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방/강안남자

542. 유혹(4)

오늘의 쉼터 2014. 9. 20. 19:39

542. 유혹(4)



(1672) 유혹-7

 
그래 놓고 유지선은 방을 나갔다.
 
이제는 유지선이 두번 다시 오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조철봉은 가슴이 텅 빈 동굴처럼 느껴졌다.
 
옷을 벗어 던지고 침대에 누웠지만 유지선의 알몸이 눈앞에서 어른거리는 바람에
 
새벽까지 잠을 설쳤다.
 
그러나 다음날 눈을 떴을 때는 심신이 개운했다.
 
잘했다는 생각으로 자신이 자랑스러워졌고 이은지에게 칭찬받고 싶은 마음까지 일어났다.

본래 내일 귀국하는 일정이었지만 오전 비행기로 스케줄을 바꾼 것도
 
그 영향을 받았기 때문일 것이다.
 
공항까지 배웅 나온 박재규는 조철봉의 밝은 표정을 보자 유지선이 베이징자동차로부터
 
소음기 오더를 받은 때문인 줄로 안 것 같았다.
 
그리고 박재규는 어젯밤에 그들과 마신 술이 아직도 깬 것 같지 않았다.

“저기, 유지선씨를 이번 달에 정식 부장으로 승진시키겠습니다.”

출국장으로 막 나가려는 조철봉에게 박재규가 말했다.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박재규가 말을 이었다.

“베이징자동차의 동 부사장도 유 부장 칭찬을 하더군요.”

머리만 끄덕여 보인 조철봉은 몸을 돌렸다.
 
앞으로는 유지선을 만날 기회가 거의 없겠지만 사장으로부터
 
인정을 받고 있다는 소문이 날 것이었다.
 
직장 생활에서 그것만큼 안전한 보장은 없다.
 
비행기에 탑승한 조철봉이 통로쪽의 비즈니스석에 앉아있을 때 옆에서 인기척이 났다.
 
머리를 든 조철봉은 서있는 여자와 시선이 마주쳤다.

“아.”

눈치를 챈 조철봉이 다리를 오므리자 목례를 한 여자가 앞을 지나 창가의 좌석에 앉았다.
 
큰 키에 날씬한 체격, 스커트 밑의 맨다리에 탄력이 느껴졌고 샌들을 신은 발가락이 섬세했다.
 
건성으로 스쳐 보는 것 같아도 조철봉의 시선은 예리했다.
 
쇼트커트한 머리에 약간 햇볕에 탄 갈색 피부, 꼬리가 조금 치켜 올라간 눈이 맑았고
 
쌍꺼풀은 없었다.
 
곧고 날카로운 콧날에 얇은 입술은 꾹 닫혀 있었다.
 
나이는 20대 후반이나 30대 초반 정도.
 
여자가 자리에 앉았을 때 옅게 향내가 풍겨왔다.

숨을 들이켠 조철봉의 가슴은 다시 활력이 생성되기 시작했다.
 
청도에서 인천까지는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지만 비즈니스석 요금은
 
일반석의 세배 가깝게 되는 것이다.
 
한시간만 일반석에서 견디면 되는 터라 조철봉도 자주 일반석을 탄다.
 
그러나 비즈니스석이나 일등석 탑승에 길이 든 승객은 좀처럼 급수를 내리지 못한다.
 
차라리 차를 작은 것으로 바꿔탈지언정 비행기 급수를 내려 타지는 못한다는 사람도 있다.
 
조철봉은 시야 한쪽에 겨우 팔 하나만 보이는 여자가 그런 부류라고 생각했다.

이미 유지선에 대한 미련이나 후회 따위는 옆자리의 여자를 본 순간에
 
안개 걷히듯이 사라져 버렸다.
 
얼마만의 기회인가?
 
이런 기회는 조철봉에게 두어번밖에 오지 않았다.
 
비행기가 활주로를 달려 창공에 떠올랐을 때 조철봉이 머리를 돌려 여자를 보았다.
 
이때가 가장 좋은 기회인 것이다.
 
내색은 하지 않고 있지만 승객 모두는 이 순간을 가장 겁내고 있는 것이다.
 
이때 말을 걸어주면 백이면 백 다 말을 받는다.
 
이야기를 하면서 무서움을 잊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출장 나오셨습니까?”

조철봉이 묻자 여자가 예상했던 대로 금방 대답했다.

“네, 공장에 검사하러 나왔다가 돌아갑니다.”

그러더니 이번에는 그쪽에서 물었다.

“선생님은요?”

비행기는 아직도 상승중이다.

(1673) 유혹-8

 

 

 “나도 회사가 청도에 있기 때문에….”

그렇게만 말한 조철봉이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내 내밀었다.

“조철봉입니다.”

“전 박은희라고 합니다.”

하고 여자도 가방에서 명함을 꺼내 주었다.

 

조철봉은 명함을 보았다.

나라상사 대표이사 사장 박은희라고 찍혀 있었는데 아래쪽에는 청도공장 전화번호도 보였다.

 

박은희는 공장까지 갖춘 회사 사장인 것이다.

 

조철봉이 시선을 들고 박은희를 보았다.

 

이제 비행기는 수평상태가 되어 비행하고 있었지만 아직 벨트등은 꺼지지 않았다.

“대단하시네요. 젊은 나이에 회사를 경영하시다니.”

놀람 반 칭찬 반이었지만 진심이다.

 

그러자 박은희는 쓴웃음을 지었다.

“겨우 적자를 면하고 있는 걸요, 뭐.”

“어떤 품목이신데?”

“섬유예요. 주로 아동복.”

“아아.”

중국과 국교 정상화가 되면서 가장 먼저 생산기지를 중국으로 옮긴 게 섬유관계산업일 것이다.

 

값싼 노동력을 보유한 데다 한국과 비행기로 한시간 거리에 위치한 항구도시 청도는

 

한때 한국 섬유산업의 최적지로 각광을 받았지만 개방 10년이 지난 지금 이곳에서도

 

사양산업이 되어 가는 중이다.

 

중국정부는 고부가가치의 첨단산업을 우대했고 섬유산업 등 단순산업은 인건비 상승과

 

각종 규제, 세금, 중국 자체 업체와의 경쟁에 밀려 이곳에서도 고전하는 중이다.

“어려워요.”

하고 이맛살을 찌푸린 박은희가 머리를 젓는 시늉을 한 순간 조철봉은

 

목구멍이 좁아지는 느낌을 받았다.

 

시도 때도 없이 닥쳐오는 이 반응에 가끔 난감할 때도 있지만 조철봉에게는

 

원기를 일으키는 청량제와 같다.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그래요. 중국도 예전 같지 않습니다. 우리가 다 학습을 시켰거든요.”

“조 사장님은 어떤 사업을 하시죠?”

“여러가지죠. 자동차 부품 공장에다 백화점, 요식업까지.”

가라오케 사업은 뺐는데도 박은희가 눈을 둥그렇게 뜨더니

 

손에 쥐고 있던 조철봉의 명함을 다시 보았다.

“중국에서 이렇게 큰 사업을 하시는 분은 처음 만나뵌 것 같아요.”

“수십번 비행기로 중국을 다녔지만 박 사장 같은 미인이 옆자리에 앉은 건 나도 첨입니다.”

“제가 어디….”

박은희가 수줍게 웃었고 다시 조철봉의 목구멍이 좁아졌다.

 

어느덧 벨트 사인이 꺼졌고 승무원이 돌아다니고 있었다.

“제가 운영하던 공장 사장이 중국인인데 이젠 말을 안 들어요.”

조철봉의 시선을 받은 박은희가 말을 이었다.

“종업원 3백명인 공장인데 제 오더만 생산한다는 조건으로 투자를 했거든요?

 

지분 절반을 갖기로 하고 기계값으로 2억을 투자했는데.”

그러고는 박은희가 길게 숨을 뱉었다.

“기계값만 날린 것 같아요. 계약서니 각서 따위는 아무 소용이 없더군요.”

“그런 경우가 많죠.”

조철봉이 머리를 끄덕였다.

 

중국 변호사를 시켜 서류를 완벽하게 작성했는데도 엎어진 경우를 여러번 보아 온 것이다.

 

그때 박은희가 물었다.

“조 사장님, 혹시 사업 늘려 보실 생각 없으세요?”

그러더니 시선을 내리고는 말을 이었다.

“제가 더 이상 회사를 운영할 자신이 없어서요. 그래서 양도했으면 좋겠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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