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9
은상은 가잠성 서문 밖 시오리나 떨어진 곳까지 달아나고서야 가까스로 한숨을 돌렸다.
조금 있으니 동이 터오고 그러구러 천신만고 끝에 가잠성을 탈출한 잔병들이
하나둘 비참한 몰골로 나타나기 시작했는데, 그 숫자가 모두 합해 겨우 2백 남짓이었다.
2천의 군사 중에 2백이 살았으니 그야말로 구사일생(九死一生)이 아닐 수 없었다.
길지의 원한을 풀고자 자청하여 가잠성으로 갔던 은상은 도리어 처참한 패장이 된 채
피눈물을 씹으며 웅진으로 향했다.
그는 웅진성이 바라 뵈는 곳에 이르자 말에서 내려 스스로를 결박하고 장왕의 앞으로 나가
죽기를 청하였다.
장왕은 은상을 보고 크게 놀랐으나 자초지종을 다 듣고 나자
친히 옥좌에서 내려와 은상의 결박을 풀어주었다.
“싸움에서 이기고 지는 것은 매양 있는 일이다.
이번에 패하였으니 다음에는 이기지 않겠느냐?
너는 나이 아직 젊고 명장의 자질을 두루 갖추었으니 성급하게 생각할 것이 하나도 없다.
밤 없는 낮이 없듯 패하지 않는 명장이란 본시 말뿐인 것이다.
너는 이번에 패한 일을 거울삼아 기필코 백제국 최고의 명장이 되도록 하라.”
임금의 따뜻한 위로에 감격한 은상은 섧게 흐느끼며 왕방울만한 눈물을 뚝뚝 떨구었다.
장왕은 은상과 패잔병에게 모두 물러가서 쉬도록 명한 다음 휘하의 장수들을
일제히 탑전으로 불러 모았다.
“이번에 가잠성을 취하러 갔던 은상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크게 패하였는데
상대편 장수의 이름이 알천이라고 한다.
제장들도 알다시피 은상은 지략이 비상하고 무예가 절륜하여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인물인데,
그런 그가 꾀에서도 넘어가고 무예를 겨뤄서도 이기지 못하였다니
알천이란 자는 능히 경계할 인물임에 틀림없다.
제장들은 그 이름을 반드시 기억해두었다가 훗날 싸움터에서 만나거든 각별히 주의하라.”
왕은 진지한 어투로 거듭 다짐을 두었다.
한편 소임을 다한 알천은 성주 육서의 극진한 대접도 마다하고 곧장 금성으로 돌아와 왕에게
백제군을 물리친 사실을 아뢰었다.
양국의 크고 작은 싸움에서 번번이 패하여 영토가 줄어들고 군사들의 사기가 떨어질 대로 떨어진
신라에서 이때의 승전보는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 같은 것이었다.
낭보를 접한 왕과 신하들은 크게 기뻐하며 알천에게 급찬 벼슬을 내리고
시위부의 대감(大監:부대장)으로 삼아 대궁 정전(政殿)의 방비를 맡기는 한편 유사에 명하여
대궐에서 가까운 곳에 집과 땅을 마련하고 노비와 녹읍을 넉넉히 하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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