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0장 인물 6
“보아하니 그대는 의로운 사람인 듯한데 내 비록 적성을 쳐서 수중에 넣었으나
어찌 옥석 구분 없이 함부로 사람을 죽이겠소.
무슨 사연인지 어디 한번 얘기나 들어봅시다.
본래 백제와 신라는 해마다 국경이 바뀌고,
사람들이 살기 좋은 곳을 찾아 넘나들기를 마치 한집 식구가 문지방을 넘나들듯 해왔으며,
사람들의 형상이 크게 다르지 않고 풍속과 관습에도 새털만큼 작은 차이가 있을 뿐이오.
나라를 잘못 타고났으면 바꾸면 되는 것이지 굳이 귀한 목숨을 버릴 게 무어요?
신라의 공주였던 우리 왕비께서도 그러하셨으니
그대가 나라를 바꾸어 산들 무슨 허물이 되겠소?”
그러기를 예닐곱 회, 은상이 다정하게 꼬드기는 내내 복잡한 표정을 짓고 앉았던 알천이 드디어,
“물 한 바가지만 주오.”
하며 입을 열었다.
벌컥벌컥 게걸스럽게 목을 축이고 난 알천은 비로소 저간에 얽힌 말못할 사연을 털어놓았다.
“가잠성 성주는 성질이 포악하고 수말과 암말조차 구별하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인데,
조정에 뇌물을 써서 벼슬을 얻고 급기야는 가잠성의 책임을 맡아 나오게 되었소.
그런데 그는 항상 궁벽하고 위험한 곳에 성주로 오게 된 것을 불만하여 밤낮없이 주색을 일삼고
성민들을 괴롭히며 공무는 통 돌보지를 않았소.
내가 성주를 볼 때마다 백제가 침략할 것을 누누이 말했지만 그는 번번이 코방귀를 뀌면서
내 말을 무시했을 뿐 아니라,
심지어 향군들이 훈련하는 것조차 시끄럽다고 하지 못하게 하더니
정작 성이 위급함에 빠지자 싸울 궁리는 하지 않고 저 혼자 살길을 찾는 데만 급급하였소.
그가 말하기를 가잠성은 본래 수성이 어려운 곳이라서 우선 패주하는 척하고 성을 빠져나갔다가
길동군(吉同郡:영동)과 관산성에 군사를 청하여 다시 성을 되찾겠노라 하고는 엊그제 부랴부랴
사람을 보내었는데, 조금 전 양쪽에서 도착한 원군 5천이 재 너머 금산벌에 당도했다는 기별이 왔소.
그리하여 성안의 군사 1천을 거느리고 원군을 맞이하러 금산벌로 갔으니
늦어도 내일 아침에는 줄잡아 6천여 군사가 가잠성으로 들이닥칠 것이오.”
알천의 얘기를 들으며 은상의 안색은 점점 흙빛으로 변했다.
그는 알천의 비난과는 달리 가잠성 성주의 지모가 대단하구나 싶어
속으로 섬뜩한 느낌에 사로잡혔지만 곧 시치미를 떼고 물었다.
“한데 어찌하여 그대는 일행을 따라가지 않고 옥사에 갇히는 신세가 되었소?”
그러자 알천은 새삼 분통이 터진다는 듯 씩씩거리며 말했다.
“나보고 성안에 남아 있다가 거짓 항복을 하고 적장을 속이라니
누군들 그런 위험한 짓을 하고 싶겠소? 장군도 생각을 해보시오.
백제군의 숫자가 기껏해야 2천 남짓인데, 5천이나 되는 원군이 당도한 마당에
왜 거짓항복까지 하는 위태로운 계책이 또 필요하단 말이오?”
한껏 언성을 높이던 알천이 별안간 허무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 내가 못하겠다고 거절하니 갑자기 불같이 화를 내며 부하들이 보는 앞에서
나를 오라에 묶어 옥에 가두고는, 이에 항의하는 향군들까지도 모조리 같은 신세를 만들고 말았소.
그게 간밤의 일이외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한솥밥을 먹던 처지로 설마 우리를 사지에 버려둔 채 그대로 가겠나 싶었더니
좀 전에 성주란 자가 옥사 앞에 와서 한다는 소리가, 이제 적군이 성안에 들어오거든
어찌어찌 하라고 자세히 이르고서, 처자식을 볼모로 데려가니 말을 듣든지 말든지
나보고 알아서 하라며 협박까지 하더이다.
그러면서 헤실헤실 웃던 성주놈 쌍판만 떠올리면 내가 지금도 피가 거꾸로 치솟고 이가 절로 갈리오!”
은상은 말을 하는 알천의 표정을 시종 유심히 살펴보았는데 믿음과 의심이 절반씩 교차하여
좀체 진위를 파악할 수 없었다.
그래서 알천과 함께 옥사에 갇혀 있던 군사들 몇을 따로 불러 물어보았더니
대개 알천이 한 말과 내용이 일치하였다.
은상이 다시 알천을 만나,
“장군은 볼모로 붙잡혀간 처자의 일이 걱정되지 않으시오?”
하였더니 알천이 만감이 교차하는 얼굴로 잦바듬히 한참을 말이 없다가,
“처자도 내가 살고 처자지 죽은 다음에야 무슨 소용이 있소?
암만 생각해도 이는 평소 나를 고깝게 여긴 성주가 계책을 빙자하여
내 명줄을 끊어놓자는 수작이 틀림없소.”
하고서,
“성주가 하고 간 말을 하나도 숨김없이 다 털어놓고 그를 붙잡을 계책까지 일러줄 테니
장군은 부디 성주놈을 사로잡아 내가 보는 앞에서 오장육부를 꺼내 죽여주시오.
장군이 그렇게만 해준다면 나는 앞으로 장군과 백제국을 위해 목숨을 바치겠소.”
하고 말하는데 이미 그 눈빛이며 안색에 비장한 기운마저 감돌았다.
은상으로선 과히 밑질 것이 없는 일이었다.
그러마고 약속을 하자 알천이 목소리를 낮추어 급히 말했다.
“성주놈이 가면서 내게 말하기를, 거짓항복으로 적장의 환심을 산 뒤에 성의 경계가
다소 느슨해질 때를 틈타 봉화로써 신호를 하라 하였으니,
이제 성루에 봉화를 올리면 성주놈은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동문으로 진격해 들어올 것이 뻔하오.
그런데 지금 금산벌에 모인 군사가 장장 6천이나 되니 가볍게 볼 일이 결코 아니오.
장군은 지금부터 휘하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후문의 협곡에 매복하고 밤낮없이 기다렸다가
성주놈이 원군을 이끌고 산길에 이르렀을 때 위에서 화살과 돌을 퍼붓는다면
제아무리 6천의 군사라도 별로 어렵잖게 물리칠 수 있을 게 아니겠소?
그런 방법이 아니고선 적은 군사로써 가잠성을 지키기란 여간 어렵지 않을 거외다.”
은상은 알천의 말을 옳다고 여겼다.
곧 그에게 봉화를 지피게 한 뒤 막하의 부장들을 불러 군령을 내렸다.
“이제 내막을 알아보니 싸움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금산벌에 모인 원군의 숫자가 무려 6천이나 된다고 하니 오히려 지금부터 시작이라 할 것이다.
너희는 당장 군사들을 소집하여 동문 밖의 협곡으로 가라.
그곳에서 몸을 숨기고 기다렸다가 적군이 나타나 그 선진이 동문 근처에 이르거든
일제히 시석을 퍼부어 한 놈도 남김없이 섬멸하라.”
성을 탈취하고 한숨을 돌렸던 백제의 장졸들은 다시 군장을 갖춰 동문의 협곡으로 나갔다.
가잠성 봉화대에 연기가 피어오르자 백제군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적군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해가 지기 시작하자 알천이 은상에게 말했다.
“야간에도 군사들을 쉬게 해서는 안 됩니다.
성주놈이 비록 무식한 자이나 금산벌서 예까지 이르는 것은 불과 순식간입니다.
더욱이 가잠성 주변의 지형 지세는 손바닥처럼 꿰뚫고 있으니 밤에 공격할 공산이 더 큽니다.”
은상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내 어찌 그것을 모르겠소. 이미 군령을 내려두었으니 염려하지 마시오.”
하지만 신라군들은 좀처럼 나타나지 않았다.
밤이 지나고 이튿날이 되자 알천이 다시 은상에게 말했다.
“어제는 원군들이 먼길을 오느라 싸울 형편이 되지 못한 듯싶습니다.
계속해서 봉화를 피우고 있으니 오늘은 틀림없이 공격이 있을 것이오.
잠시도 경계를 소홀히 해선 안 됩니다.”
“알았소.”
그러나 이튿날에도 신라군은 오지 않았다.
낮이 지나고 다시 밤이 되었다.
은상이 조금씩 수상한 낌새를 채기 시작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