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557.인연(7)

오늘의 쉼터 2014. 9. 23. 00:18

 

557.인연(7)

 

 

(1702) 인연-13

 

 

유리 젤린스키는 대머리에 비대한 체격의 사내였는데 언제나 웃는 표정의 호인 인상이었다.
 
약속 장소인 호텔 한식당의 방에 먼저 와 기다리던 유리는 방으로 들어서는 조철봉과 서연주를
 
보더니 활짝 웃었다.

“멋있군요.”

그쯤은 조철봉도 이해했지만 서연주가 정색하고 통역했다.
 
멋있다고 한 것은 저를 보고 말한 것인데도 그랬다.
 
식탁에 앉은 조철봉이 서연주를 소개했다.

“내 통역이죠. 앞으로 잘 부탁합니다.”

“제가 오히려….”

유리는 영어로 말했다.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유리가 말을 이었다.

“통역이 얼마나 중요한지 잘 아실겁니다.
 
실제로 통역 실수로 협상이 틀어진 경우가 많아요.”

그 말을 통역하면서 서연주는 조금 민망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 음식이 들어왔으므로 셋은 입을 다물었다.
 
서연주가 긴장하고 있다는 것을 조철봉은 태도만 봐도 알 수 있었다.
 
조금전 커피숍에서 만났을 때 서연주는 몸을 굳힌 채 제대로 시선을 마주치지도 못했다.
 
첫 업무였기 때문일 것이다.

“이야기 들었겠지만….”

한정식 반찬은 수십가지가 되었기 때문에 종업원들이 찬을 내려놓는 동안 조철봉이
 
서연주에게 말했다.

“하바로프스크에서 이 사람하고 합작투자 회사를 차릴까 검토중이야.
 
이 사람은 적극적인 입장이지.”

서연주의 눈에 생기가 돌았다.
 
열심히 듣는 자세가 진지했으므로 조철봉은 저도 모르게 빙긋 웃었다.

“오늘 이 사람 이야기를 듣고 서연주씨도 판단을 해보라고.”

서연주를 데려온 이유가 바로 그렇다.
 
서연주에게 유리 젤린스키를 판단해보라고 해놓고 조철봉은 서연주를 살펴볼 것이었다.
 
같이 있으면 사적 대화도 나누게 될 것이었고 그동안에 허실이 드러난다.
 
식사를 하면서 유리는 중고자동차 사업의 전망을 역설했는데 서연주의 표정도 열기를 띠었다.
 
유리는 합작공장 설립 첫해부터 흑자를 예상했고 3년 후부터는
 
이윤을 모아 대규모 운송사업으로 분야를 넓히겠다는 포부를 말했다.
 
물론 그 서류는 이미 기획조정실 실무자들이 검토를 하는 중이다.
 
식사하는 동안 한국산 소주를 세 병이나 마신 유리의 얼굴은 상기되어 있었다.
 
조철봉도 한 병쯤 마셨으므로 약간 취기가 올랐다.

“조, 하바로프스크에는 미인들이 많습니다.
 
물론 여기 있는 미스 서보다는 못하지만 말이죠.”

유리의 말을 그렇게 통역한 서연주의 얼굴에 희미하게 웃음기가 떠올랐는데,
 
어느덧 긴장이 풀려가고 있다는 증거일 것이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여 보이자 유리는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하바로프스크 미인들이 더 좋습니다.
 
눈처럼 흰 피부에 윤기까지 흐른단 말이죠.”

서연주가 거기까지 통역하더니 힐끗 조철봉의 눈치를 보았다.
 
서연주는 유리가 권한 소주를 딱 한 잔 받아놓고 아직 다 마시지도 않았다.
 
그때 조철봉이 말을 받았다.

“유리씨, 외면의 아름다움보다 내면이 중요한 겁니다.
 
그런 면에서 한국 여자들은 전통과 긍지를 갖고 있지요.”

서연주가 눈을 빛내며 통역했다.
 
오늘 석간 신문에서 보았던 남원 춘향이 이야기가 떠올랐기 때문이지만
 
그것을 서연주가 알 수 있겠는가?
 
조철봉의 열변이 이어졌다.

“제 첫남자를 향한 일편단심, 이런 건 외국에서는 드물 겁니다.”

춘향전이 소설이라는 것을 말할 필요도 없다.

 

 

(1703) 인연-14

 

 

저녁 식사를 마쳤을 때는 오후 9시가 되어갈 무렵이었다.
 
그동안 유리 젤린스키는 소주를 두 병쯤 더 마셨으며 조철봉도 분위기에 젖어 한 병을 더 마셨다.

사업 능력은 아직 파악되지 않았지만 유리의 친화력은 뛰어났다.
 
시종 분위기를 편안하게 이끌면서 일분에 한 번은 웃음을 터뜨리게 만들었다.
 
물론 그것을 통역한 서연주의 역할도 중요했다.
 
우스운 이야기가 통역의 입을 거치고 나면 괴상하게 변할 수도 있다는 것을 조철봉도 아는 것이다.
 
농담도 남의 이야기나 들은 사건을 주제로 삼는 것과 제 자신과 주변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로
 
나누어지는데 유리는 후자의 방식이었다.
 
순전히 제 실수나 어처구니없는 무용담, 여성 편력을 주제로 삼아 우스갯소리를 한 것이다.
 
그래서 실감이 더 났지만 상당한 용기가 필요한 데다 위험 부담도 감수해야만 하는 방법이었다.
 
제 약점을 스스로 드러내는 꼴이었으니 얼마든지 이용당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조철봉은 그것을 호의로 받아들였다.
 
제 약점까지 우스개로 털어놓는 유리의 입장에서는 이쪽을 믿는다는 의미도 될 것이었다.

유리와 호텔 현관에서 헤어진 후에도 조철봉의 얼굴에는 웃음기가 남아 있었다.
 
조철봉이 그 얼굴로 서연주를 돌아보며 물었다.

“차나 한잔 할까?”

“네, 사장님.”

바로 대답한 서연주도 웃음띤 얼굴이었다.
 
불빛을 받은 서연주의 얼굴 윤곽이 뚜렷해졌으므로 조철봉은 심호흡을 했다.
 
아름답다.
 
조철봉에게 여자는 매 순간 아름답다.
 
물론 그 여자가 작업대상이 되면 더 그렇다.
 
그들은 다시 호텔 안으로 들어가 2층의 바로 향했다.
 
조철봉이 들어서자 지배인이 반색을 했는데 서연주에게는 시선도 주지 않았다.
 
조철봉에 대한 예의상 그런 것이다.
 
바에 들어올 때마다 동행한 여자가 달랐으니 얼굴을 본다면 실례다.

“술 한잔 할까?”

구석 자리에 앉은 조철봉이 묻자 서연주가 여전히 웃음띤 얼굴로 머리를 끄덕였다.
 
조철봉이 기다리고 서있는 지배인에게 눈짓을 하며 말했다.

“내가 남긴 술이 있거든.”

“저, 이런 데 첨 와요.”

하고 서연주가 말했으므로 조철봉이 머리만 끄덕였다.
 
바로 엊그제 서연주는 동해건설의 유중환 부장하고 그린호텔의 바에서 협상을 했던 것이다.
 
조철봉은 서연주가 서울호텔 바에는 처음 왔다고 말한 것으로 수용을 했다.
 
서울호텔은 특급이었고 그린호텔은 무궁화 세개짜리이기도 한 것이다.
 
지배인은 밸런타인 30년을 들고 왔는데
 
그것으로 조철봉은 서연주의 가치를 대충 측정할 수 있었다.
 
지배인이 보는 서연주의 가치였다.
 
조철봉은 이곳에 조니워커에서부터 밸런타인 17년 등 네댓 종류의 술을 보관해 놓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여자를 데려왔을 때 특별한 지시를 받지 않은 지배인이 가져온 술 종류로 등급을 알 수
 
있었다.
 
서연주는 특급이다.
 
밸런타인 30년보다 비싼 술이 보관되었는지 알 수 없었지만
 
얼마전에 나이트에서 여자 하나를 데려왔을 때 가장 싼 위스키가 나왔고 그 판단이 정확했다.
 
바 지배인쯤 되면 여자 보는 안목이 전문가 수준인 것이다.

“자, 한잔.”

기분이 좋아진 조철봉이 술병을 들고 말했다.
 
지배인이 여전히 시선도 주지 않고 돌아서자 조철봉은 서연주의 잔에 술을 채웠다.

“입사 기념이고 첫 업무를 끝낸 기념이야.”

그러나 테스트는 아직도 많이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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