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555.인연(5)

오늘의 쉼터 2014. 9. 23. 00:17

 

555.인연(5)

 

 

(1698) 인연-9

 

 

“혹시 마음이 변하지 않으셨나 해서.”

하고 김태영이 말했을 때 서연주는 어깨를 늘어뜨렸다.
 
그렇게 금방 변할 리가 있겠느냐 인마. 넌 여자 심리 공부 좀 더 해야 돼.
 
이럴 땐 그냥 놔 두는 것이 이롭단다.
 
머릿속으로 그런 단어가 차례로 지나갔지만 입 밖의 말은 부드럽게 나갔다.

“제가 지금 바빠서요. 그리고.”

한호흡 하고나서 서연주는 말을 이었다.

“약속은 바뀌지 않았어요.”

마음이 변하지 않았느냐는 말을 그렇게 정정해 준 서연주가 웃음띤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요, 그럼 다음에.”

핸드폰의 덮개를 닫은 서연주는 벽에 머리를 붙이고 눈을 감았다.
 
월세방을 쫓겨나 오갈 곳도 없는 처지로 동해안을 가다니.
 
다시 얼굴에 쓴웃음이 떠올랐고 그때 방바닥에 내려놓은 핸드폰이 울렸다.

눈을 뜬 서연주가 힘들게 핸드폰을 집어 보았다가 몸을 세웠다.
 
대학 부교수이며 서연주의 고등학교 선배인 유선숙의 전화였다.
 
유선숙은 서연주의 후원자 역할을 했는데 이번 건설회사 알바도 유선숙이 소개해 준 것이다.

“네, 교수님.”

7년 선배인데다 미국 박사인 유선숙에게 서연주는 감히 선배 소리도 못한다.
 
긴장한 서연주의 귀에 유선숙의 목소리가 울렸다.

“건설회사 알바 바쁘니?”

“아녜요. 바쁘진 않습니다.”

“오늘 오후엔 뭐해? 네가 바쁘지 않다면 5시에 일이 있는데.”

“저, 무슨 일인데요?”

오후에는 집 구하러 다녀야 했으므로 서연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러자 유선숙이 억양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꽤 큰 회사 일이 있어, 사장 통역 일인데, 파트타임이지만 연간 계약을 해줄 수 있다는구나.”

서연주의 심장이 세게 뛰기 시작했다.

연간 계약을 하면 계약금을 받게 되는 것이다.
 
서연주의 꿈이었다. 유선숙의 말이 이어졌다.

“가볼래? 오후 5시에 만나 보라는데.”

“가죠, 교수님.”

“그럼 전화번호 적어.”

“네, 교수님.”

전화번호를 불러준 유선숙이 이번에는 다짐하듯 말했다.

“나도 선배님 통해서 이 일을 받은 거야.
 
용모 단정하고 일주일에 서너번 통역일을 할 수 있는 여자를 추천해 달라는데
 
딱 네 조건하고 맞더구나.
 
믿을 만한 선배가 말해주신 거라 괜찮을거야.”

“고맙습니다, 교수님.”

“다, 네가 운이 좋은거지.”

“은혜 잊지 않겠어요.”

“네가 열심히 사는 것 같아서 기쁘다.”

전화가 끊겼을 때 서연주는 어금니를 물었다.
 
콧등이 찡해지면서 눈에 눈물이 고여졌기 때문이다.
 
눈을 깜박이자 두줄기 눈물이 주르르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렇다. 열심히는 산다.
 
그런데 좀처럼 풀리지가 않는다.
 
수없이 알바를 계속해 왔지만 겨우 먹고 살 뿐이다.
 
옷도 청계천 시장에서 만원, 이만원짜리를 사서 입었고 택시를 탄 적도 오래 되었다.

남자는 수없이 바꿨지만 지금은 어느 놈이 어느 놈인지 이름도 다 잊었다.
 
섹스도 마찬가지. 다 그 놈이 그 놈같다. 테크닉도 어쩌면 그렇게 똑같은지,
 
앞 아니면 뒤로, 다시 눈을 감은 서연주는 벽에 머리를 기대고는 두 다리를 길게 뻗었다.
 
남자는 외로움이나 욕구를 해소시키기 위한 지팡이 역할이었을 뿐이다.
 
그렇다. 이용물이었다. 어느 놈도 내 지금까지의 인생에 큰 도움이 되지 않았다.

 

(1699) 인연-10

 

 

평소의 김태영이었다면 서연주에게 이런 전화를 하지 않았다.
 
여자한테 거부당한 지 몇시간도 되지 않아서 이제는 마음이 변했느냐는 따위로
 
전화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조철봉의 영향이다.
 
적극적인 행동,
 
이긴 자가 결국은 강한 자라는 따위의 조언을 받지 않았다면 이러지 않았다.

김태영은 기를 쓰고 서연주에게 다시 전화를 했지만 이번에도 좌절당했다.
 
그러나 인간 심리가 어디 이성적, 논리적으로 전개되는가?
 
바로 지금 김태영의 경우가 그렇다.
 
거부당하면 당할수록 더 타오른다.
 
오기일 수도 있고 승부욕, 또는 복수심이나 정복욕이 발동되었을지도 모른다.
 
김태영은 전화가 끊기고 나서 한참 동안이나 공사장 한복판에 서 있었다.
 
주위로 인부들이 벽돌을 나르는 중이었다.
 
헬멧을 쓴 인부들은 무표정한 얼굴로 바쁘게 움직였다.
 
김태영은 지금 현관의 바닥 공사를 체크하고 있는 것이다.
 
이윽고 심호흡을 하고 난 김태영은 아직도 손에 쥐고 있던 휴대전화를 켜고는 버튼을 눌렀다.

“응, 태영이냐?”

신호음이 세 번 울리고 나서 조철봉이 전화를 받았다.
 
오후 2시 반이다.

“형님.”

갑자기 가슴이 먹먹해진 김태영이 입 안에 고인 침을 삼키고 나서 말을 이었다.

“저기, 바쁘세요?”

“아니, 괜찮아. 무슨 일 있는 거냐?”

“자꾸 이런 전화 드려서 웃으시겠지만.”

“뭐가?”

해놓고서 조철봉이 부드럽게 말했다.

“네가 무슨 말을 하건 안 웃는다. 나한테 체면 차릴 것도 없다.”

“저기, 그 여자 말인데요.”

“아, 그 여자.”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조철봉이 바로 말을 받았다.

“그래, 조사 보고는 받았니?”

“예. 형님.”

“잘 진행해. 정보는 대단히 중요한 거다.”

“예. 그런데.”

전화기를 고쳐 쥔 김태영이 말을 이었다.

“잘 안 되네요. 제가 마음에 들지 않는 것 같단 말입니다.”

“…”

“그 여자가 상대한 남자 모두 다 그렇고 그런 놈인데도 말입니다.”

“…….”

“오늘도 두 번이나 차였습니다. 동해안으로 가자고 했더니….”

“야, 태영아.”

조철봉이 말을 잘랐다.

“서둘지 마라.”

“예. 형님.”

“넌 정보를 보고 어떤 작전을 쓴 거야? 그걸 알고 싶다.”

“작전은 없습니다. 여자가 요즘 두어 달간 남자 만난 적이 없다고 조사 자료가 나왔기 때문에….”

“그냥 만나자고 한 거구먼?”

“예. 형님.”

“그 여자 남자 관계가 많았어?”

“예, 아니, 조금요.”

“조금이라, 몇명이라고 조사되었지?”

“그, 그게, 대여섯 명 정도.”

47개월에 12명이라고 하면 조철봉이 놀랄 것이었고 서연주에 대한 선입견이 나빠질지도 모른다.
 
그러자 조철봉이 3초쯤 가만 있더니 말했다.

“인연이 안 되려면 아주 붙여 놓고 묶어 놓아도 안 되고 될 인연이면 떼어 놔도 된다.
 
그러니까 기다려.”

조철봉의 목소리가 조금 딱딱해졌다.

“내가 지난번에 이야기했지? 여자가 등을 돌렸을 때 쫓아가는 게 아니라고.”

들었는지 김태영은 기억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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