하고 계실까?
아냐, 그냥… 행복하시기만 하면 좋겠어.
나, 잊혀져도 좋아… 엄마가 행복할 수만 있다면.
한때는 원망도 했지만, 이젠 엄마 삶에 상처가 없었으면 한다.
엄마없이 지낸 7년이 보상받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걸.
저녁시간 내내 혹사시켰던 두 다리는 걷는다기보다 끌고 온다는 느낌이
들만치 무거웠다.
걸으면서도 피로가 자꾸 몰려와 동하는 돌아가는 동안 몇번이나
눈을 비벼댔다.
…오늘따라 왜 이렇게 힘들까.
얼마 안되는, 집까지의 거리가 이렇게 멀게 느껴진 적이 없었던 것 같다….
' 아아… 정신차려야 하는데… 오늘은 방을 치워야 하는데… '
지극히 현실적인 고민을 하면서 집 앞에 도착해 보니,
다행히 사무실 아저씨는 아직도 깨어 있는 듯 불이 켜져 있었다.
동하는 안도의 숨을 내쉬며 사무실 창문을 두들겼다.
" 동하 학생. 누나도 있다면서 왜 혼자 살어? "
동하를 본 아저씨의 첫마디였다.
" 누나…? "
" 음, 오늘 왜… 여기 자주 오는 친구--- "
" 연석이요? "
" 그래, 그 학생이랑 아주 예쁘장한 아가씨가 왔는데--- 누나라고 해서,
난 그런 줄 알았는데? 아니었나? "
" 예에… "
" 친구는 먼저 가버리고 아가씨가 나중에 나와서 열쇠를 맡겨 놓고 갔어.
---자. "
키를 받아 쥔 동하의 머릿 속에 생각이 뒤섞이고 있었다.
피곤함도 사라진 듯 동하는 빠른 걸음으로 계단을 걸어 올라가
계단 바로 옆에 있는 문을 따고 방으로 들어갔다.
허둥대느라 오히려 열쇠가 잘 돌아가지 않는다.
설마--- 연석이 녀석…!
불을 켠 동하의 눈에 좁은 원룸이 들어왔다.
원룸의 모습은 여느 때와 전혀 달랐다.
보통 때라면 책상 위엔 책이며 물 마신 컵 같은 것들이 온통 흐트러져 있고
침대에는 벗어 놓은 파자마가 이불과 함께 둘둘 말려 있고 바닥에는 읽다 만
신문이 그대로 놓여 있어야 했다.
그러나 지금 동하의 눈에 비친 원룸은 마치 새로 입주한 것처럼 깨끗하게
정돈이 되어 있다.
침대에는 시트와 이불을 깔끔하게 깔아 놓았고, 책상에 놓인 책들은
책꽂이에 가지런히 꽂혀 있는 모습.
바닥에 널려있던 신문들도 한구석으로 치워져 있다.
부엌도 마찬가지였다.
제대로 닦지 못해 계란 노른자 같은 것이 튀어 굳은 것을 그대로 방치해
놓았던 가스렌지도 반짝거릴 만큼 깨끗히 닦여 있었고 설거지통에 가득
쌓여 있던 그릇이며 접시들은 깨끗이 씻어져 건조대 위에 올려져 있었다.
화장실 안도 깨끗이 청소했고 빨래는 물론, 탈수에 건조까지 된 속옷이며
타월 등도 예쁘게 접혀 붙박이장 안에 들어 있다.
문득 책상 위에 놓인 종이 한장을 발견하고 집어 들었다.
그 종이 위엔 지폐 몇장과 명함 한장이 놓여 있었다.
종이에 적힌 글을 읽은 동하는 아랫입술을 깨문 채 부엌으로 향했다.
가스렌지 위에 놓인 냄비에는 미역국이 가득 차 있었고 냉장고 안에는
감자사라다로 만든 샌드위치와 1리터짜리 쥬스 한병이 들어 있다.
냉장고 문을 연 채 한동안 멈춰 서 있었다.
불쾌감이 목끝까지 치밀어 온다.
정말… 쓸데없는 일을 하는 여자다…….
미역국을 개수대에 쏟아 붓고, 감자 샌드위치는 쓰레기를 담는 봉지에
버렸다. 쥬스도 버릴까 하다가 그것만은 그냥 냉장고에 넣어 두었다.
책상 앞으로 다시 돌아온 동하는 이번엔 아까의 종이를 구겨
방 입구 쪽에 있는 쓰레기통에 던져 넣었다.
구겨진 종이는 쓰레기통으로 정확히, 빨려 들어간다.
그 위에 얹혀 있던 돈과 명함을 보며 난감한 표정을 짓던 그는
책상 왼쪽 제일 윗 서랍을 열어 다이어리를 꺼냈다.
그리고 돈과 명함을 다이어리 안에 끼운 다음, 본래 자리에 돌려 놓고 서랍을 닫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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