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552.인연(2)

오늘의 쉼터 2014. 9. 20. 20:05

552.인연(2)

 

 

(1692) 인연-3

 

 
다음날 현장으로 출근한 김태영은 서연주를 만나지 않았다.
 
현장 건물은 22층 12만 제곱미터 규모인데다 마무리 작업으로
 
하루 5백여명의 인력이 붐비고 있는 것이다.
 
김태영의 담당인 설계분야에 통역이 필요하지 않은 이상 서연주하고는 만날 일이 없다.
 
그런데 김태영이 TV연속극을 보면서 꼭 투덜대던 일이 자신한테도 일어났다.
 
연속극을 보면 천만 인구를 가진 그 넓은 서울바닥에서 남과 여가 우연히 잘도 만나는 것이다.
 
그것도 길거리에서, 식당이 서울바닥에 서너개 뿐인지 식당에서,
 
사람 갖고 놀린다고 욕지거리를 해댔는데 그런 일이 김태영한테도 발생했다.
 
점심시간 바로 전에 20층의 휴게실 공사장 앞에서 딱 마주친 것이다.

“아.”

하고 서연주가 눈을 크게 뜨더니 환하게 웃었다.
 
흰 치아가 드러났고 그것을 본 순간 김태영의 가슴이 쩌르르 울렸다.
 
서연주는 긴 생머리를 말 꼬랑지처럼 리본으로 묶어 늘어뜨렸다.
 
진 바지에 반팔 흰 셔츠를 입고 운동화를 신었는데 손에는 서류와 흰색 헬멧을 들었다.
 
공사가 끝나가는 때여서 헬멧을 들고 다니는 인간들이 많다.
 
특히 일용직 노동자나 서연주 같은 알바가 그런다.

“데이비스가 20층 회의실 내부 장식을 알고 싶다고 해서요.”

서연주가 묻지도 않았는데 말을 이었다.

“최 부장님한테서 서류 받아가는 길이에요.”

“서연주씨, 취미가 뭡니까?”

김태영이 불쑥 묻자 서연주는 주춤했다.

“네?”

“취미요.”

그러고는 김태영이 따지는 것 같은 표정을 지었으므로 서연주가 마침내 풀썩 웃었다.

“등산 좋아해요.”

서연주가 또박또박 말을 이었다.

“여행도 좋아해요.”

“등산과 여행.”

“어제 일로 화나신 거 아니죠?”

하고 서연주가 묻자 김태영은 머리를 저었다.

“차근차근 진행시키기로 했습니다. 내식으로.”

“내식이라뇨?”

이종사촌 형인 조철봉이 그렇게 조언했다고 말할 수가 있겠는가?
 
서연주의 시선을 받은 김태영이 말을 이었다.

“난 나니까요.”

그러자 어깨를 추켜올려 보인 서연주가 몸을 돌리면서 말했다.

“김 대리님은 재밌어요.”

웃기는 놈이라는 표현과 비슷하게 들렸지만 김태영은 가만 있었다.
 
화장실로 걸으면서 김태영은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라고 결론을 냈다.
 
시도를 한 것이 안한 것보다 나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저녁, 퇴근시간이 되었을 때 김태영은 또 보았다.
 
앞으로는 TV 연속극 작가 험담을 하지 못할 것이었다.
 
서연주가 유 부장이 운전하는 차의 옆자리에 타고
 
현장 정문을 빠져나가는 장면을 목격한 것이다.
 
그때 김태영은 현관 공사를 감독하는 중이었다.
 
경비는 과장급 이상에게만 경례를 올려 붙였는데 부장급이 되면 ‘안전’이라고
 
소리까지 지르는 통에 시선이 그쪽으로 가게 된 것이다.

“시발년이네.”

저절로 김태영의 입에서 욕설이 터져나왔다.
 
오늘 저녁에 약속이 있다는 것은 이혼남 유 부장과의 약속이었던 것이다.
 
유 부장이 누구인가? 바람을 피우다가 와이프에게 이혼당한 바람둥이다.
 
아이도 하나 딸렸다.
 
그러나, 김태영은 어깨를 늘어뜨렸다.
 
유 부장은 아파트 3채, 빌딩도 한동 장만한 재력가인 것이다.
 
 
 
 

 

(1693) 인연-4 

 

 

“그래, 포기한다.”

다음날 아침 출근하면서 김태영은 스무 번도 더 그렇게 중얼거렸을 것이다.
 
어젯밤은 친구를 불러내어서 소주를 다섯 병이나 마셨기 때문에 생각하고
 
자시고 할 겨를이 없었다.
 
지금까지 여자를 안 만나고 살아온 것이 아니다.
 
남만큼이나 다 하고 지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계산하면 만났다가 갈라선 여자가 열 명은 되었다.
 
그것도 다 인연이다.
 
이쪽이 차인 적도 있고 찬 적도 있다.
 
다 그렇고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진짜 가슴에 파고드는 인연이 있었다면 한번 작심하고 해봤겠지만
 
끝나고 나서 채 한 달도 못가서 다 잊었다.
 
이쪽이 차인 경우도 마찬가지. 상처 따위는 받지 않았다.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여자 몸을 알았지만 지금까지 연애랍시고 겪은 여자 모두가 비처녀였다.
 
어느 놈이 먼저 다 선수를 친 것이다.
 
그렇다고 재수 없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처녀, 비처녀 따지는 놈이 웃기는 세상이다.
 
처녀막 따위는 지저분한 껍질 따위로 인식되어 있는 것이다.
 
모처럼 현장의 사무실 책상에 앉은 김태영은 생각을 정리했다.
 
솔직하게 말해서 스물아홉살이 된 작금에 이르러 처음으로 가슴이 찡해 올 만큼
 
감동을 주는 인연을 만난 것이다.
 
그것이 서연주였다.
 
지금까지 한 번도 이런 감동을 몰아준 여자가 없었다.

그러나, 심호흡을 한 김태영은 어금니를 꽉 물었다.
 
인연이 닿지 않는 모양이다.
어제 유 부장의 차를 타고 나가는 서연주의 웃음띤 표정이 다시 떠올랐으므로
 
김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그때 주머니에 넣은 핸드폰이 진동을 했다.
 
핸드폰을 꺼낸 김태영이 발신자 번호를 보고 나서 곧 귀에 붙였다.
 
이종사촌형 조철봉이다.
 
갑자기 형이 웬일이신가?
 
김태영의 가슴이 뛰었다.

“예, 형님.”

“어, 회사냐?”

“예. 그런데 웬일이세요?”

김태영이 묻자 조철봉이 짧게 웃었다.

“갑자기 네 생각이 나서.”

“아, 예.”

“네가 오랜만에 날 찾아와 이야기한 것도 떠오르고 해서말야.”

김태영은 쓴웃음을 지었다.
 
서연주는 이미 물 건너간 것이다.
 
그때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그런데 너한테 무게만 잡느라고 현실적인 이야기는 안해 준 것 같더구나.
 
그래서 전화한 거다.”

“뭔데요? 형님.”

“야. 이건 내 경험인데 말이다.”

“작전이 필요하다.”

“예?”

핸드폰을 고쳐쥔 김태영이 긴장했다.
 
그러자 조철봉이 말을 이었다.

“우연을 만들고 함정을 파서 끌어들여.
 
사람 시켜서 뒷조사를 철저히 해서 약점을 파악해라.”

기가 질린 김태영이 침만 삼켰고 조철봉의 말이 이어졌다.

“우연 기다리지마. 연속극 같은 우연은 백년 기다려도 안온다.
 
조사해. 작전을 짜란 말이다.
 
네가 마음 먹은 여자 사생활이 어떤지,
 
옛날에 성병 걸렸다는 것까지 알 수가 있다.”

“…….”

“난 그렇게 했다.
 
그래서 거의 실패를 하지 않았어.
 
마음만 먹으면 수단은 다 생긴다. 알았어?”

“예, 형님.”

“치사하다고 생각한다면 아예 그만두는 게 낫다.
 
그런 열정이 없으면 포기하는 게 낫단 말이다.”

김태영은 심호흡을 했다.
 
마음이 또 변했다.
 
과연 형님 말씀이 맞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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