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10
왕녀 덕만(德曼)은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새벽 예불을 마치고 자신의 거소로 돌아왔다.
그날은 몇 해 전부터 시작한 천일기도가 끝나는 날이었다.
해가 늦게 뜨는 산사의 신새벽, 사방은 아직도 검은 승복 빛깔 같았다.
덕만은 행장을 꾸리고 자신이 쓰던 방을 깨끗이 치운 다음 법당 옆으로 난 좁은 오솔길을 따라
스승 연적(蓮跡)이 묵고 있는 작은 암자를 찾아갔다.
처음 불문에 들던 날부터 덕만을 가르쳐왔던 선승 연적은 어느덧 칠순을 넘긴 고령으로,
승니와 불자들이 북적거리는 번잡한 장안사(長安寺)를 피해 초막을 짓고 나앉은 지 수년째였다.
노승은 초막으로 거처를 옮기던 날만 해도 덕만에게 말하기를,
“이곳인들 어찌 영원히 머물 곳이며, 시방세계 어딘들 영원히 머물 곳이 있으랴.
그럼에도 흙내가 고소할 적에 기어이 새 집을 짓는 까닭은 평생 머문 장안사에
마음을 얽매이지 않으려 함이니,
해가 가고 달이 가듯 오로지 가고, 가고, 또 갈 뿐이지.
이승이란 곳은 목숨 끊어지는 날까지 가는 일뿐이라네.”
하였는데,
용춘(龍春)이 장안사를 다녀간 뒤로 덕만이 자주 심란해하는 것을 보고는,
“내가 불문에 든 지 50년이 넘었다네.
그간 자고 나면 떠나고 자고 나면 떠나서 참 무던히도 먼 길을 왔지 싶었는데,
지난 가을 절 문 밖에 산보를 나갔다가 개암 열매를 보구선 그만 절로 입에 군침이 돌지 뭔가.
그래 정신없이 한참을 따먹다가 문득 돌이켜보니
그 놈의 열매는 내가 소싯적부터 좋아했던 물건이더라고.”
하고서,
“가도 가도 본래 자리요 와도 와도 떠난 자리야.
눈으로 허공을 바라보고 처음부터 없는 길을 한없이 걸어가는 게 인생이지.
그만치 닦았으면 자네도 어언 무(無)자 하나는 건졌을 터, 차후론 인연 따라 살아도 좋으이.”
하고 오묘한 소리를 입에 담았다.
덕만이 그런 스승의 초막 앞에 이르러 조심스럽게 기척을 내고,
“스승님, 저 내려갑니다.”
했더니 안에서 잠시 아무런 대꾸가 없다가,
“잘 가시게. 다시 오지 말게나.”
하는 연적의 음성이 들려왔다. 30년 인연치고는 스승이나 제자나 매정하기 이를 데 없는 이별이었다.
덕만의 환속에 누구보다 신경을 곤두세운 이는 당연히 백반(伯飯)과 그의 두 아들이었다.
그러나 마침 마야 왕비가 노환으로 병중에 있었고 황룡사 신년 법회가 목전에 다다랐을 때였다.
“제 아무리 불가에 귀의한 몸이지만 어머니가 노질을 얻어 고생하시는데
자식된 도리로 문병을 아니 올 수 있습니까? 신년에 대찰 불사도 있고 해서 겸사겸사 왔습니다.”
백반의 처인 남천부인이 덕만을 만나 사정을 떠보려고 입궐하자 이를 알아차린 덕만은
우선 그렇게 핑계를 둘러댔다.
이 말을 전해들은 백반은 곧 의심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두 아들을 불러 앉히고,
“효는 백행의 근본이다. 너희도 덕만 공주의 효심을 본받도록 해라.”
하고 훈육까지 하였다.
주변의 따가운 시선을 의식한 덕만은 대궐에 와서도 한동안 승복을 벗지 않았다.
그 바람에 조정 중신들은 대부분 덕만이 곧 금강산으로 돌아갈 거라고 믿어
아무도 이를 중한 일로 여기지 않았다.
날짜가 지날수록 덕만의 안색은 점차 어두워졌다.
막연히 걱정하던 나라 사정이 형편을 알면 알수록 기가 막혔다.
국고는 비고, 국법은 권위를 잃은 지 오래며, 성곽 하나를 보축하거나 증축하려고
노역 동원령을 내리는데도 도망가는 자가 절반이 넘었다.
왕명이 외관에 서지 않고, 외관의 영이 백성들에게 서지 않으니
광석을 캐고 무기를 만드는 일이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일 따위가 제대로 될 리 없고,
산지사방에 화적패가 다투어 출몰하는가 하면, 관리나 향군의 위계도 엉망이었다.
국정이 어려우니 횡도가 날뛰고 난속이 들끓는 것은 당연지사였다.
경사에선 3년 군역을 나갔다가 돌아와 보니 부모는 늙어 죽고 처자식은 굶어 죽었다는
한 맺힌 노래가 크게 유행하였고, 노역도 사고팔고, 벼슬도 사고팔고,
심지어 사람을 사고판다는 소리까지 들렸다.
경향 각지에 색주가가 번창하는 것도 건복 말년의 어지러운 시속과 무관하지 않았다.
본래 신라에선 남녀간에 내외하는 법이 없어 나라의 큰 행사나 명절놀이 때에도
선남선녀가 자유롭게 어우러져 노는 일이 다반사였다.
엄격히 금하는 것은 기혼녀의 간통 하나였을 뿐,
처녀와 총각이 혼전에 눈이 맞아 내통하는 것도 성혼만 이루어지면 허물이 아니었고,
남자가 첩을 두거나 여자들이 후살이를 가는 것도 죄가 되지 않았다.
따라서 나라의 고된 공역이나 전쟁터에서 남편을 잃은 여염의 여자들은 얼마든지 재혼, 삼혼을
거듭할 수 있었으므로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색주가로 빠져 기생 노릇을 할 까닭이 없었다.
그런데 건복 연간에 신라가 백제, 고구려와 벌인 몇 번의 큰 싸움에서 대패하여 나라에 과부들이
부쩍 많이 생겨난 데다,
국정이 어지러워 백성들의 살림이 무척 궁핍해졌고, 설상가상 한재와 기갈,
지진과 까닭 모를 화재까지 겹쳐 거의 해마다 농사를 망치자 고단한 입살이를 위해
몸을 파는 여자들이 철철이 수백을 헤아리게 되었다.
시집에서 쫓겨난 여염의 범골 과부야 다시 말할 것이 없고, 먹을 것이 귀한 변방에선
지방 현령의 출가한 딸까지 기생이 되었다는 소리도 나돌았다.
아비가 딸을 팔고 시집에선 며느리를 쌀말과 바꾸기도 했다.
속설에 개 한 마리 값은 닷 냥이요,
하룻밤 해웃값은 반 냥이라 하였고, 육(肉) 중에 제일 싼 육은 인육(人肉)이요,
문 (門) 중에 제일 싼 문은 옥문(玉門)이며,
보시(布施) 중에 제일 싼 보시는 살보시라는 웃지 못할 얘기도 있었다.
자식은 늙어 병든 부모를 버리고 부모는 어린 자식을 이웃과 맞바꾸어 잡아먹는
비행과 패륜이 속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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