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0장 인물 5

오늘의 쉼터 2014. 9. 20. 18:50

제20장 인물 5

 

 

 

 

그런 다음 다시 육서를 불렀다.

“그대는 내가 말하는 것을 잘 듣고 이를 어김없이 시행하라.

 

지금부터 성안의 여자들과 어린애들은 동편 계곡으로 서둘러 대피시키고 말과 수레는

 

모두 한곳에 모으라.

 

5백의 군사 중에 늙고 힘없는 군사 수십 명을 추려 옥에 가두고 나머지는

 

그대가 인솔하여 말과 수레를 끌고 동문으로 빠져나가라.

 

그리하여 협곡 사잇길을 따라 동편 재를 천천히 넘어가되 말 꼬리와 수레 뒤에

 

싸리비를 매달아 적으로 하여금 많은 군사가 달아나는 것처럼 보이게 하라.”

알천은 잠시 사이를 두었다가 다시 말허리를 이었다.

“재를 넘은 군사들은 성루가 보이는 적당한 곳에 몸을 숨기고 둔적하여 기다리되

 

미리 비상 식량을 준비해 밥을 짓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이며,

 

보초를 세워 성에서 잠시도 시선을 떼지 말고 동향을 주시하라.

 

아마도 내일 아침부터는 봉화대에 불이 붙고 며칠 동안 계속해서 연기가 오를 것이다.

 

하지만 이럴 때는 절대로 움직여서는 안 된다.

 

그러다가 불이 꺼지고 연기가 그치거든 그날 밤을 놓치지 말고 민첩하게 재를 되넘어

 

벼락같이 동문을 통해 성안으로 짓쳐 들어오라.

 

그리하면 반드시 성도 지키고 공도 세울 수가 있을 것이다.”

육서는 알천이 말한 계책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었다.

“병권이 장군에게 있으니 나야 시키는 대로 하면 그만이지만 도대체 궁리속을 모르겠구려.

 

무엇보다도 늙고 힘없는 군사들은 어째서 옥에 가두라는 것이며,

 

성안의 거의 모든 사람들을 빼내 가는데 누가 성을 지킨다는 말씀이오?

 

만일 장군의 말씀대로 하면 가잠성은 대번 적의 수중으로 넘어갈 것이 아니겠소?”

그러자 알천이 웃으며 대답했다.

“바로 보았네. 이는 성을 잠시 적에게 맡겼다가 되찾는 임대책(賃貸策)일세.”

“하면 성을 적에게 거저 내어준단 말씀이오?”

육서가 경악하여 묻자 알천은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가잠성은 본래 쳐서 빼앗기보다는 지키기가 어려운 곳이니

 

그대는 의심하지 말고 내가 하라는 대로 하게.

 

그리고 성을 빠져나갈 때 내 몸도 오라로 결박하여 늙은 향군들과 같이

 

옥에 가두고 자물쇠를 밖에서 채운 뒤에 떠나게나.

 

그들에게 설명하는 일은 내가 알아할 것이네.”

알천은 점점 더 모를 소리만 했으나 육서로선 명을 거역할 처지가 아니었다.

성주 육서가 알천의 명에 따라 조치를 취한 뒤 대부분의 군사들을 이끌고 가잠성을 빠져나가자

 

백제군은 별다른 저항 없이 성을 수중에 넣었다.

이때 백제군의 장수는 가잠성에서 해론의 손에 죽은 길지의 아들 은상이었다.

 

그는 웅진에 주둔하고 있던 장왕에게 아버지의 원한이 서린 가잠성을 반드시 공취하겠다고 졸라서

 

마침내 허락을 얻어낸 터였다.

성을 얻은 은상은 성안에 사람들이 거의 없는 것을 보고 곧 후문이 있는 동편으로 달려갔다.

 

그런데 저만치 기험한 계곡과 재를 끼고 흙먼지가 자욱히 일어나는 광경을 보게 되었다.

 

은상은 당장 군사를 내어 도망가는 신라군의 후미를 치려고 하였지만 부장들이

 

황 급히 만류하고 나섰다.

“본래 도망가는 적은 뒤쫓지 않는다고 하였습니다.

 

이제 저들의 규모를 보니 족히 수천은 되지 싶은데,

 

만일 군사를 내었다가 결사항전이라도 하고 나온다면 공연히 피해를 입지나 않을까 걱정입니다.”

그러고 보니 은상의 눈에도 달아나는 적군들의 숫자가 결코 만만치 않아 보였다.

 

더군다나 가잠성 동편은 고래로 신라 땅이었기 때문에 백제군으로선 지리에도 어두웠다.

 

은상은 군사를 내어 뒤쫓는 것을 단념하고 가잠성에 남은 잔병들을 포박해 데려오도록 하였다.

그때 군사 하나가 황급히 달려와 고하였다.

“성의 옥사에 장수와 수십 명에 달하는 군졸들이 있습니다!”

“그래? 그럼 어디 그 장수를 데려와보라.”

은상의 말이 떨어지자 조금 뒤 오라에 묶인 신라 장수가 붙잡혀 와서 은상의 발아래 무릎을 꿇리었다.

 

은상이 장수를 내려다보며 짐짓 목소리를 높여 물었다.

“너는 누구이며 어찌하여 옥에 갇혔는가?”

신라 장수는 은상을 똑바로 쳐다보고 대답했다.

“나는 가잠성에서 향군을 맡아 훈련시키던 당주 알천이다.

 

책무를 다하지 못해 성을 잃었으니 구구하게 무슨 말을 더 하겠는가?

 

패장에게는 오직 죽음이 따를 뿐이니 너는 어서 나를 죽여 마지막까지

 

장수의 의연함을 잃지 않도록 해달라!”

은상이 장수의 말하는 모습을 찬찬히 뜯어보니

 

제법 기백이 있고 태도도 의연하여 예사로운 인물은 아닌 듯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옥사에 갇힌 사연이 궁금했다.

“옥에 갇힌 연유를 말하라 하지 않았느냐!”

은상의 다그치는 말에 알천이 별안간 허탈한 웃음을 터뜨렸다.

“성은 이미 잃었고 내가 옥에 갇힌 것은 그 전의 일이다.

 

설사 약간의 억울한 일이 있었다곤 하나 어찌 내 집의 부끄러운 사정을 남에게 말하여

 

스스로 천하의 웃음거리가 될 것인가?

 

죄가 있다면 나라를 잘못 타고 태어난 죄요,

 

벌을 받는다면 성주를 잘못 만난 벌일 뿐,

 

너는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자꾸 나를 구차하게 만들지 말라!”

은상은 무슨 말못할 사연이 있는 줄을 직감했지만 알천의 태도로 미루어

 

그가 호통으로 입을 열 사람은 결코 아님을 깨달았다.

 

곧 좌우에 말하여 장수의 몸에 묶인 오라를 풀게 하고 말투며 표정을 온화하게 고쳐 회유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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