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7
그는 혹시 봉화에 무슨 꿍꿍이가 있을지도 모른다고 여겨 알천과 함께 옥사에 갇혔던 군사들을 불렀다.
“너희 장수가 봉화로써 하는 신호의 뜻이 무엇이냐?”
“구원군을 청하는 신호입니다.”
“어서 원군을 보내라고 독촉하는 신홉니다.”
불려온 군사들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이리하여 봉화에 대한 의심은 풀었지만 기다리는 원군이 나타나지 않으니 궁금하고 답답한 일이었다.
또다시 하룻밤이 지났다.
성을 장악한 뒤 미처 쉬지도 못한 채 다시금 이틀씩이나 뜬눈으로 밤을 지샌 백제군들은
극도의 피곤함으로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어째서 원군이 나타나지 않는 거요?”
은상이 퉁명스럽게 묻자 알천이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나타나지 않는 게 당연합니다.”
“그게 무슨 소리요?”
“장군과 마찬가지로 나 역시 하도 수상한 느낌이 들어 아침 일찍 협곡으로 나가봤더니
군사들이 조반을 지어 먹느라고 연기가 하늘을 뒤덮을 정도였소.
그러니 아무리 이쪽에서 신호를 보내면 무엇하오?
결국은 끼니때마다 그랬던 모양인데 뉘라서 그걸 보고 함부로 군사를 내겠소?
나는 백제의 군사가 강성하고 지혜롭다고 들었거늘 어찌 매복의 기본도 지키지 않는단 말이오?”
알천은 은상과 백제군을 싸잡아 원망하듯 말했다.
“끼니때마다 그랬던 건 아니오.
군사들이 워낙 피곤하고 굶주려 있다기에 야식을 먹으라고 했더니 아마 아침까지 그랬던 모양이오.
내 당장 중단을 시키리다.”
은상이 다시 부드러운 말투와 온화한 얼굴로 알천을 달랬다.
“내가 귀국에 투항한 까닭은 강성한 백제군의 힘을 빌려 성주놈을 죽이고
처자의 목숨과 내 목숨을 구하기 위함이오.
하루이틀 고생하면 쉽게 끝이 나는 일이니 부디 만전을 기해주오.”
“알았소. 장수들을 불러 단단히 주의를 시키지요.”
은상은 즉시 군령을 내려 모든 군사들이 매복지에서 취사하는 것을 금하고,
불을 지펴 짐승의 고기를 굽거나 연기를 피우는 자는 참수형으로 다스리겠다고 엄명하였다.
“정 배가 고프거든 수목의 열매나 날것으로 먹을 수 있는 것을 찾아보고
그마저도 어려우면 물배를 채우도록 하라. 하루이틀이면 끝날 일이다!”
하지만 때는 바야흐로 2월 중순이라 열매가 있을 리 만무했고,
협곡에는 물조차 흔치 않아 복병들은 장졸 할 것 없이 배를 곯았다.
그렇게 다시 낮과 밤이 지나가고 또 낮이 되었다.
은상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알천을 불렀다.
“나는 그대가 말한 것을 하나도 어기지 않았다.
그 바람에 우리 군사들은 뱃가죽과 등가죽이 서로 맞닿았고,
연일 밤낮을 지새며 협곡을 지키느라 장수들조차 선 채로 졸고 있는 형편이다.
사정이 이와 같은 데도 어찌하여 온다는 신라군은 나타나지 않는 것인가?”
그러자 알천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이제까지와는 달리 사뭇 자신 없는 어투로 대꾸했다.
“글쎄올시다. 성주란 놈이 워낙이 종잡을 수 없는 위인이라 나도 그 연유를 알지 못하겠소이다.
아마도 겁을 집어먹고 달아난 것은 아닐는지요?”
은상은 기가 찼다.
“만일 그렇다면 그대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생고생을 하였는가!”
은상이 젊은 혈기를 참지 못하고 버럭 고함을 내지르니
알천이 볼멘소리로 무어라 중얼거린 뒤에,
“나는 다만 백제군이 위급함에 빠질 것을 걱정하였을 따름이오.
어찌 신라군이 오고 말고까지 내 마음대로 할 수 있겠소?
이제 장군이 그 일을 가지고 나를 책망하니 서운하기 짝이 없소.
어쨌거나 신라군이 오지 않으면 다행한 일이 아니오?
나도 봉화 올리는 일을 그만둘 터이니 장군도 그만 피곤하고
굶주린 군사들을 성 안으로 불러들이시오.”
하였다.
은상은 알천의 말을 듣고도 한동안 분이 풀리지 않아 씩씩거리다가 저녁때가 되자
협곡에 매복했던 군사들을 모조리 성안으로 불러들이고 성의 창고에서
양식을 모두 꺼내 밥을 배불리 먹인 뒤 일찌감치 잠자리에 들도록 하였다.
한데 일이 터진 건 바로 그날 밤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