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0장 인물 11

오늘의 쉼터 2014. 9. 22. 23:22

제20장 인물 11

 

 

 

 

인륜지도가 무너져 민심이 흉하니 성세만 같았어도 당연했을 이야기가 새삼 반짝이는

 

청담, 미담이 되어 만인의 입에 오르내리기도 했다.

 

그 무렵 경사에 크게 유행한 설씨(薛氏) 이야기도 그 중의 하나다.

설씨는 금성 ‘밤나무골(栗里)’에 살던 민가의 여자로 비록 가난하고 외로운 가문에 태어났으나

 

품행이 단정하고 행실을 잘 닦아 보는 사람마다 곱다 하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런데 여수대전(麗隋大戰)이 발발하자 나라에서는 대대적인 군역을 징발하였고,

 

설씨의 늙은 아버지도 정곡(正谷) 지방의 곡식을 지키는 당번으로 가게 되었다.

 

딸은 병들고 쇠약한 아버지를 차마 멀리 보낼 수 없어 자신이 여자의 몸임을 한탄하며

 

매일 깊은 수심에 빠져 있었다.

 

이때 사량부(沙梁部)에 사는 가실(嘉實)이란 소년이 있었는데,

 

그는 일찍부터 설씨의 아름다움을 남몰래 흠모하였으나 감히 말을 꺼내지 못하다가

 

설씨가 아버지의 일로 고민한다는 말을 듣자 비로소 용기를 내어 찾아갔다.

“나는 가진 것이 없는 나약한 사람이지만 일찍이 의지와 기개가 있음을 자부하던 터이니

 

원컨대 불초한 몸이나마 아버지의 일을 대신하게 해주십시오.”

이 말을 들은 설씨는 매우 기뻐하며 아버지에게 가실의 뜻을 전하였고,

 

그 아버지는 가실을 안으로 불러들여 상면하고는,

“이 늙은이의 종군을 대신 하겠다니 기쁘고도 송구스러운 마음을 가눌 길이 없네.

 

어떻게든 이 은혜에 대한 보답을 하고 싶으니 만일 자네가 어리석고 누추하다 하여

 

버리지만 않는다면 내 딸을 아내로 삼는 것이 어떠한가?”

하였다.

 

이에 가실이 자리에서 일어나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감히 바라지 못한 일이나 그것은 저의 소원이었습니다.”

하고는 물러나와 곧 설씨에게 혼인을 청하였다.

 

그러자 설씨가 대답하기를,

“혼인이란 인륜의 대사라 함부로 서두를 일이 아닙니다.

 

제가 이미 마음을 허락하였으므로 죽는 한이 있어도 변하지 않을 것이니

 

그대가 당번으로 나갔다가 교대하여 돌아온 뒤에 날을 받아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말을 마치고는 품에 지닌 거울을 꺼내 반으로 나누더니 그 한 쪽을 건네며 이를 신표로 삼자고 하였다.

 

가실은 설씨의 뜻을 받아들이고 자신이 타던 말까지 맡긴 다음 정곡으로 떠났다.

그런데 처음 3년을 기약한 군역이 교대할 사람을 구하지 못한 까닭에 6년이 지나도 끝나지 아니하자

 

설씨의 아버지는 딸을 불러 다른 사람에게 시집갈 것을 말하였다. 이에 설씨가 대답하기를,

“먼저는 아버지를 편안하게 모시기 위해 가실과 억지로 혼인을 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가실은 이를 믿었기 때문에 오랫동안 아버지 대신 종군하여 굶주림과 추위에 고생하고 있습니다.

 

하물며 그가 가 있는 곳은 국경 인근이라 손에서 무기를 놓을 사이도 없거니와 이는 비유하자면

 

매일 사나운 호랑이 아가리 앞에 있는 듯한 형국입니다.

 

그런데 이제 와서 그와 맺은 신의를 저버리고 약속한 것을 어긴다면 어찌 사람이라 하겠습니까?

 

저는 아무래도 아버지의 명을 따르지 못하겠으니

 

차후로는 두 번 다시 그와 같은 말씀을 말아주십시오.”

하였다. 하지만 그 아버지는 늙고 쇠약하여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형편이었다.

 

딸의 소청에도 불구하고 몰래 마을 사람과 혼담을 나누고는 잔칫날까지 정하여

 

다른 이를 배필로 맞아들였다.

 

사태를 알아차린 설씨는 도망을 가려 했지만 뜻을 이루지 못하자 방문을 걸어 잠그고 거절하였다.

 

그는 틈이 나면 외양간에 나와 가실이 두고 간 말을 보며 눈물짓곤 했다.

가실이 돌아온 것은 그로부터 얼마 뒤다.

그런데 떠날 때와는 달리 형상은 해골처럼 마르고 옷은 남루하기 이를 데 없어 사람들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고 다른 사람이라고 말하였다.

 

그러자 가실은 설씨의 앞으로 다가와서 몸에 지녔던 거울 반쪽을 내밀었고,

 

신표를 받아든 설씨는 기쁨에 겨워 가실을 끌어안고 소리 높여 통곡하였다.

 

그리고는 좋은 날을 가려 마침내 백년가약을 맺으니

 

이미 오상(五常)과 인륜(人倫)이 땅에 떨어진 세상에서 효와 지조를 두루 지켜낸

 

설씨의 처신을 일컬어 아름답다고 말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대궐에서 덕만이 어느 정도 국정을 파악해갈 무렵 병석에 있던 마야 왕비가 세상을 떴다.

 

늙은 임금은 왕비가 죽자 식음을 폐하고 울다가 혼절하였다.

 

덕만 역시 땅이 꺼지는 듯한 슬픔에 목이 메었지만 곧 감정을 억누르고 침착하게

 

장례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그는 남자처럼 상주 복장을 하고서 유사에 명하여 국상이 났음을 원근에 포고로써 알리고,

 

임금을 대신해 백관과 신료들의 조문을 받았다.

석존의 어머니와 이름이 같았고, 평생 불교를 신봉한 마야비였다.

 

덕만은 국상 기간 내내 용춘, 천명 내외와 대소사를 긴밀히 의논하고 고인의 유지를 받들어

 

불교 의식에 따라 장사를 지낸 뒤 남산 북봉에 능을 지어 유해를 묻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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