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삼한지

제20장 인물 4

오늘의 쉼터 2014. 9. 20. 18:39

제20장 인물 4 

 

 

 

 

“자고로 세상을 이롭게 하려는 자는 천하가 그 길을 열어주고,

 

남을 해치려는 자는 천하가 이를 닫는다 하였습니다.

 

또한 민심을 좇는 자는 흥하고 거역하는 자는 반드시 망하는 법입니다.

 

지금 천하의 민심은 왕실을 떠난 지 오래요,

 

백성들 중에는 당번이 되어도 군역에조차 나오지 않는 자가 허다합니다.

 

일이 여기까지 이른 실정(失政)의 책임은 모두 백반과 조정 중신들의 몫입니다.

 

오죽하면 왕경의 아이들까지도 백반이 왕이 되면 나라가 망한다는 노래를 지어 부르겠습니까?

 

이제 공주께서 저의 뜻을 받아들여 환속을 결행하신다면 저는 기회를 보아 큰일을 한번 도모하려 합니다.

 

나라가 망하는 판국이올시다.

 

국법이나 전례가 비록 중하기는 하나 어찌 사직의 존망에 견주오리까?”

공주는 영특한 사람이었다.

 

그 자신 일찍이 불법에 심취하여 수행자로서는 일가를 이루었으나

 

부왕과 나라가 처한 어려움을 모를 리 없었다.

 

항차 자신이 대궐을 떠나 출가를 할 때와 그로부터 3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여러 가지 사정이 서로 비교도 할 수 없을 만치 나빠져 있었다.

“당숙부께서 거기까지 생각하셨다니 저 또한 굳이 일신의 편안함만을 고집하지는 않겠습니다.

 

그러나 인과응보란 무엇입니까? 삼라만상의 근본은 오로지 인연이요,

 

인연으로 말미암아 만유(萬有)가 생성하고 또 소멸하는 법입니다.

 

이제 지난 일을 돌이켜보건대 이 나라가 겪는 작금의 어려움은 왕실이 민심을 얻지 못한 데 연유 하고,

 

그것은 또 당숙의 부왕이신 진지대왕께서 폐위되고 아바마마께서 보위에 오르실 때 왕실과 관련된

 

여러 아름답지 못한 추문이 나돈 탓입니다.

 

민심이란 한번 잃고 나면 다시 얻기란 새는 바가지로 물을 퍼담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하물며 저는 불문에 귀의한 지 벌써 30년이 넘었습니다.

 

비록 나라와 왕실을 위하여 환속하더라도 어찌 친족을 해치는 전철을 밟으면서까지

 

보위에 오르겠습니까?

 

당숙부께선 이 점을 부디 유념하시어 더 이상 추한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주십시오.”

덕만의 일침에 용춘은 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명심하겠습니다.”

“하면 정리할 일도 있고 하니 약간의 말미를 주시지요.

 

적당히 기회를 보아 산문을 내려가겠습니다.”

공주로부터 드디어 환속 허락을 얻어낸 용춘은 지체 없이 왕에게 달려가서 그 사실을 전하였고,

 

왕은 공주가 돌아온다는 말에 어린애처럼 기뻐하였다.

그런데 그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백제가 다시 군사를 일으켜 이번엔 가잠성으로 쳐들어왔다는

 

급보가 날아들었다.

 

부랴부랴 당황제의 조서까지 얻어와 간신히 위기를 수습한 지 불과 반년 만의 일이었다.

“참으로 알지 못할 것이 부여장이란 놈입니다.

 

그는 몇 달 전에 당황제의 명을 받자 혼비백산하여 물러갔는데 이제 다시 무엇을 믿고 군사를 냈는지,

 

아무리 생각해도 속마음을 읽기 어렵습니다.

 

마땅히 당황제에게 이 사실을 고하여 부여장의 간악함과 교활함을 꾸짖어야 할 줄로 압니다.”

상신 임종이 언성을 높이자 병부령 칠숙이 말했다.

“우선은 위급함에 빠진 가잠성을 구하는 일이 시급합니다.

 

일선주 군주 석품은 지모가 있는 사람이니 그에게 말하여 가잠성을 구원토록 하십시오.”

그러자 이찬 대일이 입을 열었다.

“부여장은 전에도 우리의 관산성을 공략하는 체하며 사실은 만노군과 흑양군으로 대군을 내었는데

 

이번에도 그러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한단 말이오?

 

함부로 주의 군사들을 움직였다가 오히려 더 큰 봉변을 당할지도 모르니

 

신중을 기해 군령을 내려야 할 것이오.”

어전에 모인 신하들이 제각기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아니하자 왕은 쉽게 결단을 내릴 수 없었다.

 

부여장의 속뜻을 파악할 수 없어 난감하기로는 용춘 또한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아침부터 시작한 회의가 중식 때가 되어도 결말이 나지 아니하자

 

노쇠한 왕은 귀찮다는 듯이 팔을 휘저으며,

“병부를 맡은 칠숙과 염종이 알아서 하라.”

하고 자리를 뜨려 하였다. 바로 그때였다.

“신에게 가잠성의 병권을 맡겨 보내주시면 한달음에 달려가 반드시 성을 구원하고 돌아오겠습니다.”

백관들의 말석에서 문득 한 사람이 나타나 큰 소리로 아뢰었다.

 

모두가 소리나는 곳을 쳐다보니 그는 다름이 아니라

 

시위부의 대두(隊頭:대대장)로 복직하던 알천이었다.

 

용춘은 거로에서 데려온 알천이 왕실의 족친임을 들어 궁성을 방비하던

 

시위부의 대두 15인 중 한 사람으로 삼고 대궁의 호위를 거들게 하였는데,

 

그가 단신으로 가서 가잠성을 구원하겠노라 장담하니 뜻밖의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가잠성은 충신 찬덕과 해론 부자가 목숨을 걸고 지켜낸 곳으로 우리에게는 무척 귀중한 성입니다.

 

게다가 전날에는 그다지 쓸모가 없는 곳이었지만 북으로 관산성의 자성 둘을 잃고

 

남으로 지리산마저 잃었으니 이제 가잠성마저 빼앗긴다면 일선주와 거타주는

 

당장 누란의 위기에 처할 것입니다.

 

그런데 웅진에 주둔하고 있는 부여장에게 또 다른 계책이 있을지도 모르므로 주군을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는 처지이니 달리 방법이 없습니다.

 

신을 보내주시면 틀림없이 백제군을 격파하고 성을 지키겠나이다.”

알천이 거듭 입찬소리를 하였다.

“군사도 없이 혼자 가겠단 소린가?”

“가잠성에는 대략 5백여 명의 정군과 향군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그들만 가지고도 충분합니다.”

알천이 너무 쉽게 말하자 왕은 일변 미심쩍은 바가 없지 않았지만 달리 방법이 없었다.

 

병권을 쥔 칠숙과 염종 역시 반대할 까닭이 없었다.

 

그들은 해마다 장왕의 계책에 번번이 허를 찔린 터였으므로 다소나마 책임을 면하고 싶었다.

“알천에게 따로 궁리가 있는 듯하니 그의 말대로 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알천의 장담과 두 병부령의 요청으로 왕은 즉시 알천을 장수로 삼고 그에게 성의 병권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군령장을 써주어 가잠성으로 급파했다.

알천이 쉬지 않고 말을 달려 가잠성에 당도한 것은 뒷날 해질녘이었다.

 

성은 이미 백제군에게 둘러싸여 한 치 앞도 안전을 장담할 수 없는 지경이었고,

 

성주와 성안의 군사들은 오직 성문만을 걸어 잠근 채 필사의 항전을 하느라 지칠 대로 지쳐 있었다.

이때 가잠성 성주는 내마 육서(六抒)란 자였다.

 

원군이 당도하기만을 학수고대하던 육서는 이름도 알 수 없는 젊은 장수가 필마단기로 나타나자

 

얼굴에 낙담하는 빛이 역력했다.

 

알천이 내민 군령장을 보고도 멀찌감치 거리를 격하여 선 채로,

“지금 사방을 에워싼 백제군의 숫자가 어림잡아 2천은 넘어 보이는데 우리는 돌을 나르는

 

어린애까지 모두 합쳐야 겨우 5백이나 될까 모르겠소.

 

대체 무슨 수로 네 갑절이 넘는 적을 상대할 수 있단 말씀이오?”

하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알천은 대꾸도 하지 않고 후문의 망루에 올라

 

야산과 계곡으로 둘러싸인 성의 동편 지세를 유심히 살펴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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