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8
이경도 지나고 삼경에 접어들었을 무렵 어디선가 갑자기 숫자를 가늠할 수 없는 정체불명의 무리가
나타나더니 일사불란하게 성의 동문으로 숨어들었다.
횃불 아래 서서 꾸벅꾸벅 졸던 초병들은 어둠을 뚫고 날아온 화살에 맞아 불귀의 객이 되었고,
그 중 몇몇은 등 뒤에서 휘두른 칼에 비명 한번 지르지 못하고 죽었다.
게다가 안으로 걸어놓았던 성문마저 열려 있었으니 이는 성안의 내응 없이는 어려운 일이었다.
그렇게 연기처럼 성안으로 침투한 무리들은 예닐곱씩 짝을 지어 숙소를 돌며 깊이 잠든
백제군의 목을 치고 배를 갈랐다.
코를 골며 한잠에 빠졌던 백제군들로선 그야말로 속수무책이 아닐 수 없었다.
성안이 점점 소란스러워진 것은 이미 수백의 사상자를 내고 난 다음이었다.
“자객이다! 자객이 숨어들었다!”
사성문을 감독하는 순라군이 동문 근처에 이르렀다가 나자빠진 초병과 활짝 열린 성문을 발견하자
고함을 질러 잠든 사람들을 깨우기 시작했다.
백제 장군 은상도 그 바람에 잠을 깼다.
그는 황급히 머리맡에 놓아둔 칼을 찾아 거머쥐고 바깥으로 달려 나갔다.
과연 바깥에는 피비린내가 진동하고 정체불명의 무리가 창칼을 든 채 마구잡이로
숙소를 짓밟는 게 보였다.
“군사들을 깨워라! 모두 일어나 불을 밝히고 무기를 들어 대응하라!”
은상은 큰 소리로 부하 장수들을 깨운 다음 갑옷도 입지 않고 그대로 달려가
닥치는 대로 적군 몇을 베어 눕혔다.
백제군들도 부랴부랴 잠에서 깨어나 무기를 찾아들고 밖으로 뛰쳐나왔지만
그들은 금방 잠에서 깬 데다 놀라고 당황한 터라 신라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여기저기서 칼에 베이고 창에 찔린 사람들이 사지를 버둥거리며 아우성을 치고,
쫓는 자와 쫓기는 자, 비명소리와 울부짖는 소리들로 성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생지옥이 되었다.
잔뜩 기세가 오른 신라군은 산지사방으로 흩어져 달아나는 백제군을 더욱 맹렬히 뒤쫓으며
마음껏 베고 찔렀다.
“이러다간 살아남는 자가 아무도 없겠습니다!
어서 서문으로 달아나 후사를 도모하는 것이 상책입니다!”
혼비백산한 부장들이 이구동성으로 권하자 은상도 하는 수 없이 그 말을 좇기로 했다.
그는 전군에 퇴각 명령을 내리고 자신도 한 필 말에 올라 서문을 향해 말 배를 걷어찼다.
하지만 달아나는 것조차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장군은 자다 말고 어디를 그처럼 급히 가시오?”
서문이 저만치 바라뵈는 곳에서 갑자기 말 탄 장수 하나가 앞을 가로막고 물었다.
은상이 보니 그는 다름아닌 알천이었다.
알천은 어느새 신라 장수의 복장을 하고 갑옷과 무기를 갖춘 채 은상을 비웃듯이 바라보았다.
은상은 그제야 모두가 알천의 흉계임을 알아차렸다.
“이 배은망덕한 놈아! 나는 너를 불쌍히 여겨 은전을 베풀고 살려주었거늘
네 어찌 이따위 졸렬한 수작으로 앙갚음을 한단 말이냐!”
은상이 머리털을 곤두세워 큰 소리로 꾸짖자
알천이 빙그레 웃으며 크지 않은 소리로 대꾸했다.
“우리 대왕께서는 백공까지 보내어 너희를 도왔거늘
정작 배은망덕한 무리가 누군지 모르겠구나.”
“닥쳐라! 내 어찌 너를 두고 그냥 가겠느냐?
가더라도 반드시 너의 창자를 꺼내어 두 손으로 움켜쥐고 가리라!”
화가 머리 끝까지 나 있던 은상은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벼락같은 고함과 함께
칼을 휘두르며 달려들었다.
말과 말이 어우러져 10여 합을 싸웠을까.
그러나 일변 시쁘게만 여겼던 알천의 칼솜씨는 결코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하물며 갑옷도 입지 않은 데다 마음마저 급하니 오히려 갈수록 수세에 몰리는 쪽은 은상이었다.
그는 알천을 죽이려던 당초의 마음을 고쳐먹고 적당한 기회가 엿보이면 달아나려고 했다.
그러나 알천의 몸놀림에는 워낙 빈틈이 없어 좀처럼 달아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
“어린 나이에 장군 소리를 들어 수상하다 싶었더니 이제 보니 제법 칼 쓰는 법을 아는구나.”
잠깐 말머리가 떨어졌을 때 알천이 말했다.
은상은 대꾸도 못할 만큼 기운이 빠져 있었지만 알천은 숨소리 하나 흐트러짐이 없었다.
바로 그때였다.
은상의 등 뒤에서 홀연 피를 뒤집어쓴 두 장수 가 나란히 말을 몰아 나오더니,
“장군,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어서 몸을 피하십시오!”
하고 소리쳤다.
평소 은상이 아끼던 도이(度훅)와 사만(沙?)이란 장수들이었다.
그들을 보자 은상은 다시 마음을 바꾸어 알천을 죽이고자 했다.
두 장수의 검술이 이미 절륜하므로 셋이서 힘을 합친다면 알천 하나 당하지 못하랴 싶었다.
“내 어찌 저놈의 목을 두고 그냥 가겠느냐?”
기운을 얻은 은상이 칼자루를 고쳐 잡고 알천에게 덤벼들자
두 장수도 재빨리 협공으로 나오며 알천의 목을 노렸다.
그러나 알천은 조금도 당황하지 않고 잠깐 뒤로 물러섰다가 이내 3인을 상대로
화려한 검술을 펴 보이기 시작했다.
네 자루의 칼날이 허공에서 맞부딪기를 어언 30여 합, 3인을 동시에 상대하면서도
오히려 공세를 잃지 않고 갈수록 칼끝이 예리해지던 알천이 별안간 몸을 뒤채며 돌아서는가 싶더니
그와 동시에 무엇인가가 땅에 뚝 떨어졌다.
그것은 다름아닌 도이의 머리였다.
도이가 눈앞에서 맥없이 죽는 것을 본 은상과 사만은 화가 나기보단 기가 질렸다.
“안 되겠다. 분하고 원통하지만 오늘은 이쯤에서 그만두는 게 좋겠다.”
은상은 치욕스러움을 감수하고 사만에게 말했다.
사만 역시 전의를 상실하기는 은상과 마찬가지였다.
두 장수는 사력을 다해 알천의 칼을 막아내며 서문으로 통하는 길을 열었다.
그리고 겨우 틈을 보아 달아나려 할 때 다시 사만이 비명을 지르며 말에서 떨어졌다.
은상은 등뒤에서 사만의 비명소리를 들었지만 미처 돌아보지도 못하고 그대로 말 배를 걷어찼다.
실로 어처구니없고 참혹한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